“어머니 일엽스님, 당신이 그립습니다”
일당스님‘畵僧~’ 펴내
“나를 어머니로 부르지 말고 스님으로 불러라.”
충남 예산의 수덕사에서 14세 된 아들을 처음 본 어머니는 이같이 매정했다.
아들은 하염없이 눈물만 흘렸다.
이화여전과 도쿄제국미술학교를 나온 한국 최초의 여성 유학생으로 불가에 귀의한
일엽(속명 김원주) 스님과 그의 유일한 혈육인
일당(속명 김태신·82) 스님은 이렇게 처음 만났다.
일당 스님의 파란만장한 일생을 담은 자전소설 ‘화승(畵僧),
어머니를 그리다’가 나왔다.
그는 일엽 스님과 일본 명문가 출신인 오다 세이조 사이에서 태어났다.
조선인 며느리를 받아들일 수 없다는 오다 집안의 반대에 부닥쳐
일엽 스님은 수덕사로 출가했다.
일당 스님은 어릴 때 황해도 해주에 있는 아버지의 한국인 친구 집에서 자라야 했다.
그는 이당 김은호 선생의 제자로 운보 김기창 화백과 동문수학했으며
일본 도쿄제국미술학교에서 화가 수업을 받았다.
일본에 있던 그는 6·25전쟁 직전 해주를 찾았으나 친일파로 몰려 고초를 겪었다.
다시 일본으로 건너간 그는 유명 화가로 활동하면서 우에모리(上野森)
미술관상과 신일본미술원전 미술원상을 받았다.
1965년 한일기본조약 체결 이후 남한으로 오려 했으나 북한에서 김일성 초상화를
그렸다는 이유로 입국하지 못했다.
그는 1990년 한국에 정착해 66세에 경북 김천 직지사 조실 관응 스님을 은사로
계를 받고 현재 직지사 중암에서 그림에 열정을 쏟고 있다.
그는 “2002년에 펴낸 ‘어머니 당신이 그립습니다’에 비해 나의 그림 관련
이야기를 많이 넣고 인생 이야기도 보다 자세하게 실었다”고 말했다.
서정보기자 suhchoi@donga.com
‘화승 어머니를 그리다’
<경향신문 2004/7/5 문화16>
이백(李白), 즉 이태백은 말했다.
“인생이란 문틈으로 한 마리 백마가 지나가는 것과 같다”고.
이백이 읊은대로 보통사람들, 장삼이사(張三李四)에게는
인생이란 덧없고 단조롭고 짧은 것인지 모른다.
그러나 이 사람의 인생은 결코 그렇지 못했다.
그의 한살이는 ‘백마’가 아니라 ‘곡류(曲流)’였다.
그것도 구십구개의 구비를 휘감아 도는.
오타 마사오(太田正雄), 송영업, 김설촌, 김태신, 그리고 일당(日堂)스님.
모두 그의 이름이다.
조선인 일본 유학생 김원주와 일본 귀족인 오타 세이조(太田淸藏)는
열차 안에서 만나 서로 첫눈에 반해 사랑에 빠진다.
그 결실로 1922년 아들이 태어나고, 마사오라는 이름을 얻는다.
그러나 대만은행 총재를 지낸 일당의 할아버지는 장남의 로맨스를 인정하지 않는다.
조선인 며느리를 받아들일 수 없다는 것.
결국 김원주는 아이 아버지의 앞날을 위해 도쿄를 떠난다.
몇년 뒤 그는 예산 수덕사에서 머리를 깎는다.
김일엽(金一葉) 스님이 바로 그다.
훗날 독일주재 일본 특사라는 고위관리를 지낸 일당의 아버지는
할아버지와 의절한 채 결혼하지 않고, 못이룬 사랑을 그리며 일생을 보냈다고 한다.
세이조는 조선인 친구(송기수)에게 마사오의 양육을 맡겼다.
일당은 황해도 신천에서 송영업으로 자란다.
소학교 졸업식 전날 영업은 자신이 송씨가 아니라는 사실을 듣게 된다.
서울로 올라온 그는 이당 김은호 화백의 양자로 들어간다.
이때 일당의 이름은 김설촌으로 바뀐다.
그는 당시 이당 선생의 문하생으로 있던 운보 김기창과 함께 그림공부를 한다.
그는 중학생때 혈육의 정에 이끌려 어머니를 찾아 홀로 수덕사로 발걸음을 했다.
산사는 눈에 덮여 있었다.
출가전 조선의 대표적인 여류 문인이자 화가였던 어머니는 아직 어린 아들에게
“나를 어머니라 부르지 말고 스님이라 부르라”고 단호하게 말했다.
일엽 스님은 훗날 당대 최고 비구니로 존경받기에 이른다.
그러나 일당은 그 후 어머니는 자신을 찾았고,
스님 어머니가 당시 총독부 고위 관리를 하던 아버지에게 곧 무너질 것 같은
수덕사의 보수를 위한 비용을 도와달라고 부탁하는 일의 심부름을 자신이 했다고 술회한다.
해방 후 고향 신천을 방문했던 일당은 그만 북한에 억류되고 만다.
이때 그가 그린 50호짜리 김일성 대형 초상화는 지금도 김일성 대학에 걸려 있다고 한다.
힘겹게 북한을 탈출한 그는 일본에 머물며 김설촌이라는 이름으로 그림을 그렸다.
북종화 계통의 동양화로 그는 우에노모리 미술관상 등
일본 3대 미술상을 모두 받게 된다.
화가로서 일본에서의 명성과 달리 한국에서 그는 빨갱이 취급을 받았다.
김일성 초상화 등이 이유였다.
일당은 “나를 당시 빨갱이로 몬 것은 한국의 정보부도, 수사기관도 아니라
한국 화단의 이른바 최고화가였다”고 주장한다.
최고라는 자기들의 위상을 지키기 위해 자신의 입국을 막았다는 것이다.
좌익으로 몰려 한국 땅을 밟지 못하던 일당은 해방 40년만에야
꿈에 그리던 귀국을 할 수 있게 된다.
한국정착 후 호적에 오른 이름이 김태신.
그는 “한국 화단의 이름난 작가들은 이번에는
내 그림이 일본화라며 차별과 배척의 장막을 쳤다”고 말한다.
그에게 그림은 특별한 의미가 있다.
중학생때 그는 어머니에게 “훗날 같이 그림전을 열자”고 말했고,
어머니는 빙긋이 웃으며 화답했을 정도로 그림은
속세의 그와 스님 어머니를 이어주던 가교였다.
그는 결국 나이 66세 때 출가했다.
일당 스님이 된 그는 지금 김천 직지사에서 수행 정진중이다.
그는 최근 ‘화승 어머니를 그리다(전 2권·이른아침 간행)’라는 자전소설을 펴냈다.
세수 82살인 노스님의 애절한 사모곡이다.
〈김용석기자 kimys@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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