德崇禪學 4-11 제11주제 발표; 경허의 미도선(尾塗禪)
고영섭 (동국대학교)
1. 문제와 구상
불교사상사에서 禪은 수행의 대표명사로 자리잡아 왔다. 禪 수행의 길은 깨닫고자 하는 모든 이에게 열려 있다. 학자에게 있어서 禪은 (경우에 따라서) 교의 대척점에 있는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유수한 선사에게 있어 禪은 敎의 대척점에 있는 선이 아니라 이미 敎를 아우른 일상적 삶이다. 때문에 유수한 선사의 삶 속에는 자신의 일상적 가풍과 살림살이가 다 녹아있는 것이다.
고려 중기 이래 禪法이 敎法을 통섭하기 시작하면서 이후 이 땅의 불교는 선적 기반 위에서 전개되어 왔다. 중국불교에 상응하여 얘기해 보면 이때의 선법은 이미 13종 가운데에서 1종 내지 12종의 여러 종파를 통섭한 상위개념으로서 자리한다. 때문에 고려 중후기 및 조선시대는 물리적으로 선법과 교법, 二乘과 三乘을 온몸 속에서 ‘곰탕’ 졸저, ꡔ한국불학사ꡕ(연기사,1999), 19면. 논자는 한국불교의 성격을 인도와 중국의 여러 종파를 물리적으로 종합한 ‘비빔밥’을 넘어서서 그들을 사상의 가마솥에서 치열한 고투를 거쳐 화학적으로 삼투시킨 ‘곰탕’의 기질을 지닌 것으로 파악한 바 있다. 즉 이 땅의 불교 사유는 다양한 이질적 사유의 개물들이 물리적으로 ‘종합’된 비빔밥 불교가 아니라 그들 사유들이 화학적으로 삼투된 ‘독창’의 맛을 지닌 ‘곰탕불교’이며 바로 이것이 인도불교, 중국불교, 일본불교와 변별되는 ‘한국적’인 것이라고 보는 것이다.
처럼 육화시킬 수 있는 시공간 속에 자리한다. 때문에 禪과 敎를 누가 어떻게 자신의 한 몸둥어리 속에서 일체화시켰느냐의 여부에 따라 유수한 사상가냐 아니냐로 판가름난다.
고려 중기 이래의 한국 선법에는 원효 이래의 교학과 선학, 혹은 교법과 선법이 융섭되어 있었다. 아울러 지눌의 禪敎 일원화의 노력 이후 麗末 鮮初의 선법은 조선 유학의 과도한 주도 속에서 갸날프게나마 지혜의 맥을 이어왔다. 碧溪 淨心-碧松 智嚴(1464~1534)-芙蓉 靈觀(1485~1571)의 家統과 宗統을 이은 休靜(1520~1604)과 그 문도들에 의해 西山宗 金煐泰, ꡔ한국불교사ꡕ(경서원,1997), 281면. 저자는 여기에서 “휴정은 산승불교의 종통을 굳건히 다져서 慧命을 길이 계승하게 하였”으며 “碧松을 初祖로 하고 大慧․高峰을 遠祖로 하는 한 宗派(西山宗이라고도 부를 수 있는 山僧佛敎)의 開宗 완성자라고 할 수 있을 것”이라고 말하고 있다.
의 형식으로 정립되면서 朝日 전쟁 및 朝淸 전쟁 이이화, ꡔ한국사이야기ꡕ 제 9책(한길사,2001), 면. 저자는 여기에서 종래의 일본과 싸웠던 임진왜란과 청나라와 싸웠던 병자호란을 ‘조일전쟁’과 ‘조청전쟁’으로 규정했다. 논자 역시 매우 적절한 규정이라 생각한다.
의 소용돌이 속에서도 조선 불교는 이 땅에서의 정체성을 다시 확보하게 된다.
1) 法化와 行履
휴정 이래 조선 중후기의 이후의 선적 가풍을 총섭한 이가 바로 鞭羊 彦機 계통을 이은 龍岩 慧彦과 그의 계통을 이은 萬化 普善의 선맥과 강맥을 이은 鏡虛 惺牛(1846~1912) 金知見, 「鏡虛禪師散考」, ꡔ禪武學術論集ꡕ 제5집(선무학술회, 1995), 15~16면.; 一指, ꡔ삼수갑산으로 떠난 부처ꡕ(민족사,2001), 17~18면. 그의 生年에 대해서는 그동안 萬海 龍雲의 1849년설, 漢巖 重遠의 1857년설, 西涯 閔泳珪와 莊峰 金知見의 1846년설 등이 제기되었다. 김지견은 한암이 경허의 「梵魚寺金剛庵七星閣創建記」(大韓 光武 6년, 1902년 지음)의 “이제 이미 늙어 영고의 성쇠를 다 맛보았으니 백 가지 생각이 찬 재처럼 식어버렸구나”(今已老矣, 閱盡榮枯, 百慮灰冷. ꡔ韓佛典ꡕ 제11책, 610하 면)라는 구절에 근거하여 제시한 1857년설에 대해 “그때 경허당의 나이(年光) 고작 46, 결코 ”今已老矣“라고 자탄할 계제가 못된다”며 이의를 제기한다. 그러면서 「瑞龍和尙行狀」(大韓 光武 4년, 1900년 지음)의 “이제 내 나이 55세이니”(今年光五十有五. ꡔ韓佛典ꡕ 제11책, 612하 면)라는 구절에 근거하여 역산한 1846년 설을 제시하고 있다. 一指 역시 「與法子漢巖」(大韓 光武 7년, 1903년 지음)의 “다만 스스로 절룩거리고 다니면서 마흔 넷 남짓의 세월을 보냈는데”(只自跛跛挈挈, 送過了四十四介光陰. ꡔ韓佛典ꡕ 제11책, 639상 면)라는 구절에 근거하여 “이 44년이란 바로 그가 14세 되는 해(1859) 동학사에서 수업을 시작한 이후의 반평생을 말하므로 한암 중원과 한용운이 명기하고 있는 바와 같이 경허의 출가 연령 9살을 더해 역산해 보면 1846년설이 확실하다”고 말한다.[일지, ꡔ삼수갑산으로 떠난 부처ꡕ(민족사,2001), 16~17면]. 한중광 역시 이 설에 동의하고 있다.[한중광, ꡔ경허: 부처의 거울 중생의 허공ꡕ(한길사,2001), 36~39면]. 위의 두 사람의 견해를 종합해 보면 경허의 생년은 己酉年(1849)과 丁巳年(1857)이 아니라 丙午年(1849)임이 분명해 진다.
이다. 경허는 특히 龍岩 慧彦을 그의 禪的 源流라고 밝히면서 자신의 살림살이를 피력하고 있다 漢巖 重遠, 「先師鏡虛和尙行狀」(ꡔ韓佛典ꡕ 제11책, 654하 면). 여기서는 “(경허)화상은 淸虛(休靜)로부터 11세손이 되며, 喚性(志安)으로부터는 7세손이 된다”고 했다. 그런데 덕숭문중과 耕耘 炯埈의 ꡔ佛祖源流ꡕ(我編 鏡虛惺牛 조, 불기 2520년 간)에서는 용암 혜언-‘영월 봉률-만화 보선’-경허 성우로 이어지는 청허로부터 13세 손이고 환성으로부터 9세손이라고 말하고 있다. 이는 종래의 청허 아래 11세손 설에다 ‘永月 奉律과 萬化 普善’의 2대를 추가하고 있다. 이에 대해 김영태 교수는 한암이 지은 “「行狀」에서의 11세 7세설은 鏡虛自說에 근거하여 道統 곧 法統의 淵源을 정리한 代數이므로 이를 옳다고 하지 않을 수가 없다”며 “「행장」에서의 11세 7세설은 嗣法師의 禪脈 중심 법통이며, 덕숭문중의 13세 9세설은 受業師의 講脈까지 포함한 法系라고 하는 것이 옳지 않을까 싶다”고 말한다. 金煐泰, 「鏡虛의 韓國佛敎史的 위치」, ꡔ德崇禪學ꡕ 제1집, 한국불교선학연구원, 2000, 156~160면.
. 따라서 불교의 궁극적 지향인 성불(一乘)이 아라한 상(二乘)과 보살상(三乘)을 한 몸 속에서 삼투시킨 것이라면 경허가 우리에게 보여준 生平은 육척 장신의 한 몸둥어리 속에다 육화시킨 ‘大白牛車의 삶’이요 ‘곰탕같은 살림살이’이며 ‘조선불교사의 결론’이자 ‘대한불교사의 서론’이라 말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조선말 대한 초기에 활동했던 경허 경허의 ‘첫 이름 東旭’은 일반적인 용례와 다른 것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1942년 9월에 간행된 ꡔ경허집ꡕ의 「서문」과 「약보」를 쓴 만해(1879~1944)는 자신의 입적 직전 출판된 이 저술에서 “스님의 성은 송씨이고 법명은 성우인데 첫 이름(初名)은 동욱이었고 호는 경허였으며 여산사람이다”고 기록했다. 그런데 여기에서 ‘초명’을 단순히 ‘어릴 때의 이름’ 혹은 ‘처음 부모에 의해 불린 이름’으로만 해석할 수 없다. 경허에 대한 첫 평전을 썼던 시인이자 언론인인 이흥우는 “1972년 11월 어느 날, 서울 사간동 法輪寺에서 만난 卞雪醐(당시 85세)스님에게서 동욱은 경허의 최초의 법명이었다는 증언을 들었다”(이흥우, 앞의 책, 16~17면)고 한다. 뿐만 아니라 晦明 日昇 선사의 문집인 ꡔ회명문집ꡕ에 실린 일본인 삼소 중촌건태랑이 보낸 편지(「三笑中村建太郞來書」)에서 “그 뒤로 조선의 스님들은 비록 臨濟의 宗脈을 전한다고 하였으나 名子 뿐이고 실지로는 선의 뜻을 알지 못하였다고 하겠습니다. 그러나 지금부터 60여년 전에 나타나신 ‘鏡虛 東旭’선사는 流遠을 뛰어난 분이어서 그 분의 法下에서 傑魁한 스님들이 많이 나왔으니 田水月․申慧月․方漢巖․宋滿空 등의 스님들이 나와서 轉轉하며 크게 발휘하여 남북지방에 禪院들이 숲처럼 우거졌으니 鏡虛禪師야말로 스님들 가운데 巨匠이시며 朝鮮禪의 元祖라고 하여도 무방하겠습니다”(晦明, ꡔ회명문집ꡕ, 권태영편역, 통도사 四溟庵,1991, 면); 일지, 앞의 책, 265~265면. 라고 한 곳에서 그를 ‘鏡虛 東旭’선사로 표현하고 있다. 논자 역시 20년 뒤에 경허의 법명이 ‘惺牛’로 바꾸기 전까지 사용했던 ‘東旭’은 출가 전의 이름이 아니라 출가 뒤 처음 받았던 법명으로 추정한다. 출가자에겐 이미 출가 이전의 행장은 무의미한 것이다. 더우기 이 「약보」를 쓴 만해 역시 이미 만년에 접어든 선사의 신분이다. 그 때문에 이미 ‘선사로서의 경허’의 간략한 연보를 쓰는 만해에게 있어 14세 출가 이전의 兒名의 기록은 무의미하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이런 예는 원효의 初名으로 알려진 ‘誓幢’ 역시 출가 전의 이름이 아니라 ‘塞部’ 혹은 ‘元曉’라고 쓰기 이전까지 사용했던 출가 뒤의 첫 법명이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왜냐하면 그의 오랜 주석처였고 행장을 담은 「高仙寺誓幢和上碑文」의 ‘서당’이 출가 전의 이름이라면 출가 사문의 탑비 제목명에 ‘誓幢和上’이라고 쓰지는 않았을 것이다. 따라서 경허의 ‘초명’ 동욱 역시 변설호 선사와 일본인 중촌건태랑의 편지처럼 ‘첫 법명’ 동욱으로 읽어야 할 것이다.
에 대한 세평은 비교적 부정적이다. 일찍이 상현거사 이능화는 그의 역저 ꡔ조선불교통사ꡕ(하)에서 “世人의 선류들(世之禪流)이 다투어 이를 본받아 심지어는 술을 마시고(飮酒) 고기를 먹음(食肉)이 깨달음에 구애받지 아니하고(不碍菩提) 도둑질을 하고(行盜) 음행을 함(行淫)이 반야에 방해받지 아니한다(無妨般若)고 외치고 이를 대승선(大乘禪)이라 하여 수행이 없는 잘못을 가리고 장식하여 모두가 진흙탕 속에 들어갔으니 대개 이러한 폐풍은 실로 경허로부터 시작되었다(實自鏡虛, 始作俑也). 총림에서는 이를 지목하여 마설(魔說)이라 한다”고 했다. 용성 진종(1864~1940) 역시 경허의 가풍을 두고 한때 ‘선마’(禪魔) 「龍城法語」, ꡔ龍城大宗師全集ꡕ 제1책(용성대종사전집간행위,1992), 면.
라고 일갈했다.
이에 비해 경허의 애제자 한암(1876~1951)은 「先師鏡虛和尙行狀」을 쓰면서 “대개 행장이란 그 사실을 기록하는 것이고 虛僞로 기록하지 않는 것이다. 화상의 悟道와 교화인연은 실로 위에서 말한 바와 같거니와 만약 그 行履를 논할 것 같으면 장신 거구에 志氣는 果强하고, 음성은 종소리와 같아 무애변을 갖추었고, 八風(利, 衰, 毁, 譽, 稱, 譏, 苦, 樂과 같이 사람의 마음을 흔들어 놓는 여덟 가지 바람)을 대함에 산과 같이 不動해서 행할 만 할 때엔 행하고 그쳐야 할 때는 그쳐서 다른 사람의 영향을 받지 않으므로 음식을 자유로이 하고 聲色에 구애받지 않아서 호호탕탕 유희하여 사람들의 의심과 비방을 초래하였으니, 이는 광대한 마음으로 不二門을 증득했기 때문이다”면서 “후대의 학인들이 화상의 法化를 배우는 것은 옳으나 화상의 行履를 배우는 것은 옳지 않으니 사람들이 믿어서 이해할 수가 없기 때문이다” 漢巖 重遠, 「先師鏡虛和尙行狀」, ꡔ韓國佛敎全書ꡕ 제11책, 656상 면); 한암문도회, ꡔ한암대종사법어록: 漢巖一鉢錄ꡕ(민족사,1995), 299면 및 301면. 하지만 한암은 「행장」의 앞부분에서는 “누가 능히 여기에서 대장부의 뜻을 갖추어 자성을 철저히 깨달아 그 제일가는 공덕을 성취하여 큰 지혜 광명의 의취로 저 오백 세 후까지 강대하게 유통하리오. 나의 先師 경허화상이 이런 분이시다”(ꡔ韓佛典ꡕ 제11책, 653상 면)고 드높이고 있다. 이렇게 볼 때 경허의 「행장」을 정직하게 기술하는 한암의 시선은 스스로 스승에 대한 존경의 念을 깔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경허의 가풍과 행적에 대해 이와같이 기록한 것은 투철한 역사 정신에 입각하여 그 진실을 기록함으로써 후대인의 근기에 따라 이 선사를 이해하는 길을 열어두기 위함(記其實事, 以示後人)이라 할 것이다. 여기에서 우리는 경허를 올바로 이해하기 위한 指南을 제시받음과 동시에 “천고에 말없는 학이 될지언정 삼세에 말 잘하는 앵무새는 되지 않겠다”고 한 한암의 家風과 禪機를 엿볼 수 있다.
며 가치 중립적인 시선을 보이고 있다.
만해 용운(奉玩, 1979~1944)은 만공으로부터 ꡔ경허집ꡕ의 교열과 서문을 부탁 받고 “혹은 술집과 시정에서 읊조렷으되 저속하지 않으며 비바람 눈보라 치는 텅 빈 산에서 붓을 잡아도 세간을 벗어난 것만도 아니어서 종횡으로 힘차고 생소하거나 숙달되었거나 걸림없이 문장마다 선이요 구절마다 법이어서 그 법칙이 어떠한 것을 논할 것도 없이 실로 일대의 기이한 글이요 싯구이다” 韓龍雲, ꡔ鏡虛集ꡕ 「序」(ꡔ韓佛典ꡕ 제11책, 587중 면). “或高唫於酒肆屠市之間, 而不入世間, 或縱筆於空山雨雪之中, 而不出世間, 縱橫淋漓, 生熟自在, 無文不禪, 何句非法, 莫論其軌則之如何, 實一大奇文奇詩也.”
라고 기술하고 있다. 만공 월면(1871~1946) 역시 “좋을 때와 나쁠 때는 부처와 (사나운) 호랑이보다 더한 이가 바로 경허선사” 滿空 月面, 「聞鏡虛法師遷化吟」, ꡔ惺牛 鏡虛集ꡕ(補遺)(ꡔ韓佛典ꡕ 제11책, 651하 면); ꡔ滿空語錄ꡕ(약수암, 1976), 85면. “善惡過虎佛, 是鏡虛禪師.”
라고 했다.
퇴경 권상로는 그의 ꡔ한국선종약사ꡕ에서 “현하 전국선원에서 주장자를 짚고 면벽하는 이들은 모두 그 문풍을 承襲할 뿐만 아니라 僧尼로 하여금 선의 면목을 알게 하고 일반으로 하여금 선법이 있는 줄 알게 된 것은 전혀 선사의 힘이다. 선사에 대한 毁譽가 양극단에 이르러서 ‘善時에 善過於佛하고 惡時에 惡過於虎라’는 말을 適評이라 하지만 현대의 우리나라 禪學을 말하는 데는 禪師를 중흥조로 존앙하지 않을 수 없는 바이다” 退耕 權相老, 「韓國禪宗略史」, ꡔ백성욱박사 송수기념 불교학논문집ꡕ(동국대학교, 1959), 292면.
고 평가하고 있다.
더불어 그에 대한 학계와 선계 그리고 문화계의 세평은 ‘최근의 종교적 天才’ 혹은 ‘한국 불교 禪旨의 中興祖’(서경수 서경수, 「경허연구」, ꡔ석림ꡕ 제3집, 1969.11, 14면; ꡔ불교철학의 한국적 전개ꡕ(불광출판부,1990), 392면 및 397면.
), ‘한국의 달마’(진성 원담 眞性 圓潭 역, ꡔ경허선사법어: 진흙소의 울음ꡕ(홍법원,1993), 5면.
), ‘근대 한국 선불교의 한 희한한 고승’ 혹은 ‘한 투철한 마음, 최고의 진리(空性)의 저편 언덕(彼岸)을 찾아서 가는 한 가열(苛烈)한 정신의 절뚝거리는 편력’(이흥우 李興雨, ꡔ경허선사: 공성의 피안길ꡕ(민족사,1996),11면. 그는 조선일보사 발행 ꡔ주간조선ꡕ에 ꡔ현대한국고승전: 경허대선사편ꡕ(1972)을 25회 연재(1.2~11.16)하며 ‘근대 한국 선불교의 희한한 고승, 경허 성우의 행적과 연고지에 대한 추적을 시도하였다. 이 책은 이것을 보충과 수정을 더한 것이다.
), ‘조선 근대의 巨人’(김지견 金知見, 「鏡虛堂 散考」, ꡔ선무학술논집ꡕ 제5집, 선무학술회, 1995, 12면; ꡔ莊峰散稿: 화엄사상과 선ꡕ(민족사,2002), 255면.
), ‘현대 한국 參禪의 中興祖’이자 ‘現近代의 우리 불교역사에 하나의 새로운 기원을 이룩한 장본인’(김영태 金煐泰, 「鏡虛의 韓國佛敎史的 위치」, ꡔ德崇禪學ꡕ 제1집, 한국불교선학연구원, 2000, 139면; 168면.
, ‘한국 최근세선을 중흥시킨 大禪匠’(고익진 高翊晋, 「경허당 惺牛의 兜率易生論과 그 시대적 의의」, ꡔ한국미륵사상연구ꡕ(동대출판부,1987), 408면.
), ‘선종이 한창 흥왕하였던 唐宋시대 五宗家風의 宗匠班列에 끼어도 오히려 雄輝하게 빛나실 거룩한 어른’(석명정 釋明正 譯註, ꡔ鏡虛集ꡕ후기(통도사 극락선원,1990), 428면.
), ‘憂國의 禪僧이며 한국선의 도화선에 불을 당기고 영원한 형벌을 받는 프로메테우스’(일지 一指, ꡔ삼수갑산으로 떠난 부처ꡕ(민족사,2001), 9면.
), ‘한국 근대선의 첫새벽’ 혹은 ‘한국 현대선의 아버지’(한중광 韓重光, ꡔ경허: 부처의 거울 중생의 허공ꡕ(한길사,2001), 20면 및 31면.
) 등 비교적 긍정적 시선을 얻어가고 있다.
문제는 “화상의 ‘깨달은 진리’(法化)를 배우는 것은 옳지만, 화상의 ‘행한 자취’(行履)를 배우는 것은 옳지 않다”는 한암의 갈파처럼, 경허 내면 속의 ‘깨달음’과 ‘자취’가 실존적 인간인 우리의 삶 속에서 어떻게 마찰되고 윤활되는가를 살펴보는 것이 보다 중요한 것이라 할 수 있다. 즉 어떻게 해야 경허의 ‘행리를 넘어서서 법화를 보고, 행리를 따르면서도 법화를 따르는 지혜를 확보할 수 있느냐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경허의 진리와 자취가 어떻게 그의 몸둥어리 속에서 어떻게 마찰되고 윤활되는지를 우리의 온몸으로 적확하게 통찰해 내느냐에 달려 있다는 것이다.
이 글에서는 우선 ‘법화’와 ‘행리’에 대한 선행 연구자들의 평가의 담론들이 적절한가는 미루어 두고 경허의 선이 과연 무엇이며 어떠한 가풍 속에서 전개되고 있는지를 규명해냄으로써 경허선에 대한 정당한 평가를 내오려 한다. 논자는 동학사 강사 시절 ꡔ莊子ꡕ를 千讀이나 한 경허의 선사상을 ꡔ莊子ꡕ 「秋水」편의 ‘曳尾(於)塗中’에서 따와 그의 온전한 가풍을 ‘尾塗禪’ 혹은 ‘曳尾禪’의 관점에서 규명해 볼 것이다. 그의 생평에는 이 기호가 의미하는 것처럼 노장사상의 영향이 짙게 보이기 때문이다.
2) 방석과 책상
경허는 그의 「중노릇 하는 법」에서 출가 수행의 분명한 이유를 말하고 있다. “대저 중노릇 하는 것이 어디 적은 일이리요 잘 먹고 잘 입기 위하야 중노릇 하는 것이 아니라 ‘부처 되어 살고 죽은 것을 면하자’고 하는 것” 鏡虛, ꡔ鏡虛集ꡕ(韓佛典ꡕ 제11책, 797상 면).
이라고 역설하고 있다. 부처가 되어 생사 윤회를 면하고자 함은 출가 수행자를 포함한 모든 불제자들의 제1의 화두이다.
그런데 그가 이러한 글을 썼던 이유를 돌이켜 보면 출가 수행의 본분사를 잊고 있는 당시의 교단의 모습을 엿볼 수 있다. 경허는 이에 대한 준엄한 비판을 통해 참다운 수행 가풍을 세우려 했음을 알 수 있다. 그가 해인사를 무대로 「結同修定慧同生兜率同成佛果禊社文」을 지으면서 수선결사를 주도하고 있음에서도 이 점은 잘 드러나고 있다.
당시의 선법에 대한 경허의 문제의식은 고려 중기의 知訥(1158 ~1210)과도 일맥 상통하고 있다. 지눌은 그의 「勸修定慧結社文」에서 고려 중기 불교 교단의 禪敎 갈등을 ‘癡禪’과 ‘狂慧’라는 기호로 갈파했다. 깨달음을 얻는 데에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는 선종의 ‘헛된 참선’과 깨달음으로 가는 길에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는 교종의 ‘마른 지혜’에 입각하여 당시 불교인들은 끊임없이 자신의 입장만 주장하고 있었다. 拙論, 「지눌의 眞心 사상: 頓漸(定) 축과 理事(慧) 축의 긴장과 탄력」, ꡔ보조사상ꡕ 제15집, 보조사상연구원, 2001, 126면.
즉 붇다의 마음인 禪이 빠져버린 敎(狂慧)와 붇다의 가르침인 敎가 빠져버린 禪(癡禪)의 일방적 주장만이 어지럽게 춤추고 있었다.
이에 대해 지눌은 ‘헛된 참선’과 ‘마른 지혜’의 대립으로는 더 이상 깨달음을 얻을 수 없음을 확신하고 ‘참된 참선’과 ‘살은 지혜’의 화회를 위해 返照의 방식(논리)을 제창했다. 반조의 논리는 자기 본성(自性)과 자기 마음(自心)의 두 축을 안으로 돌이켜 봄으로써 참된 마음(眞心)의 회복을 도모하는 것이다. 즉 진심(혹은 無心)을 안에서 구하고 밖에서 구하지 말며, 나에게서 구하고 남에게서 구하지 않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자기 본성과 자기 마음을 서로 돌이켜 비춤으로써 그의 궁극적 화두였던 참된 마음을 드러내는 것이었다.
경허 역시 당시 조선 후기 불교 교단의 선법과 교법의 특징을 ‘눈 먼 방석불교’와 ‘다리 저는 책상불교’로 규정하고 ‘눈을 밝히고’ ‘다리를 바로 잡는’ 가풍을 제창하였다. 그는 먼저 방석에 앉아 있기만 한 ‘눈 먼 불교’를 바로잡기 위해 깨달음에 대한 규정을 새롭게 했다. 경허는 깨달음은 “용이 換骨함에 그 비늘을 바꾸지 않고, 범부가 開心함에 그 얼굴을 바꾸지 않는 것” 鏡虛, ꡔ鏡虛集ꡕ(ꡔ韓佛典ꡕ 제11책, 면).
과 같다고 했다. 즉 용은 비늘을 지닌 채로 환골하고 범부는 얼굴 그대로 개심해야 참다운 깨달음이라고 할 수 있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자기마음과 분리된 대상화된 깨달음은 이미 깨달음이 아니라는 뜻이다. 이는 마치 “중생의 세계가 줄어들지 않고 부처의 세계가 늘어나지 않는 것” 閔漬 撰, 「一然碑文」, ꡔ朝鮮金石總攬ꡕ 卷下(아세아문화사,1975), 면. “生界不減, 佛界不增.”
이라는 일연의 화두와도 같은 것이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용이 비늘을 바꾸지 않고 뼈를 바꾸며 범부가 얼굴을 바꾸지 않고 마음을 열 수 있는가. 다시 말해서 어떻게 해야 중생의 세계 그 자리에서 중생이 부처가 될 수 있는가.
경허는 ‘용이 뼈를 바꾸되 그 비늘을 바꾸지 않고’, ‘범부가 마음을 열되 그 얼굴을 바꾸지 않는’ 소식을 통해 깨달음의 경계를 환기시키고 있다. “부처와 조사라고 이름하며 선과 교를 설하지만 어찌 특별한 자리가 있어 분별을 일으키리. 돌 사람이 피리 불고 목마가 졸고 있네” 鏡虛, 「悟道歌」, ꡔ鏡虛集ꡕ(韓佛典ꡕ 제11책, 629상 면).
라고 노래 부른다. 그래서 “부처가 되려면 내 몸에 있는 내 마음을 찾아보아야 하는 것” 鏡虛, 「중노릇 하는 법」(ꡔ韓佛典ꡕ 제11책, 597상 면).
이라고 말한다. 그 때문에 눈 먼 방석불교를 극복하기 위해서 경허는 붇다의 가르침인 교를 㓉句法門으로 살려내야만 했다. 동시에 다리 저는 책상불교를 이겨내기 위해서 그는 붇다의 마음인 선을 活人劍으로 휘둘러야만 했다.
당시 교학과 선학은 임란 이후 새롭게 정립되는 看(講)經門, 參禪門, 念佛門의 三門으로 자리잡아 가고 있었다. 강당(방)과 선방(참선당)과 염불방(당)이 별립되면서 전문 수업 혹은 兼修에 열중하였다. 경허 역시 동학사 강원에서 만화 보선의 지도 아래 講學을 이수하였다. 그는 약관인 20대 초반에 이미 강사가 되었고 30세 초반에는 修禪에 몰입하여 정진하던 중 34세의 겨울에 깨달음을 얻었다.
한암은 경허의 가풍을 이렇게 표현했다. “주장자를 꺾어 문 밖으로 던져 버리고 훌훌 털고 산을 나서서 형편따라 교화를 베푸심에 상투적인 데서 벗어나고 격식을 두지 않으셨다. 혹은 시중에서 어슬렁거리며 속인들과 섞여 지내시며, 혹은 한가로이 소나무 정자(松亭)에 누워 초연히 풍월을 �조리시니 그 초탈한 취지는 사람들이 능히 헤아릴 수 없었다. 漢巖 重遠, 「鏡虛和尙行狀」, ꡔ鏡虛集ꡕ(ꡔ韓佛典ꡕ 제11책, 655하~656상 면). “遂拗折柱杖, 擲於門外, 翩然出山, 隨方宣化, 脫畧窠臼, 不存軌則, 或懶遊城市, 混同塵俗, 或閑臥松亭, 嘯傲風月, 其超逸之趣, 人莫能測.”
” 한암의 기술처럼 경허는 종래의 선사나 강사들의 상투적인 제접과 담론에서 벗어나 당시의 세상 사람들과 함께 했다.
경허는 그들과 담론하고 거량하면서 경허는 조선 유학의 과도한 주도에 밀려 진이 다 빠질대로 빠져있던 당시의 불교를 새롭게 세우려 했다. ꡔ경허집ꡕ의 많은 산문들 경허는 「德裕山松溪庵回祿後成造勸善文」, ꡔ鏡虛集ꡕ(ꡔ韓佛典ꡕ 제11책, 에서 “경우에 따라서 글이란 혹은 흥취에서 혹은 적말할 때 혹은 슬플 때 혹은 무엇을 동경할 때나 그윽하고 한가로움이 맑고도 깊을 때나 우수가 다하여 찌들 때, 그럴 때 짓나니 그 일이 실로 한 두 가지가 아니다”면서 자신의 文章觀을 드러내 보이고 있다.
과 운문들은 이러한 경허의 異類中行에 대한 흔적을 잘 보여주고 있다. 자신과 담론한 인물들에게 몸소 시를 써 주거나 혹은 그들과 만난 이후의 所懷를 형상화 해낸 시들에서 특히 경허의 내면을 잘 들여다 볼 수 있다.
그는 당시 ‘다리 저는 책상불교’의 모습을 보이는 강학계와 ‘눈 먼 방석’의 모습을 보이는 선(학)계를 넘어서서 ‘반듯한 다리’와 ‘눈을 활짝 뜬’ 불교적 인간상을 제시하려 했던 것이다. 경허가 그의 「悟道歌」에서 “사방을 돌아보아도 사람이 없으니, 의발을 누구에게 전해 받으리, 의발을 누구에게 전해 받으리. 사방을 돌아보아도 사람이 없네” 金浩星, 「結社의 近代的 展開 樣相」, ꡔ普照思想ꡕ 제8집, 1995, 142면. 김호성은 漢巖의 「先師鏡虛和尙行狀」에서 “四顧無人 네 구를 첫머리에서 시작하고 끝머리에서도 맺어놓은 것은 이는 師友와 淵源이 이미 끊어져서 印證하여 서로 받을 곳이 없음을 깊이 탄식한 것이다‘라고 하고 이를 근거로 ”의발을 누구에게 전해받으랴“로 옮기고 있다. 최병헌 역시 ”경허가 悟道 이후 고심 끝에 禪의 道統 淵源을 정리하여 밝히고 있음을 보아 그의 悟道를 인가해 줄 스승이 없음을 탄식한 의미로 해석하는 것이 타당하지 않은가 한다“고 하며 김호성의 견해를 따르고 있다(崔柄憲, 「近代 禪宗의 復興과 鏡虛의 修禪結社」, ꡔ德崇禪學ꡕ 제1집, 72면). 논자 역시 경허 이래 ”水月, 慧月, 枕雲, 滿空, 漢巖 등 그의 高足들이 즐비했던 역사적 사실에 근거해 볼 때 이 구절은 그의 아래로 의발을 전해줄 이가 없음을 고뇌한 것이 아니라 글의 제목인 「悟道歌」인 것처럼 ‘그의 위로부터 의발을 누구에게 전해 받으리’로 보아야 하며 이것은 ‘자신에게 의발을 줄 사람이 없음을 탄식하는 것’이자 동시에 ‘자신의 깨달음이 여타의 종래 선사보다 더 투철함을 드러낸 자신감의 표현’으로 보는 것이 더 적확하다고 생각한다.
라고 한 것처럼 이는 자신에게 의발을 전해 줄(받을) 이가 없음에 대한 탄식과 더불어 자신으로부터 비롯되는 새로운 경허 가풍을 예견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오도가」 서두의 이러한 담론은 종래 조선 후기의 강학계와 선학계의 풍토가 ‘눈 먼 방석불교’와 ‘다리 저는 책상불교’의 틀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음에 대한 준엄한 비판과 반성이라 할 수 있다. 동시에 자신이 전개할 불교는 ‘반듯한 다리’와 ‘눈을 활짝 뜬’ 독자적인 경허 가풍임을 암시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2. 照了와 專精의 논리 방식
유수한 학자나 사상가들에게는 그들의 학문적 화두와 더불어 사상적 화두가 있기 마련이다. 그런데 언어를 통해서 자신의 집을 지은 사상가들에게는 이들 화두를 풀어헤쳐 나갈 나름대로의 논리적 매개항이 있다. 특히 불교사상가들에게 있어서는 소승과 대승, 아라한과 보살, 깨달음과 나눔, 채움과 비움 등의 이항을 유기적으로 해소하는 매개항이 있다. 이들 매개항은 붇다의 中道를 일깨우기 위해 설정된 두 문을 회통하는 기제가 된다. 경허에게는 지눌의 ‘返照’에 상응하는 ‘照了’의 기호가 있다.
경허는 만년에 禪家의 종요를 모아 ꡔ정법안장ꡕ이라 붙이고 서문을 붙였다. 그런데 이 ꡔ정법안장ꡕ은 훗날 ꡔ선문촬요ꡕ로 제명이 바뀌어 유포된 이후로 선문의 고전으로 자리잡는다. 그 서문에서 그는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마음의 근원을 돌이켜 비추어 (마음의) 功用을 오롯이 정밀히 하면 비록 일대 장교(四藏)를 지나쳐 보지 않았다 하더라도 일대 장교가 여기에 있다. 鏡虛, 「正法眼藏序」, ꡔ鏡虛集ꡕ(ꡔ韓佛典ꡕ 제11책, 600하 면). “返照於心源, 用功專精, 雖不用看過藏敎, 藏敎在焉.”
경허에게 있어 선과 교는 대립하지 않는다. 그는 젊은 시절 동학사 강사를 할 정도로 교학에 대한 이해가 전제되어 있었다. 그 위에서 다시 선의 이해를 추가하고 있는 것이다. 그가 보이는 마음의 근원을 돌이켜 비추어 깨닫아 사무치는 ‘照了’나 마음의 공용을 오롯이 정밀히 하는 ‘專精’의 기호 역시 일대장교의 ‘看過’를 무시하는 맥락에 있지 않다는 것이다.
1) 照了의 논리
원효에게는 歸一心源과 饒益衆生을 성취시키는 ‘和會’의 논리가 있고 지눌에게는 二門眞心과 禪敎一元을 비추어 보게 하는 ‘返照’의 논리가 있으며, 휴정에게 一物禪心과 捨敎入禪을 이루어내는 ‘會通’의 논리가 있는 것처럼 경허에게도 照了心源과 異類中行을 돌이켜 보게하는 ‘照了’의 논리가 있다. ‘조료’는 말 그대로 ‘돌이켜 비추어 깨달아 사무치는’을 뜻하는 기호이다. 다시 말해서 마음의 근원을 ‘返照’하고 ‘了達’하게 하는 코드이다.
위 인용문의 “마음의 근원을 돌이켜 비추어 (마음의) 공용을 오롯하게 정밀히 하면(返照於心源’ 用功專精), 비록 일대장교를 보지 않았다 하더라도 대장경이 여기에 있다”(雖不用看過藏敎, 藏敎在焉) 鏡虛, ꡔ鏡虛集ꡕ(ꡔ韓佛典ꡕ 제11책, 600하 면). “返照於心源, 用功專精, 雖不用看過藏敎, 藏敎在焉.”
는 말에서 주목되는 두 기호는 ‘返照’와 ‘專精’이다. 경허는 일대장교의 ‘看過’와 변별되는 선법 수행의 길을 ‘返照’와 ‘專精’이라는 코드를 갈파하고 있다. 또 경허는 그의 글 「示法界堂」에서 “빛을 돌려 되비추고 마음의 근원을 비추어 깨달아 사무쳐라”(廻光返照, 照了心源) 鏡虛, ꡔ鏡虛集ꡕ(ꡔ韓佛典ꡕ 제11책, 595상 면).
고 하면서 ‘日日照顧’ 鏡虛, 위의 글, 위의 면.
, ’照了自性‘ 鏡虛, 위의 글, 위의 면.
, ‘照了妄想’ 鏡虛, 위의 글, 위의 면.
등과 같이 ‘返照’ 대신 ‘照了’ 혹은 ‘照顧’라는 ’기호를 애용하고 있다.
이처럼 여느 선사들처럼 경허는 위로 향하지 않고 아래로, 밖으로 향하지 않고 안으로, 남에게서 구하지 아니하고 자기에게서 구하기 위해 ‘照了’하고 ‘返照’하는 논리 방식을 통해 정진했다. 교학자들은 언어를 통해 매개 논리를 원용하지만 워낙은 선사와 마찬가지로 ‘觀照’ 혹은 ‘照了’ 내지 ‘返照’의 논리 방식을 통해 붇다의 핵심교설인 중도를 드러내 보이고 있다. 이러한 맥락에서 중도 구현을 위해 고투한 유수한 한국불교사상가들의 화두와 매개항을 도표화시켜 보면 아래와 같다.
위의 도표와 같이 경허에게 있어 ‘照了’는 먼저 높은 곳에서 찾지 않고 낮은 곳에서 찾으며, 남에게서 찾지 않고 나에게서 찾으며, 바깥에서 찾지 않고 안에서 찾게 하는 기제이다. 여기서 ‘비춘다’(照)는 것은 모든 사물을 비추는 거울처럼, 모든 물길을 아우르는 바다처럼 무차별의 시선으로 마음의 근원을 관조하는 것이다.
즉 眞心의 몸체인 자기 본성과 진심의 몸짓인 자기 마음을 있는 그대로 비추는 것이다. ‘요달한다’는 것은 마음의 근원을 또렷또렷(惺惺)하고 고요고요(寂寂)하게 깨달아 사무치는 것이다. 따라서 照了는 “스스로 ‘마음의 근원’(心源)을 비추어 보게 함으로써 깨달음을 얻게 하고 동시에 자신의 존재 이유가 오늘의 성취를 있게 해준 모든 인연들에게 다 나누어주는 것임(中行)을 사무치게 통찰하는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心源의 몸체를 비추어 깨닫게 하는 ‘照了’ 뿐만 아니라 心源의 몸짓을 보다 구체화하는 ‘專精’의 방식이 요청되는 것이다. 불교의 초기 경전인 ꡔ아함경ꡕ의 주요 수행법은 ‘홀로 한 고요한 곳에서 오롯하게 정밀히 사유하는’(獨一靜處 專精思惟) 것이었다. 이때 專精은 위빠사나(洞察禪) 수행의 구체적인 방법이었다. 즉 담마(法)의 현상에다 호흡의 일어남과 사라짐을, 나아가 사물에 즉한 언어와 사유의 일어남과 사라짐을 대응시켜 또렷하고 정치하게 살피는 것이었다. 따라서 경허에게 있어 專精의 방식은 照了를 통해 비춰진 心源을 보다 정밀하게 관찰하는 기제였다고 할 수 있다.
2) 專精의 방식
경허는 照了를 통해 마음의 근원을 살피고 ‘專精’을 통해 그것을 보다 현실 속에서 구체화하고자 했다. ‘조료’가 보다 근원적인 몸체의 논리라면 ‘전정’은 그 몸체의 구체적 적용인 몸짓의 방식이다. 몸체와 몸짓이 분리될 수 없는 것처럼 조료와 전정 역시 따로 설명될 수 없다. 몸짓이 부처의 길을 구하는 ‘채움’의 과정이라면, 몸체는 보살의 길을 향하는 비움의 과정이다.
照了
心源
부처
返照心源
專精
用功
보살
異類中行
경허에게 있어 照了는 마음의 근원을 비춤으로써 깨달음을 얻게 하고 동시에 그의 존재 이유가 중생들 속에서 더불어 나누며 살아가는 것임을 이끌어주는 매개항이며. 專精은 마음의 근원의 공용을 오롯하게 살핌으로써 이 異類中行과 返照心源의 구도를 구체적인 현실 속에서 헤쳐나가도록 이끌어주는 매개항이다. 이러한 매개항은 결국 어떠한 근원적 화두를 돌파하기 위해 설정된 방편이기 마련이다. 그러면 경허가 ‘조료’ 혹은 ‘전정’을 통해 얻고자 했던 궁극적 화두는 무엇인가. 그것은 한 마디로 깨달음이다. 그 깨달음은 ‘영원히 사는 나라’이자 ‘불생불멸의 나라’인 ‘축복받은 곳’(壽域)에 태어나는 것이다. 그런데 경허가 꿈꾸는 不生不滅의 나라는 여기서부터 저만치 떨어져 있는 ‘어디’가 아니라 풍전등화와 같은 위기 속에 자리한 조선말 대한 초기의 이 땅 바로 여기이다.
경허는 「梵魚寺設禪社契誼序」에서 “이제 수행자들을 보건대 모두가 방편설에 미혹되어 일생을 그르치니 슬프다”면서 “듣고 믿지 않더라도 오히려 부처를 이룰 인연을 맺고 배워서 이루지 못하더라도 오히려 사람과 하늘의 복보다 낫다”며 동참계를 시설해서 함께 최상의 인연을 맺어 불생불멸의 나라(壽域)에 이르자고 제안한다.
영원히 사는 나라(壽域)란 무엇인가. 푸른 산은 높이 솟고 푸른 바다는 넓고 넓으며 조각 구름은 떠 있고 솔바람은 소슬하니 어느 것이나 자기의 광명이 아님이 없어서 하늘에 두루 하고 땅에 두루하여 항상 영원한 옛이요 항상 영원한 현재로다. 비록 妙用이 항하강 모래 수와 같으나 그 견고함도 능히 금강과 같으리라. 鏡虛, 「梵魚寺設禪社契誼序」, ꡔ鏡虛集ꡕ(ꡔ韓佛典ꡕ 제11책, 600중 면).
가장 좋은 인연이란 무엇인가. 경허는 함께 수행에 동참하여 영원히 사는 나라에 태어나기를 기원하는 인연이라고 역설한다. 금강과도 같은 견고함으로 불생불멸의 나라에 이르기를 다짐하자는 것이다. 그것은 照了의 논리와 專精의 방식을 통해서 마음의 근원을 비추어 깨달아 사무치고 뿔을 이고 털옷을 입고 꼬리를 끌며 중생속으로 들어가 밭을 갈고 짐을 나르며 더불어 나누며 사는 삶인 것이다. 경허가 궁극적으로 모색한 것은 바로 이 照了心源과 異類中行이 하나로 삼투되는 삶이었던 것이다. 그것은 곧 당대의 가장 주체적인 선사로서 國亡의 아우라를 돌파해가는 몸부림과도 같은 것이었다고 할 수 있다.
3. 被毛 戴角 曳尾의 行化
경허의 깨달음은 철저하다. 그의 「悟道歌」 즉 ‘無生一曲歌’ (1881)는 無生 즉 空性에 대한 투철한 인식을 드러내고 있다. 그는 선가의 전법의 상징인 가사와 발우를 전해줄 이를 찾고 있다. 아니 오히려 그에게 가사와 발우를 전해줄 이가 없음을 탄식하고 있는 것이라 읽어야 할 지 모르겠다. 鏡虛, 「悟道歌」, ꡔ鏡虛集ꡕ(ꡔ韓佛典ꡕ 제11책, 628하~629상 면). “四顧無人, 衣鉢誰傳, 衣鉢誰傳, 四顧無人.”
이 「오도가」는 자신에게 의발을 전해줄 사람이 없음에 대한 탄식과 동시에 여타의 선사들과 변별되는 자신의 독자적 가풍에 대한 자부심이 투영되어 있다.
1) 경허의 살림살이
깨우친 경허에게는 사방을 둘러보아도 눈을 뜬 자가 보이지 않는다. 나라가 累卵의 위기에 있어도 나라의 장래를 걱정하는 사람은 보이지 않는다. 교단은 교단대로 자신의 입장만이 옳다고 하고 누구 하나 교단의 부흥을 위해 분연히 일어나 佛祖의 慧脈을 바로 잡으려고 하지 않는다. 이 선언은 당시의 부조리한 현실에 대한 경허의 통렬한 비판이자 자기 학대이다. 이후 그가 보인 자학과 삼수갑산으로 은둔해 보여준 살림살이는 이러한 면모를 잘 보여주고 있다.
사방을 돌아보아도 사람이 없어
의발을 누구에게 전해 받으리
의발을 누구에게 전해 받으리
사방을 둘러보아도 사람이 없네 鏡虛, 悟道歌」, ꡔ鏡虛集ꡕ(ꡔ韓佛典ꡕ 제11책, “衣鉢誰傳, 四顧無人, 四顧無人, 衣鉢誰傳.”
그는 나뭇꾼 아이들에게 “너희들이 만일 이 주장자로 나를 치면, 과자 값을 많이 줄 것이라”고 제안하고 머뭇거리며 제대로 치지 못하는 아이들에게 “어찌 나를 치지 않느냐? 만일 나를 친다면 부처님도 치고 조사도 치고, 삼세 제불과 역대 조사와 내지 천하 노화상을 한 방망이로 치게 되리라” 鏡虛, 「於馬亭嶺與樵童問答」, ꡔ鏡虛集ꡕ(ꡔ韓佛典ꡕ 제11책, 596중 면).
고 외친다. 무엇이 그를 치게 하고 또 그는 왜 맞고자 하는가. 아무리 쳐도 그는 굴하지 않는다. 아이들이 몽둥이로 쳐도 그는 맞은 것이 아니다. 경허는 눈 뜬 자로서의 고독과 시나브로 다가오는 國亡의 기운을 몸소 느끼면서 이렇게 독백하고 있다.
온 세상 다 혼탁함이여
나만 홀로 또렷또렷 하구나
숲 아래 남은 세월
내멋대로 보내리라. 鏡虛, 위의 글, 위의 면. “擧世渾然我獨醒, 不如林下度殘年.”
모두들 눈을 뜨고 살지만 사방을 둘러보는 경허의 눈에는 또렷또렷하게 눈 뜬 이가 보이지 않는다. 이 시는 홀로 눈 뜬 자로서의 지독한 고독과 절망이 진하게 배어있다. 남은 세월을 내멋대로 보내고자 하는 경허는 삼수갑산으로 和光同塵할 때까지 무애자재한 가풍을 전개하며 온몸으로 살아간다.
결국 그가 지독한 자학의 길을 통해 가고자 했던 것은 자유로운 나라, 외세에 휘둘리지 않는 자유로운 국가가 아니었을까. 그것은 彌勒淨土이기도 하고 주체를 확립한 ‘朝鮮’ 혹은 ‘大韓’이기도 할 것이다. 선사의 삶이 그렇겠지만 경허는 누구보다도 주체적인 삶을 살고자 했다. 주체가 살아있는 나라, 주인공이 있는 나라에서 숨쉬고 싶어했다.
홀연히 어떤 사람의 콧구멍 없는 소라는 말을 듣고
몰록 삼천대천세계나 나의 집임을 깨달았네
유월 연암산 아랫 길에서
들사람이 일 없이 태평가를 부르네 鏡虛, 「悟道歌」, ꡔ鏡虛集ꡕ(ꡔ韓佛典ꡕ 제11책, 629중 면). “忽聞人語無鼻孔, 頓覺三千是我歌, 六月燕巖山下路, 野人無事太平歌.”
스승 만화 보선이 자신의 방에 들어왔을 때도 경허는 누워있었다. ‘일 없는 사람은 본디 이렇게 하는 것’(無事之人, 本來如是 漢巖, 「先師鏡虛和尙行狀」, ꡔ鏡虛集ꡕ(ꡔ韓佛典ꡕ 제11책, 654상 면).
)이라고 하던 그였다. 아라한은 이미 배워야 할 공부를 다한 사람
이기에 無學이라고 한다. 더 이상 배울 것이 없는 것이다. 경허 역시 이미 본분사를 다해 마쳤으므로 ‘일 없는 들사람’(了事漢, 野人無事)이 된 것이다. 거기에 무엇을 더 하고 뺄 것인가. 깨닫고 난 뒤는 할 일이 없는 것이다. 다만 피모 대각의 보살행만이 남아있을 뿐이다.
어떤 이는 “영산회상에서 부처님이 꽃을 들어 보이자 백만 대중이 어쩔 줄 몰라 하는데 오직 가섭존자 한 사람만이 알아차리고 빙그레 웃었다. 그러나 말세 중생들이 자기의 그릇이 작은 줄 살피지 못하고 ‘조사의 뜰을 찾았노라’ 하고 말한다. 이와 같이 삿된 말은 가히 수를 다 셀 수 없다. 이것은 대개 지혜의 눈이 없는데다가 눈 밝은 종장을 참견하지 못하여 멍청한 말을 하고 있으니 괴이한 일도 아니다.… 대개 부처님께서 법을 전하실 때, 모든 제자들이 화현으로 거듭 오셨으니 가섭과 아난 같은 이들의 숫자는 헤아릴 수 없었다. 어찌 가히 도에 참석할 근기가 없었겠는가. 그래도 한 사람에게 전한 것은 부처님이 열반하신 뒤 한 사람을 내세워 一代 敎主를 삼으려 한 것뿐이니 마치 하늘에 해가 둘이 없고 나라에 두 임금이 없는 것과 같을 뿐 득도한 사람이 없다는 이야기는 아니다. 鏡虛, 「結同修定慧同生兜率同成佛果稧社文」, ꡔ鏡虛集ꡕ(ꡔ韓佛典ꡕ 제11책, 601하~602상 면).
경허는 이 「결사문」에서 모든 인간에게 열려있는 깨달음의 보편성을 강조하고 있다. 붇다의 회상 아래서 깨달은 사람은 가섭만이 아니라는 것이다. 가섭과 아난과 같은 이들의 숫자는 헬 수가 없을 정도로 많았다는 것이다. 다만 하늘에 두 해가 있을 수 없고 나라에 두 임금이 있을 수 없는 것처럼 방편으로 한 사람을 내세워 일대의 교주로 삼은 것일 뿐이라는 것이다. 여기에서 우리는 경허의 열려있는 인간 이해와 세계 인식의 지평을 읽어낼 수 있다.
경허는 누구나가 “빛을 돌이켜 마음의 근원을 비추어 깨달아 사무칠 수가 있다”고 역설한다. 누구나가 가섭과 아난이 될 수 있고, 또 석존의 마음을 전해받은 이는 가섭과 아난만 있는 것이 아니다. 문제는 “자기의 그릇이 작은 줄 살피지 못하고 ‘조사의 뜰을 찾았노라’고 말하거나”, “대개 지혜의 눈이 없는데다가 눈 밝은 종장을 참견하지 못하여 멍청한 말을 하”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자기의 그릇을 잘 살펴 눈 밝은 종장을 참견하면” 얼마든지 깨달을 수 있는 길을 열 수 있다고 읽을 수 있다. 그런데 눈 밝은 종장은 어디 있는가. 먼저 눈 밝은 종장 역시 지혜의 눈이 있어야만 볼 수 있다. 지혜의 눈은 ‘照了’의 논리에 의해 마음의 근원을 비추어 깨닫고 ‘專精’의 방식에 의해 마음의 공용을 오롯하게 정밀히 해야만 뜰 수 있는 것이다.
그래서 경허는 그의 법명 ‘惺牛’와 같이 여러 산문과 운문들에서 ‘진흙소’ 내지 ‘깨우친 소’를 즐겨 원용한다. 특히 宋나라 廓庵 師遠선사의 심우도를 원용하여 자기의 가풍 속에서 재해석하고 있다. 논자가 그의 생평의 가풍을 ‘曳尾禪’ 혹은 ‘尾塗禪’이라 명명하고 논지를 전개해 가는 것도 이와 깊은 관련이 있다. 자유로운 그의 살림살이 속에는 노자와 장자의 영향이 짙게 배어있다. ‘예미’나 ‘미도’라는 기호 역시 莊子의 언어이다. 하지만 여기에서는 老莊思想과의 관련성은 다른 논고로 미루고 우선 禪家 속에서 그의 가풍을 해명하고자 한다.
被毛戴角의 가풍은 無我를 기초로 하는 보살행을 일컫는다. 때문에 고요한 승원에 앉아 아라한과를 성취하기 위해서 수행하는 것이 궁극의 목표는 아니다. 아라한상의 我相을 멸하지 않고는 도저히 할 수 없는 이타행이다. 송나라 곽암 사원은 진리의 정체를 소로 형상화하여 조직적으로 十牛圖를 만들었다. 불성을 상징하는 소는 우리의 본래면목이요 참된 나이다. 그런데 이 불성은 아직 길들여지지 않은 채 깊은 산 속에 숨어있는 야생의 소이다. 이 소를 어디서 찾으며 어떻게 길들여 자유자재로 오르내릴 수 있을 것인가.
일본에 의해 강제로 제물포항을 열게 되고 나라의 장래가 바람 앞의 등불과도 같았던 때였다. 나라의 장래를 걱정하는 그에게 과연 자유로운 삶은 어떠한 것이었을까. 경허의 가풍을 생각할 때 無相의 被毛戴角, 南泉의 異類中行, 雪峰의 服勞爲人 등의 가풍을 생각키우지 않을 수 없다. 그의 살림살이는 조선 후기 이래의 가풍과는 변별된다. 무상으로부터 비롯된 피모대각행의 가풍은 신라의 道詵, 고려의 一然, 조선의 雪岑으로 갸날프게나마 이어졌음을 알 수 있다. 하지만 설잠 이후 그 가풍은 자취를 감춰버렸다. 때문에 피모대각행, 즉 이류중행의 가풍은 다시 몇백 년 뒤의 경허를 기다려야만 했다.
경허는 설잠 이래 단절된 이류중행 가풍의 복원을 염두에 두고 있었던 것은 아닐까. 그의 가풍은 무상 이래의 남전과 설봉 등의 가풍을 계승하고 있기 때문이다. 경허의 가풍은 크게 머리의 단계, 가슴의 단계, 온몸의 단계로 구분된다. 이를 도표화하면 다음과 같다.
그러면 수행의 초기 단계인 머리에 뿔을 인 가풍에 대해 살펴보자. 廓庵 師遠의 十牛圖로 보면 1단계의 尋牛로부터 見跡-見牛-得牛-牧牛를 거쳐 제6단계의 騎牛歸家의 단계까지에 해당된다.
2) 뿔을 인(戴角) 가풍
경허는 ꡔ경허집ꡕ에서 오언절구로 된 「심우송」과 산문으로 된 「심우송」 두 갈래의 글을 남기고 있다. 산문 「심우송」의 첫 시 「소를 찾아나서다」(尋牛)는 곽암 사원의 시와 매우 흡사하다.
본디 잃지 않았거니 어찌 다시 찾을손가. 다만 찾으려 하는 이것이 비로자나불의 스승일세. 산은 파랗고 물은 푸르며, 꾀꼬리 울고 제비 지저귀는 곳곳에 온갖 소식 보이누나 쯧! 鏡虛, 「尋牛頌: 尋牛」, ꡔ鏡虛集ꡕ(ꡔ韓佛典ꡕ 제11책, 629중 면).
경허가 언제나 照了의 논리로 마음의 근원을 돌이켜 비추어 본다. 그런 뒤에 專精의 방식으로 마음이 공용을 구체화 한다. 여기에서도 그것은 그대로 적용된다. 우리는 본디 잃은 적이 없는 소를 찾으려고 애쓰고 있다. 이 시에서처럼 머리에 뿔을 인 소를 찾아나서는 경허의 가풍은 자유롭다. 눈 안에는 청산이 가득하고 마음속은 넉넉하다. 우리는 비로자나불의 스승을 찾아나서지만 경허에게는 이미 산과 물과 꾀꼬리와 제비가 있는 그곳이 바로 비로자나불의 스승 계시는 곳이다. 그는 다시 서산 휴정의 게송을 패러디해서 자신의 가풍을 드러내고 있다.
가소롭다 소 찾는 이여
소를 타고도 소를 찾네
해 지는 방초길에
이 일이 실로 아득하구나 鏡虛, 「尋牛頌: 尋牛」, ꡔ鏡虛集ꡕ(ꡔ韓佛典ꡕ 제11책, 630중 면).
곽암 사원은 “소를 타고 소를 다시 찾는다”고 그의 십우도에서 말했다. 사원은 소를 찾아가는 먼 길을 ‘늦매미가 우는 가을’로 비유했다. 하지만 경허는 ‘해 지는 방초길’로 자리바꿈했다. 서산 휴정은 ‘그림자 없는 나무’(無影樹)로 비유하여 제자인 소요 태능에게 이 시를 보인다. 태능은 어렵게 이 시를 전해받고 크게 깨닫게 된다. 그림자가 없는 나무란 무엇인가. 소를 타고 소를 다시 찾는 것을 말한다. 우리는 눈에 보이는 것만을 있는 것이라 착각하며 산다. 하지만 눈에 보이지 않는 것이 보이는 것보다 더 많은 것이다. 눈에 보이지 않는 소처럼 말이다.
“소를 타고 소를 다시 찾는다”는 이 역설은 우리로 하여금 이미 마음 안에 있는 소를 타고 있다는 사실을 자각하게 한다. 내 마음 바깥의 야생의 소와 내 마음 안의 야생의 소는 둘이 아니다. 하지만 대상화에 익숙한 삶을 살아가는 현실적 인간들에게 있어서 소는 언제나 나와 ‘저만큼’ 떨어져 있을 뿐이다. 이 거리를 어떻게 좁히고 없애 가느냐가 수행의 과제다. 손바닥을 마주 치는 것처럼 마음 속의 소와 마음 밖의 소를 일치시키기 위해서는 어떠한 인식의 전환이 필요한가.
경허는 산문 「견적」에서 곽암 사원과 달리 자신의 가풍을 또렷이 드러낸다. “밝고 미묘한 빛은 만발한 꽃에만 있는 것이 아니네. 잘 익은 노란 유자에도 덜 익은 귤에도 있나니 좋고 좋구나. 발자국이 있으니 미루어 소가 있음이로세. 무심하면 진리에 가까워질지니 좋고 좋구나. 법당 안 향로에도 맑은 가을 들가의 물에도 좋고 좋구나.” 鏡虛, 「尋牛頌: 見跡」, ꡔ鏡虛集ꡕ(ꡔ韓佛典ꡕ 제11책, 629중하 면).
경허는 무수한 발자국 속에서 어느 것이 진짜인지 묻는다. 우리는 어찌 해야 소의 진짜 발자국을 �아갈 수 있는가.
그는 다시 산문 「견우」에서 고함부터 지르며 노래한다. “악! 신령스런 빛이 홀로 빛나 하늘과 땅을 덮는다. 턱없는 중생은 정혼과 손발을 쓸데없니 놀리나니 도깨비 아닌가. 그런데 또 보았다는 것은 무엇을 본 것인가. 악! 또 한 번 악!” 鏡虛, 「尋牛頌: 見牛」, ꡔ鏡虛集ꡕ(ꡔ韓佛典ꡕ 제11책, 629하 면).
경허는 소를 보았다는 것에 대한 집착을 깨어주고자 한다. 마음의 소는 볼 수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경허는 다시 산문 「득우」에서 소를 붙들기 어려움을 들면서 더욱 정진을 요청한다. “소를 얻기는 얻었는데 다음은 어찌 할 것인가. 얻지 못했으면 얻도록 해야 하고. 이미 얻은 것은 놓치지 말아야 한다. 깨달아 얻는 이는 깨달아 얻는 것이고. 놓치는 이는 길이 놓치는 것이다. 다시 한 번 정말로 제대로 얻은 것인가 그렇지 아니한 것인가. 주장자로 탁자를 한번 치며 말하니 한줌 버들가지를 거머쥐지 못하나니 부드러운 바람은 간들간들 옥난간을 건드리네.” 鏡虛, 「尋牛頌: 得牛」, ꡔ鏡虛集ꡕ(ꡔ韓佛典ꡕ 제11책, 629하 면).
마음의 소는 얻기 어렵다. 형상으로 잡히지 않기 때문이다. 하지만 한 번 얻는 소는 놓치면 다시 얻을 수 없게 된다. 이미 멀리 달아나버리기 뒤쫓아 잡을 수 없다. 때문에 경허는 더욱더 고삐를 꼭 잡기를 촉구한다.
경허는 다시 「견우」와 「득우」 단계를 「소의 전체 모습이 드러난다」(露現全體)는 제목의 오언시로서 아울러 노래한다. 그런 뒤에 소를 보고 얻은 것을 雪山 동자의 향기로운 소식으로 승화시킨다. “넓고 끝없는 세상과 같은 땅을/ 달리고 달려 한 구역을 지났네/ 들었나니 저 설산 속에/ 영원히 서리는 젖향기가 있다는 소식.//” 鏡虛, 「尋牛頌: 露現全體」, ꡔ鏡虛集ꡕ(ꡔ韓佛典ꡕ 제11책, 630중 면).
그는 ‘보고 얻은’ 이 두 단계를 ꡔ열반경ꡕ의 「諸行無常偈」로까지 끌어올리고 있다. 진리의 반 게송을 더 듣기 위해 목숨을 던진(爲法亡軀) 석존의 전신인 설산동자의 수행으로 승화시키고 있다.
그는 산문 「목우」에서 착한 마음과 악한 마음은 본디 분별이 없으니 마음으로써 마음을 끊을 필요가 없음을 역설한다. “착한 마음 악한 마음이 다 마음이니 닦느니 끊느니 할 것이 없다. 마음이란 독기있는 땅을 지나는 것과 같아 물 한 방울도 묻히지 않을 수가 없네. 탐욕에 빠지는 마음 끊지 않으며 예까지 왔는데, 마치 죽은 사람의 눈과 같아 모두가 험로이니 가지 말아야 하며, 또한 갈만한 길도 아니네. 그러면 어떻게 해야 할 것인가. 구구는 팔십일이네. 밑빠진 그릇은 용천 마흔 해를 달려가는데, 향림은 마흔 해를 힘써 한 경지를 이루었네. 아, 얻기는 쉬워도 지키기는 어려우니, 또 조금 얻은 것으로 만족해선 아니되네. 모름지기 좋은 스승에게 배우고, 도가니와 풀무에 단련을 거듭해야만 비로소 얻을 것이네.” 鏡虛, 「尋牛頌: 牧牛」, ꡔ鏡虛集ꡕ(ꡔ韓佛典ꡕ 제11책, 629하 면).
선가의 수행법은 무엇보다도 좋은 스승을 만나서 묻고 배워야 하는 것이다. 스승으로부터 화두를 건네받고 그것을 마음 속에서 혼침과 도거를 넘어 또렷 또렷하고(惺惺) 고요 고요하게(寂寂) 들고 그 핵심을 향해 정면돌파를 해야만 한다. 그렇게 해서 얻은 결과를 가지고 다시 스승과 거량하며 점검받고 인가를 받아야만 비로소 소기의 목적을 달성할 수 있게 된다.
경허는 몇 해를 두고 두고 길들여 보호 임지하는 「調伏保任」의 경지를 오언시로 노래한다. “몇 번을 풀과 나무 우거졌다 졌는가. 코 꿸 고삐를 던져 잡기가 참으로 어려웠네. 오늘의 결과는 그 끝에 얻어지는 것이니, 강산을 모두 내 속에 거머쥐었네.” 鏡虛, 「尋牛頌: 調伏保任」, ꡔ鏡虛集ꡕ(ꡔ韓佛典ꡕ 제11책, 630중 면).
여기까지가 뿔을 이고 털옷을 입고 꼬리를 드리우며 밭을 갈고 짐을 나르며 함께 어우러져서 중생을 제도하는 심우도의 절반 단계이다.
경허는 「심우송」에서 「任運歸家」라는 오언시로서 스스로 자연 속의 일부분처럼 자유로이 집으로 돌아가는 노래를 부른다. “동과 서가 따로 있는 것이 아니니/ 맡겨지는대로 본고향을 향해 가네/ 구멍이 없는 한 자루 피리가/ 소리 소리 마음대로 내기 어렵네.//” 鏡虛, 「尋牛頌: 任運歸家」, ꡔ鏡虛集ꡕ(ꡔ韓佛典ꡕ 제11책, 630중 면).
구멍없는 피리를 어떻게 불 것인가. 석녀가 어떻게 아이를 낳을 것인가. 하지만 禪家에서는 주관과 객관을 떠나 하나로 나아가면 구멍없는 피리로 불 수 있고 아이 못낳는 석녀도 아이를 낳을 수 있다고 본다. 중요한 것은 주객 분별을 넘어선 반야 지혜의 터득으로만 가능한 일이다.
이처럼 심우도의 첫 단계인 ‘尋牛’부터 여섯 단계인 「騎牛歸家‘까지는 뿔을 인 가풍으로 볼 수 있다. 즉 경허가 보여준 이류중행의 가풍을 십우도에 대비해 볼 때 ‘머리’에 달린 뿔처럼 수행의 초기단계인 ‘머리’의 단계이자 앎의 단계이다. 마치 뿔을 이고 밭을 가는 소처럼 말이다. 그러면 가슴의 단계는 어떤 가풍으로 상응될 수 있는가.
3) 털을 쓴(被毛) 가풍
경허는 다시 머리의 단계로 보인 가풍을 넘어서 ‘가슴’의 단계로 보인 가풍을 열어 보인다. 뿔이 머리에 있다면 털은 전신 혹은 가슴에 있다. 피모의 가풍은 짐을 나르는 말의 모습처럼 땀을 흘리는 형상이다. 털옷을 입은 이 단계는 머리의 단계에서 가슴의 단계로 보다 구체화된다.
경허는 師遠의 일곱 번째 단계인 「忘牛存人」을 자신의 가풍 속에서 육화하여 산문으로 적고 있다. “잠을 깨어라. 어이 이리 어수선한가. 일없이 우뚝이 앉아있음에, 봄이 오니 풀은 스스로 푸른 것을. 도대체 등창을 쑥뜸질하듯 하며, 푸른 하늘을 곧바로 보지 못한다면, 몽둥이로 얻어 맞을 일이네. 어찌 이렇단 말인가. 비가 와야 할 때에 비가 안 오고, 개야 할 때는 개이지 않네. 이와 같이 된다면, 이 무슨 마음의 소행인가. 아아, 오랫동안 문 밖을 나가지 않는 경계는 무엇인가. 오로지 저 뒷간도 안 보고 가려는 경계는 무엇인가. 덧없는 인생의 아둥거림을 몰라라 하는 경계는 무엇인가. 두 줄기 뿔이나 눈썹은 늘 드러나 있는 것이네. 머리를 숙이거나 얼굴을 들거나 감출 곳이 없으니, 구름은 청산에 있고 물은 병 속에 있는 것을.” 鏡虛, 「尋牛頌: 忘牛存人」, ꡔ鏡虛集ꡕ(ꡔ韓佛典ꡕ 제11책, 630상 면).
비가 와야 할 때에 비가 안 오고, 개야 할 때는 개이지 않는 것처럼 우리의 모든 분별은 잘못된 선택으로부터 비롯된다. 중요한 것은 분별심에 의한 잘못된 선택을 지혜로운 선택으로 전환하는 데에 있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지혜를 닦는 수밖에 없다. 지혜를 닦게 되면 더 이상 구할 것이 없다는 사실을 자각하게 �다. 이 단계가 바로 가슴의 단계이다.
그래서 경허는 오언시로 「망우존인」을 이렇게 노래한다. 모든 존재는 “바람 앞의 등불이며 물거품인데/ 무슨 진리를 다시 구할 것인가/ 장안 거리에 서서 말하노니/ (물거품같은) 소리 앞에 발을 멈출 것 없네.//” 鏡虛, 「尋牛頌: 忘牛存人」, ꡔ鏡虛集ꡕ(ꡔ韓佛典ꡕ 제11책, 630중하 면).
경허의 이 시는 더이상 구해야 할 진리가 없는 경계를 노래하고 있다. 이미 소와 함께 하는 모든 진리를 사람이 주체적으로 거두어들인 단계이다. 모든 것이 내 안에 하나로 자리잡았고 온갖 경계가 내 안에 거두어 간직되었다.
그런 뒤 수행의 최후 목표가 되는 여덟 번째 단계인 「인우구망」에서 師遠의 그림은 동그라미 하나(一圓相)만을 그렸고 경허는 노래를 불렀다. 「심우송」의 「인우구망」에서 그는 “적광토에는 아직 이르지 못했는데/ 쭉방울만 하나 더 얻었네/ 이 도리가 별스런 데 있지 않아서/ 산은 높고 물은 저절로 흐르네.//” 鏡虛, 「尋牛頌: 人牛俱忘」, ꡔ鏡虛集ꡕ(ꡔ韓佛典ꡕ 제11책, 631하 면).
여기서는 주관과 객관의 분별을 다 버리니 산은 높고 물은 절로 흐르는 도리를 깨닫는다. 그는 산문의 「인우구망」에서 이렇게 적고 있다. “시리 소로 못다야 지다야 사바하. 버들꽃이라, 버들꽃이라. 오랫동안 수행해 여기에 이르렀는데, 도리어 어둡고 잘못된 길에 떨어진다면, 한 푼의 값어치도 없는 일이네. 아는가. 싸움터의 장군의 명령도, 천하를 호령하는 천자의 말씀이라도, 악! 또 한 번 악!” 鏡虛, 「尋牛頌: 人牛俱忘」, ꡔ鏡虛集ꡕ(ꡔ韓佛典ꡕ 제11책, 630상 면).
이 진언은 “좋도다! 세존이 설법할 때의 나뭇잎 지는 소리, 기쁘고 어질고 경사스러운 마음 다 이뤄지이다”를 뜻한다. 경허는 이러한 진언을 통해 무엇을 말하고자 하는가. 오랫동안의 수행조차도 이 단계에서는 이미 다 잊어버렸다. 소를 찾는 나도, 나에 의해 찾아지는 소도 다 사라져버렸다. 여기에 이르러 잘못된 길에 떨어진다면 한 푼의 값어치도 없다고 했다. 이것은 격외의 도리요 초탈의 경계를 보여주는 것이다. 하지만 이 것이 수행의 마지막이기는 해도 여기까지 온 목적은 분명해야 한다. 불교의 궁극은 ‘가슴’에 털옷을 입고 짐을 나르는 것으로 끝나지 않는다. 여기까지는 아직 가슴의 단계이자 함의 단계일 뿐이다. 결국 꼬리까지 끄는 ‘온몸’의 가풍이 다 이루어져야 ‘더 이상 할 일이 없는 것’이다.
4) 꼬리를 끄는(曳尾) 가풍
대승불교의 이상적 인간상인 유마거사는 “이 세상에 어리석음이 남아 있는 한 그리고 존재에 대한 집착이 남아있는 한 제 아픔은 앞으로도 계속될 것” ꡔ維摩詰所說經ꡕ 卷中, 「文殊師利問疾品」(ꡔ高麗藏ꡕ 제9책, 987하 면; ꡔ大正藏ꡕ 제14책, 544중 면).
이라고 말한다. 그런 뒤에 그는 “중생들의 아픔이 낫지 않는 한 보살의 아픔도 나을 리가 없으며 중생들의 아픔이 나을 때 보살의 아픔도 낫게 되는 것”이라 말하며 “보살의 아품은 바로 대자비가 그 원인”이라고 갈파한다.
이와 마찬가지로 尋牛圖는 삶의 단계인 아홉번째와 열번째 단계를 위해 첫 번째부터 여덟 번째의 길을 걸어 온 것이다. 그래서 경허 역시 유마거사의 보살행처럼 아홉번째의 「반본환원」과 「수수입전」을 통해 자신의 ‘曳尾禪’ 혹은 ‘尾塗禪’의 가풍을 복원하고 있다. 이는 ‘머리’와 ‘가슴’을 넘어선 ‘온몸’의 단계라 할 수 있다.
경허는 「반본환원」과 「입전수수」를 「異類中事」라는 제목으로 통섭하여 오언시로 노래하고 있다.
털을 입고도 뿔을 이었으니
등 앞에 말이 쓸쓸하다
조사는 이제 몸 밖으로
긴 세월은 시장거리로 달려가네 鏡虛, 「尋牛頌: 異類中事」, ꡔ鏡虛集ꡕ(ꡔ韓佛典ꡕ 제11책, 630하 면).
아울러 「반본환원」과 「수수입전」을 변별하여 산문으로 이렇게 적고 있다. 먼저 「반본환원」을 보자.
학의 다리가 비록 길지만 자르려 하면 근심이 되고, 오리의 다리는 짧지만 이르려 하면 걱정이 된다. 발우는 자루가 필요가 없고 조리는 새는 것이 마땅하다. 면주에는 부자요 병주에는 쇠로다. 만물이 저마다 본고장 것이 좋도다. 양식이 풍부하고 땔감 또한 많아서 네 이웃이 풍족하구나. 이것이 호남성 밑에 불을 부는 입술은 뾰쪽하고, 글을 읽는 혀는 날름댐이니 이것이 대우의 가풍이로다. 다시 한 구절 있으니 내일로 미루노라. 鏡虛, 「尋牛頌: 返本還源」, ꡔ鏡虛集ꡕ(ꡔ韓佛典ꡕ 제11책, 630상 면).
이 「반본환원」은 모든 사물이 있어야 할 곳에 있어야 하며, 본분을 지키는 것이 바로 진리임을 보여주는 것이다. 학의 다리는 길어야 하고 오래 다리는 짧아야 제격인 것이다. 주발이나 사발에 자루를 달 수는 없고 조리는 새어야만 쌀을 일 수 있는 것이다. 면주의 특산물은 附子가 최고이고, 병주의 특산물은 쇠가 최고이다. 모두가 있어야 할 본고장에 다 있다. 있어야 할 곳에 있어야 비로소 제일이 되는 것이다.
아홉번째 단계의 “본래 자리로 되돌아오다”는 말 그대로 중생을 구제하기 위해 대신심과 대분심과 대의심을 일으키며 출가했던 初心의 상태 그 자리로 되돌아오는 것이다. 그래서 여덟 번째 단계의 「인우구망」의 일원상을 진리가 가만히 있는 상태인 ‘전체즉진’(全體卽眞)이라고 일컬음과 달리 「반본환원」의 아홉 번째 단계는 ‘진리의 본체가 작용하는 ’전체즉용‘(全體卽用)의 경계라 하는 것이다.
경허는 심우도의 마지막인 열번째 단계인 「수수입전」을 다음과 같이 적고 있다.
목녀의 꿈과 석인의 노래도 한갓 감각작용의 그림자와 같네. 상이 없는 부처도 용납하지 못하는데 비로자나불의 정수리가 무에 그리 귀하리. 방초 언덕에 놀다가 갈대꽃 숲에서 잠을 자고, 포대를 메고 시장에서 교화하며, 요령을 흔들며 마을에 들어가는 것이 진실로 일을 마친 사람의 경계로다. 전날에 풀 속을 헤치고 소를 찾던 시절과 같은가 다른가. 모름지기 살가죽 밑에 피가 흐르는 것을 본 다음에야 비로소 깨달음을 얻으리니. 鏡虛, 「尋牛頌: 垂手入廛」, ꡔ鏡虛集ꡕ(ꡔ韓佛典ꡕ 제11책, 630중 면).
「수수입전」은 진리의 능동적인 작용을 말한다. 저자거리에 나아가 손을 드리우고 사람들을 교화하는 것이다. 「수수입전」은 「인우구망」과 「반본환원」을 체득한 뒤에 비로소 중생을 교화하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머리로 아는 앎의 단계와 가슴으로 하는 함의 단계를 넘어서서 온몸으로 사는 삶의 단계인 것이다. 경허의 삶의 궤적과 상응시켜 보면 이 점이 잘 드러난다.
그가 14세에 출가하여 34세에 깨달음을 얻은 이후로 67세까지 보여준 생평이 「심우」로부터 시작해서 「기우귀가」에 이르는 앎의 단계, 「망우존인」과 「인우구망」의 함의 단계, 그리고 「반본환원」과 「수수입전」의 삶의 단계로 드러나고 있다. 그가 삼수갑산으로 들어가 머리를 기르고 유관을 쓰고 학동들을 가르친 것 역시 「반본환원」과 「수수입전」을 온몸으로 체인하는 구체적 삶이라 할 수 있다.
그의 생평을 ‘尾塗禪’ 혹은 ‘曳尾禪’이라고 명명할 수 있는 것도 바로 이러한 그의 가풍 때문이다. 노장사상의 영향과 그의 생래적인 기질로부터 경허의 가풍이 비롯되었지만 신라 정중 무상으로부터 비롯되어 신라말의 도선, 고려말의 일연, 조선 초의 설장으로 이어지다 단절된 이류중행의 가풍을 복원하기 위하여 그는 온몸으로 살았던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붇다가 45년간 보여준 「반본환원」과 「입전수수」의 길과 일치하는 것이기도 했다.
그의 ‘행리’가 당대에 그만큼 낯설었던 것도 사실은 조선 초기의 설잠 이래 이류중행의 가풍의 단절이 깊었기 때문이라고 할 수 있다. 따라서 이류중행의 가풍은 십우도의 결론일 뿐만 아니라 불교정신으로 돌아갈 때 궁극적으로 귀결되는 보살행인 것이다. 경허는 아라한상과 보살상을 육척 장신의 한 몸둥어리 속에서 일치시키는 삶을 살다간 것이다. ‘법화’와 ‘행리’의 마찰과 윤활 속에서 그의 생평을 전관해야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4. 정리와 맺음
1) 미도선의 계승
경허의 가풍은 한 마디로 尾塗禪 혹은 曳尾禪이라 명명할 수 있다. ꡔ장자ꡕ 「秋水」편의 ‘曳尾於塗中’에서 비롯된 이 기호는 경허의 생평을 한 마디로 요약하고 있다. 경허 역시 「법제자 한암에게 주며」라는 글에서 자신의 생평을 ‘曳尾於塗中’으로 표현하고 있다. 그런데 이 尾塗의 가풍은 이미 신라 성덕왕의 넷째 아들이자 중국 사천을 무대로 정중종을 창종하여 새로운 가풍을 드날린 無相의 살림살이이기도 하다. 이 가풍은 중국의 馬祖를 비롯하여 남전, 백장 등에게로 이어졌으며, 신라의 도선, 고려의 일연, 조선의 설잠으로 계승되다가 단절되었다.
경허는 설잠 이래 단절된 이류중행의 가풍을 자신의 가풍 속에서 새롭게 재해석한다. 그 해석은 동학사 강사 시절 千讀이나 했던 ꡔ莊子ꡕ 및 ꡔ老子ꡕ의 영향 속에 자리하고 있다. 그런데 그의 이류중행의 가풍은 앎의 단계와 함의 단계를 거쳐 삶의 단계로 이어지고 있다. ‘照了’와 ‘專精’의 논리 방식에 의해 이루어진 그의 尾塗行은 뿔을 인 머리의 단계와 털옷을 입은 가슴의 단계 그리고 꼬리를 끌며 뭇삶들과 더불어 나누며 사는 온몸의 단계로 나눠볼 수 있다. 경허는 앎과 함을 넘어서서 그렇게 사는 모습을 보여주었다. 그가 그러한 모습을 지향해 간 근거는 노장사상의 영향으로부터 비롯된 점도 있지만 보다 근원적인 기반은 참다운 불교정신의 회복에 있었다.
그는 눈 뜬 자로서 고독했고 밀려오는 국망의 분위기에 절망했다. 그 때문에 그의 고독이 불러일으킨 자학의 몸부림을 현상적으로만 보면 ‘법화’와 ‘행리’가 마찰되기도 하지만 尾塗禪의 관점에서 보면 오히려 활발발하게 윤활되는 지평이 더 넓다. 그는 정중 무상으로부터 비롯되어 조선 초기의 설잠으로 이어지다 단절된 미도선의 가풍을 복원하고 계승하였으며 한국선은 그로부터 주체적인 살림살이의 외연을 더 넓히게 되었다.
조선 후기 불교 교단의 눈 먼 책상불교와 다리 저는 방석불교를 넘어서려고 온몸으로 살았던 경허를 조선불교사의 결론이자 대한불교사의 서론이라고 명명할 수 있는 근거도 여기에 있다.
2) 한국선의 독자성
한국불교의 독자성을 세우는 작업은 인도와 중국과 일본과 다른 우리 고유의 모습을 뽑아내는 것으로부터 시작해야 한다. 한국선 역시 마찬가지다. 정중 무상으로부터 비롯된 이류중행의 가풍은 불교의 근본 정신이기도 하다. 그것은 곧 자기만의 깨달음을 추구하는 아라한상을 넘어서서 그 깨달음을 모든 이들과 더불어 나누는 보살상을 한 몸둥어리 속에다 삼투시킨 모습이 일불승상이다.
한국선에는 아라한상(二乘)과 보살상(三乘)을 삼투시킨 일불승(一佛乘)의 전통이 있어왔다. 그것이 조선 초기 설잠 이래 단절되어 왔으나 조선말 대한 초기의 경허에 의해 복원되었다. 尾塗禪 혹은 曳尾禪의 가풍은 간화선 전통에서는 쉽게 찾아볼 수 없는 것이지만 한국불교의 전통 속에서는 그 뿌리가 변면히 이어져 왔다. 경허가 보인 被毛 戴角 曳尾의 가풍은 바로 이러한 가풍의 복원이며 아라한상과 보살상을 삼투시킨 일승의 가풍이요 최상승의 살림살이이다.
경허가 보인 살림살이는 앎의 단계와 함의 단계를 넘어서서 삶의 단계를 우리에게 환기시켜 주고 있다. 불교가 나아갈 바는 불교의 근본정신을 회복하는 것이다. 붇다는 “연기의 바다는 참으로 깊다. 감히 함부로 들어오지 못한다”고 역설했다. 온몸으로 살지 않고 머리로만 알게 되면 연기의 바다에서 익사할 수 있기 때문이다. 앎은 삶으로 이어질 때 참다운 앎이라 할 수 있고, 삶은 앎을 기반으로 할 때 더욱 지속적인 삶을 유지할 수 있기 때문이다.
경허의 생평은 앎을 기반으로 하여 삶의 현실로 나아간 것이며, 이것이 바로 미도선 혹은 예미선의 벼리라 할 수 있다. 그의 ‘법화’와 ‘행리’가 마찰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그의 육척 몸둥어리 속에서 윤활하고 있다. 그 근거는 그의 생평이 ‘照了’와 ‘專精’의 논리 방식에 의해 머리의 단계가 아니라 온몸의 단계에서 일관되고 이루어지고 있음에서 찾을 수 있다. 한국선의 독자성은 경허선의 지향처럼 아라한상과 보살상을 삼투시킨 새로운 수행자상의 제시이며, 그것은 곧 불교정신의 회복에 있는 것이라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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