德崇禪學 4-10 제10주제 발표; 인터넷 時代와 禪의 役割
이동한 (충북대학교)
Ⅰ. 인터넷의 시대상(時代相)
최근 마이크로 전자기술의 발달에 따라 정보 통신이 사회의 기간 회로망을 구축하고 지구촌을 하나의 정보망으로 묶은 인터넷 세계는 지금까지 인류가 발전시킨 정보화의 대표작이라 할 수 있다. 인터넷의 발달로 사회는 급속도로 변화되고 있으며 전자 매체에 의한 정보는 이제 여타의 정보 매체를 압도하여 현대 사회에서 절대적인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다. 현대 사회의 특징 중에 주된 것은 모든 인간 활동에 상업화가 강화되고 있다는 점인데 인터넷이라고 하는 정보화의 기수가 인간 활동의 상업화에 획기적인 기여를 하고있음은 의문의 여지가 없다. 우리 나라의 경우만 하더라도 인구의 6활이 넘는 사람들이 인터넷을 구사하고 있으며 앞으로는 전국민에게 보편화 될 전망이다.
정보화가 진전되면 정보량은 폭발적으로 증가하고 사회의 편의성은 더욱 높아진다. 누구든지 시공의 제약을 넘어서 필요한 정보를 적시에 입수할 수 있는 정보의 이용과 개방성은 만인에게 평등하게 부여된다. 하지만 정보가 만인에게 개방된다는 긍정성은 그것이 바로 부정적인 요인으로 작용될 소지가 있다. 인터넷이나 피씨 통신을 통해 저질 정보와 음란물이 거리낌없이 유통되고 있는 현실은 개방성이 가져다주는 부정적 효과이자 그 부산물의 하나이다. 또 정보는 속성상 계속적인 증폭성이 있고 인간의 착각과 바르지 못한 의도 때문에 허위와 오류정보의 발생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또 기존의 정보를 근거로 하여 그때그때 인간의 생각들이 개입되어 무수한 관념을 만들게되고 그 것이 도리어 인간을 속박하는 도구로 쓰여 인간은 인간이 만들어 놓은 정보의 피해자가 되기도 한다.
정보통신의 보편화에 따라 정보 도용을 비롯한 각종 전자범죄가 속출하고 있음은 주지의 사실이다. 전자범죄는 잘 노출이 되지 않는 특성이 있고 현대 사회의 물질주의적 분위기에 편승하여 날이 갈수록 늘어만 가는 추세에 있으나 이에 대처할 효과적인 방안은 이렇다 할 것이 없다.
특히 청소년층에서는 인터넷이나 피씨 통신에 매달리지 않으면 불안심리(不安心理)를 갖게되는 이른바 전자중독증(電子中毒症)에 걸린 사람들이 날로 증가하고 있다. 필요로 하는 정보 검색이나 자료 처리가 아닌 단순한 오락적인 기분으로 장시간 기계 앞에서 전자대화(電子對話)에 몰두하는 심리 상태는 마약이나 알코올에 버금가는 중독성이 있다. 이런 현상은 일종의 환경 변화에 대한 면역성의 결핍증이라고도 볼 수 있으며 이런 청소년들이 늘어만 가고 있는 추세이다 김창환, ꡔ몸과 마음의 생물학ꡕ, 서울 : 지성사, 1995, 284쪽. “사실 도시에는 적응능력이 영구히 멈춰버린 사람이 많다. 특히 오늘날 과보호로 기른 아이에 많다. 적응능력을 위축시키는 그런 조건하에서 생활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현대인은 지성과 도덕을 필요로 하며 그런 소양을 획득하는 데는 노력과 인내와 단련이 요구된다”.
. Michael Crichton은 ꡔThe lost worldꡕ를 쓰면서 ‘인터넷은 인류를 파멸시키는 흉기’라고 까지 말했다 이동한, 「정보화의 技術倫理와 교육의 역할」, ꡔ한국정보과학회지ꡕ, 제14권 제6호, 서울, 한국정보과학회, 1996, 88쪽.
. 인터넷에서 요구되는 행동 유형의 균질화가 인간의 사고와 의식을 장악하면 환경 변화에 적응력을 잃고 창의력이 결여되는 인간을 만들게 된다는 경고와 함께 악의적인 시스템 파괴범(속칭 바이러스)이 침범하면 범지구적으로 정보통신이 마비되어 전세계가 공포에 떨게 된다는 것을 우려하고 있는 것이다.
위와 같은 인터넷의 부정성(否定性)은 문명의 이기(利器) 그 자체에서 오는 것이라기 보다는 그것을 이용하는 마음이 항상 문제를 일으킨다고 보아야할 것이다. 그러므로 인터넷의 부정성이란 인터넷이란 기술 장비의 부정성이 아니라 마음의 부정성이라 할 것이다. 개인 한 사람 한 사람의 마음이 어떤 양상으로 움직이게 될 것인가는 예측하기 어렵다. 자기 자신도 모르는 일이다. 다만 확실한 것은 어떻게 움직이든 그것의 선택은 전적으로 각자의 몫이라는 사실이다. 어느 누구도 간섭하지 못하는 일이다. 그러므로 개인의 선택에 의존할 수밖에 없기 때문에 기술 교육에 있어서도 인간성 함양이라던가 사회적 임무에 대한 높은 인식의 문제를 교육 과정으로 다루어야 한다는 주장이 나오고 있다 오일석.박혁로, 「연구-교육 인력 양성을 위한 소프트웨어 교과과정」, ꡔ정보과학회지ꡕ, 제19권 제12호, 서울, 한국정보과학회, 2001, 36쪽.
.
인터넷을 기반으로 하는 정보화 시대에는 지식을 강조한다. 지식 제일주의다. 그러나 지식은 분별(分別)에서 비롯되며 분별은 자기 마음속에 나타나는 자의식(自意識)이다. 자의식이란 자기 마음속에 나타나는 상(相)으로써 그것은 객관적 사물이 아닌 간접적인 정보일 따름이다. 그런데 지식 제일주의에 치우쳐서 거기에 집착되면 지식을 사물 그 자체와 동일시하는 착각이 습성화되고 그런 습성이 쌓이고 쌓이면 삶은 진실과 점점 거리가 멀어지게 된다. 정보화를 극대화하면 할수록 그 거리는 더욱 커질 것이다.
그러므로 사물의 참다운 모습을 알기 위해서는 지식과 정보에서 손을 떼야 하는 것이다. 손을 뗀다고 하는 것은 지식과 정보를 버리라는 것이 아니라 지식과 정보가 사물 그 자체가 아니라는 사실을 인정하라는 말이다. 사물을 ‘내가 그렇게 보니 그것이 사물의 실상이다’라고 한다던가 그것이 진리라고 주장해서는 안되며 다만 ‘나는 그렇게 보았을 뿐이다’라고 한다던가 ‘나는 그렇게 들었을 뿐이다’라고만 해야한다는 것이다. 한 개인이 보고들은 것을 진리라고 주장해서는 안 된다는 말이다. 지식과 정보에서 손을 떼고 사물을 사물 그 자체로서 통찰하는 지혜를 개발해야만 참다운 삶인 것이다. 지식과 정보에서 손을 떼는 것이 선(禪) 선(禪)을 넓은 뜻으로 말하면 깨달음으로 가는 불교적 수행법의 총칭이라고 볼 수 있으며 협의로는 몇 가지 특수한 수행 방법에 한정하는 말로 쓸 수 있다. 본 논문에서는 많은 불교의 수행 법 중 비파샤나에 속하는 천태종의 지관법(止觀法)과 간화선으로 대표되는 선종의 선정(禪定) 수행법 만을 ‘선’이란 용어에 포함시킨다.
이다. 허망 분별을 그만두고 사물을 그 사물 자체에게 돌려주는 것이 선이다. 그러므로 선은 안다고 하는 것을 버리는 것이다. 인간의 인식작용을 일체 버리라는 것이 아니라 허망 분별을 버리고 사물 자체를 직관하는데 힘쓰라는 것이다. 즉 사물의 본질을 파악하라는 것인데 이는 ‘나’의 본질로 돌아갈 때만이 그것이 가능한 것이다. 그러므로 선에 대한 공부는 나 자신으로 돌아가는 일이다. 나의 잘못된 주관의 덮개를 버리고 순수한 나 자신으로 돌아가는 것이 선이다. 나의 본질로 돌아가면 물은 물 스스로 흐르고 꽃은 꽃 스스로 피는 그런 자연의 상태가 자기 모습을 그대로 나타내는 것이다. 내 마음이 조작하거나 나의 주관이 색칠한 그런 자연이 아니라 자연의 참다운 바로 그 모습이 눈앞에 나타나게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선은 자기의 잘 못된 주관에서 손을 떼는 데서부터 시작된다. 지금 내가 보는 사물은 나의 자의식이 색칠한 사물이고 사물 그 자체의 진상이 아니다. 그러므로 정보에서 손을 떼어 나의 자의식으로 색칠되지 않는 사물 그대로의 자연스러운 모습이 나타나는 삶이 바로 선인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선은 단순한 앎이 아니라 생활이다.
불교적 차원에서 보면 정보화라던가 지식이라고 하는 것은 무명(無明)을 키우는 원인으로 작용하기 십상이다. 왜냐하면 정보는 앎(인식) 활동에 따라 성립되며 이렇게 성립된 정보는 편계소집성(遍計所執性) 鶴潭法性再編, ꡔ白雲景閑禪師語錄ꡕ, 교불련하계수련대회 법성스님 강의록, 1998, 22쪽. “앎활동(六識)은 스스로 있는 것이 아니라 인식주체와 인식대상이 어울려 일어남으로 의타기성(依他起性)이다. 앎 활동을 일으키는 인식주체(六根)와 인식대상(六境)도 고립된 실체가 없으므로 서로 어울려 식을 연기하는데 그 주체와 대상인 식자체에 실체가 있다고 생각하는 것이 편계소집성(遍計所執性)이다. 편계소집성은 자체가 원래 없는 것이다. 연기된 식에 실체로서의 자기모습이 없고 식을 일으키는 주체와 대상에 실체가 없는 삶의 참모습이 바로 식의 원성실성(圓成實性)이다. 그러므로 편계소집성.의타기성.원성실성은 모두 독립된 자기 성품이 없으니(三無性) 의타기로서의 식 안에서 인식주체와 인식대상의 실체성을 뛰어넘으면 의타기로서의 생각과 모습을 없애지 않고 원성실성을 구현할 수 있으니 이것이 유식이 말하는 ‘식을 돌이켜 지혜를 얻는 해탈의길’(轉識得智 : 轉依)이다”.
이기 때문이다. 이런 편계소집성의 허망된 실체를 알지도 못하고 또 알려고도 하지 않는 상태에서 오직 물질적 풍요만을 위해 살아가는 풍조가 만연된 것이 오늘의 현실이다. 따라서 세계를 통찰하고 본질적 요소를 밝혀 올바른 삶의 모습을 갖기 위해서는 정신세계의 개발이 절대적으로 필요하며 이는 선을 통하여 이루어질 것으로 생각된다. 따라서 본 논에서는 인간의 실상과 선의 참모습을 살펴보고 지금과 같은 불안과 혼돈의 세태에 있어서 정신적인 방황을 치유하기 위해 선이 어떤 역할을 할 수 있을 가를 검토해 보기로 한다.
Ⅱ. 연기적(緣起的)인 인간의 실상(實相)과 선(禪)
인간이란 어떤 존재인가. 인간도 다른 존재와 마찬가지로 타자(他者)와의 관계를 떠나서는 존재할 수 없는 존재다. 타자와의 관계 속에서 그 존재성을 찾을 수밖에 없다는 것은 바로 연기적 존재라는 말이다 盛永宗興 編, ꡔ生命科學 と 禪ꡕ, 東京 : 紀伊國屋書店, 1994. 290쪽.
. 인간은 연기적 존재임으로 사람이라는 현상은 분명 있으나 그 자성(自性)은 ‘없다’라고 말 할 수밖에 없다. 인간과 타자와의 관계를 따져보면 크게 세 가지로 말 할 수 있다.
첫째로 자연과의 관계이다. 인간의 육체를 구성하고 있는 물질은 대부분 물이다. 인간은 생명을 유지하기 위해 계속적으로 대기를 호흡하며 자연계로부터 나오는 음식물을 먹어야한다. 우리들의 인식이라는 것도 오관을 통하여 나타나는 외부 세계와의 관계 속에서 이루어지는 것들이다. 이런 의미에 있어서 우리가 처해 있는 세계 전체의 내용이 바로 인간의 내용이 되는 것이다. 따라서 오늘날 자연환경을 파괴하는 행위가 곳곳에서 일어나는 것도 인간이 자연과의 관계를 망각하는데서 기인한 것이다.
두 번째로 한 인간은 다른 인간과의 관계 속에 있다는 사실이다. ‘사회적 동물’이라고 하는 말과 같이 인간은 다른 사람과 완전히 독립된 존재로 살 수 없다. 우리는 부모 조상이 있으며 이웃이 있다. 우리의 일상 생활에 필요한 것들은 대부분 다른 사람의 손을 거처서 전달된다. 말과 글을 비롯한 모든 문화 유산은 모두 ‘나’가 아닌 다른 사람의 손에 의해 이루어진 것들이며 ‘나’라는 존재는 그런 문화유산의 혜택을 받고 살아가고 있다. 따라서 개인적인 이기주의와 집단 이기주의 등은 모두 사람이 다른 사람과 독립되어 살아갈 수 있다는 착각에서 비롯된 것이다.
세 번째로 중요한 관계는 인간이 자기 자신과의 관계이다. 육체뿐만 아니라 정신적인 면에 있어서 현재의 나는 과거의 나와 미래의 나에게 관련되어 있다. 현대 과학의 생물학에서 인간은 육체적으로 유전 인자의 역사적 산물 김창환, ꡔ몸과 마음의 생물학ꡕ, 서울 : 지성사, 1995, 24쪽. “우리들의 게놈(하나의 배우자가 갖고 있는 모든 유전자 또는 염색체를 말한다)은 자연계에서 지금까지 일어난 얼마간의 사건들을 빠짐 없이 수록하고 있어 모든 행동에 대한 지침서와 같은 것이라는 생각을 갖게 되었고 나아가 생명의 탄생도 그런 맥락에서 생각하게 되었다. 다시 말해서 생명의 신비를 역사의 산물로 보자는 나의 주장이다. 생명의 탄생과 발전은 어디까지나 생명체 자체의 힘 즉 내재적 힘(생명력)에 의해서 40억 년이란 기나긴 기간에 걸쳐 이루어졌다고 믿어진다”.
이라는 것을 밝혔으며 불교의 유식론에서는 아뢰야식 太田久紀, ꡔ佛敎の深層心理ꡕ, 東京 : 有斐閣, 1983, 128쪽. “〈阿賴耶識〉のいろいろな性質, 「過去との關係」で〈阿賴耶識〉をみた場合, 過去を因とすると, 現在はその結果ということになりますので, 〈果相〉と呼び, 「現在や未來との關係」でみますと, それは, 現在や未來の原因となりますので, 〈因相〉と呼びます. 「過去との關係」でみた場合を, 〈異熟識〉とも呼び, 「未來との關係」でみた場合を, 〈種子識〉といいます”.
의 흐름이 인간 정신 작용의 뿌리라는 것을 통찰의 지혜로 설명하고 있다. 또 인간은 자기 자신을 비출 수 있는 거울과 같은 것을 가지고 있다. 말하자면 도덕이라던가 이상(理想)이라는 것이 거울과 같은 역할을 한다. 이런 거울에 자기 자신을 비추어 보고 자신을 반성하여 보다 더 가치 있는 삶이 되고자 하는 것이 바로 이간이다. 이런 반성적 의식이 있으므로 깨달음이라는 것도 있을 수 있다. 따라서 이런 자기 자신에 대한 사실을 잘 모르고 살아가는 것은 다름 아닌 무명(無明)이다.
이상에 살펴본 바와 같이 인간은 타자와 단절된 자기만의 생(生)을 타고난 것이 아니라는 것이 명백하다. 따라서 현재 이 순간의 ‘나’라고 하는 존재는 자연과의 완전한 분리(分離), 남과의 관계의 완전한 상실(喪失) 그리고 자기 자신과의 이탈(離脫)이 된다는 것은 있을 수 없다. 인간뿐만 아니라 이 우주내의 만물은 오직 연기적 관계 속에서만이 개체적인 현상으로 인정될 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연, 남 그리고 자기와의 관계를 잘 이해하지 못하고 살고 있는 사람이 대단히 많다. 왜 이런 생각들이 만연되고 있는가. 이것은 인간과 자연을 이원화(二元化)해서 대립적으로 보는데서 오는 결과이다. 자연과 인간을 대립적으로 보는 사고(思考)는 범부(凡夫)가 어리석기 때문이다. 또 근세의 서양 철학에서도 그 일단(一端)을 살펴 볼 수 있다 盛永宗興 編, ꡔ生命科學 と 禪ꡕ, 동경 : 紀伊國屋書店, 1994. 297쪽.
. 근세 서양 철학자 데카르트(1596~1650)는 자연 속에서의 인간적인 입장을 강조하여 “나는 생각한다. 그러므로 나는 존재한다”라고 하는 명제 Fritjof Capra, The Tao of Physics (Berkeley, California : Shambhala Publications,Inc. 1975), p23. “Descartes’ famous sentence ‘Cogito ergo sum’- ‘I think, therefor I exit’-has led Western man to equate his identity with his mind, instead of with his whole organism. As a consequence of the Cartesian division, most individuals are aware of themselves as isolated egos existing ‘inside’ their bodies”.
로써 자연과 인간이 대립적인 존재로 될 수 있다는 것을 선언 하였다. 이런 데카르트의 입장은 자연과 마음 즉, 물(物)과 심(心)의 이원론으로 발전하는 사상적 계기를 마련하여 자연과 독립되는 인간을 상정할 수 있다는 결론에까지 이르게 한 것이다. 이런 데카르트의 논리는 인간과 자연을 완전히 분리하게 만들어 놓고 나아가 인간이 자연을 지배할 수 있다는 인간의 오만성 마저 낳게된 것이다. 이에 따라 오늘날 전 세계적으로 문제되고 있는 환경 파괴는 당연한 논리적 결과가 된 것이며, 여기에 자연과 ‘나’를 완전히 분리하여 객관화하는 과학 기술의 발달이 불 난데 부채질하는 격으로 자연을 훼손하는데 한 못을 단단히 하고 있는 실정이다.
이런 상황에서 우리는 어떤 노력을 해야할 것인가. 즉, 불투명한 과학과 철학의 미래를 위해 우리는 어떤 노력을 해야할 것인가 하는 것이 문제다. 말하자면 과학과 철학이 자기 반성을 하는 노력이 범지구적으로 널리 퍼져야한다는 것이다. 이원론적인 사고와 논리가 인간을 자연과 분리했을 뿐만 아니라 인간과 인간 사이 마저 분리시킴으로서 갈등과 분쟁이 쉴새 없이 퍼지는 환경을 만들어 놓고 있는 현실을 바로 잡는데 우리는 어떤 노력을 해야할 것인가를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위에서 살펴 본 바와 같이 인간을 독립된 개체로 한계 짓는다는 그 자체가 불가능한 일이기에 불교는 이런 점에 있어서 일직부터 다음과 같은 기본 교리로서 인류에게 큰 깨우침을 주었다. 즉, 「일체의 현상은 연기적인 장(場)에서 일어나는 것이기에 영원히 변하지 않는 것은 없어 [제행무상(諸行無常)] 어떤 것도 다른 것과 독립된 고정적인 실체가 없다[제법무아(諸法無我)]. 그러므로 일체의 현상은 공(空)이다. 이것을 모르고 모든 것에 집착하면 괴로움이 생기[일체개고(一切皆苦)]지만 그것을 깨달으면 번뇌의 불꽃이 소멸되어[열반적정(涅槃寂靜)] 괴로움 따위는 없다 김종욱, 「인간의 본성은 무엇인가(2)」, ꡔ불교평론ꡕ, 제2권 제3호, 서울, 불교평론사, 2000, 367쪽.
」는 것이다. 그러기 때문에 불교적 윤리는 인격성(人格性)에만 머무를 수 없고 부단히 그 범위를 넓히고자함에 있는 것이니 이것이 바로 자비(慈悲)인 것이다. 불교는 전생명군(全生命群)을 생명 활동의 영역으로 하는 것이며 한 개인은 말할 것도 없고 인류 전체만으로도 그 한계를 짓지 아니한다는 말이다.
따라서 “한 인간이란 우리가 우주라고 부르는 전체의 일부로서, 시간과 공간적으로 제한된 일부이다. 인간은 스스로 자신이나, 자기 생각과 느낌을 다른 나머지와 분리된 것으로 경험하는데, 이 것은 일종의 의식의 착시(錯視) 현상 같은 것이다. 이 같은 착각은 우리에게는 일종의 감옥이며, 우리로 하여금 자기 개인의 욕구와 자기와 가장 가까운 몇 사람에 대한 애정으로만 제한시킨다 J.Goldstein 지음, 현음 스님.이금주 공역, ꡔ통찰의 체험ꡕ, 서울 : 도서출판 한길, 1998, 186쪽.
”고 하는 사실을 알아야한다.
그러므로 철학이든 과학 기술이든 할 것 없이 일단 원점으로 돌아가서 철저한 자기 반성을 하지 않으면 안될 것이다. 즉, 우리의 생각을 철저하게 원점으로 돌려서 거기서 새로이 출발해야할 것이다. 원점으로 돌아가면 모든 사물의 현상은 있으나 실체[자성(自性)]는 없다고 하는 이치를 깨달을 수 있으며 이런 이치가 공(空)이다. 공으로 돌아가야 한다. 공으로 돌아간다고 하는 것은 사물 그 자체로 돌아가자는 말이다. 공으로 돌아가야 사물의 실상을 볼 수 있는데 이것은 바로 선의 길이다. 선의 길에서는 육체가 자기라는 망념이 살아지고 전 우주적인 범위로 자기를 확대하게 되는 것이다.
선은 공으로 돌아가는 길이며 이 길은 무심(無心)이 되는 공부다. 무심은 마음 그 자체가 없다는 것이 아니고 번뇌 망상인 심소(心所 : 심리 작용)가 없다는 말이다. 그러므로 무심은 무심소(無心所)의 뜻이다. 무심소의 상태는 순수의식(순수경험) 미즈하라 �지 지음, 이호준 옮김, ꡔ과학시대의불교ꡕ, 서울 : 대원정사, 1988. 134쪽. “<대원경지>란 거울이 청정하여 한점 티도 없을 때, 모든 것이 있는 그대로 비친다. 그와 같이 우리의 마음에 추호의 흐림도 없고, 아견(我見).아욕(我欲).사심이 없으면 모든 것이 여실하게 비친다. 이 상태를 학문적으로는 <순수경험>.<직접경험 >, 혹은<직관>이라고 한다. 이때가 나(主觀)도 남(客觀)도 없는 자타일체미분(自他一體未分)의 경지인 것이다. 이것이 대원경지이며, 이 지(智)에 이르렀을 때, 선종에서는 <깨달았다>고 하는 것이다”.
의 상태임으로 그런 상태에서는 어떤 대상을 만나도 진실된 반응을 나타낼 수 있는 것이다. 철학적인 정의를 하면 무심이란 번뇌에 시달리고 있는 오염된 상대적인 마음[유심(有心)]을 부정하는 것이고 맑고 밝은 순수한 절대적인 인간의 본성을 긍정[무심(無心)]하는 말이다. 무심으로 사물을 보면 자기의 오염된 주관으로 보는 것이 아니라 순수의식으로 사물의 실상을 바로 비추어 볼 수 있는 것이므로 그 속에는 보통 생각과는 비교할 수 없는 더 넓고 원만한 지혜가 담겨있는 것이다.
Ⅲ. 선의 참 모습
1. 공(空)의 토양을 먼저 가꾸어야한다
불교를 올바르게 이해하거나 마음 공부인 선 수행의 바른 길로 들어서기 위해서는 기본적으로 지적차원(知的次元)에서 만이라도 공에 대한 이해가 선행되어야한다. 공은 위에서 말한 바와 같이 연기(緣起)에서 출발하여 제행무상 제법무아라고 하는 불교 교리의 가장 기본 개념에서 도출(導出)된 것이며 깨달음으로 가는 수행의 첫째 관문이기 때문이다. 일체의 현존[현상적 존재(現象的存在) : 물질적 존재뿐만 아니라 정신적인 마음의 작용 모두를 포함한 것]은 연기로 형성된 것이기 때문에 자성(自性)이 없다. 자성이 없는 사물에 존재성을 부여할 수는 없다. 그러나 현상은 있으므로 자성이 없다는 측면에서의 무(無)와 현상이 있다는 측면에서의 유(有)를 다 포섭하여 나타내는 것이 바로 공이다. 따라서 공이라는 것은 일체의 실체성(實體性)을 부정하고 일체의 현상이 있는 모습 그대로를 긍정하는 말이다. 모든 현존은 상호 관계로 이루어지며 항상 변화한다. 따라서 일체의 현존은 현상적으로는 있지만 본질적으로 주체적이고 독자적인 성질을 갖는 자성은 없다. 따라서 유(有)는 유유(唯有)로써 있어야할 이유가 있어 있는 것도 아니고 본질이 있어 있는 것도 아닌 말하자면 ‘그저 있음’ 이다. 이와 같이 현상적으로는 존재하나 본질로는 존재하지 않는 것을 ‘비여 있음’이라 하며 한자로 空이라 표현한다. 즉, 현상적으로는 유이고 본질적으로는 무를 일러 공이라 하는 것이다.
‘空’자(字)를 쓰지 않고 공을 설한 법문은 금강경(金剛經)이다. 짧은 내용으로 공을 체계 있게 설한 경전은 반야심경이다. 반야심경에서 공이 제일 먼저 나온 부분은 범어본에서는 “pañca skandhāh taṃ śca svabhāva-śūnyān paśyati sma”로 되어 있으며 이것은 「오온(五蘊) 그것 또한 자성(自性)을 공(空)으로 보았다」인데 현장은 「오온개공 도일체고액(五蘊皆空 度一切苦厄)」이라 번역했고 일반적으로 우리 나라에서는 현장역이 보편화 되어 있다. 이어 공에 대한 설명을 다음의 세단 계로 체계화 하여 설명하고 있다 中村元, ꡔ般若心經ꡕ, 岩波文庫(33-303-1), 東京 : 岩波書店, 1976. 12쪽.
.
제일 먼저 물질적 현상에는 실체가 없다는 것을 사실로서 기술한다. 이 부분은 범어본에서 “rūpaṃ śūnyatā śūnyatāiva rūpaṃ”이고 당 지혜륜(唐 智慧輪)의 번역본에서는 「색공 공성현색(色空 空性見色)」으로 되어 있으나 李靑潭說法, ꡔ般若心經ꡕ, 서울 : 普成文化社, 1978, 80쪽.
현재 우리가 읽고 있는 현장(玄奘) 번역의 소품반야심경에서는 이 부분이 빠져 있다. 이 것은 「물질적 현상에는 고정 불변한 자성(自性)이 없으며, 자성 없음이 물리적 현상으로 나타난다」의 뜻이다. 이것은 깊은 지혜로 관찰하건대 물질적 현상에는 자성이 없다는 것을 밝힌 것이다. 두 번째로 공의 개념을 철학적 사상으로 정리 한다. 이 부분의 범어 원문은 “rūpānna pṛthak śūnyatā śūnyatāyā na pṛthag rūpaṃ”이며 현장역에는 「색불이공 공불이색(色不異空 空不異色)」으로 되어있다. 물질적 현상은 공과 다르지 않으며, 공은 물질적 현상과 다르지 않다는 논리이다. 즉, 물질적 현상이 자성이 없다는 측면에서는 공이고 공이란 것도 현상적 측면에서는 물질적 존재라는 말이다. 세 번째로 수행으로 포착된 깨달음의 세계를 직설(直說)한다. 즉 현상과 공을 하나로 체득한다. 이 부분의 범어 원문은 “ya drūpaṃ sā śūnyatā yā śūnyatā ta drūpaṃ”이며 현장역은 「색즉시공 공즉시색(色卽是空 空卽是色)」으로 되어 있다. 물질적 현상에서 바로 공을 보며, 공에서 바로 물질적 현상을 본다는 깨달음이다. 이것을 ‘즉(卽)’자에 의미를 두어 「색은 공을 설립시키고 공은 색을 성립시킨다」라고 할 수 있다. 여기서 첫 번째 나온 공과 세 번째 나온 공의 언어적 의미는 결국 같지만, 그러나 그 내면적 함의에는 현격한 차이가 있다. 첫 번째 것은 지식(지혜)으로서의 공을 설명한 것이고, 세 번째 것은 직접 깨달음을 통한 공의 체험적 통찰이다. 이것은 물질적 현상에 대해 자성의 존재성을 부정하고 연기로 나타난 것에 대한 긍정을 통합한 체험인 것이며 두뇌(頭腦)로 인식한 것을 몸으로 직접 체험하여 자기화(自己化)에 성공했음을 의미한 것이다.
반야심경에서는 색에 이어 수(受).상(想).행(行).식(識)의 정신적 요소에 대해서도 물질적 현상과 같이 긍정과 부정을 쓴 공의 논리로 설명하고 있다. 그런데 부정은 긍정에 대립하는 한에 있어서 부정이다. 일체가 나머지 없이 몽땅 부정되고 긍정은 아무 것도 없다는 것에서는 부정은 부정의 의미를 상실한다. 이것이 공에 있어서의 긍정이다. 공에 있어서의 긍정은 부정. 긍정의 대립을 벗어난 긍정으로서 절대적 긍정의 의미를 가지는 것이며 이것을 중도(中道)라고도 말하는 것이다 矢島羊吉, ꡔ空の哲學ꡕ, 東京 : 日本放送出版協會, 1996, 210쪽.
. 그러므로 공의 입장에 선다면 어떤 특수하고 별난 주장을 가지지 않는 것이고, 그것은 일체의 주장을 있는 그대로 긍정하는 것으로 귀결된다. 이런 관점에서는 공은 불교마저 넘어서는 것이라 할 것이다. 금강경 속에는 이런 뜻이 곳곳에 나와 있다 ꡔ金剛經ꡕ(正信稀有分 第六). “是故 不應取法 不應取非法 以是義故 如來常說 汝等比丘 知我說法 如筏喩者 法尙應捨 何况非法”; (依法出生分 第八) “所謂佛法者卽非佛法”.
. 따라서 불교의 교설을 고집하는 한 공은 아니다. 이런 의미로 볼 때 불교의 역사 중에 불교라는 그것까지 넘어서고자 하는 운동이 있었다고 할 것이다 矢島羊吉, ꡔ空の哲學ꡕ, 東京 : 日本放送出版協會, 1996, 214쪽.
.
연기는 자성을 거부하는 동시에 잠정적이나마 자성을 요구하는 복잡한 모순적 관계를 나타내고 있다 앞의 책 193쪽.
. 그래서 공이란 개념이 요구되는 것이다. 한편 공이나 열반은 사유(思惟)의 문제로서 생각할 때는 반성적 철학적 사유의 모든 모습의 정지, 자기지양(自己止揚)을 의미한다. 공은 사유의 내용에 대해 언급하는 것이고 열반은 사유의 움직임에 대해 언급한 것이다. 공이란 있기 때문에 있는 것이며 필연적인 우연적인 것도 아닌 그저 있기 때문에 있는 공이다. 선이 바로 사유의 모든 모습을 정지하면서도 한편 사유의 모든 모습을 그대로 긍정하는 것이기 때문에 공사상은 바로 선 수행의 토양이 되는 것이다.
대승불교에서 열반과 해탈은 이 세상을 부정하는 의미가 아니라 이 세상을 긍정하는 뜻을 가지고 있다. 따라서 번뇌와 집착을 부정한 것으로의 열반이 단순한 공무(空無)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도리어 이 세상을 긍정하는 의미를 가지고 있다. 따라서 공의 토양에서 자라나는 선은 일상에서 도피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일상에로의 적극적인 참여를 뜻한다 Fritjof Capra, The Tao of Physics (Berkeley, California : Shambhala Publications, Inc. 1975), p123, “Enlightenment in Zen does not mean withdrawals from the world but means, on the contrary, active participation in everyday affairs”.
. 그래서 공은 철저하게 부정적 의미를 갖는 동시에 철저하게 긍정의 의미를 가지고 있다. 연기 관계와 연기하는 일체를 부정되고 공이라는 것에 의해 다시 무조건적으로 긍정되는 것이다 矢島羊吉, ꡔ空の哲學ꡕ, 東京 : 日本放送出版協會, 1996, 34쪽.
. 즉, 공이란 연기되는 현상의 자성을 부정하고 현상 그 자체는 긍정하는 것이다.
위에서 검토한 바와 같이 공은 연기 현상의 자성을 철저하게 부정하는 동시에 실제로 나타난 연기 현상 그 자체를 철저하게 그대로 긍정하는 것이기 때문에 공을 단순히 무(無)로 보는 것은 잘못된 것이다. 그래서 육조는 다음과 같이 주의를 주고 있다 “선지식이여 내가 ‘공하다’는 이 말을 듣고 공에 집착해서는 않된다. 무엇보다도 공에 걸리지 말아야한다. 만약 마음을 비우고 고요히 앉아 있기만 하면 바로 무기공에 떨어질 것이다 ꡔ六祖壇經ꡕ(德異本 悟法傳衣 第一 ). “善知識 莫聞吾說空 便卽着空 第一莫着空 若空心靜坐 卽着無記空”.
”. 무기공이란 어떤 심리상태도 일어나지 않음을 말한다. 예를 들면 꿈 없이 깊은 잠에 빠지는 것과 같는 것이다. 그러나 숙면을 취한다고해서 수행하는 것은 아니다.
공이란 공에 부쳐진 말이 아니다. 현상을 두고 하는 말이다. 현상이 없으면 공이란 말도 실효(實效)가 없다. 그러므로 공은 공 홀로 있는 그런 공은 없다. 이것에 대해 주의해야 한다고 하는 것이 육조의 뜻이다. 그러므로 공을 무라든가 허공과 같이 생각하는 것은 매우 잘못된 견해다. 가끔 진공묘유(眞空妙有)라는 말을 ‘허공과 같이 없는 것에서 무엇이 신묘하게도 생겨난다‘라는 뜻으로 해석하는 경우를 종종 목격하는 데 이것은 올바른 해석은 아닐 것이다. 진공묘유에서 진공은 물리학에서 말하는 물리적 공간을 뜻하는 것이 아니라 말하자면 ‘연기의 장(場)’으로 이해 해야 할 것이며 묘유는 연기의 장에서 일어나고 있는 작용의 현상화를 의미한다고 보아야할 것이다. 연기의 장에서는 모든 현상이 간단없는 생멸(生滅) 현상을 일으키기 때문에 공의 차원에서 보면 세상 “만사가 모두 꿈과 허깨비 같고 이슬과 번갯불과 같은 것이다” ꡔ金剛經ꡕ(應化非眞分 第三十二). “一切有爲法 如夢幻泡影 如露亦如電 應作如是觀“.
. 여기서 꿈 같다고 한 것은 허무를 뜻하는 것이 아니고 그런 일이 전무후무(前無後無)하고 유일무이(唯一無二)하다는 말이다. 내 앞에 내가 없었든 것과 같이 내 뒤에 내가 없으며 나는 이 ‘나’로서 하나이며 둘도 될 수 없기에 인생은 꿈과 같은 것이다. 그러므로 불교의 교리는 우리의 순간 순간의 삶이 전무후무하고 유일무이하기 때문에 우리의 일상적인 삶을 정성을 다해 소중하게 여기고 헛되이 시간을 보내지 말라는 그런 고귀한 교훈인 것이다.
선은 사물의 실상을 체험하는 것이기 때문에 공의 토양에서 자라나는 것이다. 그러므로 선 수행은 객관적 대상으로부터 도피하지 않고 공 사상을 기반으로 하여 무념 무상의 상태에서 그 대상 속으로 들어가서 주관이 객관적 대상과 합일됨으로서 이원적 사고에서 오는 괴로움을 극복할 수 있는 것이다. 예를 들면 누가 동산양개선사(洞山良价禪師, 807~869)에게 “어찌해야 추위와 더위가 없는 것입니까?”라고 했을 때 “추울 때는 당신을 얼려 죽이고 뜨거울 때는 당신을 쪄 죽인다 ꡔ碧巖錄ꡕ(第四十三則, 洞山無寒暑), “擧 僧問洞山 寒暑到來 如何廻避 山云 何不向無寒暑處去 僧云 如何是無寒暑處 山云 寒時寒殺闍黎 熱時熱殺闍黎”.
”고 말한 것과 같이 선은 현실을 도피해서 닦는 공부가 아니라 오히려 현실 속에 적극적으로 들어가서 닦는 공부인 것이므로 현대인의 복잡한 삶이 오히려 선의 좋은 재료가 될 수 있는 것이다. 따라서 선은 현실 도피나 내세(來世)를 위해 닦는 것이 아니라 일상 생활에 바로 적용되어야 하며 그 결과는 지금 바로 여기에 나타나야 하는 것이다.
2. 선(禪)은 생활 속에서 꽃 핀다
육조 혜능(惠能, 638-713)은 불법은 우리 일상생활 속에 있으므로 우리의 일상 생활을 떠나서 깨침을 얻을 수 없다고 하였다. “일상 생활을 떠나서 보리를 찾으려하는 것은 마치 토끼 뿔을 구하려는 것과 다를 바 없다 ꡔ六祖壇經ꡕ (ꡔ德異本ꡕ 悟法傳衣 第一). “佛法在世間 不離世間覺 離世覓菩提 恰如求兎角”.
” 고 하면서 생활과 선(禪)을 완전히 일시키고 융합시켜 중국 특유의 선 맥을 일으켰다.
중국에서 인도 불교를 중국화 하는 과정에서 경전 번역은 필요했을 것이고 불교는 자연적으로 언어 문자에 치중된 교학 중심의 불교에 편중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이러다 보니 불교 신앙은 깨침이라고 하는 불교 본래의 모습과는 점점 거리가 멀어지는 경향이 있게되었을 것이다. 이에 대한 반성으로 육조와 그 후계자들은 깨침이라고 하는 불교 본래의 모습으로 돌아가자고 하는 일종의 새로운 불교운동으로서 이른바 선불교(禪佛敎)라는 전통을 세웠고 후대의 조사들이 인도의 선과 구별하기 위해 인도의 선을 여래선(如來禪)이라 하고 육조 이후의 새로운 선을 조사선(祖師禪)이라 한 것이다.
그는 “어리석은 사람이나 지혜로운 사람이나 불성에는 본래 차별이 없고 다만 미혹함과 깨침이 다르기 때문에 어리석음과 지혜로움이 있게 되는 것 ꡔ六祖壇經ꡕ (ꡔ德異本ꡕ 悟法傳衣 第一). “當知 愚人智人 佛性本無差別 只緣迷悟不同 所以有愚有智”.
”이라며 깨달음은 우리의 생활 속에 있으며 반드시 입산 수도해만 된다는 것은 아니라 하였다. 우리의 일상 생활을 떠나서 깨침은 없는 것이며 또 일상 생활을 떠나서 깨침이 있다한들 아무 소용이 없다는 것이다. 따라서 선을 한다고 하여 이 세상의 겉모습이 달라지는 것은 아무 것도 없다. 선이란 사물의 진상을 올바로 보는 것 崔玄覺 譯註, ꡔ禪 의 길ꡕ, 서울 : 寶蓮閣, 1986, 30쪽.
으로 부터 시작하기 때문에 육조는 “마음이 평등하면 계율을 지키려고 애쓸 필요가 없으며 행동이 올바르다면 참선을 닦아 무엇하겠나 ꡔ六祖壇經ꡕ (ꡔ德異本ꡕ 釋功德淨土 第二). “心平何勞持戒 行直何用修禪”.
” 그리고 “수행은 집에 있어도 할 수 있으며 반드시 절에 있어야 된다는 것은 아니다 위의 책 (釋功德淨土 第二). “若欲修行 在家亦得 不由在寺”.
”라고 하면서 불도나 선이 만인의 보편적 삶 속에 있음을 일깨워 주고 있다. 보통 도를 닦기 위해 세간을 떠난다는 말을 많이 하는데 세간을 떠난다는 것은 현실적인 생활 공간을 떠나는 것이 아니라 바른 소견을 가지면 그것이 속세를 떠난 것이며 삿된 생각에 묶여 있으면 그것이 바로 세간이라는 것이다. 따라서 삿됨과 올바름을 모두 다 던져 버리면 이야말로 보리의 성품이 완전하다고 할 것이다 위의 책 (悟法傳衣 第一). “ 正見名出世 邪見是世間 邪正盡打却 菩提性完然”.
.
깨침이란 오직 안으로 구하는 것이다. 즉 자기 마음에서 얻는 것이다. 그러므로 천당이라는 것도 바로 자기 앞에 있는 것이지 어디 머나먼 우주공간에 물리적으로 존재하는 천체를 가리키는 말은 아니다. 깨침이란 단지 자기 마음을 행해 찾는 것이므로 수고롭게 외부에서 구할 일이 아니다. 설법을 듣고 그대로만 실천에 옮긴다면 천당은 바로 우리의 눈앞에 있다는 것을 명심해야할 것 위의 책 (釋功德淨土 第二). “菩提只向心覓 何勞向外求玄 聽說依此修行 天堂只在目前”.
이다.
육조는 좌선을 “선지식이여 무엇을 좌선이라 하는가. 이 법문 중에서 말하는 좌선이란 이러하다. 장애가 없고 막힘이 없어서 외부적으로 일체의 객관적 사물의 선악 경계에 대하여 마음이 일어나지 않음을 ‘좌’라 한다. 내부적으로 자성이 동요 없음을 보는 것을 ‘선’이라 한다 위의 책 (敎授坐禪 第四). “善知識 何名坐禪 此法門中 無障無礙 外於一切善惡境界 心念不起 名爲坐 內見自性不動 名爲禪”.
”라고 정의하고 있으며, 선정을 “선지식이여 무엇을 선정이라 하는가 외부적으로 모습을 떠나는 것이 선이며 내부적으로 어지럽지 않음이 정이다. 외적으로 모습에 집착하면 내부적으로 마음이 어지럽게 된다. 외부적으로 만약 모습을 떠나면 내부적으로 마음이 어지럽지 않는 것이다. 본래의 성품이 그 스스로 깨끗하고 그 스스로 고요한 것이며 다만 객관적이라 하는 경계에 부딪쳐 생각을 일으키기 때문에 자연히 마음이 어지럽게 된다. 만약 모든 객관이라 할 수 있는 경계를 상대하더라도 마음이 어지럽지 않으면 이것이 진정한 ‘정’이라 할 수 있다. 선지식이여 외부적으로 모습을 떠난 것이 ‘선(禪)’이고 안으로 어지럽지 않음이 ‘정(定)’이다. 외부적으로 ‘선’이고 내부적으로 ‘정’인 것이 ‘선정(禪定)’이다 위의 책 (敎授坐禪 第四). “善知識 何名禪定 外離相爲禪 內不亂爲定 外若着相 內心卽亂 外若離相 內心不亂 本性自淨自定 只爲境界思境 卽亂 若見諸境心不亂者 是眞定也 善知識 外離相卽禪 內不亂卽定 外禪內定 是爲禪定”.
”라고 정의하고 있다.
그리고 일상적인 생활 속에서 선을 닦는 원칙을, “만약 언제 어디서나 속세의 모습에 머물지 않고 그런 모습 가운데 있으면서도 미워하거나 사랑하는 감정을 내지 않고 또한 취하고 버린다는 욕심도 없으며 이익과 성취와 파괴되는 등의 일을 생각하지 않고 편안하고 한가롭게 고요하여 텅 비고 담박하면 이를 ‘일상삼매(一相三昧)’라 한다. 만약 언제 어디서나 행주좌와(行住坐臥)의 일상 생활에서 순수하게 한결같이 곧은 마음이 되면 자기가 있는 좁은 도량을 벗어나지 않아도 진실로 정토를 이룬다. 이를 ‘일행삼매’라고 한다 위의 책 (咐囑流通 第十). “若於一切處 而不住相 於彼相中 不生憎愛 亦無取捨 不念利益成壞等事 安閑이靜 虛融澹泊 此名一相三昧 若於一切行住坐臥 純一直心 不動道場 眞成淨土 此名一行三昧”.
”. 여기서 속세의 모습에 머물지 않는다는 것은 속세 속에 있지만 속세의 온갖 것에 집착함이 없는 마음 상태를 말한다. 일상(一相)과 일행(一行)의 두 가지 삼매는 완벽한 정신집중(精神執中) 상태를 말한다. 마치 고양이가 쥐를 잡을 때 한 눈을 팔지 않고 쥐구멍을 뚫어지게 주시(注視)하는 것과 같은 정신집중 상태가 일상삼매이고, 닭이 병아리를 까기 위해 하루하루 한결 같이 알을 품고 있는 것과 같은 정신집중 상태가 일행삼매이다. 따라서 선은 어디까지나 마음가짐이라던가 순수한 심리 상태를 말하는 것이고 외형적이고 형식적인 삶의 모습을 뜻하는 것은 아니다.
육조는 “내 마음에 부처가 있다. 자기의 부처야말로 참 부처다. 나에게 스스로 부처가 없다면 또 어디에 가서 참 부처를 구할 수 있을 것인가. 너희들은 너희들 마음이 바로 부처이니 다시는 의심치 말라. 외적으로 어떤 존재도 세울 것이 없다. 다 본래의 마음이 온갖 존재를 성립시키는 것이다 위의 책 (咐囑流通 第十). “我心自有佛 自佛是眞佛 自若無佛心 何處 求眞佛 汝等 自心是佛 更莫狐疑 外無一物而能建立 皆是本心 生萬法”.
”라고 하였다. 내 마음에 부처가 있다는 것은 나는 태어날 때부터 불종(佛種)을 가지고 태어났기 때문에 내가 어느 때 어떤 생활 공간에 있더라도 불종은 변함이 없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불종을 가꾸기 위한 선은 특별한 장소가 없으며 특별한 시간이 따로 있는 것이 아니다. 즉, 모든 생활공간과 시간이 선이 자리할 수 있는 시공인 것이다. 물긷고 밥하는 것과 같은 일상 생활이 모두가 선기 虛雲 著, 朴敬勖 譯, ꡔ參禪要旨ꡕ, 서울 : 東國譯經院, 1981, 78쪽. “所謂運水搬柴 無非妙道 鋤田種地 總是禪機”.
임으로 꼭 앉아야만 참선을 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육조는 열반에 임박하여 제자들에게 공부의 요체를 분명히 알렸다. “너희들은 제발 고요함을 특별히 관한다거나 너희들의 그 마음을 애써 비운다고 생가하지 말라. 이 마음이 본래 고요한 것이므로 따로 가지고 버릴 것이 없느니라. 각자 바르게 노력하고 인연 따라 잘 실천하라 ꡔ六祖壇經ꡕ( ꡔ德異本ꡕ咐囑流通 第十). “汝等 愼勿觀靜 及空其心 此心本靜 無可取捨 各自努力 隨緣好去”.
”고 하였다. 이 말은 중생이 본래 부처임을 확실하게 믿고 수행하라는 것이며, 중생이 본래 부처임으로 개으르게 수행하지 않아도 자연히 부처가 된다는 의미는 아니다. 오히려 거듭 수행에 힘쓰라는 경계의 말이라고 보아야한다.
위에서 검토한 바와 같이 육조는 어디까지나 모든 중생은 다 같이 불성이 존재하는 일체평등사상에 입각하여 누구든지 자기가 있는 바로 그 장소가 불당이고 도량임을 역설했으며 생활이 바로 선이라는 것을 몸소 실천하고 후세의 귀감으로 남겼다. 일체의 중생이 평등하다는 것은 현대의 생물학에서도 물질적 차원에서 증명해주고 있는 것 김창환, ꡔ몸과 마음의 생물학ꡕ, 서울 : 지성사, 1995, 25쪽. “유전물질의 구조가 밝혀지면서 그것이 모든 생물종에서 동일하다는 것이 확인되었고 이 사실로 지구상의 생물은 하나로 이어져 있다는 것이 움직일 수 없는 사실로 되었다”.
임으로 선이 특수 계통의 사람들이 닦는 공부가 아니라 만인공통의 공부라는 것이며 중생과 깨달은 부처와의 차별도 없는 것이다 虛雲 著, 朴敬勖 譯, ꡔ參禪要旨ꡕ, 서울 : 東國譯經院, 1981. 84쪽. “心卽是佛 佛卽是覺 此一覺性 生佛平等 無有差別”.
.
마조 도일(馬祖道一, 709~788)이나 백장 회해(百丈懷海, 720~814) 같은 육조의 탁월한 후계자들도 생활과 선을 일치시키고 있다. 그들은 선이 일상에 있음을 강조하였으며, 일상생활에서 깨여 있음을 선이라고 말한다. 일상 생활이 깨침의 길인 동시에 깨침 자체인 것 Fritjof Capra, The Tao of Physics (Berkeley, California : Shambhala Publications, Inc. 1975), p123. “The Chinese masters always stressed that Ch’an, or Zen, is our daily experience, the ‘everyday mind’ as Ma-tsu proclaimed. Their emphasis was on awakening in the midst of everyday affairs and they made it clear that they saw everyday life not only as the way to enlightenment, but as enlightenment itself”.
라고 그들은 말한다. 따라서 선은 일상으로서, 배고프면 밥 먹고 피로하면 쉰다. 이것이 선이다. 즉, 평상적 생활이 선이며 또 극히 자연스러움이 선이라는 뜻이다. 그러나 자연스러움이란 사실 매우 어려운 것이다. 많은 노력과 훈련을 통해 자연스러움은 얻어진다. 그것이 정신적인 위업이 되는 것이다 위의 책, p124.. “The perfection of Zen is thus to live one’s everyday life naturally and spontaneously. When Po-chang was asked to define Zen, he said, ‘When hungry eat, when tired sleep’. Although this sounds simple and obvious, like so much in Zen, it is in fact quite a difficult task. To regain the naturalness of our original nature requires long training and constitutes a great spiritual achievement”.
.
3. 지(止)와 관(觀)의 조화로 닦는 선(禪) 이 부분은 《智顗大師 述, 金無得 譯註, ꡔ止觀坐禪法ꡕ, 서울 : 經書院, 1982.》의 책을 부분적으로 인용 또는 요약한 것이다.
1) 선의 선결 조건
예로부터 선 수행에는 선결 조건이 있다. 여기서는 천태지이(天台智顗, 538~597)의 ꡔ천태소지관(天台小止觀法)ꡕ에 나와 있는 선을 위한 조건 중 중요한 것을 현대인의 생활 여건에 비추어 검토해 보기로 한다.
선을 위해서는 연(緣)을 갖추어야 한다. 무질서하고 불규칙적인 생활에서 정돈되고 가급적이면 규칙적인 생활 모습을 갖추는 것이 연이다. 그 중 계(戒)를 지키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 智顗大師 述, 金無得 譯註, ꡔ止觀坐禪法ꡕ, 서울 : 經書院, 1982, 33쪽. “夫欲修止觀 必須持戒淸淨”.
. 계는 외부적으로 주어지는 규제가 아니라 자발적인 자기의 생활 규율을 말한다. 전문적인 수도자(修道者)는 지켜야할 계가 많지만 일반 재가자는 적어도 오계(五戒)정도는 지켜야한다. 계를 지키지 않고 참선한다는 것은 동쪽으로 가고자 하면서 서쪽으로 걸어가는 것과 다를 바 없다. 왜냐하면 무질서한 심신(心身)의 관리로는 선력(禪力)이 붙지 않기 때문이다. 물론 현대인으로 살아가는 한 고전적 의미에 있어서 오계를 백퍼센트 완벽하게 지킬 수는 없다고 하겠으나 환경을 파괴할 정도의 살상, 과도한 음주, 문란한 성행위 그리고 거짓된 언행 등은 문명인으로서도 삼가야할 일이다. 따라서 오계 정도를 생각할 때 계를 지킨다는 것이 특정 종교인으로서 또는 수도인으로서 당연히 지켜야할 의무이기에 앞서 복잡한 시스템 속에서 살아가는 문명 사회의 일원으로서 기본적이고 필수적인 생활 윤리라고 말 할 수 있다.
계를 쉽게 말한다면 좋은 생활 습관을 지키는 일이라고 할 것이다.
다음으로 탐욕을 물리쳐야 선에 입문할 수 있다. 탐욕이란 인간의 눈, 귀, 코, 혀 및 몸의 다섯 가지 감각기관이 가져오는 인간적 욕망이다. 이에는 이성(異性)에 대한 갈구와 신체상의 보호 및 미식(美食)을 쫓아가는 욕구가 주도적이다. 현대인은 오히려 이런 욕망을 추구하고 그런 욕망 속에 살아가는 것을 행복으로 여기지만, 이런 것은 선을 수행하는데 있어서는 독사를 밟은 것과 같고 꿈이나 다름 없으며 순간적인 행복에 지나지 않으므로 물리쳐야 한다고 천태 소지관에서는 말한다 위의 책, 46쪽. “五欲害人 如踐毒蛇 五欲無實 如夢所得 五欲不久 亦如假借須臾”.
. 그러나 여기서 ‘물리친다’는 것은 그런 욕망을 절대적인 것으로 탐닉하고 집착하거나 때로 필요 이상의 욕망을 소유하지 말도록 하라는 말이며, 현대 생활인으로서 기본적인 욕망을 버리라는 것은 아니다. 탐욕이라는 것은 일반적으로 그것이 도를 지나치기 때문에 문제가 발생하는 것이므로 말하자면 ‘적절한 욕망의 소유’를 갖는 것이 요체일 것이다. 따라서 ‘욕망을 물리쳐야 한다’는 말은 ‘부적절한 욕망을 없앤다’는 말로 이해하면 좋을 것이다. 현대 사회에서 지나친 향락으로 파생되는 사회적인 문제를 생각해 본다면 선을 하기에 앞서 부적절한 욕망을 없애는 일이야말로 개인과 사회를 정화하는 데도 크게 도움이 된다고 할 것이다.
계를 지키고 욕망을 조절할 수 있는 능력이 선 수행에 있어서 기본적인 선결 조건이며 이런 선결 조건하에서 지(止)와 관(觀)을 생활화해야 한다. 즉, 이런 수련이 삶 그 자체로 되어야한다. 인간은 한 순간도 쉬지 않고 운동하는 생명체이기 때문에 어떤 특정한 시간과 공간에서만 선을 하는 것으로 그쳐서는 안 된다. 조용한 시간과 공간에서 집중적으로 수련하는 것도 필요하며 일상 생활의 동작 중에서도 선적 수련을 쌓을 수 있어야 한다. 따라서 수행을 원만히 하려면 정적(靜的) 수행에 초점을 두는 지(止)와 동적 수행에 적합한 관(觀)의 수행을 병행해야 한다. ‘止’는 마음을 안정하여 대상의 모양[상(相)]이 나타나지 않도록 심진여(心眞如)를 염(念)하는 것으로서 무념(無念)의 적정(寂靜) 상태를 실천하는 수행이며, ‘觀’은 여러 가지 현상의 인연 따라 일어나는 심생멸(心生滅)의 모습과 일체 만상의 실상을 분명하게 관찰하는 직관(直觀)과 정견(正見)의 지혜를 말한다 정성본, 「간화선의 본질과 수행구조」,ꡔ불교평론ꡕ, 제3권 제1호, 서울, 불교평론사, 2001, 192쪽.
. 지와 관의 간단없는 실천 의지가 선 수행의 기본적인 태도이다.
2) 지관법
천태소지관에 의하면 지관은 좌선 중에 수행하는 것과 생활 환경 속에서 여러 가지 대상을 만나면서 수행하는 두 가지가 있다고 하였다. 첫째 좌선은 지(止)를 위주로 수행하는 선이다. 대체로 좌선 중에는 망념이 그치지를 않는 것이 초심자들의 경험이다. 이럴 때는 망념이 일어나는 그 마음을 바로 관해야 한다. 요는 그런 망념이 일어나는 마음이 실재한다고 할 것인가 실재하지 않는다고 할 것인가 하는 것인데 망념을 일으키는 마음의 모습은 얻을 수가 없으므로 마음이란 없다고 보아야한다 智顗大師 述, 金無得 譯註, ꡔ止觀坐禪法ꡕ, 서울 : 經書院, 1982, 122쪽. “當知 心相不可得 心相無故 則無有心”.
. 마음이 없다는 것이 자각되면 잡념이란 원래 없는 것이라고 여길 것이며 반연(攀緣 : 객관적 대상에 마음이 끌려 감)은 일어나지 않을 것이다. 그렇게 되면 몸과 마음은 고요하게 되어 올바른 선정을 얻을 것이다 위의 책, 122쪽.
. 이것이 지다. 또 좌선 중에 정신이 흐리멍덩하거나 졸음이 오면 관을 수행하고 마음이 들떠 움직일 때는 지를 수행한다 위의 책, 123쪽. “行者 於坐禪時 其心闇塞 無記등懵 或時多睡 爾時應當 修觀照了 若於坐中 其心浮動 輕躁不安 爾時應當 修止止之”.
. 마음을 가라앉히기 위해 관을 수행 한다하더라도 마음이 밝지 못하고 깨끗하지 못하면 지를 수행하여 결과가 좋으면 지로서 마음을 안정시킨다. 또 지를 수행해도 마음이 일정하게 머무르지 않고 방법상에 이로움이 없다면 관을 사용하여 마음을 안정시키도록 시도해야한다. 이와 같이 번뇌를 없애고 마음을 안정시키기 위하여 지(止)에서 관(觀)으로 관에서 지로 편의에 따라 지관을 수행하면 마음이 안일(安逸)해지고 번뇌가 살아진다 위의 책, 123쪽.
.
좌선 중에 세밀하게 일어나는 나쁜 마음이 있다면 얼른 그것을 알아차리고 지를 수행해야한다. 그러나 지를 수행해도 효과가 없다면 관을 써서 세밀한 마음을 관한다. 그리하여 세밀한 마음이 보이지 않는다거나 그것에 집착하지 않는다면 관의 효과가 있는 것이다 위의 책, 123쪽.
. 선정과 지혜를 균등히 하기 위해 지관을 수행한다 하더라도 지혜를 관하지 못하면 어리석은 선정이 되며 번뇌를 끊을 수가 없다. 이 때는 관을 수행하여 지혜를 개발해야한다. 그러면 선정과 지혜가 균등하여 번뇌에서 벗어나 모든 법문을 증득하게 된다 위의 책, 123쪽, “若無觀慧 是爲癡定 不能斷結 或觀慧微少 卽不能發起眞慧 斷諸結使 發諸法門 爾時應當 修觀破析 若於定中 智慧開發 卽定慧均等 能斷結使 證諸法門”.
. 선정과 지혜의 어느 하나에 치우치지 않아야 올바른 선이다.
다음에는 생활상의 지관(止觀)에 대해 살펴보자. 생활인이 심신을 고요히 하여 선을 한다고 하지만 일상적인 생활 환경 때문에 몸은 항상 현실에 얽매이게 되고 고요한 상태를 유지할 기회를 얻기가 매우 힘든다. 따라서 일상 생활 속에서 어떻게 지관을 수행해야할 것인가 하는 것이 매우 중요하다. 그런데 일상 생활 환경이란 왔다 갔다 하는 것, 한 곳에 머물러 있는 것, 앉아 있는 경우, 누워 있거나 잠자는 경우, 어떤 작업을 하고 있는 경우 그리고 말할 때 등이다.
가고 있는 것이 좋거나 나쁘거나 또는 좋고 이익이 될 때는 가야한다. 그러나 가는 것이 타당하지 않거나 가도 그만 안가도 그만일 때는 가지 말아야한다 위의 책, 124쪽. “行者 若於行時 應作是念 我今爲何等事欲行 若爲不善無記事 卽不應行 若爲善利益 爲如法事 卽應行”.
. 가도 그만 안가도 그만인 경우는 반드시 가지 않는 것이 바람직하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안가면 잘못될 확률은 없지만 만약 간다면 잘못될 확률을 배제할 수 없기 때문이다. 가고 있다하더라도 어느 하나의 법도 취할 것이 없으니 망념은 일어나지 않는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이것이 가는 중에 수행하는 ‘止’다. 마음이 몸을 운반하여 가고 있지만 그 마음의 모습은 보이지 않으니 결국 간다는 것 그 자체는 공적(空寂)한 것이라 생각해야한다(연기가 공이며 따라서 연기로 된 것은 자성을 주장할 수 없으므로 이를 적이라 한다). 이것이 가는 중에 행하는 관이다. 그리고 가는 중에 행하는 지와 관의 병행적 수행은 위에서 말한 좌선의 경우와 같다.
머물고 있을 때, 앉아 있을 때 그리고 누워 있을 때도 갈 때의 경우와 같은 요령이다 위의 책, 125쪽.
. 일을 하려고 할 때는 왜 그런 일을 하려 하는 가를 생각해야한다. 옳지 않은 일이라면 그런 일은 하지 말아야한다. 만약 해야하고 이익이 있는 일이라면 일을 한다. 일을 함으로서 모든 현상이 있게 되지만 결국 한 법도 취할 것이 못됨으로 망념은 일어나지 않는다고 생각해야한다. 이것이 일을 할 때 수행하는 지다. 일을 할 때는 마음이 손과 발을 움직이고 오관을 작동시켜 일을 하지만 그런 일을 하는 마음을 살피면 그 모습은 보이지 않는다. 따라서 일할 때 일어나는 모든 법은 결국 공적한 것이라고 생각해야한다. 이것이 일하는 중에 행하는 관이다.
말하려고 할 때는 왜 무엇을 위해 말하려하는 가를 생각해야한다. 옳지 않고 이익이 없다면 말하지 말아야한다. 만약 말하여야할 때는 말을 하지만 결국 한 법도 취할 것이 없으니 망념은 일어나지 않는다고 생각해야한다. 이것이 말하는 중에 행하는 지다. 말을 할 때 마음이 인후와 입술 혀 등을 움직여 말하고 이것으로 인하여 여러 자기 현상이 벌어지지만 말하는 마음을 관하면 그 모습은 보이지 않으므로 결국 말한다는 것은 공적한 것이라고 생각해야한다. 이것이 말하는 중에 행하는 관이다. 의식(意識)의 차원에서 모든 인식(認識)에 관해서도 좌선 속에서나 생활 선에서와 같은 요령으로 지관 수행을 해야하는 것이다.
“몸의 자세에 대해서도 동일하게 관찰한다. 갈 때는 가고 있다는 것을 알고, 서 있을 때는 서 있다는 것을 알고, 앉아 있을 때는 앉아 있다는 것을 알고, 누워 있을 때는 누워 있는 것을 안다. 이와 같이 몸의 어떤 자세에 대해서도 잘 안다. 이것을 통해서 몸에서 발생하는 요소와 소멸하는 요소를 바로 보아서, 이 세상 어떤 것에도 집착하지 않은 채, 초연하게 이 세상을 살아간다 김정휴, 「천태 4종삼매, 그리고 간화선.위파사나」, ꡔ불교�론ꡕ, 제3권 제1호, 서울, 불교평론사, 2001, 265쪽.
”고 하는 것이 관의 요체다.
4. ‘나’를 찾는 선지(禪旨)
위에서는 천태소지관을 중심으로 선을 보았고 여기서는 우리나라에서 많이 실천하는 화두선(話頭禪)에 대해 살펴보기로 한다. 화두선의 요령은 제일 먼저 모든 집착을 쉬어 번뇌를 끊고 다음으로 참 ‘나’를 찾아 불성을 확인하고 마지막으로 자연과 내가 하나가 되는 과정을 거친다는 것이 일반적인 선의 수행 과정이라 볼 수 있을 것이다.
선의 선결 조건은 망상을 제거하는데 있다. 망상을 제거하는 데는 ‘쉬면 곧 깨닫는다’는 이 간단한 부처님 설법 보다 나은 것은 없다 虛雲 著, 朴敬勖 譯, ꡔ參禪要旨ꡕ, 서울 : 東國譯經院, 1981, 13쪽. “禪的先決條件 就是 除妄想 妄想如何除法 釋迦牟尼佛說的很多 最簡單的莫如 「歇卽菩提」 一箇 「歇」字”.
. 이 ‘쉰다[헐(歇)]‘고 하는데 우리는 주목할 필요가 있다. ’쉰다‘는 것은 번뇌를 쉬고 쓸데없는 생각을 쉰다는 말이다. 현대인은 여러 가지 잡다한 생각을 하면서 생활하고 있는데 그중 십중팔구는 낭비적 사고라고 말하는 사람도 있다 윤성희 말씀, 송환영 옮김, ꡔ마음의 신비ꡕ, 서울 : 대교출판사, 1996, 245쪽.
. 필요할 때 필요한 생각을 집중적으로 하지 못하고 번뇌로 에너지를 소모하면 심신이 피로하게 되어 필요한 때에 사고의 에너지를 집중시킬 수 없다. 그러므로 우선 필요하지 않는 생각을 없애는 일 즉, 쉬는 일부터 배워야 할 것이다. 공에 투철하면 집착과 애착으로 인한 번뇌에 시달리지 않을 것이기 때문에 쉬는 일이 쉬워질 것이다.
선을 공부하기란 매우 어렵다고 한다. 그러나 길만 바로 들어서면 또한 대단히 쉽다고 한다. 물론 특별히 좋은 방법은 없다. 단지 놓아버릴 뿐이다 虛雲 著, 朴敬勖 譯, ꡔ參禪要旨ꡕ, 서울 : 東國譯經院, 1981, 76쪽. “用功雖說難 但摸到路頭又很易 甚麽是初用心的易呢 沒有甚麽巧 放下來便是 放下箇甚麽 便是放下一切無明煩惱”.
. 무엇을 놓아버리는가. 일체의 무명 번뇌를 놓아버린다[방하착(放下着]) 白雲景閑和尙抄錄 圓照覺性飜譯.講解, ꡔ佛祖直指心體要節ꡕ, 서울 : 玄音社, 1999, 65쪽. “汝今放下外六塵 內六根 中六識 一時放下 到無可捨處 是汝脫生死處”.
. 방하착은 쉰다는 것과 같은 맥락이다. 특정 정보의 노예가 되지 말라는 것이 방하착이다. 좋은 것에도 집착하지 말고 나쁜 것에도 집착하지 말라고 옛 선사(禪師)들은 가르친다. 그래서 일체를 집착하지 않고 놓아버릴 때 대 자유를 얻는다. 선의 효과는 바로 대자유를 얻고 해탈의 세계로 가고는 데 있다.
‘나’를 송장과 같이 생각하는 것도 쉬고 놓아버리는 방법이다. 죽은 송장에는 어떤 욕을 하거나 자극을 준다해도 아무런 반응도 없는 것과 같이 팔풍(八風 : 이익을 줌〈利〉, 손실을 끼침〈衰〉, 상처를 줌〈毁〉, 명예롭게 함〈譽〉, 칭찬 함〈稱〉, 비방함〈譏〉, 괴로움을 줌〈苦〉, 즐겁게 함〈樂〉)과 오욕(五慾)에 부동심(不動心)이라야 쉬고 놓아 버릴 수 있다. 무명 번뇌를 집착 없이 놓아버리지 못하는 것은 가족, 돈, 명예 등을 쉽게 버리지 못하기 때문이다. 만약 이 몸을 시체일 뿐이라고 생각 할 수만 있다면 무엇을 버리지 못하겠는가. 그런데 버린다고 하는 것은 실제로 버린다는 것이 아니라 그런 것에 대한 애착과 집착을 버리라는 의미다. 망념이 없으면 자기의 진심, 본래면목(本來面目)이 스스로 드러난다. 그래서 옛사람이 말하기를 “다만 범부의 정념(情念)만 없애라 따로 성인의 알음알이가 있는 것이 아니다” 虛雲 著, 朴敬勖 譯, ꡔ參禪要旨ꡕ, 서울 : 東國譯經院, 1981, 96쪽, “但盡凡情 別無聖解”.
라고 했다.
또 망상과 번뇌는 허공의 티끌과 같아서 잠시 왔다가 가는 손님 정도로 생각하고 우리의 본심은 주인이기에 허공과 같이 변함없이 여여(如如)하게 존재한다는 것을 가슴에 간직하고 모든 사물에 무심하다면 모든 사물이 무슨 방해가 되겠는가 위의 책, 56쪽. “所謂 但自無心于萬物 何妨萬物”.
. 망상이 일어날 때 망상을 쫓아가거나 번뇌를 의도적으로 끊으려고 한다면 그 끊으려는 생각 그 것이 또한 번뇌이기 때문에 번뇌는 증폭된다. 뿐만 아니라 깨달음을 얻어야 하겠다고 늘 생각하는 것도 그 역시 번뇌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하는가. 망상이 일어나면 그것을 아는 놈이 있을 것인바 그 망상을 ‘아는 놈이 무엇인가’라고 참구하면 망상에 더 이상 시달리지 않게 된다고 큰스님들은 말한다 유식논(唯識論)의 인식(認識)에 관한 사분설(四分說)에서는 우리의 인식은 자증분(自證分)에서 견분(見分)과 상분(相分)이 나와 인식활동을 하면 최종적으로 증자증분(證自證分)이 인식을 완성하게 되는 데, 증자증분에 대해 반성적 사고가 있을 때는 자증분이 증자증분을 보게된다. 따라서 번뇌가 일어나는 것을 ‘아는 놈이 무엇인가’ 하는 것은 증자증분 그 놈이 무엇인가를 참구하는 것이 될 것이므로 자연히 번뇌는 살아질 것이고 증자증분을 보는 마음만 남아 있게될 것이다. 분(分)은 마음의 부분을 말한다.
. 이렇게 하면 망상을 자유자재로 처리할 줄 알기 때문에 비록 망상이 꼬리를 물고 일어난다 하더라도 더 이상 망상을 두려워하거나 싫어하지 않게 되는 것이다. 이쯤 되면 상당히 공부가 익어 가는 것으로 볼 수 있는 것이다. 이런 기본적인 마음가짐이 있을 때 번뇌와 망상이 일어난다 해도 나의 본심에는 아무런 장애가 되지 않는 다는 것을 인식하게되는 것이다. 이런 마음가짐이 선 공부의 기본 자세이다. 선은 일념으로 해야하며 조급하게 굴거나 서둘러서는 안 된다. 그렇게 하면 병이 생기고 장애가 생긴다 虛雲 著, 朴敬勖 譯, ꡔ參禪要旨ꡕ, 서울 : 東國譯經院, 1981, 32쪽.
. 종일토록 일을 하지만 어떤 것에도 집착하지 않는 무심(無心)으로 해야 괴로움이 덜하게 되는 데 선에서도 같은 요령이다.
화두를 참구(參究)하는 간화선(看話禪)을 생각해 보자. 화두는 말의 머리인데 말의 머리라는 것은 말이 있기 전의 존재이다. 말은 마음을 따라 생기는 것이기 때문에 화두란 바로 마음인 것이다 위의 책, 24쪽. “誰字下的答案 就是心 話從心起 心是話之頭 念從心起 心是念之頭 萬法皆從心生 心是萬法之頭 其實話頭卽是念頭 念之前頭就是心 直言之 一念未生以前 就是話頭”.
. 따라서 간화 즉 화두를 보라는 것은 마음을 보는 것 즉 관심(觀心)이다. 마음이 성품이고 깨달음이고 부처인데 마음은 물질이 아니므로 형상을 가지고 어떤 시공 상에 존재하는 그런 것이 아니므로 마음이란 얻을 수 없는 것이라 말한다. 그래서 “수행하여 도를 깨달음은 쉽고도 어려우며 어렵고도 또한 쉬운 것이다. 전기 불을 켜는 것과 같아서 알면 손가락 한번 튕귀는 사이에 큰 광명을 비춰 만년의 어두움을 한꺼번에 없애며, 알지 못하면 기회는 놓치고 등불은 꺼져 번뇌만 더욱 더해진다 위의 책, 28쪽.
”고 한다.
화두의 종류는 매우 많지만 예를 들면 ‘이 뭣고’ 즉, 마음의 본체는 무엇인가 하는 총체적 의문을 타파하기 위한 주제가 화두이다. ‘이 뭣고’라는 세 글자는 話이고 이 화가 일으키는 의정(疑情 즉, 疑心)으로 화(話)가 생기기 전의 세계인 마음의 본체를 찾는다고 할 때 ‘이 뭣고’하는 이 세 글자를 화두라고 말한다. 따라서 “화두란 곧 한 생각도 일어나기 전이니, 한 생각이라도 일어나면 화미(話尾)를 이루게 된다. 이 한 생각도 일어나기 전을 ’나지 안 한다[불생(不生)]‘고 부르니 흔들리지 아니하고 혼침하지 아니하고 고요에 빠지지 아니하고 허무에 떨어지지 아니하며, 이를 ’없어지지 아니한다[불멸(不滅)]‘고 부르나니, 언제나 홀로 밝아서 한 생각으로 빛을 돌이키어 반조(返照)한다. 이 나지도 아니하고 없어지지도 아니함[불생불멸(不生不滅)]을 일러서 화두를 본다[간화두(看話頭)]고도 하며, 혹은 화두를 비춘다[조고화두(照顧話頭)]고도 한다 虛雲 著, 朴敬勖 譯, ꡔ參禪要旨ꡕ, 서울 : 東國譯經院, 1981, 60쪽.
”고 하는 것이다.
그런데 화두를 본다는 것은 구체적으로 어떻게 한다는 말인가. 의심을 내는 일이다. 의심을 내는 일은 화두를 보는 길잡이 이다 위의 책, 60쪽. “看話頭 先要發疑情 疑情是看話頭的枴杖”.
. ‘이 뭣고’ 할 때 ‘나는 무엇인가’ 또는 ‘누구인가’하는 그런 의미가 되겠는데, 누구라던가 무엇은 나의 육체를 지칭하는 것이 아니며 마음의 본체를 지칭하는 것인데 그렇다고 마음은 모양도 없고 볼 수도 없으니 정말 답답한 것이다. 그러니 무엇이고 누구인고 하는 의심이 나지 않을 수 없다. 이런 의문을 갖는 것에 정신력을 집중하는 것을 화두를 본다 또는 화두를 든다 라고 말한다. 다만 화두를 들 때 분별하는 마음을 가지지 말 것이며 힘을 얻거나 못 얻거나, 그리고 조용한 곳이나 시끄러운 곳이나 상관하지 말고 일념으로 해나가는 것이 중요하다 위의 책, 60쪽.“但切不可生分別心 不要管他得力 不得力 不要管他 動中或靜中 你一心一意的用你的功好了”.
.
생각하거나 이리저리 헤아리는 것은 벌서 망상으로서 의정(疑情)이 아니다. 의정이란 단지 의심할 뿐이다. “어쨌든 가거나 머물거나 앉거나 눕거나 간에 ‘이 뭣고’ 를 들면 가장 쉽게 의심이 일어날 것이다. 조금이라도 반복하여 사량하거나 헤아리거나 생각을 지을 필요가 없다. 그러므로 누구인가라는 화두야말로 참으로 참선의 묘법이라 할 것이다 위의 책, 62쪽. “不論行住坐臥 「誰」字一擧 便最容易發疑念 不待反覆 思量卜度 作意才有 故誰字話頭 實在是參禪妙法”.
“라할 것이다. 화두를 드는 요령은 “아침에 ‘이 뭣고’ 화두를 들었으면 저녁, 새벽까지 ‘이’가 계속 되어야한다. ‘뭣고’는 그 다음에 언제 할는지 모를 정도로 화두를 들어야한다. 그래야 아무 생각이 나지 않는다. ‘이 뭣고, 이뭣고,...’를 자꾸만 계속하면 기멸(起滅)이 계속 상속하기 때문에 그렇게 공부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못하다 白雲景閑和尙抄錄 圓照覺性飜譯.講解, ꡔ佛祖直指心體要節ꡕ, 서울 : 玄音社, 1999, 454.
”라는 것이다.
우리의 몸에는 불성이 없는 곳이 없다. “눈에 불성이 있으면 보고, 귀에 불성이 있으면 듣는다. 코에 불성이 있으면 냄새맡고 혀에 불성이 있으면 말한다. 손에 불성이 있으면 물건을 쥐며 발에 불성이 있으면 걸어간다 위의 책, 189쪽, “在眼曰見 在耳曰聞 在鼻辨香 在舌談論 在手執捉 在足運奔”.
”는 것이다. 우리 육체를 움직이는 것이 불성인데 그것을 밝히는 것이 선이다. 따라서 선이란 어떤 초능력이나 탁월한 건강을 유지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가 자기가 되는 공부를 뜻한다할 것이다. 그러므로 선은 자기의 삶 그 자체인 것이다.
마음은 주관이고 외계의 사물은 객관이다. 이 두 가지는 마치 거울 위에 붙은 티끌과 같다. 이런 티끌이 말끔히 없어지면 빛이 비로소 밝아서 주관과 객관을 다 잊어버리면 그것이 ‘인간의 본성으로 진실 된 것이다’ 위의 책, 235쪽. “師云 心是根 法是塵 兩種猶如鏡上痕 痕垢盡除 光始現 心法雙忘 性卽眞”.
. ‘인간의 본성으로 진실된 것이다’라는 말은 자기 자신으로 돌아간다는 의미인 데, 이 것은 물아양망(物我兩忘)을 말한다. 주관과 객관을 모두 제거해야 본래의 자기에 도달되는 것이다. 우리가 말하는 주관은 진짜 주관이 아니다. 객관의 접촉으로 오염된 주관이다. 그리고 객관이라 하는 것도 객관 그 자체가 아니다. 오염된 주관이 왜곡시킨 객관이기 때문에 객관마저 객관 그 자체가 아니다. 그러므로 이 가짜의 주관과 객관을 모두 없애야 진정한 주관과 객관이 나타날 수 있다는 말이다. 선은 바로 진정한 주관과 객관이 나타나게 되는 삶이다.
Ⅳ. 이 시대의 선(禪)의 역할(役割)
인터넷을 기반으로 한 정보화 시대에 있어서 많은 사람들은 화폐 단위로만 계산되는 경제적 가치를 최우선으로 하고있으며 나와 남을 분명하게 구별하고 오로지 자기만이 옳다고 생각하는 자기 중심적이며 이원적인 생각에 젖어있다. 더구나 인터넷을 위시한 각종 정보 매체로부터 홍수 같이 쏟아져 나오는 정보를 맹신함에 따라 올바른 사고를 자유롭게 구사하지 못하는 <생각의 노예>가 되어 세속적인 욕망 추구에 빠져 있는 사람들이 적지 않다.
원래 인간이나 만물은 하나의 근원에서 나왔다는 것을 깨닫고 자기의 본성을 다하면 이원성(二元性)은 생겨나지 않는다. 분별상은 없다. 그러나 자기의 육체를 자기로 착각하여 나와 남을 분리해서 생각하는 순간에 모든 차별상이 존재하게 되고 온 세상이 온통 분별상으로 뒤덮히게 되는 것이다. 분별상 때문에 분쟁과 갈등과 고통이 뒤따르게 되는 것이다. 나와 남이 서로 다르다는 생각은 우리들이 육체 본위로 살고 있는 그 마음 속에만 존재하고 있는 것이지 서로 다름이 실제로 존재하는 것이 아님은 분명하다. 왜냐하면 우리가 시간과 공간상에서 사물을 본다하더라도 그것은 특정한 사람의 머리 속에 나타난 현상일 따름이며 그 특정한 사람의 마음의 조작이라는 것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Fritjof Capra, The Tao of Physics (Berkeley, California : Shambhala Publications, Inc. 1975), p63, “Both space and time become merely elements of the language a particular observer uses for his description of the phenomena”.
. 또 여럿을 통하여 하나인 내가 나타나기 때문에 나는 여럿에 의해 이루어짐으로 하나인 나는 여럿을 위해 존재한다는 즉, 일즉일체 일체즉일(一卽一切 一切卽一)이다. 나라는 인간은 연기적 존재로서 남을 도우는 것이 자기를 도운다는 논리가 여기서 나오게 되는 것이므로 일체평등성과 보편성은 좋은 환경을 만들어내는 에너지다.
서로 다르다는 잘못된 생각이 가져오는 피해는 엄청나다. 자기 중심적인 생각은 사람들에게 세상일에 대해 불평 불만을 일으켜 그 결과 알콜이나 마약 중독에 빠지게 하고 심하면 무차별 살인 행위를 감행하게 한다. 불평 불만의 생각이 집단적으로 또는 국가적인 권력욕과 지배욕 등으로 결합하면 수많은 생명들을 도탄에 빠트린다. 또 그런 생각이 종교화된 이데오로기의 광신(狂信)으로까지 발전되면 종파적인 갈등과 세계적인 침략 전쟁으로 확대되는 것이다. 이와 같이 개인의 에고이즘이 집단의 에고이즘으로 발전되고 더욱 국자적이며 인종적인 에고이즘으로 확대될 때 그 피해는 이루 말할 수 없는 것이다.
개개인의 명예욕과 출세심은 성공하던 실패하던 어느 쪽이든지 상처받기 쉬운 것이지만 여기에는 회망자가 너무도 많다. 아니 모든 사람이 다 이런 희망을 갖고 있다해도 과언이 아니다. 만인이 다 성공할 수는 없는 것이므로 실패한 사람은 절대 다수로서 온 세상에 좌절과 원한과 불만과 악의가 사회적 분위기를 불안의 도가니로 몰아 넣을 뿐만 아니라 자연 환경까지도 파괴하는 결과를 초래하게되는 것이다. 자기 개인적 욕구의 만족과 경제적 부를 최고의 가치로 알고 그 추구를 당연한 권리로 외치며 남에게 미치는 피해 따위는 아랑곳하지 않고, 정신적인 불안정 속에서 온갖 횡포를 부리는 무리들이 날로 늘어만 가고 있는 세태를 바로 잡을 묘약은 없는 것일까.
인간은 사고와 상념이란 능력을 이용하여 자기 스스로 극락 세계를 만들기도 하고 지옥을 조성하기도 한다. 이 양극단 사이에는 수많은 수준과 차원이 있는데 이런 차원을 만들고 기뻐하며 또는 슬퍼하며 괴로워하는 것은 그것을 만든 인간 자신이다. 극락이란 공간상에 존재하는 구조물이 아니며 그것은 깨달음이 완성되는 의식 상태이다. 그러므로 인간은 마음먹기에 따라 얼마든지 마음을 바꿀 수 있으며 그 효과적인 수련법이 선이다.
선을 닦는 것은 죽음을 극복하고자 하거나 아예 장생 불사를 꿈꾸는 것이 아니다. 선은 생명의 본원으로 돌아가 자기 자신의 실상과 만물이 하나의 뿌리라는 진리를 일깨워줌으로서 존재의 실상을 알고 원융무애(圓融無碍)한 세계를 만드는데 있다. 불자들의 근원적인 소원은 자기의 본래면목인 불성을 찾는데 있다. 말하자면 자기의 고향으로 돌아간다는 의미인데 자기 고향으로 돌아가지 않는 한, 물질적으로 아무리 풍요롭게 살아간다 하더라도 마음 속은 오히려 허전하여 향락에만 탐익(耽溺)하고 말 것이다.
‘내 속에 부처가 있으며 우리의 일체 생활 공간이 공부하는 계기이며 도량이다. 우리는 늘 눈에 보이는 물질적인 세상에서만 살고 있기 때문에 고도한 영적 수준의 세계는 의식하지 못한다. 그러나 우리가 매일 매일 공부해 나가는 노력을 쌓아 보다 더 높은 수준의 차원에 올라가면 우리가 보지 못했던 세상을 체험하게 될 것이다. 말하자면 ’무시선무처선(無時禪無處禪)‘인데 우리가 선의 행위를 하지 않는 한 선의 장이 될 수는 없는 것이다. 따라서 밥 먹고 길가는 것도 다 선이 될 수 있는 계기이지만 선지(禪旨)로 밥 먹고 선지로 길을 걸어가지 않는한 선은 아니다. 그러므로 일상적 행위를 선기(禪機)로 잡을 때만이 우리는 참선한다고 말할 수 있는 것이다.
보통 사람들이 사물을 보면 그런 사물이 존재하는 것으로 의심 없이 본다. 인간의 감각 기관에 이상이 없고 의도적으로 거짓말을 하지 않는 다면 제대로 사물을 보는 것이라고 말하기 때문에 이것을 과학적인 사물관이라 할 수 있겠다. 그러나 깨달은 사람의 사물관은 다르다. 보통 사람들이 있다고 보는 것에 대해 깨달은 사람은 없다고 보는 것이다. 없다는 말은 그런 현상이 존재하지 않다는 말이 아니라 그런 현상은 현상일 따름이고 그것이 실체(實體)가 아니라는 의미이다. 즉 이 말은 모든 현상은 일시적인 것이고 조건적인 것이며 영원 불변한 것이 아니라는 말이다. 불교의 전문 용어로 말하면 사물이 공하다고 보는 것이다. 그러므로 공의 체험은 인간의 고통을 근본적으로 제거하는 요인인 것이다. 공의 체험적 삶이 선이다.
불교에서 말하는 앎[지(智)]이라는 것과 우리가 일반적으로 말하는 앎[인식(認識)]이라는 것과는 다르다. 보통 사람이 말하는 앎이란 인간의 머리 속에서 일어나는 여러 가지 어지러운 생각이 빚어낸 것에서 하나를 뽑아서 ‘이 것이다’ 또는 ‘저 것이다’ 말하는 것에 비해 깨달은 사람의 앎은 직관으로 통찰한다는 것이다. 이를 두고 ‘지혜로움의 비춤이 환히 밝다’라고 말한다. 보통사람의 인식에 있어서는 일체의 본질이 파악되지 못하며 깨달은 자는 소위 무분별지(無分別智)로 보기 때문에 사물의 실상을 여실히 파악한다는 것이다. 무분별지란 ‘이 것이다’ 또는 ‘저 것이다’를 분간하지 못하는 앎이란 뜻이 아니라 머리 속에서 주관적인 생각으로서의 앎이 아닌 사물 그 자체를 직관적으로 통찰함에 의한 앎이라는 말이다. 불교에서는 우리의 일상적인 앎을 분별이라 하고 깨달은 사람의 앎을 무분별지라고 하는 데, 자기의 상념을 앎으로 착각하는 것이 분별이고 사물의 실상을 직관적으로 통찰하는 것이 무분별지인 것이다. 따라서 우리의 일상적인 앎은 불교적인 입장에서 보면 허망한 것이라서 우리의 일상적인 인식 일반을 허망분별(虛妄分別)이라고 말하는 것이다. 그런데 여기서 허망하다고 표현하는 것은 거짓되었다던가 왜곡(歪曲) 되었다던가 하는 그런 의미가 아니라 우리의 일상적인 인식 능력이 그런 수준에 머물고 있을 따름이라는 뜻이다. 따라서 무분별지를 얻으려면 선을 통하여 자기 자신의 실상을 깨쳐야한다는 것이 불교의 수행인 것이다 玄覺禪師著, 慧業 禪人 편역, ꡔ禪宗永嘉集ꡕ, 서울 : 弘法院, 1989, 165쪽, “迷者見境 則謂之有 悟者見境 則謂之無 則迷者之所謂有 悟者之所謂無也 所謂了境者 謂了悟境空也 智者對識而言 迷者見境 則識想紛然 悟者見境 則智照朗然 以識見境 則一切紛 紜 以智照境 則一切寂然 則所謂智者 無分別之照也”.
.
선은 무심이 되는 공부다. 무심이란 마음이 없다는 의미가 아니다. 무심이란 번뇌에 시달리고 있는 오염된 일상적인 상대적인 마음{유심(有心)]을 부정하는 것이고 맑고 밝은 순수한 절대적인 인간의 본성을 긍정하는 말이다. 유심으로 사물을 보는 것에는 자기의 주관이 개입되는 것이기 때문에 사물의 진상을 알 수 없다. 그러나 무심으로 사물을 보면 자기의 오염된 주관으로 보는 것이 아니므로 사물의 실상을 바로 비추어 볼 수 있다는 것이다. 따라서 무심이라는 것은 자기 자신으로 돌아가서 일상 언어를 넘어서 있는 진리를 체험할 수 있다.
우리는 침묵을 유지하는 노력을 게을리 하지 말아야한다. 침묵은 현실에서 도피하는 것이 아니라 마음과 몸의 총체성을 경험하고 자기에게 돌아가는 첫 단추가 된다. “모든 통증과 고통을 철저히 겪어내고, 온갖 가슴 벅찬 행복한 감정들, 첨예한 집중의 순간들, 더불어 초조와 권태의 순간들까지 경험해 보기 위한 것이다. 침묵은 이러한 모든 것들이 뚜렷이 보일 수 있는 홀로의 공간을 제공한다 J.Goldstein 지음 현음 스님.이금주 공역, ꡔ통찰의 체험ꡕ, 서울 : 도서출판 한길, 1998, 142쪽.
”라고 하는 통찰의 체험을 말하는 것과 같이 참선의 초보자에게 한가한 곳에서 공부하라는 이유는 바로 이러한 것에 있다.
선의 체험은 모든 사고의 범주를 넘어서 있다. 선에서는 어떤 추상적인 말이나 개념을 초월한다. 선에는 어떤 교설이나 철학 관념 도그마는 없다. 선은 이런 모든 고정 관념으로부터 자유로운 것이다 Fritjof Capra, The Tao of Physics (Berkeley, California : Shambhala Publications, Inc. 1975), p122. “The experience of Zen is thus the experience of satori, and sinc
'불교이야기 > 인곡당(법장스님)' 카테고리의 다른 글
법장스님, 종도들께 글 남겨... (0) | 2008.02.24 |
---|---|
德崇禪學 4-11 제11주제 발표; 경허의 미도선(尾塗禪) (0) | 2008.02.22 |
德崇禪學 4-9 제9주제 발표; 정신치료와 불교의 선수행 (0) | 2008.02.22 |
德崇禪學 4-8 제8주제 발표; 禪佛敎에서 본 深層心理學의 自我實現論 (0) | 2008.02.22 |
德崇禪學 4-7 제7주제 발표; 知訥 ‘마음철학’에 대한 硏究 (0) | 2008.02.22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