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교이야기/인곡당(법장스님)

德崇禪學 4-2 제2주제 발표; 六祖慧能大師의 蘇軾에 대한 영향

淸潭 2008. 2. 22. 18:10
 

德崇禪學 4-2 제2주제 발표; 六祖慧能大師의 蘇軾에 대한 영향

 

박영환 (동국대)


Ⅰ. 서  론

六祖慧能(638-713)의 俗姓은 盧씨이며, 본적은 河北范陽(지금의 河北꟔縣)이다. 그는 中國禪宗史에 있어서 가장 기념비적인 인물로 만약 그가 없었다면 오늘날의 선종도 없었다고 할 정도로 선종사상 가장 뛰어난 승려이면서 중국의 선풍을 크게 진작시킨 장본인이라고 할 수 있다. 특히 그의 “보리의 자성은 본래 청정하며, 오직 이 마음을 써야만, 바로 성불에 이를 수 있다(菩提自性, 本來淸淨. 但用此心, 直了成佛)”는 心性論을 바탕으로 “자성을 깨달아야만 견성하여 성불에 이를 수 있다(頓悟自性, 見性成佛)”는 不立文字, 頓悟成佛의 사상을 제기하여 南宗禪을 중국선종을 대표로 하는 종파로 발전시켰다. 그러므로 이후 선종을 대표하는 五家七宗 모두가 그의 사상에서 출발하여 발전한 것이다. 다시 말해서 六祖에서 출발하여 曹洞宗, 雲門宗, 法眼宗, 臨濟宗, 潙仰宗등의 五宗이 唐代에 발전하였으며, 宋代에 이르러 臨濟宗이 크게 흥성하여 다시 黃龍과 楊岐 二派로 나뉘어져 오늘날에까지 이르고 있다.
이러한 禪宗의 흥성은 고대중국사회에 광범위한 영향을 미쳤다. 종교적인 측면에서 불교내부에 대한 영향뿐만 아니라, 당시의 道敎에 대해서도 영향을 미쳤으며, 사상적인 측면에서도 상당한 영향을 미쳤다. 즉 六祖≪壇經≫의 “본성이 바로 부처(本性是佛)”라는 사상은 宋代이후 理學사상의 원류가 되어 朱熹와 明代의 王陽明등의 학설에 커다란 영향을 미쳤음을 알 수 있다. 이외에도 문학예술창작방면에도 적지 않은 영향을 미치고 있는데, 예를 들면 당나라의 齊己는≪寄鄭谷郞中≫에서 “시심은 어떻게 전하는가? 증명함이 스스로 선과 동일하다.”        “詩心何以傳? 所證自同禪.“(≪全唐詩≫卷840)
송나라의 吳可는≪詩人玉屑≫에서 “시를 배우는 것은 혼연히 참선을 배우는 것과 같다(學詩渾似學參禪)”고 주장하는 등, 내심의 깨달음을 중시하는 선의 頓悟의 주장과 시의 창작사유가 상통한다고 주장하고 있다. 더욱이 南宗禪이 크게 흥성한 宋代에 이르러 여러 詩話의 흥성과 함께 禪學은 詩話理論에 더욱 광범위하게 영향을 미쳐 많은 以禪喩詩의 ≪詩話≫들이 대량으로 탄생되게 되었다.        이에 대해 중국의 학자 張伯偉는 ≪禪與詩學≫에서 두 가지 측면에서 그 영향을 논하고 있다. 즉 “선종의 어록체가 詩話形式의 형성에 영향을 미쳤으며, 다른 하나는 선종의 사상이 詩話理論에 영향을 미치고 있다”고 설명하고 있다. ≪禪與詩學≫, 浙江人民出版社, 30쪽.
        이러한 以禪喩詩는 송대에 이르러 문인들의 口頭禪 같이 광범위하게 유행하였는데, 그 대표적인 주장으로는 위에서 언급한 吳可의 학설이외에 范溫의 ≪詩眼≫, 葉夢得의 ≪石林詩話≫, 嚴羽의 ≪滄浪詩話≫등을 들 수 있다. 특히 嚴羽의 “대저 선도는 오로지 묘오에 있으며, 시도도 역시 묘오에 있다(大抵禪道唯在妙悟, 詩道亦在妙悟)”, “시를 논하는 것은 선을 논하는 것과 같다(論詩如論禪)”(≪滄浪詩話≫)는 주장은 이전의 以禪喩詩를 총괄하는 것으로 명청시대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그러나 宋代에서 본격적으로 以禪喩詩와 以禪入詩의 기풍을 연 사람은 바로 소식이다. 그는 “오랜만에 좋은 시집 빌려 밤을 지새운다. 좋은 구절 만나는 곳이 언제나 참선이네.(暫借好詩消永夜, 每至佳處輒參禪)”        <夜直玉堂攜李之儀端叔詩百餘首讀至夜半書其後>,≪蘇軾詩集≫卷30, (臺灣)學海出版社.
, “고요하기에 온 세상의 움직임을 관찰하고, 공허하기에 온 우주를 용납할 수 있다네. 시법과 불법이 서로 방해되지 않으니, 이 말을 마땅히 다시 물어 보리라.(靜故了群動, 空故納萬境. 詩法不相妨, 此語當更請)”        <送參寥師>, ≪蘇軾詩集≫卷17.
, “나의 마음이 공허하고 사물이 없으니, 삼라만상이 스스로 왕래한다네. (我心空無物, 萬象自往還.)”        <書王定國所藏王晉卿畵著色山>其一, ≪蘇軾詩集≫卷31.
, “도인의 마음은 마치 물과 같아, 아름다운 꽃을 비춤에 걸림이 없네.”        <臥病彌月聞垂雲花開順闍黎以詩見招次韻答之>: “道人心似水, 不碍照花姸.”(≪蘇軾詩集≫卷32)
등등의 선의 깨달음에 이르는 사유방식을 시의 창작론에 대비시키는 以禪喩詩의 창작론과 풍격론의 주장은 후대 시의 창작이나 시론에 큰 영향을 미쳐 중국의 문학이론형성과 발전에 커다란 공헌을 하고 있다.        拙著, <소식의 문학이론과 선종>, ≪中國文學≫제36집, (2001년, 11월)

이와 같이 남종선의 흥성은 소식의 문학창작에 커다란 영향을 미친 동시에 소식 개인의 인격도야에도 적지 않은 영향을 끼치고 있다. 다시 말해서 계속되는 유배와 좌천 속에서도 평상심을 유지하면서 曠達하면서도 達觀적인 생활을 영위하는 동시에 언제나 흔들림 없이 지속적인 창작활동을 전개하였고, 또한 세속을 떠나 자연산수 속에서 어디에도 얽매임이 없는 隨緣自適하며, 自由自在로운 해탈의 추구는 바로 선종사상의 영향이라고 할 수 있다. 또한 소식은 20세부터 선승과의 교류를 시작하여 일생동안 백 명에 가까운 승려들과 교류를 하였고, 그러므로 ≪五燈會元≫에는 소식을 東林常總禪師의 法嗣로 기록하고 있다.
이렇게 소식과 선종과는 매우 밀접한 관계를 유지하고 있다. 그러나 불교선종의 관점에서 소식의 문학작품을 연구한 논문은 필자가 寡聞한 탓으로 거의 접해보지 못했다. 설사 불교 선종의 측면에서 언급하고 있다하더라도 거의 儒家적 관점이나 혹은 道家적인 관점과 함께 간략하게 서술하고 있거나, 사상적인 측면에서 표피적으로 언급하고 있을 뿐이다. 이에 비해 현재 중국과 대만에서는 이에 관한 적지 않은 연구가 이루어져 왔다. 특히 대만의 杜松栢, 대륙의 周裕鍇, 孫昌武, 葛兆光, 張伯偉등은 소식의 작품을 포함한 중국문학 및 시가와 불교선종과의 관계에 대하여 연구를 진행해 왔다. 다만 이러한 저서들 대부분이 거시적인 측면에서 논하고 있는 관계로 소식과 불교선종과의 관계에 대해서는 깊이 있는 연구가 이루어지지 못하고 있다.
고로 필자는 이방면의 연구에 미력을 보태고자 일찍이 <소식선시연구>를 발표하였고, 이어서 <소식선시와 이규보선시의 비교연구>, <소식선시의 공관고찰>, <소식의 문학이론과 선종>등의 소논문을 통하여 국내 중문학계와 관련학계에 이 분야에 대한 관심을 불러일으키고자 노력하였다. 이러한 소논문을 바탕으로 좀 더 논제의 범위를 축소시켜 “六祖慧能大師의 蘇軾에 대한 영향”에 대하여 살펴보고자 한다. 다시 말해서 소식의 禪詩속에는 자주 慧能大師의 사상을 언급하고 있는데, 본 논문에서는 六祖大師의 悟道頌을 인용하여 선사상을 나타낸 경우, 그리고 六祖大師의 ≪壇經≫을 인용하여 선사상을 표출하고 있는 경우, 마지막으로 六祖大師의 遺跡을 인용한 禪詩등 세 방면으로 나누어 분석해보고자 한다.

Ⅱ. 육조의 悟道頌을 인용

불교선종에서 스스로의 깨달음을 제일 중요시한다. 다시 말해서 自性이 본래 청정하기 때문에 깨달음을 밖에서 추구하는 것이 아니라 바로 스스로의 마음에서 찾아야 한다는 것이다. 예를 들면 六祖慧能은 다음과 같이 주장하고 있다.

일체의 만법이 모두 자신의 몸 안에 있는데, 어찌하여 자신의 마음을 따라 眞如本性을 깨달아 체현해내지 못하는가.        “一切萬法, 盡在自身中. 何不從於自心, 頓現眞如本性.”(敦煌本≪壇經≫)


또한 “한 순간에 깨달으면, 중생이 바로 부처인 것이다.(一念若悟, 卽衆生是佛.)”라고 주장하고 있다.        이러한 혜능의 주장은 그의 제자들에게 지속적으로 계승되고 있다. 즉 南岳懷讓의 제자이며, 홍주선의 대표자인 馬祖道一에 이르러서도 “이 마음이 바로 부처의 마음이다(此心卽是佛心)”, “마음 밖에 다른 부처가 없다(心外無別佛)”는 주장과 홍주선을 계승한 百丈懷海의 제자 黃檗希運도 이와 비슷한 주장을 하고 있다.즉 “오늘날 도를 배우는 자들이 스스로의 마음속에서 깨달음을 구하지 않고 마음 밖에서 표현해내며 그 경계를 취하려고 하니 모두 도에 위배되는 것이다.(今學道人不向自心中悟, 乃于心外著相取境, 皆與道背.)”(≪黃蘗山斷際禪師傳心法要≫)
나의 마음이 바로 부처의 마음이기 때문에 스스로를 깨우칠 수만 있다면 바로 자신이 부처인 것이다. 그러므로 깨달음이란, 나 개인의 마음속에 있는 불성을 찾는 것으로 일종의 개인적이고 주관적이며 창조적인 정신 활동인 것이다. 이러한 깨달음에 대하여 六祖慧能은 다음과 같은 悟道頌을 남기고 있다.
菩提本無樹,        깨달음은 본래 나무가 아니며,
明鏡亦非臺.        밝은 거울도 역시 경대가 아니다.
本來無一物,        본래 하나의 물건이 없는데,
何處惹塵埃        어디에 털을 먼지가 있겠는가?

이것은 사람의 몸을 보리수에, 마음을 맑은 거울에 비유하며 열심히 닦아서 본래의 청정심을 회복하여 부처가 되자는 神修의 偈頌에 대해 읊은 것이다.        선종의 五祖인 弘忍에게는 수제자인 神修가 있었는데, 그의 悟道頌은 바로 “몸은 보리수이고, 마음은 명경대와 같도다. 자주 자주 닦아서, 먼지가 끼지 않게 하라.(身是菩提樹, 心如明鏡臺. 時時勤拂拭, 勿使惹塵埃.)” 이다.
여기에서 慧能은 菩提란 본래 나무가 아니며, 명경도 본래는 거울이 아닌데, 어디에 닦을 먼지가 있느냐고 완전히 神修의 게송을 부정하고 있다. 따라서 사람의 본래 마음은 오염됨 없이 깨끗하게 비어있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사람들은 세속의 모든 執着이나 分別心에서 벗어나 사람마다 본래 가지고 있는 淸淨心을 찾는 것만이 바로 불성을 깨닫게 되는 것이고, 또한 해탈의 경지에 이른다는 것이다.
慧能大師의 이 偈頌은 불교에 관심이 있는 사람이면 모두가 암송하고 있을 정도로 광범위하게 알려져 있으며, 禪宗의 역사상 대단히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 중국의 선종이 南宗禪과 北宗禪으로 구별되는 관건이 바로 이 偈頌으로 인한 것이다. 다시 말해서 인도에서 건너온 선종사상의 中國化가 바로 여기에서부터 시작된 것이라고 적지 않은 중국학자들은 주장하고 있다.        胡適 은 ≪論禪宗史的綱領≫에서 “달마의 종파 역시 과도시기의 선이다. 이러한 반은 중국적이고 반은 인도적인 선은 진나라와 수나라 사이에 성행하기 시작하여, 수나라 때 특히 성행하였다. 당의 慧能과 道一에 이르러 비로소 중국선이라고 말할 수 있다.” 黃夏年主編,≪禪宗三百題≫, 上海古籍出版社, 334쪽 재인용.
고로 역대로 많은 시인들과 문인들이 이 게송을 암송하는 동시에 詩文속에 이를 인용하여 禪理와 禪法을 선양하였다. 따라서 역대선사들의 수많은 偈頌중에서 六祖대사의 이 偈頌만큼 중국의 문단과 시단에 널리 영향을 끼친 것은 없다고 할 수 있다.
소식도 그의 여러 작품 속에 혜능대사의 이 悟道頌을 직접적으로 인용하여 사람의 본심은 본래 청정한 것이며, 모든 것이 空으로 귀결된다는 깨우침의 경지를 나타내고 있다.        “향을 사르고 고요히 앉아서 깊이 자아성찰을 하니 곧 物과 我를 서로 잊고, 몸과 마음이 모두 空한 경지에 이르렀다. 죄와 허물이 생겨난 곳을 구하려 해도 찾을 수가 없었다. 한 순간에 청정함을 깨달으니 더러움이 저절로 없어지고, 안팎으로 얽매이지 않고 자유로와 맺히는 곳이 없었다.(焚香黙坐, 深自省察, 則物我相忘, 身心皆空. 求罪垢所從生而不可得, 一念淸淨, 染汚自落, 表裏翛然, 無所附麗.”(≪黃州安國寺記․蘇軾文集≫卷12)
그러므로 본문에서 소식의 詩作들 중에서 이 偈頌을 인용한 대표적인 작품 몇 수를 골라서 분석해보고자 한다.
소식의 나이 49세인 元豊7年(1084), 당시 王安石은 宰相직에서 물러나 金陵에 머물고 있었다. 소식이 이곳을 지나다 王安石을 방문하였을 때, 王安石은 자기가 살던 집을 이미 절에 희사하여 절로 개수하였다. 이에 소식은 <次荊公韻四絶>其四를 지어 이르기를,

甲第非眞有,        아름다운 집이란 본래 없는 것이니,
閑花亦偶栽.        한가로운 꽃도 우연히 자란 것이리라.
聊爲淸淨供,        잠시 청정한 곳에서 공양을 올리고,
却對道人開        ≪蘇軾詩集≫卷24.
        꽃은 도인을 향하여 피어있다네.

甲第란, 王安石이 살던 호화스러운 집을 가리키는데 바로 부귀영화의 상징이다. 재상까지 역임한 王安石의 집이 흔적도 없이 사라지고, 이미 사원으로 변한 데 대해, “본래 하나의 사물도 없다(本來無一物)”는 육조의 게송을 인용하고 있다. 따라서 첫 구절에서 세상 모든 것이 실존하지 않는 것이기에 세상의 부귀영화와 호화스런 집도 원래는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러기에 뜰 앞에 핀 꽃도 어떠한 의도를 가지고 재배한 것이 아니라, 인연에 의하여 제멋대로 잠시 자란 것임을 말하고 있다. 여기에서 세속의 모든 집착에서 벗어나고, 또한 모든 것을 초월한 隨緣自適하는 시인의 심경을 읽을 수 있다.
그러므로 3,4구에서 시인은 이러한 청정한 환경 속에서 부처님을 향하여 공양을 올리고 수행을 하고 있으며, 이에 꽃도 자연스럽게 인연에 따라 도인(시인)을 향하여 바라보고 있음을 말하고 있다. 이 세상의 모든 것은 원래 실체가 없는 것이지만, 그러나 우리의 눈에 보이는 사물은 바로 인연에 의하여 잠시 우리 앞에 나타났다가 다시 인연이 다하면 사라지는 것이다. 고로 어디에도 걸림이 없이 인연을 따라 생활하는 시인의 달관한 정신이 엿보이는 작품이다.
위의 작품과 같은 시기인 元豊7年에(1084) 지은 <次韻答寶覺> 시에서도 역시 같은 경지를 노래하고 있다.
芒鞋竹杖布行纏,        짚신에 대나무 지팡이 짚고 헝겊으로 싸매어 떠나니,
遮莫千山更萬山.        천산이 아니라 만산이라도 거침이 없다.
從來無脚不解滑,        산의 돌은 발이 없었기에 길의 미끄러움을 모르고,
誰信石頭行路難.        ≪蘇軾詩集≫卷24.
        가는 길의 험준함을 돌들이 안다하면 누가 믿겠는가?

첫 구절에서 짚신을 신고, 헝겊으로 각반을 하여 지팡이를 짚고 고행의 길을 떠나는 고행승의 모습을 묘사하고 있다. 2구에서 해탈의 길을 찾아서 헤매는 고행승의 굳은 결심을 엿 볼 수 있다. 여기에서 시인은 해탈의 길을 찾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것인지를 나타내고 있는 동시에 깨우침을 얻기 위해서 이렇게 집착하는 것에 대해서 시인이 비판적인 태도를 견지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왜냐하면 自性은 자기 자신에게 있어 明心見性을 하면 바로 깨우침의 경지에 다다르는 것이지, 결코 외부에 있지 않기 때문이다. ≪壇經≫에는 “부처는 본성 속에서 작용하는 것인데, 몸 밖에서 구해서는 아니 된다.(佛是性中作, 莫向身外求)”라고 주장하고, “자성을 깨우치면, 바로 이것이 부처(自性覺, 卽是佛)”로 중생과 부처의 차이는 바로 “깨우치지 못함” 과 “깨우침”의 차이이기 때문이다.
고로 3,4구에서 육조대사의 “본래 하나의 물건이 없는데, 어디에 털을 먼지가 있겠는가?(本來無一物, 何處惹塵埃)”라는 게송을 인용하고 있다. 산에 있는 돌들은 본래부터 발이 없기에 길이 미끄러운 줄 모르며, 길의 험준함은 더더욱 모른다고 말하고 있다. 육조대사는 “세상 사람들의 본성은 본래 청정한 것이며, 만법은 모두 자성에 있다(世人性本自淨, 萬法在自性)”        郭朋校釋, ≪壇經校釋≫, (北京)中華書局, 39쪽.
고 말하고 있다. 즉 萬法(森羅萬象과 宇宙萬物)은 모두 眞如, 法性, 自性에서 나온 것으로, 고로 萬法 자체가 바로 眞如이고 法性이며, 自性이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세상만물 모두가 부처이이기에 다른 곳으로 깨우침을 구하는 것은 바로 미혹에 빠지는 것이다. 산의 돌에도 자성이 있으며, 꽃에도 자성이 있다. 따라서 짧은 인생 속에서 萬山을 넘어서 무한한 불법을 찾아 헤매는 행위는 바로 산의 돌보다도 못한 것이라고 말하고 있다. 다시 말해서 현실세계 속에 많은 사람들이 공명에 집착하고, 미혹에 빠져서 인생의 험난함을 노래하고 있는데, 이 모든 집착과 미혹을 벗어난 돌과 같이 행동하라는 것이다. “돌에 발이 없다”는 시인의 해학적인 표현 속에 선의 정취가 들어있을 뿐만 아니라, 시인의 인생에 대한 깊은 깨달음이 내포되어 있는 동시에 시인의 달관적인 면을 살펴볼 수 있다.
시인이 임종 이틀 전에 지었다는 <答徑山琳長老>시를 보면,

與君皆丙子,        그대와 나는 같은 병자생,
各已三萬日.        각각 이미 삼만 일을 살았네.
一日一千偈,        하루에 천 개의 게송 외워도,
電往那容詰.        빠른 세월속에 어떤 필요가 있는가.
大患緣有身,        큰 병은 몸이 있는 인연이고,
無身則無疾.        몸 없으니 바로 병도 없노라.
平生笑羅什,        평생을 구마라십을 비웃은건,
神呪眞浪出.        ≪蘇軾詩集≫卷45.
        신통한 주문이 실지로 소용없기에.

維琳승은 소식이 항주에 있을 때 徑山寺의 주지로, 당시에 常州로 병문안 와서 소식에게 <與東坡問疾>이란 시를 주었고, 소식은 위의 시로 유림승에게 답하고 있다. 1,2구는 蘇軾과 유림승이 같은 나이로 매우 오랫동안 살았음을 3만일로 표현하고 있다. 3구는 ≪晉書≫에 의하면 구마라십은 스승에게 경을 배울 때 하루에 천 개의 게송을 외웠다고 전한다.        ≪蘇軾詩集≫권45.
고로 3,4구에서는 시인자신도 구마라십과 같이 하루에 많은 게송을 외우면 아는 게송이 나날이 늘어가겠지만, 그러나 아무소용이 없음을 이야기하고 있다. 그 이유를 아래의 구절에서 설명하고 있다. 즉 5,6구에서 慧能대사의 오도송을 인용하여 시인이 세상의 모든 집착에서 벗어났음을 말하고 있다. 몸이란 형상에 집착하기 때문에 병이 생겼으며, 만약 집착을 하지 않으면 병도 없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本來無一物”로 근본적으로 몸이란 것 자체도 원래는 존재하지 않는 假有의 상태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마지막 두 구에서도 ≪晉書≫를 인용하여 구마라십이 임종 전에 자기의 병을 낫게 하려고 外國제자에게 신통한 주문을 외우라고 하였으나, 결국은 효험을 보지 못하고 입적하였음을 말하며        위와 같은 책.
, 구마라십의 이러한 행위를 비웃고 있다. 왜냐하면 사람의 생사는 필연적인 규율로 사람이 어떤 수단을 사용하더라도 아무 소용이 없기에 隨緣自適하는 정신이 필요함을 말하고 있다. 이와 같이 소식은 혜능의 “본래 하나의 사물도 없다”는 게송을 원용하여 시인 스스로가 생사에 초연한 경지에 이르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같은 경지를 노래한 <錢道人有詩云 “直須認取主人翁” 作兩絶戱之>其二시는 육조대사의 게송을 직접적으로 인용하여, 자아해탈의 경지를 추구하고 있다.

有主還須更有賓,        주인 있으면 반드시 손님이 있어야 하니,
不如無鏡自無塵        거울 없기에 먼지조차 없는 것이 낫다네.
只從半夜安心后,        오로지 한밤중 안심에 이른 후부터,
失却當前覺痛人.        ≪蘇軾詩集≫卷47.
        눈앞의 통증을 느끼는 사람 잊어버렸네.

이 시는 소식의 해학적인 성격이 두드러지는 詩중의 하나이다. 제목에서 알 수 있는바와 같이 蘇軾은 錢道人이 지은 “곧 바로 주인공을 인지하여 취해야 한다”는 구절을 보고 두 수의 7언 절구를 유머러스하게 지어 화답하고 있는데, 이 시는 그 두 번째 작품이다. 첫 구절은 錢道人의 시 구절을 겨냥한 것으로, 여기에서의 주인공은 불교에서 말하는 佛性을 가리킨다. 다시 말해서 마음속의 주인공인 佛性을 찾아야 깨달음에 이를 수 있다는 錢道人의 주장을 시인은 부정하고 있다. 왜냐하면 주인의 존재를 인정하게 되면, 반드시 객의 존재를 인정하지 않을 수 없는데, 이것은 禪宗의 空사상에 위배된다는 것이다. 만약 주와 객의 나눔이 마음속에 있으면, 바로 나와 사물을 구분 짓게 되어, 결국에는 맑고 청정한 본심에 이를 수 없다는 논리이다. 고로 2구에서 六祖慧能의 悟道頌을 인용하고 있다. 거울이 없기에 털을 먼지가 없듯이 마음속에는 주인과 객의 관념이 없어야 하며, 이로써 비로소 맑은 청정심이 생겨나게 되고, 결국은 불성을 찾아서 해탈의 경지에 이른다는 것이다.
3,4구에서 ≪楞嚴經≫을 인용하며        위와 같은 책, ≪楞嚴經≫: “독침이 발을 상하게 하니, 몸을 움직이면 통증이 오는데, 청정심을 깨달으니, 조금의 아픔의 느낌도 없도다.(毒刺傷足, 擧身疼痛, 覺淸淨心, 無痛痛覺.)”
, 스스로 참선하여 깨달음에 이르렀음을 나타내고 있다. 다시 말해서 마음에 아무런 막힘이 없으니 安心의 경지(모든 번뇌를 벗어난 경지), 즉 주객의 차별성을 뛰어넘은 경지에 이를 수 있었고, 이런 안심의 경지에 이르니 어떠한 바깥 사물도 나의 깨달음을 방해하지 못한다는 의미인 것이다.

이외에도 ≪追和沈遼頃贈南華寺≫의 시에서도 “옳구나 저 上人은, 명경대를 알고 있네(善哉彼上人, 了知明鏡臺)”라며 上人의 마음이 明鏡과 같이 만물을 밝게 비추고 있음을 말하고 있다. 이와 같이 蘇軾은 六祖의 偈頌을 인용하여 사람의 자성이 청정함을 주장하거나 혹은 모든 번뇌를 벗어난 安心의 경지와 선종의 空사상을 선양하고 있는데, 이것은 그의 複雜多難한 일생과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다. 다시 말해서 그는 육조대사의 偈頌을 원용하여 인생의 해결점을 모색하는 동시에 정신적인 고뇌로부터 탈피하려 하였고, 이러한 집착으로부터의 해방은 그로 하여금 세속적인 것을 초월하게 하였다. 그러므로 시인은 개인적인 어려움 속에서도 언제나 隨緣自適하거나, 樂觀曠達하며, 또한 해학적인 면모를 보여주고 있다.
Ⅲ. 六祖≪壇經≫의 사상을 인용

六祖慧能대사가 생전에 설법한 내용을 그의 제자 法海가 기록하여 전한 것이 바로 ≪壇經≫이다. 그러므로 唐代 이래로 六祖≪壇經≫은 선종의 경전 중에서 최고의 경전으로 숭상되어져 왔다. 더욱이 佛學思想적인 측면에서 ≪壇經≫은 慧能이전의 학설을 계승하고 있는 동시에, 慧能이후의 선종사상계와 중국철학계에 지대한 영향을 미치고 있다.        印順法師는 ≪中國禪宗史≫의 제6장 <단경의 성립과 연변>의 제3절 <단경의 변화>에서 “단경의 각종 판본을 크게 분류한다면 대략 네 종류의 판본으로 나눌 수 있다. 즉 敦煌本, 古本, 惠昕本, 至元本이다.”(272쪽)라고 주장하고 있다. 그러나 이를 敦煌本, 惠昕本, 契嵩本, 宗寶本으로 분류하는 사람도 있다.
이러한 六祖慧能사상의 精髓가 실린 ≪壇經≫은 당대이후의 많은 문인사대부와 승려들로부터 중시를 받았을 뿐만 아니라, 근대철학의 대가인 錢穆으로부터 중국문화를 탐색하는데 반드시 필독해야할 서적으로 평가받았으며, 또한 첫 번째 백화로 쓰여진 책으로 규정되고 있다. 이렇게 고금을 통하여 커다란 주목을 받아온 이유는 바로 ≪壇經≫속에 이전과는 구별되는 六祖慧能의 대표적인 사상이 기재되어 있기 때문이다.
≪壇經≫의 체제를 크게 두 방면으로 분류할 수 있는데, 하나는 바로 慧能大師가 大梵寺에서 설법한 것을 기록한 부분이고, 다른 하나는 제자와 문답을 주고받은 내용과 임종시에 부탁을 기록한 부분으로 나누어 볼 수 있다.        印順法師는 ≪中國禪宗史≫에서 ≪壇經≫의 내용을 크게 두 방면으로 분류하고 있다. 하나는 바로 육조혜능대사가 大梵寺에서 설법한 것을 기록한 부분으로, 이것은 비교적 믿을 수 있는 자료이며, 또한 주된 부분이라고 말하고 있다. 다른 하나는 제자와 문답을 주고받은 내용, 그리고 임종시에 부탁을 남긴 부분으로 위의 내용에 부속된 부분이라고 설명하고 있다.
大梵寺에서 설법한 주된 내용 중에서 “定慧爲本”과 “一行三昧”, 그리고 “無相爲體, 無念爲宗, 無住爲本”과 “頓悟菩提”의 사상 등이 가장 대표적인 사상으로 볼 수 있다.
蘇軾도 唐代의 王維나 柳宗元, 劉禹錫등과 마찬가지로 慧能大師의 인품과 사상을 매우 높이 평가하고 있다.        당나라의 王維, 柳宗元, 劉禹錫은 각각 <六祖慧能禪師碑銘>과 <賜諡大鑑禪師碑>와 <大鑑禪師碑>를 기록하여 전하고 있다.
고로 그의 詩文集속에는 六祖慧能의 ≪壇經≫에 나타난 사상과 유적에 대해 자주 언급하고 있다. 특히 그의 시속에는 ≪壇經≫의 대표적인 사상을 직접적으로 인용하고 있다. 예를 들어 熙寧6年(1073), 시인이 杭州에서 노래한 <書雙竹湛師房>(其二)시를 살펴보면,

暮鼓朝鍾自擊撞,        아침저녁 종소리와 북소리 스스로 울리고,
閉門孤枕對殘釭.        문을 닫고 홀로 누워 남은 등불 마주보네.
白灰旋撥通紅火,        흰 재 속을 헤쳐서 붉은 불씨 뽑아내고,
臥聽蕭蕭雨打窓.        ≪蘇軾詩集≫卷11.
        밤비가 창문 두드리는 소리 누워서 듣는다.

이 시는 시인이 杭州의 廣嚴寺(雙竹寺)에 있는 禪師를 방문하고 난 뒤, 절에서 묵으면서 느낀 감회를 노래한 것이다. 첫 구절에서 청정한 산사의 아침과 저녁에 들려오는 종소리와 북소리를 묘사하고 있는데, 이러한 고요함을 깨트리는 종소리와 북소리를 통하여 오히려 산사의 고요함과 적막함을 더욱 두드러지게 묘사하고 있다. 특히 “스스로 울린다”는 표현은 시인의 達觀者적인 모습을 엿볼 수 있게 한다. 2구에서는 첫 구를 계승하여 구체적으로 깨우침을 향하여 수행하는 시인의 모습을 그리고 있다. 앞의 시에서도 언급하였듯이 六祖慧能大師는 스스로가 淸淨한 自性을 유지하여야만 진정한 깨우침의 경지에 이를 수 있다고 주장하고, 깨우침을 추구하는 과정에 대해 ≪壇經≫에서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자성의 변화는 매우 많다. 미혹에 빠진 사람은 스스로 견성을 알지 못하고, 일념의 선에는 지혜가 생겨난다. 하나의 등불은 천년의 어두움을 몰아내고, 하나의 지혜는 만년의 어리석음을 멸한다.”        “自性變化甚多, 迷人自不知見. 一念善, 知惠卽生. 一燈能除千年闇, 一智惠能滅萬年愚.” 郭朋校釋, ≪壇經校釋≫, (北京)中華書局, 40쪽.
그러므로 여기에서 “문을 닫는다”는 표현은 바로 외계와의 단절함을 의미하는 것이고, “한 가닥의 남은 등불”은 바로 천년의 어두움을 몰아내는 깨우침의 등불임을 뜻하고 있다.
그러므로 제3구에서 시인은 ≪五燈會元≫속의 公案을 인용하여 스스로가 이미 깨우침의 경지에 이르렀음을 나타내고 있다. 당나라의 百丈懷海禪師(720-814)가 제자인 潙山靈祐禪師(771- 853)에게 “난로에 불씨가 있는지 찾아보라?”고 하였고, 영우선사는 난로를 후비면서 “없다”고 대답하였다. 이에 백장선사가 직접 일어서 친히 난로 깊숙한 곳에서 작은 불씨를 찾아 들고 “너는 없다고 했는데 이것은 무엇이냐”라고 다시 물으니, 마침내 영우선사는 깨달음을 얻게 되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潙山靈祐禪師>: “丈問‘誰師?’ 曰‘某甲’. 丈曰‘汝撥爐中有火否?’ 師撥之曰 ‘無火.’ 丈躬起深撥得少火, 擧以示之曰 ‘汝道無這箇’ 師由是發悟, 禮謝陳其所解.”(≪五燈會元․百丈海禪師法嗣≫卷九, 臺灣中華書局 520쪽)
이것은 바로 난로의 재 속에 묻혀있는 작은 불씨를 생각하지 못하고, 단순히 표면적인 면만 보고 판단하고 있는 경솔한 마음을 탓하고 있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스스로의 확실한 내면적인 체득을 강조하고 있는 것이다. 六祖大師가 강조하였듯이 사람의 自性은 본래 淸淨하고, 自心이 바로 부처이기에 妄念을 제거하고 내심을 향하여 노력을 하면, 어느 순간 空明하고 淸淨한 禪定, 즉 頓悟의 경지에 도달하게 된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위의 公案은 단순히 하나의 형식에 집착해서는 깨우침에 이를 수 없으며, 실질적으로 자기 내면에 있는 스스로의 마음을 다스려서 청정한 본심을 확인하는 것만이 진정한 깨우침의 경지에 이를 수 있음을 강조하고 있다.
마지막 구절에서는 첫 구절을 계승하여 창문을 두드리는 밤비 소리로 끝을 맺고 있다. 이미 모든 것을 초월한 경지에 다다른 시인은 오직 청정한 마음을 유지하고, 모든 잡념을 버렸기에 그의 마음에 들려오는 것은 창문을 두드리는 밤비 소리뿐이다. 이로 보아 시인은 첫 구절과 같은 수법으로 밤비소리에 대한 묘사를 통하여 시인 마음의 고요함과 유유자적함을 더욱 두드러지게 표현하고 있다. 고로 이 구절은 육조혜능의 ≪壇經≫을 인용하여 시인자신이 청정한 본성을 깨우치기 위해 노력한 과정과 깨우침의 결과를 말하고 있다.
<書焦山綸長老壁>의 시에서도 ≪壇經≫의 대표적인 사상을 소재로 노래하고 있다.

法師住焦山,        법사께서 초산에 머무르고 있으나,
而實未嘗住.        그러나 실지로 머문 적이 없다네.
我來輒問法,        내가 늘 불법에 대하여 물어도,
法師了無語.        법사는 대답을 하지 않는다네.
法師非無語,        법사가 말하지 않음이 없으면,
不知所答故.        대답할 바를 모르기 때문이네.
君看頭與足,        그대는 머리와 발을 보았는가?
本自安冠屨.        ≪蘇軾詩集≫卷11.
        본래의 자리에 따라 쓰고 신음을.

앞에서도 언급하였듯이 육조≪壇經≫의 대표적인 사상중의 하나가 “無念爲宗, 無相爲體, 無住爲本”        “돈오와 점수는 모두 무념으로 종을 삼고, 무상으로 체를 삼으며, 무주로써 본을 세워야 한다. 무엇을 무상이라고 하는가? 무상이란, 상이면서도 상을 떠난 것이다. 무념이란, 생각함이 있으면서 생각하지 않는 것이다. 무주란, 사람의 본성이다. (頓漸皆立無念爲宗, 無相爲體, 無住爲本. 何名無相? 無相者, 於相而離相; 無念者, 於念而不念; 無住者, 爲人本性.)” ≪壇經校釋≫31-32쪽.
이다. 여기의 宗과 體, 本이란 바로 궁극적인 본성을 가리키는 것이다. 無念이란, 바로 眞如本性의 토대 위에서 다른 모든 雜念과 妄念(취하고 버림, 선악, 미추의 관념)에서 벗어남을 가리킨다. 相이란, 속세에서 실지로 존재하고 있다고 집착하는 모든 존재(언어나 개념, 형상)를 가리킨다. 고로 無相이란, 세상 모든 名相에 집착하지 않고, 오염되지 않음을 말하는 것이다. 無住란, 머무름이나 얽매임이 없음을 가리킨다. 혜능은 ≪壇經≫에서 “만약 한 생각이 만약 머무르게 된다면, 생각마다 모두 머무르게 되고, 이것을 계박(繫縛: 묶임, 번뇌의 의미)이라 부른다. 일체의 모든 것에 있어서 생각마다 머무름이 없는 것이 바로 無縛이다. 이것이 바로 無住를 본으로 삼는 것이다.”        “一念若住, 念念卽生, 名繫縛; 於一切上, 念念不住, 卽無縛也. 此是以無住爲本.” ≪壇經校釋≫, 32쪽.
라고 설명하고 있다.
그러므로 첫 두 구절에서 ≪壇經≫의 “無住爲本”의 사상을 인용하여 綸長老가 초산에 머무르고 있는 것 같지만, 실질적으로 머문 적이 없다고 설명하고 있다. 왜냐하면 세상만사 모두가 항상 변하며 고정되지 않은 것이며, 실질적으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고로 綸長老는 당연히 이러한 진리를 알고 있기에 실질적으로는 머무름이 없었다고 말하고 있다. 다음 구절에서 시인이 대사에게 어떠한 것이 불법이냐고 물으니 아무 대답이 없음을 말하고 있다. 다시 말해서 “不立文字, 明心見性”이기에 깨우침이라는 것은 말이나 언어, 개념의 집착에서 벗어나서, 스스로의 마음으로 체득해야한다는 禪理를 설명하고 있다. 예를 들면, 어떠한 설명이 없어도 모자는 당연히 머리에 쓰는 것이고, 신은 발에 신는 것임을 알 수 있듯이, 불법의 오묘함도 마찬가지로 다른 언어적인 설명이 필요 없음을 말하고 있다. 이로 보아 이 시는 육조≪壇經≫의 대표적인 “無住爲本”사상을 직접적으로 원용하여 모든 속박에서 벗어나 어디에도 걸림이 없는 任運無碍의 경지를 노래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元豊2年(1079), 烏臺詩案이 발생하기 직전에 쓴 <霅上訪道人不遇>시에서도 같은 경지를 노래하고 있다.

花光紅滿欄,        붉은 꽃은 울타리 안에 가득하고,
草色綠無岸.        푸른 풀들은 끝없이 이어진다.
不逢靑眼人,        도인을 만나지 못하였으나,
長歌白石澗.        ≪蘇軾詩集≫卷19.
        계곡의 흰 바위서 노래 부르네.

시의 제목에서 알 수 있듯이 시인은 절강성 吳興縣의 霅溪에 있는 도인을 찾아갔으나, 만나지 못하고 이 시를 지었다. 첫 두 구절에서는 도인이 살고 있는 환경을 묘사하고 있다. 울타리안쪽에는 형형색색의 백화가 만발하여 있고, 그 주위에는 푸른 풀들이 끝없이 펼쳐진, 그야말로 속세의 번잡함을 벗어나 대자연의 아름다움이 그대로 존재하는 환경임을 알 수 있다. 제3구에서는 ≪晉書․阮籍傳≫의 典故를 인용하여 시인이 찾아간 도인을 靑眼人이라고 높이 평가하고 있으며        ≪晉書․阮籍傳≫에 보면 완적은 푸른눈(靑眼)과 흰눈(白眼)을 동시에 표현할 수 있었는데, 세속의 사대부를 만나면, 백안으로 대하고, 광달하고 얽매임이 없는 고고한 인사를 만나면 청안으로 대했다고 기록하고 있다. 그러므로 여기에서 靑眼人이란 속세를 떠난 道人임을 추측할 수 있다.
, 또한 도인을 만나러 갔으나 결국은 만나지 못했음을 말하고 있다. 이에 마지막구절에서는 뜻을 이루지 못했으나 조금도 개의치 않고 유유자적한 曠達한 심경으로 큰 소리로 노래를 부르고 있음을 묘사하고 있다.
소식 이전에도 ‘道人이나 隱人을 찾아갔으나 만나지 못한 감개’를 소재로 노래한 작품이 적지 않다. 대표적인 작품으로 中唐의 賈島가 지은 <尋隱者不遇> (은자를 찾아갔으나 만나지 못하다)시를 살펴보면,
松下問童子,        소나무 밑에서 동자에게 물으니
言師採藥去.        스승께선 약초를 캐러 가셨는데
只在此山中,        이 산 속에 계시기는 하지만
雲深不知處.        구름 깊숙한 곳이라 어딘지는 모릅니다.

宋初 晩唐體詩人의 일원인 魏野의 작품 중에서도 같은 제목의 시가 있다.

尋眞誤入蓬萊島,        眞人을 찾아 봉래섬에 잘못 들어갔더니
香風不動松花老.        향그런 바람일지 않고 松花만 떨어지네.
采芝何處未歸來,        어디에서 영지를 따는지 돌아오지 않고
白雲滿地無人掃.        흰 구름 가득한데 쓰는 사람이 없구나.

두 작품 모두 시인이 은자를 찾아갔으나 결국은 만나지 못한 소회를 적고 있다. 여기에서는 단지 隱者가 거처하는 곳이 인적이 없고 속세와 단절된 신선의 거처와 다를 바 없음을 말하고 있다. 또한 “雲深”과 “香風” 두 글자는 바로 隱者의 고결함과 작자의 그에 대한 동경을 나타내고 있으며, 자연산수를 소재로 맑고 적막하며 고아하면서도 유심한 대자연의 경지를 묘사하고 있다.
그러나 소식의 작품은 단순히 속세를 벗어나 산림에 은거하는 생활환경과 대자연의 경지만을 묘사하는 것을 뛰어넘어, 그것을 즐기는 시인의 달관적인 모습을 나타내고 있다. 다시 말해서 “도인을 만나지 못하였으나, 계곡의 흰 바위서 노래 부르는” 어디에도 얽매이지 않고 본래의 목적의식조차도 뛰어넘은 自由自在로운 경지를 노래하고 있다. 그러므로 이 시도 혜능의 無住爲本사상을 원용하여 어디에도 머무르거나, 집착함이 없는 自由自在로운 경지를 체현해내고 있다고 할 수 있다.

廬山을 노래한 <贈東林總長老>시를 살펴보면,

溪聲便是廣長舌,        계곡물 소리는 바로 부처님의 상이니
山色豈非淸淨身.        산색은 어찌 청정한 법신이 아니리요?
夜來八萬四千偈,        밤 사이에 팔만 사천 偈頌이 있으니
他日如何擧似人.        ≪蘇軾詩集≫卷23.
        다른 날 어떻게 사람들에게 설명할까?

이 시는 시인이 元豊7年(1084) 廬山을 유람할 때 유명한 <題西林壁>과 같은 시기에 지은 것이다. 廣長舌이란, ≪法華經․神力品≫에서 나온 것이다. 즉 “세존이 큰 신력으로 광장설을 나오게 하였는데 위로는 梵世에 까지 이르렀다.”        ≪蘇軾詩集≫卷23, ≪法華經․神力品≫: “世尊現大神力, 出廣長舌, 上至梵世.”
불교에서는 부처가 소위 32相을 가지고 있으며, 어떠한 형상으로 나타나 설법을 한다고 전한다. 廣長舌이 바로 32상중의 하나인 것이다. 淸淨身이란, 바로 淸淨法身의 준말로 三身중의 하나이다. 육조혜능은 이것을 自性으로 해석하고 있다. 즉 淸淨法身佛, 圓滿報身佛, 自性化身佛을 가리킨다.        “자신의 육신중에서 청정법신에 귀의하고, 자신의 육신중에서 원만보신불에 귀의하며, 자신의 육신중에서 천백억화신불에 귀의한다.(於自色身歸依淸淨法身佛, 於自色身歸依圓滿報身佛, 於自色身歸依千百億化身佛)” 郭朋校釋, ≪壇經校釋≫, (北京)中華書局, 39쪽. 즉 부처를 생각할 때 부처의 ‘본체성의 몸(法身)’과 부처가 닦아서 이룩하신 ‘덕성의 몸(報身)’과 중생을 위하여 나타내는 ‘변화의 몸(化身)’의 3가지로 부처를 말하게 된다. 즉 부처의 몸을 말할 때 ‘법신’, ‘보신’, ‘화신’의 셋으로 말하는데 이것을 삼신불(三身佛)이라 한다.
이러한 淸淨法身佛에 해서 ≪壇經≫에서는 아래와 같이 설명하고 있다.

이 삼신불은 자기의 自性중에서 나온 것이다. 무엇을 청정법신불이라고 하는가? 세상 사람들의 본성은 본래 청정한 것이며, 일체의 만법은 모두 자성에서 나온 것이다. 만약 마음속에서 일체의 악한 것을 생각하면, 곧 악한 행위가 일어나고, 만약 마음속에서 일체의 선함을 생각하면 선한 행위가 일어난다. 이와 같이 선악의 諸法은 自性속에 있다. ……고로 선지식에 의한 진리의 정법을 들으면 스스로 마음속의 집착과 망념을 제거하여 자연적으로 내외가 밝고 맑아져 자성속에 만법을 볼 수 있다. 일체의 법 스스로가 자성에 있는데 이것을 청정법신이라 이른다.        “此三身佛, 從性上生. 何名淸淨法身佛? 善知識! 世人性本自淨, 萬法在自性. 思量一切惡事, 卽行於惡. 思量一切善事, 便修於善行. 如是一切法, 盡在自性. ……故遇善知識開眞法, 吹却迷妄, 內外明徹, 於自性中, 萬法皆見. 一切法自在性, 名爲淸淨法身.” 40쪽.


앞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 萬法(森羅萬象과 宇宙萬物)은 모두 眞如, 法性, 自性에서 나온 것으로, 고로 萬法자체가 바로 眞如이고 法性이며, 自性이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세상만물 모두가 부처이이기에 삼라만상 모두에도 自性이 있다는 것이다. 여기에서 시인은 이를 인용하여 ‘계곡물의 소리는 바로 부처가 廣長舌로 설법을 하는 것’이라고 말하며, ‘푸른 산색도 바로 부처의 淸淨法身’이라고 설명하고 있다. 1구는 청각으로 표현하고, 2구는 시각으로 표현하고 있다. 3구의 팔만사천이란 숫자는 불문의 수를 기록한 것이다. 그러므로 3구는 시인이 한 명의 구도자로서 하루 저녁 사이에 불가의 무수한 法門을 깨닫고, 이에 따라 무수한 게송을 지었음을 말하고 있다. 마지막 구에서는 지은 게송이 너무 많아 다른 사람에게 어떻게 설명해야할지 모르겠다고 말하고 있다. 이로 보아 시인은 ≪壇經≫속의 淸淨法身을 인용하여, 생활속의 개인적인 심오한 불성의 깨달음을 대자연을 통하여 묘사하고 있다. 다시 말해서 시인은 廣長舌相과 淸淨法身을 인용하여 불법이 존재하지 않는 곳이 없음을 비유설명하고 있다.        이것은 후기 선종의 “푸르고 푸른 대나무 모두가 법신이고, 울창한 황색 꽃은 반야가 아님이 없다.(靑靑翠竹, 盡是法身. 鬱鬱黃花, 無非般若)”(≪景德傳燈錄≫)의 사상과 일치하고 있다.
즉 불법은 眞如法體의 완전하고 큰 공간 속에 위치하고 있어, 시간과 공간의 제약이 없이 언제 어디서든지 항상 존재한다는 것이다.

다음의 <聞潮陽吳子野出家>의 시에서도 潮陽郡의 吳子野가 세속을 떠나 출가한다는 것을 듣고 자기의 일생동안 겪은 과정과 吳子野의 출가를 대비하며 인생여정에 있어서 객관적으로 존재하는 실체를 모두 부정하면서 ≪壇經≫의 사상을 직접적으로 묘사하고 있다.

妻孥眞敝屣,        처와 자식을 진정으로 낡은 신발처럼,
脫棄何足惜.        벗어 던지면 애석해할 필요가 있는지?
四大猶空幻,        사대가 모두 공하며 헛된 것인데,
衣冠矧外物.        의관은 하물며 외물에 불과하다네.
一朝發無上,        한때 불법의 길로 들어섰다면,
願老靈山宅.        오랫동안 영취산에 있기를 바라네.
世事子如何,        당신은 세상사를 어떻게 생각하는지,
禪心久空寂.        선심은 오래도록 공적에 이르렀네.
世間出世間,        세간의 일과 출세간의 일
此道無兩得.        이 두 길 모두를 다 이루기 어려우니.
故應入枯槁,        반드시 빈 마음으로 들어가서,
習氣要除拂.        나쁜 습성을 털어 내야 한다네.
丈夫生豈易,        장부의 생겨남이 쉬운 것은 아니고,
取捨志匪石.        취하고 버림의 뜻도 영원히 변치 않네.
當爲獅子吼,        당연히 사자후 앞에서는
佛法無南北.        ≪蘇軾詩集≫卷47.
        불법이 남북의 차이가 없다네.

여기에 묘사하지 않은 전 8구에서는 시인이 儒家思想에 입각하여 젊은 날의 포부를 실현하려고 하였으나, 정치적으로 여러 차례의 좌절을 겪으면서 자기의 이상이 거품처럼 사라져 버렸음을 설명하고 있다. 고로 그는 儒家에서 인생의 해결점을 찾지 못하고 만년으로 다가갈수록 불교선종에 심취하였고, 결국에는 四大, 즉 사람의 몸과 인생이 모두 환상이고 공허한 것임을 깨달았다고 말하고 있다. 따라서 벼슬길은 바로 몸 밖의 물건이기에 조금도 애석하지 않다고 설명하고 있다. 불교와 선종에서는 바로 세계만물과 사람의 몸이 모두 地, 水, 火, 風의 四大가 화합하여 이루어져, 모두가 허망한 형상으로 만약 이 四大의 본질이 空한 것이고, 가짜라는 것을 깨우칠 수 있다면 바로 空寂의 경계로 들어간다고 설명하고 있다.        ≪佛光大辭典≫, 1654쪽.
또한 혜능이 ≪金剛經≫을 통하여 깨우침을 얻었으며, 그가 가장 중시한 경전중의 하나가 바로 ≪金剛經≫이다.        이것은 五祖弘忍이 ≪金剛經≫으로 제자들을 거두어 들였고, 六祖慧能도 ≪金剛經≫을 통하여 도를 깨우친 것으로 기록하고 있다. 고로 남종선에서는 ≪金剛經≫을 매우 중시하고 있다. “祖以袈裟遮圍不令人見, 爲說金剛經, 至‘應無所住而生其心’ 慧能言下大悟 ‘一切萬法不離自性’”(≪壇經≫)
이러한 ≪金剛經≫에서는 일체의 모든 법은 空으로 귀결된다고 강조하고 있다. 여기에서 “無上”이란 바로 불법의 길을 가리키고, 영산이란, 불교의 명산 靈鷲山을 이른다. 吳子野에게 세상사에 대하여 어떠한 태도를 가지고 있느냐고 묻고는 吳子野의 禪心이 이미 오랫동안 空寂의 경계에 이르러 세상 만물에 대한 실체를 파악하고 있다고 스스로 대답하고 있다. 표면적으로는 吳子野의 출가에 대한 감개를 노래하고 있지만, 실질적으로는 시인 스스로가 禪宗의 空觀을 통하여 자기 인생에 대한 인식과 체험을 이야기하고 있다.
마지막 8구에서 세속의 모든 것을 잊고 선종에 귀의하려는 시인의 의지를 읽을 수 있다. 세간의 일과 출세간의 일 모두를 잘 할 수 없으니, 반드시 빈 마음으로 들어가서 세상사의 모든 것을 잊고자하는 마음을 나타내고 있다. 불교에서는 부처의 경을 읽는 소리를 사자후 같다고 비유하고 있다. 마지막의 “불법에는 남북의 차이가 없다” 구절은 두 가지 측면에서 해석할 수 있다. 첫째로는 ≪壇經≫의 “佛法은 하나이며, 사람은 남북이 있어, 남종과 북종이 세워졌다.”는 측면에서 살펴보면, 이 구절은 불법은 하나이며, 이것은 선종으로 귀결된다는 의미로 볼 수 있다. 또 다른 하나는 혜능이 五祖弘忍을 찾아갔을 때 오조가 “너는 영남인이며 또한 미개인인데, 어떻게 부처가 될 수 있겠는가?”라는 물음에 대해 혜능은 “사람은 남북이 있으나, 불성에는 본래 남북의 차이가 없다.”        “‘弟子嶺南人, 新州百姓, 今故遠來禮拜和尙, 不求餘物, 唯求作佛.’ 大師遂責慧能曰: ‘汝是嶺南人, 又是獦獠, 若爲堪作佛’ 慧能答曰:‘人卽有南北, 佛性卽無南北.’”8쪽.
고 대답하였는데, 여기에서는 불법의 평등성에 대해서 말하고 있다. 어쨌든 소식은 육조혜능의 ≪壇經≫을 인용하는 동시에, 선종의 “空觀”을 통하여 인생의 진리를 나타내며, 또한 불법의 평등성과 인생의 귀의처가 바로 남종선임을 말하고 있다.

이로 보아, 소식은 육조≪壇經≫의 사상에 상당히 정통하였음을 알 수 있다. 그러므로 시인은 작품 곳곳에 ≪壇經≫의 대표적인 사상을 운용하여 任運無碍의 자유로운 경지를 노래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시인이 직접 그 경지를 체험하여 인생의 진리를 나타내는 달관적인 모습도 보여주고 있다.


Ⅳ. 六祖의 遺跡에 대한 인용

육조혜능대사의 소식에 대한 영향은 시문의 여러 곳에서 육조혜능대사의 사상과 경전을 인용하고 있는 데서도 알 수 있지만, 이외에도 소식이 혜능대사의 인격과 학문을 높이 추앙하며 그의 유적에 대해 자주 언급하고 있는 데서도 충분히 파악할 수 있다. 예를 들면, 蘇軾이 興國寺에 있는 육조혜능의 畵像을 대하고 경건한 마음으로 “육조상에 머리를 조아리니, 옛날의 어두움이 지금에는 밝아졌네. 가고 옴이 없으니, 무슨 증감이 있겠는가”        <興國寺浴室院六祖畵贊>: “稽首六師, 昔晦今明. 不去不來, 何損何增.” ≪蘇軾文集≫권21, (北京)中華書局, 622쪽.
라는 감회를 적고 있다. 또한 <卓錫泉銘>에서 “육조대사가 처음 曹溪에 머물 때 탁석천이 솟구쳐 올랐는데, 청량하면서도 매끄럽고 단맛이 있었다. 사대부중에게 충분히 공급하면서, 지금까지 수 백년이 되었다..... 명을 지어 이르기를: ‘조사는 청정한 마음을 가지며, 오로지 본심밖에 없다. 와서 두드리는 사람 있으니, 구름이 솟구치고 샘물이 떨어진다.’”        “六祖初住曹溪, 卓錫泉湧, 淸凉滑甘, 贍足大衆, 逮今數百年矣.……爲作銘曰:‘祖師無心, 心外無學. 有來扣者, 雲湧泉落.’”≪蘇軾文集≫권19, 566쪽.
라고 육조대사의 유적에 대한 설명과 그의 핵심사상에 대해서 찬양하고 있다. <南華長老題名記>에서도 “남화사는 육조대사께서 입적한 후에 그 전하는 법을 얻은 자가 흩어져 사방에 이른다. 고로 남화사는 율사이다.”        “南華自六祖大鑑示滅, 其傳法得眼者, 散而之四方. 故南華爲律寺.”≪蘇軾文集≫권12, 393쪽.
라며, 육조대사가 주석한 남화사의 유래와 육조의 사상이 각 지역으로 널리 전파되었음을 찬양하고 있다.
蘇軾의 나이 59세인 紹聖元年(1094)에 惠州로 안치하라는 명을 받고, 선종의 대표적인 성지이며, 육조대사가 법을 전한 그 유명한 曹溪南華寺에 도착하여 육조탑을 마주하고 아래의 <南華寺>를 지었다.

云何見祖師,        왜 조사를 만나느냐고 말한다면,
要識本來面.        본래의 면목을 알기 위해서이네.
亭亭塔中人,        탑 속에 있는 육조 혜능스님이
問我何所見.        나에게 무엇을 보았느냐고 묻는다.
可憐明上座,        가련한 명상좌 혜명스님은
萬法了一電.        만법을 눈 깜짝할 사이에 깨달았네.
飮水旣自知,        물을 마실 때 스스로 마셔야 맛을 알고,
指月無復眩.        손가락에 다시는 현혹되지 않으리.
我本修行人,        나는 본래 수행하는 사람으로
三世積修練.        삼세에 걸쳐 수련을 쌓았다네.
中間一念失,        중간에 한 순간의 실수로 인하여
受此百年譴.        백년간에 허물을 입었다네.
摳衣禮眞相,        옷자락을 들어올려 육조께 예를 갖추니,
感動淚雨霰.        감동으로 싸라기 같은 눈물이 흐르네.
借師錫端泉,        육조스님의 석단천의 물을 빌어서,
洗我綺語硯.        ≪蘇軾詩集≫卷38.
        아름다운 글을 짓는 벼루를 씻는다네.

시공을 초월하여 육조혜능 앞에선 소식은 자기의 불우한 인생역정과 정치적인 실의에 의한 모순된 감정을 육조혜능의 유적과 사상을 통하여 해소하고 있다. 첫 두 구절에서 혜능과 혜명의 공안을 빌어서 자기가 육조대사를 만난 이유는 바로 자기의 본래면목        육조혜능이 오조가 전한 衣鉢을 가지고 남으로 와 대유령에 이르렀을 때 그를 �아온 惠明(惠順이라고도 함)을 만나서 말하기를 “선함도 생각하지 않고, 악함도 생각하지 않는다. 바로 이러한 때에 어느 것이 명상좌 본래의 면목인가?(不思善, 不思惡, 正與麽時, 那個是明上座本來面目)” 라고 물으니 혜명이 바로 깨우쳤다고 전하고 있다. 東方佛敎學院編, ≪六祖壇經註釋≫, 臺灣佛光出版社, 40쪽.
, 즉 일체의 모든 煩惱와 汚染을 벗어난 自性을 알기 위해서라고 말하고 있다. 고로 3,4구에서 탑 속의 육조대사가 소식에게 무엇을 보았느냐고 묻고 있으며, 5구에서 12구까지는 이에 대한 소식의 대답이다. 위의 공안 중에서 혜명이 혜능의 말을 듣고 순간적으로 깨닫고 “(이전에) 실질적으로 스스로의 면목을 깨닫지 못했는데, 오늘 스님의 가르침을 얻으니, 마치 사람이 물을 마시고 난 뒤에야 스스로 차갑고 따뜻함을 아는 것과 같다”         惠明雖在黃梅, 實未省自己面目. 今蒙指示, 如人飮水, 冷暖自知. 今行者卽惠明師也.” 앞의 책.
는 말을 하였다. 여기에서 소식은 이 말을 인용하여 소식 스스로가 혜명같이 이미 깨우침의 경지에 이르렀음을 설명하고 있다. 또한 선종에서는 언어나 지식에 대한 집착에서 벗어나야 함을 강조하여 “直指人心, 不立文字”, “明心見性” 등을 주장하고 있다. “달을 보지 않고 달을 가리키는 손가락을 보면, 미혹에 빠진다”는 경전을 인용하여, 시인 스스로가 이미 세상의 모든 곡절을 겪고 난 뒤, 진정한 깨우침의 경지에 이르렀기에, 이제 다시는 미혹에 빠지지 않을 것임을 강조하고 있다. 그러므로 본인 스스로가 “나는 본래 수행하는 사람으로, 삼세에 걸쳐 수련을 쌓았다”라는 감탄을 발하고 있다. 그러나 이전에는 이것을 이해하지 못하고 미혹에 빠져서 백년간에 허물을 입었는데, 이제 이 모든 것을 깨치고 육조 앞에서 예를 갖추니, 스스로 감동의 눈물까지 흘렸음을 말하고 있다. 마지막 두 구에서 육조혜능의 卓錫泉의 물을 빌어 모든 언어문자로부터 벗어나 해탈의 경지만을 추구할 것임을 설명하고 있다. 이로 보아 소식은 육조가 강조한 청정한 자성으로 세속의 모든 오염과 번뇌를 씻어내는 동시에 육조에 대해 무한한 공경심을 표시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元符3年(1100)에 儋州(海南道)에서 사면되어 북쪽의 조정으로 돌아갈 때 다시 曹溪南華寺에 이르러 다음과 같은 시를 남기고 있다. <昔在九江蘇伯固唱和....>(권44, 2408)

扁舟震澤定何時,        진택에서 작은 배로 노닐 때가 언제였던가?
滿眼廬山覺又非.        눈에 가득한 여산이 깨어나니 또한 아니네.
春草池塘惠連夢,        혜련이 꿈속에 나타나 좋은 구절 얻었고,
上林鴻雁子卿歸.        상림에서 기러기를 쏘아 자경이 돌아왔네.
水香知是曹溪口,        물향기를 보니 이곳이 조계의 입구이고,
眼淨同看古佛衣.        세속을 떠난 눈으로 함께 법의를 본다네.
不向南華結香火,        남화사를 향하여 향불을 피우지 않고서,
此生何處是眞依?        ≪蘇軾詩集≫卷44.
        이 인생 진정으로 의지할 곳 어느 곳인가?

이 시의 제목은 약100여자에 이른다. 주된 것은 옛날 시인이 소백고와 구강에서 놀면서 서로 시를 주고받은 내용과 꿈속에서 그를 만난 내용 등을 말하고 있다.        시의 내용은 “꿈에 진택에서 작은 배타고 떠돌았고, 흰 파도가 공중을 가로질러 천경을 덮었네. 깨어보니 여산이 눈 안에 가득하고, 무수한 푸른 벼랑이 하늘에 기대 있다네.”이다.
그러므로 위의 작품은 南華寺에서 시인을 며칠동안이나 기다리고 있는 蘇伯固에게 감사의 뜻으로 지어 보낸 것이다. 고로 첫 두 구절은 바로 옛날 소백고와 唱和하던 때를 묘사한 것이다. 3구에서 사령운이 꿈속에서 친척 동생을 만난 뒤, “池塘生春草”라는 좋은 구절을 얻었음을 인용하여, 자기도 꿈속에서 소백고를 만나 비로소 좋은 구절을 얻었음을 말하고 있으며, 4구에서는 ≪漢書․蘇武傳≫인용하여, 시인 자신이 해남의 유배지에서 조정으로 돌아오고 있음을 설명하고 있다.        漢書․蘇武傳≫에 보면, 漢昭帝가 즉위한 후에 蘇武를 돌려줄 것을 흉노에게 요청하였으나, 흉노는 거짓으로 蘇武가 죽었다고 말한다. 그러나 후에 사신이 흉노족을 찾아가 황제가 상림원에서 기러기를 쏘아서 소무의 편지를 받았다고 하여 결국에는 蘇武가 돌아오게 되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蘇軾詩集≫권44, (臺灣)學海出版社, 2408쪽.
5,6구의 “曹溪口”와 “眼淨”은 각각 “南華寺”와 “번뇌를 끊어버린 청정무구한 지혜의 눈”을 가리키며, “古佛衣”란 五祖가 六祖에게 전해준 法衣을 말한다. 여기에서 소식은 장차 소백고와 남화사에서 만나, 청정한 지혜의 눈으로 육조혜능의 법의를 함께 대할 수 있기에, 마지막 두 구절에서 “진정 자기인생이 귀의할 곳은 바로 남화사의 육조혜능대사”라는 感慨를 발하고 있다. 다시 말해서, 시인은 淸淨한 自性으로 六祖慧能의 法衣를 대하는 동시에, 복잡한 현실 속의 모순된 감정과 번뇌로 점철된 자기의 인생을 六祖大師와 南華寺에 歸依시키고 있는 것이다.

아래의 <過嶺二首>시도 靖國元年(1101)에 韶州曹溪에서 大庾嶺을 지나 북으로 돌아갈 때 지은 작품으로, 오랫동안의 유배 생활 속에 나타나는 작가의 정신적인 모순과 고통을 육조의 사상을 통하여 해결하려 함을 알 수 있다.
七年來往我何堪,        어찌하여 나는 칠 년만의 왕래 중에,
又試曹溪一勺甘.        또 다시 조계의 단물을 맛보는가.
夢裏似曾遷海外,        꿈속에서 마치 바다를 건너간 것 같고,
醉中不覺到江南.        ≪蘇軾詩集≫卷45.
        취중에 모르는 사이 강남에 도착했네.

이 시에서 시인은 7년 만에 다시 찾은 남화사를 보고 느낀 감회를 묘사하고 있다. 일반적으로 많은 당송시인들이 禪門을 말할 때 거의 “曹溪”를 언급하지 않음이 없는데, 여기에서의 “曹溪”란 바로 육조혜능의 남화사를 지칭하는 것이다. 또한 “曹溪一滴”, 혹은 “曹源一滴” 등은 바로 혜능의 선법을 비유하여 가리키는 것이다. 즉 한 방울의 물로부터 확대되어 선종의 큰 바다를 이루고 다시 온 천하로 퍼짐을 비유한 것이다. 그러므로 양기파의 법연선사(?-1104)는 일찍이 “조계의 한 방울 물이 인간 세상을 가득 채운다(曹源一滴彌滿人間)”라고 말하였고, 소식도 “庾嶺에서 이별한지 3년이 되었는데, 조계의 한 방울 물 얻었는지 모르겠네.(不知庾嶺三年別, 收得曹溪一滴無.)”라고 말하고 있는데, 여기의 “曹溪”도 모두 혜능의 선법을 지칭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2구의 “曹溪一勺”도 역시 혜능의 선법을 가리키는 것이며, “조계의 단물을 맛본다”는 의미는 혜능의 선법을 깨우쳤다는 의미인 것이다. 그러므로 시인은 영남에서의 7년 동안에 겪은 모든 생활이 하나의 꿈이며, 醉中이라는 결론을 도출하고 있다. 이것은 바로 혜능의 핵심사상의 하나인 空을 말하는 것이다. ≪金剛經≫에서는 일체의 모든 법은 바로 꿈, 환상, 거품과 같다고 강조하고 있다.        ≪金剛經≫:“一切有爲法, 如夢幻泡影, 如露亦如電, 應作如是觀.” ≪佛光大辭典≫, 臺灣佛光出版社, 5776쪽.
다시 말해서 영남과 해남에서의 유배생활과 7년 만에 육조 앞에 다시선 시인이 깨우친 것은 바로 “人生如夢”임을 설명하고 있다. 그러므로 매우 힘든 인생역정을 겪었고, 또한 육조대사의 사상에 심취한 소식으로서는 결국에 육조를 마주보며, 이러한 인간사를 如夢으로 귀결시키고 있는 것이다.
아래의 <贈龍光長老>시도 역시 靖國元年(1101)에 南安軍嶺 아래의 龍光寺를 지나며 지은 시이다.

斫得龍光竹兩竿,        용광사의 대나무를 잘라 두 장대를 얻었으니,
持歸嶺北萬人看.        북쪽으로 가지고 가서 만인에게 보여주리.
竹中一滴曹溪水,        대나무 속에 있는 조계의 한 방울 물이,
漲起西江十八灘.        서강의 십팔탄에 큰 파도를 불러일으켰네.

이 시의 서문에 보면 소식이 龍光을 지날 때 큰 대나무를 구하여 가마를 만들기 위해 두 개의 장대를 얻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당시에 龍光寺에서는 南華寺의 규수좌(珪首座)를 이 산의 長老로 청하였고, 이에 소식은 이 시를 창작하여 규수좌에게 주려고 기다리고 있었는데, 왜냐하면 훗날 규수좌의 어록 중에 첫 번째 질문으로 삼게 하기 위해서라고 말하고 있다. 고로 龍光長老는 바로 南華寺의 규수좌임을 알 수 있다. 첫 두 구절에서 대나무를 북쪽으로 가지고 가서 만인에게 보여주겠다고 말하고 있는데, 그 이유를 3,4구에서 설명하고 있다. 여기에서 “一滴曹溪”라고 칭한 이유는 바로 규수좌가 慧能의 禪法을 계승한 南華寺의 首座이기 때문이다. 4구의 西江의 十八灘은 江西경내에 있으며, 큰 파도를 불러 일으켰다는 것은 南宗禪이 크게 흥성하였음을 비유하고 있는 것이다. 중국선종의 역사를 보면, 唐代에는 臨濟宗, 曹洞宗, 潙仰宗, 雲門宗, 法眼宗의 5家가 크게 흥성하였고, 宋代에 이르러서 다른 종파는 비교적 침체되었지만, 오직 臨濟宗계열이 크게 흥성하여 黃龍과 楊岐 두 파로 발전하였다. 그런데, 이 두 파 모두가 江西경내에서 발전하여 중국선종의 맥을 계승하였다. 그러므로 소식은 曹溪의 한 방울 물이 江西경내에서 크게 흥성한 바와 같이 자기도 이 대나무(즉 혜능의 선법)를 북으로 가지고 가서 그 법을 만인에게 펼쳐 보여주겠다고 말하고 있다. 이렇게 소식은 慧能의 禪法을 대나무와 “一滴曹溪”에 비유하고 있으며, 동시에 선종의 역사적인 사실을 시속에 함축적으로 표현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이외에도, 역시 靖國元年(1101)에 지은 <南華寺六祖塔功德疏>를 보면, 소식은 남화사의 육조혜능의 탑 아래에서 온 가족과 함께 경건한 마음으로 육조대사를 참배하고 감사를 표하면서,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제가 영남과 해남으로 떠돌아다닌 지 전후로 칠 년이 되었습니다. 생사의 갈림길에서 오랫동안 만나지 못하고, 아홉 명이 세상을 떠났습니다. 전생의 죄업 때문에 나쁜 길로 떨어져서, 그리하여 일생동안의 우환으로 항상 타인을 배반하였습니다. 오늘 이렇게 북으로 돌아가니, 약간의 희망이 생겨납니다. 엎드려 바라옵건대 육조선사께서 자비로움과 동정심을 나타내시어, 광명이 널리 미치게 해주십시오. 미숙한 어떠한 허물도 가련히 여겨 그 나쁨을 제거하여 주십시오. 나의 인생이 얼마 남지 않음을 생각하시어, 이렇게 편안하고 한가로움을 하사하셨습니다. 소식이 감히 스스로 본심을 구하지 못했으나, 영원히 여러 業障에서 벗어났습니다. 기대한 만큼의 결과가 있으니, 이에 부처님의 은혜에 보답하려 합니다.        <南華寺六祖塔功德疏>: “伏以竄流嶺海, 前後七年. 契闊死生, 喪亡九口. 以前世惡業, 應墮惡道, 故一生憂患, 常倍他人. 今玆北還, 粗有生望. 伏願六祖寶覺眞空大鑑禪師, 示大慈愍, 出普光明. 憐幼稚之何辜, 除其疾. 念余年之無幾, 賜以安閑. 蘇軾不自求本心, 永離諸障, 期成道果, 以報佛恩.” ≪蘇軾文集≫卷62, 1904쪽.


紹聖元年(1094)에서 靖國元年(1101)에 이르기까지 7년에 걸친 유배생활의 어려운 환경 속에서 시인은 주변의 인물과 생이별 및 사별을 하고 난 뒤, 친히 생명의 본질에 대해 깨달음을 얻어 육조대사 앞에서 三世의 因果應報를 말하고 있는 것이다. 이 문장을 통하여 볼 때 도 소식 본인 스스로 정신적인 고뇌로부터의 해탈을 육조혜능에서 찾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이로 보아, 소식은 육조혜능대사의 행적과 선종의 公案에 대해 상당한 관심과 지식을 가지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그러므로 그는 육조혜능의 남종선사상을 통하여 만년의 복잡한 현실과 모순된 감정을 해결하려 했을 뿐만 아니라, 그 자신이 六祖大師에 대하여 무한한 恭敬心을 표출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Ⅴ. 결  론

결론적으로 蘇軾은 六祖大師에 대한 동경과 흠모를 바탕으로, 六祖의 사상에 대해서 깊은 사고와 인식을 가지고 있음을 알 수 있으며, 또한 이를 운용하는 시인의 능수능란하면서도 뛰어난 문학성도 엿볼 수 있다. 따라서 소식의 적지 않은 詩歌속에는 六祖大師의 偈頌과 ≪壇經≫의 사상 및 六祖大師의 遺跡을 원용하고 있어, 연이은 좌천과 유배의 곤궁한 현실 속에서도 시인은 언제나 대범함을 유지하여 隨緣自適한 생활을 할 수 있었고, 정신적인 고민과 번뇌 속에서도 자아해탈을 추구하여 언제나 낙관적이고 曠達한 면을 보여주고 있다. 이에 따라 그의 禪詩속에는 마치 세속을 벗어난 禪師의 풍모가 보이거나, 혹은 禪師의 機鋒과 같은 詩歌가 나타나는 이유도 여기에 있는 것이다. 이것은 그가 육조대사의 사상뿐만 아니라, 선종사상에 대해 깊은 이해가 있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다.
둘째로 蘇軾은 六祖慧能大師의 禪學에 대한 학습과 동시에 직접적인 실행이 있었기에, 세속의 일에 초연하며, 맑고 청명한 마음을 유지하며 지속적으로 창작활동을 할 수 있었다. 이러한 平靜한 마음과 선종에 의지한 처세태도는 바로 자기인생에 대한 理智的인 반성을 불러왔고, 이를 토대로 정신적인 안위와 여유를 가질 수 있게 되었다. 그리하여 그의 시속에는 언제나 禪理와 禪趣가 담겨져 있는 동시에 인생을 달관한 듯한 해학적인 면도 나타나고 있는 것이다. 이 모든 것이 바로 六祖慧能大師의 사상과 경전, 그리고 유적에 대한 시인의 해박한 지식을 토대로 정신적인 자아해탈을 추구하였기 때문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므로 蘇軾詩歌의 주요한 특징 중의 하나는 바로 해학성과 유머 감이 뛰어나다는 것이다. 이것은 그 자신의 성격의 영향이라고도 할 수 있겠지만, 그러나 禪家의 영향을 직접 받았다고 할 수 있다. 왜냐하면 禪師들이 제자들을 깨우침으로 인도하기 위해 행하는 이성을 초월하는 행위와 언어 속에는 언제나 해학적이면서도 유머러스함이 묻어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일본의 선학자인 鈴木大拙은 ≪禪與藝術≫에서 “만약 우리들이 유머와 해학적인 면을 논하지 않는다면, 곧 하나의 완전한 선학 논문집을 만들어 낼 수 없다”고 규정하면서, 이것이 바로 선종이 다른 종교와 차이가 있는 가장 중요한 요소 중의 하나라고 말하고 있다.        鈴木大拙等著, 劉大悲譯, <禪家的幽墨感>, ≪禪與藝術≫, (臺灣)天華出版公司, 195쪽.
고로 소식의 禪詩속에 나타나는 해학적인 면은 바로 선종사상과 직접적인 관계가 있다고 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