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교이야기/인곡당(법장스님)

德崇禪學 4-1 제1주제 발표; 馬祖禪의 心性論 연구

淸潭 2008. 2. 22. 18:09
 

德崇禪學 4-1 제1주제 발표; 馬祖禪의 心性論 연구

 

 

김태완 (부산대)

1. 서  론

오늘날 우리나라 불교의 주류를 이루고 있는 것은 조사선(祖師禪)이며, 이 조사선을 행하는 종파를 선종(禪宗)이라고 한다. 조사선은 흔히 인도의 28대 조사이자 중국의 제1대 조사인 보리달마가 인도에서 중국으로 전해온 것이라고 말하지만, 실제로 문헌을 살펴보면 중국에서 선종의 실질적 창시자는 불이법문(不二法門)을 세워 남종돈교(南宗頓敎)를 개창한 육조혜능(六祖慧能 638-713)이며, 직지인심(直指人心)을 행하여 오가칠종(五家七宗)의 태두가 된 마조도일(馬祖道一 709-788)과 석두희천(石頭希遷 700-790)이다.
규봉종밀(圭峰宗密 780-841) 이래로 선을 사상적으로 논의할 때에는 대개 심성론(心性論)과 수증론(修證論)으로 구분하여 논한다. 본 논문은 선종(禪宗)의 심성론을 이해하기 위한 한 방편으로 중국 선종 성립기의 가장 중요한 인물에 해당하는 마조도일의 심성론을 밝히는 것을 목적으로 한다.
선공부(禪工夫)의 본래 목적은 불성(佛性)을 깨달아 번뇌의 속박에서 해탈(解脫)하는 것이다. 즉 선공부에서 가장 중요한 점은 깨달음 곧 불성(佛性)을 어떻게 알아낼[見性] 것이냐 하는 점이다. 그러므로 선문헌(禪文獻)의 내용은 주로 불성(佛性)이 어떤 것이며 어떻게 해야 불성을 볼 수 있는가에 관한 것이다. 불성(佛性)은 늘 마음과 연관지어서 말해지기 때문에 불성(佛性)에 관한 설법은 심성론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므로 본 논문의 연구도 마조의 어록 가운데 주로 시중설법(示衆說法)을 분석함으로써 마조의 심성론을 도출할 것이다.
2. 선종 심성론의 특징

선종(禪宗)의 심성(心性)과 입도(入道)에 대한 기본적인 관점을 서술한 것은 ꡔ속고승전(續高僧傳)ꡕ․ꡔ능가사자기ꡕ 등에 실려 있는 달마(達磨)의 이입사행(二入四行) 가운데의 이입(理入)이다. 여기에 따르면, 중생심(衆生心)과 성심(聖心)은 동일진성(同一眞性)인데, 객진망상(客塵妄想)에 덮혀서 진성(眞性)이 드러나지 않는 것이 중생심(衆生心)이고, 객진망상(客塵妄想)을 걷어내고 진성(眞性)으로 돌아가면[捨妄歸眞] 바로 본래 그대로의 진성(眞性)으로서 곧 성심(聖心)이 된다고 한다.        理入者 謂籍敎悟宗 深信含生 同一眞性 但爲客塵妄想所覆 不能顯了 若也捨妄歸眞 凝住壁觀 無自無他 凡聖等一 堅住不移 更不隨於文敎 此卽與理冥符 無有分別 寂然無爲 名之理入(ꡔ楞伽師資記ꡕ 大正藏85-1285a)

요컨대 중생심은 진성(眞性)과 객진망상(客塵妄想)의 이원적(二元的) 구조로 이루어져 있고, 성심(聖心)은 진성일원(眞性一元) 혹은 진망불이(眞妄不二)이다. 중생심의 입장에서는 사망귀진(捨妄歸眞)을 하지 않는 한 범성(凡聖)이 동일할 수가 없으나, 성심(聖心)에서는 범성(凡聖)이 분별되지 않고 동일하다. 따라서 중생심의 입장에서는 사망귀진(捨妄歸眞)하는 입도(入道)의 방법이 관심의 초점이 될 것이고, 성심(聖心)의 입장에서는 객진망상(客塵妄想)에 오염되지 않는 것이 중요할 것이다.
이처럼 심성(心性)을 바라보는 관점에 따라서 선관(禪觀)이 다르고, 선관(禪觀)이 달라지면 선법(禪法)도 달라진다.
중국선종의 전개를 살펴보면, 선관(禪觀)과 선법(禪法)의 변천을 확실히 읽을 수 있는데, 그 이면을 보면 심성(心性)을 바라보는 관점의 변화가 있음을 알 수가 있다. 그러한 변천의 흐름을 요약하면, 육조혜능을 기점으로 하여 그 이전에는 중생심(衆生心)의 관점에서 선(禪)을 바라보고 있으며, 혜능에 의하여 그 관점은 성심(聖心)으로 옮아가고, 혜능 이후의 조사선(祖師禪)은 전적으로 성심의 입장에서 선(禪)을 바라보고 있다고 할 수 있다.
다시 말하여 혜능 이전의 선자(禪者)들은 주로 진성(眞性)이 망상(妄想)에 덮혀 있다는 이원적(二元的) 중생심(衆生心)의 입장에서 사망귀진(捨妄歸眞)의 방법에 관심을 두고 있는 반면, 혜능 이후 조사선의 선자(禪者)들은 일심(一心)에 나타나는 일체는 개진[一切皆眞]이라는 불이적(不二的) 성심(聖心)의 입장에서 불오염(不汚染)에 관심을 두고 있다.        예컨대 마조의 평상심(平常心)에 관한 언급이 이러한 입장을 잘 나타내고 있다. “도는 닦을 필요가 없다. 다만 오염되지만 말라. 어떤 것이 오염되는 것인가? 생사심을 가지고서 조작하고 추구하는 것이 모두 오염이다. 곧바로 도를 알고자 한다면, 평상심이 바로 도이다.”(道不用脩 但莫汙染 何爲汙染 但有生死心 造作趨向 皆是汙染 若欲直會其道 平常心是道)(ꡔ四家語錄ꡕ 馬祖錄 續藏經119-812a)
또한 혜능 이전에는 좌선수행(坐禪修行)을 통하여 사망귀진(捨妄歸眞)하여 견성(見性)을 추구하라고 가르치고 있는 반면, 혜능 이후에는 언하(言下)에 돈오(頓悟)하여 견성(見性)하고 바른 지견(知見)을 갖추어 어긋나지 말 것을 강조하고 있다.
이처럼 선관(禪觀) 내지 선법(禪法)의 변천은 심성론(心性論)의 변화를 동반하고 있다. 그 심성론의 변화는 이원적(二元的) 중생심의 입장에서 불이적(不二的) 성심(聖心)의 입장으로의 변화이다. 물론 중생심의 입장에 있다고 하더라도 성심을 지향하고 있으므로, 이 두 입장이 전적으로 상반되는 입장은 아니다. 사실 앞에서 본 달마(達磨)의 이입설(理入說)은 이 두 입장을 하나의 구조 속에 품고 있으며, 달마가 자교오종(藉敎悟宗)이라고 말하듯이 이것은 경전(經典)에 근거한 가르침이므로 그 기본적 구조가 달라지는 것은 아니다.        졸고 「見性의 心性論的 解明」<ꡔ선학연구ꡕ제1집>(한국선학회, 2001) 참조.

다만 혜능을 전후하여 이원적(二元的)이니 일원적(一元的)이니 하는 입장의 차이를 말할 수 있는 것은, 미혹(迷惑)한 중생심(衆生心)의 입장에 서서 선(禪)을 말하고 행하느냐 아니면 깨달은 성심(聖心)의 입장에 서서 선(禪)을 말하고 행하느냐 하는 입각점(立脚点)의 차이가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입각점의 차이는 단순하지만, 그것에 근거한 선관(禪觀)과 선법(禪法)의 차이는 커서 이른바 북종(北宗) 점수법(漸修法)이니 남종(南宗) 돈오법(頓悟法)이니 하고 달라진 것이다. 이처럼 중국선종의 전개사를 이해함에 있어 이원적 관점에서 일원적 관점으로의 변화를 이해하는 것은 중요하다.


3. 마조 이전 심성론의 개관

달마(達磨)의 심성론(心性論)과 선관(禪觀)은 앞서 보았듯이 선종(禪宗) 심성론(心性論)의 기본 구도를 보여주고 있지만, 진망이원(眞妄二元)의 입장에서 사망귀진(捨妄歸眞)을 말하고 있다. ꡔ능가사자기ꡕ와 ꡔ수심요론ꡕ에 서술되어 있는 달마 이후 오조홍인(五祖弘忍)까지의 심성론(心性論)은 진망이원(眞妄二元)의 중생심(衆生心)에 입각하고 있으며, 그에 따른 사망귀진(捨妄歸眞)의 방법은 응주벽관(凝住壁觀)․묵연정좌(黙然淨坐)․좌선간심(坐禪看心) ․응연수심(凝然守心) 등으로 표현되는 좌선(坐禪)을 통하여 견불성(見佛性)한 후 이것을 불문주야(不問晝夜) 행주좌와(行住坐臥)로 확대하는 좌선관법(坐禪觀法)이다.        若初學坐禪時 於一靜處 眞觀身心 四大五蔭 眼耳鼻舌身意 及貪嗔癡 爲善若惡 若怨若親 若凡若聖 及至一切諸狀 應當觀察 從本以來空寂 不生不滅 平等無二 從本以來無所有 究竟寂滅 從本以來 淸淨解脫 不問晝夜 行住坐臥 常作此觀 卽知自身猶如水中月 如鏡中像 如熱時炎 如空谷響 若言是有 處處求之不可見 若言是無 了了恆在眼前 諸佛法身 皆亦如是(ꡔ楞伽師資記ꡕ 大正藏85-1288c)

이들에 비하여 육조혜능(六祖慧能)은 그 심성론(心性論)을 진망이원(眞妄二元)의 중생심의 관점에서 불이적(不二的) 성심(聖心)의 관점으로, 그 선관(禪觀)을 좌선관법(坐禪觀法)에서 언하견성(言下見性)의 돈오돈수(頓悟頓修)로 변화시킴으로써, 선(禪)을 중국화(中國化)하였다. 혜능의 불이적(不二的) 관점은, 정혜불이(定慧不二)․본성무이(本性無二) 혹은 번뇌즉시보리(煩惱卽是菩提)․범부즉불(凡夫卽佛)로 표현된다. ꡔ단경ꡕ 돈황본과 혜흔본에는 혜능의 이러한 불이법(不二法)이 “정(定)과 혜(慧)는 그 바탕이 하나로서 둘이 아니다.”        我此法門 以定惠爲本第一 勿迷言惠定別 定惠體一不二 卽定是惠體 卽惠是定用(ꡔ六祖壇經ꡕ-敦煌本-, 大正藏48-338b)
라거나, “진여(眞如)와 생각[念]은 체용(體用) 관계로서 둘이 아니다.”        無者無何事 念者何物 無者 離二相諸塵勞 眞如是念之體 念是眞如之用 性起念 雖卽見聞覺之 不染萬鏡而常自在(ꡔ六祖壇經ꡕ-敦煌本-, 大正藏48-338c)
라거나, “둘 없는 성품이 곧 실성(實性)이다.”        無二之性 是名實性(ꡔ육조단경ꡕ -興聖寺本- 나카가와다카 주해. 양기봉 역(서울.김영사.1993)p.255.)
라 하는 등으로 표명되어 있다. 그러나 혜능의 불이법(不二法)은 덕이본 ꡔ단경ꡕ에서 가장 잘 정리되어 나타난다.
ꡔ단경ꡕ에서 불이적(不二的) 입장을 나타내는 방법은 두 가지인데, 하나는 불이(不二) 혹은 무이(無二)라고 하여 이원적(二元的) 입장을 부정하는 것이며, 하나는 불이적(不二的) 입장의 근거가 견자성(見自性)이라고 하는 것이다. 견성(見性)하면 곧 불이(不二)의 입장이 된다는 것이다. 이로써 보면 혜능은 자성일원론(自性一元論)을 말하고 있다고도 할 수 있다. ꡔ단경(壇經)ꡕ을 보면 혜능은 여러 곳에서 자성(自性)이 만법(萬法)의 근원(根源)이며 만법은 자성(自性)에서 생겨나 자성을 벗어나지 못하니, 만법이 곧 자성(自性)이라고 강조하고 있다.        돈황본 ꡔ단경(壇經)ꡕ에서 이러한 내용을 말하는 것을 모아보면 다음과 같다.
        世人 性本自淨 萬法在自性.(大正藏48-339a)
        一切法盡在自性 自性常淸淨.(大正藏48-339a)
        於自性中 萬法皆現.(大正藏48-339a)
        性含萬法...萬法盡是自性.(大正藏48-339c)
        故知一切萬法 盡在自身心中.(大正藏48-340c)
        自性含萬法 名爲含藏識(大正藏48-343b)
이것은 곧 망념(妄念)까지도 자성(自性)에서 생겨나고 자성을 벗어나 따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강조하는 것이다.        이점을 혜능은 체용(體用)의 논리를 이용하여 설명하기도 한다. “진여자성(眞如自性)은 염(念)의 체(體)요 염(念)은 진여의 용(用)이다. 따라서 성(性)이 염(念)을 일어켜 보고, 듣고, 느끼고, 알고[見聞覺知] 하더라도, 만 가지 경계(境界)에 오염되지 않고 항상 자재하다. 그러므로 ꡔ유마경(維摩經)ꡕ에 말하기를, 「밖으로는 제법(諸法)의 모습을 잘 분별하면서도 안으로는 제일의(第一義)에서 움직이지 않는다」라 한 것이다.”(眞如是念之體 念是眞如之用 性起念 雖卽見聞覺知 不染萬境 而常自在 維摩經云 外能善分別諸法相 內於第一義而不動)(ꡔ六祖壇經ꡕ敦煌本 大正藏48-338c)
그러므로 자성(自性)만 올바로 파악하면 만법(萬法)에 이원적 분별은 없다. 자성만 바로 알면 망념(妄念)은 더 이상 망념이 아니라 다만 자성일 뿐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없애야 할 망념이 따로 있는 것이 아니다.
혜능이 이처럼 자성(自性)의 근원성(根源性)과 유일성(唯一性)을 강조하여 자성일원론(自性一元論)의 입장에 선 이후로, 그를 계승한 남종(南宗)의 조사선(祖師禪)도 마찬가지로 불이적(不二的) 일원적(一元的) 입장을 나타내게 된다. 마조(馬祖)의 일심(一心), 황벽(黃檗)의 일진법계(一眞法界), 임제(臨濟)의 일무위진인(一無位眞人) 등이 모두 일원론적 입장에 서있으며, 종밀(宗密)이 ꡔ선원제전집도서(禪源諸詮集都序)ꡕ에서 마조(馬祖) 문하를 일체개진(一切皆眞)        江西 一切皆眞(ꡔ禪源諸詮集都序ꡕ 大正藏48-398b)
이라고 특징지우고 있는 것도 같은 맥락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


4. 마조선의 심성론

마조(馬祖)의 선(禪)을 대표하는 한 마디를 들어보라 하면 그것은, 「지금 각자의 이 마음이 바로 부처이다」라는 말이라 해도 좋을 것이다. ꡔ마조록(馬祖錄)ꡕ의 ‘시중(示衆)’은 이 구절로 시작되고 있고,        祖示衆云 汝等諸人 各信自心是佛 此心卽佛(ꡔ四家語錄ꡕꡔ馬祖錄ꡕ 續藏經119-810b)
시중(示衆) 전체는 이 말에 대한 설명이라고 할 수 있다. 마음이 바로 부처이므로, 마음을 아는 것이 곧 부처를 아는 것이 된다. 그러므로 ꡔ마조록(馬祖錄)ꡕ의 시중(示衆)은 마음이 무엇이며 어떻게 마음을 알 수 있는가 하는 것에 대한 설명이며, 마조와 학인(學人)과의 문답(問答)에서도 마조는 여러 가지 방편(方便)을 통하여 마음을 알 수 있도록 지도하고 있다. 또 ꡔ마조록ꡕ에는 마조가 남악회양(南嶽懷讓)에게 심지법문(心地法門)을 배운다는 이야기가 나오고, 마조는 달마(達摩)가 전한 법(法)이 일심법(一心法)이라고 단정하고 있다.        達磨大師 從南天竺國 來至中華 傳上乘一心之法(ꡔ四家語錄ꡕꡔ馬祖錄ꡕ 續藏經119-811a)

혜능(慧能)까지만 해도 깨달음의 대상은 진성(眞性) 또는 자성(自性)이라 하여 심(心)보다는 성(性)에 관심이 모아져 있었다.        졸고 「慧能의 새로운 禪」<ꡔ철학논총ꡕ제18집>(새한철학회. 2000) 참조.
그러나 마조의 관심은 성(性)이 아니라 심(心)에 있다. 마조의 선(禪)을 특징지우는 구절이 심지법문(心地法門)․즉심시불(卽心是佛)․평상심시도(平常心是道) 등등으로 나타나는 것처럼, 마조가 성(性) 보다는 심(心)에 대하여 주로 언급하고 있는 것을 보아도 마조의 관심이 심(心)에 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ꡔ사가어록ꡕ ꡔ마조록ꡕ에서 조사해 보면, ‘성(性)’ 자(字)는 모두 16회 나타나는 반면, ‘심(心)’ 자는 68회나 나타나고 있다.
성(性) 보다는 심(心)을 주로 언급한다는 사실은 마조선(馬祖禪)의 특징을 나타내고 있는 것이기도 하지만, 이것은 동시에 마조 이하 조사선(祖師禪)의 특징을 나타내는 것이기도 하다.        ꡔ경덕전등록ꡕ에서 마조 문하의 선자(禪者)들을 기록한 제6권에서 제13권까지를 조사해 보면, ‘心’자(字)는 300여회가 나타나는 반면 ‘性’자는 120여회가 나타나며, 또 석두 문하의 선자들을 기록하고 있는 제14장에서 제26권까지를 조사해 보면, ‘心’자가 400여회이고 ‘性’자가 90여회 나타난다. 이러한 현상을 보더라도 마조 문하이건 석두 문하이건 조사선 선자들의 관심은 성(性) 보다는 심(心)에 있음을 알 수가 있다.

ꡔ도서(都序)ꡕ에서 종밀(宗密)은 선종(禪宗)의 심성론(心性論)을 논하면서 일심(一心)을 성(性)과 상(相)의 두 뜻으로 분석하고 있는데, 성(性)은 일심(一心) 가운데 불변(不變)의 측면을 뜻하며, 상(相)은 일심(一心) 가운데 인연(因緣)따라 변화(變化)하는 측면을 뜻한다. 따라서 성(性)은 진여(眞如)와 같고 상(相)은 생멸법(生滅法)으로서 망상(妄想) 또는 망념(妄念)에 해당한다.        不變是性,隨緣是相,當知性相,皆是一心上義,今性相二宗,互相非者, 良由不識眞心,每聞心字,將謂只是八識,不知八識,但是眞心上,隨緣之義,故馬鳴菩薩,以一心爲法,以眞如生滅二門爲義,論云依於此心,顯示摩訶衍義,心眞如是性體,心生滅是相用(ꡔ禪源諸詮集都序ꡕ 卷上之一 大正藏48-401b,c)
심성(心性)에 대한 이와 같은 분석은, 종밀(宗密)이 ꡔ대승기신론(大乘起信論)ꡕ을 따른 것으로서, 선종(禪宗)에든 교종(敎宗)에든 공통적으로 해당된다고 할 수 있다. 앞절에서 보았듯이 달마 이래 혜능까지의 선문헌(禪文獻)을 살펴보더라도 성(性)은 항상 진성(眞性)으로서 일심(一心) 중의 진(眞)의 측면이고, 상(相)은 곧 객진망상(客塵妄想)으로서 일심(一心)의 망(妄)의 측면을 나타내고 있음을 알 수가 있다. 따라서 심(心)이 성(性) 보다는 포괄적 의미이다.
그런데 마조는 일심(一心) 가운데의 진성(眞性)에 주목하는 것이 아니라, 포괄적으로 일심(一心) 전체에 주목하고 있다는 점에서 혜능까지의 조사들과는 다른 새로운 특징을 나타낸다. 이처럼 일심법(一心法)인 마조선(馬祖禪)의 심성론(心性論)의 요점을 말하면, 즉심시불(卽心是佛)․삼계유심(三界唯心)․무생법인(無生法忍)․평상심시도(平常心是道) 등이라고 할 수 있다.

⑴. 즉심시불(卽心是佛)
마조는 지금 자신의 이 마음이 그대로 부처이며,        自心是佛 此心卽佛(ꡔ四家語錄ꡕꡔ馬祖錄ꡕ 示衆 續藏經119-810b)
마음 밖에 따로 부처도 없고 부처 밖에 따로 마음도 없다고 하여,        心外無別佛 佛外無別心(ꡔ四家語錄ꡕꡔ馬祖錄ꡕ 示衆 續藏經119-811a)
마음과 부처를 이름만 다를 뿐 같은 하나로 보고 있다. 이것은 지금 나의 앞에서 눈․귀․코․혀․육체․의식(意識)이라는 지각(知覺)의 문        즉 육근(六根)이다.
을 통하여 육식(六識)으로 작용하고 있는 마음이 그대로 부처라고 하는 의미로서, 종밀이 일체개진(一切皆眞)이라고 요약했던 견해(見解)이다.
앞에서 보았듯이 혜능 이전에는 법신불(法身佛)인 진성(眞性)이 중생심(衆生心) 속에서 망상(妄想)에 가려져 숨어 있다는 것으로서 자성은 진-망(眞-妄) 이원(二元) 가운데 하나로서 말해졌지만, 혜능은 자성(自性)이 만법을 함장(含藏)하고 있어서 만법(萬法)이 모두 자성(自性)으로부터 생겨나고 모두 자성 속에서 나타난다고 하여 자성(自性) 일원적(一元的) 태도를 나타냈는데, 마조가 마음이 곧 부처라고 말하는 것은 혜능의 이러한 일원적 태도를 발전시킨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즉 혜능의 심성론에서 성(性)에 해당하는 자리에 마조는 성(性) 대신 심(心)으로 바꿔서 넣었다고 할 수 있는 것이다.
마조가 이처럼 성(性)을 심(心)으로 대치한 의의를 말한다면, 그것은 철저한 일원적(一元的) 자세의 확립이라고 할 수 있다. 비록 혜능이 자성(自性) 일원(一元)을 말하고 있더라도 성(性)에는 여전히 상대되는 의미로서 상(相)이 있기 때문에, 혜능의 자성 일원은 철저한 일원적 자세는 아니다. 그러나 심(心)은 삼계유심(三界唯心)의 의미를 가지므로 가장 포괄적이며, 따라서 심일원(心一元)은 상대(相對)가 없는 가장 철저한 일원(一元)이다.
선(禪)의 심성론(心性論)에서 일원적(一元的) 자세를 가진다는 것은 미혹한 범부(凡夫)의 입장이 아닌 깨달은 자의 입장에 서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므로 마조가 철저한 일원적 자세를 가진다는 것은 곧 철저히 깨달은 자의 입장을 견지한다는 의미가 있다. 이것은 곧 그 선법이 깨달음의 지혜에 초점을 맞추고 있지, 깨달음을 향한 수행에 초점을 맞추고 있는 것이 아님을 의미한다. 이처럼 깨달은 자의 입장에 서서 깨달음의 지혜에 초점을 맞추고 있는 것에서, 직지인심(直指人心)과 돈오견성(頓悟見性)을 말하는 조사선(祖師禪)이 성립하는 것이다.

⑵. 삼계유심(三界唯心)
‘마음이 곧 부처’라고 말하면서, 마조는 또 ‘삼계(三界)는 마음일 뿐이고 삼라만상(森羅萬象)은 심(心) 일법(一法)이 나타내는 것’        三界唯心 森羅及萬象 一法之所印(ꡔ四家語錄ꡕꡔ馬祖錄ꡕ 示衆 續藏經119-811a)
이라고 말한다. 삼계유심(三界唯心) 또는 일체유심조(一切唯心造)라는 말은 ꡔ능가경ꡕ 제5권 무상품(無常品), ꡔ화엄경ꡕ 55권, ꡔ대승기신론ꡕ 등 대승(大乘)의 여러 경론(經論)에 등장하는 것인데, 마조가 이 구절을 인용하여 자신의 선(禪)인 일심법(一心法)을 주장하는 것이다. 마조가 설명하는 삼계유심(三界唯心)의 내용을 보면, 무릇 색(色)        여기서 색(色)이란 곧 색법(色法)으로서, 일체의 바깥 경계(境界)인 육경(六境)을 가리킨다.
을 보는 것은 모두가 마음을 보는 것이니, 마음은 스스로 마음으로 드러나는 것이 아니라 색(色)에 인하여 드러나기        凡所見色 皆是見心 心不自心 因色故有(ꡔ四家語錄ꡕ「馬祖錄ꡕ 示衆 續藏經119-811a)
때문이라 하고, 또 마음에서 생겨나는 것을 이름하여 색(色)이라 한다        於心所生 卽名爲色(ꡔ四家語錄ꡕꡔ馬祖錄ꡕ 示衆 續藏經119-811a)
고 하며, 또 일체의 법(法)은 모두 심법(心法)이며 일체의 이름은 모두 심명(心名)이라고        一切法 皆是心法 一切名 皆是心名(ꡔ四家語錄ꡕꡔ馬祖錄ꡕ 示衆 續藏經119-812a)
한다. 한마디로 만법(萬法)은 모두 마음에서 생겨나니 마음이 만법의 근본이라는        萬法皆從心生 心爲萬法之根本(ꡔ四家語錄ꡕꡔ馬祖錄ꡕ 示衆 續藏經119-812a)
것이 마조가 말하는 삼계유심(三界唯心)이다.
이처럼 마음이 만법(萬法)의 근본으로서 만법이 마음에서 생겨나고 만법은 모두 마음의 법(法)이라는 말은, 앞서 혜능이 “자성(自性)이 만법을 품고 있으니,...만법이 모두 자성이다.”        性含萬法...萬法盡是自性.(ꡔ壇經ꡕ 敦煌本 大正藏48-339c)
라고 했던 말과 같다. 다만 혜능의 자성(自性)이 마조에게서는 마음으로 바뀐 것이 다를 뿐이다. 이처럼 자성(自性)이 마음으로 바뀐 의의는 위에서 말한 것처럼 가장 포괄적인 의미에서의 심일원론(心一元論)의 확립이다. 그런데 마조는 또 마음이 곧 부처라고도 하고 있다. 따라서 일체법(一切法)은 마음이고 마음은 부처이므로, 이것만 놓고 본다면 종밀(宗密)이 지적한 것처럼 마조의 일심법(一心法)은 일체법이 모두 참되다고 하는 일체개진(一切皆眞)의 특징이 있는 것이 분명하다. 사실 마조도 일체개진(一切皆眞)의 입장을 입처즉진(立處卽眞)이라고 하고 있다.

여러 가지로 성립되는 것이 모두 한 마음에서 말미암으니, 건립하여도 되고 쓸어버려도 된다. 모두가 현묘(玄妙)한 작용이고 모두가 스스로의 일이며, 참[眞]을 떠나서는 설 곳이 없으니, 서는 곳이 곧 참이며[立處卽眞], 모두가 자기의 근본이다. 그렇지 않다고 하는 자는 어떤 사람인가? 일체의 법(法)이 모두가 불법(佛法)이니, 모든 법(法)이 곧 해탈(解脫)이다. 해탈이란 곧 진여(眞如)이니, 모든 법은 진여를 벗어나지 않는다. 가고․머물고․앉고․눕는 것이 모두 불가사의(不可思議)한 작용(作用)이다.        種種成立 皆由一心也 建立亦得 掃蕩亦得 盡是玅用 盡是自家 非離眞而有立處 立處卽眞 盡是自家體 若不然者 更是何人 一切法皆是佛法 諸法卽是解脫 解脫者卽是眞如 諸法不出於眞如 行住坐臥 悉是不思議用(ꡔ四家語錄ꡕ 馬祖錄, 續藏經119-812b)


그런데 종밀은 마조선의 이러한 특징을 가지고서, 일체법이 모두 심법(心法)이라고 일체개진(一切皆眞)을 주장하는 마조선(馬祖禪)에는 진망(眞妄)과 정사(正邪)를 구분 못하는 폐해가 있다고 비판하고 있다.        이제 홍주(洪州)가 단지 말하기를, “탐(貪)․진(瞋)․계(戒)․정(定)은 한 가지로서 곧 불성(佛性)의 작용(作用)이다.”라 하는 것은 미혹함과 깨달음[迷悟]․거꾸로 됨과 바로 됨[倒正]의 작용(作用)을 구별하지 못하는 것이다.(今洪州但言 貪嗔戒定一種是佛性作用者 闕於揀辨迷悟倒正之用也)(ꡔ承襲圖ꡕ 續藏經63-35c)
그러면 과연 마조는 일체개진(一切皆眞)의 입장만을 지키면서 진망(眞妄)과 정사(正邪)를 구분하지 않는다고 할 수 있는가? 다시 말하여 마조는 일체개진(一切皆眞)이라는 깨달은 입장만을 지키면서 진-망(眞-妄)의 이원적(二元的) 틈바구니에 빠져 있는 중생의 입장은 무시하고 있는가? 이제 이 문제를 살펴보자.

⑶. 중생심(衆生心)과 불심(佛心)
일체유심(一切唯心)․즉심시불(卽心是佛)이라고 말하는 마조의 입장은 일체개진(一切皆眞)의 일원(一元)으로서 깨달은 자의 입장이지만, 마조는 또한 깨달음이란 미혹(迷惑)에 대응하여 말하는 것이라 하면서        對迷說悟 本旣無迷 悟亦不立(ꡔ四家語錄ꡕꡔ馬祖錄ꡕ 示衆 續藏經119-811b)
진망(眞妄) 이원(二元)의 미혹된 입장에 관해서도 설명하고 있다. 진망(眞妄) 이원(二元)을 말한다는 것은 일심(一心)을 진성(眞性)과 망념(妄念)으로 분석하여 말한다는 것이다.
마조도 진성(眞性)에 관하여 언급하기를, 자성(自性)은 본래부터 구족(具足)되어 있으므로,        自性本來具足(ꡔ四家語錄ꡕꡔ馬祖錄ꡕ 示衆 續藏經119-811a)
일체 중생은 본래부터 법성(法性)        성(性)은 본래 일진성(一眞性)이므로 진성(眞性), 자성(自性), 법성(法性)이라 말하더라도 모두 같은 성(性)을 말하는 것이다.
을 벗어난 적이 없이 늘 법성 속에서 살아가며 모든 행위는 법성(法性)이라고 말한다.        一切衆生 從無量劫來 不出法性三昧 長在法性三昧中 著衣喫飯 言談祗對, 六根運用 一切施爲 盡是法性(ꡔ四家語錄ꡕꡔ馬祖錄ꡕ 示衆 續藏經119-811b)
이처럼 자성(自性)은 본래 평등성(平等性)으로서 여러 가지가 없지만 이것은 성(性)의 본체적(本體的) 측면이고, 작용(作用)의 측면에서는 오히려 같지 않아서, 미혹한 때에는 식(識)이라 하고 깨달은 때에는 지(智)라 하는데, 리(理)를 따르는 것이 깨달음이고 사(事)를 따르는 것이 미혹함이라고 한다는        性無有異 用則不同 在迷爲識 在悟爲智 順理爲悟 順事爲迷(ꡔ四家語錄ꡕꡔ馬祖錄ꡕ 示衆 續藏經119-812b,813a)
것이 마조의 진망(眞妄) 이원(二元)에 대한 해설이다.
성(性)을 체(體)와 용(用) 양면으로 분석하고 리(理)와 사(事)를 따라 진망(眞妄) 이원(二元)을 설명하는 방식은 종밀(宗密)도 ꡔ도서(都序)ꡕ나 ꡔ승습도(承襲圖)ꡕ에서 사용하는 방식으로서 선적(禪的)인 설명이라기 보다는 오히려 교학적(敎學的)인 설명이다. 이와 같이 성(性)을 체용(體用)으로 분석하여 진망(眞妄) 이원(二元)을 설명하는 마조는, 다시 ꡔ기신론(起信論)ꡕ의 심진여의(心眞如義)․심생멸의(心生滅義)와 거울의 비유를 이용하여 심(心)의 진망(眞妄)을 설명하고 있다. 마음의 작용을 거울이 상(像)을 비추는 것에 비유하면 거울은 마음에 해당하고 상(像)은 제법(諸法)에 해당하는데, 마음이 제법(諸法)을 취하면 바깥 인연과 교섭하게 되니 이것이 생멸의(生滅義)이고, 마음이 제법을 취하지 아니하면 이것이 진여의(眞如義)라는        心生滅義 心眞如義 心眞如者 譬如明鏡照像 鏡喩於心 像喩諸法 若心取法 卽涉外因緣 卽是生滅義 不取諸法 卽是眞如義(ꡔ四家語錄ꡕꡔ馬祖錄ꡕ 示衆 續藏經119-812b)
것이 마조의 설명이다. 결국 진여(眞如)냐 생멸(生滅)이냐 하는 진망(眞妄)의 갈림길은 마음의 거울이 자신에게 나타나는 제법(諸法)의 상(像)을 취하느냐 마느냐에 있다. 그러므로 마조는 다시 “근원으로 돌아갈 줄 모르고 이름을 따르고 상(相)을 쫓으면 미혹(迷惑)한 생각이 망녕스레 일어나 여러 가지 업(業)을 짓는데, 만약 한 생각에 돌이켜 비출 수 있다면 전체가 불심(佛心)이다.”        不解返源 隨名逐相 迷情妄起 造種種業 若能一念返照 全體聖心(ꡔ四家語錄ꡕꡔ馬祖錄ꡕ 示衆 續藏經119-811b)
라고 말하는 것이다.
이렇게 보면 마조가 설명하는 중생의 미혹(迷惑)한 마음이란 곧 명상(名相)의 경계를 따라서 제법(諸法)을 취하고 헤아리는 망념(妄念)을 일으키는 마음이다. 명상(名相)을 따라서 망념(妄念)을 일으키느냐 아니냐 하는 것은 조사선(祖師禪)을 이해하기 위한 중요한 열쇠 가운데 하나이다. 말하자면 선(禪)을 알았느냐 몰랐느냐, 즉 선문(禪門)에서 입처(入處)를 얻었느냐 아니냐, 다시 말해 견성(見性)을 했느냐 못했느냐 하는 것을 결정하는 기준이 바로, 명상(名相)을 따라가느냐 아니면 명상(名相)의 근원인 무명무상(無名無相)의 자성(自性)을 보느냐 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 점은 조사선(祖師禪)의 독특한 공부법(功夫法)인 선문답(禪問答)을 통한 교육과 감변(堪辨)에서 잘 활용되고 있다. 선문답을 통하여 시험하고 가르치는 것은 결국 명상(名相)        문답(問答)을 하는 중이므로 주로 언어(言語)에 의해 나타내진 명상(名相)이지만, 때로는 몸짓을 통해 가리켜진 명상(名相)일 때도 있다.
을 벗어나느냐 벗어나지 못하고 그곳에 매여 있느냐 하는 것이다. 이것은 바로 위에서 말한 식(識)이냐 지(智)냐, 사(事)를 따르느냐 리(理)를 따르느냐, 또는 마음의 거울이 제법(諸法)의 상(像)을 취하느냐 취하지 않느냐 하는 것과 같은 말로서, 중생심(衆生心)이냐 불심(佛心)이냐를 가르는 기준인 것이다.
이처럼 마조는, 진망(眞妄)의 이원적(二元的) 세계에서 망상(妄想)에 기울어져 있는 중생심(衆生心)이란 곧 명상(名相)의 제법(諸法)을 따라가는 마음이라고 한다. 그러므로 마음과 경계(境界)의 본질을 이해하면 망상(妄想)이 생기지 않는데,        了心及境界 妄想卽不生(ꡔ四家語錄ꡕꡔ馬祖錄ꡕ 示衆 續藏經119-813a)
마음과 경계의 본질이란 마음과 경계, 자성(自性)과 만법(萬法), 생멸심(生滅心)과 진여심(眞如心)이 서로 다른 것이 아니라 모두가 하나인 일심(一心)이라는 사실이다. 그러므로 마조는, “마음에서 생기는 것을 색(色)        여기의 색(色)도 앞에서의 색(色)처럼 공(空)과 대비되는 의미에서의 명상(名相)으로 드러나는 일체법(一切法)을 말한다.
이라고 말하므로 색(色)은 공(空)이며, 색(色)이 공(空)이기 때문에 생기더라도 진실로 생기는 것이 아님을 알면, 때에 따라 옷 입고 밥 먹으며 성인(聖人)될 씨앗을 키우고 뜻에 따라 시간을 보낼 뿐이니, 다시 무슨 일이 있겠는가?”        於心所生 卽名爲色 知色空故 生卽不生 若了此意 乃可隨時著衣喫飯 長養聖胎 任運過時 更有何事(ꡔ四家語錄ꡕꡔ馬祖錄ꡕ 示衆 續藏經119-811a)
라고 말한다.
이렇게 보면 중생심(衆生心)이란 색(色)이 마음 밖에 따로 있다고 보는 이원적(二元的) 관점이요, 불심(佛心)이란 색(色)이 바로 마음이라고 보는 것 곧 삼계유심(三界唯心)의 일원적(一元的) 관점이라고 말할 수 있다. 다시 말해 중생심이건 불심이건 본래 하나의 마음일 뿐인데, 중생은 그 하나의 마음을 알지 못하고 색법(色法)을 따로 존재하는 것이라고 보는 것이고, 부처는 일체법(一切法)이 마음 하나일 뿐임을 깨달아 알고 있는 사람이라고 할 수 있다.
⑷. 평상심시도(平常心是道)
마조의 선(禪)에서 불심(佛心) 즉 깨달은 자의 마음을 나타내는 말이 평상심(平常心)이다. 마조는 “그 도(道)        여기서 그 도(道)란 곧 불도(佛道)로서 마조가 사용하는 불법(佛法), 불성(佛性), 불(佛), 진여(眞如), 자성(自性), 일심(一心), 불심(佛心) 등의 말과 동의어(同義語)이다.
를 알고자 한다면 평상심(平常心)이 바로 도(道)이다.”        若欲直會其道 平常心是道(ꡔ四家語錄ꡕꡔ馬祖錄ꡕ 示衆 續藏經119-812a)
라고 말하고는, 이어서 “무엇을 평상심(平常心)이라 하는가하면 무조작(無造作)․무시비(無是非)․무취사(無取捨)․무단상(無斷常)․무범성(無凡聖)이다.”        何謂平常心 無造作 無是非 無取捨 無斷常 無凡無聖(ꡔ四家語錄ꡕꡔ馬祖錄ꡕ 示衆 續藏經119-812a)
라고 하여 평상심(平常心)을 설명하고 있다. 평상심(平常心)이라 하면 무언가 특별한 마음이 아니라 평상(平常)의 마음 즉 일상적(日常的)으로 매순간 끊임 없이 작용하고 있는 마음을 가리킨다. 그러므로 평상심이 바로 도(道)라고 하면 일상(日常)의 매 순간 순간의 마음 그대로가 모두 도(道)라는 것으로 이른바 일체개진(一切皆眞)이라는 뜻과 같다. 그래서 마조는 다시 “지금 가고․머물고․앉고․누움에 때에 응하여 사물을 접하는 것이 모두 도(道)이다.”        只如今行住坐臥 應機接物盡是道(ꡔ四家語錄ꡕꡔ馬祖錄ꡕ 示衆 續藏經119-812a)
고 하고, 또 “도(道)는 곧 법계(法界)인데 무궁한 작용이 모두 법계를 벗어나지 않는다.”        道卽是法界 乃至河沙玅用 不出法界(ꡔ四家語錄ꡕꡔ馬祖錄ꡕ 示衆 續藏經119-812a)
라고 하는 것이다.
이처럼 평상(平常)의 순간 순간의 마음이 모두 도(道)라고 하면서도 마조는 또 평상심(平常心)의 특징으로서 무조작(無造作)․무시비(無是非)․무취사(無取捨)․무단상(無斷常)․무범성(無凡聖)을 말하고 있는데, 이 점에서 마조가 말하는 평상심은 범부(凡夫)의 일상적 마음은 아님이 분명하다. 즉 깨달음을 통해 일원적(一元的) 근원(根源)에로의 반본회귀(返本回歸)를 거치지 않은 범부들의 일상적 마음이 그대로 평상심(平常心)은 아니라는 말이다. 왜냐하면 조작(造作)하고 시비(是非)하고 취사(取捨)하고 분별(分別)하는 것이야말로 중생심의 가장 뚜렷한 특징이기 때문이다.
이와 같이 조작(造作)․시비(是非)․취사(取捨)․분별(分別)이 없는 것이 평상심(平常心)이라면, 평상심은 곧 평등심(平等心)과 같은 뜻일 것이다. 평등심은 이원적(二元的) 중생의 마음이 아니라 진일원(眞一元)의 부처의 마음이다. 앞에서 보았듯이 이원적 중생의 마음이나 일원적 부처의 마음이나 그 마음은 일심(一心)일 뿐으로서 다른 것이 아니다. 다만 사람이 시비․조작․분별을 벗어나지 못하면 그의 마음은 분열되어 평등하지 못하고, 시비․조작․분별을 벗어나면 그 마음은 평등하여 늘 하나의 마음이다. 다시 말하면 범부나 성인(聖人)이나 살아가는 일상(日常)은 꼭 같다. 다만 범부는 그 일상 속에서 시비․조작․분별하며 살아가고, 성인은 시비․조작․분별 없이 살아간다는 점이 다를 뿐이다. 그래서 마조는 “삼계(三界)에서 헤아리는 마음만 없으면 된다.”        但盡三界心量(ꡔ四家語錄ꡕꡔ馬祖錄ꡕ 示衆 續藏經119-811a)
라 하고, 또 “도(道)는 닦을 필요가 없다. 다만 오염(汚染)되지만 말라. 어떤 것이 오염되는 것인가? 생사심(生死心)을 가지고서 조작(造作)하고 추구(追求)하는 것이 모두 오염(汚染)이다.”        示衆云 道不用脩 但莫汙染 何爲汙染 但有生死心 造作趨向 皆是汙染(ꡔ四家語錄ꡕꡔ馬祖錄ꡕ 示衆 續藏經119-812a)
라 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마조가 평상심(平常心)이 도(道)라고 할 때의 평상심(平常心)은 곧 마음이 바로 부처라고 할 때의 그 마음임을 알 수 있다. 앞에서 보았듯이 이 때의 마음은 깨달은 자의 입장에서 말하는 마음이며, 만법(萬法)의 근원으로서의 마음이기도 하고 동시에 일상의 평범한 마음이기도 하다.
요컨대 마조의 일심법(一心法)에서 말하는 바의 마음이란, “모든 법(法)은 모두 마음의 법[心法]이며 모든 이름은 모두 마음의 이름이며, 만법(萬法)이 모두 마음으로부터 생겨나왔으니 마음이 만법의 바탕이다.”        一切法 皆是心法 一切名 皆是心名 萬法皆從心生 心爲萬法之根本(ꡔ四家語錄ꡕꡔ馬祖錄ꡕ 示衆 續藏經119-812a)
라는 일체유심(一切唯心)․만법근원(萬法根源)의 마음이며, 동시에 “마음 밖에 따로 부처가 없고 부처 밖에 따로 마음이 없는”        心外無別佛 佛外無別心(ꡔ四家語錄ꡕꡔ馬祖錄ꡕ 示衆 續藏經119-811a)
마음 즉 “이 마음이 바로 부처”        此心卽佛(ꡔ四家語錄ꡕꡔ馬祖錄ꡕ 示衆 續藏經119-810b)
인 깨달은 자의 마음이다. 따라서 이 마음은 바로, “일체법(一切法)이 모두가 불법(佛法)이니, 모든 법(法)이 곧 해탈(解脫)이며, 해탈이란 곧 진여(眞如)이니, 모든 법은 진여를 벗어나지 않는다. 그러므로 가고․머물고․앉고․눕는 것이 모두 불가사의(不可思議)한 작용(作用)이다.”        一切法皆是佛法 諸法卽是解脫 解脫者卽是眞如 諸法不出於眞如 行住坐臥 悉是不思議用(ꡔ四家語錄ꡕꡔ馬祖錄ꡕ 示衆 續藏經119-812b)
라고 하든가, “모두가 현묘(玄妙)한 작용이고 모두가 스스로의 일이며, 참[眞]을 떠나서는 설 곳이 없으니, 서는 곳이 곧 참[眞]이다.”        盡是玅用 盡是自家 非離眞而有立處 立處卽眞(ꡔ四家語錄ꡕꡔ馬祖錄ꡕ 示衆 續藏經119-812b)
라고 하는 일체개진(一切皆眞)․입처즉진(立處卽眞)의 일원적(一元的) 마음이라고 할 수 있다.


5. 결  론

달마(達摩)에서 동산법문(東山法門)의 홍인(弘忍)까지의 심성론(心性論)은 망념(妄念)이 진성(眞性)을 뒤덮고 있으므로 망념을 걷어내어야 진성이 드러난다고 하는 진-망(眞-妄) 이원(二元)의 심성론이었다. 그러나 중국 선종(禪宗)의 문을 열었다고 평가받는 혜능(慧能)은 자성(自性)의 근원성(根源性)을 강조하며 자성만 깨달으면 망념을 따로 걷어낼 것이 없다고 하는 돈오돈수(頓悟頓修)를 주장하여, 자성(自性) 일원론(一元論)의 색채를 띄게 된다.
일원론(一元論)의 입장이란 곧 깨달은 자의 입장에 선다는 의미인데, 마조(馬祖)는 혜능과는 달리 심(心) 일원론의 입장인 일심법(一心法)을 주장한다. 일심(一心)의 양 측면을 진성(眞性)과 망상(妄想)으로 구분하므로 자성(自性) 일원론은 아직 완전한 의미에서의 일원론은 아니다. 비록 망상(妄想)도 자성(自性)에서 나오므로 그 둘은 서로 다른 것이 아니라고는 하지만, 아무래도 망상을 피하고 진성쪽으로 치우친 감이 남아 있는 것이다.
그러나 심(心) 일원론은 이미 진-망(眞-妄)의 분별을 넘어서 있다. 삼계유심(三界唯心)이라는 의미에서 일체법(一切法)은 심(心) 아닌 것이 없으므로, 마조의 심(心) 일원론은 완전한 의미에서의 일원론이고 철저히 깨달은 입장에 서있으며, 또 그런 뜻에서 보다 보편적이고 일상적으로 된 것이다. 그러므로 마조의 심성론(心性論)인 일심법(一心法)에서는 심지법문(心地法門)․즉심시불(卽心是佛)․평상심시도(平常心是道) 등 심(心)에 초점을 맞추고 있는 것이다.
이 때 심(心)의 의미는 만법(萬法)이 모두 마음으로부터 생겨나왔으니 마음이 만법의 바탕이라는 일체유심(一切唯心)과, 즉심시불(卽心是佛)이므로 일체법이 모두 불법(佛法)이어서 참[眞]을 떠나서는 설 곳이 없으니, 서는 곳이 곧 참[眞]이라는 일체개진(一切皆眞)․입처즉진(立處卽眞)의 심(心) 일원론이다. 이처럼 심(心) 일원론은 마조선(馬祖禪) 심성론(心性論)의 본질을 나타내고 있는 것이기도 하고, 동시에 마조계 조사선(祖師禪)의 특징을 나타내는 것이기도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