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집 제5주제 논평:만공이 현대 한국선에 미친 영향
김태완(부산대)
우선 이런 좋은 논문을 통하여 만공 스님의 선법(禪法)을 자세히 소개해 주신 이덕진 선생님께 깊이 감사드립니다. 더구나 선행 연구가 일천하고 자료도 극히 한정되어 있는 상황에서 이만한 논문을 만들어내신 노고가 새삼 짐작이 됩니다. 중국 조사선을 전공한 평자(評者)는 사실 현대 한국선에 관하여 깊은 이해를 가지고 있지 못합니다. 다만 현대 한국선도 조사선을 본질로 하기 때문에 이 논평을 맡긴 것으로 생각됩니다. 논문을 쓰신 노고를 생각하면 논평한다는 것이 대단히 조심스럽습니다만, 논문을 읽어가면서 눈에 띈 몇 가지를 지적해서 문제를 제기해 보겠습니다.
Ⅰ. 선(禪)이 과연 시대적 상황에 대한 반성의 산물인가?
논자(論者)편의상 논문을 쓴 이덕진 선생을 논자(論者), 평을 하는 본인을 평자(評者)로 표현한다.
는 ‘Ⅱ. 만공이 현대 한국선에 미친 영향, 1. 선 일원의 공부법을 강조’의 7번째 문단에서, “논자는 만공의 철저한 선 일원론이 당대 불교에 대한 반성에서부터 시작되었다고 본다.”... ...“이에 만공은 한국전통불교의 주류인 선불교를 다시 구축함으로써 자기에게 주어진 시대적 소명을 다하려 했던 것이다.”라고 하여, 마치 선이 시대적 사명의 산물인 것처럼 말하고 있습니다.
평자는 선에 관한 글들을 읽으면서 이런 발언을 접할 때마다 뭔가 초점이 어긋나 있다는 느낌을 받습니다. 만약 만공 스님이 선사(禪師)가 아니라 시대정신에 투철한 사상가(思想家)라든지 철학자(哲學者)라고 한다면 시대적 요구에 부응하여 새로운 사상체계나 철학체계를 세웠다고 말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선사의 가르침에 시대정신이 과연 얼마나 중요한 동기가 될 수 있는가 하는 것은 의문이 아닐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불교와 선의 본질은 깨달아 해탈한다는 것인데, 이것은 시대와 장소를 불문하고 인간이라면 모두에게 공통한 근원적이고 보편적인 문제의 해결을 의미하기 때문입니다. 불교와 선의 입장에서 보면 싯달타나 혜능이 안고 있던 문제나 만공이 안고 있던 문제나 지금 이 자리에 있는 우리가 안고 있는 문제는 동일한 문제라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부처, 혜능, 만공이 지금 우리에게 스승이 될 수 있는 것입니다. 따라서 특정한 시대의 요구에 부응하여 선을 행한다는 말은 맞지 않은 말이라고 보입니다.
또 선의 공부는 견성(見性) 이전에 견성을 목표로 하는 공부와 견성 이후의 보림(保任)이 있습니다. 선 공부의 일차적 목표는 견성의 체험이고, 다음은 보림을 통하여 그 체험의 폭과 깊이를 더해가는 것입니다. 이러한 모든 과정에서 가장 핵심은 자신의 체험에 충실할 뿐, 어떤 의도적[有爲] 생각이나 견해도 비우는 무위행(無爲行)일 것입니다. 그리고 제자를 지도하는 것은 어느 정도 보림이 된 상황에서 겠지요.
시대적 소명이라는 역사 해석학적 용어를 적용할 수 있는 경우가 있다면, 견성 후에 보림을 일정 기간 거친 선사가 제자를 지도하는 과정에서 당대의 잘못된 선공부의 관행(慣行)을 비판하고 바로잡아주는 가르침을 폈을 때일 것입니다. 그러나 이 경우에도 선사의 일차적 관심은 병통(病痛)을 바로잡아 올바른 선 공부를 할 수 있도록 인연따라 이끌어 주는 응병여약(應病與藥)의 가르침이지, 무슨 시대적 소명을 수행한다는 생각이 동기가 되었다고 할 수는 없을 것입니다. 선사의 선행위에 시대적 소명이라는 의미를 부여하는 것은 물론 선사상사를 다루는 학자나 역사가의 몫이겠지만, 이러한 의미 부여에는 분명 본말을 전도시키고 있거나 선이 세속적 의미에서의 가치도 가지고 있음을 인정받고자 하는 의도가 깔린 억지 해석을 가하고 있다고 하겠습니다.
본 논문의 경우 논자는 ‘Ⅱ. 만공이 현대 한국선에 미친 영향, 2. 참선의 생활화를 통한 올바른 학인상의 제시’의 마지막 문단에서는 오히려 “만공이 그의 전 생애를 통하여 일관되게 견지한 삶의 태도는, 적극적인 현실참여를 통한 현실정토의 실현보다는, 마음정토를 참선을 통해서 찾는 참된 선사의 면모를 보여주는 것이었다. 다시 말해서 만공은 사실의 세계가 아니라 경지의 세계를 통해서 우리에게 선법의 진수를 보여준다. 만공은 시대에 맞는 선불교, 새로운 선불교를 외치기보다는, 선불교가 어느 시대에나 들어맞는 새로움을 가지고 있음을 주장한다.”라고 하여 앞서의 주장과는 다르게 말하고 있으므로 단순히 논점의 일관성에 관한 문제일 수도 있겠습니다. 그러나 평자가 여기에서 이 문제를 제기하는 것은 어쨌든 선을 이런 식으로 해석하는 경향이 일반적으로 있는 것 같기 때문에, 차제에 논의에 부쳐서 각자의 관점을 정리할 필요가 있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입니다.
만공의 위대성과 현대 한국선에의 기여는 단지 자신의 선 체험에 근거한 공부와 가르침에 충실했을 뿐임에서 찾아지는 것이지, 시대적 소명에 응하여 선을 한 것에서 찾아지는 것은 아니라고 보는 평자의 관점이 잘못된 것일까요? 위의 문제 제기와 더불어 여기에 대한 논자의 일관되고 분명한 관점과 그렇게 보는 이유를 듣고 싶습니다. 논자는 ‘Ⅰ. 들어가는 말’에서 이 논문에서는 만공의 선법(禪法)만을 다루고 만공사상의 대사회적 문제는 배제한다고 하였지만, 만약 선의 의의가 시대적 소명에 부응하여 역사적 역할을 수행하는 데 있다면, 오히려 만공사상의 대사회적 문제를 논점으로 삼아야 하지 않았을까요?
Ⅱ. 한국 간화선 전통의 해석에 미심쩍은 부분이 있습니다.
논자는 만공의 선법이 한국 간화선의 전통에서 어떤 특징을 가지고 어떤 위치에 있는가를 밝히기 위하여 지눌과 혜심을 이용하여 나름의 해석을 가하고 있습니다. 지눌은 경절문(徑截門)에서 조주의 무자화두(無字話頭)를 자성(自性)의 공적영지(空寂靈知)를 현시(顯示)하기 위한 방법[用]으로만 이용하고 있는 반면, 혜심은 조주의 무자화두를 방법[用]으로뿐 아니라 그 자체 목적[體]으로 수용하는 점이 다르다고 논자는 주장합니다. 즉 혜심에게는 “오로지 간화경절문만이 유일한 선적 탐구방법이 되며, 여기에서는 知解는 버려야 할 그 어떤 것이 된다. 자성인 불성은 결코 언어로 현시되지 않으며, 자성은 정의될 때 이미 왜곡되어 진다. 깨침의 경지는 顯示가 아니라 暗示되어질 뿐이기 때문에, 언어는 끊임없이 해체의 과정을 거치게되고, 이러한 해체의 과정을 통하여, 존재 자체가 우리 앞에 열리게 된다.”라고 합니다. 그리고 만공의 경우에는 한편으로 자성(自性)의 묘용을 현시(顯示)함으로써 지눌과 같은 입장에 있으며, 다른 한편으로는 조주의 무자화두를 체(體)이자 용(用)으로 인정하며 오로지 간화선에만 관심을 가진 것은 혜심과 같은 입장이라고 주장합니다.
그런데 평자가 보기에 이 분석을 엮어주고 있는 체(體)와 용(用)의 개념에 혼란이 있습니다. 논자는 선공부의 목적을 체(體)라 하고, 그 목적을 달성하기 위하여 사용하는 수단을 용(用)이라고 규정하고 있습니다. 그리하여 지눌의 경우 용이 조주의 무자화두이고 체는 자성의 공적영지를 현시(顯示)하는 것이며, 혜심의 경우는 용이 조주의 무지화두이고 체는 언어의 끊임 없는 해체라 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만공의 경우 용은 조주의 무자화두이만, 체가 자성(自性)의 묘용을 현시(顯示)하는 것과 언어의 끊임 없는 해체라는 둘이 되어버렸습니다. 세 사람 모두 수단[用]은 조주의 무자화두로서 동일하지만, 목적[體]에서 지눌과 혜심이 달라져서 이 두 사람을 회통(會通)한 입장에 있는 만공에 와서는 목적이 둘이 되는 혼란이 생긴 것입니다.
평자가 보기에 이러한 혼란은 기본적으로 분석의 틀이 잘못된 데 기인합니다. 우선 형식적인 측면에서 본다면 세 사람 모두 선(禪)이라는 동일한 범주에 속하고 있으므로 그 목적[體]은 동일하면서도 그 수단[用]에 차이가 있어야 할 것인데도, 논자는 오히려 수단을 동일하게 잡고 목적에 차이를 둠으로써 오류를 범한 것으로 보입니다.
모든 학선자(學禪者) 나아가 모든 불교인은 견성성불(見性成佛)이라는 동일한 목적을 가지고 있다는 것은 말할 필요도 없는 사실입니다. 이 동일한 목적을 달성하는 방법에서 교(敎)와 선(禪), 북종선(北宗禪)과 남종선(南宗禪), 묵조선(黙照禪)과 간화선(看話禪)이 나누어진다는 것도 주지의 사실입니다. 그리고 아무리 수단이 다양하다고 하더라도 그 모든 수단에 공통하는 속성은 파사현정(破邪顯正)이라는 것도 부인할 수 없는 사실입니다. 물론 이미 나가르쥬나가 밝힌 바처럼 파사즉현정(破邪卽顯正)이므로, 파사와 현정은 견성(見性)이라는 한 체험의 양 측면을 언급하는 말일 뿐입니다. 그러나, 가르침의 방편(方便)에서는 어느 측면을 더 강조할 수가 있습니다. 그러므로 불교의 종파(宗派)는 파사(破邪) 즉 파상(破相)을 보다 강조하느냐, 현정(顯正) 즉 현성(顯性)을 보다 강조하느냐에 따라 분류해볼 수가 있습니다.―파사현정(破邪顯正)을 성상론(性相論)으로 말하면 곧 파상현성(破相顯性)입니다.―이미 규봉종밀은 ꡔ도서(都序)ꡕ에서 이러한 분류를 하고 있습니다.종밀은 파상(破相)을 강조하느냐 현성(顯性)을 강조하느냐에 따라서 선(禪)을 식망수심종(息妄修心宗)․민절무기종(泯絶無寄宗)․직현심성종(直顯心性宗) 등 3종으로 구분하고, 교(敎)를 밀의의성설상교(密意依性說相敎)․밀의파상현성교(密意破相顯性敎)․현시진심즉성교(顯示眞心卽性敎) 등 3교로 구분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평자는 지눌, 혜심, 만공의 경우에도 이러한 분류를 통하여 상호간의 관계를 살펴보는 것이 좋다고 생각합니다. 이 논문의 내용만을 가지고 이들 3인의 관계를 한번 살펴본다면, 지눌은 파상(破相)과 현성(顯性)을 모두 방편으로 사용하면서도 간화선(看話禪)에 관하여는 파상(破相)에 무게를 두고 있으며, 혜심은 간화선의 파상(破相)만을 강조하고 있으며, 만공은 간화선 속에서 파상(破相)과 현성(顯性)을 모두 말하고 있다고 하겠습니다. 물론 이들의 목적은 모두 견성성불(見性成佛)로서 동일합니다. 간화선(看話禪)을 방편으로 하여 파상(破相)을 강조하느냐 현성(顯性)을 강조하느냐에 차이가 있을 뿐이지요.화두(話頭)의 파사(破邪) 기능과 현정(顯正) 기능에 관해서는 지난 3월 17일 한국선학회에서 발표한 평자의 졸론 「선, 언어, 선학」을 참조하기 바랍니다.
물론 평자의 이러한 분류도 선(禪)이라는 언어도단(言語道斷)의 체험에 학문적인 분석을 시도한 것이므로, 하나의 가능한 분석 가운데 하나입니다. 그러나 평자로서는 이렇게 분석하는 것이 보다 진실을 잘 반영할 수 있다고 생각되어서, 논자의 논문에 대하여 감히 하나의 대안적 분석으로 제시해 본 것입니다. 논자는 여기에 대하여 어떻게 보십니까?
Ⅲ. 만공이 독자적 선해석을 했다는 말이 타당할까요?
논자는 ‘들어가는 말’과 ‘나오는 말’에서 만공이 “한국 간화선의 전통을 한편으로는 수용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독자적 선 해석을 통하여 간화선 이해의 폭을 넓혔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평자가 문제삼고자 하는 것은 ‘해석’이라는 용어입니다. ‘해석(解釋)’이라는 용어는 사량분별(思量分別)을 통하여 연구하는 학자(學者)에게나 어울리는 말이지, 선사(禪師)에게 해당되는 말은 아니라고 봅니다.
이것을 사소한 용어의 문제라고 넘겨버릴 수도 있으나, 평자로서는 혹 논자가 선사들의 선공부를 연구와 해석의 활동으로 보는 것은 아닌지 하는 기우(杞憂)가 들어서 지적하는 것입니다. 어떤 의미에서 만공이 선을 해석했다고 하는지를 설명하여 주십시오.
평자가 보기에 만공은 단순히 화두를 통하여 깨달음을 추구하였고, 견성의 체험 후에는 보림에 충실하였으며, 개당(開堂)함에 있어서는 다양한 방편설(方便說)과 방편행(方便行)을 통하여 제자들을 자신과 같은 체험에 이르도록 지도한 것뿐입니다. 간단히 말해 만공은 오로지 시공간(時空間)을 초월한 보편적 진리로서의 선(禪)을 충실히 구도(求道)하였고 지도(指導)하였던 것입니다. 평자로서는 바로 이 점에 만공의 위대성이 있으며, 나아가 현대 한국선에서의 만공의 확고한 위치가 결정된다고 생각합니다. 즉 만공의 위대성은 선사상의 전개사 속에서의 특정한 선 해석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선에 철저히 충실함에서 나오는 것이라고 생각되어서 이러한 문제를 제기해 봅니다.
다시 한번 좋은 논문을 읽게 해주신 이덕진 선생님께 감사드리며 이상으로 논평을 마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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