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교이야기/인곡당(법장스님)

德崇禪學 3-5 제5주제 발표:만공이 현대 한국선에 미친영향

淸潭 2008. 2. 22. 18:04
 

德崇禪學 3-5 제5주제 발표:만공이 현대 한국선에 미친영향

 

이덕진(고려대)


  Ⅰ. 들어가는 말

  滿空月面 禪師(1871~1946)는 1871년(高宗 8년) 전라북도 태인군 태인읍 상일리에서 출생했다. 속성은 宋氏이고, 아버지의 諱는 神通이고, 어머니는 金氏이다. 선사의 諱는 道岩이고, 법명은 月面, 법호는 滿空, 叟山이다. 世壽 75살, 法臘 62살이 되던 1946년 10월 26일 입적하였다.만공의 행장에 대한 자세한 내용은 다음을 참고. 滿空門待會編, 「만공 월면 선사 행장(滿空月面禪師行狀)」, ꡔ滿空法語:보려고 하는 자가 누구냐ꡕ (妙光, 1983), 298~327쪽. (이하 ꡔ滿空法語ꡕ로 표기)

  주지하다시피 만공은 鏡虛惺牛(1849~1912)의 선법을 이어받은 사법제자로서, 修德寺를 중심으로 40 여년간 선법을 펼치며, 현대 한국불교의 선 체계를 확립한 대선사이다. 하지만 만공은 불립문자의 전통 안에 있는 선사이기 때문에 저술 활동은 그의 관심사가 아니었다. 그렇기 때문에 만공의 사상을 논구할 수 있는 유일한 자료는 그의 어록집인 ꡔ滿空法語ꡕ 뿐이며, 그 것은 만공의 사상에 대한 학문적 논구를 가로막는 장벽이 되고 있다. 그 결과 만공에 대한 기존의 연구결과는 거의 없다고 할 수 있다.만공에 대한 연구결과는 박사논문으로는 黃貞洙, ꡔ鏡虛․滿空의 禪思想 硏究ꡕ (동국대학교 박사학위 논문, 1999)가 있고, 연구논문으로는 <鄭性本, 「滿空禪師의 生涯와 禪思想 硏究」, ꡔ한국불교학ꡕ 22집, 한국불교학회, 1997>, <이은윤, 「滿空의 禪世界와 미래문명의 비전」, ꡔ덕숭선학』2집, 한국불교선학연구원 무불선원, 2000>, <釋之鳴, 「滿空禪師」, ꡔ한국불교인물사상사ꡕ, 민족사, 1990> 등이 있다. 그 외에 단편적인 글들이 몇 편 있기는 하지만 만공을 주요 주제로 하지는 않은 글들이다.
즉 모든 것을 처음부터 시작하여야 되는 것이다.
  논자는 만공의 선법이 한국 현대선에 직․간접적으로 미친 영향이 지대함을 인지하고 있다. 그 중에서 논자가 특히 관심을 가지는 부분은 한국 간화선의 전통 안에서의 만공 선법의 독자적인 영역과, 그리고 그의 독자적 선 해석이 현대 한국 불교에 어떠한 영향을 미치고 있고, 또 미칠 수 있느냐 하는 부분이다.
  사실 만공의 사상을 선사상, 그것도 이론적으로, 안에서만 규명하려는 논자의 시도는 만공 전체 사상의 일부분만을 보는 어리석음을 범할 수도 있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는 한편의 단편 논문에서 만공의 사상 전체를 조감하려 한다면 그 시도 또한 어리석을 수 있다. 오히려 많은 연구자들의 각론이 모이면 하나의 훌륭한 총론이 될 수 있을 것이고, 거기에서 만공 사상의 정체가 제대로 드러나게 될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논자는 만공 사상의 대 사회적인 문제, 예를 들어 선학원의 창설 문제, 정치와 종교의 분리문제, 선학 공제회의 문제 등, 는 고의로 담론의 영역에서 배제하고자 한다. 이 논문이 단지 만공 선사상만을 주요 주제로 한정하여 논구하는 것은 이러한 이유 때문이다.

  Ⅱ. 만공이 현대 한국선에 미친 영향

   1. 선 일원의 공부법을 강조
  한국불교는 한편으로는 禪主敎從을 바탕으로 하는 禪敎一致의 관점을 취하면서 궁극적으로는 捨敎入禪의 전통을 가지고 있다. 이때 사교입선이라는 명제는 두 가지 서로 상반되는 의미를 지닌다. 그 하나는 선을 참구하기 전에 반드시 먼저 교학을 충분하게 숙지해야 한다는 것이며, 다른 하나는 경전의 내용과 그리고 표현방법인 문자나 교설, 즉 교학은 한갖 수단에 불과한 것이기 때문에, 경전이 말하고자 하는 내용 이전의 것, 혹은 경전이 말하고자 하는 내용 바로 그 자체를 귀히 여기라는 것이다. 위와 같이 한편으로는 선교일치의 관점을 가지고 있으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선을 중시하는 것이 한국 선의 전통이다.종호, 「한국선의 보편성과 특수성」, ꡔ덕숭선학ꡕ 2집, 한국불교선학연구원 무불선원, 2000, 59쪽.
다음을 보자.

  ㉠지금 교에 의해 마음을 깨달으려는 사람을 위해 (그 중에서도) 번사는 제거해버리고 요강만 뽑아내어 관행의 귀감으로 삼은 것이다. 내가 보기에는 지금의 修心하는 사람들은 문자의 취지가 돌아온 것에 의거하지 않고 바로 밀의를 서로 전한 것만을 도라 하여 서로 접하는 곳이 없는 듯이 헛되게 수고하며 앉아 졸기도 하고, 혹은 관행함에 있어서 정신이 뒤섞이어 어지럽기도 한다. 그러므로 모름지기 여실한 말의 가르침에 의하여 깨닫고 닦는 본말을 결택하여 그것으로써 제 마음을 비춰보면, 곧 시중에 관조함에 있어서 그 功用을 굽게 하지 않을 것이다.ꡔ法集別行錄節要幷入私記ꡕ, ꡔ普照全書ꡕ, (普照思想硏究院, 1989) 103쪽右. “今爲因敎悟心之者, 除去繁詞, 鈔出綱要, 以爲觀行龜鑑. 予觀今時修心人, 不依文字指歸, 直以密意相傳處爲道則溟涬然, 徒勞坐睡, 或於觀行, 失心錯亂. 故 須依如實言敎, 決擇悟修之本末, 以鏡自心, 卽於時中觀照, 不枉用功爾.” (이하 ꡔ節要ꡕ로 표기)

  ㉡세존께서 세 곳세 곳이란 다자탑 앞에서 자리를 절반 나누어주심이 첫째요, 영산회상에서 꽃을 들어 보이심이 둘째요, 사라쌍수 아래에서 관속으로부터 두 발을 내어 보이심이 셋째이다.
에서 마음을 전하신 것은 禪旨가 되고, 한 평생 말씀하신 것은 敎門이 되었다. 그러므로 선은 부처님의 마음이요, 교는 부처님의 말씀이다. …… 말없음으로써 말없는 데에 이르는 것은 선이고, 말로써 말없는 데에 이르는 것은 교다. …… 법은 비록 한 맛이라도 뜻은 하늘과 땅만큼 아득히 떨어진다. …… 그러므로 누구든지 말에서 잃으면 꽃을 드신 것이나 미소하는 것이 모두 교의 자취만 될 것이고, 마음에서 얻으면 세간의 鹿言細語라 할지라도 모두 교밖에 따로 전한 선지가 될 것이다.ꡔ禪家龜鑑ꡕ, ꡔ韓國佛敎全書ꡕ 7冊(동국대학교불교전서편찬위원회, 1986), 635쪽中.“世尊三處傳心者, 爲禪旨, 一代所說者, 爲敎門. 故曰 禪是佛心, 敎是佛語. …… 以無言至於無言者 禪也. 以有言至於無言者 敎也. …… 法則雖一味, 見解則天地懸隔. …… 是故若人, 失之於口, 則拈花微笑, 皆是敎迹, 得之於心, 則世間鹿言細語 皆是敎外別傳禪旨.”

  인용문㉠에서 보이듯이 普照知訥(1158~1210)은 공부하는 이들이 무조건 비밀리에 서로 전하는 바를 道라고 여기는, 당시의 선의 풍조를 개탄한다. 왜냐하면 그는 선을 수행하는 사람들은 우선 진실한 말의 가르침, 다시 말해서 교학적 토대를 가져야 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지눌은 선 수행자들이 우선 선에 대한 확실한 지적 이해를 가지는 것이 긴요하다고 생각할 뿐 아니라, 더 나아가서 선사이면서도 ‘교를 통해서 마음을 깨달으려는 사람들’을 인정한다. 결국 지눌은 교학을 통해서, 선적 수행을 하려는 자들에게, 觀行을 위한 지적 지침을 마련해주려는 것이기 때문에, 그가 이해하는 교는 선에 대립되는 것이 아니다.吉熙星, 「知訥 禪 사상의 구조」, ꡔ知訥의 사상과 그 현대적 의미ꡕ (한국정신문화연구원, 1996), 66쪽.

  인용문㉡에서 보이듯이 西山休靜(1520~1604)에 의하면 선은 부처님의 마음이고, 교는 부처님의 말씀이다. 그에 의하면 법은 이름이 없기 때문에 말로서 미칠 수가 없다. 그러므로 선은 말없음을 방편으로 해서 법에 이르는 것이고, 교는 문자나 교설을 통해서 법에 이르는 것이다. 우리는 여기서 휴정이 선교일원의 견해를 가지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또 휴정은 말에 팔리면 부처가 꽃을 든 것이나 가섭이 미소하는 것이 모두 죽은 이야기가 되고, 마음에서 얻으면 세상의 온갖 잡담이나, 심지어 새소리와 짐승의 울음소리까지도 모두 진리라고 하며, 법은 비록 한 맛이라도 뜻은 하늘과 땅만큼 아득히 떨어진다고 한다. 즉 선은 깊고 교는 옅은 것을 표방한다.ꡔ禪家龜鑑ꡕ, 635쪽下. “法無名故, 言不及也. 法無相故, 心不及也. 擬之於口者, 失本心王也. 失本心王, 則世尊拈花, 迦葉微笑, 盡落陳言, 終是死物也. 得之於心者, 非但街談善說法要, 至於鷰語, 深達實相也. 是故寶積禪師, 聞哭聲, 踊悅身心, 寶壽禪師, 見諍拳, 開豁面目者, 以此也. 此明禪敎深淺.”
즉 근본적으로는 선교일원의 견해를 가지고 있으나, 교는 선으로 들어가는 통로에 불과하다는 사교입선적 견해를 가지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결국 한국 불교, 더 나아가서 한국 선불교의 전통은 선교일원적 전통이라고 말 할 수 있다. 단지 선사들에 따라서 선을 교보다 중시하는 강도가 다를 뿐이다.상기의 인물들은 대표적인 선사일 뿐이고, 이외에도 그 예는 수없이 많다. 이 문제에 대한 보다 자세한 논구는 앞에서 인용한, <종호, 「한국선의 보편성과 특수성」, 62~66쪽>을 참고.
그러나 만공은 지눌이나 휴정과는 좀 다른 입장을 표방한다. 다음을 보자.

  그러기 때문에 마음이란 것은 모든 현인(賢人)과 성인(聖人)의 할아비이며, 모든 법의 근원인고로, 전불(前佛)․후불(後佛)이 마음으로써 마음을 전하시고, 문자(文字)를 세우지 아니하시었나니라. 부처님이 다자탑(多子塔) 앞에서 가섭존자(迦葉尊者)와 자리를 나누시고, 영산회상(靈山會上)에서 꽃을 들어 보이시었으며, 사라 쌍수(沙羅雙樹) 아래 곽(槨)속에서 두 발을 보이사, 이 세 곳에서 마하 가섭(摩訶迦葉)에게 교외 별전 법을 전하시고, 가섭이 아난(阿難)에게 전하사 三十三대에 걸쳐 조사와 조사가 서로 전함이 덕숭산에 이르러 경술년으로부터 이제까지 三十회에 달한바, 무슨 법으로써 사람을 위하였는가?ꡔ滿空法語ꡕ, 207~208쪽.


  만공이 보기에는 8만 4천의 법문이 모두 부처의 말이기는 하지만, 그 것은 모두 아이의 울음을 그치게 하는 것일 뿐이고, 오직 있는 것은 마음을 바로 가르쳐서 견성성불하게 하는 참선법이 있을 뿐이다. 그렇기 때문에 선법을 여의고는 만가지 법을 닦을 지라도 부처의 참된 법이 나타나지 아니하고, 중생을 제도할 수 없다.같은 책, 216쪽.
우리는 여기에서 지눌과 휴정에게서 보이던 한국선의 선교일원의 전통이 만공에게 오면 흔적도 없이 사라지고 마는 것을 볼 수 있다. 즉 철저하게 외골쑤로 선 일원의 공부법 만을 주장하고 있는 것이다.釋之鳴, 「滿空禪師」, ꡔ한국불교인물사상사ꡕ (민족사, 1990), 446쪽.


  논자는 만공의 철저한 선 일원론이 當代 佛敎에 대한 반성에서부터 시작되었다고 본다. 일찍이 조선 왕조 초기에 고려 시대의 여러 종파를 통합하여 禪敎兩宗이라 칭하였지만 실제로는 선종으로의 단일화였다. 그러나 조선 후기로 내려올수록 선 수행의 기풍은 점점 사라지고 講學이나 念佛과 혼합됨으로 선종은 形骸만 남게 되었다. 그러한 상황에서 1876년 개항이 되자 일본불교의 각 종파가 경쟁적으로 한국에 진출하여와서 한국 불교는 또 한번의 변질을 겪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최병헌, 「近代 禪宗의 復興과 鏡虛의 修禪結社」, ꡔ덕숭선학ꡕ 1집(한국불교선학연구원 무불선원, 2000), 61~69쪽.
그러다가 1911년 조선총독부에 의한 寺刹領 반포와 30本山制의 시행으로 한국 불교계는 점차 일제 식민통치에 활용되게 되었다. 따라서 일제 치하의 한국 불교계는 일제의 각종 통제와 불교 자체 내의 내적인 모순을 극복하고 당시 불교계가 직면하고 있는 시대적 과제를 해결하여야만 되었다.김광식, 「일제하 禪學院의 운영과 성격」, ꡔ韓國 近代佛敎史 硏究ꡕ (민족사, 1996), 95~99쪽.
이에 만공은 한국전통불교의 주류인 선불교를 다시 구축함으로서 자기에게 주어진 시대적 소명을 다하려 했던 것이다.
  주지하다시피 선불교는 불교 역사상 가장 혁명적인 개혁불교이다. 그 이유는 다름 아니라 선불교가 교학불교를 ‘마음의 종교’로 변화시켰기 때문이다. 교학불교가 가지고 있는 이론과 실천 사이의 근원적 틈을 이론을 폐기하고 오직 실천만을 통해서 메워보려는 종교운동이었다. 선불교는 더 이상 불교의 형이상학적 모델이나 심리학적 분석에 시간을 쪼개지 않고, ‘마음’에 대한 단도직입적 훈련을 강화시켜, 깨침을 증득하겠다는 것을 표명했다.한형조, 「간화와 돈오를 넘어 새 정체성 만들기」, ꡔ불교평론ꡕ 5호(불교시대사, 2000년 겨울), 129쪽.
즉 교학불교가 잃어버리고 있던 초기의 불교정신을 회복시키려는 종교개혁운동이다. 그렇기 때문에 선불교의 깨달음은 일체 중생에게 개방되어있는 무한한 인간주의의 가능성이다. 그리고 이때 인간주의의 가능성이란 종교적 관용성과 문화적 유연성을 내포한다. 그렇기 때문에 선불교가 만일 어떠한 종교적 기능도 발휘하지 못하고 신비주의이거나 일종의 초월적인 고행, 하나의 고급스러운 정신주의가 된다면 그 폐해는 가공할 만 할 것이다. ‘불립문자 교외별전’이라는 선의 일반적 명제는 교학불교의 거대한 관념론적 담론을 일거에 부정해버리는 일에 유용했지만, 만일 우리가 선불교 우위의 절대적 가치관만을 주장한다면, 그때 선불교는 교학불교가 저질렀던 실수를 다시 한번 더 반복하는 오류를 범하게 될 것이다.一指, ꡔ100문100답ꡕ 下, 대원정사, 1997, 706~717쪽.

  그렇기 때문에 만공의 선 일원의 사상은 역설적으로 우리에게 선 일변의 사고방식을 경계하게 만든다. 만일 오늘날 우리가 만공의 선 일원의 사상을 받아들이면서, 멀리는 초기 선불교의 개혁정신, 가깝게는 만공의 시대정신이 가지고 있는 깊은 함의를 보지 못한다면, 그것은 우리에게 주어진 시대정신을 다하지 못하는 결과가 될 것이다.
   2. 참선의 생활화를 통한 올바른 學人像의 제시
    1) 참선의 구체적 조건을 제시
  외골쑤의 선사인 만공은 자신이 깨침의 경지를 증득했던 ‘萬法歸一 一歸何處’과 ‘無字’ 화두를 학인들에게 주로 권하면서, 참선공부에 필요한 외적조건을 다음과 같이 말한다. 다음을 보자.

  나를 완성시키는 데는 三대 조건이 구비되어야 하는데, 그것은 도량(道場)․도사(道師)․도반(道伴)이다.ꡔ滿空法語ꡕ, 253쪽.


  만공에 의하면 짚신 한 컬레를 삼는 데도 선생이 있다. 그렇기 때문에 일체 만물을 總攝하는 도를 알려는 사람은 도인의 가르침이 없이는 도인이 될 수 없다. 또 이름 있는 버섯 한 송이도 나는 땅이 있다. 그렇기 때문에 도인이 나는 도량은 특별히 있다. 또 도반의 감화력은 선생의 가르침보다도 강한 것이기 때문에 도반 끼리는 서로 존중해야 한다는 것이다.같은 책, 254쪽.
그렇기 때문에 학인은 도량․도사․도반의 요건이 갖추어진 곳을 떠나서는 안 된다.같은 책, 294쪽.
특별하게 위 3가지 중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아무래도 스승이다. 왜냐하면 도는 둘이 아니지만 도를 가르치는 방법은 각각 다르기 때문이다.같은 책, 294쪽.
그렇기 때문에 반드시 善知識을 여의지 말아야 한다. 왜냐하면 선지식은 인생 문제를 비롯하여 일체 문제에 걸림이 없이 바르게 가르쳐 주는 분이기 때문이다.같은 책, 250쪽.

  만공은 참선 공부에 필요한, 위의 3가지 외적 요소에 더하여, 3가지 내적 요소를 말한다.

  남음 없는 신심(信心)만 있으면 도의 기반은 이미 튼튼해진 것이니라.같은 책, 251쪽.

  신심(信心)․분심(憤心)․의심(疑心) 세 마음을 합하여야 공부를 성취할 수 있느니라.같은 책, 251쪽.


즉 선지식을 찾았으면 그에 대한 깊은 믿음이 요구된다. 왜냐하면 이 법은 언어가 끊어지고 心行處가 멸한 곳에서 발견되는 도리이기 때문에 선지식의 직접 가르침이 아니면 배울 수가 없기 때문이다. 즉 선지식의 가르침에 대한 신심만 철저하면 나의 正氣에 대상을 곧 정당화시켜서, 나를 찾는 공부가 성취된다.같은 책, 251쪽~252쪽.
그러나 무조건의 신심에 머물러서는 안되고, 깊은 신심으로부터 깨닫지 못하고 육도윤회하는 나에 대한 憤心으로 발전해야 하고, 강한 분심에서 다시 화두에 대한 강한 의심으로 발전해야 한다.釋之鳴, 「滿空禪師」, 450쪽.
만공에 의하면, 외적 요인으로 도사․도량․도반이 갖추어지고, 내적 요인으로 신심․분심․의심이 갖추어지면 이제 화두 공부를 할 조건이 어느 정도 갖추어졌다고 할 수 있다.
  만공이 참선의 내적 요인으로 강조하고 있는 신심․분심․의심이나 외적 요인으로 강조하는 도사․도량․도반은 만공의 독창적 견해는 아니다. 그러나 단지 이렇게 구체적으로 조목 조목 학인들에게 자상하게 설명하는 선사는 그렇게 흔하지 않다는 점에서 그 함의가 깊다.
    2) 참선의 생활화를 통한 올바른 學人像의 제시
  만공은 참선 수행의 구체적 외적․내적 조건을 제시한 후에, 그 조건이 어느 정도 갖추어진 학인들에게 참선을 생활화 할 것을 늘 당부한다. 다음을 보자.

  참선하는 사람의 시간은 지극히 귀중한 것이라, 촌음(寸陰)을 허비하지 말아야 하느니라.같은 책, 259~260쪽.

  공부가 늦어지는 까닭은 시간 여유가 있거니 하고 항상 미루는 마음이 있기 때문이니라. 자고 나면 오늘은 죽지 않고 살았으니, 살아있는 오늘에 공부를 마쳐야 하지 내일을 어찌 믿으랴! 하고 매일 매일 스스로 격려해 가야 하느니라.같은 책, 260쪽.

  수도(修道) 중에는 사람 노릇할 것은 아주 단념해 버리고 귀먹고 눈먼 병신이 되어, 일체 다른 일에 간섭이 없게 되면 대아(大我)는 저절로 이루어 지나니라.같은 책, 254쪽.


  만공에 의하면 참선하는 사람은 촌음도 허비할 시간이 없다. 그렇기 때문에 공부를 잘하고 못하는 문제보다도 이 공부밖에 할 일이 없다는 결정적 신심부터 세워야 한다.같은 책, 258쪽.
방일은 온갖 위험을 초래하기 때문에,같은 책, 291쪽.
사형이 집행될 시간 직전에도 오히려 여념이 있을지 모르지만, 정진 중에는 털끝만한 어른거림이라도 섞여서는 안 된다.같은 책, 259쪽.
오직 꿈과 생시가 일여하게 공부를 해나가서,같은 책, 258쪽.
꿈속에서도 공부해 가는 것을 증험하여 선생으로 삼아야 한다. 그렇기 때문에 수도 중에는 사람 노릇할 것은 아주 단념해 버리고 귀먹고 눈먼 병신이 되어, 일체 다른 일을 버려 버리면 大我는 저절로 이루어진다. 사람을 대할 때에는 자비심으로 대하여야 하지만, 공부를 위하여서는 극악극독심이 아니면 팔만 사천 煩惱魔를 쳐부수지 못하기 때문에,같은 책, 259쪽.
공부하는 사람은 悟前이나 悟後나 한 번씩 죽을 고비를 넘겨서,같은 책, 258쪽.
세간법과 불법이 둘이 아니요, 부처와 중생이 하나라는, 이 불이법을 증득해야 참 인간이 된다.같은 책, 277쪽.
결국 공부가 늦어지는 까닭은 공부를 주업으로 하지 아니하고 부업으로 하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자고 나면 오늘은 죽지 않고 살았으니, 살아있는 오늘에 공부를 마쳐야 하지 하고 매일 매일 스스로 격려해 가야한다는 것이다.
  특기할 만한 점은 만공은 승려뿐 아니라 일반 대중들에게도 참선 공부할 것을 강조한다는 것이다. 다음을 보자.

  불법을 알면 속인(俗人)이라도 중이요, 중이라도 불법을 모르면 이는 곧 속인이니라.같은 책, 277쪽.

  장맛이 짠 줄을 아는 사람은 다 공부할 수 있느니라.같은 책, 251쪽.


  만공에 의하면 禪門에서 벽을 바라보고 마음을 관하는 것은 안신 입명처를 깨달아 부처님의 깨달음과 같이 하여 길이 참된 사람이 되려는 목적을 가지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이 공부가 다만 출가한 승려만이 하는 일이고, 세속 사람에게는 해당되는 일이 아니라면, 불법은 정법이 아니다.같은 책, 76~77쪽.
또한 세상의 학문은 당시 그 몸의 망상에서 일시의 이용으로 끝나고 말지만, 參禪學은 世世生生에 어느 때, 어느 곳, 어느 몸으로, 어느 생활을 하던지 구애됨이 없이 활용되는 학문이자,같은 책, 249쪽.
장맛이 짠 줄을 아는 사람은 다 공부할 수 있을 정도로 쉽기 때문에, 참선 교육은 전 인류에게 시급히 알려야 할 가장 중요한 것이다.같은 책, 282쪽.
공부에 차별이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승속의 차이는 불법을 알고 모르는데 있는 것이지 머리를 깍고 기르는 데 있는 것이 아니다.
  만공은 참선의 생활화와 더불어 참선의 대중화를 강조하며 일반 대중들도 참선 공부를 할 수 있음을 말하지만, 그러나 그의 주요 관심사는 선불교를 전 인류에게 시급히 알려야 할 책무를 지고있는 승려들을 겨냥한다. 왜냐하면 이때 승려들의 청정 수행의 가풍은 그 자체로 하나의 빛이 되기 때문이다. 만공에 의하면 만유의 주인이요, 천상인간의 스승이 바로 승려이다. 그렇기 때문에 승려 생활을 올바르게 함은 아주 중요하다. 그러기 위해서는 첫째 부처님의 혜명을 잇는 삶을 살아야 한다. 오늘날에 와서는 민중을 교화할 책임이 있는 승려가 도리어 불법을 모르는 경우가 많아서 민중이 도탄에 빠지는 경우가 많다. 만일 승려가 되어 부처님 법을 자기 대에 와서 끊으면 그 죄는 비할 대가 없다. 둘째 주인공의 삶을 살아야 한다. 승려는 이 우주 전체가 나인 것을 깨달아 체달해서, 운명을 지배하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 셋째 세속에 물들지 않는 삶을 살아야 한다. 수도 생활을 하려는 것은 성품이 백련 같이 되어 세속에 물들지 않는 사람이 되려는 것이다. 넷째 인욕․정진하는 삶을 살아야 한다. 정진하는 일은 꿈에서라도 방심해서는 안 된다. 공부는 하지 않으면서 시물을 얻어 쓰는 것은 사기취재이기 때문에, 시주의 밥만 허비해서는 안 된다. 다섯째 무소유의 삶을 살아야 한다. 승려는 부모 처자와 일체소유를 다 버림은 물론 자기 자신까지도 버려야 하는 무위의 삶을 살아야 한다. 세속의 부귀를 부러워해서는 안 되며, 부귀영화 뿐 아니라 부처나 조사에 대한 애착심까지도 끊어야 한다. 또한 승려는 물질 본위의 삶을 벗어나야 하며, 심지어 자신의 노력으로 수입되는 물질이라도 사사로이 사용해서는 안 되며, 일의 성취와 물건의 보존이 대중에게 공익으로 돌아가게 해야 한다. 여섯째 스승은 상좌를 지도하고, 상좌는 스승을 존경해야 한다. 일곱째 반드시 대중에 처해야 하며, 대중을 중히 생각해서. 대중처에서 당파를 지어서도 안 될 뿐 아니라, 도반을 존중해야 한다. 왜냐하면 대중시봉은 곧 부처님 시봉이기 때문이다.같은 책, 281~293쪽.


  만공이 특별하게 하나 하나 구체적으로 힘을 주어 「승니(僧尼)란 무엇인가?」, 「대중처(大衆處)에서 할 행리법(行履法)」 그리고 「경구(警句)」에서 8가지로 조목별로 ‘올바른 승려생활에 대하여’ 제시한 조목들은 만공의 견처를 잘 보여주는 하나의 증거이다.만공이 올바른 승려상에 대해서 언급하는 곳은 대개 세 군데이다. 이 부분은 ꡔ만공법어ꡕ에서 「대중처(大衆處)에서 할 행리법(行履法)」, 「승니(僧尼)란 무엇인가?」, 「경구(警句)」라는 章으로 잘 정리되어 있다. 이때 「대중처에서 할 행리법」은 19조목으로, 「승니란 무엇인가?」는 25조목으로, 「경구」는 30조목으로 되어있다. 모두 74조목이다. 이것을 8가지로 나누어 분류한 것은 논자의 깜냥에 의한 것이다. 만공이 스스로 8가지라고 한 적은 없다.
만공에 의하면 8만 4천의 법문이 모두 부처의 말이기는 하지만, 그 것은 모두 아이의 울음을 그치게 하는 것일 뿐이다. 오직 참선법 만이 견성성불하게 하는 유일한 법이다. 그리고 이때 참선 공부를 하기 위해서는 몇 가지의 조건이 필요하다. 그것은 도사․도량․도반이 라는 3가지 외적 요인과, 신심․분심․의심이라는 3 가지 내적 요인이다. 이 6가지 내적․외적 요소가 갖추어지면, 이제 화두 공부를 할 조건이 어느 정도 갖추어졌다고 할 수 있다. 그 조건이 갖추어진 학인들은 대중처에서 같이 거주하면서 참선을 생활화해야 한다. 꿈과 생시가 여일하게 공부를 해나가서, 사람노릇 할 것을 아주 단념해버리고, 공부를 주업으로 한다면, 大我는 저절로 이루어진다. 만공은 승려들이 올바른 수도생활을 통하여 두 가지의 목적을 동시에 달성할 수 있음을 시사한다. 그 하나는 수행을 통해서 깨달음을 증득하여 大我의 경지에 이른 完人(부처)이 된 다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수행이나 깨달음의 전 과정에서 無我行의 전형을 실천하고 보여줌으로서 세속사회에 하나의 모범사례를 보여준다는 것이다. 이렇게 된다면 선사는 수행한다는 것만을 가지고도 세상에 기여하는 삶을 살게된다. 왜냐하면 승려들의 청정 수행의 가풍은 그 자체가 하나의 빛이기 때문이다.
  논자는 만공에게서 청정한 수행가풍의 하나의 전형을 본다. 만공은 그가 산사에서 일생을 통하여 정진하였다는 사실 하나만을 가지고, 현대 한국인의 가슴속에 禪, 더 나아가서 불교의 존재가치를 확신시켰다. 그야말로 말없는 말이요, 행동 없는 행동인 것이다. 만공이 그의 전 생애를 통하여 일관되게 견지한 삶의 태도는, 적극적인 현실참여를 통한 현실정토의 실현보다는, 마음정토를 참선을 통해서 찾는 참된 선사의 면모를 보여주는 것이었다.오해 없기 바란다. 이 말은 그가 현실참여를 하지 아니하였다는 말은 아니다. 단지 정도의 경중에 대한 언급일 뿐이다.
다시 말해서 만공은 사실의 세계가 아니라 경지의 세계를 통해서 우리에게 선법의 진수를 보여준다. 만공은 시대에 맞는 선불교, 새로운 선불교를 외치기보다는, 선불교가 어느 시대에나 들어맞는 새로움을 가지고 있음을 주장한다. 그렇기 때문에 그는 사실의 세계에 적응하는 ‘불교의 현대화’보다는, 경지의 세계로 사실의 세계를 정화하는 ‘현대의 선불교화’를 시사한다. 그렇게 본다면 오늘 현재 선방에서 정진하고 있는 눈푸른 납자들의 존재야말로, 만공이 그렇게 원하던 대중들의 모습이요, 현대 한국 불교계의 가장 큰 자산이다. 또 어떤 의미에서는 만공의 진정한 후계자들이며, 새로운 만공인 것이다.이능화에 의하면 전체 30본산의  전후 주지 50여인 가운데 선종에 속하는 자는 불과 3, 4인에 불과하고 그 나머지는 모두 교종이다. 조선의 승려 중에 10 중 8, 9는 모두 교종에 속해있었다. 그러나 현재 한국 불교는 종래에 보기 드문 선불교의 융성을 보이고 있다. 이러한 융성의 근저에는 만공을 비롯한 걸출한 선사들에 의한 종래의 선풍 복원이 있다. 1976년 대한불교 조계종 총무원에서 조사한 「전국선원현황」에 의하면 전체 45개소의 선원과 비구 533명과 비구니 396명을 합해서 950명의 선승들이 선원에서 정진하는 것으로 집계되었다. 1982년에는 비구 602명과 비구니 950명 모두 950명의 선승들이 선원에서 정진하는 것으로 집계되었고, 1999년의 「전국선원 정진대중 명단」에 의하면 총림 5개소, 비구 선원 42개소, 비구니 선원 30개소, 전체 77개소의 선원과 총림의 148명, 비구 선원 714명, 비구니 선원 778명 모두 1640명의 선승들이 선원에서 정진하는 것으로 집계되었다. 자세한 것은 다음을 참고. (<敎育院 佛學硏究所編, 「선원의 운영 현황과 문제점」, ꡔ禪院總覽ꡕ, 大韓佛敎曹溪宗 敎育院, 2000, 99쪽>, <崔柄憲, 「近代 禪宗의 復興과 鏡虛의 修禪結社」, ꡔ덕숭선학ꡕ 1집, 한국불교선학연구원 무불선원, 2000, 61~64쪽>, <一指, ꡔ100문 100답ꡕ 下, 대원정사, 1997, 702쪽>




   3. 간화선 전통의 수용과 독자적 이해
    1) 한국 간화선의 두 갈래
  주지하듯이 간화선은 중국 臨濟宗 楊岐派인 大慧宗杲(1089~1163)가 宋代 禪의 분위기를 일대 혁신하고자 내세운 선법이다. 그는 창조적이며 풍부한 사회적 활력을 가지고 唐代 불교를 이끌었던 祖師禪이, 이후 北宋 대에 이르면 새로운 선적 발전을 가져오지 못한 채, 唐代 불교의 범주 안에서 이전의 형식만을 답습하면서, 文字禪化하여 現成公案의 의미를 상실하는 것을 개탄한다. 그렇기 때문에 大慧는 정당한 公案禪으로서의 간화선을 제시하여 禪 본래의 傳燈을 계승하여 宋代 불교의 한계를 극복하고 자 한다. 즉 선불교가 당대이후 교학의 한계를 극복하면서 생긴 실천불교 운동이라면, 간화선은 南宋代 이후, 대혜에 의해서 새롭게 제기되는, 文字禪이라는 宋代 선의 문제점을 극복하고자 하는 실천불교 운동이다.대혜종고의 간화선 문제에 대해서는 강혜원, 종호, 인경, 김호귀, 이병욱이 보조사상연구원에서 이 문제를 최근에 집중적으로 다룬 적이 있다. 대혜의 간화선에 대한 자세한 내용은 다음을 참고. (ꡔ보조사상ꡕ 13집, 보조사상연구원, 2000)

  이후 간화선은 普照知訥(1158~1210)에 의해서 처음으로 우리나라에 도입되며大慧宗杲(1089~1163)의 入寂후 3년 1166년(乾道 6年) 8월에 徑山 妙喜庵 明月堂에서 최초로 그의 語錄이 간행된다. 지눌은, 전후 사정을 살펴볼 때, 지리산 상무주암에서 1197년 대혜의 어록을 열람한 것 같다. 약 30년의 기간밖에 흐르지 않았기 때문에, 지눌이 열람한 대혜어록은 중국에서 간행한 최초의 본이며, 더 나아가서 우리나라에서 대혜의 ꡔ어록ꡕ을 입수한 최초의 인물은 아마 지눌일 것이다. 이후 우리 나라에서는 1387년(洪武 20年)에 대혜의 어록이 최초로 간행된다.
, 지눌의 법을 이은 眞覺慧諶(1178~1210)에 의해서 간화선은 크게 선양된다. 고려말의 懶翁慧勤(1320~1376)이나 太古普愚(1301~1382)는 물론이거니와 조선의 西山休靜(1520-1604), 근세 초의 鏡虛惺牛(1849~1912)와 滿空月面(1871~1946), 그리고 지금에 이르기까지 간화선은 한국의 유일한 참선 수행법으로서의 위치를 굳건히 지키고 있다.종호, 「한국선의 보편성과 특수성」, 76~77쪽.
그러나 간화선이라고 해도 그 함의가 모두 같은 것은 아니다.만공의 간화선을 한국 간화선의 전통과 비교하기 위해서는 많은 사상가들을 논구해야 한다. 보조지눌, 진각혜심, 나옹혜근, 태고보우, 서산휴정, 경허성우, 퇴옹성철과 같은 한국의 뛰어난 선사들은 모두 간화선 적인 전통안에서 그들의 선법을 주장했다. 그러나 이 단편 논문에서 그들을 모두 논구할 수는 없고 그것은 지금 여기에서의 우리의 관심사도 아니다. 논자는 단지 만공의 간화선이 한국의 간화선 전통에서 차지하는 위치를 논구하고자 할뿐이다. 논자의 졸견에 의하면 한국 간화선 수행의 전통을 대표하는 양 축은, 상당한 이견이 예상되기는 하지만, 지눌과 혜심이다. 그렇기 때문에 여기에서는 지눌과 혜심의 간화선에 대한 견해만을 비교하고자 한다. 우리는 지눌과 혜심의 간화선에 대한 비교를 통해서 한국 간화선의 서로 다른 두 가지 견해를 알 수 있을 것이다. 지눌과 혜심의 선법의 동처와 부동처에 대한 문제에 대해서 논자는 이미 2회에 걸쳐서 졸견을 발표한 적이 있다. 그리고 그 주장을 번복할 만한 근거를 아직까지 발견하지 못했다. 그렇기 때문에 이 글에서의 견해는 그 글들과 크게 다르지 않다. 이 문제에 대한 보다 자세한 논자의 입장은 다음의 글들을 참고했으면 한다. (<「慧諶의 禪思想에 대한 硏究」, ꡔ철학연구ꡕ 20집, 고려대학교 철학연구소, 1997>, <「看話禪의 ‘狗子無佛性’에 대한 一考察」, ꡔ한국선학ꡕ 창간호, 한국선학회, 2001>)
먼저 지눌의 입장을 보자.

  情識이 아직 깨뜨려지지 않았으면, 마음의 불이 활활 타오를 것이니, 바로 이러한 때를 당하게 되면 단지 의심하는바 화두를 든다. 예컨대 어느 스님이 조주스님에게 묻기를 '개에게도 불성이 있습니까?' 조주스님이 답하기를 '無'라고 하였으니, 다만 이 화두를 들고 의식에서 놓치지 않는 데만 몰두한다. 즉 왼쪽이라고 해도 옳지 않고, 오른 쪽이라고 해도 옳지 않다. 有다 無다 하는 알음알이를 짓지 말고, 참된 無의 無라고 이해하지 말며, 道理의 알음알이를 짓지 말고, 意根 속에서 사량분별하지 말며, 눈썹을 치뜨고 눈을 깜박이는 곳에서 뿌리박지 않아야 하며, 언어의 길에서 살길을 짓지도 말며, 모든 것을 날려 버리고 일없는 경계에 틀어박혀 있지도 말고, (화두를) 드는 것만으로 알아차리려 하지도 말며, 문자에서 인용해 증거 삼지 말고, 미혹된 상태에서 깨달음의 시기를 기다리지도 말아야한다. (화두를 들다가) 마음을 쓸 여지가 전혀 없고 마음이 어디로도 갈 곳이 없어졌을 바로 그 때 허무(空)에 떨어지지 않을까 두려워하지 말라. 이 경계가 오히려 화두를 공부하기 좋은 상태인 것이다. 갑자기 쥐가 소뿔로 만든 쥐틀에 들어가 오도 가도 못하는 것과 같아서 모든 망상분별(倒)이 끊어지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ꡔ看話決疑論ꡕ, ꡔ普照全書ꡕ, 96쪽左~97쪽右. “情識未破, 則心火熠熠地, 正當恁麽時, 但只以所疑底話頭提撕, 如僧問趙州, 狗子還有佛性也無, 州云無. 只管提撕擧覺, 左來也不是, 右來也不是, 不得作有無會, 不得作眞無之無卜度, 不得作道理會, 不得向意根下思量卜度, 不得向揚眉瞬目處垜根, 不得向語路上作活計, 不得颺在無事甲裏, 不得向擧起處承當, 不得文字中引證, 不得將迷待悟, 直須無所用心, 心無所之時, 莫怕落空, 這裏却是好處, 驀然老鼠入牛角, 便見倒斷也.”


  주지하다시피 구자무불성을 화두로 들고 참구하는 선적방법은 대혜에 의해서 구체화된다.無字話頭는 大慧에 의해서 처음으로 제시된 工夫法은 아니다. 趙州從諗(778-897)에게 어느 僧侶가 “개에게도 佛性이 있습니까?”라고 물었을 때 趙州가 “없다”라고 대답하고, 다시 그 僧侶가 “위로는 부처님으로부터 아래로는 昆蟲에 이르기까지 모두 佛性이 있는데, 개에게는 왜 없는 것입니까?”라고 되물었을 때, “그에게는 業識性이 있기 때문이다.”라고 대답한 問答과, 또 다른 시간에 어느 僧侶가 “개에게도 佛性이 있습니까?”라고 물었을 때, 趙州가 “집집마다 門前은 長安으로 통하고 있다.”라고 대답하여, 趙州가 한번은 개에게는 佛性이 있다고 또 다른 한번은 개에게는 佛性이 없다고, 서로 矛盾되어 보이는 대답을 한데서 유래한다.
그리고 지눌은 구자무불성을 대혜의 간화선을 대표하는 언명으로 본다. 즉 지눌은 대혜가 해석한 조주의 구자무불성에 대한 견해를 몸을 빼어낼 活路로서 받아들이고 있다.그러나 표면적인 모습과는 달리 지눌은 대혜의 구자무불성을 그대로 수용하지는 않는다. 대혜의 간화선은 지눌의 선법에, 방법론적인 입장에서, 부분적으로만 받아들여진다. 대혜와 지눌의 간화선에 대한 해석의 차이도 역시 앞에서 인용한 「看話禪의 ‘狗子無佛性’에 대한 一考察」을 참고.
그렇다면 누가 어떻게 공부하여야 活路가 될까? 다음을 보자.

  근래 어설피 배우는 무리가 선문의 화두를 참상하는 묘하고 비밀한 이치를 알지 못한 채 이러한 의심을 갖는다. 만일 眞性이 緣起[性起]하는 이치와 分齊를 논하건대, 곧 선을 배우는 사람들이 어찌 이러한 열 가지 禪病이 화엄의 法界緣起와 같은 줄을 알지 못하겠는가.…… 따라서 마음이 일어나는[性起] 덕을 온전히 밝히는 것이다.ꡔ看話決疑論ꡕ, ꡔ普照全書ꡕ, 91쪽右. “近來汎學輩, 不知禪門話頭參詳妙密旨趣, 多有此疑. 若論眞性緣起義理分齊, 則禪學者, 豈不知此十種禪病, 如華嚴法界緣起耶, …… 此全明性起之德.”


  지눌이 여기에서 말하는 어설피 배우는 무리는 교학자, 그 중에서도 화엄교학자를 지칭함에 틀림이 없다. 즉 화엄교학자들은 화엄에서 이미 연기의 이치를 밝혔는데, 무엇 때문에 선문의 화두 참구가다시 필요한 가하고 의심을 갖는다. 하지만 그것은 잘 모르고 하는 말이다. 왜냐하면 간화선을 공부하는 사람들이 화엄의 법계연기와 간화선의 열가지 선병[무자화두]이 같은 줄을 모르는 것이 아니다. 다만 선의 무자화두를 참구하는 이들은 화엄교학이 이론적으로만 성불을 논하기 때문에 실천적인 수행을 하지 못하는 것을 알고, 동일한 심성론적 토대인 自性의 緣起라는 性起를 실천적인 實修行의 입장에서 증득하고자 한다는 것이다. 즉 선의 무자화두를 참구하는 이치와 화엄교학의 법계연기의 이치는 같은 性起의 공덕이라는 것이다.
  우리는 여기서 지눌의 선․교에 대한 기본적인 입장을 알아차릴 수 있다. 그 하나는 간화선과 화엄교학이 같은 심성론적 토대로서의 마음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고, 나머지 하나는 간화선은 화엄의 약점인 수행의 측면을 보완해준다는 것이다. 이러한 지눌의 입장은 두 가지를 시사한다. 그것은 간화선이 방법론적으로 교학보다 우수하다는 것과, 그러나 교학은 방법론적인 측면에서 간화선에 미치지 못할 뿐이지 근본적인 입장에서는 간화선과 같은 이야기를 하고 있다는 것이다. 결국 지눌의 선법은, 선을 교보다 방법론적으로 중시하지만, 근본적으로는 선교일원의 입장이다. 다음을 보자.

  먼저 여실한 知解로 자심의 진실과 허망과 생사를 가려서 본말을 환히 가리어 결정하고, 그 다음에 못을 자르고 쇠를 끊는 말[話頭]로써 세밀하고 자세히 참구하여 몸을 빼어 낼 곳을 얻게되면, 이른바 네 모퉁이로 땅에 꼭 붙어있는 것과 같아서, 흔들어도 움직이지 않을 것이고, 生으로 나오거나 죽음으로 들어가거나 큰 자유를 얻은 사람이 된다.ꡔ節要ꡕ, ꡔ普照全書ꡕ, 164쪽左. “先以如實知解, 決擇自心眞妄生死, 本末了然, 次以斬釘截鐵之言, 密密地, 仔細叅詳, 而有出身之處, 則可謂四稜著地, 掀揧不動, 出生入死, 得大自在者也.

  觀行하는 사람이 집착을 비워 마음을 밝게 하지 못하고 의리에 걸려 있을까 걱정하기 때문에, (ꡔ節要ꡕ의) 맨 끝에 본분종사의 경절문의 언구[話頭]를 간략히 끌어와 지견의 병을 씻어 버리고 몸을 빼어낼 살길이 있음을 알게 하였다.같은 책, 103쪽左. “又恐觀行者, 未能忘懷虛朗, 滯於義理, 故末後略引本分宗師, 徑截門言句, 要令滌除知見之病, 知有出身活路爾.”


  지눌은 조주의 무자화두로 대표되는 대혜의 간화선을 깨침을 증득하기 위한 수행의 방편으로 받아들인다. 그러나 지눌에 의하면 무자화두[구자무불성]는 두 가지의 용도를 지니고 있다. 그 하나는 중․하근기의 경우인데, 이들에게는 여실한 知解로 자심의 진실과 허망과 생사를 가려서 본말을 환히 가리어 결정하는 頓悟[解悟]가 먼저 요구된다. 그리고 화두 공부는 돈오이후의 점수를 함에 있어서, 못을 자르고 쇠를 끊는 말[話頭]로써, 필요하다는 것이다. 즉 말[知解]에 의지하여 해오할 수밖에 없는 중․하근기들의 경우 간화선은 점수를 제대로 하는 방편으로서 제시된다. 다른 하나는 상근기의 경우이다. 지눌은, 지해를 단박에 없앨 수 있는 능력을 가진 이 들에게는 돈오점수 가 아닌 별도의 지름길로서의 看話徑截의 방편을 제시한다.같은 책, 159쪽中. “故 更爲今時衲僧門下, 離言得入, 頓亡知解之者. 雖非密師所尙, 略引祖師善知識, 以徑截方便, 提接學者, 所有言句, 係於此後, 令叅禪峻流, 知有出身一條活路耳.”
즉 공부하는 사람이 義理의 흔적에 걸려 있을까 걱정하여, ꡔ절요ꡕ의 뒷부분에 本分宗師들의 話頭를 끌어와 知見의 병을 씻어 버리고 몸을 빼어낼 活路가 있음을 알게 하였다고 한다.
  결국 지눌에 의하면 구자무불성은 두 가지의 도구적 용도를 가지고 있다. 그 하나는 돈오라고 표현되지만 사실은 해오의 상태인 돈오 이후에 점수를 제대로 하기 위한 방편이고, 나머지 다른 하나는 지해를 단박에 없앨 수 있는 능력을 가진 상근기를 위한 방편인 돈오이다. 이때 그 두 가지의 용도가 모두 깨침을 증득하기 위한 방법론이라는 점에 지눌이 대혜의 간화선을 받아들이는 특징이 있다. 그렇다면 그 방법론은 궁극적으로 무엇을 겨냥하고 있는 것일까? 다음을 보자.

  頓悟란 범부가 迷했을 때에 네 가지 물질적 요소로 몸을 삼고 망상으로 마음을 삼아 自性이 참 法身인 줄 모르며 자기의 神靈스럽게 아는 知[靈知]가 참 부처인줄 모른다. 그래서 마음 밖의 부처를 찾아 이리 저리 달리다가 홀연히 선지식의 가르침을 만나 한 생각에 光明을 돌려[一念廻光] 자기 본성을 보면, 이 성품의 바탕에는 본래부터 번뇌가 없고 무루지성이 저절로 갖추어져 있어서 모든 부처님과 조금도 다르지 않는 것을 깨닫는 것이다. 그러므로 頓悟라 한다.ꡔ修心訣ꡕ, ꡔ普照全書ꡕ, 34쪽中. “頓悟者, 凡夫迷時, 四大爲身, 妄想爲心, 不知自性是眞法身, 不知自己靈知時眞佛, 心外覓佛, 波波浪走, 忽被善知識, 指示入路, 一念廻光, 見自本性. 而此性地, 元無煩惱, 無漏智性, 本自具足, 卽與諸佛, 分毫不殊, 故 云頓悟也.”


  지눌에 의하면 우리는 누구나 자심을 갖추고 있다. 마음의 본래 모습은 비고 고요하면서도[空寂] 동시에 신령스럽게 알고[靈知], 절대불변하면서도 환경에 따라 가지가지의 작용을 다툰다. 그리고 이러한 마음은 과거․현재․미래의 모든 부처님의 바탕이며 동시에 우리의 바탕이기도 하다.같은 책, 36쪽左~37쪽右. “諸法皆空之處, 靈知不昧, 不同無情, 性自神解, 此是 汝空寂靈知, 淸淨心體. 而此淸淨空寂之心, 是三世諸佛, 勝淨明心, 亦是衆生本源覺性.”
그렇다고 해서 자심 그 자체가 바로 자성인 것은 아니다. 하지만 자성은 자심을 벗어나서 존재할 수는 없다. 따라서 인간이 아닌 무정에는 자심이 없으니, 자성도 없다. 지눌은 자심 밖에 부처가 있음을 믿지 않는다. 자심은 불법을 수용하는 心城이다.ꡔ勸修定慧結社文ꡕ, ꡔ普照全書ꡕ, 10쪽中. “守護心城, 增長觀照, 寂爾有歸, 恬然無間.”
그렇기 때문에 ‘부처 됨’이란 자심 그 자체의 확장, 즉 자심을 깨달아 묘용을 일으키는 것 이외의 다른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같은 책, 7쪽右. “迷一心而起無邊煩惱者, 衆生也. 悟一心而起無邊妙用者, 諸佛也.”
즉 불성으로서의 자성과, 그 자성을 둘러싼 城인 자심에 대한 탐구가 지눌 선사상의 일관됨이다. 그렇기 때문에 지눌의 대혜를 보는 입장도, 自性의 空寂靈知를 보다 빠르게 실천적으로 얻기 위한, 방법론적인 자각으로서의 간화경절문이다. 즉 지눌의 경우에 구자무불성이란 무자화두는 佛性인 自性의 空寂靈知를 廻光返照하기 위한 도구이다. 그러나 혜심은 지눌과는 다르다. 다음을 보자.

  ㉠이 문에 들어와서는 知解를 가지지 말라. 대개 그 지해란 모두 情에 속하는 것이다. 그것을 생각하면 생각할 수록 도에 크게 어긋난다. 道라는 한 글자를 나는 듣기를 기뻐하지 않는다. 문이 이미 활짝 열렸으니 그대는 모름지기 곧바로 들어오라.ꡔ眞覺國師語錄ꡕ, ꡔ韓國佛敎全書ꡕ 6冊(동국대학교불교전서편찬위원회, 1986), 11쪽上. “入此門來, 莫存知解. 蓋爲知底解底, 盡屬於情. 思之念之, 大乖於道. 道之一字, 吾不喜聞. 門已八開, 君須直入.” (이하 ꡔ語錄ꡕ으로 표기)

  ㉡스승(天童正覺)이 말했다. ‘조주가 있다고도 없다고도 말하니, 개의 불성을 천하 사람 분별하네. 얼굴 붉은 것이 말 곧은 것만 못하니, 마음이 곧거든 말 거친 것 허물 말라. 七百甲子를 산 늙은 선사가 나귀 똥으로 남을 만나서 눈알을 바꿔 주네.’ (혜심은 말한다.) 대충 공부하는 道人과 俗人의 무리들은, 이 화두의 시종 문답을 보고서, 말을 따라서 뜻을 정하여, 有無의 無라고 決定지어 생각한다. (혜심이 보기에 위와 같이 생각하는 자들은) 오조 법연화상이, ‘조주가 칼끝을 드러내니, 찬 서리와 같은 빛이 번덕인다. 어떠한가를 또 다시 물으려 하면, 몸을 나누어 두 토막을 내리라.’ 고 한 게송과, (또) 진정화상이, ‘業識이 있다고 말하는구나! 누가 그 뜻이 깊지 않다고 말하겠는가. 바다가 마르면 종내 바닥이 보이지만, 사람은 죽어도 마음을 알지 못하는 법이다.’라고 한 게송의 뜻을 전혀 모르는 탓이라 하겠다.「狗子無佛性話揀病論」, ꡔ韓國佛敎全書ꡕ 6冊, 69쪽中. “天童擧僧問趙州. 狗子還有佛性也無? 州云有. 僧云爲什麽, 撞入這箇皮帒? 州云他知而故犯. 又僧問趙州. 狗子還有佛性也無? 州云無. 僧云一切衆生皆有佛性, 爲什麽, 狗子却無? 州云爲他有業識在. 師云 趙州道有, 趙州道無, 狗子佛性, 天下分疎. 面赤不如語直, 心眞莫怪言麤. 七百甲子老禪伯. 驢糞逢人換眼珠. 汎叅道俗, 看此話始終問答, 隨言定旨, 決定作有無之無. 殊不知, 五祖演和尙頌云, 趙州露刃劒, 寒霜光焰焰. 擬欲問如何, 分身作兩段. 眞淨和尙頌云, 言有業識在. 誰云意不深. 海枯終見底, 人死不知心. 如是等頌, 不可勝數.”

  앞에서 이미 보았듯이 지눌은 知解를 중시한다. 지눌은 먼저 여실한 知解로 頓悟한 이후에, 그 다음에 話頭 공부를 하라고 한다. 그러나 인용문㉠에서 보듯이 혜심은 지해를 가지지 말라고 한다. 그것을 가질수록 도에 어긋난다는 것이다. 혜심에 의하면 가령 경전과 논을 강설하고 禪과 道를 설명하여 하늘의 꽃이 땅에 떨어지고 돌들이 머리를 끄덕이더라도, 그것은 아무 의미 없는 소리 일 뿐으로, 자기 본분의 일과는 아무 관계도 없다.ꡔ語錄ꡕ, 30쪽中. “假使講慶論說, 說禪說道, 直得天花落地, 群石點頭, 也是咬蚤之義, 於自己本分事上, 了沒交涉.”
오로지 간화일문이 가장 빠른 길이다.같은 책, 40쪽上. “此外有看話一門, 最爲徑截, 止觀定慧, 自然在其中.”
지해에 대해서 지눌과 다른 입장을 보이고 있는 것이다.물론 혜심도 교의 입장을 지눌보다 상대적으로 약하기는 하지만 받아들인다. 이것은 혜심이 ꡔ어록ꡕ에서 ꡔ화엄경ꡕ을 11회, ꡕ화엄론ꡕ을 2회, ꡔ원각경ꡕ을 6회, ꡔ금강경ꡕ을 7회, ꡔ능엄경ꡕ을 5회나 인용하는 것을 보아도 알 수 있다. 단지 혜심은 보다 간화선을 중시하고, 간화선법이 아닌 (교학 및 기타 선법인) 지해는 경시한다. 이 문제에 대한 자세한 논구는 다음을 참고. (김호성, 「慧諶 禪思想에 있어서 敎學이 차지하는 의미」, ꡔ普照思想ꡕ 7집, 普照思想硏究院, 1993, 114~115쪽)

  혜심은 방법뿐 아니라 간화선 자체에 대해서도 이해가 지눌과 다르다. 인용문㉡을 보자. 조주가 개의 불성의 유무에 대하여 말한 것을 가지고, 천하 사람들이 개의 불성을 분별하는 것은 잘못이다. 왜냐하면 어디에도 물들지 않고 제한되지도 않는 불성을 오염되고 한계가 뚜렷한 자신의 有의 세계 안으로 끌어들이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120세를 산 늙은 조주가 나귀 똥과 같은 천한 것, 즉 有無를 분별하는 것과 같은 안목으로 우리의 눈알을 바꿔 준다는 것이다. 곧 말은 거칠지만 마음이 곧다. 그렇기 때문에 혜심은 이 화두의 시종 문답을 보고서, 有無라는 말을 따라서, 有無의 뜻을 정하여, 有無의 無라고 결정지어 생각하는 이들을, 조주의 문답의 껍데기만 보는 자라고 힐난한다. 결국 혜심에 의하면 조주의 구자불성에 대한 전후의 상반된 언명을 가지고, 구자불성의 유와 무 중 어느 한편으로 단정하려 하는 자는 제대로 공부의 길을 열지 못하는 道俗이 된다. 왜냐하면 혜심이 이해하기에는 조주의 의도는 불성에 있는 것이 아니다. 조주는 유와 무를 통하여 우리를 흩트려놓고자 한다고 여긴다. 또 혜심은 구자불성의 無에 대해서는 오조 법연화상의 게송을 인용한다. 즉 조주의 칼은 몸을 나누어 두 토막을 내는 殺人劒이라는 것이다. 이때 殺人劒은 無를 말함에 다름이 아니다. 구자불성의 有에 대해서는 진정극문의 게송을 인용한다. 조주가 業識이 있다고 말하지만, 조주의 업식이 있다는 언급이 가지고 있는 숨겨진 의미를 알아차린다면, 조주의 말이 단지 有로 단정한 평범한 답변이라고 이해하겠는가 하는 것이다. 즉 불성의 유와 무에 천착하는 자들은, 오조법연이나 진정극문의 게송의 뜻을 전혀 모르는 자들일 뿐 아니라, 조주의 구자불성의 함의를 파악하지 못하는 자들이라는 것이다. 혜심은 조주가 有無라는 언어를 사용함은 본분의 작용을 어떤 상황에서나 열어보이고자 하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즉 언어는 수단이다. 그렇기 때문에 언어 자체에 천착하면 언어의 효용은 상실된다. 혜심의 경우 언어를 해체함은, 그 자체가 혜심 선법이다.이덕진, 「看話禪의 ‘狗子無佛性’에 대한 一考察」, 20~21쪽
그리고 이러한 사유형태는 지눌의 선법과는 다르다.
  결국 혜심의 선법은 방법론적으로도 간화선 일변이며, 그 내용에 있어서도 대혜 간화선의 본래 정신에 보다 충실하다.대혜 간화선의 특질에 관해서는 「看話禪의 ‘狗子無佛性’에 대한 一考察」, 6~10쪽을 참고.
그리고 이것은 지눌이 대혜의 간화선을 방법론적으로 자기의 선 체계를 강화하는 하나의 방편으로 받아들이는 것과는 현격한 차이가 있다고 할 수가 있다. 다시 말해서 간화선은 지눌의 경우에는 用의 측면에서만 수용되고, 혜심의 경우에는 體․用의 양 측면에서 수용되어 지는 것이다. 그렇다면 만공의 간화선 이해는 어떠한가.
    2) 간화선 전통의 수용
  주지하듯이 만공은 깨달음을 두 번 증득한다. ‘萬法歸一 一歸何處’라는 화두에서 처음 깨달음을 얻었으나, 아직 미진함이 있다가, 조주의 ‘無字’ 화두를 통해 마침내 완전히 깨닫게 된다. 그래서 만공은 처음 화두를 드는 자에게는 ‘만법귀일 일귀하처’의 공안을 들게 한다. 다음을 보자.

  화두는 一천 七백 공안(公案)이나 있는데, 내가 처음 들은 화두는 곧 「만법(萬法)이 귀일(歸一)이라 하니 一은 어디로 돌아갔는고?」를 의심하였는데, 이 화두는 이중적 의심이라 처음 배우는 사람은 만법이 하나로 돌아갔다고 하니, 하나는 무엇인고? 하는 화두를 들게 하는 것이 가장 좋으리라. 하나는 무엇인고? 의심하여 가되 의심한다는 생각까지 끊어진 적적(寂寂)하고 성성(惺惺)한 무념처에 들어가야 나를 볼 수 있게 되나니라.ꡔ滿空法語ꡕ, 255쪽.


  인용문에서 보듯이 만공이 처음 화두를 드는 자에게는 ‘만법귀일 일귀하처’의 공안을 들게 하는 이유는 하나는 무엇인고? 와 그 하나는 어디로 돌아갔는고? 라는 이중적 의심을 통해 화두를 참구함에 힘을 얻을 수가 있기 때문이다. 왜냐하면 의심이 크면 깨달음도 크기 때문이다. 즉 하나라는 것은 있는 것도 아니고, 없는 것도 아니며, 이 정신 영혼도 아니고, 마음도 아니니, 하나라는 것은 과연 무엇인가? 라는 의심을 지어가되, 고양이가 쥐를 노릴 때에 일념에 들 듯, 물이 흘러갈 때에 間斷이 없듯, 의심을 간절히 하면, 반드시 하나를 알게 된다는 것이다.같은 책, 255쪽.
그렇지만 만공이 궁극적인 깨달음을 얻은 것은 스승인 경허로부터 받은 ‘조주무자’ 에 의해서 이다. 다음을 보자.

  자네가 「有眼石人齊下淚」를 모르면서 어찌 토시를 부채라 하고 부처를 토시라 하는 도리를 알겠느냐? 「만법귀일 일귀하처」의 화두는 더 진보가 없으니 다시 조주(趙州) 스님의 무자(無字) 화두를 드는 것이 옳다. 원돈문(圓頓門)을 짓지말고 경절문(徑截門)을 다시 지어 보도록 하여라. …… 경허 화상이 떠난 후 무자 화두를 의심하면서 열심히 공부하였다. …… 마침 장마를 만나게 되어 보름 동안 갇혀 있던 중 새벽 종소리를 듣고 홀연히 다시 깨달았으니[再悟] 백천삼매(百千三昧)와 무량묘의(無量妙義)를 걸림없이 통달(通達)하여 요사장부(了事丈夫)가 되었다. …… (경허)화상은 기꺼이 월면 스님의 오도 경지를 인가(印可)하고 다음과 같은 전법게(傳法偈)를 내렸다.같은 책, 308~309쪽.


  인용문에서 경허가 만공에게 말하는 徑截門이란 곧바로 꺽어 이해하는 문을 말한다. 곧바로 꺽어 이해한다는 것은 사량분별이나, 돌아가서 무엇을 얻고자 하는 마음을 잘라내고 탁 트인 心地를 곧바로 직관하여 드러내는 것이다. 이때 그 심지를 곧바로 직관하여 드러내는 것은 조주의 ‘구자무불성’을 화두로 들고 참구하는 선적 방법, 즉 간화선에 의해서 가능해진다. 그리고 이 방법에 의해서 만공은 깨친다. 다음을 보자.
  진실도의 정진법은 一千七百 公案이요. 一千七百 公案中에 趙州無字 最上이라. 無字話頭 드는 법을 세밀하게 說하오니 이 話頭를 決擇하여 진실도에 정진하면 부처되기 아주쉽소.같은 책, 227~228쪽.


  만공은 조주 무자화두를 제일로 치며, 무자화두에 의하면 부처되기가 아주 쉽다고 한다. 사람 노릇할 것은 아주 단념해 버리고 귀먹고 눈먼 병신이 되어,같은 책, 254쪽.
조주가 무엇 때문에 無라 했는가? 이 한 생각을 짓되 고양이가 쥐 생각하듯, 닭이 알을 품듯 앞생각과 뒷생각이 서로 끊어짐이 없이 샘물 흘러가듯 하여 가되, 아침 일찍 찬물에 얼굴 씻고 고요한 마음을 단정히 하고 않아, 화두를 들되 개가 불성이 있단 말인가, 없단 말인가? 있고 없는 것이 다 空하여 참으로 없단 말인가? 하고 화두를 지어가되, 요별 망상은 옛 사당의 찬 향로와 같이 고요하게 하고, 화두는 성성하게 하여, 밝은 달이 허공에 뚜렷하게 드러난 것 같이 하여, 망상은 적적하고 화두는 성성하여 적적함이 달 덩어리와 달 광명이 서로 어김없는 것같이 하면 十년 二十년을 허송 세월 하지 않고 바로 깨친다는 것이다.같은 책, 237~238쪽.

  무자화두에 대한 만공의 입장은 지눌과 혜심의 무자화두 이해와, 적어도 用的 측면에서는, 크게 달라 보이지 않는다. 그렇기 때문에 만공의 간화선법에 대한 입장은 보다 세밀한, 體的 측면에서의 논구를 필요로 한다.
    3) 간화선의 독자적 이해
  만공은 그의 법문 중 많은 부분을 할애하여 나를 찾아야 할 것을 강조한다. 그리고 그것은 무념처에서 가능하다. 다음을 보자.
  좌선하는 법은 별달리 긴요한 법칙에 있는 것 아님이니, 일체 망상이 고요함이 곧 좌(坐)요, 화두의 의심이 성성(惺惺)함이 곧 선(禪)이다. 성성함과 적적함을 같이 가지면, 하루 해가 가기 전에 참선하는 일을 성취하리라.같은 책, 57쪽.

  나는 무념처(無念處)에서 찾을 수 있는 것이니, 그것은 무념처에 일체유(一切有)가 갖추어져 있기 때문이다.같은 책, 248쪽.

  일체 생각을 쉬고 일념(一念)에 들되, 일념이라는 생각조차 잊어 버린 무념처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야 나를 발견하나니라.같은 책, 253쪽.


  만공에 의하면 좌선하는 법은 별달리 긴요한 법칙이 없다. 일체 망상이 고요한 경지가 좌이며, 화두를 참구하는 본래심의 깨어있는 그 작용이 선이다.성본은 만공의 이러한 좌선에 대한 정의가 선종사를 통해 볼 때 최초의 주장이라고 한다. 자세한 내용은 다음을 참고. (鄭性本, 「滿空禪師의 生涯와 禪思想 硏究」, ꡔ한국불교학ꡕ 22집, 1997, 160쪽)
일체의 망상을 여윈 본래심으로 나를 무념처에서 찾아야 한다. 왜냐하면 무념처에 일체유가 갖추어져 있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백년 동안의 공부도 일분간의 無念處에서 얻은 것만 같지 못하다. ꡔ滿空法語ꡕ, 253쪽.
이때 무념처란 일체 생각을 쉬고 일념에 들되 일념이라는 생각조차 잊어버린, 다시 말해서 의심하여 가되 의심한다는 생각까지 끊어진 寂寂하고 惺惺한 경지이다.같은 책, 255쪽.
이 경지에 있는 학인은 여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가야 나를 발견한다. 그렇다면 나는 어떠한 구조로 되어 있는가? 만공은 나의 몸을 세 가지로 나누어 설명한다.

  사람에게 세 가지 몸이 있으니, 一왈(一曰) 법신(法身)이요, 二왈(二曰) 업신(業身)이요, 三왈(三曰) 육신(肉身)이로다. … 법신은 곧 불신(佛身)이요, 업신은 곧 귀신(鬼神)이요, 육신(肉身)은 곧 사람의 색신(色身)이로다.  색신 가운데 업신과 법신이 구족(具足)하여 서로 여의지 않건마는 중생의 업보(業報)가 중(重)하여 다못 업신이 구원겁(久遠劫)을 드나들며 …… 사람에게 법신(法身)․업신(業身)․육신(肉身) 세 가지 몸이 있다 하니 어떠한 것이 육신인고? 지(地)․수(水)․화(火)․풍(風) 四대(四大)로다. …… 四대가 흩어지니 허황하기 일장 춘몽(一場春夢)이요, 장마에 두엄 버섯이라. 어떠한 것이 업신(業身)인고? 안(眼)․이(耳)․비(鼻)․설(舌)․신(身)․의(意)이 여섯가지 식심(識心)이로다. 눈으로 일체 만물을 보아 탐하여 모든 업을 지으며…… 이 여섯 놈이 무량겁(無量劫)으로 드나들며 모든 업을 능히 짓기도 하며, 모든 업을 능히 받기도 하나니, 이러므로 이름을 업신(業身)이라 함이로다. 어떠한 것이 법신(法身)이런고? 일찍이 발심하여 …… 多生罪業을 참회하고 …… 자기에게 합당한 화두를 분명히 결택(決擇)하여 …… 모든 망상(妄想)이 적적(寂寂)한 가운데 화두가 성성(惺惺)하여 들지 아니하되 화두가 스스로 들림이 샘물 흘러가 듯 간단이 없이 화두가 타성一편(打成一片)에 이르러, 홀연히 망상 구름이 흩어지고 마음달이 홀로 드러나 삼천대천세계(三千大天世界)를 비추어 그 밝은 빛이 하늘과 땅이 궤멸(潰滅)하여도 이 광명(光明)이 길이 멸하지 아니하며, 이것을 이름하되 불생불멸지도(不生不滅之道)라 하나니라. 이 같은 이치를 통달(通達)한 사람을 선지식이라 이름하며, …… 이 사람의 이름이 불(佛)․세존(世尊)이로다.같은 책, 231~235쪽.


  만공에 의하면 사람은 법신, 업신, 육신의 세 가지 몸을 가지고 있다. 이때 육신은 사람의 色身으로, 지․수․화․풍 사대이며, 업신은 귀신으로 안․이․비․설․신․의 육식이고, 법신은 佛身으로 자기에게 합당한 화두를 결택하여 打成一片의 경지를 증득한 선지식이다. 선지식이 곧 佛身이자 法身이요 부처인 것이다. 이때 색신, 즉 육신 가운데 업신과 법신이 구족하여 있다. 그러나 중생의 업보가 중하여 끊임없이 모든 업보를 받는다. 만공의 삼신론은 전통적인 불교의 法身․報身․化身의 삼신론과는 전혀 다른 입장이다.鄭性本, 「滿空禪師의 生涯와 禪思想 硏究」, 151쪽.
만공은 여기에서 아주 독특한 견해를 네 가지 언급한다.
  첫 번째는 귀신의 문제이다. 귀신이란 용어는 원래 불교적 용어는 아니다.유교에 귀신관에 의하면, 사람은 天地 두 德의 和合이고, 陰陽의 變合이며, 귀신의 모임이고, 五行의 빼어난 기운으로서, 하늘의 기품[精]과 땅의 형상[形]을 부여받은 존재자이다. 사람이 죽어 혼백이 분리되면 혼백은 제각기 처음 온 곳으로 되돌아가게 되는데, 이때 하늘로 되돌아 간 魂은 神이 되고 땅으로 되돌아 간 魄은 鬼가 된다. 죽음은 혼백의 분리이며, 귀신은 천지 사이에 가득 찬 기운[氣]이다. (<「禮運」,ꡔ禮記ꡕ 9卷, ꡔ漢文大系ꡕ 17, 10쪽. “故人者, 其天地之德, 陰陽之交, 鬼神之會, 五行之秀氣也.”>, <ꡔ中庸或問ꡕ, ꡔ近世漢籍叢刊ꡕ, 中文出版社 影印本, 323쪽. “盖陽魂爲神, 陰魄爲鬼, 是以其在人也, 陰陽合, 則魄凝魂聚而生, 陰陽判, 則魂升爲神, 魄降爲鬼.”>)
그렇기 때문에 만공의 업신을 귀신으로 보는 입장은, 귀신이란 용어를 차용해서, 윤회설을 설명한다고 볼 수있다. 윤회설에 의하면 인간이 죽으면 인간을 구성하고 있던 오온은 그 일시적인 만남을 청산한다고 본다. 육체적인 요소인 색은 지․수․화․풍으로 흩어진다. 그리고 정신적인 요소인 수․상․행․식은 육체를 떠나서 존재할 수 없기 때문에 역시 없어진다. 오직 남는 것은 그가 생전에 지은 행위인 業뿐이다. 이와 같이 중생은 惑으로 인하여 업을 짓고 업으로 인하여 고를 받는 것이니 三世에 걸쳐 欲界, 色界, 無色界의 三界와 天人, 修羅, 餓鬼, 畜生, 地獄의 六道를 윤회하는 것이다. 윤회 이론에 의하면 어떤 한 개인의 생은 한없는 전체 생 가운데의 하나의 생이다. 윤회설은 붓다가 불교를 설하기 이전부터 있었던 인도의 전통사상이다. 그렇기 때문에 불교의 독창적 이론이라고는 할 수 없다. 그러나 불교는 이것을 외래사상으로서가 아니라 불교 자신의 정통 사상으로 생각했다. 즉 불교의 거의 모든 교리는 윤회사상 위에 세워져 있다. 하지만 무아와 윤회의 문제는 초기불교 에서부터 현대블교에 이르기까지 끊임없이 논쟁의 중심에 있다.무아와 윤회의 긴장관계에 대한 자세한 내용은 다음 책을 참조. (윤호진, ꡔ無我․輪廻問題의 硏究ꡕ, 민족사, 1993)
그렇기 때문에 만공의, 육식이 무량겁으로 들고난다는, 귀신에 대한 주장은 무아설, 즉 空사상과 정면으로 배치되는 주장이라고 여길 수도 있다.
  두 번째는 육신 가운데 업신과 법신이 구족하여 있다는 주장이다. 만공은 한 티끌 가운데에 헤아릴 수 없는 국토를 갖추었고, 한 생각 가운데에 한량없는 劫數를 초월하였으며, 한 몸 가운데에 가없는 중생을 나타내고, 한 몸으로 수 없는 모든 부처를 합하였다고 한다. ꡔ滿空法語ꡕ, 67쪽.
그렇기 때문에 만공이 깨달아야 한다는 ‘나’는 업신과 법신 그리고 육신이 합치된 상태로서의 나이다. 즉 업신 속에 육신과 법신이 포함될 수도 있고, 법신 속에 육신과 업신이 포함될 수도, 육신 속에 업신과 법신이 포함될 수도 있다. 그렇기 때문에 여기서 만공이 강조하는 것은 육신을 떠나서 법신을 찾아야 한다는 것이 아니라, 육신이나 업신의 그 자리에서 법신을 깨달아야 한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번뇌와 보리의 문제나, 생사나 열반의 문제에 있어서, 번뇌를 떠나서 보리가 있거나, 생사를 떠나서 열반이 있는 것이 아니라, 번뇌가 곧 보리요, 생사가 곧 열반임을 강조하는 不二이다. 결국 만공의 경우 법신은 업신과 육신이 끝나고 시작되는 것이 아니라, 업신과 육신을 있는 그대로 관찰함으로 업신과 육신의 바로 그 몸에서 법신이 증득되는 것이다.釋之鳴, ꡔ滿空禪師ꡕ, 446~447쪽.

  세 번째는 간화선의 수행을 통해서 업을 소멸할 수 있다는 주장이다. 만공에 의하면, 일찍이 발심하여 선지식을 친견하여 多生罪業을 참회하고 자기에게 합당한 화두를 분명히 決擇하여 行․住․坐․臥․語․黙․動․靜에 전신이 화두와 한 몸이 되어버린 打成一片의 상태가 되면 불생불멸지도를 얻어, 마음달이 홀로 드러나 삼천대천세계를 비추어 그 밝은 빛이 하늘과 땅이 궤멸하여도 이 光明이 길이 멸하지 않는 선지식이 된다. 이때 선지식이 증득하는 불생불멸지도는 육식이 無量劫으로 드나들며 짓기도 하고 받기도 한 업신의 소멸을 말한다. 간화선을 통하여 깨침의 경지를 증득함은 만공을 포함한 모든 간화선사의 주장이다. 그러나 만공처럼 간화선 수행을 통해서 업의 소멸을 주장함은 독특하다.만공이 말하는 귀신이나 업의 소멸 문제는 일단 실재론적인 사고라고 말할 수 있다. 그러나 꼭 그런 것만은 아니다. 만일 귀신이나 업의 소멸 문제가 인간의 마음 안에서만 일어난다면, 귀신이나 업을 주재하는 절대적 존재자를 전제하지 않는다면, 귀신이나 업의 소멸 문제는 방편론적으로만 설명되어지는 것이고, 그렇게 될 때 만공 선법의 본체론적인 연루에 대한 우리의 걱정은 기우가 된다. 이 문제는 좀 더 많은 논구를 필요로 한다.

  네 번째는 마음달에 대한 언급이다. 만공은 망상을 여윈 본래심을 마음달이라고 한다. 이 본래심은 하늘과 땅이 궤멸하여도 광명이 길이 멸하지 아니한다. 이 마음달을 만공은 다른 곳에서는 如來藏이라고도 표현하기도 하고,ꡔ滿空法語ꡕ, 48쪽.
육근의 근원으로서 神靈스럽고 밝으며, 사대의 본성으로 본래 청정하고 한 티끌도 없는 것으로 표현하기도 한다.같은 책, 65쪽.
즉 자심을 顯示하고 있는 것이다. 또 더 나아가서 만공의 이러한 표현은 지눌이 자성을 空寂靈知라고 하는 것과 그 표현은 다르지만 그 함의는 다르지 않다. 여기서 우리는 조심스럽게 만공의 간화선법이 혜심보다는 지눌과 접점을 공유하고 있음을 추론할 수 있다.정성본은 만공의 마음달에 대한 입장이 ꡔ단경ꡕ의 입장과 다름을 설명한다. 즉 ꡔ단경ꡕ에서는 그냥 본래심이 념념 상속하는 것이 無住의 실천이라고 하는데, 만공은 본래심으로 공안을 참구하는 입장을 제시하고 있다는 것이다. 논자는 일찍이 혜능의 선법과 지눌의 선법이, 자성에 대하여, 그 내밀한 함의가 다름을 논구한 적이 있다. 결국 만공과 지눌은 본래심[자성]에 대해서 혜능과는 약간 다른 입장을 견지하고 있는 것이 된다. 이 문제에 대한 자세한 내용은 다음을 참고. (<鄭性本, 「滿空禪師의 生涯와 禪思想 硏究」, 158쪽>, <이덕진, ꡔ普照知訥의 禪思想 硏究ꡕ, 고려대학교 박사논문, 1999, 144~149쪽>)

여기에서 만공이 말하는 불신이나 법신은 결국 나의 본래면목을 말함에 다름이 아니다. 그렇다면 나의 본래면목은 어떠한 모습을 하고 있을 까? 다음을 보자.

  한 생각이 일어날 때 일체가 생기고, 한 생각이 멸할 때 일체가 멸하니라. 내 한 생각의 기멸(起滅)이 곧 우주의 건괴(建壞)요 인생의 생사니라.ꡔ滿空法語ꡕ, 257쪽.

  三세가 오직 이 마음이요, 오직 이 마음이 삼세로다. 일체 모든 법이 공한 관자재(觀自在)시여! 곳곳마다 광명이요, 곳곳마다 법신이라, 한낱 거품의 환(幻)이 한 가지도 걸림이 없음이로다. …… 삼라만상이 다 나의 집이로다.같은 책, 41쪽.


  위의 인용문에서 만공은 ‘나’의 한 생각의 일어나고 멸함이 우주의 건립과 기별이 된다고 하여, 나의 한 생각이 일어날 때 일체가 생기고, 나의 한 생각이 멸할 때 일체가 멸한다고 한다. 이는 나를 우주와 동일시하는 것이다. 또 삼계가 오직 이 마음이고 법신이며 나의 집이라고 한다. 이는 마음과 삼라만상 그리고 법신을 동일시하는 것이다. 여기서 우리는 만공이 나, 마음, 법신, 삼라만상을 동일시함을 알 수 있다. 그렇기 때문에 나의 본래면목은 나의 마음을 말함에 다름이 아니다. 다음을 보자.

  마음에는 붙일 것이 없어서 그 형상은 의지할 바가 없으며, 발로 걸을 바가 없으며, 언어로 이를 바가 없으며, 가히 보았으되 모양을 이름할 수가 없으며, 가히 얻었으되 만져 헤아릴 수가 없으니 삼라만상이 그 용과 같고 태허공이 그 체와 같도다.같은 책, 61쪽.

  세상에는 물심 양면이라면 우주의 총칭(總稱)인 줄 알지만, 우주의 정체(正體)는 따로 있나니라.같은 책, 279.


  만공은 우주의 정체는 마음이고, 이때 마음의 體는 太虛이고 用은 삼라만상이라고 한다. 그렇기 때문에 마음은 누구 때문이 아니라 본래 완전하고 본래 밝다.같은 책, 56쪽.
일심이 곧 만상이요, 만상이 곧 일심이다. 마음은 터럭만치도 원융무애를 유실하지 아니하였거니, 형상을 비추는 거울이다.같은 책, 47~48쪽.
어떤 것도 마음이라는 구슬을 더럽히지 못한다.같은 책, 42쪽.
즉 마음은 물질에 의존해서 생기는 존재가 아니라, 자기창조적인 존재이다.같은 책, 262쪽.
마음[정신]은 사람이면 누구나 다 가지고 있고, 이름도 형상도 없지만 만유의 근본이며, 어디서 무슨 일에나 절대 능력자이어서, 이 정신만 도로 찾으면 만능인이 된다.같은 책, 263쪽.
그렇기 때문에 물체에 의존하지 아니하는 정신은 한 모양도 없는 자리에서 일체 행동으로 능히 현실화할 수 있다.같은 책, 262쪽.
그런데 인생은 자기 업신의 반영인 이 몽환 세계를 실상으로 알고 울고 웃고 하는데, 이것은 마치 은행나무가 물에 비치는 제 그림자를 이성으로 감응하여 열매를 맺는 것과 같다.같은 책, 266쪽.
또 마음이 스스로 마음이라는 相이 없어야 비로소 이것이 제 마음이요, 제 눈이 눈이라는 상이 없어야 비로소 이것이 제 눈이다.같은 책, 55쪽.
그렇기 때문에 도라는 것이 따로 있는 줄 알고 구하는 마음으로 참선한다면 外道에 떨어지게 된다. 더 나아가서 신통변화는 相法이라서 도인이 취할 바가 아니다.같은 책, 261쪽.

  우리는 여기서 만공이 법신을 본체계의 眞我라기 보다는, 오히려 현상을 여의지 않는 본체, 본체를 여의지 않는 현상으로 설명하고, 나 혹은 마음을, 망심을 여의지 않는 진심, 진심을 여의지 않는 망심으로 설명하는 것을 볼 수 있다.釋之鳴, 「滿空禪師」, 448쪽.
즉 법신, 나, 마음에 대한 만공의 선적 입장은 현상계에 있는 나 혹은 나의 마음이 중심이 되어서 현상에서 본체를 방편으로 설명하기 때문에, 그의 법신이나 마음에 대한 본체론적인 표현은, 體라기보다는 用의 입장이 중시되는, 方便論이다.이렇게 본다면 우리가 앞에서 만공의 三身論을 논구하면서, 그의 귀신과 업에 대한 태도가 空 사상과 배치되는 입장이 될 수도 있다고 한 점은 기우에 그침을 알 수가 있다. 왜냐하면 귀신이나 업의 문제는 모두 방편론의 입장에서 설명되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만공선법의 특징은 단적으로 우리의 自心을 담론의 절대적 중심으로 하는 絶對唯心論 안에서의 唯心淨土에 있다. 이 ‘나’를 중심으로 한 절대유심적 입장안에서의 유심정토에 대한 견해는 만공의 독특한 선풍이다. 그렇다면 만공의 간화선법은 한국 간화선의 두 물줄기 가운데 어느 쪽에 자리 매김 할 수 있을까.

  만공의 선법은 간화선 일색이다. 그는 외골쑤로 간화선법 만을 설파하며 교학은 그에게 어떤 의미를 가지지 않는다. 이런 점은 아무래도 지눌보다는 혜심에 가깝다. 어떤 면에서는 오히려 혜심보다도 더 선에 철저하여서 그는 한국의 선사들 가운데 가장 선 일변적인 사상가이다. 조주의 무자화두에 대한 만공의 입장은 겉으로 보기에는 지눌이나 혜심과 별로 다르지 않다. 지눌과 혜심이 조주의 무자화두를 몸을 빼어낼 活路로서 받아들이는 것과 같이, 만공도 무자화두를 활로로 간주한다. 그러나 내밀하게 들어가면 다르다. 그렇기 때문에 이 문제는 보다 상세한 논구를 필요로 한다.
  주지하듯이 지눌은 조주의 무자화두를 방법론[用]적으로만 차용한다. 법에는 차별이 없지만 사람은 근기가 다르기 때문에, 상근기의 경우에는 간화선은 지해를 단박에 없애는 방편이 되고, 중․하근기의 경우에는 간화선은 돈오[해오] 이후에 점수를 제대로 하는 방편으로 제시된다. 결국 지눌에 있어서 무자화두는 우리가 본래적으로 가지고 있는 佛性인 自性의 空寂靈知를 廻光返照하기 위한 도구이다. 그렇기 때문에 무자화두라는 수단을 통해서 우리의 불성인 자성의 공적영지는 顯示되고, 부처됨이란 자심을 깨달아 묘용을 일으키는 것이 된다.
  그러나 혜심은 조주의 무자화두를 방법[用]일 뿐 아니라 목적[體] 그 자체로 수용한다. 오로지 간화경절문만이 유일한 선적 탐구방법이 되며, 여기에서는 知解는 버려야 할 그 어떤 것이 된다. 자성인 불성은 결코 언어로 현시되지 않으며, 자성은 정의될 때 이미 왜곡되어 진다. 깨침의 경지는 顯示가 아니라 暗示되어질 뿐이기 때문에, 언어는 끊임없이 해체의 과정을 거치게되고, 이러한 해체의 과정을 통하여, 존재 자체가 우리 앞에  열리게 된다.
  만공의 경우 조주의 무자화두는 體이자 用이다. 그는 지눌처럼 禪과 敎를 같은 자리에 배대하고, 선이 교보다 방법론[用]적으로 우등하기 때문에, 간화선을 수용하는 것이 아니다. 선만이 그의 유일한 관심사이다. 이런 측면에서 그는 혜심과 보다 더 많은 접점을 공유한다. 그러나 만공은 혜심처럼, 언어를 解體하거나, 自心을 暗示하지 않는다. 오히려 그는 자심을 顯示하고, 그 현시된 자심을 끊임없이 묘용하고자 한다. 즉 불성인 자심을 현시함은 지눌과 아주 많은 접점을 가지고 있다.
  만공의 선법은, 간화선 자체의 전통에서 본다면, 간화선을 선 그 자체와 동일시하고, 간화선법 이외의 다른 선법이나 교학을 인정하지 않는다는 면에서, 간화선을 자기 선법의 일부분으로 차용하는 지눌과는 다르고, 간화선을 유일한 선법으로 받아들이는 혜심과 그 궤를 같이한다. 그러나 그 함의를 따진다면, 간화선을 유일한 선적 방법으로 하여 ‘마음달’인 자심[일체만유, 법신, 불성, 나]을 체득하고자 한다는 면에서 오히려 지눌과 그 궤를 같이한다.
  결국 만공의 간화선법은 두 가지 특징을 가지고 있다고 할 수 있다. 그 하나는 철저하게 간화선법 일변이라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간화선법을 통해서 자심을 체득하고자 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만공의 입장은 지눌과 혜심을 會通한 선법이기도 하며, 동시에 지눌과 혜심을 辨證的으로 止揚한 선법이기도 하다. 그리고 여기에 만공 선법의 독자성이 있는 것이다.
지금까지 우리는 만공의 선법이, 한편으로는 한국 간화선의 전통을 충실하게 수용하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간화선을 독자적으로 이해함을 보았다. 그렇다면 만공의 선법은 21세기 현대 한국선 안에서 어떻게 자리 매김 할 수 있을까.

  Ⅳ. 한국선의 새로운 좌표를 제시

  앞에서 논자는 만공선법의 특징을 ‘나[自心]’를 담론의 절대적 중심으로 하는 絶對唯心論 안에서의 唯心淨土에 있다고 논증하였다. 이때 여기에서 말하는 만공의 절대유심론은 현대에 살고있는 우리에게 시사하는 바가 크다. 다음을 보자.

  ㉠형이상학(形而上學)이나 유심론(唯心論)을 말하는 자 스스로 물질적 영역을 벗어나지 못한 것을 모르나니라.ꡔ滿空法語ꡕ, 271쪽.

  ㉡물질 과학의 힘으로서는 자연의 일부는 정복할지언정 자연의 전체를 정복할 수는 없는 것이요, 설사 다 정복한다 하더라도 그것은 다생(多生)에 익혀 온 습성을 어느 정도까지 만족시키는 데 지나지 않을 뿐으로, 정말 습성 자체는 정복하지 못할 것이니, 그 습성 자체를 정복하고, 그 근본에 체달한 후라야 비로소 자연과 습성을 모두 자가용(自家用)으로 삼게 될 것이다.같은 책, 272쪽.

  ㉢불교의 유심(唯心)이란 유물(唯物)과 상대되는 유심이 아니요, 물심(物心)이 둘이 아닌 절대적인 유심임을 말하는 것이다.같은 책, 279쪽.

  ㉣일심(一心)이 곧 만상(萬像)이요, 만상이 곧 일심이니라. 이것이 가깝지도 아니하고 멀지도 아니하여, 지극히 얕고 지극히 깊어서 건곤(乾坤)으로 더불어 같이 덮이고 실렸으며, 일월(日月)로 더불어 같이 비추었으니, …… 터럭만치도 원융무애(圓融無碍)를 유실(遺失)하지 아니하였거니, 형상을 비추는 거울이요.  …… 평온함이 대지와 같아서 능히 이 물건은 확연한 허공과 같이 바늘 끝만치라도 걸리지 아니함이로다.같은 책, 47~48쪽.


  인용문㉠에서 만공은 물질의 중요성을 강조한다. 그에 의하면 형이상학이나 유심론을 말하는 자들은 자기네들이 물질적 영역을 벗어나지 못한 것을 모르는 자들이다. 그렇기 때문에 신이 아무리 신통 자재하고 인류화복을 주재한다 하더라도 육체를 갖추지 못했기 때문에 삿된 것에 불과하다. 같은 책, 271쪽
왜냐하면 정신은 물질의 창조자이지만, 물질이 아니면 정신의 존재와 효과가 나타나지 못하기 때문이다.같은 책, 72쪽.

  인용문㉡에서 만공은 정신의 중요성을 강조한다. 그에 의하면 물질 과학의 힘으로서는 자연의 일부는 정복할지언정 자연의 전체를 정복할 수는 없다. 설사 겉으로 보기에 정복한 것처럼 보인다 하더라도 그것은 정복한 것이 아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다생에 익혀 온 습성을 어느 정도까지 만족시키는 데 지나지 않을 뿐이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정신으로 그 습성 자체를 정복하고, 그 근본을 체달한 후라야 비로소 자연과 습성을 모두 自家用으로 삼게 되었다고 할 수 있다. 다시 말해서 현대 과학이 아무리 만능을 자랑한다고 하더라도, 그 과학적 결과가 자타를 위하여 順用되지 않고, 逆用되는 이상 그것은 인류에게 실리를 주는 것보다 해독을 더 많이 주는 것이다. 다만 세계가 자타의 我相이 없는 생활로 물질과 정신의 합치된 참된 과학 시대가 와야 전 인류는 합리적인 제도하에서 안정된 생활을 하게 될 것이니, 인간의 근본을 밝히는 정신 문명이 사람마다 마음속에 건설하여야 잘 살 수 있는 진정한 평화가 된다.같은 책, 272쪽.

  인용문㉢에서 만공은 한계가 있는 물질[物]과 정신[心]을 지양하고, 그 장점을 극대화하는 절대적인 唯心을 표방한다. 그에 의하면 불교에서 말하는 唯心이란 唯物과 상대되는 유심이 아닐 뿐만 아니라, 物․心이 둘이 아닌 절대적인 유심이다.같은 책, 279쪽.

  이러한 만공의 절대적인 유심에 대한 견해는 인용문㉣을 통해서 더욱 잘 알 수 있다. 만공에 의하면 一心이 곧 萬像이고, 만상이 곧 일심이다. 이 절대 유심은 지극히 얕고 지극히 깊어서 乾坤으로 더불어 같이 덮이고 실렸으며, 日月로 더불어 같이 비추었다. 생긴 이래로 터럭만치도 圓融無碍를 유실하지 아니하여서 거울과 같이 형상을 비춘다.
  우리는 여기서 만공의 절대 유심론이 유심론과 상충하지 않을뿐더러, 유물론과도 상충되지 않고, 더 나아가서 절대 유심 안에 세간에서 말하는 唯心과 唯物을 모두 포괄하고 있는 절대적인 유심론임을 확연하게 알 수 있다. 이것은 만공이 절대 유심을, 다시 말해서 바로 여기에서 현존하는 각자의 마음을, 우주 질서의 근원으로 보는 것임을 시사하는 것이다.釋之鳴, ꡔ滿空禪師ꡕ, 449쪽.
그렇기 때문에 만공의 절대 유심론 안에서는, 모든 것이 절대 유심 안에서 녹아 버려서, 정신이나 물질 그리고 자연과학 더 나아가서 신까지도 모두 방편이라는 한계를 벗어나지 못하게 되고, 마침내는 곳곳이 법신이 되고 삼라만상이 다 나의 집이 되는 것이다.ꡔ滿空法語ꡕ, 41쪽.

  이러한 만공의 절대 유심론은 세계와 인간을 보는 그의 시각에서 더욱 자세히 드러난다. 다음을 보자.

  ㉠생사없는 그 자리는 유정물(有情物)이나 무정물(無情物)이 다 지녔기 때문에 한가닥 풀의 정(精)이라도 전 우주의 무장(武裝)으로도 해체(解體)시킬 수 없느니라.같은 책, 247쪽.

  ㉡중생이라 하는 것은 한 개체에 국한된 소아적(小我的)인 생활을 하는 사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