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교이야기/인곡당(법장스님)

3집 제3주제 논평:「만공선사와 독립운동」을 읽고

淸潭 2008. 2. 22. 17:59
 

 

3집 제3주제 논평:「만공선사와 독립운동」을 읽고

 

황인규(동국대)


Ⅰ.

  발표자께서는 근대 한국불교를 중흥시켰다고 평가받는 鏡虛惺牛(1849~1912)선사의 상수제자인 滿空月面(1871~1946)선사의 독립운동에 대해서 고찰하였다.
  다 아시다시피 만공(이하 존칭 생략)에 대한 연구가 본격적으로 이루어지기 시작한 것은 최근에 와서이며 아직도 연구의 여지가 적지 않다. 더욱이 그의 독립운동에 대해서 다루어지기는 이번 발표자의 논고가 처음이 아닌가 한다. 이러한 점에서 본 발표문은 근대불교사 연구의 한 장을 열고 있다고 할 것이다.
  발표자의 지적대로 ‘한국 불교의 정체성 확립’문제는 오늘에 와서 새롭게 돌출한 것이 아니며 근대 초기부터 지금까지 계속해 내려오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오늘날 한국불교의 정체성 확립을 위해 근대초기 불교계를 이해하는 것은 대단히 중요하다.
  발표자가 언급했듯이 당시 한국 불교를 왜곡하여 식민지 통치에 이용하려 했던 일제에 맞서서 한국 불교의 전통을 지켜내고 그 정통성을 회복하려고 했던 움직임들은 또 다른 형태의 항일 민족 운동으로서 높게 평가할 수 있을 것이다.
  그 동안 사실 불교계의 독립운동에 대해서는 타종교에 비해서 널리 알려지지 않은 듯하며 고작해야 卍海 韓龍雲(1879~1944) 정도가 알려져 있을 뿐이다. 만해 뿐만아니라 근대 불교 개혁과 독립운동을 전개한 불교계의 승려들이나 인물들은 적지 않다. 이는 애국독립운동이라는 차원 뿐만 아니라 불교의 정체성을 바로잡는 차원에서도 반드시 밝혀져야 할 것이며, 이에 대한 보다 폭 넓은 관심을 가져야 할 것이다.
  이미 선학의 연구에서 밝혀진 바와 같이 일제하의 불교개혁과 항일운동은 3.1운동을 분수령으로 불교계의 자각적인 참여의식에서 민족운동에 가담하였다. 韓龍雲․白龍城․金星淑․吳卍光(惺月)․白初月 등 직접적으로 일제에 항거하여 항일 독립운동을 펴나가기도하고 金尙昊․都鎭浩․韓龍雲을 중심으로 한 金法麟․金尙昊 등 불교계 내부의 혁신운동이 있었다. 그리고 李能和․權相老․金映遂․朴漢永 등 불교학자들의 전통문화 수호운동과 宋滿空․申慧月․方漢岩 등 禪修行에 정진했던 禪風再興運動이 있었다.
  이러한 것은 일제에 적극적으로 항거하여 나라를 지키는 한편 소위 사찰령의 실시로 일컬어지는 일본불교의 침탈에 맞선 것이다. 여기서 우리가 주목해야 할 것은 일제가 유교나 기독교 등은 다소 항일적인 것으로 보고 당시 민중들과 친밀성을 지니고 있던 불교를 식민통치의 방편으로 삼고자 한 사실이다. 때문에 그들이 일방적․강제적으로 제정 시행한 사찰령은 한국의 전통불교를 파기하여 당시는 물론이고 오늘날까지도 큰 휴우증을 낳고 있는 것이다. 특히 일제의 사찰령 제정은 독립운동의 근거지 또는 그 자금의 유출을 막는 내용이 다분히 있었으므로, 일본불교를 반대하고 전통불교를 수호하는 것 자체가 항일독립운동이 될 수 있었던 것이다.
  그러한 측면에서 발표자는 일제강점기 내내 불교의 개혁과 항일정신을 변치 않고 끝까지 지켜낸 불교게의 인물을 만해와 더불어 만공을 들고, 대사회적 영향력이라는 측면에서 그 뿌리의 견실함으로 볼 때, 만해 보다 만공의 心田투쟁을 더 주목해야 할 것이라 하였다.


Ⅱ.

  논평자는 발표자의 연구내용을 잘 못 이해하는 부분이 없지 않으리라 보고 혹 이러한 점이 있다면 미리 양해를 구하고자 하며, 보다 좋은 논고가 되는데 조금이라도 보탬이 되었으면 하는 바램으로 의문점을 제시하고자 한다.
  앞서서 언급했듯이 만공에 대한 본격적인 논고는 최근에 와서이며, 이에 대한 연구의 여지는 앞으로도 적지 않다. 따라서 만공의 활동 내지 사상조차 제대로 정리되지 않은 학계의 현실에서, 그의 독립운동에 대해서 접근하다보니 아직 미진한 부분이 있는 듯 하다.
  무엇보다도 만공의 행적이 보다 선명하게 정리되어야 할 것 같다. 특히 그의 항일운동이나 항일의식이 있는 행적을 좀더 발굴하여 보다 정치하게 연구되었으면 한다. 아울러 만공의 선사상의 요체는 과연 무엇인가? 특히 본고에서 논의하고자 하는 독립운동의 사상적 배경이 된 것은 무엇인가? 그의 선종재흥운동 외에 보다 적극적인 독립운동에 참여한 사실은 없는가? 없다면 그 이유는 무엇인가? 등등이 밝혀져야 할 것이다.
  발표자는 선학의 연구성과를 바탕으로 만공의 독립운동을 고찰하였지만, 이번 발표문에서 무엇보다도 아쉬운 점은 발표자가 주장하고자 하는 견해가 선명하지 않다는 것이다. 예컨대 ‘Ⅱ. 일제하의 불교개혁과 항일운동’ 과 같이 개괄적인 설명보다는 본래의 주제인 만공의 독립운동과 연계되면서 부각 설명되었으면 한다.
  본 발표문에서 주장하고자 하는 것은 ‘Ⅲ. 만공선사와 선종진흥과 독립운동‘ 부분일 것이다. 발표자는 만공이 40여년간 수덕사에 머물면서 ’참다운 나‘를 찾아야한다는 선사상을 주창하는 것이 곧 한국불교의 정체성을 회복하는 일이며 이것이 바로 일제에 항거하는 것이라고 하였다. 또 이러한 차원에서 만공이 선학원과 선우공제회, 그리고 선리참구원 설립을 주도하였고 종헌제정, 유교법회의 참여, 그리고 조선 총독부 총독에게 一喝을 하는 등 항일불교운동을 전개하였다고 하였다.
  이러한 견해는 논평자의 부족한 이해때문인지 모르겠으나 이미 선학의 연구에서 대개 밝혀진 것으로 알고 있으며, 발표자의 새로운 시각이나 견해는 무엇인가 묻고 싶다.
  논평자가 이해하는 바로는, 만공이 행하였다는 독립운동은 ‘心田투쟁’ 즉 선수행에 정진했던 선풍재흥운동이다. 따라서 만공의 선사상에 대한 연구가 구체적으로 본격화되어야 할 것이며, 그의 선사상과 독립운동을 연결시키는 노력이 더 요구되어야 하지 않는가 한다.
  그리고 만공이 전개한 선풍재흥운동은 수덕사를 중심으로 한 산문보다는 서울 선학원에서 전개하였다는 것인가 하는 의문이 일고 있다. 이 문제는 단순한 장소문제가 아니라 만공의 선충재흥운동의 성격까지 규정될 수 있는 문제이다.
  다 아시다시피 만공이 선학원에 참여한 것은 1921년 무렵부터 그의 만년인 1941년 무렵까지 이루어지고 있는데, 그렇다면 수덕사에서 40여년간 머물면서 선수행에 철저하게 정진했던 사실은 어떻게 이해하여야 할까? 특히 만공이 일본불교를 반대하고 전통불교를 수호하고자 한 노력들이 수덕사 산문에서 드러나는 것은 없는가? 사찰령 실시로 산중공의제 실시, 대처육식의 금지운동 등등 전통불교를 수호하고자 하는 노력들은 없었는가?
  혹 발표자가 서술했듯이  ‘을사조약이 체결되던 1905년 봄 定慧寺 밑에 金仙臺라는 초가 암자를 지어 살면서 제자들을 길러내기 시작하였고, 수덕사를 중심으로 민족정기를 바로잡으며 인근 忠義志士들을 은유로 격동시켜 항일구국 전열에 서게 하니, 인근에서 金佐鎭 장군을 비롯하여 尹奉吉 의사 등 많은 독립지사들이 배출된 것도 결코 우연은 아닐 것이다. 뿐만 아니라 서산 안면도의 看月庵을 크게 중창하고 1942년 여름부터 조국 해방을 위한 千日祈禱를 올렸는데, 廻向 3일만에 8․15해방을 맞이하게 된다. 스님의 애국충정은 이와 같이 지극했다고 하며, 선견지명이 있었다는 것이다.’ 라고 했는데, 이러한 사실을 이야기 하는 것인가?
  이 부분에서도 만공과 김좌진․윤봉길과의 관계 등 그 전거가 명확히 밝혀져야 할 것이며 구체적인 설명이 필요하다. 만약 이러한 사실을 지칭한 것이라 본다면 선의 본질을 회복하기 위한 노력이 서울 선학원을 중심으로 이루어진 것이며, 따라서 만공의 선풍재흥운동의 성격이나 의미도 달라질 수 있는 것이 아닌가?

Ⅲ.

  다음은 논평자가 다소 의문을 가고 있는 사실들에 대하여 좀더 구체적으로 지적하고자 한다.
  첫째, 앞서 지적한 사실 외에 만공의 독립운동 부분으로 들 수 있는 핵심은 3.1운동이후 불교계에서 일제에 항거하여 자각적인 의식이 생기기 시작하면서 일제의 사찰령 정책에 대항하려는 의도에서 창설한 선학원 창립과 운영일 것이다.
  이와 관련하여 3.1운동 당시 만공이 취한 생각이나 행적은 무엇이었는가? 알려진 사실이 있다면 밝히고 없다면 추론이라도 하여야 할 것이다.
선학원과 관련하여 의문이 가는 사실은 과연 선학원을 주도한 인물을 만공으로 볼 수 있을까? 선학원에 참여한 인물은 선학의 연구에서 이미 밝혀져 있듯이 白龍城․金石頭․吳惺月의 경우처럼 항일의식의 소유자와 白龍城․金南泉․康道峯․韓雪濟 등 불교천양의식이 강렬한 포교사로 나누어 볼 수 있다.
  물론 만공은 선학원의 卜地를 한다거나 불상을 직접 조성하고 토지를 보시하는 등 선학원 설립 및 운영에 참여하였으나, 그 보다 적극적으로 참여한 인물은 범어사의 南泉이나 吳惺月, 그리고 만공의 제자인 寂音이 아닐까 하는데, 이 점을 좀 더 명확히 하여야 하지 않을까 한다.

  둘째, 선학원의 낙성 4 개월이 지난 1922년 3월 선풍진작을 위한 구체적인 활동으로 善友共濟會가 탄생하게 되는데, 이의 창립취지서에는 ‘일제의 종교정책에 관한 언급이 없는 것은, 아마도 표면적으로 지나치게 자극하는 것이 이로울 것 같지 않아서 그랬던 것인 듯 하다.’라는 정광호교수의 견해를 그대로 인용 주장하고 있는데, 이러한 사실은 독립운동이라는 측면과 연계해서 볼 때 너무나 소극적인 처사가 아닌가?
  그리고 1924년부터 자금난으로 선학원과 선우공제회가 운영난에 봉착하여 공제회사무소를 직지사로 옮기는 등 어려움을 격고 있는데, 이 때 만공이 취한 입장은 무엇이었는가? 이는 당시 불교계의 일부 승려들이 자금을 걷어 상해임시정부로 보내준 사실과 너무나도 대비되는 사실이 아닌가?

  셋째, 1931년 1월 만공의 제자인 金寂音이 선학원을 인수한 직후 만공은 韓龍雲․白龍城․柳葉 등과 함께 일반 대중을 위한 설법․강화 등의 행사를 거행하면서 점차 선학원을 대중적 운영의 방향으로 추진하기 시작하고 1934년 초 재단법인 朝鮮佛敎中央禪理參究院이 설립되어 만공이 이사장으로 선출되었다.
  여기서 만공이 한용운․백용성 등과 함께 참여하면서도 9,000원 상당의 田畓을 기부한 것 외에 선학원이나 그 재단을 위해 행한 사실은 없었는가?

  넷째, 이후 선학원은 조직 정비와 위상 강화를 위해 1935년 1월 5일에 ‘朝鮮佛敎禪宗 宗憲’을 공포하면서 만공이 수석종정으로 거명되고  1935년 3월에 열린 제3차 朝鮮佛敎首座大會에서는 재단법인 禪理參究院의 운영기구로서 宗務院이라는 새로운 기관을 만들고 임원 선거를 하게 되는데, 여기서 만공은 申慧月․方漢岩과 함께 종정으로 선출되는 등 선학원 계열 수좌들의 정신적 지주로서 높은 존경을 받고 있었다.
  발표자도 지적했듯이 이는 일제의 사찰령 지속이라는 현실에서 그것을 배척하고 한국 불교의 전통을 수호하려는 일단의 의식의 발로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혹 만공이 이러한 것을 산문에서 실제 노력한 흔적이 나타나고 있는지, 그리고  그것이 당시 불교계에 미친 영향이 있었는가?

  다섯째, 1941년 만공이 朴漢永․鞠黙潭 등의 碩德 34명의 청정비구들과 함께 모인 가운데 개최되었던 遺敎法會에서 朴漢永과 함께 법사로 초대되어 처음으로 普照長衫을 입고 ꡔ梵網經ꡕ․ꡔ遺敎經ꡕ 내지 우리나라 조계종의 종지를 설하였다. 이 법회는 일제의 불교정책과 일본 불교의 침투로 인하여 한국의 청정승풍의 전통이 희미해지는 것을 방지하여 전통 佛脈을 구현해 보자는 목적 하에 개최된 것이다. 만공은 여기서 계율을 올바로 지키고 선을 진작시켜 한국 불교의 바른 맥을 이어가자는 설법을 하였다.
  발표자도 서술했듯이 유교법회는 일제시대에 있었던 마지막 법회로, 물론 그 발단에는 일제의 저의가 숨어 있었다 하더라도 결과적으로는 선학원 수좌들의 전통불교 수호의지를 재확인시켜 준 법회였다고 평가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일제의 저의, 즉 이 고승법회에서 일제의 學務局이 적극적으로 후원해 주었다는 사실을 어떻게 이해하여야 할까? 독립운동이라는 측면을 부각시키는 차원에서 좀더 구체적인 설명이 필요하지 않을까 한다.
  그리고 만공은 백용성 등이 일제당국에 대처육식 금지에 관한 건백서를 내는 등 적극적인 입장을 취하였는데(사실은 이 문제도 독립운동의 한계로 지적되기도 하지만), 만공이 이 문제에 대하여 취한 입장은 무엇인가?

  여섯째, 만공은 일제 치하에서 전국 31개 본산 주지 중에서 유일하게 創氏改名을 하지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제의 사찰령에 의해 시행된 31본산 주지인 마곡사 주지를 왜 하게 되었는가하는 구체적인 경위와 설명이 필요하다.
  그리고 1937년 만공이 일제 총독 南次郞 앞에서 일대 사자후를 토했던 사실을 매우 높게 평가하였다. 이에 대해서 발표자는 ‘조선에 사찰령이 시작된 지 26년만에 조선 승려로서, 일본총독이 보는 앞에서 이 정도로 정면으로 사찰령을 비판했던 예가 일찍이 없었다. 이것은 1920년대부터 줄기차게 사찰령 폐지를 주장하였던 조선불교청년회(유신회, 만당) 운동 보다 한 걸음 더 나아간 것이며, 1930년대 초 선학원 재건과 함께 높아진 선종 수좌들의 위상과 자신감 아래에서만 가능했던 일이었다.’ 고 하였다.
과연 그렇게 볼 수 있는지 좀더 구체적인 설명이 필요하며, 이와 관련하여 만공의 독립운동이라 할 수 있는 사실 가운데 발표자가 간주하는 가장 값진 것은 무엇이라 생각하는가?

  마지막으로, 만공과 만해와의 관계, 그리고 만공이 차지하는 불교계 독립운동사에서 차지하는 위상문제에 대해서 이다.
  발표자는 만공과 만해, 두 선사의 독립운동에 대한 기본적인 입장이 달랐으면서도 교우관계가 지속되었던 것은 무엇때문인가? 발표자의 지적처럼 비록 방법은 조금 달랐지만, 일제에 항거해서 한국 불교의 본래면목을 회복해야 한다는 의식만큼은 결코 다르지 않았기 때문인가?
  그리고 발표자가 시작하는 말에서 만공을 만해와 더불어 불교계의 대표적인 독립운동가로 규정을 지었는데, 과연 불교계의 독립운동사라는 차원에서 그렇게 볼 수 있겠는가 묻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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