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교이야기/인곡당(법장스님)

3집 제2주제 논평:「滿空月面의 禪思想 考察」을 읽고

淸潭 2008. 2. 22. 17:57
 

3집 제2주제 논평:「滿空月面의 禪思想 考察」을 읽고

 

종호스님(동국대)


  Ⅰ.

  근세의 대선지식 鏡虛禪師의 문인으로 스승과 함께 근대 선풍을 중흥시킨 滿空月面禪師의 선사상을 살펴본다는 것은 선을 가까이 하거나 그렇지 않은 사람을 막론하고 무척 의미 있는 일이라고 본다. 진정한 선승의 삶이 무엇인지 몸소 실천해보인 선사일뿐만 아니라 난세의 한 세대를 살아가면서 고통과 아픔을 느껴야만 했었을 한 선조의 인간적 고뇌를 엿볼 수 있기 때문이다.
  스승 경허와 달리 행적과 사상 등 여러 면들에 대한 조명이 그리 많지 않은 만공선사에 대해 그 선사상을 고찰한 효탄스님(이하 논자로 칭함)의 논문은 평자에게 선사의 수행관과 사상 등 여러 면모를 이해하는데 많은 도움이 되었음을 먼저 밝히고 싶다.
  하지만 평자에게 부여된 임무가 논문의 이모저모를 살피고 개인적 견해를 덧붙여야 하는 역할이라 먼저 논문의 내용을 개괄적으로 살펴보고, 평자의 보다 넓은 이해를 위해 몇 가지 질문을 첨언할까 한다.

  Ⅱ.

  논문은 크게 만공선사의 생애와 시대인식, 선사상, 사법제자와 문도의 셋으로 나누어져 있지만 핵심은 주된 주제인 선사상에 집중되어 있다.
  우선 ‘생애와 시대인식’을 언급한 곳에서는 출가 이전과 득법시기, 그리고 교화를 거쳐 입적기까지의 세 단계로 나누고, ‘萬法歸一 一歸何處’ 및 ‘無字’話의 참구와 오도, 득법, 그리고 제방 여러 선원에서의 조실과 선학원 건립 및 선우공제회 구성 등의 행적에 대해 기술하고 또한 그 의미를 언급하고 있다.
  두 번째 선사상 부분에서는 修行觀과 修行道의 둘로 나누고 있는데, 수행관으로는 대강백으로 명성을 떨치면서 선․교를 구분하지 않았던 스승 경허와 달리 일생 간화참선만을 견지했다는 것, 그리고 이를 바탕으로 선의 대중화와 참선의 생활화를 꾀했다는 내용을 밝히고 있으며, 수행도에서는 信心․憤心․疑心의 간화 三要 중 만공은 특히 ‘信心’쪽에 비중을 더 두어 강조하고 있다는 것과, 덕숭산을 중심으로 한 최적의 수행도량, 선지식의 중요성을 밝힌 道師, 그리고 감화력을 주는 도반이라는 공부의 삼대 요건을 언급하고 있다.

  Ⅲ.

  우선 논자의 이런 관점을 중심으로 몇 가지 질문을 하고, 이후 개인적 의문점을 덧붙이고자 한다.

  1. ‘생애와 시대인식’에서 논자가 밝히고 있는 것처럼 만공이 불교 내부의 자정운동만이 아니라 사회적 측면에도 지대한 관심을 가지고 있었던 것을 알 수 있다. 선사는 논자의 기술처럼 선의 대중화와 참선의 생활화를 시도했었고, 이를 통해 불가내의 자정운동과 사회적 역할의 증대를 추구했다. 이는 「경허․만공의 선사상 연구」를 통해 박사학위를 받은 황경수씨가 논문에서 만공은 ‘현대세계에서 선을 통한 문제 해결의 열쇠를 제공했다’(p.176)고 하고 있는 것과 같은 지대한 의미를 갖는다.
  그런데 만공이 가졌던 것과 같은 이런 사상이 오늘날에 이르기까지 현실화되지 못하고 있다고 비판하고 있는 목소리가 있으며, 평자의 견해로는 만공선 고찰의 참다운 필요성은 바로 이런 문제에 대한 성찰에 있다고 본다. 특히 선승들의 시대의식 및 현실사회에 대한 안목을 요구하는 주장들이 있는데 이의 부재와 관련해 무엇이 문제이며, 이를 개선해야 한다면 그 방법은 무엇이라고 생각하는지 논자의 견해를 듣고 싶다.

  2. 논자는 만공이 선․교에 해박했던 스승 경허와 달리 일생 간화선만을 강조했다고 하며 그것을 만공선의 독특성처럼 기술하고 있다. 사실 이는 선사의 법어 전반에 나타나 있는 주요 가르침으로 선사가 강조했던 내용인 것만은 분명하다. 그런데 여기에 문제는 없는 것인가? 곧 이를 장점으로 보아야만 하는 것인가?
  교학에 대한 선사의 이런 시각은 定慧雙修나 捨敎入禪을 이야기했던 보조나 서산 및 스승 경허에 이르기까지의 기존 관점과는 다른 것이며, 현대에 들어서도 교학 부정과 배제에 대한 비판의 시각이 많다. 심지어는 현대학 전반에 대한 학습을 역설하는 목소리도 있으며, 이는 종교의 사회화를 통해 그 종교의 이상세계를 구현하게 된다는 외적 시각에서 볼 때 개연성이 있기도 하다.
  선승들은 오로지 선수행에만 매진해야 하는가, 아니면 정혜쌍수나 교관겸수의 입장도 필요한 것인가? 이에 대한 논자의 견해를 듣고 싶고, 만약 후자라면 만공의 ‘看話一門論’에 대한 논자의 直說을 듣고 싶다.

  3. 수행도에서 논자는 信心․憤心․疑心의 간화 三要 중 만공은 특히 ‘信心’쪽에 비중을 더 두어 강조하고 있다는 것을 밝히고 있다. ‘신심을 강조하는 만공의 이러한 간화선풍은 일반적인 간화선풍과는 다소 차이가 있는 것’이라 하면서 ‘선학원 고승법어에서도 한 조각 밝음의 진실한 신심으로 법문을 들을 것과 지극한 정성과 간절한 신심을 가져야만 일이 헛되지 않음을 강조하고 있다’(p.15)는 것이다. 논자는 이런 관점에서 ‘신심이 갖주어진다면 의정과 분심을 자연히 따를 것’이라 하면서 신심에 대한 강조를 만공선의 한 특색적 형태로 기술하고 있다.
  그런데 이와는 달리 그의 법어에는 ‘사람을 대할 때에는 자비심으로 대해야 하지만 공부를 위하여서는 極惡極毒心이 아니면 八만 四천 번뇌마를 쳐부수지 못하나니라’(ꡔ만공법어ꡕ, p.258)라든가, ‘諸山 衲子여! 憤을 발하라!’(ꡔ만공법어ꡕ, p.217)라는 등 오히려 분심을 가져야 한다는 내용도 있고, 실제 신심․분심․의심이라는 삼요설 중 만공은 분심에 중점을 두었다는 기존의 견해도 있다.(정성본, 「만공선사의 생애와 선사상 연구」ꡔ한국불교학ꡕ 22집, p.146)
  또한 일반적으로 간화 삼요 중 신심과 분지가 중요한 것만은 분명하지만 이는 결국 大疑團을 갖기 위한 하나의 전제조건으로 말해진다. 즉 화두 일념의 상태를 이루기 위한 필요조건이지 그 자체를 간화의 요체로 볼 수는 없다는 것이다. 흔히 誦話頭에서 寤寐一如까지의 8단계나 혹은 永劫一如까지의 13단계 간화수행을 이야기하고 있는데, 곧 이의 아래 단계에서는 신심과 분지가 필요조건으로 작용할 수 있지만 動靜一如나 夢中, 오매일여의 참구의 단계에 들어가면 그러한 것이 붙을 여지가 없을 뿐더러 있다면 오히려 바른 간화수행이 되지 못하게 되는 것이다. 다시 말해 간화의 요체는 의단에 있다는 말이다.
  만공의 삼요설 중 핵심이 ‘신심’보다 ‘분지’에 있다는 위의 내용에 대한 논자의 견해와, 신심을 중시한 것이 만공이라면 선사의 이런 시각과 의단을 강조한 기존의 관점 사이에 어떤 차이와 특징이 있는지 듣고 싶다.

  4. 道場과 道師, 道伴을 언급한 修行道에서 논자는 만공이 “‘도량․도사․도반의 3애 요건이 갖추어진 곳을 떠나지 말 것이니, 석가불 3천운에 덕숭산에서 3聖․7賢이 나고 그 외에 무수 도인이 출현할 것이다. 나는 육체에 의지하지 아니한 영원한 존재임을 알라. 내 법문이 들리지 않을 때에도 사라지지 않는 내 면목을 볼 수 있어야 한다.’고 하여 덕숭산을 최적의 도량이라고 말하였다”(p.15)고 하고 있다.
  인연 있는 곳을 찬하는 것은 좋은 일이라고 본다. 그러나 이는 자칫 잘못하면 다른 지역에 대한 부정과 폄하의 시각을 담고 있는 것으로 비쳐질 수 있고, 나아가 지역주의에 얽힌 이기심과 배타의식을 가져올 우려가 있다고 본다. 또한 문중을 비판적으로 보는 일부 현대 승가 구성원들의 시각도 또한 이러한 것에 연유하고 있다고 알고 있다.
  선사가 비록 덕숭산과 오랜 기간동안 깊은 인연을 맺고 있고 그것을 칭탄하고 있는 것은 사실이지만 그의 도량에 대한 시각을 조실을 지냈던 유점사와 마하연이 있는 금강산이나 오대산 및 팔공산 등 그의 행적이 스며있는 전체로 확대해보는 것은 잘못일까? 전불교적 차원에서 선사의 이런 설을 반드시 논자의 논술처럼 덕숭산을 중심으로, 또는 긍정적으로만 보아야 하는 것인지 논자의 견해를 듣고 싶다.

  5. 만공선사가 31본산의 주지회의를 열어 조선불교의 일본화를 획책하던 총독부의 미나미총독에게 ‘청정이 본연커늘 어찌하여 산하대지가 나왔는가’라는 말과 함께 벽력같은 할을 하고, 전임 총독인 데라우찌가 대처와 육식, 음주를 허용하여 계율을 파하고 불교의 일본화를 시도한 죄 때문에 지금 무간지옥에서 허덕이고 있다고 하며 조선불교의 말살정책 철회와 정교분리를 요구한 일화는 너무도 유명하다. 우리는 여기에서 어떤 어려운 환경속에서도 당당함을 잃지 않는 진정한 선승의 참모습을 발견하게 된다.
  그러나 평자는 진정한 불국토의 실현은 정교분리가 아니라 정교일치의 환경이 훨씬 바람직하다고 생각한다. 정교분리는 신본주의의 상황속에서 이른바 인간의 이성이 힘을 얻어가면서 주창된 내용이다. 하지만 선은 직관을 통한 바른안목의 구비를 요구하고 이에 의해 오히려 체득된 진리의 현실화, 생활화를 추구한다. 맹목적 맹신주의가 아니라 근원의 체득을 통해 지극히 합리적이고 이성적이며 실제성을 띠고 있는 것이 선이다. 변질된 불교와의 일치는 옳지 않지만 궁극적으로는 정교일치의 환경을 만들어 가는 것이 불국토 구현을 위한 보다 더 효과적인 방법이 될 수 있다는 것이다. 실제 국왕의 부름을 거절했던 일부 선사들도 있지만 수많은 조사들이 철저한 시대의식과 현실관을 가지고 현실에 참여한 행적을 보이고 있기도 하다.
  이런 면에서 선사의 정교분리 주장을 구분해 볼 필요가 있다고 보는데 논자의 견해는 어떤 것인가? 즉 선의 기본관점이라고 여기는 것인지 아니면 시대환경에 따른 선사의 방편접인행이라고 보는지 듣고 싶다.

  6. 선사는 「무자화두 드는법」이라는 법문에서 ‘깨달음이란 어느 한정된 기간에서 성취하는 것이 아니고 그 지극한 마음에 따라서 고요한 밤 밝은 달을 보고 도를 깨닫기도 하며, 새벽 종 소리를 듣고 도를 깨닫기도 하며…(ꡔ만공법어ꡕ, p.238)’라든가 ‘혹 도를 깨달음에 다시 닦고 닦아 증득한다 하나, 월면의 아는 바는 그렇지 아니하여 본래 잃어버린 것이 없어 다시 증득할 것이 없어…(동, p.239)’라 하고 있고, 또한 「나를 찾는 법 - 참선법」에서는 ‘참선을 하여 인생 문제만 해결되면 億生 億劫에 지은 갖은 악, 갖은 죄가 다 소멸되나니, 그 때는 四생 六취에 헤매는 고생을 다시는 받지 않게 되나니라.’라 하고 있다.
  이는 수행의 실참론이 아니라 과정에 대한 이론적 접근이라는 점에서 말장난이라 소치되고 있기도 한 頓悟頓修에 대한 내용이다. 돈오돈수는 정통 조사선에서 견지하고 있는 기본관점이긴 하지만 한국의 경우 보조로부터 서산에 이르는 모든 조사들이 한결같이 일관해 온 돈오점수와는 다른 내용이다.
  돈점론에서 이야기하자면 많은 부분을 언급할 수 있겠지만 선사의 이런 돈오돈수 주장은 한국에서 최초라고 여겨지며, 이런 점에서 커다란 의의를 가지는 내용이라고 본다. 논자는 선사가 이렇게 설파한 사상적 배경이 있다고 생각하는지, 있다면 그것이 무엇인지 묻고 싶다.

  7. 마지막으로 선은 21세기 인류의 정신문화를 이끌어갈 수 있는 유일한 대안이라고 이야기하는 주장이 있다. 절대자를 중심으로 한 신본주의와 인간의 이성적 능력을 극대화시키려는 인본주의의 사유나 행동양식에 의해서는 더 이상 인류를 구원할 수 없으며, 이분법과 일원론의 구조를 떠나 직관의 수행으로 본질과 현상의 일치를 이루고 이를 삶 속에서 그대로 구현해 내는 것이 바로 21세기 인류의 귀결처이며, 그 방법론이 바로 선이라는 것이다.
  이와 관련해 만공의 선사상에서 21세기 정신문화를 선도할 어떠한 구체적 내용을 엿볼 수 있는지 논자의 견해를 들었으면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