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교이야기/인곡당(법장스님)

德崇禪學 3-2 제2주제 발표:만공의 선사상

淸潭 2008. 2. 22. 17:56
 

德崇禪學 3-2 제2주제 발표:만공의 선사상

 

효 탄(동국대)


  Ⅰ. 序 言

  滿空 月面(1871~1946)禪師는 근대 선풍의 중흥자인 鏡虛 惺牛(1849~1912)禪師의 뒤를 이은 전법제자로, 경허의 뒤를 이어 德崇山을 중심으로 선풍을 진작하였다는 것은 주지의 사실이다. 그러나 만공선사 사후 ꡔ滿空法語ꡕ가 간행되었으나, 그의 사상이 과연 어떠한 특징을 가지는가 밝힌 것은 극히 드물다. 최근 만공선사의 생애와 선사상에 대한 본격적인 연구가 한 두편 발표된 것은 그나마 다행한 일이라고 하겠다.鄭性本, 「滿空禪師의 生涯와 禪思想 硏究」, ꡔ韓國佛敎學ꡕ22輯, 1997, 春季.

  이것은 스승인 경허선사의 그늘에 가려 오직 경허의 선사상경허에 관한 논문, 李性陀, 「鏡虛禪師와 韓末의 佛敎」, 佛光 62, 불광사. 李性陀, 「鏡虛禪師의 禪世界」, ꡔ韓國佛敎學ꡕ弟22輯, 1997, 春季. 韓重光, ꡔ경허-길위의 큰스님ꡕ, 한길사, 1999.
을 계승하여 진작시키는데 공헌하였다고 말해지고, 만공선사에 대해서는 진실한 모습을 살펴볼 수 없었기 때문으로 여겨진다. 만공선사는 법어의 내용이나 논지를 살펴볼 때 경허와 동일하게 參禪法을 주장하고 있다. 그러나 스승 경허선사와 달리 그 나름대로 자신의 선사상을 전개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그것은 그가 살던 시대가 또 다른 상황에서 만공을 필요로 하였기 때문이다. 본 글에서는 만공선사의 선사상에 접근을 시도하여 근대 간화선이 만공을 통해서 어떻게 전개되었으며, 아울러 경허선사의 선사상과 비교하여 어떠한 특징을 가지는지 살피고자 한다.



  Ⅱ. 生涯와 時代認識

  한 사람의 생애는 그가 처한 시대상황과 무관할 수 없다. 더구나 선각자의 경우 그가 어떠한 시대인식을 가졌는가는 생애와 밀접한 관계를 가진다. 한 사람의 삶의 여정은 그가 처한 시대인식에서 나오는 것이며 이 둘은 상호 영향을 끼치기 때문이다. 만공선사의 생애에 대해서는 圓潭 眞性이 쓴 「滿空月面大禪師行狀」에 의하여 자세히 살펴볼 수 있다.「滿空月面大禪師行狀」 ꡔ滿空法語ꡕp.298~309, 德崇山 修德寺 能仁禪院, 1982. 이하 만공스님 및 제스님의 호칭은 ‘스님’을 생략함을 양해를 구한다.

  만공선사의 생애는 크게 세 시기로 나누어 볼 수 있다. 1871년 3월 출생한 이후에서 출가 이전까지와 13세에 출가한 이후 1904년 경허로부터 전법한 시기, 그리고 전법 이후 교화를 하고 1946년 10월 75세로 입적한 시기까지이다. 그러나 출가 이전의 기록은 일반적 고승이 그렇듯이 알려진 바가 없으니  2년(1871)년 3월 7일 전북 태인군 태인면 상일리에서 출생하였으며 礪山 宋氏로 속명은 道岩이라는 것이 전부이다. 그후 13세 때 金山寺에서 불교와 첫 인연을 맺은 얼마 후 전주 棲鳳寺․松廣寺를 거쳐 논산 雙溪寺의 진암노사를 �아 다시 계룡산 동학사로 가 14세 때 진암노사의 문하에서 출가하였다(1884). 동년 10월 그는 天藏庵의 경허화상이 東鶴寺로 와 대중과 함께 하던 중 경허에게 추천을 받아 서산 천장사의 太虛를 모시게 하였다. 동년 12월 8일 태허를 은사로 경허를 계사로 사미계를 받고 법명을 월면이라 하였다. 이 때 경허선사는 이미 오도한(1881년) 이후 20여년을 천장암․開心寺․浮石寺․修德寺 등 주로 湖西지방에서 선풍을 일으키며 활약하던 시기이다. 출가 이후 25세까지 만공의 기록이 보이지 않는 것은 그가 사미의 신분으로 불법 제반에 대하여 익히며 수련기를 지냈을 것으로 여겨진다. 만공선사는 25세 1893년 11월 한 소년이 천장암에 와서 묵으면서 ‘萬法歸一 一歸何處’의 화두를 물은 것을 계기로 ‘만법귀일 일귀하처’의 화두를 들고 공부에 전념하였다. 온양 鳳谷寺에서 정진하던 중 1895년 7월 25일 一圓相이 나타나는 신이를 경험하였으며 새벽종성을 할 때 ‘應觀法界性 一切唯心造’를 외우다가 문득 오도송을 짓기도 하였다.‘空山理氣古今外 白雲淸風自去來 何事達摩越西天 鷄鳴丑時寅日出’ 「滿空月面大禪師行狀」.
그로부터 공주 마곡사 보경화상의 토굴에서 3년간 정진하기도 하였다. 26세인 병신년 1896년 7월 경허선사가 천장암에 �아오니 이때 수행정진과 깨달음의 견처를 말하니 ‘불꽃 속에 연꽃이 피었다’ 고 평하였다. 이어 ‘토시와 부채’에 대한 질문과, ‘有眼石人齊下淚’를 물었으나 경허는 만공이 아직 완전한 깨달음의 경지에 이르지 못함을 파악하고 조주의 ‘無字話頭’를 참구하도록 하며 원돈문을 짓지말고 경절문을 다시 지으라고’하였다. 이 후 오로지 ‘무자화두’ 열심히 참구하였다. 이후 동래 범어사 鷄鳴庵禪院에서 경허선사를 초청하니, 경허는 20여년간 호서지방에서의 교화를 영남지방으로까지 넓히게 되었다. 이 때 계명선원에서 스승을 모시고 하안거를 지냈으며 31세 1901년 통도사 白雲庵에서 정진 새벽 예불시 종소리에 오도하고 1901년 7월 말 다시 천장암으로 돌아왔다. 이 때 즉시 스승인 경허를 �지 못했던 것은 멀리 떨어져 있었기 때문인 듯하다. 34세인 1904년 7월 15일 경허선사가 함경도 甲山으로 가는 길에 천장암에 들렀을 때 깨달음의 경지를 보이니 입실을 허락하고 인가의 전법게를 내렸다. 경허는 만공이라는 호를 내리며 ‘佛祖의 慧命을 자네에게 이어 가도록 부촉하노니, 잊지말고 받아 지녀라.’고 하였다.‘雲月溪山處處同 叟山禪子大家風 慇懃分付無文印 一段氣權活眼中’, 「滿空月面大禪師行狀」.
35세인 1905년 봄에 덕숭산에 金仙臺 茅庵을 짓고 임운자재하며 보림하였다. 이 때 제방의 납자들이 설법을 간청하니 開堂說法을 하기 시작하여 법탱의 깃발을 드높이기 시작하였다. 만공선사는 1931년에 금강산 유점사 조실楡岾寺 禪院 祖室, ꡔ禪苑ꡕ 1號, 楡岾寺 禪院 會主 ꡔ佛敎ꡕ 81號.
, 1933~1935년 승가사․금강산 마하연 조실僧伽寺 禪院, 摩訶衍 禪院, 中央禪院 등의 籌室, ꡔ禪苑ꡕ 4號. 金剛山佛敎會 顧問 ꡔ金剛山ꡕ 2號.
로 3하를 지내고, 오대산, 팔공산 성전 등 제방을 두루 유력하였다.金剛山, 毗盧峰, 泰華山, 五臺山, 八公山 聖殿, ꡔ滿空法語ꡕ 五臺山釋尊頂骨塔墓讚揚會發起人 ꡔ佛敎ꡕ 81號.
66세 때인 1936~1937년 잠시 마곡사 주지를 역임하기도 하였으나麻谷寺住持就職 認可 ꡔ佛敎時報ꡕ 4號, 진산식 ꡔ佛敎時報ꡕ5호. 66살 마곡사 주지 역임, 1937년 3월 11일 조선총독부 회의실에서 南次郞 總督에게 일갈함.
수덕사修德寺, 報德寺 住持, ꡔ朝鮮佛敎總報ꡕ 9號.
와 정혜사, 견성암 중창하며 40여년을 덕숭산을 무대로 활동하였다. 만공선사의 사법제자 대부분 이 시기에 인연을 맺었다. 그런가 하면 서산 看月島에 看月庵을 중창하기도 하였다. 말년에 덕숭산 동쪽에 轉月寺 한칸 모암을 짓고 홀로 달과 더불어 유희하였다.
  그런가하면 만공선사는 1920년부터는 수좌들의 권익을 위하여 서울 중앙에 진출하여 禪學院 건립에 힘썼으니 창립 발기인으로 참석한 것을 시작으로 禪友共濟會를 구성하였으며 1931년 선학원 재건과 관련하여 이후 선학원이 禪理參究院으로 재단법인화하는 데에도 적극 동참하였다. 이후 조선불교선종의 종헌의 제정과 함께 대표 종정으로 추대되어 활약하기도 하였다.禪理參究院 理事長 및 宗正, ꡔ東亞日報ꡕ 1935. 3. 13.
1941년에는 일제의 식민지불교정책에 항거하여 한국 전통불교의 고수와 투쟁을 선언하여 선학원에서 고승대회 遺敎法會를 열었을 때도 대중을 이끌어 나갔다.禪學院 遺敎法會 參加, ꡔ佛敎時報ꡕ 69號.
1941년 6월 總本山建立運動으로 曹溪宗이 출범하자 조계종 종무고문으로 擎山․慢庵과 더불어 조계종 종무고원으로 취임하였다.曹溪宗 宗務顧問 ꡔ佛敎 新ꡕ 31輯.
1946년 10월 20일 세수 75세 법랍 62살로 입적하였다.
  만공선사는 1891년 구한말에 태어나 대한제국시대를 거쳐 일제 압제기를 지나고 광복에 이르기까지 그야말로 다사다난한 시기를 살다갔다. 그가 출가한 1884년에는 개화파에 의한 甲申政變이 일어난 시기이다. 나라의 국운은 개화의 물결과 이를 틈탄 열강들이 조선을 넘보고 있던 풍전등화와 같이 위태한 시기였다. 이러한 현실 속에서 일찍이 세상의 무상함을 느끼고 암울한 유년시절을 뒤로 하고 출가한 듯하다. 그는 출가한 이후 줄곧 깨달음을 얻기 위해 자기 내면과의 치열한 투쟁을 벌였다. 이것은 일체 외부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먼저 자기자신과의 싸움에서 이겨야 한다고 깊이 통찰하고 있었기 때문이 아닌가 한다. 경허선사로부터 전법한 1904년은 국내에서 露日戰爭이 일어난 어지러운 때이다. 그는 자신과의 철저한 투쟁으로 몇차례의 깨달음을 경지를 체득하고 1904년 드디어는 경허에게 깨달음을 인가받고 홀로 우뚝설 수 있었다. 그야말로 자기와의 싸움에서 승리를 거둔 것이다. 그 후 그의 활동은 첫째, 덕숭산을 중심으로 한 선풍을 일으킨 것이였으며 둘째, 수좌들의 마음놓고 수행할 수 있는 여건을 조성하기 위한 선학원 건립 운동으로 집약할 수 있다.
  만공선사는 깨달음을 인가받고 제방을 두루 편력하였으나 그의 생애 가운데 대부분인 40여년을 덕숭산에서 머물면서 후학을 제접하였다. 즉 수행 교화면에서 주로 덕숭산을 중심으로 하여 정혜사, 수덕사에 거주하면서 후학을 지도하였다. 선사는 1905년 35세 정혜사 금선대를 짓고 개당법회를 연 이후 40여년간 이곳을 떠나지 않았던 것이다. 물론 금강산 유점사, 마하연선원 조실, 오대산, 팔공산 등 제방 두루 다니며 경허선사의 뒤를 이어 선풍을 일으켰으며 1937-1938년 麻谷寺 주지를 역임하기도 하였으나 1905년 이후 1946년 10월 20일 세수 75세 법랍 62살로 입적할 때까지 덕숭산을 떠나지 않았다. 그것은 그가 공부의 삼대조건- 道場․道師․道伴에서도 밝혔듯이 수행 도량의 최적지로 덕숭산을 택한 까닭이라 하겠다. 이와같이 이곳에서 보임과 성태를 키우며 한편으로는 많은 제자들을 지도할 수 있었기 때문에 훗날 덕숭산에서 선풍이 크게 일어날 수 있었던 것이며 1984년에는 덕숭총림을 설치하는 계기가 되었던 것이다.「叢林設置法」, 宗法 弟23號, 1967年 7月 27日 制定公布됨.
이와같은 사실은 스승 경허가 일정하게 머무는데 없이 두루 편력하며 함경도 갑산에서 和光同塵의 생을 마친 것과는 대조적이라 할 수 있다.
  그러나 만공선사는 산중에만 머물렀던 것은 아니었다. 안으로 덕숭산을 중심으로 선풍을 일으키며 후학을 양성하고 한 산중을 일으키는데 주력하였을 뿐만이 아니라, 밖으로 선풍을 진작하며 수좌들이 수행에 전념할 수 있는 풍토를 조성하기 위해 전국 규모의 제도적인 수좌 옹호 단체인 禪學院를 결성하는데 앞장섰다. 경허선사가 근대 선풍의 진작자라 한다면 만공선사는 그러한 기반을 더욱 탄탄하게 하고 그 터전을 확고히 하는데 크게 기여하였다 하겠다. 이와같은 그의 활동은 철저한 시대인식에서 나온 결과라 하겠다. 즉 만공선사는 당시를 ‘거의 수백년 이래로 국정의 압박과 여러 가지 폐해로 말미암아 大法의 광명이 黑雲에 가려 암흑한 구렁에 헤메는 중생의 앞길을 인도할 수 없을 뿐 아니라, 사라쌍수의 遺囑을 거의 저버리게 됨에 이르게 되고 백패가 다투어 일어남에 내부에 부패가 극도에 이르고 외계에 풍우가 또한 시급하니 부처님의 혜명을 쫓아 보전하기 어렵다’고 진단하였다. 따라서 ‘제산의 납자들에게 분을 발하고 대원을 세워 선우를 붙잡으며, 禪林을 부흥하고 玄風을 유통하여 위로 혜명을 영산에 잇고 아래로 心月을 龍華에 비추어 四重 은혜를 보답하며, 三途 苦趣를 도탈케 하여 법계 함령이 다 함께 성불케 하여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發願文」, ꡔ滿空法語ꡕ p217~218.

  만공선사의 이와같은 현실인식은 선학원 활동으로 나타났으니 크게 1, 2기로 나누어 볼 수 있다. 1기는 1920년 선학원 창립 발기인으로 참여한 때부터 선학원의 재편이 있게 된 1931년 3월 전까지로써 선학원 창립 초기부터 적극적인 관심을 보인 것을 알 수 있다. 만공선사는 1922년 3월 선우공제회 창립발기에는 吳惺月 이설운 白鶴鳴 외 79명이 동참하였고, 창립총회 참석에는 宋滿空․吳惺月․白鶴鳴을 비롯한 35명의 승려가 출석하였다.
에도 적극 참여하였으며, 선우공제회 修道部 理事로 활약하였다. 2기는 1931년 3월 선학원 재건운동 이후이다. 그는 3월 23일 선학원에서의 최초의 수좌 모임인 全朝鮮首座大會 참여하였으며佛敎首座大會, ꡔ東亞日報ꡕ 1935. 3. 13.
1933년 3월 선학원을 禪理參究院으로 법인화하는데 발기인으로 참가, 그동안 침체에 빠져 있던 선학원 재건운동에 적극 참여하였다.昭和 8年 癸酉年 3月 20日 수좌대회를 열고 朝鮮佛敎禪理參究院으로 개칭 재단법인화함. 발기인 宋滿空 金南泉 김현경 黃龍吟 奇石虎 윤서호 변유심 李坦翁 金寂音,ꡔ三笑窟日誌ꡕ-鏡峰大禪師日記, 極樂禪院, 1992, p.297. 1953년 7월 24일. 선사는 재단법인 전환을 위해 자금배분을 주도, 실무적인 역할을 하였음.
1934년 12월 조선불교선종 종헌의 공포와 관련하여는 조선불교선종 대표 종정을 역임하였다.首席 宗正으로 滿空, 그외 水月, 慧月, 漢岩이 종정으로 연서됨. 「朝鮮佛敎禪宗 宗憲 宣誓文」, 1934년 12월30일 제정, 1935년 1월 5일에 반포.
당시의 수좌들은 현실을 ‘邪魔’는 강력하고 ‘正法’은 미력한 상황으로 보고, 동시에 자신들을 ‘정통 수도승’라고 자부하면서 한국불교교단의 전통을 수호하기 위한 서원으로 본 宗憲을 제정하였다.당시 수좌들의 청정수도승단상이 무너지는 등에 대한 위기의식은 「朝鮮佛敎禪宗 宗憲 宣言文」에 잘 나타나 있다. 金光植, 「日帝下 禪學院의 運營과 性格」, ꡔ韓國獨立運動史硏究ꡕ 第8輯.
1935년 3월 7~8일 조선불교수좌대회 개최하였을 때 수장으로써 대중을 이끌었다.佛敎首座大會, ꡔ東亞日報ꡕ 1935. 3. 13.
한편 1937년 2월 총독부 회의실에서 개최된 31본산 주지회의에서 만공선사는 마곡사 주지 자격으로 참석하여 식민지 불교의 타락성을 지적하고 한국불교의 자립을 강조하였다.ꡔ佛敎 新ꡕ 3輯 1937. 5.
1939년에는 2차 조선수좌대회를 개최하여 명칭을 ‘조선불교선종정기총회’로 개칭하고 내외의 기반을 확고히 하였는데각 선원 동안거 방함록, 禪院消息, ꡔ佛敎時報ꡕ, 1940. 1. 1.
이러한 배경 아래 선학원은 1941년 2월 26일부터 10일간 ‘遺敎法會’를 개최하였다. 이 법회는 일제의 불교정책과 일본불교의 침투로 인하여 한국의 청정승풍의 전통이 희미해지는 것을 방지하여 전통불맥을 구현해보자는 목적하에 개최된 법회였다. 이 때 만공을 비롯한 여러 선사들의 ꡔ梵網經ꡕ․ꡔ遺敎經ꡕ․曹溪宗旨에 대한 설법이 있었다. 또한 기념사업으로 習定均慧 비구승만을 중심으로 하는 梵行團을 조직하여 선학과 계율의 종지를 선양하기 위한 노력을 하였다.‘교계조직, 선학원의 수좌대회, 梵行團 組織’ ꡔ佛敎時報ꡕ 69號, 1941. 4. 15.
또한 선학원의 한국전통선맥 계승의 노력은 이후 1942년 한국 근대선의 중흥조로 일컬어지는 경허선사의 문집인 ꡔ鏡虛集ꡕ 발간으로 이어졌다. 이 때 간행의 발기인으로는 만공선사를 비롯한 선학원 관련 인사 중심으로 40여명이 대거 참여하였다. 선학원 중심의 ꡔ경허집ꡕ 발간 노력은 선학원이 창건 이후부터 일관되게 추진한 한국전통불교의 계승 및 선 대중화의 정신과 맥을 같이하는 것이었다. 이와같은 일련의 선학원 건립 운동과 덕숭산을 중심으로 한 선풍의 진작은 선의 정신으로 어려운 시대를 이끌어나가고자 한 만공선사의 철저한 시대인식을 잘 알려주는 것이라 하겠다.

  Ⅲ. 滿空의 禪思想

  만공선사의 선사상은 ꡔ만공법어ꡕ를 통해서 잘 알 수 있다. ꡔ만공법어ꡕ의 체제는 上堂法語,  擧揚, 偈頌, 芳啣錄序, 發願文, 修行讚, 法訓, 行狀 등 8부분으로 되어 있다. ①상당법어는 「戊寅年 結制 法門」, 「世間相이 常住니라」, 「三世諸佛을 삼켜 다함」, 「日本人 總督 南次郞에게 一喝」 등 42편, ②거량은 「매미소리로 眼目을 보이다」 등 57 편, ③게송은 ㉠ 「경허법사의 遷化를 듣고 읊다」 등 경허화상에 관한 부분 3편, 및 달마 영찬, ㉡간월암 부분 3편, ㉢사법제자 전법게 15항 및 부분, ㉣歌吟 18편 ㉤輓章 부분 6편 등 모두 66편으로 구성되어 있다. ④방함록서는 「선림계 서」,  「덕숭산 정혜사 능인선원 방함록 서」, 「견성암 방함록 서」 등 3편이 실려있다. ⑤발원문은 「發願文」, 「四弘誓願」, 「三大發願」 3편이 실려 있으며 ⑥수행찬은 「參禪曲」, 「參禪을 배워 정진하는 법」, 「산에 들어가 중이 되는 법」, 「淸淨修行錄」, 「無字話頭 드는 법」 등 5편이 실려 있다. ⑦法訓은 「나를 �아야 할 필요와 나」, 「나를 �는 법- 참선법」, 「현세 인생에 대하여」, 「佛法」,  「佛敎」, 「僧尼란 무엇인가?」, 「대중처에서 할 行履法」, 「警句」, 「最後說」등 9편이 실려있으며 ⑧行狀 1편이 있다. 이와같은 법어의 내용을 분석하여 고찰하면 만공의 선사상의 특징을 발견할 수 있다.


   1. 만공의 수행관
    1) 參禪․看話一門論
  ꡔ滿空法語ꡕ의 내용을 살펴보면 그는 일생 수행에 있어서 참선․간화선법 만을 선양한 것으로 나타나 있다. 즉 교에 관한 일체의 언급 및 禪敎觀을 알 수 있는 것은 볼 수 없고 오직 선에 관한 것으로 일관하고 있다. 물론 上堂法語 곳곳에 ‘舊來不動名爲佛’, ‘若見諸相 非相卽見如來’ 등 경전어구를 인용한 것이 보이나 모두 선적인 해석을 위한 것이라 하여도 관언이 아니다.上堂法語 곳곳에는 ꡔ金剛經ꡕ, ꡔ虛空藏經ꡕ, ꡔ涅槃經ꡕ 등의 인용이 보이며, 이들은 넓게 선경에 포함할 수 있는 경전들이라는 특징을 갖는다.
그러나 만공이 출가 이후 곧 바로 화두 참구를 하였다고는 생각되지 않는다. 이 부분은 ꡔ만공법어ꡕ의 편집자의 의도적인 빠뜨림이 아닌지 의심이 가나 현재로서는 파악할 수 없다. 만공선사의 행장 중 14세 때에 출가한 이후 25세까지의 행적에 관해서는 일체 보이지 않고 있다. 따라서 그 기간 동안 어떠한 공부를 지었는지 알 수가 없다. 다만 이 기간동안 사미로써 경전과 일상의 儀式 등을 익히지 않았을까 추측할 뿐이다. 그런데 25세 때부터 ‘萬法歸一 一歸何處’의 화두를 들고 정진하였다는 기록이 처음 보인다. 26세 때 경허화상을 만난 자리에서 수행과 수행견처를 보이니 조주의 ‘무자화두’를 참구하도록 하고 ‘圓頓門을 짓지말고 徑截門을 다시 지으라’하였다. 이로써 보건대 25세 이전까지는 선과 교를 겸학하였지 않을까 추측할 수 있다. 이후 만공선사는 스승의 가르침에 따라 오로지 ‘무자’화두를 참구하였다. 이것은 스승 경허의 철저한 경험과 自內證에 의한 지도 방법이었다. 만공선사는 그가 뒷날 말한 수행의 삼대조건으로 도사․도량․도반 특히 스승, 선지식의 중요성을 누누히 강조하고 있다. 이것은 경허선사를 지칭하는 것이다. 경허선사는 원돈문인 경전 등 일체의 것을 짓지말고 오직 경절문인 참선․간화할 것을 제시하고 있다. 이와같은 가르침은 만공의 일생에 있어서 큰 좌표를 결정지어 준 것이라 하겠다.
  선가에 있어서 禪․敎一致의 문제는 줄곧 논의되어왔다. 이 문제에 대하여 일찍이 깊이 고뇌한 분은 고려후기 普照 知訥(1158~1210)이다.‘世尊說之於口 卽爲敎 祖師傳之於心 卽爲禪 佛祖心口 必不相違 豈可不竅根源 而各安所習 妄興論爭 虛喪天日耶’, ꡔ華嚴論節要序ꡕ, ꡔ韓佛全ꡕ 4, p.767.
고려말 太古 普愚․懶翁 惠勤 등이 원에 들어가 임제선을 수용한 이후 간화선법이 다시 풍미하면서 선 우위의 풍토가 조성된 감이 없지 않으나 선․교일치에 관한 논의는 언제나 이루어져 왔다. 그러나 조선시대에 들어와서 불교의 억압과 함께 특색없는 선․교양종으로 통합되고 말았다. 임진난 이후 서산휴정이 선법을 크게 일으키고 그 제자들의 노력에 의하여 선종 계보가 만들어지며 조선불교는 부흥의 기틀이 보이기도 하였다. 서산은 선승이었으나 선․교일치와 아울러 염불까지도 수용하는 자세를 보였다. 이러한 경향은 진허 팔관에 의해 ‘三門修業 ’-參禪門, 看經門, 念佛門’으로 정착되어 조선후기까지 내려왔던 것이다. 그러나 조선 말에 이르면서 내외의 어지러운 상황과 함께 불교계도 매우 혼미하고 그 힘이 약화되어있었으며 선․교의 구별도 없이 산중불교에 머물러 있었다. 이 때에 다 쓰러져가는 근대 선풍을 일으켜 세운 이가 바로 경허 성우이다.
  경허선사는 23세 때에 萬化 講伯의 뒤를 이어 동학사에서 11년간 교학을 연찬하고 일대 敎藏 및 儒典․老莊까지 섭렵하며 대강백으로 이름을 떨치고 있었다. 그러나 그는 34세 된 1879년 여름 옛 스승을 �아 한양으로 나선 길에 전염병을 만나 크게 발심한 후 교로써는 생사문제의 해답을 얻을 수 없다는 결론을 내리고 학인을 흩어버린 후 오로지 ‘驢事未去 馬事到來’의 화두를 참구하여 확철대오하였다. 1880년 봄 35세 때 연암산 천장암으로 가서 이듬해 6월까지 철저한 보림을 마치고, 닦음과 깨침의 과정을 다 거친 후 선과 교를 통달하고 확철대오한 경계에서 선․교가 둘이 아님을 선언하였다. 그는 「悟道歌」에서 ‘부처와 조사라고 이름하며 선과 교를 설하지만 무엇이 특별히 다른 것이 있겠는가. 분별만 냄이로다. 돌사람이 피리불고 목마가 졸고 있네「悟道歌」, ꡔ鏡虛集ꡕ, ꡔ韓佛全ꡕ 11, p.628~629.
’라고 노래하며 선과 교를 나누어 분별할 것이 없음을 천명하였다. 서산 휴정도 ‘말에서 잃어버리면 拈花微笑도 교의 자취가 될 뿐이고 세상의 온갖 잡담이라도 마음에서 얻으면 禪旨가 됨’을 밝히고 있다.ꡔ禪家龜鑑ꡕ, ꡔ韓佛全ꡕ 7, p.635.

  한편 경허선사는 선․교 일치 뿐만이 아니라 나아가 淨土(염불)도 수용하는 자세를 보이고 있다. 「藤菴和尙에게 주다」에서 ‘간화문에서는 惺寂等持하면 반드시 견성한다 하고 염불문에서는 一心不亂하면 결정코 왕생한다고 한다. 일심분란이 어찌 성적등지가 아니겠는가. 만약 일심불란을 他力이라 한다면 성적등지가 어찌 타력이 아니며, 만약 성적등지를 自力이라 한다면 일심분란이 어찌 자력이 아니겠는가.’라고 하여 간화문의 성적등지와 염불문의 일심불란이 다르지 않음을 밝히고 있다.「與藤菴和尙」, ꡔ鏡虛集ꡕ p.11~12.
이렇듯 경허선사 역시 선․교 일치와 나아가 정토 수용을 볼 수 있으나 그가 일관되게 주장한 것은 참선․간화를 통한 깨달음이었다. 그의 깨달음이 선을 통하여 이루어질 수 있었던 것에 볼 때 이것은 극히 당연한 일이라 하겠다.
  그러나 만공선사의 경우 경전에 대해서 ‘상당법어’ 등에 인용구가 보일 뿐이며 이것도 선적인 해석을 위하여 쓰고 있는 특징을 갖고 있다. 또한 6~7 편의 영가관련 게송도 역시 자유자재한 활안의 선풍을 보이고 있을 뿐영가와 관련하여 ‘게송’ 「輓惺月堂」, 「枕雲堂輓頌」, 「答枕雲堂臨終偈」, 「雲岩師輓頌」, 「爲昔湖靈駕」 및 경허관련 「聞鏡虛法師遷化吟」, 「於咸鏡道甲山郡熊耳面難德山下先法師茶毘時吟」과 상당법어에 「善行惡行」을 들 수 있으나 선행악행에 극락, 연화대 등의 명칭이 보일 뿐이며 이것도 선풍을 드러내는데 활용하고 있다.
오직 경절문에 의한 참선만을 강조하고 있다. 이러한 점은 경허선사가 많은 경전을 열람하고 대강백으로 이름을 드날렸던 것과는 크게 대조가 되는 일이다. 이것은 스승 경허의 수차에 걸친 간화․경절문의 현양과 그의 지도법에 따라 오직 간화 참선하였기 때문이다. 경허와 만공의 관계는 고려의 지눌과 혜심의 경우를 떠올리게 한다. 만공이 오직 간화선법만을 선양한 것은 지눌보다는 「狗子無佛性話揀病論」을 저술한 慧諶(1178~1234)에 더욱 가깝다. 이것은 지눌의 수행․오도의 과정과 혜심의 그것과도 구별되어 설명되어질 수 있는 것이다.
  佛祖가 말한 8만 4천 수행문 가운데에는 여러 방편이 있다. 활연대오해서 본래면목을 깨친  분상에는 8만 4천 법문이 모두 中道 實相․妙藥 아님이 없으며 正路 아님이 없다. 따라서 선․교일치를 말하고 염불문을 말하기도 하지만 선가에서는 일체 이론을 배제하고 오직 꽉 막힌 알 수 없는 공안을 관조해 나가는 간화 경절문만을 강조하고 있다. 그것은 간화선의 닦음과 깨달음의 구조가 8만 4천 수행법 가운데 가장 지름길이고 언제 언디서나 빈부귀천과 남녀노소 유식무식을 떠나 누구라도 닦을 수 있는 가장 수승한 수행법이기 때문이다.
  만공선사는 경허선사의 가르침대로 간화 참구한 뒤 확철대오하고 한결같이 간화선을 선양하고 있다. ‘修行讚’ 4편은 물론 그의 법어 전편은 참선법의 선양으로 일관하고 있는 것이다. 그는 간절하게 공안을 참구하는 법을 구체적으로 설명하고, 참선법이 돌아가지 아니하는 곧은 길, 경절문임을 단언하고 있다. 또한 참선법의 공부야말로 佛祖의 慧命을 잇고 佛恩을 갚는 것이라고 말하고 있다. 즉, 법어에서 무상을 사무치게 자각하고 머리에 불을 끄듯이 열심히 수행하며, 참선 수행해야 나고 죽음에서 해탈할 수 있음을 가르치고 있다.
  이렇듯 생사 해탈을 할 수 있는 참선법으로 주장되어 온 것은 구체적으로 간화선을 말한다. 간화선은 宋代 이후 화두에 의해서만 진리를 깨달을 수 있다고 본 수행방법으로 크게 유행하였다. 이러한 간화선은 眞如 佛性을 깨닫는 수행으로 우리나라에서는 고려시대 보조 지눌이 주창한 이후 太古 보우(1301~1382) 등에 의해 이어져 조선시대에 이르러 西山 休靜(1520~1604)으로 계승되어져 왔으며 오늘에 이르기까지 한국불교의 주요한 수행방법으로 자리잡고 있다. 간화선의 출발점은 分別 用心을 제거하고 자기 본심을 드러내는 공안 참구로 공부법을 삼고 있다. ꡔ傳燈錄ꡕ에 수록된 불조 1701인의 숫자에 따라서 천칠백공안이라고 하나, 법계의 森羅萬象 頭頭物物이 공안 아닌 것이 없다.
  佛祖의 기연언구인 공안은 불조가 일상의 언어와 일상의 몸짓으로 바로 실상을 열어 보인 것이며 붓다의 팔만 장교를 한 말귀 한 몸짓 안에 담아낸 것으로써, 모든 부처님의 면목이며 조사들의 골수이므로 간화 수행자가 반드시 타파해야 할 관문이며 수행인의 깨달음을 점검하는 법령과 같은 것으로 되어 있다. 그러나 공안은 이론이나 사량분별로 알 수 있는 것이 아니며, 오직 진여 불성을 사무치게 깨닫고 자기의 본래면목을 깨친 사람만이 알 수 있는 것이다. 마음의 눈을 떠서 확철히 깨쳐야만 알 수 있는 것이지 그 전에는 절대로 알 수 없는 것이다. 이론이나 사량 분별로는 도저히 알 수 없는 이 공안은 나쁜 지견이나 알음알이를 꺾는 무기, 생사 의심을 깨뜨리는 칼, 번뇌망상의 어둠을 밝혀주는 지혜의 횃불, 보고 듣는 것에 얽매인 결박을 끊어주는 날카로운 도끼, 성인과 범부를 가려내는 신령한 거울로써 알음알이를 못 붙게 하는 한 덩이 불과 같은 공능을 갖고 있어 수행인에게 지혜의 안목을 열어주고 본래면목을 깨닫게 하여 생사윤회의 굴레를 벗어나게 하는 것이다.
  간화선의 수행은 번뇌망상을 버리고 공안을 참구하는 것이 아니라, 일어나는 번뇌망상에 즉해서 알 수 없는 의심으로 공안을 참구하는데 요체가 있다. 생사를 버리고 열반을 구하는 것이 아니라 생사 속에서 바로 열반을 증득하며, 번뇌망상을 끊고 지혜를 �는 것이 아니라 번뇌 망상 속에서 바로 지혜를 증득하는 것이다. 번뇌 망상의 자성이 따로 있는 것이 아니고 그 성품이 바로 불성이기 때문에, 일어나는 번뇌 망상을 돌이켜 그 근원인 불성으로 돌아가는 것이 간화 수행법이다. 지눌은 ‘모든 부처님의 근원을 알고자 한다면 제 무명이 본래 부처임을 깨달으라’하였으며, 경허는 ‘無明의 참 性品이 곧 佛性이요, 허깨비 같은 빈 몸이 곧 法身이다.’「贈承華上人」, ꡔ鏡虛集ꡕ, ꡔ韓佛全ꡕ 11, p.596.
하였다. 그러한 모든 번뇌망상을 거슬러 올라가는 방법이 바로 공안참구이다. 일어나는 번뇌망상에 즉해서 자기의 본참 공안을 다만 알 수 없는 의심으로 한결같이 관조해 나가면 그 번뇌망상의 근원지인 마음자리, 곧 불성에 도달하게 되는 것이다.
  만공선사 역시 출가 수행인이 해야 할 일은 참선 만이 오로지 해야할 일이지 나머지 어떤 일이라도 생사의 윤회 업을 짓는 일이라고 하였다. 나아가 범 국민적인 참선교육의 중요성을 강조하여 학교교육에서도 필요하며 생사윤회를 영단하고 참된 인간을 완성시키기 위해서 전 인류에게 시급히 알려야 할 가장 중요한 것이다라고 하였다. 「發願文」에서는,

  8만4천의 법문이 부처님의 말씀이 아닌바가 아니나, 모두 아이의 울음을 그치게 함에 지나지 않고, 오직 마음을 바로 가르쳐서 見性 成佛케 하는 참선법이 있을 따름이로다. 삼계에 모든 불보살이 모두 이 법으로써 고해의 중생을 제도하시니 그러므로 이것을 正法眼藏이라 하며, 혹은 부처님의 心印이라 하며, 徑截門 또는 骨髓法이라 하나니, 선법을 여의고는 만가지 법을 모두 닦을지라도 부처님과 조사의 연설하신 참된 뜻이 나타나지 아니할 것이며, 중생 제도할 길이 어찌 막히지 아니하리오.

라고 하여 참선법을 간절히 주장하고 있다. 「本來 光明」에서도 덕숭산에 머무른 40년, 무엇을 위함이 이와같은가라고 말하며 또 「最後의 說法」에서도 道는 둘이 아니지만 도를 가르치는 방법은 각각 다르니, 문인들은 道節을 지켜갈 것을 간곡히 부탁하였으며, 도절을 지켜나가는 것이 法恩을 갚는 것도 되고, 정신적 시간적으로 공부의 손실이 없게 된다하였다.「나를 �는 법-참선법」, 「最後說」, ꡔ滿空法語ꡕ p.294.
도절을 지킨다는 것은 참선 수행하는 것을 말하는 것이다.
  그러한 참선법으로 만공선사가 구체적으로 제시하고 있는 것은 ‘無字話頭’이다. 그러나 일찍이 만공은 ‘만법귀일 일귀하처’ꡔ趙州錄ꡕ 222, ꡔ古尊宿語錄ꡕ 弟40券, ꡔ碧巖錄ꡕ 45.
화두를 들고 정진하였다. 그리고 ‘만법귀일 일귀하처’ 공안을 학인들에게 권하고 있는 점으로 보아 이 공안의 참구에서 힘을 얻었음을 알 수 있다.

  내가 처음 들던 화두는 곧 ‘만법이 귀일이라 하니 일은 어디로 돌아갔는고?’를 의심하였는데, 이 화두는 二重的 의심이라 처음 배우는 사람은 ‘만법이 하나로 돌아갔다고 하니, 이 하나는 무엇인고?’하는 화두를 들게 하는 것이 가장 좋으리라. 하나는 무엇인고? 의심하여 가로되 의심한다는 생각까지 끊어진 寂寂하고 惺惺한 無念處에 들어가야 나를 볼 수 있게 되나니라.「나를 �는 법-참선법」 32. ꡔ滿空法語ꡕ p.255.


  만공선사는 ‘상당법어’ 등에서 보여주듯이 살활자재한 선풍을 자유자재로 활용하였으며, 여러 공안으로 제자를 제접하였으나 주로 사용한 것은 역시 ‘무자화두’이다. 그는 일찍이 스승인 경허의 가르침에 따라 무자화두를 들고 정진하였으며 그를 통해 깨달음을 얻었다. 무자공안은 趙州의 ‘無字’ 공안을 말하는 것으로서, 大慧 宗杲(1089~1163)는 조주의 무자공안을 중심으로 간화선을 대성시켰다. 그는 승속을 막론하고 많은 제자를 접할 때 무자공안을 제시하였으며 무자화두를 널리 보급 시킨 이후 간화라면 무자화두가 대표가 되었다.
  경허선사는 「藤菴和尙에게 주다」에서 어느 때 어느 곳에서나 번뇌망상을 무자공안 위에 돌이켜서 의심해오고 의심해 가면 깨달음에 계합됨을 설하고 있다. 그리하여 일체시 일체처 에 빛을 돌이켜보고 이 공안을 들고 오고 들고 가며 의심하여 살펴서 다시 관하여 갈고 다시 닦아서 사량 분별심과 세간의 번뇌심을 다만 무자 위에 돌이켜 놓고 공부하기를 날이 오래고 달이 깊으면 자연히 깨달음에 계합하니 굳건한 마음을 판단하여 처음부터 끝까지 달리 함이 없으면 그 도를 이루기 쉽다고 하였다.「與藤庵和尙」, ꡔ鏡虛集ꡕ ꡔ韓佛全ꡕ 11, p.593.
만공선사도 「무자화두 드는 법」, 「산에 들어가 중이 되는 법」 등에서 자세히 ‘무자화두’에 대하여 언급하고 있다.
  한 승려가 趙州스님에게 묻되, ‘개도 도리어 불성이 있습니까, 없습니까 하니 조주스님이 이르기를 ’無‘라 하셨으니, 조주는 무엇 때문에 無라 하였는가.’ 이 생각을 고양이가 쥐를 생각하듯, 닭이 알을 품듯, 일심으로 지어갈 때 개가 불성이 있음도 아니요, 개가 불성이 없음도 아니요, 개의 불성이 있고 없고 두 가지가 다 공하여 아주 없는 곳도 아닌 곳을 향하여 들어가다, 取不得 捨不得하여, 공부를 지을래야 지을 수 없으며, 놓을래야 놓을 수도 없는 즈음에 寂夜 三更에 그림자 없는 금송아지가 쇠벽을 뚫고 나오더라.「무자화두 드는 법」, 「산에 들어가 중이 되는 법」, ꡔ滿空法語ꡕ p.237, 229.


  이렇듯 만공선사는 ‘앞 생각과 뒷 생각이 서로 끊어짐이 없이 샘물이 흘러가듯’ 간단없는 공안참구법으로 무자화두을 제시하고 있다. 대승경전에서 보여주고 있는 ‘一切衆生 皆有佛性’의 내용과는 상반되는 무자화두를 통해 오히려 왜 ‘無’인가를 참구함으로써 왜 ‘有’인가를 깨달을 수 있는 것이다. 또한 ‘무자화두’는 이러한 의심으로 일체 번뇌 망상을 쳐부수고 ‘無念處’에 들며 나아가 ‘참 나’를 �아 견성할 수 있는 좋은 방편이 되기 때문인 것이다.
    2) 禪의 大衆化․生活化
  ꡔ만공법어ꡕ 가운데에는 승려 뿐만이 아니라 일반 대중에게 쉽게 참선 정진하기를 권하는 글이 있으니 「參禪曲」, 「參禪을 배워 精進하는 법」이 그것이다. 이것은 일반인이 접근하기 어려운 현묘한 법어나 거량 등의 형식이 아니라 일반적으로 부르기 쉬운 가사로 되어 있다. 이것은 일견 경허선사의 「法門曲」, 「參禪曲」, 「可歌可吟」과 같은 형식임을 알게 한다. 일찍이 범패에서 시작한 불교가사는 일반 대중이 접하기 쉬운 향가로 발전하여 元曉․月明․永才 등 여러 선각자들이 「無碍歌」를 비롯한 다양한 불교가사를 널리 보급하였다. 이러한 전통은 고려시대에는 均如의 「普賢十願歌」 등으로 이어졌고, 대중 사이에 鄕言으로 된 노래가 계속 유행하였다. 그러한 전통이 경허선사에 와서 「참선곡」, 「법문곡」, 「가가가음」으로 나타나고 있다. 즉 과거에는 가사의 형식을 빌려 불법의 대중화를 위한 것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 참선을 대중화․생활화시키기 위하여 이러한 형식을 빌리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형식이 만공선사에게는 4언 절구 형식을 빌려 간략하나 더욱 간절하게 나타나고 있는 것을 알 수 있다. 「참선곡」에서는,

  참선하세 참선하세 젊었을 때 참선하세 노인불수 파거불행…
  이러므로 불타께서 범소유상 개시허망 곳곳마다 느낌일세…
  虛妄二字 있을진댄 眞實二字 있을 일은 증명할일 이아닌가
  사람끼리 서로불러 대답하는 나의 정신 죽도 않고 살도 않고
  생사윤회 간섭없는 昭昭靈靈 나의 불성 사람마다 다 있건마는 있는건지 없는건지…
  이러므로 싯달태자 정반왕궁 급히 떠나 설산유곡 깊이 들어 육년수행 참선하여 …
  홀연正覺 하셨으니 호를 丈夫 天人師라 우리들도 발심하여 싯달태자 본을 받세

  특유의 역설과 비유로 표현된 선세계는 자칫하면 그 깊은 이치를 이해하지 못하는 대중들에게 어려울 수 있다. 또한 선은 인식과 표현방법에서 파격적인 특징이 있다. 만공선사는 참선법은 온 국민 뿐만이 아니라 세계가 배워야 할 것이라고 하였다. 참선만이 생사를 해탈할 수 있는 길이고 나아가 불조의 혜명을 잇는 것이라고 누누히 말하였다. 따라서 참선이 얼마나 필요한가를 대중에게 적극 알릴 필요가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누구나 읊조릴 수 있는 곡의 형식을 취하여 참선의 필요성을 강조하여 선을 대중화․저변화․생활화시켜야 하는 것이다. 한시나 법문, 거량은 식자층만이 알 수 있다는 명백한 한계가 있다. 따라서 날로 강도를 더해가는 일제의 압제에 맞서고 많은 사람들에게 선법을 널리 알리기 위하여 곡을 짓은 방법을 함께 취하고 있는 것이다. 만공선사의 「참선곡」, 「참선을 배워 정진하는 법」은 만공이 대중 교화와 선의 생활화를 꾀하고 있다는 것을 한 번 더 확인시켜 준다 하겠다.
  선을 대중화․생활화시키고자 한 것은 모든 사람들이 선을 익혀서 생사 해탈할 수 있게 함이다. 일체 중생은 如來藏의 존재이다. ‘일체 중생에게는 다 불성이 있다’는 如來藏思想은 일체 중생의 본질이 여래장이며, 불성임을 선언하여 깨침의 가능성과 보편성을 일체 중생에게 활짝 열어놓고 있다. 또한 自覺․覺他․覺滿이라는 불교의 궁극적 목적을 이룰 수 있는 이론적 토대이고 불교의 모든 교설에 중심사상으로 내재되어 있으며 특히 선불교의 중요한 사상적 기틀이다. 그렇기 때문에 모든 중생이 깨달음을 얻을 수 있는 가장 수승한 법으로 참선법을 제시하고 있는 것이다. 참선법은 ‘一心’의 이 한마음을 깨치는 빠르고 바른 길이다. 삼세의 부처님이 깨친 것도 바로 이 마음이며 대장경이 드러낸 것도 바로 이 마음이며 모든 조사가 서로 전한 것도 바로 이 마음이며 이 마음의 본체가 바로 불성임을 말하고 있다. 경허선사는 자기의 本來面目을 깨닫고 보면 중생성 그대로가 佛性이요, 색신 그대로가 법신이라고 하였으며 만공선사도 「淸淨修行錄」에서 사람에게 法身, 業身, 色身 세가지 몸이 있으니 그 차이는 깨우침을 얻고 못 얻고에 있는 것이라 하였다. 이러한 관점에서 만공선사는 사람이면 누구나 참선하여 깨달을 수 있다는 것을 강조하였으며 참선하기를 권하였으니 「참선곡」이야말로 선의 대중화, 참선의 생활화, 저변 확대화를 꾀한 것이라 하겠다. 이렇듯 만공선사는 스승 경허의 선의 대중화․생활화 정신을 계승하고 있으며 경허의 「참선곡」 등과 「중노릇하는 법」에서 말한 내용보다 더욱 구체적이며 적극적으로 참선을 생활 속에 구현할 것을 강조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黃泰震, ꡔ德崇山門의 禪敎觀 硏究ꡕ, 東國大 博士學位論文, 1998. p.154.

  한편, 만공선사는 개인적인 수행에 머물러 있던 차원의 선법을 대중적․결사적 차원으로 생활화시키고 있는 것을 알 수 있다. 이와같은 것은「선림계서」, 「견성암방함록서」, 「정혜사능인선원선림계서」를 통하여 확인할 수 있다. 芳啣錄이라는 것은 無爲正法의 삼먁삼보리를 증득하기 위해 모여 참구하는 대중을 이름함이니 석가세존의 靈山會上이며, 미륵보살의 龍華會上도 이와 같음이다. 이와같은 아름다운 모임이 역사적으로 결사정신으로 면면히 이어져 내려져 왔으니 우리나라 선가에 있어서는 지눌의 定慧結社와 了世의 白蓮結社가 대표적이다. 경허선사가 일찍이 1899년 봄, 54세 가야산 해인사 조실로 초대받고 가을에 국왕의 칙명으로 추진하는 대장경 간행불사 증명하였으며 修禪社를 창설하고 이어 범어사 계명암, 화엄사 상원암에서 선원을 개설하며「海印寺修禪社蒡啣錄序」, 「梵魚寺設禪社稧宜序」, 「梵魚寺鷄鳴庵修禪社蒡啣淸規文」,  「華嚴寺上院菴復設禪室定完規文」, 「結同修定慧同生兜率同佛果稧社文」, ꡔ鏡虛法語ꡕ.
인연있는 곳을 따라 선풍을 진작시켰다. 이 때 경허선사는 「범어사계명암수선사방함청규문」,「화엄사 상원암을 복원하고선실을 시설하여 정하는 완규문」에서 대중의 규범을 세우고 있다. 즉, 계명암 청규문에서 중생의 교화와 정법의 유통을 위함이라 하며 10조항에 걸쳐 간곡하게 대중수행처에서 지켜야 할 규범을 세우고 있다. 또한 이것을 대중과 함께 의논하여 결정할 바이며, 일단 정해진 뒤에는 임의대로 바꾸지 못하는 떳떳한 법이라고 하였다. 만공선사는 이와같은 경허의 결사정신을 덕숭산을 중심으로 다시 계승하였다. 결사는 ‘붓다의 근본정신으로 돌아가 부처님 법 답게 살자’는 운동이다. 이렇듯 선원을 창설하고 下安居․冬安居를 개설하는 것은 이른바 일종의 結社精神을 계승한 것이다. 또한 만공선사 역시 결사정신을 계승한 선의 대중화․생활화를 위하여 이것을 실천 가능케하는 규범을 구체적으로 정하고 있다. 「대중처에서 할 행리법」과 「덕숭청규」에서,

  중은 물질본위로 사는 동물적 인간계를 떠나야 할 것이니 너와 내가 하나인 정신세계의 집단생활이 중의 생활이다… 중은 반드시 대중에 처하여야 하며 대중을 중히 생각하여야 한다… 대중 시봉이 곧 부처님 시봉이다.…중은 먼저 忍辱할 줄 알아야 한다.…대중의 辱됨을 내가 혼자 받을 마음을 가지며, 대중을 위해서는 身命을 아끼지 않아야 한다.「大衆處에서 행할 行履法」, ꡔ滿空法語ꡕ p.286~289.


1. 立繩의 지도를 절대 복종할 사
1. 身命을 액기지 말고 용맹으로 정진하라.
1. 금번 山林에 참학 要畢하기를 同盟할 사
1. 禪院내에 黙言을 엄중히 할 사
1. 禪定 중 睡魔를 엄금할 사
1. 산림 중 出他를 불허할 사
1. 淸規를 한가지로 위반� 시난 축출할 사定慧寺 能仁禪院에 滿空禪師가 무궁화 붓필로 쓴 것임.


  만공선사는 「大衆處에서 할 行履法」에서 출가 수행승은 반드시 대중처에 처해야 하며 대중을 중히 여겨야 한다는 기본 입장을 분명히 하였다. 나아가 대중 시봉이 곧 부처님 시봉이라 하며 대중과 화합하여 사는 법을 말하고 서로 존경하며 시비심을 끊고 공익심과 평등심으로 살며 인욕하고, 대중을 위해서 신명을 아끼지 않아야 하며, 대중처에 처하여 자기의 직무만을 충실히 지켜가면 대중 질서에 조금도 어지러움이 없다고 하였다.「大衆處에서 할 行履法」, ꡔ滿空法語ꡕ, p.286~289.
이와같이 만공선사는 결사정신과 이것을 실천시킬 수 있는 대중 규범을 세움으로써 선의 대중화와 생활화를 실현시키고자 하였다. 대중처에 거처한다는 것은 뒤에 언급할 도량․도사․도반의 3대 조건을 충족시켜 주는 것이기도 하는데 이러한 조건을 갖춘 대중처에 처하는데에는 일정한 질서가 있어야 함은 말할 나위도 없다. 이와같은 선문에서의 대중생활과 청규를 지키는 것은 백장청규 이래 선문 및 총림에서 하나의 규율로써 면면히 내려왔던 것이다. 이러한 정신은 경허에 이어 다시 만공에 의해 계승되는 것을 볼 수 있다. 이것은 선의 보급과 대중화 및 생활화를 위하여 기여하였다고 할 수 있다.

   2. 만공의 修行道
    1) 信心․疑心․憤心
  간화선의 수행법은 세단계로 나누어 볼 수 있다. 즉 바른 자세(調身)․바른호흡(調息)․바른 참구(調心)이다. 조신․조식․조심이 활구참선의 세가지 요건이라면, 크나큰 신심(大信心)․크나큰 분심(大憤心)․크나큰 의심(大疑心)은 올바른 공안참구의 세가지 기본요건이다. 高峰 原妙(1238~1295)는 ꡔ高峰和尙禪要ꡕ에서 간화 수행에 있어서 세가지 중요한 것으로 大信根․大憤志․大疑情을 구족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ꡔ高峰和尙禪要ꡕ, ꡔ卍續藏經ꡕ 122, p.714.

  요컨대 자기가 본래 부처임을 크게 믿고 큰 분한 마음을 일으켜서 공안을 크게 의심하는 것이 바른 공안 참구의 세가지 기본 요건인 것이다. 크나큰 신심과 크나큰 분심, 그리고 크나큰 의심으로 진실하고 간절하게 고요하고 깨끗하게 급하지도 느슨하지도 않게 또렷 또렷하고 고요하게 세밀히 끊어짐이 없이 일체의 알음알이와 사량분별을 버리고 오직 알 수 없는 의심으로 어느 때 어느 곳에서나 공안을 참구해 나가야 함을 말하고 있다.『화엄경』에서는 ‘믿음은 도의 근원이요 공덕의 어머니이며 일체의 선법을 증장시킨다’ 고 누누히 믿음의 중요성을 강조하고 있으며 대혜는 바른 믿음(正信)과 바른 뜻(正志)이 부처를 이루고 조사가 되는 기본임을 역설하면서, 신심과 의심이 공안 참구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임을 밝히고 있다.
  그러나 이 세가지 가운데 역대 조사들이 가장 중요시 강조한 것은 大疑情, 즉 큰 의심이다. ‘큰 의심 끝에 반드시 큰 깨달음이 있다.’ꡔ大慧普覺禪師普說ꡕ, ꡔ大正藏ꡕ 47, p.886.
고 한 것은 이를 한마디로 바로 나타낸 것이다. 無門 慧開(1183~1260)는 ꡔ無門關ꡕ 1칙에 조주의 무자 공안을 두고, 온 몸이 하나의 의심덩어리가 되어야 祖師關을 뚫을 수 있음을 말하고 있으니 ‘360골절과 8만 4천 털구멍으로 온 몸에 한 개의 의심 덩어리를 일으켜 이 ’無字‘를 참구하여 주야로 들어가라.’ꡔ無門關ꡕ, ꡔ大正藏ꡕ 48, p.293.
고 하였다. 일찍이 고봉은 ꡔ선요ꡕ에서 간절한 마음이 있으면 참 의심이 일어나고, 참 의심이 일어나면 번뇌가 끊어지고 혼침과 산란이 모두 제거되어 한 생각도 나지 않게 됨을 설파하였다.ꡔ高峰和尙禪要ꡕ, ꡔ卍續藏經ꡕ 122, p.719.

  경허 역시 부처가 되려면 내 마음을 깨달아야 함을 단언하고, 내 마음을 깨닫는 경절문으로 공안을 참구하되 항상 마음을 집중하여 간절하게 의심해 가면 필경 내 마음을 깨닫게 된다 하여 大疑心의 필요성을 강조하고 있다. 또 어느 곳 어느 때라도 의심하고 의심하되 고양이기 쥐 잡듯이 주린 사람 밥 �듯이 목마른 이 물 �듯이 늙은 과부 자식을 잃은 후에 자식 생각하듯 간절하게 참구해야 하며「중노릇하는 법」, 「法門曲」, 「參禪曲」, ꡔ鏡虛集ꡕ, ꡔ韓佛全ꡕ 11, p.597, 635, 631.
지극히 간절한 마음으로 참구하여, 참구한다는 마음조차 없는 경지에 이르면 홀연히 마음길이 끊어져 근본 생명자리에 계합하게 됨을 가르치고 있다. 「泥牛喉」 ꡔ鏡虛集ꡕ, ꡔ韓佛全ꡕ 11, p.590~591.
그리고  참선하는 이는 첫째로 무상함이 덧없이 빠르고 나고 죽는 일이 큰 것임을 두려워해야 하며 부지런히 정진하되 머리에 붙은 불을 끄듯이 할 것을 당부하고「結同修定慧同生兜率同成佛果稧社文」, ꡔ鏡虛集ꡕ, ꡔ韓佛全ꡕ 11, p.604.
광음이 덧없고 네가지 은혜가 지중함을 생각하여 慈明禪師와 歸宗禪師처럼 용맹 정진할 것을 누누히 당부하고 있다.「東來郡金井山梵魚寺鷄鳴庵創設禪社記」, 「參禪曲」, ꡔ鏡虛集ꡕ, ꡔ韓佛全ꡕ 11, p.610.

  이렇게 밤낮으로 용맹 정진하여 수마가 물러가고 혼침과 산란심이 끊어지고, 화두에 의심이 끊이지 아니하여 화두를 들지 않아도 화두가 현전하며, 종일토록 화두가 순일무잡하고 의심이 한 덩어리가 되어 꿈 속에도 또한 화두가 들리게 되는 이러한 경계를 得力이라고 한다. 화두에 대한 의심이 한 조각이 되어 화두를 들지 않아도 저절로 들려져 있는 득력의 상태에 이르면 큰 깨달음이 가까운 것이다. 이렇듯 화두 참구에서는 오롯한 의심을 가지고 용맹정징하여야 대오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런데 보조의 법을 이은 慧諶은 간화의 방편으로서 의심보다는 ‘信心’을 대단히 중요시 하고 있다. 혜심은,

  ‘그 문을 얻으면 성불도 당념을 떠나지 않고, 그 뜻을 잃으면 인을 닦기에 한갖 많은 생을 수고한다. 오직 信心에 있고 따로 방편이 없다. 그러므로 깊은 마음의 믿고 앎이 청정하다 하였고 또 믿음은 능히 여래의 지위에 이르게 한다.’「按察使中郞鮮大有請上堂」, ꡔ曹溪眞覺國師語錄ꡕ, ꡔ韓佛全ꡕ 6, p.8.


라 하였다. 즉 혜심은 깨달음에는 오직 신심이 있고 따로 방편이 없다는 말로, 신심의 방편이 소중함을 나타내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그 신심은 무엇을 가리키는 것인가. 신심의 내용은 다름아닌 ‘내가 곧 부처’라는 것이다. 실상에 있어서 누구나가 이미 空寂靈知를 갖추고 있으므로, 근본에 있어서는 성인과 범부가 조금도 차이가 없다. 그러므로 부처와 중생이 동일 진심임을 굳게 믿어야 하니 이것이 바로 ‘圓頓信解’이다. 원돈신해란 성불은 결코 먼 곳에 있는 것이 아니라 바로 지금 여기에서 이미 갖추어진 사실임을 바로 단박에 믿는 것이다. 일찍이 지눌은 교종과 선종이 현격하게 다른 현실 속에서 선․교의 합일을 체득하기 위하여 고뇌하였다. 그러다 ꡔ華嚴經ꡕ 출현품에서 ‘한 띠끌이 대천세계를 머금었다’는 비유와 ‘여래의 지혜도 그와 같아서 중생들 마음에 갖추어 있지마는 어리석은 범부들은 그러한 줄을 깨닫지 못한다’는 구절을 열람하고 눈물을 흘리며 감격하였다. 또한 李通玄의 ꡔ新華嚴論ꡕ을 얻어 범부들이 처음에 들어가는 문을 자세히 알고 이전의 앎이 더욱 밝아졌다.
  이러한 지눌의 원돈신해문이 혜심에게 있어서는 상당히 단순화되어 오직 화두 참구의 신 방편으로만 사용되고 있다. 결국 혜심은 지눌의 원돈신해문과 ‘신’방편이 그 내용상에 있어서 근본적인 차이가 없다고 본 것이다. 원돈신해문은 이치로 분별하여 불법에 들어가려고 하는 초학자들을 위한 별개의 교화방편이다. 그러나 간화선은 계급이나 차제가 없는 것이다. 혜심은 초심자나 숙련자에 관계없이 오직 간화로 입문하도록 권하고 있다. 따라서 지눌과 같은 별개의 교화방편으로서의 원돈신해문은 설정하지 않고 있다. 오직 간화의 방편으로서 신심이 의미를 지닐 뿐이다. 혜심은 ‘그것을 손에 넣게 될 때에는 노소의 구별이 없고, 어리석고 지혜로움에 관계가 없으며 마치 梵位를 가져다가 용렬한 사람에게 바로 주는 것과 같아서 다시는 계급이나 차례가 없는 것이니, 영가스님의 이른바 ‘한번 뛰어 여래의 지위에 바로 들어간다는 말이 이것이다’「示空藏道者」, ꡔ曹溪眞覺慧諶語錄ꡕ, ꡔ韓佛全ꡕ 6, p.31.
라고 오직 간화선법 만을 말하였다. 따라서 신의 방편도 경절문 안의 ‘信’인 것이다. 혜심은 이 도를 배우려는 이는 믿음으로써 출발을 삼는 것이라 하며 ꡔ화엄경ꡕ의 ‘믿음은 도의 근원이요, 공덕의 어머니가 되어 일체의 선법을 길러낸다’는 구절을 인용하여 신의 중요성을 거듭 말하고 있다. 「答鄭尙書」, ꡔ曹溪眞覺國師語錄ꡕ, ꡔ韓佛全ꡕ 6, p.45.

  여기에서 혜심이 중시하고 있는 것은 결정적인 믿음이다. 半信半疑하는 것이 아니다. 결정적으로 믿는다는 것은 마음이 바로 부처임을 믿는 것이며 부처의 마음이나 중생의 마음이나 결코 다름이 없다는 확신이다. 이 마음을 버리고 따로 마음이 없는 것이다. 조사의 문을 얻는 것은 오직 이러한 신심에 있고 따로이 방편이 없는 것이다.
  그런데 이 마음이 바로 부처의 근본이건만 다만 망상으로 스스로 막고 있으므로 만일 망상을 떠나면 마음이 저절로 앞에 나타나는 것이다. 그런데 망상을 떠나려면 화두를 드는 것만한 것이 없는 것이다. 번뇌망상을 떠난 상태, 즉 사량분별을 벗어난 상태를 ‘無心’이라고 표현한다. 당장에 망상을 비워 안과 밖으로 無事하면 곧 無心이니 곧 무심의 심이 眞心인 것이다. 따라서 더 이상 마음을 비운다거나 �으려 하는 것보다, 차라리 마음을 돌려 화두를 잡는 것이 낫다 하는 것은 무심조차도 간화를 통하여 자연히 달성되기 때문이다. 이러한 관점에서 선에서는 화두를 드는 것이다. 더 이상 마음을 비우고자 노력하거나, 진심을 �고 망심을 버리고자 노력하는 것이 아니라 아예 관심의 초점을 화두에 모을 따름인 것이다.
  결국 혜심의 간화선의 특징은 ‘내가 곧 부처’라는 확고한 신심을 바탕으로 하여, 일체 知解의 근원인 ‘待悟之心’을 타파한 상태에서 오로지 화두에 전념함에 있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혜심은 무엇보다도 신심을 강조하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혜심의 어록에서는 의심에 관한 적극적 권유는 �기 어려우며, 이와는 대조적으로 신심을 강조하는 표현이 상당수 많다. 그렇다면 만공의 경우는 어떠한 견해를 갖고 있는 것일까.

  남음 없는 信心만 있으면 도의 기반은 이미 튼튼해진 것이다. …선지식의 법문을 듣고도 흘려 버리고 하여, 信行이 없으면 법문을 다시 듣지 못하는 과보를 얻나니라. …信心․憤心․疑心 세 마음을 합하여야 공부를 성취할 수 있다. …신심만 철저하면 나의 正氣에 대상을 곧 정당화시켜서 자율적 성취가 있게 된다. …법문을 듣고도 신심이 동하지 않는 인간이라면 내세에는 다시 인간의 몸을 받기가 어려우니라. …공부를 잘하고 못하는 문제보다도 이 공부 밖에 할 일이 없다는 결정적 신심부터 세워야 하나니라. …믿음은 부처를 �아 오르는 발판이기 때문에 沒我的 믿음의 발판을 딛고 부처를 넘어 각자의 자기 正體를 �아야 하느니라.「나를 �는 법-참선법」, ꡔ滿空法語ꡕ p.251~252.


라고 하고 있다. 만공 역시 공부의 3대 조건으로 신심․의심․분심을 강조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이 가운데 특히 강조하고 있는 것은 신심 쪽이 아니가 한다. 만공선사는 신심이 투철하다면 그 나머지 의심․분심의 일은 다 성취될 수 있다고 보고 있다. 이와같은 신심의 강조는 혜심의 견해와 비견될 수 있다. 확고한 신심은 부처의 마음이나 중생의 마음이나 결코 다름이 없다고 확신하는 것으로서 조사의 문을 얻는 것은 오직 신심에 있고 따로이 방편이 없다는 것이다. 만공선사는 선학원 고승법어에서도 한 조각 밝음의 진실한 신심으로 법문을 들을 것과 지극한 정성과 간절한 신심을 가져야만 일이 헛되지 않음을 강조하고 있다. 만공의 신심을 강조하는 이러한 간화선풍은 일반적 간화선풍과는 다소 차이가 있는 것으로 여겨진다. 현재 한국선에 있어서는 확고한 신심의 제기가 약화되어 있지 않나 한다. 오히려 간화참구에 있어서 의심을 보다 강조하여 큰 의심이 있는 곳에 큰 깨침이 있다는 표현이 낯익다. 이와같은 것은 보우 이래로 전통적으로 내려온 것이다. 보우는 화두를 제시하고 설명함에 있어서 무엇보다도 의심을 강조하고 있으며, 특히 疑心, 疑團, 疑情 등의 표현으로 이를 거의 빠짐없이 거론하고 있다.「示廉政堂興邦」, 「示紹禪人」, ꡔ韓佛全ꡕ 6, p.679, 681.
그러나 엄격한 의미에서 보다 간절한 신심의 문제가 먼저 앞서야 하지 않을까 한다. 신심이 갖추어진다면 의정과 분심은 자연히 따를 것이며, 이 셋이 갖추어졌을 때 깨달음은 멀지 않은 것이다. 그런 면에서 볼 때 만공선사는 대의정, 큰 의심을 강조하는 보우 쪽보다는 큰 신심을 강조하는 혜심 쪽이 더 가깝다 할 수 있다.
    2) 道場․道師․道伴
  만공선사는 또한 도량․도사․도반을 공부의 삼대 조건으로 법어 여러 곳에서 강조하고 있다. 선사는 천장암․梵魚寺․浮石寺․報德寺․楡岾寺 등 제방을 유력하며 참선하였다. 그러나 그가 정작 오래 머문 곳은 덕숭산이었으며 주로 定慧寺였다. 그는 ‘도량․도사․도반의 3대 요건이 갖추어진 곳을 떠나지 말 것이니, 석가불 3천운에 덕숭산에서 3聖․7賢이 나고 그 외에 무수 도인이 출현할 것이다. 나는 육체에 의지하지 아니한 영원한 존재임을 알라. 내 법문이 들리지 않을 때에도 사라지지 않는 내 면목을 볼 수 있어야 한다.’고 하여 덕숭산을 최적의 도량이라고 말하였다.「最後說」, ꡔ滿空法語ꡕ p.294.

  만공선사가 이렇듯 덕숭산 도량을 중시한 것은 신라말 九山禪門의 개창과 비교될 수 있다. 신라말 선의 적극적인 도입이 이루어지고 이에 따라 선문이 개창되었듯이 경허의 뒤를 이어 쇠미해가는 선풍을 다시 일으켜 세우며 한 산중을 선문으로 크게 일으킨 것이다. 만공선사는 1904년 경허로부터 깨달음을 인가받은 후 임종을 맞이할 때까지 주로 40여년을 덕숭산에 머물면서 호서지방을 중심으로 활동하였다. 그는 덕숭산을 3성․7현과 무수한 도인이 출현할 땅이라 하였다. 「禪林稧서-懸羊賣狗」世尊應化 2954年, 1927年(丁卯) 金仙臺, 臨濟32代 沙門 滿空.
, 「見性庵蒡啣錄序」佛紀 2955年, 1928年(戊辰).
, 「德崇山定慧寺能仁禪會蒡啣錄序」佛紀 2964年 1937年(丁丑) 鏡虛禪師 嗣法 月面 滿空.
등도 이 곳에서 머믈면서 마련한 것이며 정혜사, 견성암, 수덕사, 간월암 등을 중창하였다. 그는 정혜사 능인선원 건물을 1932년 7월 사재 5천원을 들여 준공하여 선원의 기틀을 다졌으며修德寺에 能仁禪院 建築 宋滿空 禪師의 偉業, ꡔ每日申報ꡕ 1932. 6. 2.
비구니 선원인 견성암을 개창케 하였다.
  덕숭산 정혜사 아래에 위치한 수덕사는 寺記에 의하면 百濟末에 崇濟法師에 의하여 창건되었으며 백제 제 30대 武王 때 혜현이 법화경을 강론하였고 고려 恭愍王때 懶翁(1320~1375)이 중수한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일설에는 599년(법왕, 1) 지명법사가 창건하였고 元曉가 중수하였다고 한다. 수덕사의 사세는 조선조 大院君 시절인 19세기에 인근 가야산의 伽倻寺보다도 작았던 듯하다.金煐泰, 「百濟 古刹 修德寺의 史的 考察」, ꡔ韓國佛敎學ꡕ 弟22輯, 1997, 春季.
그러나 한말에 경허선사가 머물면서 선풍을 크게 일으키고 제자 만공이 중창하여 주목을 받기 시작하였다. 이후 1984년도에 이르러서 경허 -만공의 선풍을 잇는 덕숭총림이 발족됨에 그격을 높이게 되었다.
  그러한 정혜사 능인선원 바로 밑에 위치한 금선대는 경허와 만공이 향훈이 머물던 곳으로 현재는 鏡虛․滿空․慧月의 影幀을 모신 영각으로 사용되고 있다. 정혜사로 오르는 중간 쯤에는 만공이 세운 7m가 넘는 觀音石佛이 있는데 1924년 산 중턱의 자연석을 서 있는 채로 조성하였다. 1925년에는 관음석불 밑 약 5백미터 지점에 小林草堂을 지었다. 이 집은 만공선사가 굽은 나무의 자연미를 살린 재목을 쓰고 이엉을 얹고 약 5척의 탑형 토조 지붕상투를 올려 세웠다. 조금 위에는 만공 부도탑이 있는데 만공탑은 팔각 기단에 팔각기둥 셋을 받치고 그 위에 둥근 모양의 몸돌을 얹었다. 이 부도는 만공선사의 ‘世界一花’의 정신을 표현한 것으로 만공의 제자인 동경미술학교 출신 박중은이 1947년 세운 현대식 부도이다. 1941년 만공선사는 덕숭산 동편 산정에 일칸 모암인 전월사를 짓고 허공의 둥근 달을 굴리며 말년을 보냈다.
  한편, 정혜사 우축 위 동쪽에 자리잡았던 견성암이 언제 창건되었는지는 정확하지 않다. 그러나 만공이 정혜사에 주처하면서 비구니들이 스님을 의지처로 공부하면서 견성암이 생겨나게 된 듯하다. 당시 비구니 道洽이 시주와 대중의 힘으로 조그만 초가집을 짓고 정진을 시작하여 견성암 창건의 기초를 닦았다. 1913년에는 비구니 法喜가 이곳에서 머물며 정진하였고 1916년에는 비구니 최초로 만공에게 법을 인가받기에 이르렀다. 이로부터 많은 비구니가 �아와 정진하였으며 法喜․一葉․萬性․本空․智明스님들이 법을 이었다. 1928년 무진년에는 만공이 「見性庵芳啣錄序」를 직접 쓰니 이로써 전국에서 최초의 비구니 선원으로 확고하게 자리잡았음을 널리 알리는 기틀을 마련하게 되었다. 만공선사의 이와같은 비구니 선원의 개설은 현재 수행 승단의 반이상이 비구니이고 그것이 덕숭산 견성암에서 비롯되었다는 점에서 볼 때 그 의의는 자못 크다 하지 않을 수 없다. 이와같은 것은 그의 남다른 여성 출가자에 대한 남다른 따뜻한 배려와 자비의 마음에서 출발한 것이었다.
  또한 만공선사는 서산 간월암을 중창하였다.「題看月庵」, 「看月庵重創偈頌」, 「看月島巡廻路得竹吟」, 「於看月島贈瑞山郡守朴榮俊」, ꡔ滿空法語ꡕ.
간월암은 서산 서해 안면도와 육지의 중간점에 약 십리 앞에 잇는 간월도에 있다. 간월도는 백제 때 彼岸島라 하였는데 조선 태조의 왕사였던 無學自超(1327~1405)가 피안사에서 밝은 달을 보고 오도하였다고 하여 그 후부터 절 이름은 간월암, 섬 이름은 간월도라 불린다. 간월암은 조선왕조의 배불정책으로 헐리고 절 터에 묘를 썼던 것을 만공 스님이 옛 모습대로 복원하고, 즉후 조국 해방 천일기도를 올렸는데 회향 삼일만에 8․15 광복을 맞이 하였다 한다.
  만공선사는 도량의 중요성에 이어 導師-선지식의 중요성에 대하여서도 거듭 말하고 있다. 이것은 일찍이 경허와 같은 대선지식, 큰 스승을 만날 수 있었기에 깨달음의 성취가 있었으며 대해탈의 경지를 얻을 수 있었던 것을 볼 때 당연한 것이다. 1904년 해인사 印經佛事를 마감하고 2월 천장암에 도착한 경허에게 그간의 공부와 깨침의 경계를 낱낱이 말씀드리자 만공을 기꺼이 인가하고 만공이라는 법호와 전법게를 주었으며 그에게 후래 불법을 부촉하고  천장암을 떠나 북으로 향하였다.
  일찍이 ‘선지식은 곧 여래이며, 일체 법의 구름이며, 모든 공덕의 곳집이며, 만나기 어려우며, 열가지 힘의 원인이며, 다함이 없는 지혜의 횃불이며, 일체 지혜의 문이며, 지혜바다의 길잡이며, 일체 지혜에 이르게 하는 조도의 기구이다’.「入法界品」, ꡔ華嚴經ꡕ 卷68, ꡔ大正藏ꡕ 9, p60.
라 하여 그 중요성이 강조되어왔다. 그러한 선지식은 바른 길을 길을 곧게 가리키는 큰 인연이며, 교화하고 지도하여 부처를 보게 하는 것이니, 모든 착한 법이 다 선지식으로 말미암아 능히 일어난다. 그러므로 삼세의 모든 부처와 십이부의 경전들이 성품 가운데 본래부터 스스로 갖추어져 있다고 하나, 능히 자성을 깨치지 못하면 모름지기 선지식의 지도를 받아 자성을 보아야 하는 것이다.ꡔ六祖壇經ꡕ, 藏經閣, 1988, p.177~178.
경허도 무상함이 덧없이 빠름을 사무치게 깨달은 이는 급히 선지식을 �아야 생사해탈할 수 있는 바른 길을 지도받을 수 있음을 강조하였다.「泥牛吼」, ꡔ鏡虛集ꡕ, ꡔ韓佛全ꡕ 11, p.590.
만공선사는 참 나를 깨닫기 위해서는 청정한 도량․바른 선지식․훌륭한 도반의 3대 조건이 갖추어져야 하며, 특히 바른 선지식의 중요성을 거듭 강조하고 있다.

  참선은 절대로 혼자서 하지 못하는 것이니 반드시 善知識을 여의지 말아야 하느니, 선지식은 인생문제를 비롯하여 일체 문제에 걸림이 없이 바르게 가르쳐주느니라. …어느 각도에서 출발하던지 쉬지 않고 걸어가면 그 목적이 이루어질 수 있기는 하지만, 나를 발견하기까지는 선지식의 가르침이 없이는 될 수 없느니라. …선지식을 그 믿는 정도에 따라 자신의 공부가 성취되느니라. …이 법은 언어가 끊어지고 心行處가 멸한 곳에서 발견되는 도리니라, 마음과 마음이 서로 응답하여 상속하는 법으로, 선지식의 직접 가르침이 아니면 배울 수 없는 도리니라. …짚신 한 켤레를 삼는데도 선생이 있고, 이름있는 버섯 한 송이도 나는 땅이 있는데, 일체 만물을 총섭하는 도를 알려는 사람이 道人의 가르침 없이 도인이 될 수 있으며, 천하정기를 다 모아 차지한 도인이 나는 땅이 어찌 특별히 있지 않을 것인가.「나를 �는 법-參禪法」, ꡔ滿空法語ꡕ p.251~254.


  경허가 해인사 조실로 있었을 때 만공을 비롯하여 霽山과 南泉 세사람이 스승에 대한 믿음의 정도를 말할 기회가 있었는데 이 때 만공선사는 ‘나는 큰 스님을 위해서 무엇이든 할 것이라고 말하며 양식이 떨어져 공양 올릴 것이 없으면 살점을 오려드리고 나의 피를 마시게 하여 생명을 보존케 하여 세상에 나가 중생을 제도하게 하겠다’고 하였다. 이것은 만공의 스승 경허에 대한 흠모의 마음이 어느 정도 간곡한 것인지를 잘 나타내는 것이라 하겠다. 또한 법어집에도 「경허법사의 천화를 듣고 읊다」,「함경도 갑산군 웅이면 난덕산 밑에서 선법사의 다비를 모실 때 읊다」,「경허법사 영찬」「聞鏡虛法師遷化吟」, 「於咸鏡道甲山軍熊耳面難德山下先法師茶毘時吟」, 「鏡虛法師影讚」 偈頌 ꡔ滿空法語ꡕ p.162~164.
등 경허화상에 관한 부분 3편이 있다.
  만공선사는 선지식은 깨닫기 전에도 필요하나, 깨달은 후에도 이것을 결택해 줄 눈밝은 선지식을 �아 점검받을 필요를 강조하고 있다. 또한 ‘明眼祖師의 인가없이 자칭 선지식으로 남을 가르치는 죄가 가장 크다’「나를 �는 법-참선법」, ꡔ滿空法語ꡕ, p.252.
하였다. 일찍이 보우도 깨친 후에 반드시 本色宗師를 �아보아서 결택․인가를 받아야 한다「示眞禪人」, 「答方山居士」, 「示宣禪人」, 「參禪銘」, ꡔ太古和尙語錄ꡕ, ꡔ韓佛全ꡕ 6, p.678, 680.
고 하였으니 이와같은 사실은 禪家에서 누누히 강조되어온 것이다. 그 결과 선법의 전법, 선맥의 형성이 이루어져 지금까지 면면히 내려오게 하는 것이 되었다.
  한편, 만공선사는 道伴의 중요성에 대하여 ‘도반의 감화력은 선생의 가르침보다도 강한 것이다’.「나를 �는 법-참선법」, ꡔ滿空法語ꡕ, p.254.
라고 하였다. 그 외에 달리 도반에 대한 언급이 없으나 수행자는 대중처에 거처할 것을 권하는 것을 여러 곳에서 볼 수 있다. 대중처에 거처한다는 것은 도량․도사․도반을 자연히 갖추는 것이다. 만공선사는 덕숭산에서 대중을 거느리고 선풍을 일으키며 제자를 제접하였을 뿐 아니라, 선학원 건립과 운영에도 도반 및 대중과 함께 하였던 것을 볼 때 도반의 힘과 중요성을 그대로 체험하고 실제의 생활도 조화를 이루며 꾸려나갔음을 알 수 있다.
    3) 傳法 및 嗣法弟子
  만공선사의 스승인 경허선사는 1881년 6월 어느날 깨달음을 얻고 오도가를 불렀다. 이 때 ‘슬프도다 어이하리요. 대저 의발을 누구에게 전하리요, 사방을 둘러보아도 사람이 없구나.’라고 토로하였다. 그러나 경허의 이러한 바램은 헛되지 않았으니 그 후 만공을 비롯하여 수월․혜월․한암 등 많은 제자를 두었다. 이 때 경허는 근대 선맥의 재흥자로서 희미해져가는 선풍을 붙들어 일으켜 세우고 선맥을 정리할 필요를 느끼고 깨달음을 얻은 뒤 어느날 천장암에서 특별히 전등연원을 밝혔다.龍岩慧彦(1783~?)에게 법을 이어 도통의 연원을 정리하고, 만화강사로써 수업사를 삼음. 「禪師鏡虛和尙行狀」, ꡔ漢岩一鉢錄ꡕ, 漢岩大宗師文集編纂委員會, 民族社, 1996, p/303~304. 그러나 1902년 경허가 쓴 것으로 추정되는 「燈燈相續」에서는 용암혜언과 경허성우 사이 詠月奉律과 萬化普善이 더 들어 있고, 청허휴정의 13세손이며 환성지안의 9세손으로 되어 있다.
한편 경허의 제자로는 선사법어집간행회가 편찬한 ꡔ鏡虛堂法語錄ꡕ(ꡔ鏡虛集ꡕ)에 水月 觀音․慧月 慧明․龍城 震鐘․枕雲玄住․滿空月面․慧峰․漢岩 重遠을 밝히고 있다. 그러나 한암이 쓴 「선사경허화상행장」에는 침운․혜월․만공․한암으로 되어 있다. 경허선사의 수법제자이며 만공과는 같은 법형제이기도 한 침운과 혜봉에 관해서는 알려진 사실이 거의 없으며 수월(1855~1928)․혜월(1855~1937)․만공․한암(1976~1951)이 잘 알려져 있다.혜봉․수월에 관해 「門前哭聲-慧峰禪師」, 「湯器投擲-水月和尙」이 보인다, ꡔ滿空法語ꡕ.
수월․혜월․만공을 흔히 세 달이라고 일컫는데 수월은 주로 만주지방에서 20여년을 머물면서 북녘에 뜬 상현달이 되고, 혜월은 주로 영남지방에서 머물면서 남녘에 뜬 하현달에 되고 선학원 활동시 종정을 지낸 적이 있다. 만공선사는 주로 호서지방에 머물면서 보름달이 되어 일제의 탄압과 수탈로 신음하는 한반도와 만주 산하에 지혜의 달을 비추고 자비의 손을 드리웠다. 이러한 전법제자는 선법의 등등상속을 위해서 매우 중요한 것이며 불조의 혜명을 잇게 하는 것이다. 한암은 만공과의 서신문답이 「한암스님이 묘향산에 있을 때」, 「한암스님이 금강산에 있을 때」 2편이 있다.「書信問答-漢岩禪師」, 擧揚 p.98~99.
한암은 경허에게 인가를 받은 뒤 1905년 통도사 내원선원 조실로 추대되었으며 1910년 35세에 평북 맹산에서 활연대오하였으며 1925년 봉은사 조실로 추대되었으나 ‘천고의 말 없는 학이 될지언정 춘삼월 말 잘하는 앵무새가 되지 않겠다’는 말을 남기고 오대산 상원사에 들어가 27년간 산문 밖을 나오지 않았다. 1936년 조계종 초대 종정에 추대되었으며 1951년 입적하였다.
  만공선사는 사법제자로는 비구에는 寶月 性仁, 龍吟 法泉, 高峰 경욱, 惠菴 玄門, 田岡 永信, 圓潭 眞性, 雪峰 鶴夢, 碧超 鏡禪, 曉峰 圓明 등을 두었으며, 비구니로는 법희, 만성, 일엽, 선복, 지명, 명순 등과 청신녀 白蓮性「示白蓮性」 ‘死眼頭頭長無明 活眼頭頭白蓮性’ 偈頌 p.190.
등을 두었다. 보월,「堪辯禪子-於報德寺供養水瓜時」, 擧揚 p.90, 「飯價收穫-寶月禪和」, 擧揚 p.143~144, 「示寶月性印」 ‘色空空亦空 空色兩俱空 且道是何物 ○ 猛冬薄寒’ 偈頌 p.195.
용음,「揮毫一書」, 擧揚 p.105.
고봉,「拜告行脚」, 擧揚 p.107, 「喫茶獻茶-古峰禪和」 p.108. 「示古峰禪子」 ‘古佛猶未傳 今人豈能傳 雲散月白明 崇山是古峰’ 偈頌 p.197.
설봉「擧一指示」, 擧揚 p.133, 「與三十棒」, 擧揚 p.137, 「示 鶴夢禪子」 ‘眞無眞妄無妄 眞是眞妄是妄 如是眞妄眞如法 付與鶴夢雪峰子’ 偈頌 p.198.
에 관해서는 법어에 만공과 오고 간 대화가 몇편 실려있다. 보월의 경우 만공이 크게 칭찬한 제자인데 일찍 죽었으니 뒷날 만공선사는 보월이 일찍 세상을 뜬 것을 아쉬워하며 금오가 보월의 사법제자임을 대신하여 전법게를 내리기도 하였다. 전강 영신(1898~1975)은 1914년 해인사 인공화상을 득도사로 제산을 은사로 응해를 계사로 득도하였다. 대교를 졸업한 뒤 친구의 죽음을 보고 무상을 느껴 직지사 천불선원으로 가서 제산의 가르침을 받으며 불철주야 정진하였다. 예산 보덕사, 정혜사 등지에서 정진하였다. 23세 때 곡성 泰安寺에서 개오하고 오도송을 남겼다. 그 뒤 한암, 용성, 혜월스님을 �아 인가를 받았다. 그러나 만공이 여지없이 부인하고 상대하지 않으니 재발심하여 ‘板齒生毛’의 화두를 들고 용맹정진하여 확철대오하고 드디어 만공으로부터 인가를 받고 전법게를 받았다.「進拜祖室」, 擧揚 p.108, 佛祖未曾傳 我亦無所得 此日秋色暮 猿嘯在後峰 偈頌 p.198.
그 뒤 龍珠寺 중앙선원과 龍華寺 법보선원 등을 무대로 활동하였다. 金烏 太田(1896~1968)은 1911년 금강산 摩訶衍에서 출가, 직후 10여년간을 금강산과 안변 釋王寺에서 참선 정진하였다. 1921년 이후 오대산 월정사, 통도사 보광선원, 千聖山 彌陀庵 등 제방 선원에서 안거하였다. 1923년 28세 되던 해 보덕사로 가서 만공의 수제자인 보월에게 인가를 받고 사법제자로 삼았다. 그러나 갑자기 보월이 입적하니 금오스님의 처지를 안타깝게 여겨 만공이 보월의 사법제자임을 증명하여주고 전법게를 내렸다.「示金烏禪子」, ‘德崇山脈下 分付無文印 寶月下桂樹 金烏徹天飛’, 偈頌 p.197.
그 뒤 금오는 法住寺 摠持禪院을 중심으로 활동하였다. 혜암 현문(1884~1985)은 1897년 양주 興國寺에서 출가하였다. 1911년 27세에 성월화상 회상에서 정진하여 화두를 결택받은 이후 전국을 다니며 고승을 �아 운수 행각하였다. 이 때 만공․혜월․용성 선사를 모시고 정진하였다. 1929년 45세 때 만공으로부터 전법게와 ‘현문’이라는 법호를 받았다.「佛陀乳房」, 擧揚 p.112, 「舟行山去」, 擧揚 p.157, 「示惠菴玄庵禪子」 ‘雪山無同別 亦無大家風 如是無文印 分付惠菴與’, 偈頌 p.196.
혜암은 1956년 72세 때 수덕사 조실로 추대되어 후학을 제접하였고 초대 덕숭총림 방장을 지내기도 하였다. 1985년 89세로 입적하였다.ꡔ禪門法要ꡕ 編譯, ꡔ禪門撮要ꡕ 영문판으로 ꡔ祖師에로의 길Gate way to Patriarchal Sonꡕ.
벽초 경선(1899~1986)은 경허 -만공의 선풍을 계승하여 禪農一如의 가풍을 새롭게 전개하였다. 벽초는 1940년 이후 30년간 수덕사 주지를 지내면서 수행자들을 돌보기 위해 �은 일을 도맡아 하면서 수덕사를 중창하여 오늘날의 대사찰로 만들었다. 1배 이상의 절을 사영하면서 말로써 가르치지 않고 행동으로써 제자들을 가르쳐 普賢菩薩의 화신이라고 칭송을 받았다. 1985년 혜암 현문의 뒤를 이어 덕숭총림 2대 방장을 역임하였다. 평소 제자들에게 눈으로 보고 귀로 듣는 모든 것이 공부라 하였다. 언제나 자신을 알 것을 강조하고 솔선수범하여 실행하였다. 법어에는 만공과 벽초와의 거량「龍頭鼻穴」, 擧揚 p.118. 上揭書.
이 보이고 있다. 원담 진성(1926~)은 12세인 1937년 수덕사를 방문하고 발심하여 천장사에서 행자생활을 시작, 16세 때 벽초를 은사로 만공스님을 계사로 사미계를 받았다. 원담은 사미시절 만공을 모시고 다년간 시자를 살았는데 그 때 남긴 일화가 많다. 1943년 만공으로부터 전법을 받은 후「拍掌大笑」, 擧揚 p.155, ‘眞性本無性 眞我元非我 無性非我法 總攝一切行’, 偈頌 p.121.
1984년 수덕사 현재의 덕숭총림으로 지정하여 가람수호와 산중 화합에 매진하였으며 납자의 탁마에 때와 장소를 가리지 않으니 근대 불조의 혜맥을 잇는 선지식이다. 1986년 11월에는 벽초의 뒤를 이어 덕숭총림 제3대 방장에 취임하였다. 1981년 ꡔ鏡虛法語ꡕ를 번역하여 간행하였다. 그외에 성월은 보월과 마찬가지로 만공보다 일찍 죽은 것 같다. 법어에는 「성월 선자에게 보이다」, 「성월당을 애도하다」가 보이고 있다.「輓惺月堂」, 偈頌 p.186. 「示惺月禪子」, ‘心月本是空 空亦是非空 非只是何物 劫外春花實’, 偈頌 p.197.
또한 걸승으로 包山․春城 등이 있었으니 법어에 「만공․포산이 꿈꾸는 즐거움」「示飽山禪子-滿飽夢樂」, ‘月白無星色 山靑十方飽 如是山月裏 萬像日日新’, 偈頌 p.200.
이 있다. 淸潭 淳浩(1902~1971)는 만공회상에서 화두 참구할 때 무자화두를 들었다. 이후 1935년 봉정암에서 동산, 효봉스님과 하안거에 들었으며 兀然이라는 법호를 받았다.「示兀然禪子」, ‘傳也三十棒 受也三十棒 棒也三十棒 付與兀然子’ 偈頌 p.199.
1947년에는 문경 鳳巖寺에서 性徹․慈雲․운봉․慧庵․法田스님 등과 ‘부처님 법답게 살자’는 봉암사 결사를 단행하여 치열하게 정진했다. 1954년 53세 때 비구측 대표로 불교정화운동에 적극 참여하였으며 1967년 해인총림이 발족하자 방장 성철과 함께 1969년 하안거까지 총림선원의 西堂 소임을 맡기도 하였다. 그 뒤 총무원장을 지냈으며 道詵寺를 중창하였다.
  만공이 정혜사에서 주처하시니 많은 비구니가 모여들어 견성암 선방을 이루게 되고 이를 계기로 많은 비구니 전법제자가 생겨나게 되었다. 이와같은 사실은 뒷날 전국각지에 수많은 비구니 선방이 건립되고 비구니 수행납자가 배출되는 출발점을 실마리를 제공하였다는 점에서 의의가 크다 하겠다. 그 가운데 법희․일엽․만성․스님등이 유명하다. 法喜(1887~1975)는 1913년 25세 때 만공을 �아 피나는 수행 정진과 구도 행각 끝에 심안이 열리어 1916년 28세 때 법을 인가받았다. 이 때 '妙理 法喜'라는 법호와 전법게 내리니「妙理比丘尼法喜」 ‘萬像寂滅釋迦面 寂滅滅已眞面目 佛祖遷化二三千 妙理眞光永不昧’ ꡔ滿空法語ꡕ p.210.
이로써 한국 비구니 법맥의 새장이 열리게 된 것이다. 법희는 입적할 때까지 견성암을 주처로 하여 潤筆庵, 보덕사, 內院寺, 僧伽寺 등에서 대중을 지도하였으며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