德崇禪學 3-1 제1주제 발표:만공 사상의 특징과 역할
김종명(동국대)
머 리 말
만공(滿空, 1876~1946)속 성명은 송도암(宋道岩), 법명(法名)은 월면(月面), 법호(法號)는 만공(滿空), 도호(道號), 수산(叟山)(ꡔ만공법어ꡕ 1983:298-90).
은 근세 한국불교 선원(禪院)의 체계를 확립한 선승(정성본 1997:115)인 동시에 1920년대 초 선학원 설립 운동을 전개한 개혁승이었다. 그는 또한 선우공제회운동의 지도자의 한사람이었으며, 일제 하 조선총독부가 획책한 한국불교의 일본화를 위한 종교정책에 정면으로 반대한(박선영 1990:781) 행동하는 지성이기도 하였다. 그는 전국을 다니면서 선풍을 떨쳤으나, 특히 덕숭산(德崇山)을 중심으로 40여년 간 선풍을 크게 진작(정성본 1997:127)시킨 결과 근대 한국의 선불교를 크게 중흥시켰으며, 현대 한국불교계에 있어서까지 하나의 큰 법맥을 형성함으로써 덕숭산문(德崇山門)의 확립자가 되었다(황정수 1999:1). 이 논문의 목적은 만공의 사상과 그 특징을 검토하고 그의 사상이 한국불교사에서 차지하는 역할을 규명하려는데 있다. 사상도 시대적 산물이며, 만공의 사상도 이와 같은 명제에서 벗어나지는 않는다. 만공은 자신이 살던 시대적 현안점에 대한 해결책으로 불교를 제시하였으며, 그의 불교관은 부처관, 불법관, 윤리관, 정토관으로 전개되었다. 특히, 불법의 현창을 위한 최상의 방법론으로는 선법(禪法)을 강조하였다. 따라서, 만공의 시대관, 불교관, 선사상 검토 및 이 사상들에 대한 한국불교사적 역할 규명이 이 논문의 주요 내용이 된다. 이 논문은 5장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그 내용은 각각 다음과 같다:1. 만공의 시대관, 2. 만공의 불교관, 3. 만공의 선사상, 4. 만공 사상의 특징, 5. 만공 사상의 한국불교사적 역할.
만공의 사상 자체에 대한 기존의 학술 논문은 1997년에 처음 발표되었다(정성본 1997:114~200).정성본은 만공에 대한 간략한 인물 소개에 관한 몇 편의 글들을 제외하면, 학문적인 면에서 그의 선사상에 대한 연구가 전무하였다는 문제의식이 자신의 논문의 출발점이 되었음을 밝히고 있다. 이에 대해서는 정성본 1997:115, 주1)을 참조할 것.
이 논문은 만공의 선사상을 그의 생애와 함께 다루고 있으며, 부록(201~395쪽)에는 ꡔ만공어록ꡕ(滿空語錄)의 원문초(原文抄)와 한글 번역문이 부가되어 있다. 그러나, 이 글에서는 만공 사상의 전반적인 분석은 이루어지지 않았다. 그리고, 1999년에는 경허와 만공이 두 선사의 연구사에 대해서는 황정수 1999:3, 주1)을 참조할 것.
의 선사상을 같이 다룬 박사학위논문(황정수 1999)이 자료에 대한 정보는 이덕진 박사로부터 얻었다.
한 편이 발표되었다. 이 논문도 만공 사상의 전반적인 면을 다루지는 않았다. 이런 점에서 만공 사상의 전반에 대한 학술적 분석 작업은 아직 초기 단계에 있다고 할 수 있으며, 필자의 문제의식은 바로 여기에서 출발하였다.
만공에 대한 자료는 김혜공(金惠公) 편(編) ꡔ만공어록ꡕ불기 2995(서기 1968)년, 수덕사 간행. 이 책은 만공의 제자인 진성 원담(眞惺 圓潭)이 만공을 모시던 시자(侍者) 시절에 경청한 법어를 기억나는 대로 기록하여 1968년에 편찬한 것이다(ꡔ법어ꡕ 1983:5).
과 이를 수정 보완하여 만공문도회(滿空門徒會)에서 편찬한 ꡔ만공법어ꡕ(滿空法語)(이하 ꡔ법어ꡕ)1982년 10월, 수덕사 간행. 활자본으로 인쇄된 1권 1책의 법어집으로서 만공의 문도였던 혜암, 벽초, 원담 등이 간행하였다.
에 거의 수록되어 있다(정성본 1997:116). 이 논문의 일차자료도 ꡔ법어ꡕ다. 그러므로, 만공 사상의 분석을 위해서는 이 책의 내용에 대한 구체적인 검토가 중요하다. 이 책의 체재는 한글 번역과 한문 원문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총 328쪽으로 이루어진 이 책의 구성은 다음과 같다:본문의 구성에 대한 설명들은 학자들에 따라 약간씩 다르다:상당법어 42편, 거량(擧揚:선문답) 57편, 게송 57수, 서문 3편, 발원문 3편, 기타 3편 등으로 구성되어 있고, 권말에는 자세한 행장이 있다(이종익 1989:604);권두에는 혜암이 쓴 봉향송과 경봉이 쓴 서사, 원담의 간행사가 있으며, 상당법문 42편, 선문답(거량) 57편, 게송 66수, 방함록서 3편, 선림계서 등 3편, 발원문 3편, 수행찬 5편, 법훈 7편으로 구성되어 있다(정성본 1997:129-30).
혜암(惠庵)의 「만공법어 봉향송」(滿空法語 奉香頌)(1쪽), 경봉(鏡峰)의 「서사」(序辭)(2~3쪽), 진성 원담의 「간행사」(刊行辭)(4~6쪽), 「상당법어」(上堂法語) 42편(21~88쪽), 「거량」(擧揚) 57편(89~159쪽), 「게송」(偈頌) 66편(161~204쪽), 「방함록서」(芳啣錄序)“방함”이란 현실세계인 고통의 바다를 떠나 깨달음의 세계에 이르는 것을 의미한다(황정수 1999:21).
3편(205~13쪽), 「발원문」(發願文) 3편(216~22쪽), 「수행찬」(修行讚) 5편(223~42쪽), 「법훈」(法訓) 9편(243~95쪽), 「만공월면대선사행장」(滿空月面大禪師行狀) (297~327쪽), 및 「수법제자(受法弟子)․은상좌(恩上佐)」(328쪽).
「상당법어」(총 68쪽)는 안거 결제 때와 고승대회 때의 법문 및 일반 법문 등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불교와 선의 주요 문제에 대한 법문을 독자적인 경지에서 설파한 것들(이종익 1989:604)이다. 그 내용은 각자 자신이 곧 부처라는 주장, 마음의 중요성 강조, 공부할 때의 독립성 강조, 만공의 윤리관․시간관․공간관 제시, 분별심 없애기, 불교 가르침의 대상 및 내용 설명, 좌선의 정의 및 방법 설명, 실행의 강조, 혜명(慧命) 잇기 강조 등으로 나타난다. 그리고, 여기에는 당시의 일본인 조선총독 미나미 지로오(南次郞, 1874~1955)를 훈계한 내용(ꡔ법어ꡕ 1983:84~88)도 포함되어 있다. 선문답에 해당하는 「거량」(총 71쪽)의 대상자들은 화상, 선사, 선화, 사미, 시자, 비구니, 법사 등의 다양한 호칭을 가진 사람들이며, 이 부분의 내용은 분별심 없애기, 개념에 매이지 말 것, 흉내 내지 말 것, 불상의 겉모습에 혹하지 말 것, 공부에 있어서 남에게 지지 말 것, 기회를 잘 살릴 것, 신중하게 행동할 것 등이다. 「게송」(총 44쪽)의 대상들은 법사, 선자, 성인, 사미, 비구니 등의 칭호를 가진 승려들과 재가 남녀 신자들, 만공의 수행처였던 다양한 장소들, 난초와 매화 등의 식물, 석가탄신일을 비롯한 특정일 등이다. 그 내용으로는 불교의 가르침(불법佛法), 제자와 동료 승려를 위한 만가(輓歌), 만공의 윤리관, 시대관, 교육관, 참회게문 등으로 이루어져 있다. 「방함록 서」(총 9쪽)의 내용은 마음의 중요성 강조, 당시의 승단 비판, 선문의 부흥 강조, 깨달음 얻는 법 설명 등으로 구성되어 있다. 그리고, 「발원문」(총 6쪽)의 주요 내용은 불법 설명, 당시의 승단 진단, 선문 부흥을 통한 세계문화 개척 강조, 사홍서원(四弘誓願) 설명, 정법 옹호, 자리이타 성취의 중요성 등으로 이루어져 있다. 「수행찬」(총 20쪽)에서는 젊어서 참선할 것, 부처도 명상(名相)에 불과함, 무자화두(無字話頭)가 최상의 화두임, 무자화두 드는 법, 중의 본분, 사람의 3신(三身)과 수행법이 주요 내용을 구성하고 있다. 「법훈」(총 53쪽)의 내용은 지혜에 의한 참 자기[眞我] 찾기의 중요성, 진아 찾는 방법론으로서의 참선법, 바른 화두 제시, 당시의 승려들 비판, 주체성 강조, 대자유인의 단계, 현재의 중요성, 불법 및 불교의 정의 및 핵심 설명, 승니의 자세, 대중 봉사 강조, 경구, 최후설 등으로 구성되어 있다. 특히, 참선법에서는 참선 시간 및 참선 장소 설명, 선지식 및 이타행의 중요성 강조, 참선 때의 마음 자세, 선지식 참칭 금지, 학인의 자격 및 적령, 공부할 때의 금기 사항 등이 다뤄지고 있다. 만공의 제자 진성이 쓴 「만공월면대선사행장」(31쪽)에는 만공의 생애가 기술되어 있다. 마지막으로 37명의 「수법제자」(비구33, 비구니4. 여기에는 은상좌를 겸한 제자 및 참회제자도 포함되어 있음)와 16명의 「은상좌」(총 1쪽)의 명단이 기록되어 있다.
이 책의 본문 내용은 연도별로 편찬되어 있지는 않다. 따라서, 이 책을 통해 만공의 시대별 사상을 파악하기는 쉽지 않다. 그리고, 기록량을 검토해 보면, 「상당법어」, 「거량」, 「게송」 등 선어록에 해당되는 부분이 전체의 약 60%을 차지하고 있다. 특히, 「거량」을 통해서는 근대의 선사들 중 격외의 선지를 가장 자유롭게 구사한 만공의 면모를 살필 수 있다(이종익 1989:604)고 하나, 「거량」을 포함한 이 부분들을 통하여 그의 사상 전모를 파악하기는 힘들다. 오히려 선승 만공의 사상을 전반적으로 관찰할 수 있는 부분은 「법훈」이다. 그리고 「수행찬」에서는 참선수행의 강조와 함께 수행방법을 제시하고 있다(정성본 1997:137). 따라서, 이 논문에서는 「법훈」과 「수행찬」을 중심 검토 대상으로 하고, 다른 부분들도 참조하면서 만공의 사상을 검토하기로 한다.
I. 만공의 시대관
만공이 살던 시대적 특징은 서구 근대 문물의 수입과 일제 식민지 정치에서 찾을 수 있다. 이러한 시대적 현실 속에서 만공의 주 관심사는 불교계의 현실 진단과 미래에의 방향 모색에 두어졌다. 만공은 당시 사람들이 옛 성인을 모범 삼아 ○만공은 “마음”을 상징화 하기 위해 이처럼 원을 사용하기도 하였는데, 그는 ○을 불조의 심인이며, 중생의 본래면목(ꡔ법어ꡕ 1983:208)이라고도 하였다.
을 닦아 깨닫지 못했기 때문에, 큰 가르침이 침윤하고 마구니와 외도가 치성하며, 부처의 혜명 보존도 어렵게 된 시대로 당시를 진단한다(ꡔ법어ꡕ 1983:208~09). 그는 그러한 시대적 상황이 초래된 원인을 내외부적 측면에서 찾는다. 즉, “내부의 부패와 외부의 풍우로 불법이 거의 사라지게 되었다”(ꡔ법어ꡕ 1983:217)는 것이다.
내부적 부패의 대상은 당시의 승단이었으며, 외부적 풍우는 주로 일제 하 조선 총독부의 불교정책과 관련되어 있었다. 만공의 시대관은 크게 승단비판론과 정교분리론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승단비판론에는 만공의 내부적 시대관이 나타나 있으며, 정교분리론에는 그의 외부적 시대관이 표현되어 있다. 이 두 가지 시대관 중에서도 만공은 내부적 측면, 즉 당시의 승단에 대한 비판에 더 큰 비중을 두고 있다.
그리고, 그는 현실을 강조하고 있는데, 이러한 그의 현실강조론은 대내외적 시련기에 처해 있던 당시의 상황에 대한 바람직한 행동 지침의 실현을 강조한 것으로 볼 수 있다.
1. 대내적 시대관
만공의 대내적 시대관은 그의 승려관에서 잘 나타난다. 그에 의하면, 진정한 중은 일체 명상법이 생기기 이전의 사람을 가리키며, 만유의 주인이요, 천상 인간의 스승이므로, 부모와 처자와 일체의 소유물 뿐 아니라 자신까지도 버리는 사람이다(ꡔ법어ꡕ 1983:281). 그리고, 그는 승려의 자격 기준을 수계나 삭발이나 승의(僧衣) 등에 두지 않고, 불법을 아느냐 모르느냐에 둔다. 그에 의하면, 불법을 알면 속인이라도 중이요, 중이라도 불법을 모르는 이는 속인(ꡔ법어ꡕ 1983:277)임을 주장한다. 그리고, 중이 되는 이유도 부귀영화나 명예나 권력을 구하거나 문장이나 명필이 되려는 것도 아니며, 단지 진실도에 정진하기 위한 것(ꡔ법어ꡕ 1983:228~29)이라고 주장한다. 그러나, 만공은 당시의 많은 승려들이 승려로서의 본분을 벗어났음을 비판한다. 예전엔 선지식의 일언지하에 생사를 벗어난 이도 있었고, 늦어도 3일이나 7일만에 견성한 이도 많았으나(ꡔ법어ꡕ 1983:256), 만공 당시의 승려는 도리어 불법을 모르며, 많은 승려들이 시주의 밥만 허비하고 있다(ꡔ법어ꡕ 1983:283~84)고 비판한다. 그리고, 당시의 승려들이 20년, 30년을 공부해도 불법의 대의를 잘 모르는 이유를 근기 박약과 부업으로 참선을 공부하는 데서 찾았다(ꡔ법어ꡕ 1983:256). 당시의 승단에 대한 만공의 이러한 비판은 그의 임종 때까지도 계속되었던 같다. 그는 자신의 “최후설”에서도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내가 이 산 중에서 40년간 납자를 가르쳤으나, 그들은 나의 진면목을 보지 못하였다. 그들이 나를 못 본 것은 곧 자기를 못 본 것이다. 도는 둘이 아니지만, 도를 가르치는 방법은 각각 다르니, 나의 법문을 들은 나의 문인들은 도절(道節)을 지켜 내가 가르치던 모든 방식을 잊지 말고 지켜 가라(ꡔ법어ꡕ 1983:293~94).
만공은 승려로서 지켜야할 여러 가지 덕목을 강조하고 있는데, 그것들은 다음과 같다:도반 존종, 어린이 사랑, 어른 공대, 정진, 불법 잇기, 인욕, 시비심 끊기와 자기 반성, 부귀에 집착하지 말 것, 한(恨)을 남기지 말 것, 보시물의 사적 사용 금지,시주는 주지의 개인 수입금이 아니라는 사법부의 최근 판결이 있었다(《무등일보》2001. 1. 14).
공부는 안하고 보시물 얻는 것은 사기, 재색 금지(ꡔ법어ꡕ 1983:282~90). 만공이 승려의 덕목으로서 강조한 것은 크게 두 가지다. 한 가지는 충고 사항이며, 다른 한 가지는 금기 사항이다. 바람직한 인간관계 속에서 어떠한 어려움이라도 참고 스스로를 반성하면서 정진하여 불법을 잇는 것이 전자에 해당하며, 재물과 여자에 집착하지 말 것을 강조한 것은 후자에 해당한다.
만공은 또한 바람직한 승려는 대중 봉사에 적극성을 보여야 함을 주장하는데, 이는 그가 강조한 이타행을 의미한다. 만공에 의하면, 당파를 짓는 것은 중의 정신을 잃어버린 결과로서 중은 당파를 짓지 않아야 하며,근년 한국 승단에서 발생하였던 불미스러웠던 일들은 법맥 문제와 직․간접적으로 연결되어 있다. 그러나, 현재 한국 승단에서 통용되는 법맥설은 역사적 측면보다는 이념적 측면에서 형성된 것이라는 설들이 속속 제기되고 있다. 이에 대해서는 길희성 2000:159~93, 박해당 2000:43~62를 참조할 것.
대중 시봉이 부처님 시봉이기 때문에 중은 반드시 대중에 처해야 하며, 대중을 중히 생각하여야 한다. 또한, 그는 중은 공익심과 평등심으로 누구나 포용할 수 있어야 할 뿐 아니라, 대중을 위해서는 신명을 바쳐야 하며, 일의 성취와 물건의 보존도 대중의 이익에 부합되게 해야 함(ꡔ법어ꡕ 1983:286~88)을 강조하였다.
따라서, 만공의 대내적 시대관의 핵심을 이루는 그의 승려관에 의하면, 참 승려는 불법을 알고, 세속적 이익에 탐착하지 않으며, 대중을 위해 봉사하는 자로 요약될 수 있다. 그러나, 그는 당시의 승려들은 그렇지 못했음을 통렬하게 비판하였다.
2. 대외적 시대관
만공은 2차 세계대전과 일제(日帝)라는 특수한 정치․사회적 상황 속에서 살았다. 따라서, 그의 외부적 시대관도 이러한 시대 상황과 관련되어 있다. 당시의 세계 정세와 관련된 그의 견해는 다음과 같은 예들을 통하여 살펴볼 수 있다:“지구인들이 서로 싸우는 것은 비참한 일이다”(ꡔ법어ꡕ 1983: 274), “나무, 새, 돌, 호랑이가 서로 쟁론하는데, 누가 옳고 누가 그른가?(ꡔ법어ꡕ 1983:195)” 라고 함으로써, 세계 평화에 대한 그의 염원을 피력하였다. 그러나, 그의 외부적 시대관은 당시 조선총독부의 불교정책과 특히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었다. 이 점은 그가 마곡사 주지로 있을 때인 1937년 3월 11일 총독부 제1회의실에서 열린 31 본산 주지회의 도중 조선불교의 일본 예속화를 획책하던 미나미 총독의 흉계를 준열히 꾸짖은 데서 잘 나타난다. 미나미가 조선불교의 일본화를 통해 조선불교를 발전시킨 전임 총독 데라우치 마사다케(寺內正毅, 1852~1919)박선영은 미나미와 그 이전의 조선총독이었던 데라우치를 혼동하고 있다.
의 공이 크다고 찬양하자 만공은 미나미를 꾸짖으며, “청정이 본연커늘 어찌하여 산하대지가 나왔는가”만공의 이 할은 임제 의현(臨濟義玄, ?~867)의 4할 중 두 번째인 땅에 웅크리고 앉아 있는 금빛털의 사자(금모사자)가 포효한 사자후로서, 조사선사상의 저류를 이루는 정의 구현의 한 방편이었다(이은윤 2000:290).
라고 좌중에 묻고는 벽력같은 할을 퍼부으면서 일제의 한국 불교 파괴를 힐난하였다. 그리고, 만공은 데라우치는 일본불교를 본 따 한국승려들에게 대처(帶妻), 식육(食肉), 음주(飮酒)를 허용하여 계율을 파기케 하고 조선불교를 일본화시킨 죄 때문에 현재 무간지옥에 떨어져 허덕이고 있을 것이므로, 미나미도 정신차려서 정교분리를 허락하고 한국불교 말살정책을 철회할 것을 강력하게 요구하였다(ꡔ법어ꡕ 1983:84~88, 313~14).
만공은 이처럼 내외부적으로 어려웠던 시대 상황 속에서 당시는 대원을 세워 선림을 부흥시키고, 이를 통해 위로는 깨달음을 구하고[上求菩提], 아래로는 중생들을 가르쳐야[下化衆生]할 때라고 주장하면서, 삼대발원을 세워 정법을 옹호하고, 자리이타를 성취하여, 선림 진흥에 기여하고 나아가 세계문화 개척에 일조할 것을 강조하였다(ꡔ법어ꡕ 1983:217~22).
3. 현실강조론
만공은 특히 현실의 중요성을 강조하였다. 그에 의하면, 나의 현재 생활이 일체 세계며, 인생은 현재에서만 의의가 있기 때문에 현재를 완전히 파악해야 과거․현재․미래의 생활이 일체화를 이룰 수 있다(ꡔ법어ꡕ 1983:267~68)는 것이다. 그는 또한 현실 속의 실행을 강조하였다. 천 번 생각하는 것이 한 번 실행하는 것만 못하고, 말하기 전에 실행부터 해야 하며(ꡔ법어ꡕ 1983:291), 들으면 실행해야 하는데(ꡔ법어ꡕ 1983:71), 실행할 때는 분별심 없이 행해야 함(ꡔ법어ꡕ 1983:59~60)을 주장하였다.
결론적으로, 만공의 시대관은 대내적으로는 승단의 정화, 대외적으로는 보편적 인류애를 강조한 가운데 이러한 과제들의 현실적 실현을 주창한 것으로 요약될 수 있다. 그는 이러한 현안점들을 불교에 대한 바른 이해를 통해 해결하려 하였으며, 이에 대한 구체적 방법론으로서 그가 제시한 것이 간화선(看話禪) 수행이다.
II. 만공의 불교관
만공은 자신의 이러한 시대관을 바탕으로 불교관을 전개시켰으며, 그의 불교관은 부처관, 불법관, 윤리관 및 정토관으로 나눌 수 있다.
1. 부처관
만공은 부처를 법신(法身)을 얻은 자, 선지식, 도사, 보살이라고도 칭하는데(ꡔ법어ꡕ 1983:236), 그는 부처도 이름과 모습(名相)에 불과(ꡔ법어ꡕ 1983:226)하기 때문에 부처란 이름에 묶여서도 안되며, 부처를 맹목적 추종의 대상으로 삼아서도 안된다고 주장하였다. 왜냐하면, [원리적으로는] 내가 곧 부처며, 중생이 곧 부처기 때문이다(ꡔ법어ꡕ 1983:27). 그러나, 현실 속의 나는 분명 부처가 아니다. 만공에 의하면, 현실 속의 중생들은 탐․진․치 3독에 가리워져 어리석은 상태에 있기 때문에 있는 그대로의 존재의 본질과 모습, 즉 여여如如 혹은 진여眞如를 알지 못한다. 만공은 무서운 것은 지옥이 아니라 탐․진․치(ꡔ법어ꡕ 1983:291)라고 할 정도로 3독을 인간고의 원인으로 간주하였다. 그에게 있어 중생들은 3독으로 인해 망아(忘我)에 집착하고, 이 잘못된 자아에 대한 집착 때문에 허무심을 가지게 되며(ꡔ법어ꡕ 1983:285), 5계[殺, 盜, 淫, 妄, 酒]를 불신하고 불법을 비방하기 때문에 업보를 지으며(ꡔ법어ꡕ 1983:232), 사색을 중요시하면서도 사색하는 그 자체를 알아 볼 생각을 하지 않는 존재들이었다(ꡔ법어ꡕ 1983:273). 그러나, 만공은 중생들도 존재의 본질과 참 모습을 깨닫게 되면 부처가 될 수 있다고 하며, 이런 점에서는 누구나가 다 [잠재적] 부처라는 것이다(ꡔ법어ꡕ 1983:24~25). 즉, 깨달으면 성인이며, 부처지만, 어리석은 이는 범부요 중생(ꡔ법어ꡕ 1983:78)인 것이다. 그러면, 인간만 부처가 될 수 있는가? 만공은 유정(有情)과 무정(無情)이 모두 부처가 될 수 있다고 한다. 그에 따르면, 그는 인간 이외의 모든 존재도 성불의 대상이 된다(ꡔ법어ꡕ 1983:52).
2. 불법관
만공은 불법을 불보살의 가르침으로 정의하면서, 그것을 정법안장(正法眼藏), 불심인(佛心印), 경절문(徑截門), 골수법(骨髓法), 선법 등으로 부르고 있다(ꡔ법어ꡕ 1983:216). 그에 의하면, 불교는 배타적 정신(ꡔ법어ꡕ 1983:273)인 아집(我執)을 떠난 교리(ꡔ법어ꡕ 1983:278)로서 원래는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것(ꡔ법어ꡕ 1983:275)이다. 그러나, 그는 방편설적 입장에서는 불법의 핵심을 마음 깨닫기에 있는 것으로 보면서, 이 가르침의 대상으로 승속(僧俗)을 다 포함시키고 있다(ꡔ법어ꡕ 1983:77). 만공은 마음이란 만상 가운데 홀로 드러난 묘한 존재로서 생각으로도 알 수 없고, 유․무심으로도 알 수 없는 최고의 것으로 규정한다. 그리고, 그는 마음을 그 스스로 빛나지만, 하나도 아니고, 둘도 아니며, 천안으로도 볼 수 없으나, 공한 것도 아니며, 분별심에 의해서도 오염되지 않는 것(ꡔ법어ꡕ 1983:30~51)으로 본다. ꡔ화엄경ꡕ(華嚴經), ꡔ법화경ꡕ(法華經), ꡔ원각경ꡕ(圓覺經), ꡔ금강경ꡕ(金剛經) 등 주요한 대승경전들도 모두 마음 법에 대해 설하였다고 주장하면서, 마음이란 모든 현인과 성인의 할아버지며, 모든 가르침의 최고며, 모든 부처들도 마음에서 마음을 전하였을 뿐, 문자를 세우지 않았다(ꡔ법어ꡕ 1983:206~07)고 한다.
만공은 불교의 목표가 참 나 찾기에 있음을 강조한다. 그에 따르면, 인간은 누구나 거짓된 나[妄我]를 버리고 참 나[眞我]를 찾아야 하며, 이 점에서는 학식이나 인격이 뛰어난 이도 예외가 아니라고 본다. 참 나를 찾기 위해서는 지혜의 칼, 즉 불법이 필요하며, 이 불법을 통해 사람의 3신인 육신(肉身)과 업신(業身)과 법신(法身)법신은 불신(佛身)이라고도 하며, 그것은 화두를 통해 얻어지는 생멸이 없는 도 즉 진리를 말한다. 업신은 귀신이라고도 하며, 그것은 안(眼), 이(耳), 비(鼻), 설(舌), 신(身), 의(意)의 6식심을 의미한다. 그리고, 육신은 색신이라고도 하며, 지(地), 수(水), 화(火), 풍(風)의 4대(四大)를 뜻한다(ꡔ법어ꡕ 1983:231~35).
이 일체가 되어야만 비로소 올바른 사람이 된다고 한다. 그 이유는 일체 행동은 법신이 하지만, 육신과 업신은 법신과 불리된 것이 아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ꡔ법어ꡕ 1983:247). 그리고, 만공은 세속 학문에 대한 불법의 우월성을 다음과 같이 주장한다:세속의 진보된 이론이나 심원한 학설은 명상(名相)에 집착되어 있는 것이므로 인생 문제를 해결할 수 없고, 물질과 과학으로는 자연의 일부만 정복할 수 있을 뿐이며, 형이상학이나 유심론도 물질적 영역을 벗어나지 못한 이론에 불과하다고 한다. 따라서, 진정한 평화는 인간의 근본을 밝히는 정신 문명이 마음속에 건설되어야 하는데, 이 정신 문명이 곧 명상에 집착되지 않은 불법, 즉 선법이며, 이 선법을 통해야 인간의 근본과 인생문제를 밝힐 수 있다는 것이다. 그렇다고, 만공이 불법을 형이상학으로 간주하는 것은 아니다.이 점에 대해서는 만해도 같은 견해를 보였다. 그는 불교의 핵심이 마음의 강조에 있다고 보았으나, 그것을 형이상학적 철학으로 간주하지는 않았으며, 그도 그가 살던 시대의 역사적, 사회적 관점에서 불교를 해석하였다(김종명 1995:14).
또한, 그는 불교를 권선징악의 종교로도 보지 않는다(ꡔ법어ꡕ 1983:270~78). 나아가 그는 불공을 드리거나, 가사 보시를 하거나, 탑을 짓고, 불상에 금빛을 입히는 것은 불법이 아님을 주장하였다(ꡔ법어ꡕ 1983:71~83쪽). 반면, 만공이 강조한 것은 반야(지혜)였다. 이는 승려 김태흡이 조선총독의 지시로 구황방(救荒方)을 수집한데 대하여 구황방보다 반야식을 구하란 법문을 준 데서(ꡔ법어ꡕ 1983:192) 잘 드러난다.
3. 윤리관
만공은 노는 것을 모든 위험과 죄의 원천으로 간주한다(ꡔ법어ꡕ 1983: 290~291). 또한, 목우자(牧牛子) 지눌(知訥, 1158~1210)을 인용하면서, 계율을 준수할 것을 강조한다(ꡔ법어ꡕ 1983:63~64). 그러나, 이러한 세속적 계율관은 만공에게는 방편설적 의의를 가질 뿐, 그의 진정한 윤리관은 원리적으로 선악의 구분도 부정하는 데서 찾을 수 있다. 그는 선악을 다 불법(ꡔ법어ꡕ 1983:278)으로 보면서, 선악이 공함을 알면 극락국에 들어간다(ꡔ법어ꡕ 1983:31, 189)고 하였기 때문이다.
4. 정토관
만공의 정토관은 그의 시․공간관과 밀접한 관련을 맺고 있다. 그는 삼세(三世)가 곧 유심(唯心)이며, 일심(一心)이 곧 만상(ꡔ법어ꡕ 1983:41~46)이라고 본다. 즉, 시간도 마음의 산물이며, 공간적 현상도 마음의 산물이란 것이다. 따라서, 그가 의미하는 정토도 마음의 산물이며, 시간적으로는 현재, 공간적으로는 여기에 바탕을 둔 개념이다. 유심정토설(唯心淨土說)을 주장하는 만공은 아미타불이 십만억 국토를 지난 곳에 있는 것이 아니라 각자의 마음 속에 있으며, 주장자 소리를 듣는 각자의 마음이 그대로 아미타불이라고 한다. 즉, 그는 생각에서 삼라만상이 나온다(ꡔ법어ꡕ 1983:292)고 보고, 아미타불도 생각의 산물로 간주하는 것이다(ꡔ법어ꡕ 1983:32). 만공에 의하면, 천인이니 지옥이니 신이니 귀니 하는 것들도 모두 이류 중생의 명상일 뿐(ꡔ법어ꡕ 1983:268~69)이다. 이는 그가 불교전통에서 인기 있던 서방정토설(西方淨土說)이나 6도(六道) 윤회설을 실재설로서가 아니라 방편설로 보았음을 의미한다.
만공의 불교관은 다음과 같이 요약될 수 있다:인간을 포함한 모든 생명 있는 존재는 모두 부처가 될 수 있는데, 이 부처는 참선 공부를 통해 참 자기를 찾은 이를 말한다. 이 목적을 위해서는 놀지 말고 열심히 수행해야 한다. 그리고, 정토란 현재, 여기서의 깨끗한 마음을 뜻한다.
III. 만공의 선사상
만공의 선사상도 당시의 현실을 배경으로 하여 전개되었다. 만공은 내우외환으로 점철된 시대를 살던 당시의 승려들이 3독심에 의한 무명 속의 존재들이었기 때문에 참 승려가 되지 못했다고 보고, 이들을 선법에 의해 진인(眞人)이 되게 하려는 목적을 가지고 그의 선사상을 전개하였다. 그리고, 그는 선법의 보조 방법으로서 정진과 계율 등을 주장하였다.
만공은 사상적으로 그의 스승이면서 근대 한국불교의 중흥조인 동시에 덕숭산문의 개조(開祖)(황정수 1999:1)인 경허 성우(鏡虛 惺牛, 1849~1912)를 평생 존경하였으며, 스스로도 경허의 법을 이어 받은 사실을 강조하였다(정성본 1997:123~24). 만공은 선사상에 있어서도 경허의 전통을 이었다(정성본 1997:114~15). 만공은 출가 후 “만법귀일 일귀하처”萬法歸一 一歸何處(모든 현상은 하나로 귀결되는데, 그 하나는 어느 곳으로 귀결되는가?) “만법귀일 일귀하처”라는 공안은 ꡔ조주어록ꡕ(趙州語錄)에 처음 나오며, 후에 ꡔ벽암록ꡕ(碧巖錄) 45칙에 인용되어 널리 사용된 화두였다(정성본 1997:148).
란 화두로 참선에 열중하였으며, 25세 때(1895) “응관법계성 일체유심조”應觀法界性 一切唯心造(현상계의 성품을 관찰해야 하니, 일체는 오직 마음이 만든 것이다).
를 외우다가 현상계의 성품을 깨달았다. 그 후, 그는 경허의 가르침을 따라 무자화두를 참구한 끝에 34세때(1904) 경허로부터 깨달음의 경지를 인가 받았다. 전법게와 만공이란 호도 받았으며, 전법도 부촉 받았다(ꡔ법어ꡕ 1983:305~10). 나아가, 만공은 자신의 제자들에게도 이 무자화두 드는 법을 자주 설하였다. 그리고 교육을 문명의 어머니로 간주한 만공(ꡔ법어ꡕ 1983:192)은 교육 중에서도 전 인류에게 시급히 알려야 할 가장 중요한 것은 참선 교육임을 강조하였다(ꡔ법어ꡕ 1983:282). 이 논문에서는 만공의 선사상 중 중요 내용을 이루는 참선 자격자 및 조건, 공부 자세, 조사선, 선 수행법 등에 대해 살펴보기로 한다.
1. 참선 자격자 및 조건
만공은 “학인은 장맛이 짠 줄 아는 이는 다 된다”(ꡔ법어ꡕ 1983:251)라고 함으로써, 누구나 다 참선 공부를 할 자격이 있다고 한다. 그러나, 그는 가능한 한 젊을 때 참선하기를 권하면서(ꡔ법어ꡕ 1983:224), 가장 바람직한 학령을 20~32세까지로 본다(ꡔ법어ꡕ 1983:252).
만공은 참선의 조건으로서 참선 시간과 참선 공간에 대해 말한다. 참선 시간은 “행주좌와, 어묵동정,”行住坐臥 語黙動靜 (걸어가거나 서 있거나 앉아 있거나 누워 있거나, 말할 때나 침묵할 때나 움직일 때나 가만히 있을 때나).
즉 언제나 가능하다고 한다. 참선 장소로는 선방이 가장 적절하며, 선방에서만 나를 찾는 법을 배울 수 있다고 한다. 그러나, 여기서 중요한 것은 선방의 의미다. 만공이 의미하는 선방은 물리적 선방이 아니라 자기 육체 자체를 뜻한다(ꡔ법어ꡕ 1983:249~50). 만공은 어디서나 참선할 수 있음을 강조한 것이다. 그러나, 시간적, 공간적 제약 없는 이러한 참선법은 최상근기에게 적용될 수 있는 방법론으로 제시된 것 같다. 왜냐하면, 만공은 참선을 통해 자신을 완성시킬 수 있는 3대 조건도 주장하였기 때문이다. 그에 의하면, 이 3대 조건은 도량(道場)․도사(道師)․도반(道伴)이다. 만공은 말한다: “도량․도사․도반의 3대 요건이 갖추어진 곳을 떠나지 말라”(ꡔ법어ꡕ 1983:294). 현실적으로 속세의 잡사에 영향을 받지 않고 수행할 수 있는 공간은 필요할 것이다. 이런 점에서 만공이 도량을 수행 조건의 하나로 간주한 것은 당연하다 할 것이다. 그리고, 그는 적어도 일정 기간까지는 스승의 역할이 아주 중요함을 강조하였다. 만공에 의하면, 불조(佛祖)의 혜명을 상속받은 사람인 선지식 선택은 학인이 가장 주의해야 할 일의 하나였다(ꡔ법어ꡕ 1983:252). 그러므로, 선지식을 믿는 정도에 따라 자신의 공부가 성취되기 때문에 자각할 때까지는 선지식의 가르침이 필요하다(ꡔ법어ꡕ 1983:250~51)는 것이다. 수행인은 자각 후에도 선지식[明眼祖師]에 의해 자신의 자각이 옳은 지 그른 지를 평가받아야 하는데, 그러한 평가 과정을 거치지 않고 선지식으로 자칭하여 남을 가르치는 것은 그 죄가 가장 크다(ꡔ법어ꡕ 1983:250~52)고 한다. 그러나, 이 3가지 요소 중에서도 만공이 가장 중요시 한 것은 도반이다. 그는 말한다:“도반의 감화력은 스승의 가르침보다도 강하다”(ꡔ법어ꡕ 1983:254).
2. 공부 자세
참선 공부의 자세와 관련, 만공은 먼저 입지(立志)의 중요성을 주장한다(ꡔ법어ꡕ 1983:203~04). 그는 신심(信心)과 이 신심을 바탕으로 자기 스스로 공부해야 함을 강조한다. 즉, 성현과 부모와 부처도 [궁극적으로는] 따라야 할 존재가 아니므로(ꡔ법어ꡕ 1983:27), 참선은 자기가 해야 한다(ꡔ법어ꡕ 1983:256)는 것이다. 참선 공부할 때의 마음 자세로는 3가지를 강조하는 데, 그것은 신심(信心)․분심(憤心)․의심(疑心)이다. 만공은 이 신심․분심․의심이 합해져야 공부가 이루어진다(ꡔ법어ꡕ 1983:251)고 주장하였다. 그는 이러한 마음 자세를 가지고 아주 철저하게 공부해야 함을 강조하는데, “몸과 목숨에 집착하지 말고 열심히 수행해야 한다,”(ꡔ법어ꡕ 1983:219~20) “몽각일여(夢覺一如)하게 공부해야 한다,” “공부할 때는 극악극독심을 가져야 한다,”이 대목에 의하면, 만공의 수행과정은 아주 철저했으리라 생각된다. 그러나, 그의 수행과정을 직접 알 수 있는 문헌 자료는 현재 없다. 따라서, 철저한 수행을 한 선지식의 한 명이었던 구산(九山, 1909-83)의 예를 통해 만공을 비롯한 한국 선지식들의 수행과정의 구체적인 한 실례를 살펴볼 수는 있을 것이다. 구산의 수행과정에 대해서는 버스웰 2000:90~93 참조.
“참선인은 촌음을 허비하지 말아야 한다”(ꡔ법어ꡕ 1983:258~260), “유용한 인물에겐 한가한 시간이 없다”(ꡔ법어ꡕ 1983:293)라는 등의 문장은 그가 강조한 철저한 공부의 중요성에 대한 다른 표현들이었다. 또한, 그는 참선인이 지켜야 할 덕목으로서 얻음과 잃음에 집착하지 말 것(ꡔ법어ꡕ 1983:204), 이성(異性)을 멀리 할 것, 소아(小我)적 나를 없앨 것, 수마(睡魔)를 항복시킬 것(ꡔ법어ꡕ 1983:253~59)을 강조하였다.
3. 조사선
만공은 좌선의 정의를 “모든 망상이 고요해 진 것이 좌며, 화두에 대한 의심이 깨어 있는 상태가 선이다”一切妄想 寂寂是坐 話頭疑情 惺惺是禪.
라고 규정하고, 이를 모든 공부의 정수로 간주하였다. 그러나, 다양한 참선 전통 중 만공은 조사선(祖師禪)여래선, 조사선을 포함한 선법의 종류에 관한 조선시대 선승들의 논쟁인 이종선․삼종선 논쟁의 내용과 그 논쟁의 철학사적 의의에 대해서는 김종명 1998:224~61 참조.
우위 사상에 입각해 있다. 즉, 그는 “언설에 매인 선은 여래선이며, 조사선이 아니다”(ꡔ법어ꡕ 1983:59~60)라고 하였으며, “온갖 현상이 적멸한 것은 석가의 면목이며, 적멸함도 없어진 것은 진귀[조사]의 면목이다”萬象寂滅釋迦面 寂滅滅已眞歸面.
(ꡔ법어ꡕ 1983:201)라고 하여 여래선(如來禪)보다 조사선에 더 큰 비중을 두고 있다.
4. 선 수행법
만공은 특별한 참선법은 없다고 하였으나, 그러한 가운데서도 그는 화두법을 강조하였다. 만공이 든 첫 화두는 “만법이 하나로 돌아가니, 하나는 어디로 갔는고?”였으나, 이 화두는 이중적 의심이라 처음 배우는 이는 “만법이 하나로 돌아갔다고 하니 하나는 무엇인고?”라는 화두를 들게 하는 것이 가장 좋다(ꡔ법어ꡕ 1983:255)고 하였다. 그러나, 그가 최상의 화두로 주장한 것은 무자화두였다(ꡔ법어ꡕ 1983:228). 그리고, 무자화두 드는 법(ꡔ법어ꡕ 1983:236~242)으로서 진지한 자세로 망상은 잠재우고 화두는 성성하게 할 것이며, 잠은 세 시간만 자도록 하였다(ꡔ법어ꡕ 1983: 236~38). 즉, 만공은 성적등지(惺寂等持)를 바른 참선의 요체(ꡔ법어ꡕ 1983:56~57)惺寂等持 不日成之(또랑또랑하게 깨어있는 상태와 고요한 상태를 같이 가지게 되면 하루 해가 가기전에 그것[좌선]을 이루게 된다).
로서 강조한 것이다. 또한, 만공은 스스로의 해탈만으로 그쳐서는 안됨을 강조하였다. 즉, 그는 “자각 후 남을 지도하는 것은 학인이 가장 주의해야 할 일의 하나”(ꡔ법어ꡕ 1983:252)라고 말함으로써, 대승불교의 특징 중의 하나인 이타행을 중요시하였다.
결론적으로, 만공은 근본적으로 누구나 시간적, 공간적 제한 없이 선 수행을 할 수 있으며, 공부를 하려면 철저하게 해야함을 주장하였다. 그리고, 그는 조사선 전통 위에서 무자화두를 가장 좋은 선수행법으로 간주하였다.
IV. 만공 사상의 특징
이제까지 만공의 사상을 그의 시대관, 불교관 및 선사상으로 구분하여 검토하였으며, 그 내용은 대내외적 시대관, 부처관, 불법관, 윤리관, 정토관, 참선 자격자 및 조건, 공부 자세, 조사선 및 선 수행법이었다. 이와 같은 만공의 사상적 내용들은 이 주제들과 관련된 전통적 견해들과 공통점과 차이점을 동시에 공유하고 있다.
1. 공통점
부처관, 부처의 혜명 잇기 강조, 마음 강조, 선풍과 선지, 철저한 공부 자세의 강조, 조사선 강조, 화두법 강조 등은 만공이 다른 선지식들과 사상적으로 공유한 점들이었다. 만공은 원리적 입장에서는 부처가 곧 나 자신이며, 모든 부처들이 곧 중생이라고 본다. 이 점은 중국의 선사들이나 한국의 대표적 승려들의 관점과도 일치하는 것이다. 따라서, 그의 부처관은 동아시아 선승들의 전통적 부처관을 계승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부처의 혜명 잇기 강조도 불교인들의 일반적인 전통을 따르고 있다. 적어도 현대 교육제도가 수립되기 이전까지는 “술이부작”述而不作(전통적 지식을 이어 받아 서술은 하되 창작은 하지 않음). 이러한 학문태도는 중국의 공자(孔子, 기원전 551-기원전 479)이래 계승된 동아시아의 전통적 공부 방식이었으며, 한국학계도 이 전통에 충실해 왔다.
적 태도가 학문연구의 기본틀을 형성하였기 때문이다. 만공이 마음을 강조한 점도 모든 선사들, 나아가 모든 불교인들과 공통성을 보인 점이다. 한국불교사에 있어서도 원효는 일심(一心), 지눌은 공적영지심(空寂靈知心), 휴정은 일물(一物), 경허는 심월(心月)정성본(1997:190)은 경허와 만공의 마음 이해의 차이를 다음과 같이 주장하고 있다:“심월이 밝음에 그 빛이 만상을 삼키고 있는 것은 깨달음의 세계를 읊은 것이지만, 만공은 심월의 빛이 깨닫기 이전에 도리어 비추고 있는 그 사실을 분명히 알아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다. 이 점이 경허의 게송과 문제의 시각과 초점이 다른 것이다. 즉, 만공은 경허의 게송처럼 심월이 어두운 밤 하늘에 떠 올라 광명이 천지를 비추고 만상의 다 삼키고 있는 현상의 광명을 말하는 것이 아니고, 심월이 떠 오르기 이전의 근원적인 본래의 광명을 깨닫도록 설하고 있다.” 이 인용문의 문장이 명확하지 않아 필자는 이 두 선사 사이의 마음 이해가 구체적으로 어떻게 차이가 나는 지 잘 알 수가 없다.
이란 단어로써 마음을 표현하였으며, 그들은 모두 이 마음의 본질을 깨닫는 것을 자신의 목표로 하였다.
만공의 선풍(禪風)은 조사선의 선맥을 이으면서 돈오(頓悟)를 주장한 남종선의 정통성을 지닌 선법이지만, 동아시아의 다양한 선 전통을 수용하고 있는 점이 특징이라는 견해가 있다.만공의 선풍은 남악(南岳) 법계의 임제․위앙종(潙仰宗)풍과 조주(趙州) 선풍이 주류를 이루지만, 이 밖에 청원(靑原, ?~740) 법계의 조동종풍도 잇고 있어 동아시아 선불교의 핵인 남종선의 양대 법맥과 5가 7종의 각 종풍을 거의 다 망라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이은윤 2000:290)는 것이다. 또한, 이은윤(2000:294)은 만공 선풍의 내용과 관련, “만공 선풍에서 발견되는 인격론, 문명관, 자연관 등은 다른 선지식들에게서는 보기 드문 특징”이라고 주장하고 있으나, 그 인격론과 자연관의 내용이 무엇인지에 대해서는 궁금하다.
그러나, 만공 스스로는 자신을 임제 전통을 이은 것으로 생각하였다. 이는 “3요(三要)와 2리3요는 참선할 때의 3가지 마음가짐인 신심․분심․의심을, 2리는 자리이타를 말한다.
를 닦아 선림을 부흥시키고 설산의 좌선과 소림의 묵언과 조주의 용심(用心)을 모범삼아 단박 깨닫고 닦아 증득함(頓悟修證)을 얻어 불조의 정맥을 잇자”라고 하면서 자신을 “임제 32대 사문 만공이 금선대에서 쓰다”(ꡔ법어ꡕ 1983:209~10)臨濟 三十二代 沙門 滿空 書于 金仙臺.
라고 명기하였기 때문이다. 임제와 태고의 법통을 계승한 경허의 간화선풍과 무애자재함은 만공의 선에도 이어졌다(황정수 1999:171)는 기존의 견해도 필자의 주장을 뒷받침해 준다.
철저한 공부자세를 강조한 점도 기존의 선승들과 크게 다르지 않다. 만공이 강조한 참선할 때의 마음 자세들은 동아시아 선가의 전통을 따른 것으로 보인다. 중국의 대혜종고(大慧宗杲, 1089~1163)는 간화선 참구의 중요 요소로 신심과 의심을 강조하였으며, 고봉원묘(高峰原妙, 1238~95)는 대신근(大信根)․대분지(大憤志)․대의정(大疑情)을 주장하였는데, 그의 3요설의 특징은 신과 의 사이에 이 둘을 매개로 하고 있는 분지를 두었다는 점이다(정성본 1997:145~46). 이 전통은 조선시대의 휴정(休靜, 1520~1604)에게도 이어졌다(ꡔ韓國佛敎全書ꡕ[이하 ꡔ한불전ꡕ] 7.636c 10 ~12).參禪須具三要 一有大信根 二有大憤志 三有大疑情 苟闕其一 如折足之鼎 終成廢器(참선에는 반드시 3가지 요소를 갖추어야 한다. 첫째는 큰 믿음이란 근본이 있어야 하며, 두 번째는 크게 분하게 여겨 뜻을 세우는 것이다. 세 번째는 크게 의심하는 마음을 갖는 것이다. 만약 이 가운데서 하나라도 결하게 되면 다리가 부러진 솥처럼 마침내는 폐기가 되고 말 것이다).
휴정은 닭이 알을 품듯, 목마른 자가 물을 찾듯 등의 비유를 통하여 간절한 마음으로 화두 공부를 할 것을 강조하였으며(ꡔ한불전ꡕ 7.636b24~c9), 이 전통은 경허를 거쳐 만공에게까지 이어졌다. 따라서, 만공은 고봉과 휴정이 강조한 간화 3요소를 다시 신심․분심․의심의 3가지로 요약, 참선 수행의 새로운 요체로 제시한 것이다(정성본 1997:146).구산은 대분심(大憤心)․대용맹심(大勇猛心)․대의심(大疑心)을 강조하였다(버스웰 2000:197).
만공의 핵심 선지(禪旨)는 황벽희운(黃檗希雲, ?~850 혹은 849 혹은 855)의 선지와 일맥상통한다는 견해가 있다. 즉, 혜능(慧能, 638~713)선의 종지인 무념(無念)․무상(無常)․무주(無住)를 확대 심화시킨 사람이며, 임제의 스승이기도 한 황벽의 ‘즉심즉불 무심시도’卽心卽佛 無心是道(마음이 곧 부처며, 삿된 마음이 없는 것이 도다).
의 선사상과 맥락을 같이 하는데, 이러한 선 정신은 만공의 「상당법어」, 「거량」, 「게송」, 「방함록서」, 「법훈」 등을 관통하고 있다(이은윤 2000:291)는 것이다. 만공이 “무심(無心)은 비로자나불의 스승”(ꡔ법어ꡕ 1983:192, 292)이라고 한 점에서 이는 타당한 지적으로 생각된다. 그러나, 만공 자신은 임제의 선맥을 잇고 있다고 했으며, 그의 선 지도 방법도 임제종풍을 계승하였으므로(박선영 1990:781), 그의 선지도 임제의 선지를 잇고 있는 것으로 봐야 할 것이다. 따라서, 만공 선풍과 선지는 임제 전통을 잇고 있으며, 그것은 한국 선사상사에서는 고려 말 태고 보우(太古普愚, 1301~82)이래의 사상적 전통 위에 기초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그리고, 만공의 조사선 우위 사상은 지눌과는 다른 점이나, 휴정휴정의 주저인 ꡔ삼가귀감ꡕ(三家龜鑑)과 ꡔ선가귀감ꡕ(禪家龜鑑)에 대한 해제, 두 저서에 나타난 삼교관과 선교관 및 주제별 핵심 사상(마음이론, 수증론, 윤리론)에 대해서는 김종명 1999:859~81 참조.
과는 같으며, 이는 휴정 이래의 한국 선승들과도 그 사상적 맥을 같이 하는 것이다.
간화선(看話禪)을 한국에 처음 소개한 지눌(知訥, 1158~1210)이 무자화두를 강조한 예는 보이지 않는다. 그리고, 지눌의 수제자인 동시에 한국에서 간화선을 정립시킨 진각국사 혜심(眞覺國師 慧諶, 1170~1234)이 편찬한 ꡔ선문염송집ꡕ(禪門拈頌集)ꡔ고려대장경ꡕ의 학문적 역할 규명을 위한 한 가지 시도로서 ꡔ선문염송집ꡕ의 중요성, 내용, 특징 및 기여 가능성을 검토한데 대해서는 Kim 2000:69~77(English), 78~83(한글) 참조.
에는 조동종(曹洞宗), 운문종(運門宗), 임제종(臨濟宗), 법안종(法眼宗) 등 중국의 선종 중기에 전개된 모든 선가들이 다 등장하는데, 혜심은 이 책을 편찬할 때, 운문문언(雲門文偃, ?~949)과 조주종심(趙州從諗, 778~897)의 가르침에 특히 큰 비중을 두었다(Kim 2000:72, 김종명 2000:80). 따라서, 혜심도 무자화두만 강조하였다고는 볼 수 없다. 그러나, 중국 간화선의 사실상의 창시자인 오조법연(五祖?法演, ?~1104)은 조주의 무자공안을 참구하도록 주장하였으며, 대혜종고(大慧宗杲)도 무자화두를 기본으로 하여 간화선을 완성하였다(정성본 1997:153). 그리고, 조선의 휴정도 무자화두의 중요성을 강조하였다. 휴정은 중국 선문 5종의 법맥과 선풍을 더불어 논하면서도 임제종을 특히 강조하였으며(ꡔ한불전ꡕ, 7.644a16~645c2), 무자화두도 중요시하였다. 이와 관련, 휴정은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조]주가 이르기를 ‘없다는 이 한 글자는 종문(宗門)의 한 관문으로서 많은 잘못된 지식과 잘못된 깨달음을 꺾는 무기가 되고, 또한 모든 부처의 본래면목이 되며, 모든 조사들의 골수가 된다. 이 관문을 뚫은 후에라야 부처가 되고 조사가 되기를 기약할 수 있을 것이다’라고 하였다.”州云 無 此一字 宗門之一關 亦是摧許多惡知惡覺底器仗 亦是諸佛面目 亦是諸祖骨髓也 須透得此關然後 佛祖可期也(ꡔ한불전ꡕ 7.637a1~5).
그러므로, 만공의 무자화두 강조는 휴정 이래의 전통을 받아들인 것으로 보인다.만공의 ‘앞 생각과 뒷 생각이 서로 끊임없이 샘물이 흘러가듯’이라는 주장은 독창성이 있는 공안참구법(정성본 1997:157)이라고 하나, 필자는 이 주장의 뜻이 무엇인지 알 수 없다.
만공에 이르기까지 계승된 이 무자화두는 현대의 한국 승단에서도 강조되고 있다. 모든 화두는 단지 의심을 내게 하기 위한 방편으로 간주되므로, 한국의 선승들은 자신들의 선수행을 통해 의정(疑情)을 더욱 깊게 하기 위해 평생토록 같은 화두를 사용한다. 구산이 제자들을 지도할 때는 처음에는 ‘이 뭣고?’라는 화두를 권했다. 그러나, 이 화두는 의심을 일으키기에는 적당하지만, 선종 사상 선사들에 의해 효과적인 것으로 인정된 전통적인 화두들 중 하나에 마음을 집중할 때, 명상력은 훨씬 더 커진다는 것이다. 그래서, 구산은 수행이 익은 제자들인 경우에는 이 화두 대신 조주의 무자화두를 권했다(버스웰 2000:198). 이 점은 만공이 근기가 익은 수행자에게 무자화두를 권한 것과 같은 맥락에 서 있는 것이다.
2. 차이점
만공은 그의 시대관, 불교관 및 선사상의 측면에서는 독특한 자신의 사상을 피력하고 있다. 그의 시대관적 특징은 내부적인 측면에 초점이 맞춰져 있으며, 그의 불교관은 승려관, 삼신설, 계율관, 교학관, 정토관, 사홍서원에 대한 그의 독특한 해석을 통하여 살펴볼 수 있다. 그리고, 그의 선사상적 특징은 좌선의 정의, 만공 자신의 견해, 생활 참선의 강조, 수증론 및 공부단계설을 통해 나타난다.
1) 시대관
만공이 열린 자세로 당시의 시대를 내외부적으로 진단하면서, 특히 승려들의 자기 반성을 촉구한 점 등은 그 이전의 각 시대별 대표적 한국 승려들이었던 신라의 원효(元曉, 617~686), 한국 선불교 철학의 기초를 마련한 고려의 지눌, 조선의 휴정 및 만공 자신과 동시대의 대표적 개혁승이었던 만해 한용운(卍海 韓龍雲, 1879~1944)과도 공통성을 보인 부분이다. 원효는 부처를 팔아 자기 이익을 추구하던 승려들을 사자식충(獅子食蟲) 등의 예를 통하여 통렬히 비판하였으며, 지눌은 선교로 나뉘어 각자의 정통성만 강조하면서, 이양에 매달리던 당시의 승단 현실을 강하게 비판하였다. 그리고, 휴정은 당시의 타락한 승려들을 10가지로 나누어 꾸짖었으며, 한용운도 그들 당시의 불교계가 침체했던 주요 원인을 승단의 이기성과 시대 정신을 수용하지 못한 낙후성에서 찾았다.
그러나, 만공은 원효, 지눌, 휴정과는 다른 시대를 살았기 때문에 그들과는 다른 독특한 시대 정신을 갖게 되었으며, 이러한 배경 아래 승단 내부의 정화를 개혁의 초점으로 강조한 점은 그의 시대관적 특징이었다. 원효는 삼국통일 전후의 시대에서 지성사적으로는 불교 교학이 풍미하던 시대를 살았으며, 그 당시 선불교는 아직 한국 땅에서 뿌리를 내리기 전이었다. 따라서, 그의 사상적 관심도 다양한 불교 교학 사이의 교리적 회통에 주안점을 둔 것이었다. 지눌은 원효와는 달리 통일 한국의 시대에서 활동하였으나, 그의 주된 사상적 관심은 선과 교의 조화에 있었다. 휴정도 통일 한국인 조선에서 살았으나, 그가 처한 지성사적 배경은 원효 및 지눌과는 달랐다. 원효와 지눌 시대는 사상사적으로는 불교시대라고 해도 과언이 아닌 시대였으나, 휴정은 친유교 반불교 전통의 시대에서 활동하였다. 따라서, 선승으로서의 그의 사상적 관심은 지눌 이후 한국불교의 주류가 된 선불교 뿐 아니라 시대적 산물인 삼교일치에 있었다. 만공의 시대는 그 이전과는 또 달랐다. 만공은 서구문물의 수입과 일제로 특징 지워진 시대를 살았다. 따라서, 그의 사상도 이러한 시대적 배경을 바탕으로 전개되었다. 그는 당시 한국불교가 침체된 원인을 내외부적 양면에서 찾았는데, 특히, 외부적으로는 일제에 의한 한국불교의 일본화에 있다고 진단하고, 이를 극복하기 위한 방법론으로 정교분리론을 주창하였다. 이 점은 당시 불교계에 큰 화제를 불러 일으켰던 사건이었다(이종익 1989:604). 그러나, ꡔ법어ꡕ의 기록에 의해 판단하는 한, 이 두 가지 내외부적 원인 중 만공이 더욱 관심을 둔 부분은 승단의 내부적 타락이었다. 만공이 개혁의 초점을 특히 승단 내부의 정화를 통해 찾은 점은 원효, 지눌, 휴정과 구별되는 점으로 생각된다.
2) 불교관
(1) 승려관
만공의 승려관은 독특하다. 일반적으로 승려는 정식으로 승단에 입문하여 삭발을 하고, 계율을 받고, 승복을 입고 엄격하게 정해진 절차를 거친 후 불도를 걷는 사람들을 일컫는다. 그러나, 만공은 승려와 속인의 구분을 이와 같은 형식적 차이가 아니라, 불법에 대한 앎과 무지에 따라 규정한 것이다. 불법을 모르면, 삭발을 하고, 계율을 받고, 승복을 입었다 하더라도 승려가 아니며, 속인이라 하더라도 불법을 알면 승려라는 것이다. 만공의 이러한 승려관은 승속을 구분하지 않았던 경허의 사상을 계승한 것으로 보이지만, 불법에 대한 앎 여부를 기준으로 삼은 점은 그에게서 발견되는 독특한 특징이 아닌가 한다. 최근 서양에서는 보살승려(bodhisattva-monk)란 단어가 쓰이고 있는데, 이 개념은 부처의 가르침대로 삶을 살려는 재가 불교도들을 의미하며, 만공의 승려관과도 일맥상통하는 점이 있는 것으로 보인다.
(2) 삼신설
만공의 삼신설도 아주 독특하다. 그의 3신설은 법신, 보신(報身), 화신(化身)이란 부처의 삼신설과는 전혀 다르다. 전통적인 불교의 삼신설은 부처의 입장에서 주장된 것인데 비하여, 만공의 삼신설은 중생인 인간의 입장에서 법신의 경지를 체득할 수 있는 가능성의 길을 제시하기 위한 것으로 추정된다(정성본 1997:151). 만공은 또한 본래심으로 공안을 참구하는 간화선의 입장을 분명하게 제시하고 있다. 특히, 그가 법신을 설명하고 있는 곳에 이러한 본래심으로 화두를 참구하는 것이 불생불멸의 도라고 말하고 있음은 주목해야 할 말(정성본 1997:158)로 간주되고 있다.
(3) 계율관
만공은 지눌을 인용하면서 계율을 강조하였는데, 그가 특히 강조한 항목은 이성(異性) 금지와 수마(睡魔) 항복이었다. 원효의 계율관이 잘 나타나 있는 그의 저술 ꡔ보살계본지범요기ꡕ(菩薩戒本持犯要記)에 의하면, 원효는 계율 조항 자체를 문자 그대로 지키는 것이 계율 제정의 의의가 아니며, 각 계율의 뜻을 이해하고 실천하는 것이 중요함을 강조하였다. 따라서, 만공이 이성과의 접촉 금지를 철저히 금지한 점은 원효의 무애행(無碍行)적 계율 해석과는 다르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그가 이처럼 계율을 강조한 것은 방편설의 하나로 이해된다. 만공도 원리적으로는 선악의 구별이 따로 없다고 하였기 때문이다. 따라서, 만공이 강조한 이성 금지 및 수마 항복의 대상은 근기가 충분히 익지 않은 사람들었다고 할 것이다. 만공이 이성 금지를 특히 강조한 또 다른 이유는 당시의 조선 승려들의 윤리적 부도덕성이 심각했었다는 점 때문이었을 것으로 생각된다. 만공도 열린 마음으로 시대를 호흡하려 했던 점에서는 만해 및 백용성(白龍城, 1864~1940)과 공통성을 보였으며, 그는 만해와 백용성과의 교류도 있었다. 그러나, 이성 문제를 비롯한 계율관에 관한 한, 만공은 대처 허용을 주장한 만해(버스웰 2000:45~49)와는 달랐다. 그리고, 백용성과는 같은 점과 다른 점을 동시에 갖고 있었다. 백용성이 철저한 계율 준수를 강조한 점백용성은 1925년 7월 망월사(望月寺)에서 천일 참선을 시작할 때 밝힌 규칙 사항에서 계율의 준수를 강조하였다(버스웰 2000:207).
에서는 만공과 공통성을 보였으나, 만공이 상근기의 경우 원리적으로는 선악 구분도 인정하지 않은 점은 백용성과도 다른 점이었다. 따라서, 계율에 관한 한, 원효와 만해를 진보적 개혁승, 만공을 중도적 개혁승, 용성을 보수적 개혁승으로 부를 수 있을 것이다.
(4) 교학관
경허 법맥의 특징은 임제종 태고계를 이으면서 선과 교학과 정토설과 밀교가 병행된 점에 있다고 한다(황정수 1999:164). 그러나, 만공의 사상은 이 흐름과는 다른 점이 보인다. 즉, 교학과 밀교적 요소는 보이지 않기 때문이다. 만공의 ꡔ법어ꡕ에서는 불교 교학에 대한 논의는 보이지 않는다. 이 점은 원효, 지눌, 휴정, 경허, 만해와도 다른 점이다. 원효의 철학은 거의 교학을 바탕으로 하여 전개되었으며, 지눌은 지적 이해 없는 수행은 무의미하다고 할 정도로 교학 공부를 중요시하였다. 휴정도 수행이 익은 자에게는 사교입선(捨敎入禪)을 권하였으나, 그도 바른 선을 하기 위한 전제 조건으로서 교학의 중요성을 인정하였다. 경허도 참선에 전념하기 전 불교경전을 공부하여 강백(講伯)으로서 활동하였을 뿐 아니라, 유교와 노장(老莊)에도 정통하였다(황정수 1999:68~69). 경허는 결사도 조직하였는데, 그가 조직한 결사의 진정한 뜻도 정혜쌍수(定慧雙修)에 있었다(황정수 1999:100)고 한다. 만해도 교학불교와 선불교의 조화를 주장하면서 대중불교의 전개를 역설하였다(김종명 1995:11). 그러나, 이들과는 달리 만공이 교학의 중요성을 논한 부분은 보이지 않으며, 만공의 행장에서도 그가 교학을 공부했다는 기록은 발견되지 않는다.
(5) 정토관
만공은 선불교에서 자주 주장되는 유심정토의 입장을 이어 받고 있다(정성본 1997:180). 이 점에서 만공의 정토관은 원효, 지눌, 휴정의 정토관과 일치한다. 아미타불이나 극락을 외부에서 추구하는 것은 불교의 정신이 아니라는 입장(정성본 1997:181)에서 만공의 정토관은 이들과 같이 초기불교의 사상적 맥락 위에 서 있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만공의 정토관은 원효, 지눌, 휴정, 경허와도 다른 특징적인 면도 가지고 있다. 가장 큰 차이점은 염불의 중요성에 대한 언급이 없다는 점이다. 원효도 지눌도 휴정도 중․하근기용 수증론으로서 염불의 긍정성을 나름대로 인정하였다. 그리고, 경허도 도솔상생(兜率上生)의 미륵(彌勒)신앙을 수용함으로써 대중의 타력신앙적 풍조를 외면하지는 않았다(황정수 1999:102). 반면, 만공이 염불을 강조하지 않은 것은 만해가 염불당의 혁파를 주장한 것(김종명 1995:10)과는 같은 맥락에 서 있었다. 만공이 현세 중심의 유심정토설을 강조한 것은 그 당시 아미타 정토에의 왕생을 기원한 타력신앙이 유행(황정수 1999:9)한데 대한 반응으로 보인다. 따라서, 만공의 정토관은 철저한 현실 위주의 입장을 취하고 있으며, 이는 누구나 지혜를 얻음으로써 부처가 될 수 있다는 만인구원설의 현세적 입장을 강조한 사상이라고 할 수 있다.
(6) 사홍서원 해석
사홍서원의 일반적인 내용은 중생무변서원도(衆生無邊誓願度), 번뇌무진서원단(煩惱無盡誓願斷), 법문무량서원학(法門無量誓願學), 불도무상서원성이다(佛道無上誓願成). 만공도 이 서원을 그대로 받아들이고 있다. 그러나, 그는 동시에 자성중생(自性衆生), 자성번뇌(自性煩惱), 자성법문(自性法門), 자성불도(自性佛道)도 수용하고 있다. 이는 중생과 번뇌와 법문과 불도를 모두 자성의 산물로 파악한 독특한 해석으로 생각된다(ꡔ법어ꡕ 1983:221). 따라서, 만공은 모든 것을 마음의 관점에서 파악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3) 선사상
만공의 사상을 분석한 기존의 견해들은 주로 그의 선사상에 집중되어 있으며, 그의 선사상을 전문적으로 분석한 연구들은 정성본과 황정수의 업적들이 대표적이다. 정성본은 ꡔ법어ꡕ에 만공의 선사상이 집약되어 있는 것으로 간주하고, 이를 바탕으로 “만공의 선풍을 천명할 수 있는 계기를 마련함과 동시에 선불교의 새로운 방향을 제시해 보고자,” 1) 만공선사의 발원문, 2) 불교의 혜명, 3) 참선수행의 기본 정신-간화선의 수행, 4) 간화선(공안선)의 참구법, 5) 무념처의 좌선의 다섯 부분에 걸쳐 만공의 선사상을 검토하였다(정성본 1997:115~70). 황정수는 ꡔ만공어록ꡕ을 기준으로 경허와 만공의 선사상을 고찰하고 덕숭산문의 선사상의 요체를 밝히며, 그들이 덕숭산문과 한국선종사에 미친 영향을 규명하려는 목적에서 만공 사상도 검토하였다(황정수 1999:2~5).박선영도 ꡔ만공어록ꡕ을 바탕으로 만공의 선사상과 선의 지도방법을 살피고 있다(박선영 1990:781).
이러한 기존의 연구업적들에 의하면, 만공의 선사상은 지눌(정성본 1997:162~63)과 휴정과 경허(황정수 1999:30~38, 73~77)의 영향을 받은 것으로 주장되고 있는 데,정성본은 간화선의 실천정신은 보조(지눌)→경허→만공으로 전래, 계승되고 있는데, 만공은 보조의 법문을 많이 인용하고 있으며, 특히 간화선 수행의 기본 골격인 ‘성성적적,’ ‘성적등지’ 등의 주장도 보조의 법문에 기초를 두고 새롭게 발전시킨 것으로 주장하였다. 황정수는 활구 참선의 기풍 진작과 무자화두 강조, 성적등지 강조는 경허 선사상의 특징이며, 만공은 이를 잇고 있는 것으로 보았다.
필자는 마음의 중요성, 자각의 중요성, 얽매임 없는 자유, 무자화두, 계율 준수의 강조, 개념에 묶이지 말 것, 화두 공부의 자세, 참선의 3요소, 자각 후 선지식에 의한 검증의 필요성 등 다양한 면에 걸쳐 휴정의 영향을 받은 면이 특히 크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좌선의 정의, 깨달음에 대한 만공 자신의 견해, 생활 참선의 강조, 수증론 및 공부단계설을 통하여는 만공 사상의 특징적인 면을 살펴볼 수 있다.
(1) 좌선의 정의
만공의 좌선에 대한 정의는 중국의 대표적 선적들인 ꡔ신회어록ꡕ(神會語錄)이나 ꡔ육조단경ꡕ(六祖壇經)에서 제시하고 있는 좌선의 정의와는 내용이 다르다. 망념이 일어나지 않는 입장과 본성을 보는 견성이 남종선의 좌선이라고 한다면, 만공은 좌선의 정의를 “모든 망상이 고요해 진 것이 좌며, 화두에 대한 의심이 깨어 있는 상태가 선이다”라고 좌선을 정의한다. 따라서, 화두를 참구하는 공안선의 입장에서 내린 좌선의 정의는 선종사를 통해 볼 때 최초의 주장(정성본 1997:160)으로 간주되고 있다.
(2) 깨달음에 대한 만공 자신의 견해
깨달음의 성격과 수증론에 관한 만공 자신의 독특한 견해를 만공 스스로의 말을 통해서살펴볼 수 있다:
싱그러운 광명이 하늘도 덮고 땅도 덮고 밤도 없고 낮도 없는 광명의 세계를 이룬다 하나, 월면(月面)의 아는 바로는 그렇지 아니하여 터럭만큼도 밝음이 없고, 터럭만치도 어두울 것이 없으며, 혹 도를 깨달음에 명철하여 일체법을 하나도 모를 것이 없이 다 안다 하나, 월면의 아는 바로는 그렇지 아니하여 지혜가 없어 가히 한 법도 앎이 없어 한 법도 가히 모를 것이 없으며, 혹 도를 깨달음에 살고 죽는 것이 없다 하나, 월면의 아는 바는 그렇지 아니하여 혹 살기도 하고, 혹 죽기도 하여, 죽고 삶이 없고 있음이 없으며, 혹 도를 깨달음에 다시 보림(保任)하여 성품이 흰 연꽃 같아서 다시 물들음이 없다 하나, 월면의 아는 바는 그렇지 아니하여 배고픔이 오면 밥 생각이 나서 간절하고, 졸음이 오면 자고 싶은 생각이 간절하여 다시 물들음이 없고 있음이 없으며, 혹 도를 깨달음에 다시 닦고 닦아 증득한다 하나, 월면의 아는 바는 그렇지 아니하여 본래 잃어 버린 것이 없어 다시 증득할 것이 없어, 산과 산 물과 물이 각각 완연(完然)한 소식임을 뉘라서 변작(變作)할까(ꡔ법어ꡕ 1983:238~239).
이 인용문에 의하면, 만공은 명암(明暗), 앎과 모름, 생사(生死) 등의 이분법적 관점에서 깨달음을 이해해서는 안됨을 강조하였으며, 깨달았다 하더라도 절대적 순수성이 그대로 유지되는 것은 아니라고 간주하였을 뿐 아니라 돈오점수설(頓悟漸修說)도 인정하지 않았음을 알 수 있다.
(3) 공부단계설
만공은 화두법 수행을 통해 얻을 수 있는 공부의 단계를 다음과 같이 설정하였다. 그에 의하면, 공부 과정에는 지무생사(知無生死), 계무생사(契無生死), 체무생사(体無生死), 용무생사(用無生死)“지무생사”는 실제로는 생사가 없음을 아는 것, “계무생사”는 생사가 없음에 계합하는 것, “체무생사”는 생사가 없음을 체험하는 것, “용무생사”는 생사가 없는 도리를 현실의 삶 속에서 활용하는 것을 의미한다.
의 4단계가 있는 데, 그는 생멸이 실제로는 없다는 것을 안 때를 견성한 때(ꡔ법어ꡕ 1983:184)로 보았다. 그리고, 이 4단계 중 용무생사에 이르러야 이무애(理無碍), 사무애(事無碍)“이무애”는 이치에 속박되지 않는 것을, “사무애”는 다양한 현상적 조건에 얽매이지 않는 것을 뜻한다.
하게 되는 대자유인이 된다(ꡔ법어ꡕ 1983:262)고 하였다. 만공에 의한 이러한 공부 단계 설정은 독창적 사상으로서 그는 또 다른 측면에서 공부의 철저성을 강조한 것으로 생각된다.
(4) 수증론
만공의 수증론은 “단박 깨닫고 닦아 증득함(頓悟修證)을..... 얻자,” “깨달음은 어느 한정된 기간에 성취되는 것이 아니라, 지극한 마음에 따라 다양한 계기에 의해 얻게 된다,” “혹 도를 깨달음에 다시 닦고 닦아 증득한다 하나, 월면의 아는 바는 그렇지 아니하여 본래 잃어 버린 것이 없어 다시 증득할 것이 없어.....”(ꡔ법어ꡕ 1983:238~39) 등의 문귀들을 통하여 그 특징을 살펴볼 수 있다. 이 문귀들에 의하면, 만공은 돈오돈수(頓悟頓修)설의 입장을 견지하였다고 할 수 있다. 이는 돈오의 입장을 견지한 그의 스승 경허의 선사상을 계승한 것(황정수 1999:64~65)으로 볼 수 있을 것이나, 경허와 만공의 법맥상 스승이었던 휴정의 돈오점수설과는 다르다.
(5) 생활 참선의 강조
경허 사상의 요체는 목우(牧牛: 佛性)사상, 간화선풍, 대중적 생활참선, 정혜(定慧)․도솔(兜率) 결사운동으로 요약될 수 있으며(황정수 1999: 45~102), 그의 불교적 업적도 선의 대중화, 참선의 생활화, 허례허식 철폐, 근기별 차별 불인정, 승속 구분하지 않기 등에서 찾을 수 있다(황정수 1999:145). 이러한 정신은 만공에게도 이어졌다. 만공의 선사상은 “만법귀일 일귀하처” 공안과 무자화두에 바탕을 둔 참선 수행의 강조, 진아(眞我)로서의 “나”에 대한 탐구 강조, 참선의 대중화와 생활화 강조에서 그 특징을 찾을 수 있다(황정수 1999:114~44).
만공의 선사상은 대체로 휴정과 경허의 전통을 잇고 있으며, 그의 선도 승려들에 의한 선방선이 아닌 모든 이를 대상으로 한 일상생활선이었다. 그러나, 만공이 참선 자체의 중요성을 알고 그것에 대한 발심을 촉구한 점과, 경허에게서도 강조되었던 생활선이 만공에게서는 보다 더 구체적으로 전개된 점은 만공의 선사상이 가진 특징들이다. 특히, 만공은 누구나 절실한 마음가짐만 있으면 언제 어디서든 참선할 수 있음을 강조하였다. 따라서, 만공은 경허의 선사상을 계승하면서도 구체적이고도 직접적인 실천 참선에 더 큰 비중을 두고 있었다(황정수 1999:147~157)고 할 수 있다. 그러나, 만공이 승속에 구분을 두지 않고 생활참선을 강조한 점은 1928년 조선총독부가 전국의 선방에 적용시키기 위해 제정한 공통규율과는 다른 점이었다. 당시의 조선총독부는 승려들은 “재가 신자와 함께 참선하지 말 것”을 규정하고 있었기 때문이다(버스웰 2000:208).
결론적으로, 만공은 특히 그의 시대관, 불교관, 선사상에서 다른 선지식들과는 다른 특징적인 면을 보여 주었다. 그는 현실의 중요성을 강조하고 시대적 개혁의 초점을 승단 내부에서 찾았다. 그리고, 지혜 얻기를 수행인의 최고 목표로 삼고, 이 목표를 위한 방법론으로 간화선에 바탕을 둔 생활참선을 주창하였다. 그러나, 혜암은 「만공법어 봉향송」에서 언구에 매이지 말라는 요지의 말을 하였으며(ꡔ법어ꡕ 1983:1), 경봉은 「서사」에서 만공의 양구, 방할, 거불자, 시중도 교화문이었을 뿐(ꡔ법어ꡕ 1983:2)이라고 하였다. 따라서, 만공 선의 종지이은윤(2000:294)은 만공이 상대적 인식체계를 넘어선 천지미분전, 부모미생전의 절대 경지를 자신의 종지로 삼았다고 한다.
는 언구에 매이지 말라는 가르침이었으며, 그의 이 종지는 다양한 방편들을 통하여 전개되었다고 할 수 있다.
IV. 만공 사상의 한국불교사적 역할
한국불교사에서의 만공 사상의 역할은 1. 선의 사회화, 2. 현실구원론, 3. 도반의 역할, 4. 시대관, 5. 불법관 6. 수증론의 측면에서 관찰할 수 있으며, 이 주제들과 관련된 그의 사상은 순기능과 역기능의 양면을 동시에 가지고 있다.
1. 선의 사회화
기존의 연구들에서는 한국불교사에서의 만공의 역할을 지금, 여기, 자신의 문제를 우선적 명제로 하는 차생성불(此生成佛)의 조사선사상을 사회화시켜 세계 구원과 사회제도의 횃불을 밝힌 점(이은윤 2000:289~90), 한국 선불교의 부흥과 선종교단의 중흥적 토대를 마련한 점(정성본 1997:132), 생활 속의 선을 주창하면서 물질만능주의의 현대세계에서 선을 통한 문제 해결의 열쇠를 제시한 점(황경수 1999:176)에서 찾고 있다. 경허에 의해 수립되고 만공에 의해 확립된 덕숭문중이 현대 한국불교의 큰 흐름을 형성하고 있다는 점에서 이러한 견해들은 타당성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만공의 선은 조사선 전통 위의 간화선이며, 이 수행법의 대상은 현대한국사회에서도 여전히 소수인 것으로 생각된다. 전국선원수좌회가 발간한 2000년 동안거 전국선원 정진대중명단에 따르면, 전국 5개 총림과 47개 비구선원, 30개 비구니선원 등 총 82개 선원에서 정진중인 대중은 1666명이었다.여기에는 주지, 선원장, 후원대중 승려들의 명단은 규칙에 의해 등재되지 않았으며, 부분 정진에 참여한 승려들의 명단도 등재되지 않았다.
(《법보신문》2001. 1. 10). 이는 20여년 전(버스웰 2000:210)1976년의 현재 전국에는 45개의 선원이 있었으며, 등록된 총 선승 수는 929명(비구 533명, 비구니 348명)이었다. 그리고, 1982년의 조사에 의하면, 규모가 가장 큰 22곳의 전국 사찰에 속한 선승 수는 950명(비구 602명, 비구니 348명)이었으며, 이 결과는 1976년의 통계와 거의 같았다. 그러나, 당시 한국 사찰의 선방 크기에 비추어, 1982년의 통계도 과장된 것으로 간주되었다.
에 비해서는 선방 수와 선승 수가 증가한 것을 의미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현재까지도 국내 전체 승려의 10%에도 훨씬 미치지 못하는 승려들만이 참선수행에 참여하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만공이 강조한 간화선의 사회화는 아직 이루어지지 못했다고 할 수 있다. 불교 역사상 전개된 수행법은 다양하였으며, 간화선은 특정한 시기의 중국 불교계의 산물이었다. 따라서, 간화선만이 현대사회의 다양한 구성원들을 위한 유일한 수행법이 된다고는 할 수 없을 것이다.간화선 절대론의 근거, 허구성 및 간화선의 과제 등에 대한 논의는 서정형 2000:87~109 참조.
2. 현실구원론
만공의 가르침은 인간 중심, 현실 위주의 입장을 견지하면서, 누구나 부처가 될 수 있다는 만인구원설의 현세적 입장을 강조한 것이다. 그리고, 대외적으로는 정교분리론을 주창하였다. 이러한 점들은 초기불교의 정신과도 부합되며, 불사(佛事)와 기복위주의 신앙불교 성행과 ‘호국불교’의 기치 아래 불교계와 정치권의 ‘부적절한’ 밀월 관계이러한 관점에서 고려의 불교의례를 분석한 데 대해서는 김종명 2000:93~120, 김종명 2001:277~332 참조.
가 유지되어 온 현대 한국사회에서 순 기능을 할 수 있을 것으로 생각된다.
3. 도반의 역할
만공의 사상에서 주목을 끄는 또 하나의 대목은 사가(師家)와 도반의 중요성을 강조한 중국 조동종(曹洞宗)의 개산조 동산양개(東山良价, 807 ~69)의 가풍인 사우윤리학을 중시하고 있다는 점이다. 만공은 “도반의 감화력은 선생의 가르침보다도 강한 것”이라고 할 정도로 도반의 중요성을 강조하였다. 이 점과 관련, 선가의 사우윤리는 각종 회사와 인간의 비밀 결사에 심대한 영향을 끼쳤다는 최근의 중국 선학계 연구는 주목할 만하다(이은윤 2000:293). 여느 인간 집단처럼 화합을 중요시하는 승단에서 도반들 사이의 조화로운 관계는 건강한 수행을 위한 필수조건일 것이며, 만공이《당파를 짓지 말 것》을 강조하면서 도반의 중요성을 주장한 것도 바로 이런 맥락에서였다. 만공 사상이 가진이러한 순기능은 강조되어야 하겠지만, 이 주장의 악용에 대해서도 고려할 필요가 있다. 현대 한국사회는 공적인 일들의 많은 부분도 학연, 지연, 혈연에 의해 이루어지고 있는 특징을 보이고 있으며,과학적 인식틀로서의 불교 가르침이 이러한 현안점들을 푸는 데 도움이 될 수 있다는 견해에 대해서는 김종명 1997:115~47 참조.
한국 승단도 이 점에서는 예외가 아닌 입장에서 불교계 언론에서는 문중과 본사 중심의 사고로 이어지는 종단의 풍토가 많은 문제점들의 원인이 되고 있음을 지적하고 있기 때문이다(심정섭 2001).
4. 시대관
한국불교사에서 근대불교는 일반적으로 1895년 승려의 도성(都城)출입금지해제로부터 1945년 해방될 때까지의 시기를 말하며, 개혁불교의 성격이 특히 강하게 나타난 것은 이 시기의 특징이다(송현주 2000:171~73). 이러한 시대적 환경 속에서 만공은 자신이 당면했던 시대적 현안점들을 특히 승단의 내부적 정화와 선불교의 사회화를 통하여 해결하려 하였다. 현대 한국철학 연구의 지향점도 현대 한국사회가 안고 있는 현안점들에 대한 철학적 진단과 해결 모색에 두어져야 한다는 점(김종명 1999 :211)에서 만공의 이러한 견해는 현대에서도 역사적 당위성을 가질 수 있는 주장이다. 그러나, 그의 주장은 동시에 한계성도 가지고 있다.
근대 한국불교 이후 왕성했던 불교개혁의 논의 중 상당부분이 의례의 개혁에 있었으며, 그와 동시대의 개혁승들이었던 한용운, 백용성등도 의례의 개혁을 주장하였다. 그리고, 현재 한국불교는 위기상황을 맞고 있다는 진단이 상당히 제기되고 있는 가운데, 그 위기의 원인을 불교자체내에서 파악하고 있으며, 그 중에서도 의례가 매우 중요한 한 요소로서 거론되고 있다(송현주 2000:171~78). 그러나, 만공이 의례의 개혁 문제를 심층적으로 논의한 점은 발견되지 않는다. 그리고, 만공은 인류애에 바탕을 둔 자비의 중요성을 주장(황정수 1999:107)하기도 하고, 일제 정부에 대해 정교분리의 허락을 요청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그의 비판 대상은 주로 승단 내부, 특히 세속적 가치에 빠진 승려들의 생활 태도에 집약되어 있으며, 그의 활동 범주도 승단 내부에서 전개되었다. 따라서, 그가 당시의 한국이 처해 있던 일제라는 특수 상황 속에서 1970~80년대의 한국 기독교계가 독재정부에 대항함으로써 역사의 물꼬를 돌려놓은 것과 같은 역할을 하는 데는 한계가 있었다. 내적 정화에 주안점을 둔 만공의 개혁 방향도 일정한 한계성을 가지고 있었으며, 그것은 만해와도 달랐다. 만공은 현실정토의 근원으로서의 마음 정토를 중요시하고, 참선 수행을 통한 마음 정토의 구현을 주장한 반면, 만해는 현실정토의 실현을 위하여 적극적인 현실참여를 시도하면서(황정수 1999:108~09) 승려, 시인, 소설가, 민족대표 등으로 다방면에서 활동하였다. 또한, 만공의 사상에서 당시의 서구 문명의 유입과 그 영향에 대한 논의도 별로 보이지 않는 데, 이 점도 만해가 적극적으로 서구 문물 수입을 강조한 것과는 다르다. 현실구원론은 만공사상이 가진 큰 장점이다. 그러나, “세계화”와 도덕적 해이(moral hazard)가 현대 한국사회의 큰 현안점으로 등장한 지금의 입장에서는 개인적 마음 수양을 중심으로 승단 내부의 개혁에 초점을 맞춘 만공의 시대관은 우리에게 반성적 교훈의 일면을 제공해 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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