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교이야기/빈 바랑

적 멸

淸潭 2007. 12. 22. 13:57

적 멸

고통의 악순환 끊어진 절대 평화의 경지



‘적멸’은 고통의 근원인 ‘탐진치’가 완전히 끊어진 궁극적인 행복을 의미한다. 사진은 지난 2003년 12월 조계종 전 종정 서옹스님의 다비식 장면. 불교신문 자료사진



‘nirvana.’ ‘불어서 꺼진 상태’를 의미하는 산스크리트어다. 한자음을 빌려 표현하면 ‘열반(涅槃)’, 뜻으로 풀면 ‘적멸(寂滅)’이다. 불교에선 모든 번뇌가 사라진 절대 평화의 경지를 이 낱말로 갈음한다. 수행자들이 추구하는 궁극의 목표다. 생사의 업장에서 탈출한 영원한 고요. 부처님의 문제의식은 ‘어떻게 하면 괴로움에서 벗어날 수 있는가’였다. 6년간 고행과 선정 끝에 당신은 자아가 영원불변한 실체로 독립적으로 존재한다는 착각이 중생을 아프고 슬프게 한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이와 같은 통찰은 초기불교에서 ‘탐진치(貪瞋癡) 삼독(三毒)의 지멸(止滅)’이란 개념으로 심화된다. 탐욕(貪).성냄(瞋).어리석음(癡)은 말 그대로 중생을 불행으로 몸살을 앓게 하는 치명적 ‘병균’이다. <아함경>, <구사론> 등 초기불교 경전 및 논서에 따르면 탐욕은 집착과 갈애(渴愛)를 낳는다.

무언가를 갖고 싶다는 마음인 탐욕은 소유대상의 유한성으로 말미암아 필연적으로 좌절을 맛본다. 물질은 한정돼 있으나 그것을 소유하고 싶어 하는 사람은 부지기수이기 때문이다. 어렵게 얻었다 하더라도 만족할 줄 모르는 욕망은 또 다른 먹잇감을 찾아 헤매고 갈등과 투쟁을 반복한다.

탐욕은 언젠가 좌절당하게 되고, 좌절을 맛본 이는 증오를 느낀다. 고통의 원인이나 발생과정에 대한 성찰이 없다면 탐욕과 분노를 되새김질하며 무명(無明)에 침잠하기 마련이다. 고통의 악순환에서 한 걸음도 빠져나올 수 없는 것이다.

부처님은 <숫타니파타>에서 “모든 고통은 집착으로부터 시작된다”며 “그러나 이 집착이 소멸해 버리게 되면 그에 따라 고통도 없어진다”고 설했다. 탐진치는 사성제(四聖諦) 가운데 고의 원인인 집제(集諦)를 좀더 포괄적으로 설명하고 있다. 그것의 근저엔 모든 존재와 현상이 독립적 개체라는 시각과 배타적 자기중심주의가 깔려있다.

즉 소유하고 싶은 대상이 실재하고, 그것을 원하는 내가 실재하므로, 남이 갖기 전에 내가 먼저 가져야 행복해질 수 있다는 고집이다. 탐진치는 나 혼자만 잘 살겠다고 무작정 달리다 걸리게 되는 덫이다.

결국 고통과 악의 근원인 탐진치를 멈추고 없애는 일이 열반의 첫걸음이다. 그러려면 순간순간 폭발하는 욕망과 욕망의 그릇인 자아의 허상을 밝히는 게 우선이다. 탐욕은 대상에 대한 감각에서 비롯된다. 대상과 현상에서 즐거운 감각, 괴로운 감각, 즐겁지도 괴롭지도 않은 감각 등을 끊임없이 느끼고, 이것은 ‘갖고 싶다’ ‘피하고 싶다’ 등의 욕망(탐욕)으로 확대된다. 그러나 설령 즐거운 감각이라 해도 무상성으로 인해 이내 사라지고 만다. 사라짐에 집착하면 좌절하게 되니, 고통의 씨앗이 되는 것이다. 자아라는 것은 감각에 둘러싸인 덩어리일 뿐이다. 시간이 흘러 육체가 허물어져 사라지면 자아도 종적을 감춘다. “삼독의 불이 무상하고 생로병사와 우비(憂悲), 고뇌가 다 무상하다. 너희는 마땅히 알라, 온갖 존재가 무상함을!<초분설경>”

존재의 무상성을 간파하는 것이 바로 적멸이다. 부처님은 이러한 깨달음 이후에 마지막 장애인 육체마저 벗어던짐으로써 완전한 적멸을 성취했다. “열반이라는 것은 탐욕이 영원히 다하고, 분노가 영원히 다하고, 어리석음이 영원히 다한 상태를 말하는 것이네(貪慾永盡 瞋永盡 愚癡永盡 是名涅槃).”<염부차경>


탐진치 삼독의 불과 생로병사의 무상함 알아야

자아 아닌 타자를 향해 열린 자세 가져야 가능


부파불교(部派佛敎)에 이르러 부처님에 대한 신격화가 진행되면서 열반에 대한 인식도 변화했다. 열반은 오로지 부처님의 독보적인 능력이지, 수행자가 아무리 노력해도 완전한 열반을 체득하기란 불가능하다고 여겨졌다. 따라서 수행자는 아무리 무상정각(無上正覺)을 이뤄도 부처님과 달리 열반의 경지가 아니라 아라한의 경지에 머문다고 보았다. 열반이 특정한 누군가만이 누릴 수 있는 영예로 변질된 것이다.


인도 아잔타 석굴의 부처님 열반상.


열반이 개념화돼 생멸과 대립하면 그것은 곧 분별의 망집을 야기한다. 적멸의 본래 의미를 복원한 것은 대승불교다. 좀더 쉽고 간명해졌다. 일상생활에서 너와 내가 둘이 아니라는 연기적 세계관을 실천한다면 그것이 바로 깨달음의 경지요 적멸이라고 가르친다. “모든 있는 것들이 있는 그대로가 부처님 상이니, 불자가 이 도리를 깨닫기만 하면, 깨달은 그 즉시 부처를 이룬다(諸法從本來 常自寂滅相 佛者行道爾 內世得作佛)<법화경>.” <금강경>은 생각 없는 생각이 곧 부처의 생각임을 일깨운다. “마땅히 머무르는 바 없이 마음을 낼 것이니, 만약 마음에 머무름이 있으면 곧 머무름이 아니니라.(不應住色生心 不應住聲香味觸法生心 應生無所住心 若心有住 卽爲非住).” <금강경> ‘이상적멸분(離相寂滅分), 상을 떠나 적멸에 들다) 생사와 열반이 둘이 아니며 모든 것은 하나로 통한다는, 전체를 보는 일이 관건이다.

원효스님은 <금강삼매경론>에서 “유와 무의 법이 이루지 않는 바가 없고 긍정과 부정의 뜻이 돌고 돌지 않는 바가 없다(故有無之法無所不作 是非之義莫不周焉)” 자아를 내세우다 빚어진 욕망과 번뇌가 끊어진 그 자리가 적멸임을 강조했다.

열반은 단순히 죽음의 존칭어가 아니다. 아울러 살아서도 얼마든지 적멸을 경험할 수 있다. 적멸은 궁극적인 행복을 말한다. 그리고 그것을 이루려면 삶에 대한 관점을 전환해야 한다. 자아가 아니라 타자를 향한 열린 자세가 필요하다. 모든 불행과 파국은 근원을 거슬러 올라가면 한 생각 잘못 쓴 것에서 일어난다. 한 생각 쉬는 그 곳에 진정한 해탈의 길이 있다.

“영원하고 즐겁고 진정한 나이고 청정한 것이 큰 열반이오. 보살이 대자대비한 마음으로 모든 중생을 가엾이 여기고 그들을 부모와 같이 공경하며 괴로운 생사의 바다를 건너게 하고 진실한 가르침을 보여준다면 그것이 큰 열반이오. 따로 구하는 일이 없으니 얻을 법도 없고 허공 속에 두루 차있으니 없는 것 같지만 아무에게나 보여줄 수 있는 것이오. 모든 번뇌를 끊어 지혜가 원만하고 마음은 고요하고 평안합니다.<열반경>”

장영섭 기자 fuel@ibulgyo.com


열반송



시가 형식의 유훈

몸으로부터의 해방

존재 무상함 담아

선사들이 입적하면서 남긴 시가 형식의 유언을 열반송(涅槃頌)이라고 한다. 임종게(臨終偈)라고도 부른다. 많은 스님들이 지나온 생을 털어내며 저마다 독특한 노래를 남겼다. 열반송에는 치열한 수행 끝에 얻어낸 고승들의 대자유가 살아 숨쉰다. 대부분의 열반송은 존재의 무상성을 노래하고 있다. 그러나 말투는 전혀 허무하거나 쓸쓸하지 않고 오히려 기쁘고 후련해 하는 느낌이다. 입적은 자신을 수도 없이 유혹을 들게 하고 괴롭게 한 육체로부터 해방되는 것이기에 즐거울 수밖에 없는 것이다.

“인간의 목숨이란 물거품이니 팔십여 년이 봄꿈 속에 지나갔네 가죽 주머니 (육체)를 버리고 돌아가나니 한 덩어리 붉은 해는 서산에 지고 있네(人生命若水泡空 八十餘年春夢中 臨終如今放皮袋 一輪紅日下西峰).” 고려 말기의 고승 태고보우 스님의 임종게다. “내 나이 76세 세상의 인연에는 지금 만족하구나. 살아서는 천당을 좋아하지 않았고 죽어서는 지옥을 겁내지 않는다. 손까지 놓아버리고 몸은 삼계 밖에서 날 듯이 자유로우니 무엇에 걸리랴(吾年七十六 世緣今已足 生不愛天堂 死不?地獄 撤手橫身三界外 騰騰任運 何拘束).”

천녕도해 스님(1043~1118)의 임종게에도 죽음을 전혀 개의치 않는 기백이 엿보인다. “세상에 나오지 않았을 때는 머리가 말의 구유와 비슷하더니 세상에 나온 뒤에는 입이 당나귀 부리와 같구나. 백년이면 마침내 스스로 무너지는 것이니 천하의 헤아림에 맡겨두도다(未出世 頭似馬杓 出世後 口如驢角 白年終須自壞 一任天下卜度).” 송나라 운개수지 선사의 열반송에도 생사에 연연하지 않는 대장부의 경계가 드러난다.

‘청안청락’은 이번 호로 연재를 마칩니다.



[불교신문 2388호/ 12월26일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