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의 아름다운 문화유산
경주 불국사와 팔만 대장경 외...
불국사 일주문
불국사 다보탑
불국사 다보탑 기단 위 돌사자
불국사 다보탑
경상북도 경주시 진현동(進峴洞) 불국사 경내에 있는 통일신라시대의 화강석 석탑.
1962년 12월 20일 국보 제20호로 지정되었다. 높이 10.4m, 기단 폭 4.4m이다. 불국사 대웅전 앞 서쪽의 석가탑 맞은편에 자리잡고 있는 탑으로, 전형적인 쌍탑가람의 배치이다. 두 탑을 현재와 같이 동서로 나란히 세운 까닭은 '현재의 부처'인 석가여래가 설법하는 것을 '과거의 부처'인 다보불(多寶佛)이 옆에서 옳다고 증명한다는《법화경(法華經)》의 내용에 따른 것이다.
기단부에는 사방에 보계(寶階)를 마련하였고, 보계에는 난간을 가설하였던 석주가 남아 있다. 그 위에는 네 모퉁이와 중앙에 사각 석주(石柱)를 세우고 교차되는 받침을 얹어 갑석(甲石)을 받고 있다. 또 이 기단에는 원래 네 모퉁이에 돌사자를 배치하였으나, 지금은 1구만 남아 있다.
갑석 위에는 사각형 난간 속에 8각 신부(身部)를 두었으며, 다시 8각 갑석을 덮고 8각 난간을 돌린 다음, 그 안에 8개의 죽절형(竹節形) 석주를 돌려 8각 연화석(蓮花石)을 받치고 있다. 연화석 위에는 8개의 주두(柱頭) 모양의 받침으로 옥개석(屋蓋石)을 받고 있다. 상륜부(相輪部)에는 8각 노반(露盤) ·복발(覆鉢) ·앙화(仰花) ·보륜(寶輪) ·보개(寶蓋)가 거의 완전하다.
한국의 석탑 중 일반형을 따르지 않고 특이한 형태를 가진 예로, 이만큼 기발한 의장(意匠)으로 이루어진 걸작은 그 유례가 없다. 건립연대는 서쪽의 석가탑과 마찬가지로 신라 경덕왕(景德王) 때 김대성(金大城)이 중창한 당시인 8세기 중엽으로 추정된다.
증장천왕과 광목천왕
불국사 삼층석탑
귀면 문고리
불국사 관음전
불국사 청운교백운교 수구장치
불국사
불국사
경북 경주시 진현동 토함산 기슭에 있는 절.
대한불교조계종 11교구본사(敎區本寺)의 하나로 그 경내(境內)는 사적 및 명승 제1호로 지정되어 있으며, 1995년 세계문화유산목록에 등록되었다. 경내면적은 11만 7541평이다.
불국사 창건에 대하여는 두 가지 설이 전한다. 그 중 하나는 《불국사고금창기(佛國寺古今創記)》로, 여기에 보면 528년(신라 법흥왕 15) 법흥왕의 어머니 영제부인(迎帝夫人)의 발원(發願)으로 불국사를 창건하여 574년 진흥왕(眞興王)의 어머니인 지소부인(只召夫人)이 절을 크게 중건하면서 비로자나불(毘盧遮那佛)과 아미타불(阿彌陀佛)을 주조하게 하여 봉안하였고, 670년(문무왕 10)에는 무설전(無說殿)을 새로 지어 《화엄경(華嚴經)》을 강설(講說)하였고, 그 후 751년(경덕왕 10)에 김대성(金大城)에 의하여 크게 개수되면서 탑과 석교 등도 만들었다고 하였다.
한편, 《불국사 사적(事蹟)》에서는 이보다 연대가 앞선 눌지왕(訥祗王) 때 아도화상(阿道和尙)이 창건하였고 경덕왕 때 재상(宰相) 김대성에 의하여 크게 3창( )되었다고 하였다. 이상으로 미루어 처음에는 소규모로 창립되었던 불국사가 경덕왕 때의 재상 김대성에 의하여 대대적으로 확장된 것이 확실하다. 《삼국유사(三國遺事)》 권5 <대성효 2세부모(大城孝二世父母)>조에는 경덕왕 10년 김대성이 전세(前世)의 부모를 위하여 석굴암을, 현세(現世)의 부모를 위하여 불국사를 창건하였다고 하였으며, 김대성이 이 공사를 착공하여 완공을 하지 못하고 사망하자 국가에 의하여 완성을 보았으니 30여 년의 세월이 걸렸다고 한다. 당시의 건물들은 대웅전 25칸, 다보탑 ·석가탑 ·청운교(靑雲橋) ·백운교(白雲橋), 극락전 12칸, 무설전(無說殿) 32칸, 비로전(毘盧殿) 18칸 등을 비롯하여 무려 80여 종의 건물(약 2,000칸)이 있었다고 한다.
그러나 《불국사고금창기》에 있는 이 기록을 보면, 글씨도 일정하지 않고 크기도 달라 후대에 첨가된 것으로 추측되므로 여기에 나열된 건물들이 당시 한꺼번에 창건되었다고는 보기 힘들며 오히려 임진왜란 때까지 조금씩 건립된 것으로 추정함이 옳을 것 같다. 1593년 5월 임진왜란의 병화로 2,000여 칸의 대가람이 불에 타버리자 1604년(선조 37)경부터 복구와 중건이 시작되어 1805년(순조 5)까지 40여 차례에 걸쳐 국가적으로 또는 승려들에 의하여 부분적인 중수(重修)가 이루어졌으며 1805년 비로전 중수를 끝으로 그 이상의 기록은 찾을 수 없다. 그러나 조선 후기 국운(國運)의 쇠퇴와 더불어 사운(寺運)도 쇠퇴하여 많은 건물이 파손되고 도난당하는 비운을 겪게 되었다.
일제강점기인 1924년 대규모의 개수공사를 실시하여 다보탑의 해체보수, 법당의 중수 등을 실시하였는데 이때 다보탑 속에 있던 사리장치(舍利藏置)가 행방불명되었고 공사에 대한 기록도 남기지 않았다. 8 ·15광복 후인 1966년 석가탑의 해체복원 등 부분적 보수가 있었다가 1969년 불국사 복원위원회가 구성되고 1970년 2월 공사에 착수, 1973년 6월 대역사(大役事)를 끝마쳤다. 이 공사로 유지(遣址)만 남아 있던 무설전 ·관음전 ·비로전 ·경루(經樓) ·회랑(廻廊) 등이 복원되었고, 대웅전 ·극락전 ·범영루(泛影樓) ·자하문(紫霞門) 등이 새롭게 단장되었다.
불국사 경내에는 다보탑(多寶塔, 국보 20), 3층석탑(국보 21), 연화교 ·칠보교(蓮華橋 ·七寶橋, 국보 22), 청운교 ·백운교(靑雲橋 ·白雲橋, 국보 23), 금동비로자나불좌상(金銅毘盧遮那佛坐像, 국보 26), 금동아미타여래좌상(金銅阿彌陀如來坐像, 국보 27), 사리탑(舍利塔, 보물 61) 기타 많은 문화재가 잔존한다.
모든 사찰이 그러하듯이 여기에 다듬어진 돌들, 나무들, 그리고 적절히 꾸며진 공간(空間)들은 모두 사람의 정성이 깃든 곳이며, 그 정성은 우선 연약한 인간의 비원(悲願)에서 비롯된다. 자신의 구원(救援), 부모의 명복(冥福), 국가와 민족의 안녕, 부처의 가호(加護), 그 모든 것을 비는 절실한 염원(念願)이 이곳 돌 하나하나에 담겨 있다 하겠으며 이러한 정성으로 이룩된 불국사는 신라인이 그린 불국(佛國), 즉 이상적 피안(彼岸)의 세계 그 자체라 하겠다. 이 불국을 향한 염원은 대개 세 가지로 나눌 수 있으니, 하나는 《법화경(法華經)》에 근거한 석가여래의 사바세계(娑婆世界) 불국이요, 다른 하나는 《무량수경》 또는 《아미타경》에 근거한 아마타불의 극락세계 불국이요, 또 하나는 《화엄경》에 근거한 비로자나불의 연화장세계(蓮華藏世界) 불국이다. 이 셋은 각각 대웅전을 중심으로 하는 일곽(一廓)과 극락전을 중심으로 하는 일곽, 비로전으로 종합되는 전체의 구성을 통하여 그 특징적인 표현을 이루어 놓았다.
이곳에 정성을 바친 승려와 선현(先賢)들을 일일이 열거할 수는 없으나 주요한 인물만을 열거하면 불국사를 창건하였다고 하는 영제부인(법명 法流), 절을 중건한 지소부인, 헌강왕비(憲康王妃) 권씨(법명 秀圓), 의상의 제자 표훈(表訓), 불국사의 개조로 불리는 김대성, 탑을 조성한 백제의 예술가 아사달(阿斯達), 그에 대한 애정을 자비(慈悲)로 승화시킨 아내 아사녀(阿斯女), 지금은 불타 없어졌지만 광학장강실(光學藏講室) 벽에 석가상을 수놓았던 경문왕(景文王)의 공주로서 비구니가 되었던 원해(圓海) 등은 모두 이 절에 염원을 건 사람들이다. 고려시대에는 지율(持律)이 엄하기로 이름난 유가학승(瑜伽學僧) 해원(海圓)이 이곳에 살았으며, 조선시대에는 효령(孝寧) ·안평(安平) ·영응(永膺) 등의 대군(大君)과 세종 ·노산군(魯山君), 왕실의 대비(大妃) ·상궁(尙宮) 등의 지성(至誠)이 끊임없이 불국사로 쏠렸다.
불국사 범영루
불국사 석단
불국사 연화교칠보교
불국사 연화교칠보교
경상북도 경주시 진현동(進峴洞) 불국사에 있는 통일신라시대의 화강석 석교.
1962년 12월 20일 국보 제22호로 지정되었다. 연화교 높이 2.31m·너비 1.48m, 칠보교 높이 4.06m·너비 1.6m이다. 불국사 앞, 대석단(大石壇) 동쪽의 청운교(靑雲橋)·백운교(白雲橋) 맞은편 서쪽에 있다. 가구(架構) 수법은 동쪽의 청운교·백운교와 거의 비슷하다. 밑에 있는 연화교는 10단의 층계에 계단식 등형(登 )을 만들어 양분하였고, 양쪽 끝의 등형에는 난간을 설치하였던 흔적이 있으나 지금은 석주(石柱)만 남아 있다. 다리 아래는 호형(弧形)으로 가공한 석재를 사용하여 궁륭형(穹 形) 통로를 만들었으며, 이 석계(石階)에서 특이한 것은 각 계층에 미려한 연판(蓮瓣)이 양각되어 있는 점이다.
칠보교는 8단의 보계(寶階)로 이루어졌고 한 장의 장석(長石)으로 된 등형으로 양분된 점은 연화교와 다르나, 석주가 남아 있어 석난(石欄) 설치의 흔적을 남긴 점은 같은 형식이다. 다만 규모가 작아진 관계로 다리 아래 통로를 설치하지 않았으며, 보계에 특별한 조식(彫飾)도 없다. 칠보교를 올라서면 안양문(安養門)을 지나 극락전을 대하게 되는데, 이 석계는 동석계(東石階)의 장엄함에 비해 우미수려하여 조화와 변화를 주고 있다. 이 석계 또한 동석계와 마찬가지로 경덕왕(景德王) 때 김대성(金大城) 중창 당시의 것으로 추정된다.
감은사지 삼층석탑
경덕왕릉
문무대왕릉
문무대왕릉
경북 경주시 양북면(陽北面) 봉길리(奉吉里) 앞바다에 있는 신라 문무왕의 수중릉(水中陵).
사적 제158호. 대왕암(大王岩)이라고도 한다.
삼국통일을 완수한 문무왕이 유언으로, 자신의 시신(屍身)을 불식(佛式)에 따라 고문(庫門) 밖에서 화장하여 유골을 동해에 묻으면, 용이 되어 동해로 침입하는 왜구를 막겠다고 하였다. 이에 따라 유해를 동해의 대석(大石)에 장사지낸 뒤, 사람들은 왕의 유언을 믿어 그 대석을 대왕암이라고 불렀다.
이 바위에는 사방으로 수로(水路)를 냈는데, 특히 바다 쪽인 동쪽 수로에서 파도를 따라 항상 맑은 물이 흘러들어와 서쪽의 수로를 통해 빠지게 되어 있다. 인공을 가한 것이 분명하며, 그 안에는 넓은 공간이 있고 그 한가운데에 대석을 놓았는데, 바다의 수면은 그 돌을 약간 덮을 정도이다. 유골은 이 돌 밑에 안치하였을 것으로 추정된다.
또한 신문왕(神文王)은 부왕의 뜻을 이어 동해변에 감은사(感恩寺)를 창건하여 불력(佛力)으로 동해의 왜구를 막으려 하였고, 감은사 금당(金堂) 밑에서 동해를 향해 구멍을 뚫어 조수가 금당 밑까지 들어오게 하여, 용이 된 문무왕이 조수를 따라 금당까지 드나들 수 있으리라 생각하였다.
또 대왕암이 바라다보이는 북쪽 언덕 위에는 이견대지(利見臺址)가 있는데, 신문왕은 이곳에서 대왕암을 망배(望拜)하였다.
대석 밑에 어떤 시설이 있는지 알 수 없으나, 중앙의 장골처(藏骨處)를 중심으로 하여 사방으로 수로를 설치한 것은, 석가의 사리(舍利)를 안치한 탑의 형식을 적용하였다고 볼 수 있다.
경주 석빙고
경주 석빙고
경주 석빙고
1738년(영조 14) 경상북도 경주시 인왕동(仁旺洞) 월성(月城)의 북쪽에 축조한 조선시대의 화강석제 얼음창고.
1963년 1월 21일 보물 제66호로 지정되었다. 길이 18.8m, 홍예(紅霓) 높이 4.97m, 너비 5.94m이다. 남북으로 길게 조영하고, 출입구는 남쪽에 있는데 너비 2.01m, 높이 1.78m이다. 여기에서 계단을 따라 실내로 들어가게 되어 있다. 빙실의 밑면도 외부의 형태와 같은 직사각형으로 입구에서 안으로 들어갈수록 밑바닥은 경사져 있으며, 바닥 중앙에 배수구가 있어 내부의 물이 이 경사를 따라 외부로 배출된다.
내부는 연석(鍊石)으로 5개의 홍예를 틀어 올리고 홍예와 홍예 사이에 길쭉한 네모 돌을 얹어 천장을 삼았다. 벽은 직사각형의 작은 석재로 정연하게 쌓아올렸고, 밑부분은 장대석을 연결하여 지대석(址臺石)을 삼아 견실하게 축조하였다. 천장에는 3곳에 환기 구멍을 마련하여 외기와 통하게 하였는데, 조각한 돌로 구멍을 덮어 비와 이슬을 막고 있어 다른 석빙고와는 달리 정연한 양식과 축조를 보여 주목을 끈다. 환기 구멍은 중심부에서 북쪽으로 치우쳐 시설하였는데, 이것은 입구가 남쪽에 있으므로 안으로 내려가는 층계가 몇 단 있어서 그만큼 자리[房]를 차지하고 얼음창고의 주실(主室)은 좀더 깊이 들어간 내부의 북쪽에 있는 까닭이다.
석빙고 옆에는 석비가 있어 축조연대를 알 수 있는데, ‘崇禎紀元後再戊午’는 1738년(영조 14)에 해당하고, 다시 입구의 미석(楣石)에 ‘崇禎紀元後再辛酉移基改築’이라 새겨져 있어, 축조한 지 4년 만에 현위치에 옮겨 개축하였음을 알 수 있다. 현재 서쪽으로 약 100m 되는 곳에 옛터로 전하는 자리가 있다. 조선 후기에 몇몇 석빙고를 축조하였으나, 그 규모나 기법에서 이 석빙고가 가장 정연한 걸작으로 꼽힌다.
석빙고 내부
경주 석빙고 배기통
석굴암 일주문
석굴암
석굴암 석불
석굴암
신라 때 오악(五岳)의 하나인 토함산(吐含山)에 자리잡고 있는 한국의 대표적인 석굴사찰(石窟寺刹).
1962년 12월 20일 국보 제24호로 지정되었다. 정식 문화재 명칭은 석굴암석굴이다. 경상북도 경주시 진현동(進峴洞) 891번지에 있다. 한국의 국보 중에서도 으뜸으로 꼽히는 문화재의 하나이다.
일연(一然)의 《삼국유사(三國遺事)》에 의하면, 석굴암은 8세기 중엽인 통일신라 751년(경덕왕 10)에 대상(大相) 김대성(金大城)이 불국사(佛國寺)를 중창(重 )할 때, 왕명에 의하여 착공한 것으로 되어 있다. 즉, 그는 현세(現世)의 부모를 위하여 불국사를 세우는 한편, 전세(前世)의 부모를 위해서는 석굴암을 세웠다는 것이다. 이는 불교의 인과응보(因果應報) 설화를 기반으로 한 요소가 엿보이는 전설적인 유래이지만, 대상 김문량(金文亮)의 집에 환생(還生)하였다는 김대성은 《삼국사기(三國史記)》에 나타나듯이 경덕왕대에 중시(中侍)로 있었던 김문량이 실존인물임에 비추어, 그의 아들인 김대정(金大正)이 신라의 기명(記名) 방식에 의해 대성과 동일인물인 것으로 추정할 수도 있다.
따라서 김대성은 왕명을 받들어 토함산의 정상을 사이에 두고 동서로 전개하여 불국사와 석굴암이라는 김씨 왕족(金氏王族)을 위한 2대 사찰의 건립에 마지막 생애를 다 바쳤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석굴암은 김대성 생전에 완공을 보지 못하여 그 조영사업은 국가가 마침내 완성시켰다고 한다. 이 점은 분명히 석굴암의 창건이 김대성이라는 개인의 원력(願力)에 의해서 이루어졌다기보다는, 왕실을 비롯한 당시 신라인 모두가 염원한 거족적인 일대 불사(佛事)였음을 알 수 있다
십일면관음
금강역사
첨성대
첨성대
동양에서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천문대.
1962년 12월 20일 국보 제31호로 지정되었다. 경상북도 경주시 인왕동에 소재하며 높이 9.17m, 밑지름 4.93m, 윗지름 2.85m이다. 밑에서부터 4.16m 되는 곳의 남쪽 허리에 한 변이 1m인 정사각형 문이 달려 있다. 모양은 원통형으로 남쪽 문에 사다리를 걸었던 자리가 있다. 30cm 높이의 돌 362개로 27단을 쌓아 만들었다.
내부는 제12단까지 흙이 차 있고, 제19단에서 제20단까지와 제25단에서 제26단까지의 두 곳에 정(井)자형 장대석(長大石)이 걸쳐 있는데 그 양끝이 밖으로 나가 있다. 제27단 내부의 반원(半圓)에는 판석(板石)이 있고, 맞은편에는 판목(板木)을 놓았던 곳으로 보이는 자리가 있다. 판석은 길이 156cm, 너비 60cm, 두께 24cm이다.
꼭대기에는 정자석(井字石)이 2단으로 짜여 있는데, 그 위에 관측기구를 놓았던 것으로 보인다. 혼천의(渾天儀)와 같은 관측기구를 정상에 설치하고 춘분 ·추분 ·동지 ·하지 등의 24절기를 별을 통하여 측정하였고, 정자석을 동서남북의 방위를 가리키는 기준으로 삼았던 것으로 보인다. 한편, 첨성대가 제단이었다는 학설도 있다. 《삼국유사(三國遺事)》에 신라 선덕여왕(善德女王:재위 632~647) 때 건립된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천마총
천마총 내부
안압지
안압지
경북 경주시 인교동(仁校洞)에 있는 신라 때의 연못.
월성(月城)의 북동쪽에 인접하였다. 《삼국사기》 674년(문무왕 14) 조(條)를 보면 궁성 안에 못을 파고 산을 만들어 화초(花草)를 기르고 진금이수(珍禽異獸)를 양육하였다고 하였는데, 안압지는 바로 그때 판 못이며 임해전(臨海殿)에 딸린 것으로 추정된다. 1974년 이래의 준설공사와 고고학적 조사에 의하여 주목할 만한 유구(遺構)와 유물이 발견되었다. 동서 200m, 남북 180m의 구형(鉤形)으로 조성되었는데, 크고 작은 3개의 섬이 배치되었다.
연못 기슭과 섬에 실시된 호안공사(護岸工事)는 정교하고 도수로(導水路)와 배수로의 시설도 또한 교묘하다. 연못 바닥에서 출토된 유물 가운데 와전류(瓦塼類)로서는 신라 특유의 우미(優美)한 무늬가 있는 것이 많은데, ‘儀鳳四年(679)’ 또는 ‘調露二年(680)’의 당나라 연호명(年號銘)이 있는 와전은 중요한 자료이다. 불교 예술품으로서 판상(板狀)의 금동여래삼존상(金銅如來三尊像)과 금동보살상(金銅菩薩像) 등의 우수한 작품이 있고, 유존(遺存)하는 예가 드문 목조의 배, 건축 부재, 목간(木簡) 등의 채취와 그 보존에 성공한 일은 귀중한 공적이다.
안압지
안압지 조감도
황룡사 구층목탑터
팔만대장경 八萬大藏經 (1998, 삼성뮤직)
김수철 1957-현재
세계문화유산인 "팔만대장경 八萬大藏經"
우리나라의 소중한 문화재중 하나인 팔만대장경이 음악으로 만들어 졌다. 서양과 동양의 조화가 어느 앨범 만큼이나 돋보이는 작품. 그의 예술성이 또한 집대성된 음반이다. 전체적으로 신서사이저를 이용한 서양의 소리와 교회음악 연주 때 사용되는 하프시코드, 중국 악기 '얼' 그리고 피리, 아쟁, 태평소, 아쟁, 대금 같은 우리 전통 악기 소리를 조화시켰다.
1. 서곡(序曲) - 다가 오는 검은 구름 (The Gathering Storm) 2. 전장(戰場)에서 (The Tides Od Battle) 3. 구천(九天)으로 가는 길 (Journey To Valhalla) 4. 천상(天上)의 문(門)에서 (At St. Peter's Gate)
[1악장 : 서곡(序曲) - 다가 오는 검은 구름 (The Gathering Storm)]
조용하고 평화롭던 고려에 몽고군의 침략이 다가오고 있음을 예고하는 도입부. 전반부에서는 단조로운 멜로디로 평화로운 시기를 표현하였고 점차 전운이 감도는 상황을 일정한 리듬의 타악기로 나타냈다. 1장의 막바지에는 큰 북을 사용해서 전쟁의 불안감, 긴박감, 공포를 표출하여 전쟁이 임박했음에 대한 암시로 비극을 표현하는 장엄한 멜로디가 그야말로 감동의 절정을 이룬다.
[2악장 : 전장(戰場)에서 (The Tides Od Battle)]
우리 소리와 서양의 소리의 조화가 두드러진 악장. 우리 악기로는 태평소, 아쟁, 피리, 오고북, 대북 등이, 중국 악기로는 얼후(Erhu)를 사용하였고 서양 음악의 뿌리라 할 수 있는 교회 음악의 합시코드 소리 및 오케스트라 형식이 조화롭게 구성되도록 작곡되었다. 몽고의 침입, 폭력의 극단적인 표출인 전쟁은 침략한 자, 침략 당한 자 모두의 인간성을 파괴한다. 무명(無明)과 탐욕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인간 군상들.
[3악장 : 구천(九天)으로 가는 길 (Journey To Valhalla)]
침략한 나라나 침략 당한 나라나 모두 전쟁으로 인한 인간성 파괴를 겪게 된다. 전쟁 과정에서 인간을 해치며 죄를 짓게 되지만, 인간의 본성으로 그에 대한 수치심과 참회로 희망의 싹을 피어낼 수 있다. 이러한 과정을 synthesizer를 이용해 우주적인 사운드로 표현하였다. 전반부는 인간의 수치심과 참회를 또 후반부는 희망을 상징하고 있다. 부처님 가르침의 그릇인 '팔만대장경'에는 좋은 세상을 열망하는 고려인의 의지가 담겨있다. 영원한 평화가 없듯 영원한 구속도 존재하지 않는다. 희망이 없는 곳에서 희망을 찾아내는 것, 이 또한 인간이 일구어낸 자랑스런 역사 중 하나이다.
[4악장 : 천상(天上)의 문(門)에서 (At St. Peter's Gate)]
위기와 국난이 극복되고 하늘로부터 다시 기회가 주어졌다. 이 기회를 소중하게 감사드리는 마음으로 가꿔 나가야 한다. 이 악장은 클래식 장르로 작곡되었고 '참회의 눈물' 부분에서는 우리 악기 '피리' 소리로도 표현되도록 작곡되었다. '사랑으로 극복하자' 는 메시지는 장엄한 오케스트라 형식으로 표현되었다. 팔만대장경의 조성과 그로 인한 평화, 몽고 침략의 와중에 마침내 팔만대장경이 완성되고, 그 결집된 힘으로 국난을 극복하게 되었다. 고난은 새로운 창조의 원동력이 된다.
가수 김수철, 팔만대장경 테마음악 완성
해인사, 깊은 산사의 팔만대장경. 그 경판 하나하나엔 장엄한 역사의 소리가 숨쉬고 있다.
이 땅을 침탈하려는 몽골군의 말발굽 소리, 끌려가던 고려 여인들의 호곡(號哭)소리, 국난 극복의 염원이 담긴 기도 소리, 그리고 지상의 모든 어둠을 감싸안고 우주에 울려 퍼지는 부처님의 자비와 평화의 원음(圓音)….
그 대장경 소리의 거룩함이 7백여년 세월을 견뎌내고 여기 이 땅에 찾아왔다.
대중음악계의 ‘작은 거인’ 김수철(41). 그가 팔만대장경을 상징하는 테마음악을 작곡했다. ‘팔만대장경 음악 1집.’
이 작업은 대장경 전산화 작업을 벌이고 있는 고려대장경연구소(소장 종림스님)의 부탁으로 이뤄졌다. 작업 기간 2년반. 불교에 문외한이었던 그에게 이번 작업은 구도(求道)의 길이기도 했다.
지난 겨울, 해인사의 소리를 담기 위해 밤을 지새운 게 몇날 며칠인지 모른다. 살포시 부는 미풍에도 맑게 울리는 풍경 소리, 새벽 3시 세상의 아침을 깨우는 종소리, 비구니들의 은은한 기도 소리, 물소리, 바람소리.
그의 ‘소리 실험실’이자 ‘구도의 도량(道場)’이었던 서울 강남구 포이동 지하스튜디오. 인류에게 희망과 빛을 주는 팔만대장경의 소리를 찾기 위해 태평소, 아쟁, 오고북, 중국 악기 얼후 등 동서양의 갖가지 소리에 대한 실험이 진행됐다. 하루 열네시간, 자장면으로 식사를 때우는 고독한 작업이었다.
그 긴긴 대장정을 끝낸 14일 서울 조계사 대웅전. 드디어 팔만대장경 음반 1집을 부처님께 바치는 고불식(告佛式)이 열렸다. 참석한 3백여 청중들은 장중하면서도 맑고 신비로운 우주의 소리를 들으며 깊은 명상에 잠겼다. “팔만대장경은 불교만의 유산도, 우리 민족만의 유산도 아닌 인류 전체의 유산입니다. 전쟁과 살육의 고난을 평화와 자비의 힘으로 극복하려 했던 팔만대장경의 정신을 담으려고 노력했습니다.”
〈전승훈기자〉 |
Introduction
대장경이란 ‘부처님의 가르치심’의 총칭으로 경(經), 율(律), 논(論)의 삼장(三藏)으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경(經)은 부처님의 말씀이며, 율(律)이란 불교도의 생활규범이며, 논(論)은 경과 율에 대한 조사들의 논문입니다.
대장경은 고려시대에 두 차례에 걸쳐 국가 사업으로 간행되었습니다. 먼저 간행된 구판(舊版) 대장경은 1011년에 부처님의 위신력으로 거란의 침공을 물리치려는 발원에서 비롯된 것으로써 1087년까지 무려 칠십육년에 걸쳐 이루어졌는데, 중국의 정경에 견주어 그 무렵으로서는 내용이 가장 완벽한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팔공산(八公山) 부인사(符仁寺)에 봉인된 이 구판 대장경은 고종 19년인 1232년에 몽고군의 방화로 그만 불타버리고 말았습니다. 그로부터 오년 뒤인 1236년에 다시 본격적으로 대장경 간행 불사를 추진하여 1251년에 그 완성을 보게 되니, 십육년에 걸친 이 큰 불사의 결실이 바로 지금 해인사에 보관되어 있는 고려대장경입니다.
완성된 고려대장경은 처음에는 강화도에 모셨으나 왜구의 노략질이 심해져서 서울의 지천사(支天寺)에 옮겼다가 그 뒤 조선시대 태조임금 �인 1398년에 해인사로 다시 옮겨 모신 것입니다.
고려대장경을 흔히 팔만대장경이라고 하는 까닭은, 대장경의 장경판수가 팔만여장에 이르는 데에서 비롯되기도 했을 터이지만 한편으로는 불교에서 아주 많은 것을 가르킬 때 팔만사천이라는 숫자를 쓰는 용례대로, 가없이 많은 부처님의 가르침을 팔만사천 법문이라고 하는 데에서 비롯되었다고 합니다.
팔만대장경의 첫번째 음악은 팔만대장경이 하나의 종교적 의미를 초월한 세계인류의 문화유산이라는 점에 기인하여 서양의 소리와 우리의 소리가 함께 어우러지는 음악을 작곡하고자 노력했습니다. 각 장의 영문 제목번역은 서양인의 이해를 돕기 위해서 서구의 기독교 신앙과 북구신화에서 나오는 상징어를 사용했습니다.
98년4월 김수철
세계문화유산인 "팔만대장경" 가없이 많은 부처님의 가르침과 국난극복이라는 민족의 염원과 의지로 만들어진 팔만대장경이 음악 으로 표현되었다. 팔만대장경의 첫 번째 음악은 팔만대장경이 하나의 종교적 의미를 초월한 세계인 류의 문화유산으로 전 세계인이 함께 들을 수 있도록 우리의 소리와 서양의 소리가 함께 어우러지 는 음악으로 작곡되었다. 전체적으로 신시사이저를 이용한 서양의 소리와 교회음악 연주 때 사용되는 합시코드, 중국악기 '얼후', 그리고 우리 전통악기 피리, 아쟁, 태평소, 아쟁, 대금 등의 소리를 조화시켰다.
- 김수철 공식 홈페이지 -
Credits
팔만대장경 pal.man.dae.jang.kyung 高麗大藏經
김수철: producer, all synthesizers, ertu(Chinese Instrument) 김성운: 피리, 태평소 백인영: 아쟁 전병기: programming and samples 강명환: recording engineer 최종문: recording engineer 임창덕: mixing engineer 오현석: mixing engineer sonic Korea: mastering studio zho&zho: design
타악기 연주자 여러분들과 그 외에 도움을 주신 분들께 감사드립니다.
팔만대장경이 음악으로 표현되었습니다. 아는 팔만소리가 조화로이 움직이는 법계(法界)그 자체입니다. 그 법계의 소리가 온누리에 맑고 깨끗하며 희망차게 널리 울려퍼지길 바랍니다.
송 월주 총무원장(대한불교 조계종 총무원장)
세계 여러 문화유산 가운데 음악으로 표현되는 팔만 대장경. 이제 보다 많은 사람들이 듣고 아끼며 우리문화에 대한 자부심과 긍지를 가질 것입니다.
강원룡 목사(크리스찬 아카데미 이사장)
세계화의 길목에서 진통을 겪고 있는 우리는 이제 국난극복의 불심이 낳은 팔만대장경을 소리로 듣게 되었습니다. 김수철님의 정성스런 작곡으로 창조된 한국인의 기원은 시간과 공간을 뛰어넘어 온 세계인의 마음을 적시게 될 것입니다.
이 어령 교수(전 문화부 장관)
얼씨구 여기 고려대장경이 노래하누나 춤 구누나 함께 노래하고 춤추자꾸나
고은(시인)
새로이 울려퍼지는 이소리 바로 우리의 소리 입니다. 우리와 함께 세계인이 듣고 즐기는 하나된 소리로 시간과 공간을 묶는 힘이되고 21세기를 두드리는 우리의 소리로 태어나기를 기대합니다.
종림스님(고려대장경연구소 소장)
For centuries, scripture and music have joined in a sacred partnership It is exciting to see the ancient blocks of the Korean Buddhist canon being celebrated with a modern composition. This music helps us to experience the wonder of this historic national treasure. 옛날부터 문자와 음악은 신성한 동반자의 관계로 맺어져 왔었습니다. 고려 대장경 연구소로부터 고대 경판의 내용들이 현대 음악으로 표현되어 발표된다는 사실을 듣고는 무척 흥분되었습니다. 이번에 작곡된 음악 작품은 우리들이 세계적 문화유산인 고려 대장경의 경이로운 역사를 이해하는데 큰 도움을 줄 것입니다.
Lewis Lancaster(U.C. Berkeley 대학교수) 세계전자불전협의회회장
98.4월 제작 |
유네스코에 등재된 세계유산, 세계기록유산, 그리고 세계무형유산을 기준으로 평가한다면 한국은 최고 수준의 문화선진국이다. 국토의 면적이나 인구에 비해 볼 때 등재된 유산의 숫자가 결코 적지 않다. 그러나 이런 사실은 외국인들은 물론 한국인들에게조차 제대로 알려져 있지 않다.
유네스코에 세계유산으로 등재된 문화유산은 104개국 582건인데, 창덕궁 등 7건을 등재한 한국보다 많은 문화유산을 등재시킨 나라는 18개국 정도이다. 유네스코에 세계기록유산으로 등재된 것은 45개국 91건으로, 한국이 등재한 훈민정음, 조선왕조실록, 승정원일기, 직지심체요절 등 4건 보다 많은 유산을 등재한 나라는 독일, 러시아, 오스트리아, 그리고 폴란드 4개국뿐이다. 세계무형유산에 있어서는 한국의 위치가 더욱 빛나고 있다. 한국은 판소리와 종묘제례 및 종묘제례악을 등재시켰다. 유네스코에 세계무형유산으로 등재된 것은 41개국 47건에 불과하며, 한국이 등재한 2건 보다 많은 유산을 등재시킨 나라는 하나도 없다. 다섯 개 나라가 한국과 동일하게 2건씩을 등재시키고 있을 뿐이다.
인류전체를 위해 보호되어야 할 세계 수준의 문화유산, 기록유산, 무형유산을 상대적으로 많이 보유하고 있는 민족이나 국가는 자긍심과 함께 책임감도 느껴야 한다. 즉 이러한 문화유산의 존재와 가치를 세계인들이 제대로 인식하게 하고, 나아가 이들을 보호하는 노력을 함께 기울여야 하는 것이다. 이를 통해 자국의 역사와 문화가 지닌 독특성이나 우수성은 매우 자연스럽게 세계인들의 머리와 가슴에 자리를 잡을 것이다.
이 책은 현재 한반도 내에 남아 있거나 혹은 한민족에 의해 창조된 문화적 흔적으로서 유네스코에 등재된 14점을 통해 한국의 역사와 문화를 외국인들에게 총체적으로 소개하는 데 목적이 있다. 여기에 소개되고 있는 14점의 문화유산, 기록유산, 무형유산은 선사시대로부터 근대에 이르기까지 한국의 역사 5천년을 균형 있게 보여주고 있다.
영어, 중국어, 스페인어로 발간될 이 책을 통해 외국인들의 한국역사와 문화에 대한 이해 수준이 향상되고, 한국에 대한 이미지가 개선되기를 기대해본다.
다섯번째 세계문화유산 "해인사 장경판전(海印寺 藏經版殿)"
해인사 장경판전은 고려 대장경판을 8만여 장을 보존하는 보고(寶庫)로서 해인사의 현존 건물 중 가장 오래된 건물이다. 장경판전은 세계 유일의 대장경판 보관용 건물이다. 해인사의 건축기법은 조선 초기의 전통적인 목조건축 양식이다. 건물 자체의 아름다움은 물론, 건물내 적당한 환기와 온도·습도조절 등의 기능을 자연적으로 해결할 수 있도록 설계되었다.
9세기 초에 세워진 고려는 외세의 간섭과 도움 없이 독자적인 힘으로 후삼국을 통일하였다(936). 고려의 후삼국통일은 발해의 영토까지 모두 포괄하는 것은 아니었지만 자주적이었으며 발해 주민을 수용했다는 점에서 커다란 의의를 가지는 것이다. 또한, 고려의 통일은 20세기 중반 한반도가 남북으로 분단되기 전까지 유지되었던 단일한 국가체제의 시작점이었다.
고려 태조 왕건은 후삼국을 통일하는 과정에서 각 지방 호족(豪族)들의 지원과 지지를 얻었다. 이들 호족세력은 자신들의 권력을 유지·세습하는 데 유리한 제도를 만들어 귀족화 되었다. 고려사회는 문벌 귀족중심의 사회였으며 이들의 요구를 충족시키기 위한 청자·나전칠기 등의 예술품이 발전하였다. 이러한 고려의 특산품은 인삼·종이 등과 함께 송(宋)으로 수출되었고, 송으로부터는 비단·향료·서적 등이 수입되었다. 고려에는 아라비아 상인들이 오가며 고려라는 국명을 국제적으로 전파하기도 하였다. 오늘날 한국의 외국어 명칭인 코리어는 고려에서 유래된 것이다.
고려시기 470여 년은 1170년에 일어난 무신의 난을 기준으로 하여 전기와 후기로 구분할 수 있다. 고려의 문벌 귀족들은 점차 정치권력을 독점하고자 하였고, 그 결과 왕실 및 다른 귀족들과의 충돌이 잦았다. 12세기 초반 일어난 여러 반란사건은 모두 소수 문벌귀족들의 권력독점과 왕권의 약화를 배경으로 하여 나타난 것이었다. 이러한 난을 겪으면서도 문벌 귀족 중심의 사회체제는 모순을 더해갔으며, 문제를 해결하고자하는 적극적 개혁의 시도는 없었다.
문벌 귀족 중심의 정국운영은 문신들의 우대와 무신들의 천시로 이어졌다. 이에 불만을 품은 무신들은 12세기 후반 문신들을 살해하고 정치권력을 장악하였다. 이후 무인들 사이에 다시 치열한 권력 다툼이 벌어졌고, 무신정권은 매우 불안정하였다. 정국의 불안정은 최충헌(崔忠獻)이 정권을 장악하며 해소되었다. 최충헌의 집권 이후 권력은 최씨가문에 세습되어 4대 62년간 최씨 무단통치가 이루어졌다. 90여년에 걸친 무신통치시기에는 한국 역사상 가장 많은 민란이 발생하였으며, 천민 등 민중의 저항으로 무신정권의 지배체제가 흔들리기도 하였다.
그러나 체제 개혁을 이루지 못한 상황에서 13세기 전반 몽고의 침략이라는 국가적 위기가 닥쳤다. 무신정권은 강화도(江華島)로 수도를 옮기며 40년간 몽고에 항전했으나 결국 항복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 과정에서 무신정권도 무너졌다. 이후 고려의 국정은 원(몽고는 1271년에 元으로 국호를 바꿨다)의 간섭아래 운영되었다. 70여 년간 원의 간섭아래에서 고려사회는 많은 변화가 생겼다. 원의 영향으로 고려에는 몽고의 풍습이 들어왔고, 원의 필요에 의해 고려 국왕을 교체하는 등 고려 국왕의 지위가 불안해지자 사회모순은 더욱 증폭되며 고려 말의 혼란상을 낳았다.
대장경판은 고려 고종(高宗)때 만든 목판이다. 대장경은 경(經)·율(律)·논(論)의 삼장(三藏)으로서 불교경전의 총서(叢書)를 가리키는 말이다. 일반적으로 해인사 대장경판은 고려시대에 판각되었기 때문에 고려대장경이라 하며 또한 판수가 8만여 판에 이르고 8만4천 법문을 수록했다 하여 8만대장경이라고도 한다. 11세기 초 고려 현종(顯宗) 때 새긴 초조대장경(初雕大藏經)이 몽고의 침입에 불타버려 다시 새겼다하여 재조대장경(再雕大藏經)이라 일컫기도 한다. 초조대장경이 불타버리자 13세기 초 몽고의 침입을 부처의 힘으로 막기 위하여 강화도로 수도를 옮기고 국가적인 차원에서 대장도감(大藏都監)을 설치하여 대장경판을 다시 조각하기 시작하였다. 대장경판은 12년 동안 판각하였는데 준비기간을 합치면 모두 16년이란 기간이 걸려 완성된 것이다.
고려시대에는 주로 목판인쇄를 하였는데, 목판인쇄는 동일한 인쇄물의 수요가 많은 곳에서는 매우 편리한 방법이었다. 판각을 한번 해놓으면 인쇄에 편리하고, 비교적 오랜 기간 보관하였다가 다시 인쇄할 수 있기 때문이다. 고려는 불교나 유교의 각종 서적을 출판하기 위해 신라의 목판인쇄술을 계승·발전시켰다. 이것은 불경 등의 인쇄가 크게 성행하였고, 또한 귀족문화의 영향으로 많은 서적을 수집·보관한 것에서 원인을 찾을 수 있다. 이러한 고려의 목판인쇄물 중 가장 대표적인 것이 대장경이다. 대장경판은 당초 경상남도 남해에서 판각하여 강화도 대장경판당으로 옮기고 보관하였으나, 고려 말 왜구의 빈번한 침범으로 인해 14세기말에 현재의 해인사 장경판전에 옮겨 보관 중이다.
해인사 장경판전은 15세기 무렵 조선 초기에 건립된 후 한번도 화재나 전란 등의 피해를 입지 않았으며, 팔만대장경이 고스란히 간직되어 있다. 장경판전의 건물 배치는 정면 15칸이나 되는 큰 규모의 두 건물을 남북으로 나란히 배치한 구조이다. 장경판전 남쪽의 건물을 수다라장(修多羅藏), 북쪽의 건물을 법보전(法寶殿)이라 하며 동쪽과 서쪽에 작은 규모의 동·서 사간판전(寺刊版殿)이 있다.
건물을 간결한 방식으로 처리하여 판전으로서 필요로 하는 기능만을 충족시켰을 뿐 장식적 의장을 하지 않았으며, 전·후면 창호의 위치와 크기가 서로 다르다. 통풍의 원활, 방습의 효과, 실내 적정 온도의 유지, 판가의 진열 장치 등이 매우 과학적이며, 합리적으로 되어 있는 점은 대장경판이 지금까지 온전하게 보존되어 있는 중요한 이유 중의 하나라고 평가받고 있다.
이 판전에는 81,258장의 대장경판이 보관되어 있다. 글자 수는 무려 5천2백만 자로 추정되는데 이들 글자 하나하나가 오자·탈자 없이 모두 고르고 정밀하다는 점에서 그 보존가치가 매우 크며, 현존 대장경 중에서도 가장 오랜 역사와 내용의 완벽함으로 세계적인 명성을 지니고 있는 문화재이다. 대장경판전은 1995년 12월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록되었다.
팔만대장경은 불교의 경·율·논 삼장을 집대성하였기에 세계불교연구의 귀중한 문헌으로, 이 대장경은 일본이 신수대장경(新修大藏經)을 만들 때 표준으로 삼았으며, 중국에도 역수입되고, 영국·미국·프랑스·독일 등 서구에도 전해져 세계불교 연구에 커다란 영향을 끼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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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REP. of KOREA) : 7건 |
1. |
석굴암과 불국사 ( Seokguram Grotto and Bulguksa Temple : 문화, 1995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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ㅇ 경주 토함산 중턱에 위치한 8C경 석굴로 내부 본존불상은 결가부좌한 채 동해바다를 응시하고 있다 ㅇ 석굴 내부 벽면에는 11면 관음보살을 비롯한 보살과 10대 제자들이 매우 사실적이고 섬세하게 조각되어 있는 극동 불교 예술의 진수 ㅇ 불국사는 석굴암과 같은 시기인 752년에 건립된 것으로 종교 건축의 예외적 의미를 지니고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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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
종묘 ( Jongmyo Shrine : 문화, 1995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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ㅇ 조선왕조 역대 왕과 왕후의 신위를 모신 세계에서 가장 오래되고 권위있는 유교적 전통 신전 ㅇ 종묘의 건축은 16C이후 현재까지 원형을 잘 보존유지하고 있으며 종묘제례는 음악과 춤이 어우러진 제례의식으로서 14C이래 오늘에 이르기까지 면면이 전통이 계승되어 내려오고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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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
해인사 장경판전 ( Haeinsa Temple Janggyeong Panjeon, the Depositories for the Tripitaka Koreana woodblocks : 문화, 1995)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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ㅇ 가야산 해인사에는 1237∼1249년까지 제작된 불교경전의 결집체인 8만 여장의 대장경 목판이 보관되어 있다 ㅇ 장경판전은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보관 시설로서 보존기술과 장치가 과학적 으로 설계된 15C의 뛰어난 건축물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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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
창덕궁 ( The Changdeokgung Palace Complex : 문화, 1997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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ㅇ 조선 3대 태종 5년(1405년) 경복궁의 이궁으로 지어진 궁궐 ㅇ 1610년 광해군때 부터 정궁으로 쓰이게 된 뒤 1868년 고종이 경복궁을 복원할 때까지 258년동안 조선의 역대 왕들이 정사를 보살폈던 법궁 ㅇ 돈화문, 선정전, 인정전 등과 함께 우리나라의 대표적인 전통 조원시설인 후원이 유명하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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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
수원 화성 ( Suwon Hwaseong Fortress : 문화, 1997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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ㅇ 조선 22대 왕인 정조가 자신의 아버지 사도세자의 무덤을 화산으로 옮긴 후 축조한 성, 성의 둘레는 5,744m, 면적은 130ha ㅇ 축성시 거중기, 녹로 등 신기재를 사용 ㅇ 화성은 중국, 일본 등지에서 찾아볼 수 없는 평산성의 형태로 군사적 방어 기능과 상업적 기능을 함께 보유하고 있으며 시설의 기능이 가장 과학적이고 합리적이며, 실용적인 구조로 되어 있는 동양 성곽의 백미라 할 수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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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
경주역사유적지구 (Gyeongju Historic Areas : 문화, 200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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ㅇ 신라시대 천년의 문화적 업적과 불교 및 세속건축의 발달을 보여주는 뛰어난 유적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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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 |
고창·화순·강화 고인돌유적 (Gochang, Hwasun and Ganghwa Dolmen Sites : 문화, 200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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ㅇ 기원전 2∼3천년전의 장례 및 의식유적을 만들어냈던 선사시대 기술 및 사회발전을 생생히 보여주는 뛰어난 유적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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