참고실/역사의기록

학계 “무령왕릉 이후 백제 최고의 발굴”

淸潭 2007. 10. 25. 11:08

학계 “무령왕릉 이후 백제 최고의 발굴”

 

왕흥사터 백제 사리함에서 금장식·구슬 등 수천점 나와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완형의 사리장엄구(舍利莊嚴具·사리를 담은 용기)가 1430년 만에 발굴됐다. 국립부여문화재연구소(소장 김용민)는 24일 “부여 왕흥사터 목탑 기초(심초석·心礎石) 부분에서 서기 577년(위덕왕 24년)에 제작해 넣은 사리장엄구와 각종 장식품 등을 발굴했다”며 “온전한 모습을 갖춘 백제의 사리장엄구가 발굴된 것은 처음”이라고 했다. 안휘준 문화재위원장 등 전문가들은 “무령왕릉 이후 백제 최고의 발굴”이라며 흥분을 감추지 못했다.

왕흥사터 목탑은 예전에 사라졌지만 발굴 결과, 가로 세로 14m에 이르던 장대한 탑이었다. 사리장엄구는 청동으로 된 사리합(직경 7.5㎝, 높이 8㎝) 안에 은으로 된 사리병을 넣고, 그 안에 다시 금으로 된 사리병을 담은 ‘3중 세트’ 형식이었다. 이 중 청동 사리합 몸체에는 한자를 29자 새겼다. 내용은 “정유년(577년) 2월 15일, 죽은 왕자를 위해 백제왕 창(昌·위덕왕의 생전 이름)이 절을 세웠다. 사리를 2매 넣고자 했는데, 부처님의 조화로 사리가 셋이 됐다”(丁酉年二月十五日 百濟王昌爲亡王子 立刹 本舍利二枚葬時 神化爲三)였다. 백제 왕의 이름이 적힌 유물(명문·銘文)이 발굴된 것은 무령왕릉 출토품(1971년 발굴)과 역시 창왕의 이름이 적힌 사리감(사리를 안치한 용기·1994년 발굴) 이후 세 번째이다.

  • ▲ 청동사리합 바깥 부분에 적힌 명문(銘文). /문화재청 제공

이 명문으로 인해 ▲왕흥사터 사리장엄구는 삼국 최고(最古)이며 ▲왕흥사는 삼국사기 기록처럼 서기 600년이 아니라 577년에 창건됐고 ▲위덕왕에게는 일본서기(日本書紀)에 나오는 아좌 태자 외에도 577년 즈음에 사망한 또 다른 왕자가 있었다는 사실 등이 새로 밝혀졌다.

사리장엄구 주변에서는 각종 금 장식과 귀고리, 액막이(진묘수·鎭墓獸)형 장식, 구슬 등 진단구(鎭壇具·건물을 세울 때 액을 막기 위해 넣는 것)도 나왔다. 출토된 구슬은 낱개로 8000점이 넘는다.

  • ▲ 1430년 만에 햇빛을 본 백제 왕흥사 목탑터에서 나온 사리장엄구이다.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것이다. 청동사리합(맨 뒤) 안에 은제 사리병(가운데)을 담고, 그 안에 다시 금제 사리병을 넣었다. 청동사리합에는 백제왕 창(昌·위덕왕의 생전 이름)이 죽은 왕자를 위해 탑을 세우고 사리장엄구를 넣었다고 기록했다. /부여=허영한 기자 younghan@chosun.com

위덕왕(재위 554~598)은 45년간 백제를 통치했지만, ‘가족사’는 불운했다. 삼국사기와 일본서기에 따르면, 그는 왕자 시절 고구려 장수를 베고 병사와 함께 침식했던 용감하고도 다정한 인물이었다. 그러나 관산성(충북 옥천) 전투를 이끌던 자신을 위로하고자 출병했던 아버지 성왕이 매복한 신라군에게 살해되자 스님이 되려 했지만 신하들의 만류로 즉위(30세)했다. 53세 즈음에 아들이 죽는 아픔을 겪었던 그는 왕흥사 목탑 사리장엄구를 둬 아들의 영혼을 달래려고 했다. 위덕왕의 사후, 그의 아들들은 왕위를 잇지 못했다.

  • 우리나라 최고의 사리장엄구가 나온 백제 왕흥사터 발굴 현장 모습. /신형준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