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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00년 역사 속살 드러낸 미륵사지 석탑 '부활의 꿈'

淸潭 2007. 10. 7. 09:03

1400년 드러낸 미륵사지 석탑 '부활의 꿈'역사 속살

 

 

백제 무왕 창건 국내 最古·최대 석탑… 해체에만 12년 걸려 2014년 완전 복원

 

 
 ◇해체되기 전의 미륵사지 석탑.(오른쪽 하단 사진)
전북 익산시 금마면 기양리의 미륵사지.

눈부실 정도로 청명한 가을 하늘이 배경이 되어도, 미륵사지는 무척이나 고적(孤寂)해 보였다. 6만6000㎡(2만평)에 달하는 이 거대한 절터에 눈에 보이는 건물이라고는 동쪽의 9층석탑과 서쪽의 석탑을 둘러싼 덧집(콘테이너 박스)뿐이다. 지금도 매년 수십만명의 관람객이 찾고 있다지만, 이 절터에 제대로 생기가 돌려면 서쪽 탑(미륵사지 6층석탑)이 하루속히 제 모습을 되찾아야 할 것 같다.

이 덧집 안에서 미륵사지 석탑의 해체공사가 진행 중이다.

국보 11호인 미륵사지 석탑은 우리에게 가장 친숙한 문화재 중 하나다. 초등학교 교과서에 등장하는 데다 수학여행지로도 많이 찾아 역사 유적에 별 관심이 없는 사람도 한 면이 콘크리트로 덮혀 있던 탑의 모습을 어렵지 않게 기억해 낸다.

1400여년 전 백제 무왕 때(600∼641년 재위) 세워졌다는 높이 14.2m, 사방 길이 12.8m의 이 석탑은 한국에서 가장 오래된 석조 건축물이요, 동아시아 전체에서도 가장 큰 석탑이다. 본래는 9층이었던 것으로 추정되며, 17세기 이전에 붕괴돼 1915년 일본인들이 무너진 부위를 콘크리트로 보강해 놓았다.

1998년 12월 안전진단에서 붕괴 위험이 있다고 판단돼 1999년 4월 해체·정비를 결정했다. 당시 책정된 예산은 모두 80억원이었으며, 예상 공기는 10년. 2004년까지 해체작업을 마무리하고 2007년까지는 복원을 마친다는 계획이었다. 전라북도가 먼저 3년간 덧집 설치 등 사전 준비작업을 했고, 국립문화재연구소가 2001년 10월부터 사업을 대행하게 됐다.

그러나 2002년 4월부터 본격화된 해체 작업은 그 기간이 무한정 늘어나기 시작했다. 현재 국립문화재연구소 산하 미륵사지석탑 보수정비사업단(사업단)은 아무리 서둘러도 2009년 말은 되어야 해체를 끝낼 수 있을 것으로 보고 있다. 복원공사를 마치고, 덧집 철거 등 마무리 공사까지 하려면 2014년은 될 것으로 예상했다. 1998년부터 계산하면 해체에만 무려 12년이 걸리고, 복원까지는 17년이 소요되는 셈이다. 사업단은 예산도 70억원이 추가로 필요하다고 판단한다.

한국에서 단일 건물 문화재 해체·복원에 이 정도 시간이 걸린 전례가 없다. 미륵사지 석탑같이 큰 석조물을 해체한 경우가 없었을 뿐 아니라, 최신 기법을 동원해 부재(部材·석탑에 쓰인 재료) 하나하나를 세밀히 조사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공사 기간과 예산이 크게 늘어나다 보니 비난의 목소리도 나오기 시작했다.

사업단의 김덕문 학예연구관(49)에 따르면 해체작업 기간이 늘어난 이유는 크게 네 가지.

우선 일본인들이 보강해 놓은 콘크리트 양이 엄청나게 많았다. 당초 두께를 30∼40㎝로 예상했으나, 실제로는 최대 4m나 됐다. 콘크리트 양만 185t에 달했다. 또 콘크리트가 부재에 견고히 붙어 있어, 정밀드릴을 사용해 일일이 수작업으로 떼내야만 했다. 특히 해체 전에는 탑을 구성하는 부재가 1000여 개일 것으로 예상했으나, 실제로는 3000개에 달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2∼6층에서 약 1200개의 부재가 나왔고, 1층에서는 이보다 훨씬 많은 부재가 나오고 있다. 또 1층에 쌓은 석축은 붕괴 위험이 있어 보강공사와 해체작업을 병행한다는 것이다. 전례가 없는 사업이다 보니, 사전에 정확한 예측이 어려웠다는 얘기다. 김 연구관은 “2009년까지는 해체작업을 마칠 계획이지만, 실제 작업을 하다 보면 더 오래 걸릴 수도 있다”고 말했다.

무왕이 쇠락해가는 백제의 부흥을 꿈꾸며 세웠다는 미륵사. 1400여년의 세월 속에서 살아 남아 미륵사를 상징하던 석탑의 웅장한 모습을 언제나 다시 볼 수 있을까.

익산=글·사진 박창억, 그래픽 윤대영기자


미륵사지석탑 해체작업 어떻게 진행되나
첨단장비 총동원 실측도면만 15만장 '산더미'
 
 ◇미륵사지 전경.
황량한 절터에 덩그러니 탑 두 기만 남아 있는 미륵사지. 재미와 흥취가 있는 곳이 아닌데다 이 절터의 ‘주인’인 서탑도 제 모습이 아니지만, 여전히 사람들이 발길이 이어진다. 백제시대 가장 극적인 설화의 주인공인 무왕의 자취를 되짚어볼 수 있는 데다 해체 중인 거대한 석탑이 색다른 볼거리, 체험거리가 되기 때문일 게다. 5층 건물 높이의 덧집 안으로 들어가면 지금껏 한번도 보지 못한 광경과 맞닥뜨린다.

미륵사는 백제시대 최대 규모의 가람으로, 무왕과 선화공주의 설화가 깃들어 있다. 신라 진평왕의 셋째딸인 선화공주를 연모해 서동요를 퍼뜨린 서동이 훗날 무왕이 돼 미륵사를 창건했다.

미륵사 창건 과정은 ‘삼국유사’에 기록되어 있다. 삼국유사는 “무왕이 왕비와 함께 용화산 사자사를 방문하는 길에 연못에 미륵삼존이 나타났다. 왕이 이곳에 큰 절을 짓고자 하니 지명법사가 하룻밤 새 연못을 메우고 세 개의 금당과 세 개의 탑을 가진 커다란 가람을 조성하였다”고 적고 있다. 용화산은 바로 미륵사 뒷산으로, 지금은 미륵산으로 불린다.

절집은 오래전에 소실됐고 현재는 돌계단과 초석 몇 개만이 남아 있지만, 미륵사는 창건 당시 그 위용이 대단했을 것으로 짐작된다. 백제의 국운이 기울던 시기에 즉위한 무왕은 신라를 10여 차례나 공격하고 왕권을 강화하는 등 백제 중흥에 진력했다. 무왕이 자신의 재위 시절 높아진 백제의 위상을 과시하기 위해 벌인 대규모 역사가 바로 미륵사 창건이다.

◇연못에 비친 미륵사지 석탑의 덧집.(왼쪽)◇재래식 기중기에 매달린 부재.

미륵사의 탑은 원래 3기였다. 동서에 석탑이 하나씩 있고 가운데에 목탑이 있었으나, 동탑과 목탑은 흔적만 남았다. 서탑은 7세기 목탑에서 석탑으로 이행하는 과정을 충실하게 보여주고, 목탑처럼 돌을 깎아 세운 기술이 정교해 미술사적으로도 중요한 문화재다.

동탑은 1993년 9층 높이로 복원됐으나, 실패한 문화재 복원의 대표 사례로 꼽힌다. 유홍준 문화재청장이 “최악의 문화재 복원 사례”라고 개탄했을 정도다. 서탑(미륵사지 석탑)이 어떻게 복원될지 더욱 관심이 쏠리는 이유이기도 하다.

# 균열·생물침해 조사 카드 일일이 작성

덧집 안으로 들어서면 여러 번 놀라게 된다. 2∼6층까지는 해체작업을 마쳤고, 현재 1층 부분만 남아 있는 탑은 형체를 알아볼 수 없을 정도로 파헤쳐져 있다. 덧집 5층 위에 올라 석탑을 내려다보면 그 웅장한 규모에 다시 입이 벌어진다.

절터 곳곳에는 석탑을 해체하며 나온 1200여 개의 부재가 도열해 있다. 최대 3t에 달하는 부재에는 모두 번호표가 붙어 있다. 학생들을 중심으로 한 해 50만∼60만명에 달한다는 관람객들은 석탑과 부재를 흥미로운 표정으로 꼼꼼히 살펴본다.

해체 작업은 드잡이공 홍정수(70·문화재수리 기능자 제190호)씨가 주도한다. 홍씨는 22살 때부터 48년간 돌 만지는 일을 해 온 국내 최고수 중 한 명. 서울 숭례문 해체·복원, 덕수궁 담장 보수, 현충사 석축공사, 불국사 보수, 충렬사 담장 공사 등 그의 손을 거친 공사는 헤아릴 수 없을 정도다.

홍씨가 부재를 안전벨트로 묶으면 대형 호이스트(기중기)가 돌을 들어 나른다. 큰 석재를 안전하게 묶어 운반하는 데는 많은 경험과 숙련된 기술이 필요하다. 홍씨는 “평생을 석조건축물 해체와 운반일을 해 왔지만, 이렇게 규모가 큰 탑은 처음”이라며 “제대로 해체하고 복원했다는 평가를 받고 싶다”고 말했다.

◇미륵사지에 늘어서 있는 1000여개의 부재.

# 절터 곳곳에 떼어낸 1200여개 부재 도열

해체에 앞서 연구원들은 부재의 위치와 형태를 조사하고 기록한다. 이때는 광파측정기와 3D 스캐너 등 첨단 장비가 동원된다. 광파측정기로는 기준점에서 각 부재 모서리에 찍어놓은 세 점에 레이저를 쏘아 돌아오는 시간으로 3차원상의 위치를 파악한다. 3D 스캐너로는 가상공간에 석탑의 형상을 복원할 수 있도록 입체 형상을 얻어낸다.

해체 후에는 모든 부재의 실측도면을 작성한다. 부재 위에 아크릴판을 갖다 대고 실물 크기대로 도면을 그리는 것이다. 6면체를 모두 그린 다음 트랜싱지(습자지의 일종)에 다시 옮겨 그리고, 이것을 스캔해 이미지 파일로 변형한다. 지금까지 그린 도면은 5만5000장에 달하고, 해체작업을 마치면 모두 15만장에 이를 것이라는 게 김덕문 연구관의 설명.

또 부재는 모두 건식세척을 하고, 부재별로 균열·생물침해 여부 등을 조사해 일일이 조사카드를 작성한다. 해체공사 전후에 이같이 손이 많이 가기 때문에 해체작업은 통상 열흘이나 2주일에 한 번씩 진행된다. 한번 작업 때마다 뜯어내는 부재 수도 20∼30개에 불과하다.

해체작업이 늦어지다 보니 복원 방식도 결론을 내지 못하고 있다. 학계와 문화계에서는 해체 전 상태로 복원, 6층석탑으로 완벽한 보수, 9층석탑 복원 등 세 가지 방안을 놓고 논의를 거듭하고 있다.

국내 최대·최고 석탑의 해체·복원 작업은 이래저래 힘들고 지루한 과정의 연속인 것 같다.

익산=글·사진 박창억 기자 daniel@segye.com

 

◇미륵사지 석탑에서 떼어낸 화강암 부재.

문화재 복원 사업에는 정도 차이는 있지만 늘 논란이 수반된다.

초기부터 학계와 현지 주민들의 비상한 관심을 모았던 미륵사지 5층석탑 해체·복원사업도 마찬가지. 1998년 해체 결정 때부터 찬반 논란이 적지 않았던 상황에서 최근 공사 기간과 예산이 크게 늘어나자 논란이 증폭되고 있다.

최근 국립문화재연구소가 공기를 7년 연장하고 70억원의 예산을 추가로 요구하자, 전북지역 일부 언론과 도의회 등에서 강하게 불만을 표출하고 나선 것. 이들은 “복원사업을 못하는 것인지, 안 하는 것인지 분간할 수 없다”, “‘세월아 네월아’식으로 사업을 추진하는 것 아니냐”고 연구소 측을 거칠게 비판하고 있다.

이들은 석탑 해체·복원 과정을 ‘굼벵이걸음’이라고 비판하며 그 이유로 ▲조직·예산 타령만 일삼는 문화재청의 나몰라라식 태도 ▲(공사를 맡긴) 전북도의 전문성 부족 ▲전문가 그룹의 신중함을 빙자한 소극적 태도 등을 꼽고 있다.

그러나 국립문화재연구소와 미륵사지 석탑 보수정비사업단 측은 “해체 과정을 전혀 모르고 하는 소리”라며 반발하고 있다. 김덕문 연구관은 “문화재 해체·복원 공사를 아파트 짓듯이 할 수는 없는 것”이라며 “해체 자체가 역사의 기록인 만큼 대강대강 할 수는 없지 않으냐“고 반문했다. 미륵사지 석탑보다 훨씬 작은 경천사지 10층 석탑의 해체·복원에 10년이 걸렸다는 점도 상기시키고 있다.

드잡이공 홍정수씨도 “사상 초유의 대규모 공사를 벌이며 실제 공사 기간을 5∼6년 정도만 책정한 것 자체가 잘못”이라고 지적했다. 계속되는 논란에 부담을 느낀 연구소 측은 당초 2010년 8월까지 1층을 모두 해체한다는 계획이었지만, 1층에서 변형이 심한 부분만 해체하고 안정된 부분은 해체하지 않는 방향으로 가닥을 잡아가고 있다. 1층 해체 범위를 축소하면 2009년 말까지 해체작업을 마칠 수 있다는 것이다.

이 같은 논란과 관련해 다수의 학계 전문가들은 “선진국에서도 문화재 복원에는 당초 예상보다 시간이 많이 걸리는 경우가 비일비재한 만큼 시간적 여유를 갖는 게 필요하다”며 “소요 시간보다는 얼마나 제대로 복원하고 내용성을 확보하느냐가 훨씬 더 중요한 문제”라고 강조했다.

 

익산=박창억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