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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조대왕이 깜짝놀란 사연

淸潭 2007. 4. 29. 18:34
 

정조대왕이 깜짝놀란 사연

 

할아버지가 왕위에 재위한 기간이 52년이나 되니, 얼마나 끔직한 일들이 많았겠는가? 할아버지 영조가 옛 사람으로는 드물게 80이 넘게 장수하면서 극심한 당쟁의 폐해를 극복한다며 탕평책을 쓰고 왕권의 강화를 위해 노력했지만 반세기가 지나서도 당쟁의 뿌리는 뽑히지 않았고, 그 와중에 자신의 생부인 장헌세자가 뒤주 속에 갇혀 숨지는 모습을 바라보아야 했던 정조, 세손으로 있으면서 당시 큰 세력인 시파와 벽파 사이에서 목숨을 잃지 않기 위해서도 아무 말 도 못할 고충을 겪은 정조는 즉위하자마자 하고 싶은 것이 너무나 많았다.

 

1776년 3월, 25살의 나이에 왕위에 오른 정조는, 당쟁 속에서 억울하게 죽은 아버지의 존호를 높이고 묘소를 옮기는 한편, 그 때까지 꿈꾸어왔던 규장각을 궐내에 설치하는 작업에 곧바로 들어갔다. 규장각을 설치하기 위해서 먼저 할아버지가 정무를 보던 경희궁에서 창덕궁으로 본궁을 옮기고, 그 후원에 주합루(宙合樓)와 여러 서고 건물들을 지으면서 규장각을 마련한다. 이 규장각은 표면상으로는 역대 국왕의 글과 글씨를 한자리에 모아놓는다는 것이지만 실제로는 젊고 유능한 학자들을 모아서 이들에게 새로운 국정과제를 맡김으로서 이들을 통해 새로운 정치기반을 마련하자는 뜻이 더 컸다.

그를 위해서 정조는 당색(黨色)을 초월해 학식이 높은 사람을 모아 우대하였다. 왕은 이들에게 아무리 높은 사람이 옆에 오더라도 일어서지 않아도 좋다는 특권을 부여하며 열심히 연구하도록 했고, 이런 왕의 비호를 받아 젊은 학자들은 서적을 새로 모으고 이들에 대한 연구를 통해 조선왕조가 지니고 있던 구조적(構造的)인 모순에 대한 비판과 재검토를 하였다.

정조가 이같은 규장각 제도를 설치한 것은 애당초 중국 송나라의 제도를 본 딴 것이지만, 이 제도가 자리를 잡아가던 정조 5년 8월 18일, 정조는 규장각 직제학인 심념조(沈念祖)로부터 이 규장각이란 제도가 중국의 것만이 아니라 이미 세조대왕 때에 양성지(梁誠之)라는 신하가 주장한 것임을 듣고는, 깜짝 놀랐다.

"지금 처음으로 들어서 알았도다. 그 때의 규모가 오늘날의 것과 모의하지 않았는데도 똑같으니 이는 참으로 이상한 일이다"

라고 말한 정조는, 자신의 오랜 집념을 사전에 그토록 면밀하게 건의한 양성지란 사람이 궁금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래서 그에 관한 자료를 구해 오라 해서 읽어보니 뜻밖에도 그의 건의가 너무나 많은 부문에서 획기적인 것이 많았던 데에 다시 깜짝 놀란다. 그래서 그의 문집을 펴내라고 명령을 내리는데, 이미 모아져 있다고 하자, 그러면 그것을 간행하라고 다시 명령하고 양성지의 문집인 <눌재집(訥齋集)>에 서문을 써서 그의 탁견을 기린다.

"일찍이 들었노라. 제도를 만드는 것이 어려운 것이 아니요, 제도를 경영하는 것이 어려우며, 만들어낸 자는 지혜롭다 여겨지기 어려우며, 이룬 자는 신통하다는 말이 이를 두고 이른 것인가? 내가 처음 규장각을 설치할 때에 어떤 이는 '제도를 만들 때에 우리나라의 전례를 따라야지 하필 송나라 것을 따를 필요가 있겠습니까?' 하였다. 내가 '좋다'하고 이에 대제학을 지낸 문양공 양성지가 세조에게 올린 것 중에서 세조가 양성지의 말이 행할 만 하다고 칭찬한 것을 취하여 조정에 내린 다음 조정의 의논이 이루어졌고, 이에 규장각의 제도가 이루어졌다. 그러니 이 규장각의 제도를 경영한 것이 문양공이다. 정말 신통스러울 뿐이다....

실제로 양성지는 세조에게 다음과 같이 건의한다

"이 신은 또 그윽이 보건대, 임금의 어필(御筆)은 운한(雲漢)과 더불어 그 소회(昭回)함이 같으며, 규벽(奎璧)으로 더불어 그 찬란함이 같으니, 만세(萬世)의 신자(臣子)들이 마땅히 집을 세워서 보존해야 하는 것입니다. 송조(宋朝) 성제(聖製)의 예로는 모두 집을 세워 간직하였으되, 관(官)을 설치하여 이를 관장하게 하였습니다. 태종(太宗)은 용도각(龍圖閣)이라 하고, 진종(眞宗)은 천장각(天章閣)이라 하고, 인종(仁宗)은 보문각(寶文閣)이라 하고, 신종(神宗)은 현모각(顯謨閣)이라 하고, 철종(哲宗)은 휘유각(徽猷閣)이라 하고, 고종(高宗)은 환장각(煥章閣)이라 하고, 효종(孝宗)은 화문각(華文閣)이라 하여, 모두 학사(學士) 대제(待制) 직각(直閣) 등의 관직을 두었습니다. 바라건대, 이제 신 등이 어제시문(御製詩文)을 마감하여 올립니다. 인지당(麟趾堂)의 동쪽 별실(別室)에 이를 봉안(奉安)하고 규장각(奎章閣)이라 이름하소서. 또 여러 책을 소장하고 있는 내각(內閣)을 비서각(秘書閣)이라 이름하여, 모두 대제학(大提學) 제학(提學) 직각(直閣) 응교(應敎) 등의 관직을 두소서."

정조는 이처럼 규장각제도가 양성지의 발의에 의한 것임을 알고, 그의 문집을 간행하도록 한 것은 물론, 양성지의 외손들을 잇달아 기용했는데, 그 수가 33명이나 되었다고 하니 얼마나 양성지를 흠모했는지를 알 수 있다. 여기서 우리는 의문에 접한다. 규장각을 발의한 공은 그렇다고 치는데, 그의 후손까지 기용할 정도로 정조가 양성지에게 빠진 이유는 무엇일까?

 

창덕궁 후원의 주합루-맨 처음 규장각이 설치된 곳이다.

 

그 이유를 알려면 양성지가 누구인가를 다시 보아야 한다.

양성지는 조선초기 세종~성종대까지 활약한 학자이자 문신으로 본관은 남원, 자는 순부, 호는 눌재(訥齋)이다 또한 스스로 호를 '송파'라 하기도 했다. 1441년 진사시, 생원시에 합격, 이어 식년시에 급제하면서 관직에 오르게 된다 벼슬은 문신으로서의 최고 영예직인 대제학(정2품으로 '문형'이라고도 함)에까지 올랐는데 우리가 양성지에 대해 주목해야 할 대목이 있다. 그것은 바로 양성지가 일관되게 조선의 자주성을 제고하고자 했고 또한 시종 이를 견지해 나갔다는 것이다 양성지가 살았던 15세기는 소위 명나라와 조선의 주종관계가 확립되어 가던 시기였다 그러한 시대상황에서의 양성지의 행보는 시사하는 바가 크다

1456년 6월 집현전이 폐지되면서 양성지는 세자좌보덕으로 옮기게 되는데 이때에 즈음하여  

"명나라에서 우리나라에 국서를 보낼때 혹 왕이라 일컫기도 하고 경이라 일컫기도 하더니 문종대에 와서는 이여(爾汝:너)라고 부르니 통분스럽기 짝이 없다 명에 항의를 해야한다"

라고 역설하며 명나라의 오만함을 서슴없이 성토한 것이다.

그리고 양성지의 저서 [눌재집] '논군도십이사(論君道十二事: 임금의 길 12가지)'편에 보면 민족주체성을 강조하는 취지의 방안을 제시하기도 한다.

그의 주요한 생각을 언급해 보면

 

첫째 우리의 역사를 바로 알고 우리의 역사에서 배우는 슬기를 지녀야 한다.

"동방의 사람이 한갖 중국에 성(盛)한 것이 있는 줄만 알고 동국(東國)의 일을 상고할 줄 모르니 대단히 옳지 못하다 바라건대 전조(고려)태조의 구민(求民)이나 성종의 정제(定制) 현종의 수성문종(守成文宗)의 양민을 모범으로 삼아야한다"

 

둘째 우리의 주체적인 풍속을 보존해야 한다

"우리 동방은 대대로 요수의 동쪽에 살아 만리지국(萬里之國)이라 불리어졌다. 3면은 바다로 막혀져 있고 1면은 산을 짊어지고 있어 구역이 저절로 나뉘어지며 풍기도 또한 다르다 단군이래 관청을 베풀고 고을도 두어 주체적인 교화의 덕을 폈다 전조(고려)의 태조는 신서(信書)를 만들어 나라사람을 가르쳤고 의관과 언어는 모두 본래 지닌 풍속을 따랐다 만약에 의관 언어가 중국과 다르지 않다면 민심이 안정되지 못할 것이다"

 

셋째 문묘에 우리의 선현을 많이 배향해야 한다

"대개 우리나라에 기자(箕子)가 봉함을 받은 후로 홍범 유교가 오래도록 퇴색되지 않았다 당에서는 '군자지국'이라 했고 송에서는 '예의지방'이라 일컬었다 문헌의 아름다움이 중화를 짝할 만한데도 문묘에 배식(配食)하는 자가 설총, 최치원, 고려의 안향 세 사람 뿐이다" (여기서 양성지는 최충, 이제현, 정몽주, 권근 등을 배향해야 한다고 주장함)

넷째 국가의 체통을 세울 것

중국과 마찬가지로 제천행사를 주관할 것과 임금의 탄생일을 황제의 예로 "절(節, 즉 국경일)"로 할 것 그리고 상신(相臣)을 우대하고 왕실에 존호를 올릴 것을 주장한다.

그는 우리나라가 단군이라는 독자적인 민족시조를 가지고 있고, 단군이래 역사적으로 정치적 자치를 유지해왔으며, 문화적으로도 기자(箕子) 이후 중국과 대등한 수준으로 발전되어 군자의 나라라는 명칭을 들었으며, 언어·의관·풍속 등도 중국과 다르다고 했다.

따라서 우리나라는 중국의 제후국(諸侯國)이기는 하지만 천자의 직접통치를 받는 기내(畿內)의 제후가 아니라 정치적 자유와 독자적인 역사와 문화를 가진 민족국가로서의 제후라고 주장했다. 따라서 중국에 대한 사대는 힘의 강약에서 오는 불가피한 현상이지만 그 방법과 자세는 엄격한 한계가 있어야 한다고 믿었다. 즉 사대는 국가의 자주성과 독립성을 지키고, 국리민복에 지장을 주지 않는 한도 내에서 실행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나아가 중국과 마찬가지로 번부악(藩部樂)을 설치하여 우리의 번방(藩邦)에 해당하는 일본과 여진의 음악을 채용할 것을 주장했다. 《고려사》 편찬에서도 고려시대의 독자적인 연호나 묘호(廟號)를 참칭(讒稱)이라 해 바꿀 필요가 없으며 국가도서(國家圖書)에 독자적인 연호를 제정하여 기재할 것 등을 주장했다.

자칫 문약(文弱)에 빠질것을 경계하고자 문무여일(文武如一) 정책을 주장했다.

문과 무를 똑같이 존중하자는 것이다. 이러한 맥락에서 양성지는 문묘와 마찬가지로 무묘를 세워 신라의 김유신, 고구려의 을지문덕, 고려의 유검필, 강한찬,양규, 윤관, 조충, 김취려, 김경손, 박서, 김방경, 안우, 김득배, 이방실, 최영, 정지, 조선의 하경복, 최윤덕 등을 배향하자는 안을 내놓기도 한다. "문선왕 공자는 향사하면서 무성왕 강태공은 왜 제사하지 않는가. 무성묘도 문묘처럼 설치하고 신라·고구려·고려·본조의 맹장들을 배향으로 하여 향사하라"고 주장한 것이다.   고구려 유속을 본받아 봄에는 3월 3일, 가을에는 9월 9일에 교외에서 사격 대회를 열어 사기를 드높이고 무풍(武風)을 장려하자고 했으니, 확실히 당시 사회로 보아 일대 경종이 아닐 수 없었다.

 

규장각도 김홍도 그림

 

양성지는 26세에 벼슬을 시작해 68세로 생애를 마칠 때까지 세종에서 성조에 이르는 6명의 국왕을 보필해 40여 년 간 관직에 있었고, 이때에 올린 상주문은 330여 조에 이르고 있다. 이 상주문에서 그는 경학·사학·문학·병학·지리·의학·음악·농법 등 다양한 분야에 대한 폭넓은 관심과 깊이를 보여주고 있다.

그 중 사학(史學)은 그가 가장 큰 관심을 기울인 분야였다. 단군 이래의 민족사 정립과 교육을 강조해 문과시험에 중국사와 더불어 《삼국사기》·《고려사》 등을 부과할 것과, 국왕의 경연(經筵)에서 국사를 강의할 것을 여러 번 진언했다. 그는 요즈음 표현으로 하면 대륙사학자였다. 요수(遼水)의 동쪽이 우리 강역의 일부임을 주장하고 이를 수복해야 한다는 입장까지 지니고 있었다. 역사를 우리의 눈으로 보니까 역사가 새로 보인 것이었다. 세조가 즉위 다음 해인 1456년 7월에 조선단군(朝鮮檀君)의 신주(神主)를 조선시조단군(朝鮮始祖檀君)의 신위(神位)로 고쳐 정하고, 후조선시조(後朝鮮始祖) 기자(箕子)를 후조선시조 기자의 신위로 고쳐 정하고, 고구려시조를 고구려시조 동명왕의 신위로 고쳐서 정하게 한 것도 양성지의 건의에 따른 것이었다.

세종조부터 성종조까지 6조에 걸쳐 역임하는 동안에 문교(文敎)에 끼친 공로는 제외하고라도, 정치 의견과 언론 어느 것이나 다 당시를 일깨우고 후세의 거울이 되지 않음이 없었다. 그리하여 세조는 그를 ‘해동의 제갈량(諸葛亮)’이라고까지 하였다. 때로는 '왕좌지재(王佐之才)'가 있다고까지 했다. 항상 역사의 현실에 착안해 나라를 위하는 긴요한 도리를 꿋꿋이 주장했고, 당시에 사리를 가장 똑바로 이해한 경륜가였다. 중국 고대의 요순(堯舜)만을 유일한 이상적 군주로 떠받드는 시절에 단군을 국조로 모셔 받들기를 주장했으며, 중국의 역사만을 일반 교과서로 사용하던 시절에 우리의 동국사(東國史)도 배울 것을 역설하기도 하였다. 감히 생각하기 어려운 경지가 아닐 수 없다.

 

정조대왕의 태실

 

왕실의 해묵은 당쟁을 혁파하고 새로운 개혁을 실천하겠다고 다짐한 정조로서는 바로 이런 공의 재주와 능력이 보였을 것이다. 그러므로 그의 문집을 간행하고 그 외손들을 중용함으로서 그의 뜻이 곧 양성지에 있음을 천명한 것이다. 아마도 홍국영에게 그런 마음을 보였는지 모른다. 그러나 홍국영은 너무 강하다 부러졌고 양성지는 성종조까지 수를 누리며 그가 닦은 경륜을 폈다. 어쩌면 조선조 초, 중기 세조부터 성종까지의 화려한 역사는, 그의 경륜에 의한 것이라고까지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양성지의 갖가지 건의는, 당시 강력한 힘을 당시로서는 너무나 대담한 것이었을 것이다. 지금 보면 다 옳은 탁견이지만 당시로서는 결코 쉽게 채택하기 어려웠을 것이다. 양성지의 문무 동등의 대우 문제만 해도 그렇다. 그의 건의는 결국 실현을 이루지 못하고 점점 '숭문천무(崇文賤武, 문을 숭상하고 무를 천시한다)'의 풍습을 이루어 조정과 온 국민이 문약에 빠지는 결과를 빚었으며 마침내 준비 없는 나라로 만들어 뒷날 왜구의 침략을 앉아서 당하게 하였음은 역사가 가르쳐주고 있다. 지녔던 세조로서도 들어주기가 쉽지 않은 대목이 있었다.

 

 

최근 광화문 편액을 박정희 전대통령이 쓴 한글에서 정조의 글씨로 바꾼다는 소식이 전해지면서 갑자기 정조가 부각이 되고 있다. 호사가들은 지난해 10월경 유홍준 문화재청장이 노무현 대통령과 창덕궁 후원을 거닐며 독대할 당시, 정조가 세운 규장각을 안내하며 “정조는 개혁정치를 추진했고 소장학자들을 양성했으며 수원 화성으로 천도하려 했다는 점에서 대통령과 닮은 점이 많다”는 말을 건넸다는 소식까지 흘러나왔다. 

그러나 저러나 정조가 개혁을 많이 한 것은 사실이다. 정조는 재위 기간동안 규장각을 통해 방대한 양의 저술사업을 전개하였다. 역사서, 지리서, 축성에 관한 것, 왕조의 의례관계에 관한 것들뿐만 아니라, 영조 때 편찬한 『동국문헌비고』를 증보하여 『증보동국문헌비고』를 편찬하였다. 이외에도 규장각 각신들로 하여금 중요 정사를 매일 기록하도록 함으로써 『일성록』을 작성하기 시작하였다. 또한 1781년(정조 5)에는 강화도 외규장각을 설치하여 역대 왕실 의궤들의 원본을 안치하여 영구보전을 꾀하기도 하였다.

정조는 1785년(정조 9)에는 역대 법전들을 모아 『대전통편』을 편찬하여 법치의 기반을 다지기도 하였다. 또한 1791년(정조 15)에는 신해통공(辛亥通共)이라는 조치를 내림으로써 시전상인들의 특권을 없애기도 하였다. 이는 도시로 모여든 이농인구가 중소상인으로 자리잡아가자, 상업활동에 균등한 기회를 부여하려는 목적으로 단행되었다고 한다.

정조는 이런 바탕 위에서 인재를 기르고 한 단계씩 개혁정책을 폈다. 그는 강력한 힘을 기초로 해야 바른 개혁을 이룩할 수 있다고 보고 군사지휘권의 일체화를 도모했다. 당시 군사 조직은 5군영으로 나누어져 있었다. 5군영의 장수들은 군사동원에서 군무직의 최고 책임자인 병조판서의 지휘를 받지 않았다. 따라서 장수들은 5군영의 군사들을 가병(家兵)처럼 부릴 수 있었다. 정조는 5군영을 3군영으로 개편하고 그 지휘권을 병조판서에게 주었다. 또 새로운 군부대인 장용영을 설치해 친위부대로 만들었으며 그 책임자를 근신으로 임명했다. 장용영은 왕궁이 있는 서울과 서울 주변의 방위임무를 맡았다. 장용영의 군사는 특별히 정예병으로 양성했다. 아주 의미심장한 새 군영의 설치였다. 그는 결국 병조판서와 장용영을 직접 지휘할 수 있게 하여 군사 동원의 일원화를 만들어냈다. 이렇게 해서 무예를 진작시키고 자신이 직접 군을 동원할 수 있게 했다.

 

수원화성

 

이러한 강력한 개혁이 있었기에 정조는 조선왕조의 르네상스를 이룩할 수 있었던 것이다. 사상계를 젊은 피로 바꾸고 국방을 장악해 한 손에 쥐게 되니 과거처럼 권신들에 의해 좌지우지되는 일이 없어진 것이다.

그리고는 평소의 신념대로 누란의 위기에서 나라를 구한 충무공 이순신에 관한 기록을 모아 <이충무공전서(李忠武公全書)>를 펴낸 것을 비롯해 《김충장유사(金忠壯遺事)》, 《임충민실기(林忠愍實記)》, 《양대사마실기(梁大司馬實記)》 등을 편찬 ·간행하였다. 왕조 전기에 만들어진 《삼강행실도》와 《이륜행실도》를 합쳐 《오륜행실도(五倫行實圖)》로 편찬 간행하고 향촌질서 유지에 필요한 각종 의례들을 종합 정리하여 《향례합편(鄕禮合編)》을 펴내게 했다. 이 많은 저술들의 출판을 위해 임진자(壬辰字)·정유자(丁酉字)·한구자(韓構字) ·생생자(生生字:목활자)·정리자(整理字)·춘추관자(春秋館字:철자) 등 여러 가지 자체의 활자를 80여 만 자 이상 만들었다.

  정조의 뛰어난 점은, 모든 그의 사상이나 정책, 과거의 모든 역사 등을 모두 기록으로 남긴 점이다. 1793년 아버지 묘소인 현륭원 참배를 계기로 비변사로 하여금 원행정례(園行定例)를 저술하게 하여 원행의 절차, 행렬 규모와 의식 등을 정례화하고, 1795년 잔치의 모든 사실은 《정리의궤통편(整理儀軌通編)》으로 남겼다. 아버지의 묘소를 지키기 위한 도시로 화성을 수원에 새로 쌓으면서 그 전 과정과 재료, 목수, 도구 등을 일일이 기록한 《화성성역의궤(華城城役儀軌)》를 남김으로서 수원 화성이 임진왜란 때 파괴됐다가 다시 복원돼 오늘 날 유네스코가 지정한 세계문화유산으로 다시 사랑 받는 길을 일찍이 열어놓았다. 자신의 저술·강론 등도 수년 전부터 각신들에게 편집을 명하여 생전에 《홍재전서(弘齋全書)》 100권으로 정리되도록 했다.

그러나 재위 18년째인 1794년에 부스럼이 생긴 것이 격무와 과로로 피부를 파고 들며 심해져 1800년 6월 28일에 49세로 일생을 마쳤는데, 이 짧은 생애동안 그가 한 일은 너무나 많았다. 이 때 이렇게 일찍 죽은 것에 대해서도 말이 많아, 현대의 역사학자인 이덕일은 정조가 그러한 개혁을 주도하다 노론 권신들에 의해 독살당했다는 주장을 하고 있는 것이다(이덕일 지음 누가 왕을 죽였는가 1998 푸른 역사 참조).

 

광화문 편액의 교체문제를 계기로 정조가 다시 부각된 것은 기이하지만 의미가 있다고 생각된다. 개혁을 표방하는 노무현 대통령 자신이 정조에 대해서 자세히는 모른다고 한 만큼, 차제에 정조에 대해서 공부를 해 보기를 권해드리고 싶다. 그의 개혁의 의지와 방법, 그리고 그것을 실천하기 위한 경륜도 함께 공부하실 수 있기를 기대한다. 그 정조의 개혁의 큰 그림이 양성지라는, 조선조 초중기의 신하에서 비롯되었음에, 양성지의 글과 사상을 기록한 <눌재집>을 읽어보시라고 권하고 싶다. 옛 사람들은 한 나라의 지도자에게 무엇을 요구했는지를 알 수가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광화문 편액에 정조의 글씨를 모아서 붙이는 것이, 세간에서 말하듯이, 노무현 대통령에게 아부를 하려는 것일 수야 있겠는가. 아부가 아니라 노대통령에게 정조에 대해 리마인드, 곧 자꾸 생각나게 하려는 뜻이 있기 때문으로 보이기도 한다. 유홍준 청장은 “역대 제왕의 남은 글씨 중 정조대왕의 글씨는 가장 지적이고, 어필(御筆·임금의 글씨) 중 최고로 꼽힌다”는 이유라고 설명했지만 말이다.그런 면에서 이번 시비가 그런 정치적인 논란에만 머물러서는 안되겠다는 생각이 든다. 차제에 500년 조선왕조에서 세종 다음으로 어진 문치를 편 정조대왕을 우리가 좀더 잘 아는 계기가 되는 것이 필요하고, 그것을 거슬러 올라가면서 양성지라는 사람에 대해서도 같이 연구하고 이를 현실에서 비교해 혹시 우리의 시각이나 정책에 참고할 만한 점이 없는가 살펴보는 기회로 활용된다면 광화문 편액 파동은 우리나라를 위한 더 없이 좋은 사건이 되지 않겠는가?

이동식의 東窓열면 을 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