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문학/책 속의 향기

’분홍 리본의 시절’

淸潭 2007. 3. 10. 09:48

서늘한 시선으로 바라본 고립된 사람들

 

권여선 신작 소설집 ’분홍 리본의 시절’

    • “네가 진정 가슴을 치고 울어본 적이 있느냐. 남자나 실연 때문이 아니라 네 하찮음, 네 우열함, 네 교정되지 않는 악마성 때문에 입술이 새파래지도록 삶을 저주해본 적이 있느냐. 하루하루 아침에 눈을 뜨는 것이 지옥인 시체의 삶을 살아본 적이 있느냐.”(75쪽)

      작가 권여선(42)씨가 신작 소설집 ’분홍 리본의 시절’을 냈다. 소설집에는 보통의 사람이 아니라 스스로 또는 타인이나 가족에 의해 중심에서 벗어나게 된 사람들의 이야기가 실렸다.

      표제작에는 “벗을 고르는 데 까다로운 편”이고 “별 볼일 없는 인간들과 사귀느니 차라리 혼자 있는 게 낫다고 자위할 줄 아는 능력”을 가진 ’나’와 나의 대학 선배, 선배의 아내가 등장한다.

      나는 선배가 다른 여성과 바람을 피웠고 그래서 이 여성이 임신한 사실을 알고 있으며 이 여성에게 병원비를 빌려주기까지 했다. 하지만 선배의 아내에게는 그 사실을 말하지 않았다.

      이제 그 사실을 알게 된 선배의 아내는 나를 찾아왔고 이후 “그녀에게서 터져나온 말인지 내게서 터져나온 말인지 알 수 없는 말들”이 쏟아져나왔다. 진정 가슴을 치고 울어본 적이 있느냐는 것이다.

      ’약콩이 끓는 동안’은 “주변 사람들과 사이좋게 지내는 일이 점점 힘들다는 걸 느꼈”고 “세상을 이어주는 유일한 통로라면 대학원 업무를 전담하고 있는 박조교 정도”인 한 여성 대학원생 ’윤서영’이 교통사고를 당하기까지의 과정을 묘사했다.

      윤서영은 사고로 휠체어 신세를 지게 되자 학교측으로부터 논문지도특강이라는 업무를 갖게 된 ’김교수네’를 드나들던 중이었다.

      작가는 사고 이후 윤서영의 모습을 연민이 담기지 않은 서늘한 시선으로 적었다. “뺑소니 사고를 당한 여학생은 아침에 순찰을 도는 경비원에게 발견될 때까지 밤새 잔디밭에 누워 있었다고 했다. 척추를 다쳐 몸은 꼼짝 못했지만 의식은 또렷했다고 했다.”(115쪽)

      이번 소설집에 수록된 단편에는 주로 남들과 스스럼없이 어울리는 여성이 아니라 타인과 쉽게 교제하지 못하는 여성들이 등장한다.

      ’가을이 오면’의 주인공은 “규칙을 알아내는 데도 오래 걸렸고” 거기에 “타인의 말을 액면 그대로 믿”어버리는 ’로라’다. “어머니는 어려서부터 그녀에게 가혹할 정도로 주변 사람들에게 잘 보여야 한다고 가르쳤다.”

      또 다른 단편 ’문상’에는 “머릿속에 살짝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깊고 은밀한 접촉을 당한 듯 불쾌해지는 질감의 소유자”인 ’우정미’라는 여성이 등장한다.

      ’솔숲 사이로’에서는 단식원에서 일하게 된 ’그’가 주인공이다. 그는 “눈썰미가 좋고 손재주가 뛰어나”지만 “말이 너무 모자라고 단순하고 투박”했다. 어느날 그가 사라지자 단식원 직원들은 그로 인해 저마다 마음의 공백을 느낀다.

      수록작 일곱 편 가운데 ’가을이 오면’은 지난해 황순원문학상 최종심에 올랐고 ’약콩이 끓는 동안’은 2007 이상문학상 우수작으로 뽑혔다.

      작가 권씨는 1996년 장편 ’푸르른 틈새’로 제2회 상상문학상을 받으며 등단한 뒤 소설집 ’처녀치마’ 등을 냈다.

      창비. 252쪽. 9천800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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