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예술/서예실

우리나라의 서예가

淸潭 2006. 12. 2. 19:32

1. 우리나라의 대표적인 서예가

 

1) 김생(金生)711-791( 성덕왕 10 - 원성왕 7 )

신라의 명필. 자는 지서(知瑞), 별명은 구(玖). 가난한 가정에서 태어난 그는 어려서부터 글씨에 매우 뛰어났으며, 평생동안 다른 재주는 배우지 않았다. 일생을 서예에 바쳤으며, 예서(隸書) 행서(行書) 초서(草書)에 능하여 <해동(海東)의 서성(書聖) > 이라 불렀고, 송(宋)나라에서도 왕희지를 능가하는 명필로 이름이 났다. 그 한 예로서, 고려의 학자 홍 관이 송나라에 사신 으로 갔을 때, 한림원의 한 관리들에게김생의 글씨 한 폭을 내보이자 그들은 깜짝 놀라며, "오늘 뜻밖에 왕 우군(왕희지 의 호)의 친필을 보는군!" 하고 말하였다. 홍관이, "아니요, 이것은 신라사람 김생의 글씨요." 라고 하자, 그들 은 믿지 않으며, "천하에 우군을 빼고 어찌 이런 묘필이 있으랴!" 하고 끝내 믿지 않았다고 한다.
김생의 서풍은 왕희지에 뿌리를 내렸고 필력이 힘차고 결체(結體)에는 무리와 과장이 엿보인다. 작품으로 글씨에 <<백 률 사 석당기>> <<창림비>> <<화엄사 화엄경 석각>> <<전유암서>> <<유점사 편 액>> 등이 있다.

 

2) 최치원(崔致遠)857 - ?( 헌왕왕 1 - ? )
신라말기의 학자. 경주최씨의 시조. 자는 고운(孤雲) 해운(海雲). 859년(경문왕 9) 13세로 당나라에 유학을 떠나, 874년 과거 에 급제하여 , 선주표수현위(宣州漂水縣尉)가 되고 승무랑(承務朗) 시어사(侍御史) 내공봉(內供奉)에 올라 자금어대(紫金魚袋)를 하사받았다. 875년(헌강왕 5) 황 소의 난 때는 <토황소격문(討黃巢檄文)>을 써서 문장가로서 이름을 떨쳤다. 885년 신라 로 돌아와, 시독 겸 한림학사(侍讀兼翰林學士) 수병부시랑(守兵部侍郞) 지서서감(知瑞書監)이 되었으나 문란한 국정을 통탄하고 외직(外職)을 자청하여 대산(大山) 등지의 태수로 지냈다. 894년(진성여왕 8) '시무 10조'를 건의하여 정치의 어지러움과 백성들 의 어려운 생활을 구제하려 했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자, 어지러운 세상을 비관하며 해인사 쌍계사를 비롯하여 여러 절을 찾아서 각지를 유랑하였다. 오늘날 불리는 부산의 '해운대'라는 이름은 최치원의 자인 '해운'을 따서 붙여진 것이라고 한다. 그 뒤, 그 는 가야산 해인사로 들어가 글을 쓰고 시를 읊으면서 여생을 마쳤다.
글씨는 구양순의 아들인 구양통(歐陽通)의 법을 좇아 썼는데, 무척 글씨에 뛰어나 그가 쓴 <<난랑 비서문>>은 신 라시대의 화랑도를 설명해 주는 귀중한 자료가 되고 있다. 또한 숭복사 쌍계사 성주사 봉암사 등 4군데의 비석 글씨를 합하여 <<4산비명>>이라 하는데, 그 글씨체와 글씨가 모두 뛰어났다. 이외에도,글씨에 <<숭복사비>> << 진감국사비>> <<지증대사적조탑비>> <<무염국사백월보광탑비>>가 있고, 저서에 <<계원필경 >> <<중산복궤집>> <<석순응전>>이 있다.
조선 시대에 영평의 고운 영당 등 여러 곳에서 제사를 지냈다.

 

3) 탄연(坦然)1170 - 1159 ( 문종 24 - 의종 13 )
고려시대의 승려이자 서예가. 속성 손(孫). 호는 묵암(묵庵), 시호는 대감(大鑑).
1085년(선종 2) 명경과에 급제하였고, 묵종의 청으로 세자(후에 예종)를 가르치다가 88년 몰래 궁중을 빠져나와 안적사에서 중 이 되어 광명사 혜소국사(慧炤國師)의 제자가 되었다. 그 후 각지를 다니며 참선과 교학을 연구하다가 1105년(숙종 10) 승과에 급제하여, 1106(예종 1)에 대사(大師), 1109년 중대사(重大師), 15년 삼중대사(三重大師), 21년 선사(禪師)에 올랐다. 23년(인 종 1) 첩수가사(帖繡袈裟)를 하사받고 29년 보제사 주지로서 법회를 열었다. 32년 대선사(大禪師)로서 왕의 자문역이 되고 46년 왕사(王師)가 되었다. 47년 의종이 즉위한 후에는 예우가 더욱 극진하였으나 48년 은퇴하고 단속사에 들어가 계속 선교(禪敎)의 중흥에 이바지했다.
서예에도 뛰어나 김 생에 버금가는 명필로 알려졌으며 왕희지의 필체를 따랐다. 격조높은 시문을 남겼다. 국사(國師)에 추증 되 었고, 단속사에 비(碑)가 있다.
작품에 <<청평사문수원중수비>> <<북룡사비>> <<승가사 중수비>> 가 있다.

 

4) 안평대군(安平大君)1418 - 1453 ( 태종 18 - 단종 1 )
조선 세종의 세째 아들. 이름은 용(瑢), 자는 청지(淸之). 호는 비해당(匪懈堂) 낭각거사( 珏居士) 매죽헌(梅竹軒)이다.
1428년(세종 10) 안평대군에 봉해졌고 30년 성균관에 들어가 학문을 쌓았다. 그의 맏형인 문종이 다스릴 동안에는 조정의 배 후 에서 실력자 구실을 하며 둘째 형 수양대군의 세력과 은연히 맞서 있었다. 그러나 53년(단종 1) 수양대군이 계유정난을 꾸며 김 종서 등을 죽일 때 억지로 죄를 씌워 강화로 귀양 보냈다가 사약을 내렸다.
시문 그림 가야금 등에 능하고 특히 글씨에 뛰어나 당대의 명필로 꼽혀, 중국의 사신들이 올 때마다 그의 필적을 얻어갔다 한 다. 글씨는 조맹부체를 본받아 썼으며, 오래 살았다면 크게 발전했으리라는 아쉬움이 남는다. 1452년(문종 2) 경자자(庚子字)를 고쳐 임신자(壬申字)의 자모를 썼고, 그림에도 뛰어나 화가 안견과도 친분이 깊었다.
대표작으로는 <<몽유도원도 발문>> 이 있고, 이외에 글씨로 <<영릉신도비>> <<청천부원군 심 온 묘표>>가 있으며, 저서로는 <<비해당집>>이있다.

 

5) 양사언(楊士彦)1517 - 1584 ( 중종 12 - 선조 17 )
조선시대의 문신이자 서예가. 본관은 청주이다. 자는 응빙(應聘), 호는 봉래(蓬萊) 완구(完邱) 창해(滄海) 해객(海客) 이다.
1546년(명종 1) 식년문과(式年文科)에 병과(丙科)로 급제하여, 대동승(大同丞)을 거쳐 삼등현감 평창군수 강릉부사 함흥부사 철 원군수 회양군수를 지냈는데, 자연을 사랑하여 지방관을 자청한 그는 회양군수 때 금강산 만폭동 바위에 <봉래풍악원화동천 ( 蓬萊楓嶽元化洞天)>의 8자를 새겼는데 지금도 남아 있다. 안변군수로 재임 중 지릉의 화재 사건의 책임을 지고 귀양갔다가 2 년 후 풀려나오는 길에 병사하였다.
시와 글씨에 모두 능했는데 특히 초서(草書)와 큰글자를 잘 써서 안평대군 김 구, 한 호와 함께 조선 전기의 4대 서예가로 불 렀다.
저서에 <<봉래시집>>이 있고, 작품중에는 많이 알려진 <태산이 높다하되 하늘 아래 뫼이로다> 등이 있다.

 

6) 한 호(韓濩)1543 - 1605 ( 중종 38 - 선조 38 )
조선시대의 서예가. 자는 경홍(景洪), 호는 석봉(石峯) 청사(淸沙). 본관은 삼화(三和)이고, 개성 출신이다.
어머니의 떡 써는 고사로 잘 알려진 석봉은, 일찌기 어머니의 격려로 서예에 정진하여, 왕희지 안진경의 필법을 익혀 해(楷) 행 (行) 초(草) 등 각 체가 모두 뛰어났다.
1567년(명종 22) 진사시에 합격하고, 천거로 99년 사어(司禦)가 되었으며, 가평군수를 거쳐 1604년 흡곡현령 존숭도감 서사관 을 지냈다. 그 동안 명나라에 가는 사신을 수행하거나 외국사신을 맞을 때 연석에 나가 정묘한 필치로 명성을 떨쳤으며, 우리 나 라 서예계에 김정희와 쌍벽을 이루고 있다. 그때까지 중국의 서체와 서풍을 모방하던 풍조를 벗어나 독창적인 경지를 확립하여 석봉 나름대로 호쾌하고 강건한 서풍을 창시했다. 선조도 한석봉의 글씨를 특히 아꼈던 것으로 전해진다.
그의 필적으로 <<석봉서법>> <<석봉천자문>> 등이 모간(模刊)되어 있고, 친필은 별로 남은 것이 없 으 나 그가 쓴 비문은 많이 남아 있다. 글씨로는 <<허엽신도비>> <<서경덕신도비>> <<기자묘비> > <<행주승전비>> <<선죽교비>> <<좌상유홍묘표비>> 등이 있다.

 

7) 김정희(金正喜)1786 - 1856 ( 정조 10 - 철종 7 )
조선시대의 서화가 문신 문인 금석학자. 자는 원춘(元春)이고, 호는 완당(阮堂) 추사(秋史) 예당(禮堂) 시암(詩庵) 과파(果坡 ) 노과(老果)이다. 본관은 경주이다.
1089년(순조 9) 생원이 되고, 19년(순조 19) 문과에 급제하여, 세자사가원설서, 충청우도암행어사, 성균관대사성, 이조참판 등 을 역임하였다.
일찌기 스승인 박제가에게서 학문을 깊이 깨우쳤으며, 24세 때 아버지를 따라 당시 동양에서 중심지가 되고 있던 청나라의 뻬 이징으로 가서 그곳 대학자인 옹방강 완원으로부터 그의 재능을 크게 인정받았으며, 경학을 널리 연구하여 높은 수준에 이르러 ' 해동의 제1의 유학자'란 별명을 얻었다. 그외 금석학 서화에서도 많은 영향을 받았고, 귀국 후 고증학을 도입하였다. 40년(헌종 6) 윤상도의 옥사에 연루되어 제주도로 유배되었다가 48년 풀려나왔고, 51년(철종 2) 헌종의 묘천(廟遷)문제로 다시 북청으로 귀 양을 갔다가 이듬해 풀려났다. 고통스러운 귀양살이에서도 학문과 예술을 게을리하지 않았으며, 그를 찾아오는 많은 사람들에 게 학문과 예술을 가르쳤다 한다.
그는 금석학과 서예에서 독창적이며 뛰어난 업적을 남겼다. 금석학이란 쇠붙이나 돌에 새겨진 글을 연구하여 역사적 사실을 밝 혀내은 학문을 말하는데, 그는 함흥 황초령에 있는 신라 진흥왕의 순수비를 고석(考釋)하고, 16년에는 북한산 비봉에 있는 석 비 가 이대조의 건국시 무학대사가 세운 것이 아니고 진흥왕 순수비이며, <진흥>이란 칭호도 왕의 생전에 사용한 것이며, 그 세워진 연대가 진흥왕 29년 남천주 설치이후임을 밝혀냈다. 또한 그는 우리나라 서예사상 두번 다시 찾아내기 어려운 서예의 대 가로서, 소식, 구양순 등 대가들의 글씨를 열심히 연구하여 그의 독특하게 뛰어난 추사체를 이룩하였으며, 특히 예서 행서에는 당대의 으뜸이었다. 뿐만 아니라 화가로서도 이름이 높았는데, 난초 대나무 산수화를 잘 그렸다 한다.
학문에서는 실사구시(實事求是)를 주장하였는데, 그는 <<실사구시설>>을 저술하여 근거 없는 지식이나 선입견으 로 학문을 하여서는 아니됨을 주장하였으며 종교에 대한 관심도 많아 뻬이징으로부터의 귀국길에는 불경 400여 권과 불상 등을 가 져와서 마곡사에 기증하기도 하였다.
저서로는 <<완당집>> <<실사구시설>> <<금석과 안록>> <<완당척독>> 등이 있 고,작품에 <<묵죽도>> <<묵란도>>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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