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를 바꾼 건축] 이스탄불의 하기아 소피아(6)
기독교와 이슬람이 만난 건축의 ‘데탕트’
아시아와 유럽을 잇는 관문이자 두 문명권을 지배했던 제국의 도읍지로서 크게 번성했던 도시. 중세와 근세를 이어주면서 동시에 중세와 근세를 모두 지배했던 메갈로폴리스(megalopolis) 이스탄불은 그래서 두 얼굴의 신 야누스(Janus)와 같다. 서기 330년 5월 11일 로마 제국의 콘스탄티누스 대제가 혼란한 로마를 재통일하면서 새로운 제국(후일 동로마 제국)의 수도로 삼았던 비잔티움은 그후로 콘스탄티노플로 불렸다. 콘스탄티노플은 로마와 같이 7개 언덕을 가진 도시였고 시내는 14구역으로 나뉘었다. 따라서 콘스탄티노플은 또하나의 로마, 곧 새로운 로마가 됐다.
▲ 하기아 소피아의 영향이 느껴지는 이스탄불의 슐라이마니예 대모스크. |
그는 제국의 총독부가 있는 이탈리아 반도의 라벤나에 소피아 사원의 축소판으로서 모자이크 장식은 후일 시인 단테가 ‘색채의 교향악’이라 평했을 만큼 최고로 꾸민 산타 비탈레 성당을 짓고, 성화 속에 자신의 모습까지 새겨놓았다. 자신이 마치 성자인 것처럼. 산타 비탈레의 찬란함을 몸소 본 프랑크왕국의 샤를마뉴 대제는 자신의 왕도(王都) 아헨(Aachen)에 이를 닮은 대성당을 지었으니 하기아 소피아의 명성과 위엄이 어땠는지 상상이 된다.
▲ 헤롯 성전이 파괴된 자리에 세워진 예루살렘의 '바위의 돔'. |
소피아 성당은 중앙 홀과 2층 회랑으로 구성된다. 중앙 홀은 천장까지 거침이 없어 아주 높다. 따라서 공간감을 느낄 수 있다. 정면 벽에는 아라비아 서체로 ‘알라는 유일하다’ ‘무하마드는 알라의 사자(使者)’라고 쓴 원판(圓板)이 걸려있다. 1453년 비잔틴 제국을 정복한 오스만 제국이 성당을 모스크로 개조하면서 그렇게 한 것이다. 그때 성당 외곽에도 네 개의 미나레트(minaret·이슬람식 첨탑)를 세웠는데 그게 마치 창을 든 경비병처럼 보인다. 이런 변화에도 불구하고 비잔틴 교회 건축의 기본적인 특징은 지금껏 고스란히 남아있다. 1500년을 그렇게 버텨냈으니 기적이랄 수밖에.
2층 회랑 벽면에는 지워지다만 모자이크 성화가 곳곳에 남아 눈에 띈다. 8~9세기에 있은 성상(聖像) 파괴 소동에 따라 대거 훼손된 결과다. 방문자들의 시선은 거기서 머문다. 그 역사를 더듬어 보기라도 하듯.
10세기에 들어서면서 하기아 소피아의 건축양식은 그때 막 창건된 러시아의 키예프 공국으로 전파돼 그곳에도 소피아 사원이 세워졌다. 키예프의 최고 지도자 블라디미르는 988년 비잔틴 제국의 황녀 안나를 아내로 맞이하면서 기독교로 개종했는데 그때가 러시아정교가 태어난 원년이 된다. 러시아의 기독교화에 따라 비잔틴의 영역은 지중해 일대에서 우크라이나 초원으로 뻗어나가 모스크바까지 이르렀다. 서쪽으로는 발칸반도에도 미쳐 그리스 정교회, 불가리아정교회, 세르비아정교회 등이 생겨났다.
그렇다고 비잔틴에 늘 봄날만 있은 것은 아니었다. 제4차 십자군전쟁 당시(1204) 이곳을 지나갔던 베네치아 병사들이 도시를 함락하고 사흘 동안이나 약탈과 파괴, 능욕 등 사상 유례없는 야만 행위를 자행했다. 비잔틴 문명에 대한 이해가 부족했던 그들은 소피아 사원에 들어가 성상을 끌어내리는 것으로도 모자라 대주교의 의자에 매춘부를 앉히고는 성배에 술을 따라 그녀들에게 마시게 했다. 그 과정에서 콘스탄티노플의 귀중한 보물들이 땅 위에서 사라졌고 더러는 베네치아로 옮겨지는 불상사를 겪었다. 지금 베네치아의 성 마르크 성당 정면을 장식하고 있는 네 필의 청동마상도 그때 이곳에서 가져간 것이다.
▲ 시리아 다마스커스의 우마이야 모스크의 외관. |
불행은 항상 짝을 이루어서 일어나는 법. 또 한 차례의 파괴가 이 도시를 엄습했다. 길목을 지키는 도시는 항상 정복자의 공격목표가 되니 자신을 지키지 못할 때 그 길목은 피를 흘리는 전쟁터가 될 수밖에 없다.
콘스탄티누스가 비잔틴 제국을 창건한 지 1123년 11일 만인 1453년 5월 29일, 오스만 제국의 메흐메트 2세가 콘스탄티노플을 함락한 것이다. 그리고 사흘 동안 정복자에 의해 파괴와 약탈, 방화, 능욕의 만행이 저질러졌다. 그들은 콘스탄티노플을 ‘이슬람의 도시’란 의미로 ‘이스탄불’로 바꾸었고, 소피아 사원을 모스크로 개조함과 동시에 도시 곳곳에 모스크를 지었다.
재미있는 것은 모스크와 교회당이 궁륭형 천장과 돔 지붕을 하고 있어 너무 닮았다는 점이다. 오스만 제국이 비잔틴 제국의 땅을 차지해서 그렇게 된 게 아니다. 그 전통은 7세기로 거슬러 올라간다. 이슬람 최초의 왕조인 우마이야 왕국의 칼리프 왈리드 압둘 말리크가 수도 다마스커스에 최대ㆍ최고의 모스크(705년 완공)를 짓고자 콘스탄티노플에서 1만2000명의 건축기술자를 데려왔기에 모스크와 교회 건축은 여러 면에서 유사성을 띠게 됐다. 하늘을 그 무엇보다도 신성시하는 게 유일신 종교라 돔을 지존(至尊)으로 모셨다. 하지만 이들은 건축사적으로는 같은 뿌리를 갖고 있다.
우마이야 모스크에서 절정을 이룬 이러한 유사성은 이슬람이 7세기 예루살렘을 차지하자마자 헤롯 성전이 파괴된 자리(성전산)에 세운 ‘바위의 돔’과 중세 인도를 지배한 이슬람계 무굴 제국의 황제 샤 자한이 자기보다 먼저 하늘나라로 간 왕비 뭄타즈 마할을 기려 지은 ‘타지마할’에도 그대로 나타났다. 하기아 소피아는 동유럽을 근거지로 삼은 동방정교회와 이슬람 종교건축물에 이처럼 심대한 영향을 미쳤으니 세기적 건축물이라 해도 결코 지나친 말은 아닐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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