못먹다 갑자기 잘 먹게 되면 발병
한국인 20~30대, 3명 중 1명은 비만… 위험 ‘경고등’
당뇨병에 대해 일반인은 흔히 ‘서구병’ ‘부자병’이라고 오인하고 있다. 영양 과다섭취와 운동부족 등으로 인한 비만이 당뇨병의 주원인이라는 점 때문이다. ‘잘 먹고 잘 살다가 걸리는 병이 아니냐’는 생각을 하기 쉽다.
하지만 이러한 인식은 진실과 다르다. 당뇨병은 잘 먹어서 걸리는 병이 아니라 못먹어서 걸리는 병이다. 정확히 말하면 못먹다가 갑자기 잘 먹게 되면 당뇨병에 걸릴 확률이 높아진다. 못먹어서 인슐린 분비 능력이 저하된 상태에서 갑자기 잘 먹게 되면 인슐린 처리 범위를 넘어서는 영양과다가 돼 혈당이 높아지는 이치다.
못먹던 지역의 사람이 갑자기 잘 먹게 되면서 당뇨대란(糖尿大亂)에 빠진 예는 의학계에서도 주목대상이다. 예컨대 2만5000년 전부터 사냥과 절식(節食)생활을 해온 미국 애리조나주의 피마 인디언은 알래스카, 캐나다 지역을 지나 남하한 뒤 농경생활을 거쳐 서구식 생활에 노출된 지금 인구의 절반 이상이 당뇨병에 걸려 있다. 남태평양의 마이크로네시아에서 생선, 과일을 주식으로 하던 인종도 2차 세계대전을 거치며 서구식 식생활로 바뀐 후 급격한 비만증가를 겪었고, 현재 당뇨병 환자가 인구의 절반에 이르게 됐다. 또 미국 하와이주에서는 이민온 동양인이 백인에 비해 당뇨병 발병률이 2배 가까이 높다는 점 역시 많은 시사점을 준다.
이러한 당뇨병의 함정을 감안하면 당뇨병은 서양이 아닌 동양에 더 위협적이다. 저개발과 절대 빈곤에 시달리던 아시아 지역은 생활수준의 향상과 패스트푸드의 확산, 앉아있는 시간의 증가 등으로 비만이 확산되고 있고 이것이 당뇨대란을 불러올 수 있다는 게 전문가들의 견해다.
세계보건기구(WTO)는 아시아 지역 당뇨병 환자가 앞으로 5~6년 사이 50% 이상 늘어날 것이라고 경고하고 있다. WTO 아시아 지역본부에 따르면, 비만으로 인한 제2형 당뇨병 환자 1억2000만여명 중 아시아·태평양 지역 환자는 현재 약 3000만명에 불과하지만 오는 2010년에 이르면 전세계 환자 2억1600여만명 중 아·태 지역 환자가 1억3000여만명으로 절반 이상을 차지할 것으로 예상됐다.
아ㆍ태 지역에서 비만은 호주ㆍ뉴질랜드 등 선진국만의 고민을 이미 넘어선 상태로, 중국ㆍ대만ㆍ인도ㆍ싱가포르 등과 태평양의 섬나라로 확산되고 있다는 게 WTO의 경고다. 예컨대 뉴질랜드는 성인 중 이미 절반 이상이 비만이나 과체중 판정을 받고 있지만 대만도 성인 인구 중 30%가 체중과다로 분류되고 있고, 7000만여명에 이르는 과체중ㆍ비만 인구를 가진 중국도 매년 10%씩 과체중ㆍ비만 인구가 급증하고 있다.
동남아 지역 당뇨환자 급증할 듯
‘2025년까지 당뇨병 환자가 가장 폭발적으로 늘어날 지역은 동남아가 될 것’이라는 전망도 나오고 있다. 동남아 지역은 이미 ‘당뇨병 예비군’이라 할 수 있는 내당능 장애 환자가 전체 인구의 13.2%(9300만명)로 세계에서 가장 높은 유병률을 보이고 있다. 2003년 전 세계 내당능 장애 환자는 20~79세 인구의 8.2%에 해당하는 3억1400만명으로, 2025년에는 이 숫자가 4억7200만명(9%)에 이를 전망이다.
아시아 지역에서는 비만으로 인한 제2형 당뇨병을 앓는 어린이 환자가 크게 늘고 있다는 경고도 나온다. 국제당뇨병재단 서태평양지부는 2003년 조사보고서에서 당뇨병 어린이 가운데 비만으로 인한 ‘성인형 당뇨병’에 걸린 어린이들이 일본은 21%, 싱가포르는 17%나 된다고 밝혔다. 다른 아시아 국가들도 어린이 당뇨환자 중 성인형 환자의 비율이 평균 10%에 이른다고 한다. 보고서는 생활형편이 좋아지면서 아시아 지역 어린이들이 운동을 하지 않아 이같은 현상이 나타나고 있다고 지적했다.
‘체질상 동양인이 서양인보다 당뇨병에 더 취약하다’는 이론도 있다. 상대적으로 덩치가 작은 동양인의 경우 서양인에 비해 췌장 세포 수가 적어 인슐린 분비가 떨어진다는 것. 고려대 구로병원 백세현 내분비내과 과장은 “인종과 당뇨병 발병률 간의 확실한 실험 결과는 아직 없지만 체구가 작은 동양인이 서양인에 비해 인슐린 분비가 떨어질 가능성이 높다”며 “체구가 작은 사람이 갑자기 잘 먹게 되는 게 문제”라고 말했다. 전문가들은 “만일 현상태에서 통일된다면 우리에 비해 평균 체구가 작아질 만큼 영양섭취가 부족한 북한 사람들의 경우 영양공급이 갑자기 늘어나면 당뇨병대란에 휘말릴 수 있다”고 보고 있다.
한국도 젊은층의 비만이 사회문제화되는 등 위험 경고가 잇따르고 있다. 지난 3월 국민건강보험공단과 대한비만학회가 1992~2000년 건강검진을 받은 사무직 근로자 93만여명을 대상으로 9년간 ‘한국인의 비만 특성에 관한 추적조사’를 한 결과 20·30대 3명 가운데 1명이 비만이고, 이들 연령층이 40대 이상 연령층에 비해 체중 증가 속도가 최고 3배 이상 빠른 것으로 나타났다.
구체적인 연령대별 비만율을 보면 20대의 경우 체질량지수(BMIㆍ체중을 신장 제곱으로 나눈 값) 25 이상인 비만 인구가 1992년 8.1%에 불과하던 것이 2000년에는 32.3%로 4배, 30대는 18.8%에서 35.1%로 두 배 가까이 늘어났다. 반면 40대는 25.2%에서 37.8%, 50대 이상은 26.1%에서 36.6%로 증가폭이 상대적으로 낮았다. 또 20·30대는 비만도가 높을수록 당뇨병과 고혈압 등 각종 비만 관련 성인병질환 발생위험이 40·50대에 비해 훨씬 높은 것으로 분석됐다. 고도비만자가 비만이 아닌 자에 비해 당뇨병에 걸릴 확률이 20대 9배, 30대 7배, 40대 6.5배, 50대 이상 4.5배로 각각 조사됐다.
농촌거주자가 더 취약
당뇨병은 ‘서구병’ ‘부자병’이 아닐 뿐더러 ‘도시병’도 아니다. 오히려 도시 거주자보다 농촌 거주자가 당뇨병에 취약하다는 말이다. 이는 농촌 거주자들이 과거에 비해 갑자기 잘 먹게 됐고 규칙적인 운동을 하기 힘들기 때문이다. 실제 최근의 연구 결과를 보면 일부 연령층에서는 농촌 거주자의 당뇨병 발병률이 도시 거주자를 앞서고 있다.
지난 1월 질병관리본부가 발간한 ‘건강위험 행태 및 만성질환 통계’에 따르면 2001년을 기준으로 전국 읍ㆍ면과 동(洞)의 30세 이상 남녀 중 만성질환에 걸린 비율을 비교한 결과 농촌지역인 읍ㆍ면 지역의 당뇨병 환자 비율(10.23%)이 동(8.2%)보다 높았다. 당뇨병과 관련이 있는 비만도(체질량 25㎏/㎡ 이상) 비율도 읍ㆍ면에선 32.48%였고 동에서는 30.21%였다. 또 1회당 20분 이상 지속되는 운동을 전혀 하지 않는 비율도 동은 70.34%인 데 반해 읍ㆍ면은 81.94%로 나타났다.
정장열 주간조선 기자(jrchung@chosun.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