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우 할리베리, 모델 니콜 존슨, 가수 루더 밴드로스, 고르바초프, 엘리자베스 테일러…
당뇨는 그들에게 의지를 심어줬다
당뇨병이 인생의 ‘선물’이 될 수 있을까.
2002년 영화 ‘몬스터 볼’로 아카데미 여우주연상을 거머쥔 할리 베리(Halle Berry·39)는 “당뇨는 삶을 헤쳐나갈 힘과 의지력을 심어준 커다란 선물”이라고 말한다. “10살 때 학교 선생님이 제게, 어른이 되면 틀림없이 큰 선물을 받게 될 거라고 말했어요. 그게 바로 당뇨병이었죠.”
그녀가 당뇨병 판정을 받은 것은 20대 초반. 1989년에는 텔레비전 쇼 촬영 도중 쓰러져 병원에 실려가야 했다. 그 이후로 그녀는 하루에도 몇 번씩 혈당을 체크하고 인슐린 주사를 맞는 것은 물론, 철저한 식이요법과 운동을 엄격하게 지킨다. 그녀의 식탁엔 닭고기, 생선, 현미, 야채샐러드만 오른다.
할리 베리는 당뇨병 환자도 남다른 노력으로 날씬한 몸매와 아름다움을 유지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미국 주간지 ‘피플’이 해마다 선정하는 ‘세계에서 가장 아름다운 50인’ 명단에 8번이나 뽑혀, 줄리아 로버츠와 함께 최다 횟수를 기록하고 있다.
베리는 자신을 채찍질한 남다른 ‘선물’에 감사의 표시도 잊지 않았다. 그녀는 2003년 베벌리힐스에서 열린 소아당뇨 어린이들을 위한 자선기금 행사인 ‘캐루젤 오브 호프(CAROUSEL OF HOPE)’에서 “당뇨가 있었기에 오스카 수상의 영광도 있었다”며 “당뇨병 치료를 위해서라면 언제든 앞장서겠다”고 선언해 뜨거운 박수를 받았다.
스스로에게 가치 보여주고 싶어
1999년 ‘미스 아메리카’ 니콜 존슨(Nicole Johnson·31)에게 ‘미의 여왕’ 왕관을 안긴 것도 당뇨병이었다. 존슨은 19살 때 당뇨병 판정을 받았다. 첫 진단을 받던 날, 그녀는 주위 환자들로부터 절망적인 말을 들었다. “저보고 포기하라고 하더군요. 당뇨병과 싸우느라 대학도 졸업할 수 없고, 꿈을 좇다 헛된 시간만 보내게 될 거라고 말했어요.” 그러나 그녀는 “못한다고 하니까, 어떻게든 하고야 말겠다는 생각이 더 들었다”고 고백한다. “처음엔 저도 한참 우울증에 시달리고 제 자신이 쓸모없는 사람처럼 느껴졌어요. 그래서 스스로에게 제 가치를 증명해 보이겠다고 결심했어요.”
그녀는 미스 아메리카에 뽑힌 후로 화려한 연예계 생활 대신 당뇨병 환자들을 위한 활동에 발벗고 나섰다. 국회의원을 찾아가 당뇨병 환자를 위한 의료 혜택에 힘써줄 것을 설득하고 직접 개발한 당뇨 환자용 요리법을 담아 두 권의 책도 펴냈다. 그녀는 매일매일 조금씩 운동량을 늘려가는 게 중요하다고 강조한다. “아주 조금밖에 움직일 수 없더라도 조금이라도 매일 움직여야 한다”고 말하는 그녀는 피트니스 센터가 아니라도 몸을 움직일 수 있는 곳이면 어디서건 운동한다. 공항에서 짬이 나면 빨리 걷기를 하고 쇼핑몰에서 큰 걸음으로 성큼성큼 걸어다니기도 하며 호텔 계단에서 빠르게 뛰어오르내기도 한다.
당뇨병을 이기는 데는 본인의 의지뿐 아니라 가족의 눈물겨운 사랑도 버팀목이다. 지난 30년간 최고의 리듬 앤 블루스 가수이자 작곡가로 존경받아온 루더 밴드로스(Luther Vandross·52). 그가 살아있는 큰 이유는 어머니 메리 밴드로스다.
2년 전 그는 새 앨범 ‘아버지와 춤을’이 발매되기 전날, 심장마비로 쓰러져 혼수상태에 빠졌다. 이후 6주간, 어머니 메리는 병상을 지키며 말하지도 듣지도 못하는 아들의 손을 잡고 밤마다 기도를 드렸다. “나는 남편과 두 아이를 모두 당뇨로 잃었어요. 당뇨병을 심각하게 받아들이지 않는 사람을 보면 안타까워요. 그래서 그런 사람을 볼 때마다 당뇨 테스트를 받으라고 귀찮을 정도로 권하죠.”
“인슐린 펌프가 꿈 가깝게 해줘”
그가 병상에 실려간 직후 나온 앨범은 당뇨병으로 세상을 떠난 아버지에게 바친 음반. 그 앨범은 그 해 그래미 시상식에서 ‘최고의 리듬 앤 블루스 앨범’ 등 4개 부문을 휩쓸었고, 200만장이 팔려 더블 플래티넘을 기록했다. 의식이 돌아온 뒤에도 그는 삶을 한 걸음씩 다시 시작해야 했다. 목소리를 내기는커녕 움직이는 것조차 너무 힘이 들었다. 그러나 그는 재활원에서 집중치료를 받으면서도 매주 백업 싱어들과 노래 연습을 하며 음악적 영감을 잃지 않기 위해 사투를 벌였다.
그는 작년 5월 ‘오프라 윈프리쇼’에 나와 의지를 불태웠다. “그동안 체중 때문에 말도 못할 고생을 했어요. 90㎏을 한꺼번에 뺐다 다시 돌아오기도 했지요. 정말 무서운 병입니다. 사람을 완전히 무기력하게 만들죠. 하지만 이젠 식이요법으로 병을 상당히 극복했어요. 당뇨가 아무리 지치게 만들어도 저는 80세까지 노래하고 앨범을 낼 것입니다.”
어렸을 때부터 당뇨병을 앓아온 프로골퍼 스콧 버플랭크(Scott Verplank·41)에게 새로운 세상을 열어준 것은 ‘인슐린 펌프’. 그는 “7년 전 인슐린 펌프를 허리에 찬 후 내 꿈에 더 가까워졌다”고 말한다. “골프장에 나가서도 예전처럼 혈당이 급격히 낮아졌다 높아졌다 하지 않고 컨디션이 일정하게 유지되기 때문에 더 자신감이 생겨요.”
골프 코스를 돌며 주사기와 인슐린을 가지고 다녀야 하는 불편을 덜었다는 것도 큰 장점. ‘펌프’의 버튼만 누르면 24시간 필요할 때 인슐린을 얻을 수 있다. 삐삐만한 크기에 작은 건전지로 작동되는 인슐린 펌프는 저장고에 있는 인슐린을 작은 플라스틱 관을 통해 몸으로 주입한다. “인슐린 펌프를 사용한 뒤로 건강도 더 좋아졌고 내 삶이 훨씬 나아졌다”고 말하는 그에게, 펌프는 2000년 르노 타호 오픈과 2001년 밸 캐네디언 오픈 우승을 잇따라 안겼다.
스콧 버플랭크에게 홀인원을 향한 집념이 있었다면 작가 앤 라이스(Anne Rice·64)에게는 문학을 향한 열정이 있었다. 그녀는 톰 크루즈와 브래드 피트 주연의 영화로 잘 알려진 소설 ‘뱀파이어와의 인터뷰’ 원작자. 신화와 환상을 넘나드는 그녀의 소설은 전세계에 1억권이 넘게 팔렸다.
그녀는 5년 전 어느 날 새벽, 갑자기 숨이 막혀 정신을 잃고 응급실로 실려갔다. “20분만 늦었어도 죽었을지 모른다”고 그녀는 작년에 펴낸 에세이에 썼다. “혼수상태에서 처음 깨어났을 때 누구에겐지 알 수 없는 깊은 분노를 느꼈다. 내가 당뇨병이란 것을 알고 말할 수 없이 비참했다. 차라리 죽는 게 낫지 않은가 하는 생각도 했다”고 그녀는 에세이에서 고백했다. 반 년 동안 심한 정신적 고통에 시달려 아무 일도 할 수 없었던 그녀는 “모든 고통을 소설을 쓰면서 이겨냈다”고 말한다. 라이스가 병마와 싸우며 써내려간 소설 ‘메릭’. 그녀는 이 책에 죽음과 부활의 장엄한 메시지를 담았다.
“의심 생기면 바로 혈당 체크를”
라이스는 당뇨병에 대한 상식에 얽매이지 말라고 충고한다. “내가 당뇨병에 걸렸으리라곤 의심해본 적이 없었다. 사람들이 말하는 것처럼 매일 갈증에 시달리지도 않았고, 배가 유달리 자주 고프거나 단 것을 좋아하지도 않았기 때문이다.” 그녀가 강조하는 상식은 ‘혈당테스트가 아주 간단하다’는 것. “아주 간단한 테스트가 당신의 생명을 구할 수도 있다는 걸 기억하세요”라고 그녀는 충고한다.
이밖에도 당뇨병과 싸우고 있는 유명 인사들로는 배우 피비 케이츠, 전 소련 대통령 미하일 고르바초프, CNN 앵커 래리 킹, 가수 호세 펠리치아노, 영화감독 조지 루카스, 배우 엘리자베스 테일러, 가수 닐 영, 여성 프로골퍼 켈리 퀴니 등이 있다.
신정선 조선일보 국제부 기자(sbkim@chosun.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