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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들이 사별 두 번 한 과부와 결혼한답니다”···

淸潭 2025. 2. 1. 10:19

아들이 사별 두 번 한 과부와 결혼한답니다”···한 남자의 성욕이 부른 역설[사색(史色)]

강영운 기자(penkang@mk.co.kr)2025. 2. 1. 08:15
 
 

[사색-88] 전쟁, 기근, 경제붕괴, 대량실업. 세상 모든 악재가 폭풍처럼 한 번에 몰아칩니다. 방탕한 삶을 살아온 데 대한 신의 징벌이 내린 것처럼. “세상이 마침내 종말을 맞았도다”는 점술가들의 목소리가 광장에 메아리칩니다.

어느 때보다 리더십이 중요한 시기. 슬프게도 지도자는 미치광이와 한 치도 다르지 않았습니다. 정신병이 도진 나머지 숱한 헛소리를 늘어놓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부랴부랴 그의 아들을 리더로 지명합니다. 잘생긴 얼굴만큼이나 준수한 지도력을 기대합니다. 그러나 그건 그저 꿈에 불과했습니다. 그 역시 섹스와 향락에 미쳐있던 인물입니다.

영국 화가 윌리엄 터너의 ‘바다의 어부들’. 1796년 작품.
수없이 많은 육체적 파트너를 두었고, 정실 부인과는 이혼을 위해 나라를 뒤흔들기도 했습니다. 당장 내일이라도 멸국해도 이상하지 않을 상황. 아이러니하게도 이 시기는 문화적으로도 경제적으로도 풍요를 낳았습니다.

‘리젠시’(섭정) 시대를 연 영국 왕 조지 4세 이야기입니다. 방탕의 끝을 달렸던 남자가 지배한 나라가 강국이 되어버린 역설. 역사가 권선징악의 동화로 이루어져 있지 않기 때문입니다.

“얼굴의 완성은 패션이지.” 조지 4세의 초상화. 그는 패션에 관심이 무척 많았다.
향락의 왕세자 조지4세
조지 4세는 왕세자 시절부터 방탕하기로 유명했습니다. 숱한 유부녀를 건드렸고, 술에 취해있기 일쑤였지요. 왕실 자금을 맘대로 갖다 쓰다가 경고받기도 여러 차례. 알뜰하고, 근면한 기질로 ‘농부왕’이라고 불렸던 아버지 조지 3세와는 근본적으로 다른 사람이었습니다.
“짐이 좋아하는 건 술, 예술, 너의 입술이라네.” 왕세자 시절 조지 4세.
아버지 조지 3세의 근심도 깊어집니다. 식민지 미국에서는 독립전쟁이 일어나고, 유럽 대륙 프랑스에서는 혁명이 일어나 왕조 체제가 무너지고 있는데, 후계자 아들은 호색에 빠져 있으니.

1783년 그가 21살이 되던 해. 그가 일년마다 받는 금액은 오늘날 가치로 약 1700만파운드가 넘었습니다. 한화로는 330억에 달하는 거금이었으나 방탕함을 채우기엔 턱없이 부족합니다. 그의 개인 마구간에만 연간 80억원이 들어갑니다. 오늘날 스포츠카에 돈을 쏟아붓는 모습과 한치도 다름이 없었지요.왕 조지 3세는 수시로 왕세자에게 경고 메시지를 날렸지만, 메아리에 그쳤습니다.

“저 놈이 누굴 닮아 저리 여자를 좋아하누...” 조지 3세의 초상화.
왕세자 사랑에 빠지다
이듬해 봄, 따스한 바람이 부는 날, 그는 영락없이 파티장에 있었습니다. 그때 눈에 들어온 한 여인이 있었습니다. 마리아 피츠허버트. 여섯 살 연상의 원숙함이 돋보이는 여인. 시집을 두 번이나 갔지만 모두 사별한 채 과부가 되어버린 비운의 여성이기도 했었지요.

그녀는 평민 출신이었지만, 왕세자의 눈에는 그 어떤 귀족 여성보다 아름다워 보였습니다. 전 남편이 죽었어도, 어린 아들이 있어도 상관없었습니다. 그녀와 입 맞출 수 있다면, 그녀를 품을 수만 있다면.

“전하, 전 돌싱글즈 가야 해요.” 마리아 피츠허버트.
애끊게 쫓아다녔지만, “신분이 맞지 않는다”며 거절당하기를 여러 차례. 포기를 모르는 왕자는 기어이 그녀를 갖는 데 성공합니다. 프랑스 파리까지 따라와 청혼하는 그 정성에 감동해버린 것이었지요.

두 사람은 1785년 12월 결혼합니다. 왕자의 나이 24살 때였습니다. 물론 비공식이었습니다. 마리아에게는 ‘과부’라는 타이틀 말고도 몇 가지 흠이 더 있었습니다. 가톨릭교도 평민이었기 때문입니다.

신교도 국가인 영국 왕위계승법상 왕세자는 가톨릭교도와 결혼할 수 없었습니다. 만약 결혼을 고집한다면 왕자는 왕위를 포기해야만 했습니다. 두 사람이 비공식적인 혼인을 맺게 된 배경이었습니다. 국왕이자 아버지 조지 3세도 모르게 진행된 일이었습니다.

“법도 우릴 갈라놓을 수 없어요.” 풍자화가 제임스 길레이가 1796년 그린 풍자화. 제목은 ‘wife or no wife’. 법적으로 성립하지 않은 결혼을 풍자한 셈. [사진출처=예일대학교]
주지육림의 스타 조지 4세
“마시자, 취하자, 즐기자.”

마리아를 품은 왕세자 조지는 더욱 흥청망청이었습니다. 세상을 다 가진 것처럼 파티를 열고, 술을 마셨습니다. 귀한 예술품을 사들이면서 마리아의 마음을 기쁘게 하기도 했습니다. 그의 부채가 거대하게 쌓여가는 것도 개의치 않은 채.

“즐기지 못한다면, 인생은 무슨 의미가 있지?” 제임스 길레이가 향락에 빠진 왕세자를 묘사한 그림.
조지의 결혼은 모두가 아는 ‘비밀’이 되어가고 있었습니다. 낌새를 눈치챈 언론이 풍자적 만평을 기재하기 시작합니다. 조지 4세라고 적지 않아도 영국 사람 모두가 왕세자의 이름을 읽었습니다. 국왕 조지3세의 귀에 들어가는 건 당연한 수순이었습니다. 술에 미쳐있고, 사치가 심한 것까지 모자라, 과부인 가톨릭교도와의 비밀결혼이라니.

왕세자의 치명적인 도덕적 결함은 왕정의 위협이 될 수 있었던 상황. 아버지 조지 3세가 결단을 내립니다. 아들을 다른 여성과 결혼시키는 것이었습니다. 독일 브라운슈바이크 공주 캐롤라인이 신붓감이었습니다.신교도였고 무엇보다 왕족이었습니다.

“제가 잉글랜드의 왕세자빈이랍니다.” 캐롤라인의 초상화.
철들지 않는 유부남 조지 4세
마리아 피츠허버트를 진실로 사랑한 조지 4세는 저항했지만,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습니다. 결혼을 대가로 그의 빚을 모두 갚아주기로 했기 때문입니다. 그의 재정 상태는 폭발 직전의 화산과 같았습니다. 영국 의회가 승인한 조지 4세의 빚은 오늘날 가치로 800억원이 넘는 것으로 추산됩니다. 마리아 역시 눈물로 그를 놓아줍니다.

마침내 찾아온 첫날 밤. 부부는 의전에 따라 함께 밤을 보냈습니다. 다음 날까지 거사는 딱 세 번만 치러집니다. 조지 4세는 초상화와 다른 모습의 그녀를 보고 무척이나 실망했습니다. 짙은 화장에 짙은 체취도 견디기 어려운 것이었지요.

“엄마, 아빠 어디 갔어요.” 조지 4세의 딸 샬럿과 하프를 만지는 캐롤라인.
한 번의 거사로 딸아이를 출산합니다. 누구보다 존중받아야 할 산모를 두고, 조지 4세는 유언장에 이렇게 적었습니다. “왕세자빈로 불리는 여성에게 1실링을, 마리아 피츠허버트에겐 전 재산을”. 별거를 공식화한 셈이었습니다.

방탕은 달콤한 만큼이나, 강력한 중력이 작용합니다. 벗어났다고 생각할 찰나 다시 빠져들 가능성이 작지 않기 때문입니다. 왕세자 조지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아내 마리아를 두고 그는 다시 문란한 생활을 이어갑니다. 배우, 귀족의 아내, 시녀를 가리지 않았습니다. 욕망이 충족되면 그는 ‘첫사랑’ 마리아를 찾아갑니다.

왕세자빈 캐롤라인도 왕세자에게 마음이 떠난 지 오래였습니다. 자신의 시녀까지 건드리는 남자를 남편으로 인정할 수 없었지요. 궁에서 나와 따로 거처를 마련합니다. 그곳에 드나드는 여러 군인 장교가 있었습니다. 그녀에게는 더 이상 정조를 지켜야 할 상대가 없었습니다. 호사가들은 “왕세자빈이 침실에서만큼은 군인을 선호한다”는 말을 떠벌리고 다녔습니다.

“나같은 풍운아가 집에만 있을 수 없지.” 조지 4세의 초상화.
섭정의 자리에 오른 왕세자
“섭정이 왕의 자리를 대신해야 합니다.”

1811년, 왕 조지 3세의 광기가 극에 달합니다. 막내딸 아멜리아 공주가 죽은 후 그 슬픔이 병세를 깊게 만든 것이었습니다. 이제 왕의 역할을 대신할 사람이 필요합니다. 왕세자 조지 4세가 섭정(군주의 역할을 대신하는 사람)에 오릅니다. 그의 통치기를 섭정이라는 의미의 ‘리젠시’ 시대라고 부른 배경이었습니다.

“영국의 식민지 이제 거부한다.” 조지 3세 동상을 철거하는 1776년의 미국인들.
나폴레옹이 유럽을 위협하고, 영국을 윽박지르던 시기였습니다. 산업혁명의 부작용으로 대규모 실업도 잇따르던 때였습니다. 식민지 미국은 어느덧 어엿한 독립국가가 되어 있었지요. 그러나 섭정 조지 4세의 관심은 문화와 예술, 향락에 있었습니다.

국방을 책임지는 병사들의 군복보다, 본인의 옷 맵시가 더 중요한 사람이었습니다. 조지 4세의 별명이 ‘영국의 첫번째 신사’였던 이유였습니다. 급격한 도시화로 런던에는 거지와 창녀들이 거리를 헤맬 때, 그의 입에는 술과 고기, 여성의 육체로 가득합니다. 한 도시에 구현된 두 개의 세계.

영국과 인도의 문화가 묘하게 섞인 로얄 파빌리온 건축을 주도한 이도 조지 4세였다. [사진출처=Qmin]
이 역설 속에서 예술계에는 주옥같은 작품들이 터져나왔습니다. 제인 오스틴, 찰스 디킨스, 바이런 경이 ’시대의 만년필‘을 자처합니다. 낭만주의의 중심 윌리엄 터너·존 콘스터블 시대를 채색하는 화가들이었습니다. 런던 내셔널갤러리가 세워진 것도 조지 4세의 치세 하에서였습니다. 영국 예술의 황금기였습니다.
왕의 자리에 오른 조지4세...그러나
1820년 조지 4세는 더 이상 섭정이 아니었습니다. 아버지 조지 3세가 승하하면서 왕위에 올랐기 때문입니다. 그가 왕으로서 한 첫 번째 행동. 아내 캐롤라인과 이혼을 추진한 것이었습니다. 국법 상 국왕의 이혼은 있을 수 없는 일.

조지 4세는 막무가내였습니다. 어떻게든 캐롤라인이 왕비가 되는 걸 막으려는 의도였습니다. 위원회를 구성해 그녀가 다른 남자와 바람을 피운다는 걸 입증하려한 것도 그런 맥락이었습니다.

“캐롤라인 왕비가 바람 피운 것이 사실이오?” 캐롤라인 여왕의 재판.
대망의 대관식 날. 캐롤라인이 웨스트민스터 궁을 찾아옵니다. 대영제국의 왕비로서 관을 쓰기 위해서였습니다. 그러나 문은 굳게 닫힌 채 열리지 않았습니다. 조지 4세의 명 때문이었습니다.

이 때의 한이 쌓였기 때문이었는지. 그 해 그녀는 죽음을 맞았습니다. 딸 옆에 묻어달라는 마지막 유언마저, 조지 4세는 들어주지 않았지요. 그는 끝까지 무책임한 남편이었습니다.

캐롤라인의 관이 런던 시내를 지나가려 하자, 조지 4세는 한적한 길로 행차할 것을 명했습니다. 영국 신민 모두가 그녀의 죽음을 애달파 한다는 걸 알아서였습니다.

그녀의 관을 본 시민들이 왕에 대한 적개심을 키울 수 있다는 우려였지요. 그는 끝까지 나쁜 남편, 나쁜 지도자였습니다. 웰링턴 공작은 국왕 조지4세를 두고 이렇게 평했습니다. “평생 만난 사람 중 가장 이기적이고, 가장 거짓되고, 가장 악의적이며, 가장 나쁜 사람이었다.”

“나 조지4세, 오늘부터 돌싱임을 선언하노라.” 1821년 7월 조지 4세 대관식. 왕비 캐롤라인의 모습은 보이지 않는다.
나라를 지탱한 위대한 위인들
신이 버린 것은 아니었는지. 조지 4세 시기 영국에는 기라성들이 왕 대신 국가를 지탱하고 있었습니다. 뛰어난 인재들이 외환을 정리하고, 훌륭한 내치를 거듭하면서 나라가 점점 안정을 찾고 있어서였습니다.
“나폴레옹은 이제 끝이다. ” 윌리엄 새들러가 묘사한 1815년 ‘워털루 전투’.
웰린텅 공작은 워털루 전투에서 마침내 나폴레옹을 무찌르고 평화를 찾았습니다. 총리 윌리엄 피트와 뒤를 이은 헨리 에딩턴은 소득세를 도입해 전쟁으로 인한 부채를 관리하는 데 뛰어난 역량을 발휘하고 있었습니다. 그들의 재무적 혁신이 없었으면 영국은 나폴레옹에게 굴종했을 것입니다.

절체절명의 위기 속에서도 영국이 결코 침몰하지 않았던 데에는 빛나는 지성과 리더십을 갖춘 인물들이 왕의 역할을 대신하고 있었습니다. 최고 리더가 끊임없이 문제를 일으키고, 현장의 실무진들이 들보 역할을 하는 풍경. 200년 전 이역만리 땅에서의 일이 어쩐지 낯설게 보이지 않습니다.

스코틀랜드 전통 복장을 차려입은 조지4세.
윌리엄 터너의 ‘그리니치 공원에서 바라 본 런던’. 이 시기 영국은 문화적인 황금기이기도 했다. 1809년 작품.
<네줄요약>

ㅇ19세기 초반 영국 왕 조지 3세가 정신병을 앓으면서 그의 아들 조지 4세가 섭정(리젠시)으로 대리통치했다.

ㅇ그러나 그는 향락과 예술의 향유를 중요하게 생각한 인물이었어서, 왕세자빈을 구박하며 다른 이들과 바람을 피웠다.

ㅇ나폴레옹 전쟁이라는 절체 절명의 위기 속에서 기라성같은 영웅들이 등장하면서 구원투수 역할을 톡톡히 했다.

 

ㅇ지도자의 무능을 수하들이 메웠다.

<참고문헌>

ㅇCha Tea홍차교실, 영국의 여왕과 공주, 에이케이커뮤니케이션즈, 2024년

ㅇ데이비드 사울, 쾌락의 왕자: 웨일즈 왕자와 리젠시 시대의 시작, 그로브프레스, 1998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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