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A 류현진의 미디어 전략 - 전지적 보라스 시점
백종인 입력 2019.12.24. 07:38
대장정이 끝났다. 드디어 일자리를 구했다. 잘 된 건가? 아니면. 조금 아쉬운가? 판단은 천천히 하자. 지켜보면 알 일이다. 다만, 지금은 안도할 때다. 덕분에 여럿 고생했다. 기자들도, 팬들도. 매일 궁금하고, 갑갑했다. 일찍 정해져서 정말 다행이다.
한번 따져봤다. 토론토행 반나절만에 대략 400~500개 정도 기사가 떴다(한국에서만). 보도의 방향도 다양했다. 거의 모든 분야가 망라됐다. 한결같이 알뜰한 정보들이다. 팀 소개, 예상 라인업, 선발 로테이션은 기본이다. 그곳 한인 타운까지 조사 대상이 됐다. 벌써 새벽잠에 대한 걱정도 크다.
와중에 주목해야 할 부분이 있다. 역시 슈퍼 에이전트다. 스캇 보라스 말이다. 그는 과연 어떻게 성사시켰나. 협상의 달인이니까 알아서 잘 했겠지. 물론 맞다. 그래도 감상 포인트는 따로 있다. 바로 미디어를 100% 활용하는 전략과 전술이다. 오늘 <…구라다>의 메뉴다.
일단 개념도를 제시한다. 협상은 양자간의 일이다. 구단과 선수(에이전트)의 밀당이다. 둘은 가진 패의 일부만 보여준다. 거래가 진행되면서 조금씩 합의에 접근하게 된다.
이 때 변수가 작용한다. 미디어다. 기자들은 양쪽 모두를 취재한다. 구단 얘기도 듣고, 에이전트쪽도 체크한다. 때문에 공유되는 부분이 다를 수 있다. 이를테면 위에 있는 개념도에서 채색된 B와 C 부분이다.
이걸 어떻게 활용하느냐. 그게 중요한 요소다. 이를테면 포커판의 베팅과 비슷하다. 상대가 레이스를 따라와야한다. 그래야 판이 커진다. 그러려면 적당한 자극과 흔들기가 필요하다. 거기서 미디어가 작용한다. 이를테면 정보전이다. 특히나 결정적인 타이밍에서는 더 그렇다. 급박하고 미묘한 시점 말이다.
초반에 등장한 토론토를 레이스 끝까지 끌고 가는 법
그간 보도를 종합해보자. 하나의 줄기가 잡힌다. ERA 1위 투수가 시장에 나왔다. 여기에 정색을 하고 나타난 곳은 생각 외로 많지 않다. 구체적이고, 공식적인 제안은 사실상 토론토가 유일했다는 설이 유력하다. 이상할 것도 없다. 사이즈가 클수록 그렇다. 대개 간만 보는 선에서 그치는 경우가 많다. 주변에서 괜히 변죽만 울리는 팀들이다.
하지만 무시하면 안된다. 이들이 판을 떠나면 김이 빠진다. 계속 주변에 서성이도록 만들어야한다. 그래야 거래가 활력을 유지한다.
이번 케이스가 그랬다. 보라스는 누구보다 그 생리를 잘 안다. 중요성도 충분히 이해한다. 경쟁자의 실제 숫자는 문제되지 않는다. 외견상 비춰지는 부분을 관리해야한다. 어쨌든 많은 팀들이 매달리는 것처럼 보여야한다. 그래야 토론토와의 레이스를 끌고 나갈 수 있다. 바로 미디어가 필요한 지점이다.
가이드 라인은 처음부터 명확했다. 고객은 4년을 원한다고 밝혔다. 나머지는 액수다. 매디슨 범가너나 댈러스 카이클이 비교 대상이었다. 그럴 경우 평균 연봉 2000만 달러가 무난했다. 즉, 4년에 8000만 달러라는 목표치가 뚜렷했다.
문제는 액수 차이였다. 최초 토론토의 제시액이 이 보다 낮았다. OK 사인이 나올 리 없었다. 거래는 점점 늦어졌다. 시간은 무엇보다 중요한 요소다. 보라스는 빨리 끝내야한다고 믿었다. 지금 시장이 한창 달아올랐다. 뜨거울 때가 절대로 유리하다. 그걸 넘기면 장기화된다. 그럼 싸늘하게 식어버린다. 작년 카이클의 예가 떠올랐을 것이다.
데드 라인은 크리스마스다. 그 주에 접어들면 1라운드가 끝난다. 벌써 긴 연휴가 시작된다. 때문에 지난 주가 승부를 봐야할 타이밍이었다. 유례없이 부산한 움직임들이 포착됐다. 갑자기 행선지 관련 보도들의 업데이트 속도가 빨라졌다.
결정적인 페이스 메이커는 LA 에인절스
이번 판에는 여럿이 등장한다. 다저스, 트윈스, 화이트삭스…. 그 중 가장 큰 역할은 에인절스가 맡았다. 막판에 결정적으로 판을 키워줬다. 이들을 활용하는 보라스의 솜씨가 현란했다. 스피커는 유력한 매체, 전국구 스타 기자들이다.
공략 지점은 캘리포니아 남쪽이다. 고객이 강하게 연결된 지역이다. LA타임스에서 의미심장한 보도가 흘러나왔다. “(LAA) 구단이 류현진, 카이클과의 대화를 주도하고 있다”는 내용이었다. 직접적인 협상의 내용이나 가격은 없었다. 그러나 경쟁자라면 무척 신경쓰일 뉴스였다.
비슷한 시점에 켄 로젠탈(디 애슬레틱)도 거든다. 에인절스를 비롯한 몇몇 팀을 거명했다. 그리고 4년 8000만 달러라는 예상액을 구체화시켰다. 단정적인 건 아니다. 늘 그렇듯이 한 자락을 깔았다. “하지만 2개 구단 고위 관계자로부터는 부정적인 답변을 들었다. 부상 전력 때문이다.”
존 헤이먼(MLB네트워크)도 빠질 수 없다. “캘리포니아 남부팀들이 유력하지 않을까? 에인절스, 파드리스가 계속 관심을 보인다. 다저스도 불쑥 참전의사를 보였다.” 특히 헤이먼은 기존 리스트 외에 ‘미스터리 팀’ 1개가 더해졌다고 밝혔다. 토론토의 조바심을 자극할 부분이다.
한편에서는 불리한 얘기도 있었다. 블루제이스의 철수 보도였다. ‘더 스코어’라는 매체는 금액 문제를 이유로 둘 간의 협상이 결렬될 것이라고 전망했다. 뉴스의 소스는 밝히지 않았다. 다만 구단측이라면, 반격으로 해석될 여지는 충분하다.
하지만 결국 보라스의 흔들기는 성공했다. 오래지 않아 토론토의 반응이 나왔다. “경쟁력 있는 제안을 통보했다”는 보도가 잇달아 나오기 시작했다. ‘경쟁력’이란 뻔하다. 그러니까 상대 요구를 충족시키는 조건을 담았다는 뜻이다. 그리고 하루가 지나지 않아 협상은 타결됐다.
미디어 시장 영향력의 차이
막판 72시간의 뉴스 흐름을 정리하면 이렇다. 한국 시간 기준이다.
① 21일(토) - 에인절스 유력 보도
② 22일(일) 새벽 - 토론토 ‘경쟁력 있는 제안’
③ 22일(일) 오전 10시 - 카이클 계약
④ 23일 오후 1시 - 류현진 계약 합의
정리하면 이렇다. 구단과의 접촉은 기본적으로 보안 사항이다. ‘누굴 만나고, 무슨 얘기를 하고.’ 이런 건 떠벌리지 않는 게 상식이다. 설레발은 거래를 망치는 주범이기 때문이다. 다 된 일도 그르치게 만든다.
하지만 타이밍이라는 게 있다. 총정리, 대방출 같은 거다. 승부처에서는 밸브를 활짝 열어놓는다. 여러 팀과 교섭을 하고 있다는 사실을 사방에 흘린다. 있는 팀, 없는 팀 다 끌어넣는다. 물밑에서 엄청 바쁜 느낌이다. 일종의 블러핑이다. 그렇게 거래가 후끈 달군다. 그리고 결정타로 마무리한다.
물론 구단도 그럴 수 있다. ‘우리 그럼 빠진다.’ 이런 페이크가 나올 수 있다. 여기서 힘 겨루기를 결정짓는 건 ‘파워’다. 즉, 누가 갑이냐 하는 점이다. 유력한 매체들, 전국구 기자들이 누구 얘기에 더 귀를 기울이느냐는 점 말이다. 아무래도 미디어 시장의 영향력에서는 블루제이스가 보라스 코퍼레이션을 이기기 어렵다. 그가 살아남는 이유이기도 하다.
무엇보다 오해가 없었으면 한다. 이건 치밀한 정보전이다. 이 부분은 전략의 측면에서 봐야한다. 그리고 공생 관계로 이해해야한다. 어느 한 쪽이 일방적으로 이용하고, 이용당하는 게 아니다. 서로 필요에 따라 활용하는 여지인 셈이다. 직업적인 윤리가 침해되지 않는 범위 안에서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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