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구는 구라다] 이글스, 도대체 누구냐 넌 - feat. 올드보이
백종인 입력 2018.06.22. 07:31 수정 2018.06.22. 07:42
3회 초가 끝났다. 4-1이 됐다. 원정 팀의 우세가 확실해졌다. 역시 선발 투수의 무게가 달랐다.
그렇게 중반으로 흘러가고 있었다. 그냥 그랬다면 장안의 화제작은 탄생하지 않았을 것이다. 이때부터 시작됐다. 엎치락 뒤치락, 밀고-밀리는 치열한 겨루기가 이어졌다. 도망가면 쫓아가고, 또 뒷걸음질 치고…. 1~2점 차의 스코어는 7회까지 요지부동이었다.
도도한 흐름은 드디어 변곡점을 맞았다. 8회였다. 원정 팀이 1사 3루의 기회를 잡았다. 9번 정주현의 타구가 좌익수 쪽에 떴다. 별로 깊지 않다. 태그업 하기 애매한 자리다. 게다가 3루 주자가 느리다. 포수였다.
잠시의 망설임이 있었다. 하지만 승부다. 2사 후 아닌가. 스타트 신호가 떨어졌다. 유강남의 달리기가 시작됐다. 수비 쪽은 초긴장이다. 삐끗, 작은 실수라도 나오면 홈을 허용한다. 그러나 가장 안정적인 방법을 택했다. 3루수 송광민이 중간 커트맨으로 투입됐다. 좌익수 송구를 잘게 잘랐다. 그래도 홈에서 충분한 타이밍을 만들어냈다.
3번째 아웃 카운트가 선언됐다. 실패한 류중일 감독의 얼굴이 찡그려졌다. 승부사의 경험치가 작동한 탓이다. 뒷덜미가 따갑다. 갑자기 쎄~한 느낌이다.
병색이 완연한 배트에서 터진 동점 홈런
마치 장엄한 의식같다. 저들은 늘 저런다. 8회 말이 되자 하나, 둘씩 일어나기 시작했다. 양 손을 등 뒤로, 그리고 가슴을 제끼며 포효를 쏟아낸다. “최.강.한.화.” 벌써 10년 넘도록 계속된 공허한 외침이다. 청주시 사직동 일대가 끓어오르기 시작했다.
일단 흐름은 넘어왔다. 달아나려던 상대가 홈에서 잡혔다. 바로 뒤돌아선 반격이다. 타순도 안성맞춤이다. 클린업 트리오에 걸렸다. 분위기는 완벽하다. 그런데 딴판이다. 기대하고는 영 다르다. 포수 플라이, 삼진. 순식간에 빨간 불이 2개나 들어왔다. 4번 타자(호잉)만 간신히 볼넷을 얻어서 나갔을 뿐이다.
2사 1루로 싸늘해졌다. 육성 응원의 볼륨은 현저히 떨어졌다. 이대로 이닝이 마감되려나. 그 때였다. 홈 팀 벤치가 타임을 외쳤다. ‘대타’. 손가락으로 가리킨 타자는 의외였다. 하루종일 비실거리던 환자 아닌가. 반팔/반바지도 시원치 않을 30도 날씨에 혼자 후드 티 차림이었다. 이틀 째 먹지도, 자지도 못하고 끙끙 앓았다. 훈련은 고사하고, 링거 주사로 간신히 버티는 지독한 몸살 환자다.
제 한 몸 가누기도 어려운 그에게 뭘 어쩌라고. 얼핏 그 순간이 떠오른다. 메이저리그 역사상 가장 극적인 장면이다. 1988년 월드시리즈 1차전 때다. 다저스는 시즌 MVP를 빼고 라인업을 짜야 했다. 고질적인 무릎 부상 때문이다. 그런데 토미 라소다 감독은 9회에 그를 대타로 내보냈다. 다리를 절뚝이며 타석에 들어선 그는 극적인 끝내기 2점 홈런을 때려냈다.
이글스의 대타는 커크 깁슨처럼 왼쪽 타석에 들어섰다. 절뚝이지는 않았지만, 그렇다고 씩씩한 맛도 없었다. 잔뜩 움츠러든 스윙은 전혀 타이밍을 만들지 못했다. 초구, 2구. 연거푸 배트가 밀렸다. 파울 2개. 카운트는 0-2로 최악에 몰렸다. 4구째. 144㎞짜리가 낮은 쪽을 향했다.
약간 가운데로 몰리는 느낌이었나? 병색이 완연하던 배트에서 돌연 번개가 번쩍였다. 천둥소리가 났다. ‘빡-’. 잠시 정적이 흘렀다. 이윽고 관중석은 환호와 탄식으로 뒤덮였다. 김지용이 마운드에 털썩 주저앉았다.
관중석이 온통 뒤집어졌다. 그러거나 말거나. 주인공은 그라운드 도는 것도 버거워 보인다. 간신히 베이스를 일주했다. 감독은 다행이다. 가슴팍 때리는 퍼포먼스도 하는둥 마는둥이다. 나인들의 환영도 귀찮아 보인다. 얼른 들어가 벗었던 후드 티를 챙겨 입는다. 으슬으슬. 또다시 오한이 증세가 시작되나보다.
슬랩스틱에 이은 극적인 결말
흥행작은 다채롭게 구성돼야 한다. 감동적인 전개만으로는 부족하다. 관객들의 감정적인 피로감을 덜어줄 장치가 필요하다. 그래야 클라이막스의 폭발력이 배가된다. 그걸 위한 희대의 슬랩스틱 한 편이 극적인 완성도를 높였다.
“죽는 줄 알았어요. 들어가라는 사인을 받았는데, 순간적으로 멈춰야 한다는 생각이 났어요. 그러면서 발이 걸렸던 것 같아요. 솔직히 정신이 없어서 기억나지 않아요.” 9회 말 강경학의 2루타 때 3루에서 발이 꼬인 지성준의 폭풍같은 해명이다.
곁에 있던 감독이 빙긋이 웃는다. “지성준, 아프면 2군에서 다른 포수 부를까?” “아닙니다. 괜찮습니다.”
2사 후였다. 펜스를 직격하는 2루타가 터졌다. 1루 주자는 더 볼 것도 없다. 홈으로 달려들어 승부를 봐야한다. 그런데 못했다. 모두의 탄식이 터졌다. 어디 기회가 또 오겠는가. 한 번 놓치면 어렵다. 상대가 그렇게 호락호락할 리 없지 않은가.
아니나 다를까. 한 숨 돌린 상대는 여유를 찾았다. 다음 타자에 스트라이크 2개를 먹이고 시작했다. 카운트는 0-2로 완전히 투수편이다. 이제 결말은 뻔하다. 십중팔구 수비쪽 승리가 될 것이다. 1루도 비어 있었다. 떨어지는 유인구로 헛스윙을 유도하면 충분하다.
마침 타석에는 요즘 고민이 많은 타자가 입장했다. 이번 시리즈 시작 전까지 10경기에서 38타수 8안타(.211)에 불과했다. 홈런은 (6월 8일 SK전 이후) 10게임째 실종 상태다. 그나마 이날 3회에 2점짜리를 하나 쳐서 조금 살아나는듯 했다. 하지만, 이후로는 별 볼 일 없다. 헛스윙 삼진은 초읽기에 들어갔다.
그런데 이상하다. 버티는 힘이 상상 이상이다. 투 스트라이크 이후에 파울 5개를 걷어냈다. 빠른 볼, 커브, 가리지 않는다. 모두 커트해낸다. 어느 틈에 3-2가 됐다. 대기 타석에는 제라드 호잉이다. 투수는 더 이상 피해갈 데가 없다. 11구째 147㎞짜리가 가운데를 통과한다. 장시간 영점 조정을 끝낸 스윙이 용서할 리 없다. 청주 밤하늘에 까마득히 솟은 새하얀 점 하나는 담장 너머 스코어 보드까지 날아갔다.
“죽는 줄 알았어요.” 울 것 같았던 3루 주자 지성준이 비로서 가슴을 쓸어내렸다.
논리, 이론으로는 설명할 수 없는 그들의 강력함
따지고 보면 그렇다. 어제(21일) 경기는 놀라움의 연속이다. 지독한 감기 몸살로 앓아 누웠던 타자가 대타로 나가 극적인 동점 홈런을 때렸다. 또 심한 슬럼프에서 허우적대던 3번 타자는 9회 말 끝내기포의 주인공이 됐다. 모두 투 아웃, 투 스트라이크 이후에 일어난 일들이었다.
하지만 무엇보다 <…구라다>에게 경이로움을 선사한 장면이 있었다. 강경학의 엄청난 파워다. 솔직히 프로 입단 이후 그를 주전 멤버로 떠올리기는 쉽지 않다. 기껏해야 후보 내야수 정도다. 상당수 경기는 ‘대수비’ 또는 ‘대주자’로 만족해야 했다.
그러던 그가 일약 ‘지명타자’로 라인업에 등장했다. 그것도 쟁쟁한 슬러거 선배들을 제치고 말이다. 물론 탁월한 정확성에 대해서는 평가받아 마땅하다. 한때 6할, 조정 국면을 거친 뒤에도 5할에 가까운(.481) 엄청난 타율을 보이고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번 시리즈에서는 엄청난 파워까지 입증했다. 2차전이던 20일 경기에서는 5회 2점 홈런을 전광판까지 날려보냈다. 어제 3차전에서도 비슷했다. 9회 지성준의 슬랩스틱이 바로 그의 타구에서 비롯됐다. 중견수 키를 훌쩍 넘어 가운데 담장을 직접 때리는 대형 2루타였다. 180㎝, 72㎏의 체구다. 어떻게 그런 8기통급 출력이 뿜어져 나오는 지 모르겠다.
어찌 보면 그들의 시즌 전체가 경이로움 자체다. 주력 타자들 상당수가 부상으로 빠졌다. 투수진도 핵심으로 꼽히던 자원들이 전열에서 이탈했다. 듣보잡 신출내기들이 구멍을 메웠다. 그런데도 멀쩡하다. 아니, 멀쩡 정도가 아니다. 상상 이상으로 잘 굴러가고 있다.
이제 그들은 리그 2위까지 올라섰다. 상대는 공포를 느낀다. 그만큼 섬찟한 강력함으로 압박한다. 도대체 논리적으로, 이론적으로 설명할 수 없는 대목들 천지다.
<올드보이>의 오대수(최민식)가 15년간 감금 생활에서 풀려났다. 우연히 들른 어느 일식집으로 전화 한 통이 왔다. 온통 미스테리함으로 가득 찬 이우진(유지태)에게 오대수가 묻는다.
“누구냐, 넌.”
백종인/ 칼럼니스트 前 일간스포츠 야구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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