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깨비살과 마천목 장군
나뭇잎에 새겨진 천목(天牧)
보성군 회천면 모원마을에 참샘이란 샘이 있다. 마천목 장군 어머니 신씨가 아들을 낳고 처음으로 밥을 지으려고 참샘으로 물을 길으러 갔다. 그런데 샘에 나뭇잎이 떠 있어 그 나뭇잎을 피해 물을 길으려니 쉬운 일이 아니었다. 아침이 늦어질까 걱정이 되어서 할 수 없이 그냥 물을 길어 왔다.
물을 길으러 간 며느리가 늦어지자 가족 모두가 나와 기다리고 있었다. 대를 이을 아들을 낳은 며느리가 몸도 제대로 풀기 전에 밥을 짓는다고 물을 길으러 갔으니 기특하기도 했지만 걱정도 되었다.
얼마 후 며느리가 돌아오자 시아버지가 점잖게 일렀다.
“애야, 늦어서 걱정했구나. 그 몸으로 물을 길으러 가다니... 괜찮니?”
자상하게 걱정을 해주는 시아버지가 고마운 한편으로 아침이 늦어진 것이 죄송해서 신씨는 고개를 들지 못하였다.
“죄송해요, 아버님. 물을 길으려는데 나뭇잎이 떠있어서 이리 피하고 저리 피하다 할 수 없이 그냥 물을 길어왔어요. 그런데 나뭇잎이 하도 별스럽게 생겨서 가져와 봤어요.”
며느리의 말을 듣고 보니 기이하여 시아버지가 물동이를 들여다보니 아니나 다를까 나뭇잎이 떠 있는 것이 아닌가. 벌레가 먹어 다소 흉측해 보이는 나뭇잎을 무심코 바라보던 시아버지가 그 나뭇잎을 건져서 손바닥 위에 놓고 가지런히 펴보니 놀랍게도 글씨가 새겨져 있었다. 자세히 보니 누군가 새긴 것이 아니라 벌레가 먹은 것인데 하늘 천(天)자, 기를 목(牧)자 두 글자였다. 그래서 하늘의 뜻이라 여기고 이름을 천목이라 지었다.
효심이 만들어낸 도깨비살
마천목 장군은 1358년(공민왕 7년) 지금의 보성군 회천면 모원마을에서 태어났다. 장군이 15세 되던 해에 할아버지께서 돌아가셨다. 장군의 4대조가 문하시중이었으니 할아버지의 할아버지인 셈인데, 청렴한 분이어서 가세는 그리 넉넉지 못하였다. 그러다 할아버지 때 급격히 가세가 기울어 겨우 끼니를 이을 정도였다. 아버지가 돌아가신 후 마천목 장군의 아버지는 처가가 있는 곡성으로 이주하였다.
섬진강 상류 두계천(杜溪川)에 얽힌 도깨비살 설화는 마천목 장군의 효심을 보여주는 이야기이다.
도깨비살은 ‘도깨비가 만든 살뿌리’란 뜻이다. 살뿌리란 다른 말로 독살이라고 하는데 강이나 바다 위에 고기를 잡기 위해 돌로 둑을 만들어 쌓은 보라고 할 수 있다. 바다에서는 밀물과 썰물의 차이로 물빠짐이 있을 때 독살에 걸려 나가지 못한 고기를 잡으며, 민물에서는 물살이 쎈 곳에 설치하여 고기가 걸려 잡을 수 있도록 만든 어로방법이다. 곡성의 도깨비살은 전국에서 강에 설치된 독살로는 거의 유일하게 보존되어 있다.
도깨비가 만들었다는 곡성의 도깨비살. 강을 대각선으로 가로질러 막아놓아 물고기를 잡을 수 있게 만든 것이다.
외가가 있는 곡성으로 이사를 왔지만 마천목 장군 집 형편은 여전히 넉넉지 못했다. 어려서부터 효심이 지극하였던 마천목 장군은 섬진강에서 물고기를 잡아 부모님을 도와드렸다. 하지만 어린 아이가 낚시로 잡는 물고기에는 한계가 있었다.
어떻게 하면 물고기를 한꺼번에 많이 잡을 수 있을까 궁리를 하던 끝에 강을 막아 고기를 잡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돌을 쌓아서 물고기를 한곳으로 가두는 방법이었다. 하지만 그러기에는 강이 너무 넓고 물살이 세서 번번이 실패를 하고 말았다.
인근에 있는 돌이란 돌은 다 주워 와서 종일 독살을 쌓던 중에 날이 저물어 할 수 없이 집으로 돌아왔다. 오는 길에 돌멩이 하나가 발부리에 채였다. 내려다보니 푸르고 둥글게 생긴 돌이었는데 얼핏 보기에도 예사로운 돌이 아니었다. 그래서 집으로 가지고 와 부엌에 두었다. 어머니께서 마늘을 찧을 때 쓰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날 밤 잠을 자던 마천목 장군이 심상치 않은 기운을 느끼고 눈을 떠보니 한 무리의 도깨비가 방안에 진을 치고 있었다.
“무슨 일이냐? 정체를 밝혀라!”
어린 소년이지만 어려서부터 담력이 보통이 아니었던 소년 마천목은 전혀 두려워하는 기색이 없이 소리쳤다. 그러자 그 가운데 우두머리로 보이는 도깨비가 말을 꺼냈다.
“우리는 강가에 사는 도깨비들입니다. 저희들의 대장을 돌려주시기 바랍니다.”
“아니 난데없이 대장이라니 그것이 무슨 말이냐?”
“장군께서 석양녘에 주워 오신 둥글게 생긴 돌이 바로 우리들의 대장이오니 제발 돌려주시기 바랍니다.”
보통 소년이 아니라고 판단한 듯 도깨비들은 어린 마천목을 장군이라고 불렀다. 그때 문득 마천목의 뇌리에 독살이 생각났다. 독살을 쌓으려다 실패하고 둥그런 돌을 얻었기 때문이다.
“내 섬진강 두계천에 독살을 만들려다 실패하였는데, 알고 보니 너희들이 방해한 탓이구나!”
그러자 도깨비들이 이구동성으로 아니라고 손을 내저었다.
“그렇다면 너희들이 당장 내가 시키는 대로 독살을 막아주면 바로 너희 대장을 돌려주겠다.”
그렇게 해서 하룻밤 사이에 섬진강가에는 커다란 독살이 생겼고 마천목 장군은 그 독살을 이용하여 물고기들을 손쉽게 잡을 수 있었다. 이 일로 인하여 인근에는 소년 마천목의 효심은 물론 그 용기와 지혜를 칭찬하는 소리가 자자하였다. 그리고 두계천 독살은 도깨비살이라 불렀다.
마천목 장군이 1416년(태종 16년)에 초대 전라병마절도사로 부임하여 만들었다는 전라병영성.
전라병영과 설성(雪城)
강진군 병영면은 조선시대 초기에 전라병영이 있던 지역이라 하여 마을 이름도 병영이라 한다. 지금은 면소재지로 300여 가구에 불과하지만 100여 년 전만 해도 근처에 3000여 호가 살았다. 1895년(고종 32년)까지 53주 6진을 총괄하였을 만큼 전라도 최대의 군 주둔지였다.
조선시대 지방군제는 관찰사가 겸임하는 본영과 병마절도사가 관장하는 병영이 있었는데, 전라도 본영은 전주에 있었고 병영은 강진군에 있었다. 처음에는 광주에 있었는데, 1417년(태종17년) 강진으로 옮겼다. 왜구들의 침략이 잦아 바다 가까이 군대를 배치할 필요가 있었기 때문이다.
전라도 병영의 초대 절도사로 부임한 사람이 다름 아닌 마천목 장군이다. 마천목 장군은 부임하자마자 병영 동헌(東軒)을 짓고 성곽을 쌓는 일에 몰두하였다. 하지만 며칠을 둘러보아도 동헌 자리가 마땅치 않았다.
그러던 어느 날 문득 잠이 들었는데 비몽사몽간에 백발노인이 나타났다. 그러더니 활을 내놓으면서 당겨 보라 하는 것이었다. 무심코 활을 받아 시위를 당겼더니 바람을 가르는 소리가 났다. 시위 소리에 소스라치게 놀라 깨어보니 꿈이었다. 하지만 꿈이라 하기에는 너무나 생생하여 꿈에 화살이 날아간 자리를 찾아가보니 놀랍게도 그곳에 화살이 박혀 있었다.
장군이 보니 가히 동헌 자리로는 맞춤이었다. 그래서 그곳을 병영의 중심으로 결정하고 성곽을 어떻게 쌓을지 고민해보았지만 역시 답이 나오지 않았다. 참모들의 의견도 분분하였다. 수인산, 성자산, 별락산, 화방산 등 사방이 산으로 둘러싸인 분지로 천혜의 요새이기는 하지만 성을 어떻게 쌓는가에 따라 적군의 침략을 방어하는데 천지 차이가 나기 때문이다.
마땅한 생각이 나지 않아 잠이 들었는데 다음 날 일어나보니 밤새 눈이 내려 수북하게 쌓여 있었다. 근래에 보기 드문 눈이었다. 그런데 놀랍게도 동헌 자리를 중심으로 일정 구역만 눈이 전혀 쌓이지 않았다. 마천목 장군은 신령님께서 자신에게 성곽 둘레를 알려준 것이라 믿고 부하들을 시켜 그것을 경계로 성을 쌓게 하였다. 그래서 전라병영이 있던 성은 일명 설성(雪城)이라고도 한다.
충정공(忠靖公) 마천목(馬天牧) 장군
마천목 장군은 태어날 때부터 강건하였고, 무예가 출중할 뿐 아니라 경서(經書)에도 능통했다고 한다.
23세인 1381년(우왕 7년)에 산원(散員)으로 임명받으면서 처음으로 공직에 발을 들였고, 1395년(태조 4년) 정7품인 사직의 자리에 올랐다. 이때는 고려가 망하고 이성계가 조선을 건국한지 4년차 되었으나 아직 왕권이 확립되지 못한 때였다.
마천목 장군은 1398년(태조 7년) 제1차 왕자의 난 때 이방원을 도와 공을 세워 상장군의 직위를 받았고, 1400년(정종 2년) 제2차 왕자의 난 때에는 방간의 편에선 박포를 사로잡아 난을 성공적으로 평정한 공로를 인정받아 좌명공신의 녹훈과 함께 회령군(會寧君)에 책봉되면서 동지총제로 승진하였다.
55세 되던 1412년(태종 12년) 노모 봉양을 위하여 전라도 도절제사로 갔다가 4년 후 59세 되던 1416년(태종 16년)에 초대 전라병마절도사로 부임하여 전라병영성을 축조하였다.
세종 때에 병조판서와 도총제를 거쳐 판우군부사에 이르러 사직하였고, 장흥부원군에 봉해졌다. 1431년(세종 13)에 74세를 일기로 생을 마친 후 영의정에 추증되었다.
세종 임금이 제문과 춘추제향축문을 내려보냈고, 1437년(세종 19년)에는 묘역 사방 10리를 사패지로 하사하여 제향에 도움을 주도록 명하였다. 또한 석곡 방주동에 부조묘를 건립하고 대대로 지키도록 명하였다. 지금의 충정묘는 바로 이 부조묘로서 1438년(세종 20년) 초창되었다. 현재의 이름인 충정묘는 1457년(세조 3년)에 충정이라는 시호를 내림으로써 붙여진 이름이다.
[출처] 도깨비살과 마천목 장군|작성자 월간 설화와 인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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