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 나쁜 사람은 안경을 써야 한다. 근데 돈이 없으면 안경을 못 산다. 또 이빨이 썩으면 치료를 받아야 한다. 그러나 돈이 없어 치료를 못 받으면 음식을 씹지 못한다. 허리가, 배가, 머리가 아파도 돈 없으면 치료를 받을 수 없다. 돈이 없으면 엄청난 통증에 시달려야 한다. 상상을 초월하는 고통을 받다가 죽을 수도 있다. 어느 병원이든 공짜로 아픈 몸을 치료해 주는 곳은 없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돈 없으면 비참한 최후를 맞는다. 돈의 필요성은 진료비에만 국한돼 있지 않다. 집에 가만히 있어도 돈이 나간다. 불을 켜면 전기세, 물을 쓰면 수도세, 보일러를 틀면 가스세를 내야 한다. 세상 모든 게 돈 안 드는 게 없다. 심지어 죽어서도 돈이 필요하다. 국가경쟁력도 돈에 달려 있다. 돈 없으면 경제도, 안보도, 외교도 못한다. 돈으로 경제를 일으켜 세우고, 돈으로 최첨단 무기도 사오며, 돈으로 외교전도 펼친다. 요즘 세상 이래저래 돈 없으면 단 하루도 살 수 없고 문밖에 나갈 수도 없다. 이처럼 돈을 통해 인간행위가 저울질 되고, 인간관계가 규명되며, 심지어 부모자식 사이 형제자매까지도 재산분할 등, 돈 때문에 갈등과 반목을 일으키고 있지 않는가. 사람들은 돈이 삶의 목적은 아니라고 하지만, 행복한 삶을 실현하는데 돈이 필요한 것은 두 말할 나위 없다. 이래서 가난은 일종의 재난이다. 가난은 나의 행복을 가로막는 크나 큰 적이 아닐 수 없다. 여기에 가난은 자유를 파괴하고 미덕의 실현까지도 어렵게 만들며, 또 어떤 미덕은 꿈도 꾸지 못하게 하면 인간을 위축시키고 초라하게 만든다. 그래서 가난을 피하려고 많은 사람들은 오늘도 로또복권 판매소에 줄을 서서 ‘기적의 대박’을 꿈꾸는지 모른다. 요즘 세상의 시대적 조류는 생명의 가치를 파괴하는 방향으로 흘러간다. 사회 한편에서는 인권을 말하지만 음란퇴폐문화, 온갖 폭력범죄 불륜들이 예술이라는 이름으로 공공연히 자행되고 그 같은 행동을 충동질하고 있다. 한마디로 자유와 인권이라는 이름으로 보호를 받아야 할 생명들은 짓밟히고 벌을 받아야 할 생명들이 활개를 치는 세상이다. 물질, 곧 ‘돈’이 생명이고, 명예이고, 권력의 시대인 것이다. 여기에는 인간의 존엄성이라는 가치가 자리할 곳이 없다. 자신에게 경제적인 이익이 되면 손을 잡고 이익을 다 거두고 나면 사정없이 팽개친다. 돈이 되는 일이라면 사람을 속이고, 심지어 죽이기도 한다. 세상의 빛과 소금이 되어야 할 교회도 그렇다. 나는 정통 기독신자는 아니지만 간혹 아무 교회에 갈 때도 있다. 교회에서 목사님의 설교를 듣다보면 간혹 돈 얘기를 한다. 헌금 많이 내야 복 받는다는 것이다. 헌금을 많이 내야 복 받는다는 이론이 어디서 나왔는지 모르겠다. 돈이 없어 헌금을 못 하면 복을 받을 수 없다는 말로도 해석된다. 신성한 하나님의 전당인 교회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이 선포되기보다 돈이 선포되고 있는 것이다. 왜 이 지경까지 교회가 왔을까? 그 원인은 하느님보다 돈을 더 사랑하는 목사들 때문이다. 돈을 한자로 쓰면 ‘전(錢)’이다. 이를 전쟁 전(戰)자와 비교해 보자. 두 글자에 공통으로 들어가 있는 글자가 ‘창 과(戈)’자다. 그런데 돈(錢)은 창이 두 개다. ‘전쟁 전(戰)’자에는 창이 하나밖에 없다. ‘돈 전(錢)’자에는 ‘창 과(戈)’ 자를 두 개나 쓰면서 왜 ‘싸울 전(戰)’자에는 하나인가. 이는 역사상 전쟁으로 죽은 사람보다 돈 때문에 죽은 사람이 더 많다는 뜻이 아닐까? 또한 전쟁에서는 주로 졸병들이 많이 죽는데, 돈은 윗사람이나 아래 사람을 모두 죽이는 것이기 때문이다. 오늘날 일부 정치인이나 고위 공직자들의 부정축재 실상을 보라. 뇌물 때문에 죽은 사람이 얼마나 많은가? 전직대통령들도 돈 문제로 치욕을 당하지 않았던가. 이것이 바로 ‘돈 전(錢)’자가 감추고 있는 창(戈)의 위력이다. 이런 면을 보면 돈이란 만악(萬惡)의 근원이다. 따라서 우리는 돈의 장단점을 제대로 알아야 한다. 열심히 일해서 번 돈을 요긴하게 쓰면 복을 받지만, 과욕을 부리고 돈을 그저 먹으려고 하면 자신의 몸이 창에 찔리고 베인다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 신영규/한국신문학인협회 사무국장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