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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이 망하기까지

淸潭 2016. 8. 19. 14:56

일본이 망하기까지

 

일본이 연합군에 대하여 무조건 항복하던 그 날 일본의 수상이 스즈키 칸타로(1867~1948)라는 해군대장이었습니다. 1945년 4월 그는 천황으로부터 총리 지명을 받고 누차 나이가 많은 것을 구실로 조각을 사양했으나 천황은 “너 아니면 누가 하냐?”며 간청하는 바람에 어쩔 수 없이 수락을 했는데 나이는 그 때 이미 82세였고 패전이 확실시되는 그 무렵, 항복해야 할 불운에 직면한 국가의 수장이 되기를 바랄 사람이 어디 있겠습니까?

스즈키는 육군성을 찾아가 아낭 대장에게 육군 대신의 자리를 부탁하고, 조각을 끝냈지만 풍전등화의 국운의 앞날은 험난하기만 했습니다. 외무대신 토고 시게노리와 육군대신 아낭 사이에는 의견의 대립이 심각했습니다.

포츠담회담에서 투르먼, 처칠, 스탈린이 제시한 항복의 조건을 받아들인 건가 아니면 일본열도에 미군이 상륙해도 끝까지 싸울 건가, ‘이것이 문제’였습니다. 외무대신 토고는 ‘항복’ 밖에 길이 없다고 했고, 다낭 육군대신은 말하자면 끝까지 ‘주전파’(主戰派)였고, 그 두 대신의 의견대립은 끝까지 지속되었습니다.

그렇다면 과연 그 두 사람의 의견대립이 어떻게 끝난 것인가? 두 가지 사실이 벌어져 일본의 대세는 ‘항복’쪽으로 기울어졌습니다. 하나는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 원자폭탄이 투하된 사실이고, 또 하나는 소련이 일본에 선전을 포고하고 만주로 쳐들어온 사실이었습니다. 그러나 스즈키의 내각에서는 결론을 내리지 못하였고 천황이 직접 주재하는 어전회의에서 천황의 입을 통해 ‘항복’이 결정된 셈입니다. 그 뒤에도 옥신각신이 계속 되어 또 한 번 어전회의가 열렸고 또 한 번 천황이 ‘항복’밖에는 길이 없다고 못을 박았습니다. 1945년 8월 14일에야 토고 시게노리 외무대신이 주창한 ‘무조건 항복’이 결정되고 일본의 항복으로 8월 15일 정오를 기해 태평양전쟁이 끝이 났습니다.

스즈키 자신이 군인들의 난동이던 ‘2‧26’사건 때 중상을 입은 몸이라 특히 육군의 반발을 두려워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스즈키는 어찌 보면 우유부단한 자세 때문에 전쟁을 끌었고, 그가 수상이던 131일 동안에 일본은 불필요한 생명의 희생이 강요되었다고 이 늙은 해군대장을 비난하는 역사학도들도 없지 않지만, 스즈키의 우유부단한 자세에도 일리는 있었다고 볼 수도 있습니다.

그 날의 일본과 오늘의 일본을 비교하면 감개가 무량합니다. ‘주전파’ 아낭은 일본이 항복하던 날 자결(自決)했다고 들었습니다. 그것이 일본입니다.

김동길
www.kimdonggil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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