韓國의 史跡 巡禮 (4)
史跡 162호 북한산 성
백제가 수도를 하남 위례성으로 정했을 때 도성을 지키던 북방의 성이다.
백제 개로왕 5년(132)에 세워진 곳으로, 11세기 초 거란의 침입이 있을 때
현종이 고려 태조의 관을 이곳으로 옮겨 오기도 했다.
고려 고종 19년(1232)에 몽고군과의 격전이 있었고,
우왕 13년(1387)에 성을 다시 고쳐지었다.
조선시대에 임진왜란과 병자호란 이후
도성 외곽을 고쳐짓자는 의견이 일어나
숙종 37년(1711) 왕명으로 토성을 석성으로 고쳐지었다
史跡 56호 행주 산성
임진왜란(1592) 때 권율 장군의 행주대첩으로 널리 알려진 곳으로,
흙을 이용하여 쌓은 토축산성이다.
행주대첩은 임진왜란 3대 대첩 중 하나로,
선조 26년(1593)에 왜병과의 전투에서 성 안의 부녀자들이
치마에 돌을 날라 병사들에게 공급해 줌으로써
큰 승리를 거두었다.
당시 부녀자들의 공을 기리는 뜻에서 행주라는 지명을 따서
‘행주치마’라고 하였다고도 한다.
현재 1603년에 세운 ‘행주대첩비’가 남아 있으며
권율 장군을 모시는 충장사가 있다.
史跡 57호 남한 산성
북한산성과 함께 수도 한양을 지키던 조선시대의 산성이다.
신라 문무왕 13년(673)에 한산주에 주장성(일명 일장성)을
쌓았다는 기록이 있는데, 현재의 남한산성으로 보인다.
남한산성이 현재의 모습으로 갖춘 것은 후금의 위협이 고조되고
이괄의 난을 겪고 난 인조 2년(1624)이다.
인조 14년(1636) 병자호란 때 왕이 이곳으로 피신하였는데,
강화가 함락되고 양식이 부족하여 인조는 세자와 함께
성문을 열고 삼전도에서 치욕적인 항복을 하였다.
그 뒤 계속적인 수리를 거쳐 오늘에 이르고 있다
史跡 10호 서울 성곽
조선건국 초에 태조가 한양으로 수도를 옮기기 위하여
궁궐과 종묘를 먼저 지은 후,
태조 4년(1395) 도성축조도감을 설치하고
한양을 방위하기 위해 성곽을 쌓도록 하였다.
석성과 토성으로 쌓은 성곽에는 4대문과 4소문을 두었다.
현재 삼청동 ·장충동 일대의 성벽 일부와
남대문 ·동대문 ·동북문 ·홍예문만이 남아있다
史跡 297호 서울 송파구 몽촌토성
한강의 지류인 성내천 남쪽에 있으며, 둘레가 약 2.7㎞ 되는
백제 전기의 토성이다.
출토유물로는 동전무늬가 찍힌 자기조각과
여러 종류의 토기류, 철제 무기류 등이 나왔다.
특히 동전무늬가 찍힌 자기조각은 중국 서진(265∼316)대의
유물이어서 시대 확인에 있어 중요한 역할을 한다.
위치·규모·출토유물로 볼 때 백제 초기 군사적·문화적 성격을
살필 수 있는 좋은 유적이며,
주변에 풍납토성과 백제 석촌동 무덤들을 비롯한 백제 전기의
유적이 있어 역사적으로도 가치있는 곳이다
史跡 11호 서울송파 풍납리 토성
한강변에 남아있는 초기 백제시기의 토축 성곽으로,
주로 풍납토성이라 부른다.
원래는 둘레가 4㎞에 달하는 큰 규모의 토성이었으나,
1925년 홍수로 남서쪽 일부가 잘려나가 현재는 약 2.7㎞ 가량 남아있다
史跡 101호 서울 송파 삼전도비
병자호란 때 청에 패배해 굴욕적인 강화협정을 맺고, 청태조의
요구에 따라 그의 공덕을 적은 비석이다.
조선 인조 17년(1639)에 세워진 비석으로 높이 3.95m, 폭 1.4m이고,
제목은 ‘대청황제공덕비(大淸皇帝功德碑)’로 되어있다.
병자호란이 끝난 뒤 청태종은 자신의 공덕을 새긴
기념비를 세우도록 조선에 강요했고
그 결과 삼전도비가 세워졌다.
비석 앞면의 왼쪽에는 몽골글자, 오른쪽에는 만주글자,
뒷면에는 한자로 쓰여져 있다
史跡 330호 효창공원
조국의 독립을 위해 몸바친 애국지사들의 유해를 모시는 곳이다.
원래는 효창원으로, 정조의 큰 아들인 문효세자·그의 어머니 의빈 성씨·
순조의 후궁인 숙의 박씨·숙의 박씨의 자녀인 영온공주의 무덤이 있었다.
일제시대에 문효세자의 묘를 경기도 고양에 있는
서삼릉(西三陵)으로 옮기면서 효창원은 효창공원이 되었다.
광복 후에는 김구·이동녕·차이석·이봉창·윤봉길·조성환·안중근을 비롯해
나라를 위해 목숨을 바친 분들의 무덤를 모시게 되었으며,
매년 이 분들을 위한 제사를 지내고 있다. 무덤지역이 넓고
소나무숲이 울창하며, 무덤 주위로 산책로가 있다.
史跡 267호 서울 암사동 선사주거지
아차산성을 마주하는 한강변에 있는 신석기시대 유적이다.
B·C 4,000∼3,000년기에 걸친 유적이다.
20여 기의 집터와 딸린시설, 돌무지시설이 드러났다.
. 바닥이 뾰족한 빗살무늬 토기가 많이 나왔으며 돌도끼,
그물추, 불에 탄 도토리 등이 출토되었다.
한강유역의 대표적인 신석기시대 유적이며,
지금까지 확인된 우리나라 신석기시대 유적중 최대의
마을단위 유적으로서 매우 중요하다.
또한 당시 생활모습을 살필 수 있는 유물이 많이 출토되어,
신석기인의 문화를 추측할 수 있는 자료로 평가된다
史跡 193호 동구릉
조선을 세운 태조의 무덤으로 쓰여지기 시작한 뒤 조선시대를 통하여
가족무덤을 이루고 있는 왕릉군이다.
동구릉이란 도성의 동쪽에 있는 9개의 무덤이란 의미로,
무덤이 생길 때마다 동오릉·동칠릉이라 불렀는데 철종 6년(1855)에
수릉이 옮겨진 이후 동구릉으로 굳어졌다
史跡 323호 파주 윤관장군묘
고려 중기의 문신인 윤관(?∼1111)의 무덤이다.
그는 고려 문종(재위 1046∼1083) 때 문과에 합격하였고,
숙종 9년(1104)에 ‘동북면행영병마도통(東北面行營兵馬都統)’이 되어
국경을 침입한 여진과 싸웠으나 패하였다.
그 후 여진정벌을 위해 별무반을 편성해 예종 2년(1107)에
여진을 정벌한 후 9성을 쌓았다.
史跡 299호 경기 화성 제암리 3·1운동 순국유적
3·1운동때 일제가 독립운동을 가장 잔인한 방법으로 탄압한 학살현장이다.
3월 10일경에 안종린·안정옥 등이 서울에서 독립선언문과 격문을 입수하고,
3월 25일에 뒷산에 올라가 마을 사람들과 함께 봉화를 올리고 만세를 외쳤다.
이에 일본 경찰이 무차별 사격과 매질을 가해 많은 부상자가 발생하였는데,
이때 무참히 살해된 주민은 어린이를 포함하여 23명이었다.
일본군은 다시 마을을 다니며 민가에 불을 지르고,
이웃마을 고주리에서는 주민들을 마구 칼로 찔러 죽였다.
불탄 예배당터에는 순국기념탑을 세우고,
국·내외 관계자료를 모아 기념관에 전시해 국민 교육의 현장으로 활용하고 있다.
[출처]
韓國의 史跡 巡禮 (4) (삶의 배움과 나눔터) |작성자
남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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