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예술/서예실

추사 김정희

淸潭 2016. 3. 3. 10:47


추사체라는 글씨체로 우리에게 유명한 서예가이자 화가였던 김정희는 조선 말기, 부패한 정치의 희생양이었습니다. 뼈대있는 양반 가문에서 태어나 출세 가도를 달리다가, 조선을 망하게 만들었던 당파 싸움에 휘말려 거의 10여년 동안 제주도와 북청에서 귀양살이를 하다가 힘들고 기구한 일생을 마쳤지요. 하지만 김정희는 그가 그렸던 대나무처럼 꼿꼿한 삶을 살았습니다. 어느 누구에게도 부끄럽지 않다고 스스로 자부하였으며, 많은 이들에게 학문의 본질과 선비의 도리를 가르쳤습니다. 그의 정신 세계는 그가 그린 그림에서도 볼 수 있답니다.

추사라는 호를 사용하는 김정희가 태어난 집안은 왕족의 후예로서, 본디부터 강직한 성품의 가문이었습니다. 전해오는 일화에는 그가 3세 때 붓을 잡고 글씨를 썼으며, 6세 때는 입춘첩을 써서 붙이기도 했다고 하니, 어렸을 때부터 그 총명함이 남달랐나 봅니다. 24세 때는 과거에 급제하고, 병조참판까지 지내셨던 아버지를 따라 청나라 여행을 하고, 조선 학문의 한계를 뛰어넘는 새로운 청의 문화를 접할 수 있었습니다.

 

새로운 세계에 감동을 받은 그는 수많은 청나라 인사들과 교류하면서 그 곳의 선진사상에 빠져들게 되었고, 이는 그의 학문세계에 반영됩니다. 또한 실학사상의 선구자였던 박제가에게 사사를 받으면서, 우물 안 개구리와 같은 조선의 문화와 학문을 바꾸어야 한다고 생각한 거죠. 김정희는 선진학문을 탐구하면서 추사파라는 학풍을 형성할 만큼 조선의 선비 세계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습니다.

그가 주장한 실사구시(實事求是)라는 학문의 정신은 근거없는 지식과 선입견으로 학문을 하지 말고, 사실적인 진리를 탐구하라는 것입니다. 즉 실험과 연구를 거쳐서 객관적이고도 논리적인 사실만을 추구하는 것이죠. 이러한 그의 정신은, 모든 사리사욕과 허영을 버리고, 정직하면서도 대상의 본질만을 압축시켜 표현했다는 평가를 듣고 있는 추사체에 잘 드러나 있습니다.

청나라 문인에게서 “해동제일의 문장” 이란 칭찬을 받았던 추사는 <서화불분론>이란 미술 이론을 발전시키기도 하였습니다. 이는 시,서,화를 일치시키는 청나라 예술의 영향으로 “글씨는 그림처럼, 그림은 글씨처럼” 이라는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아마도 장승업이 들었다면 가슴을 쥐어 뜯으며 우울해 했을 얘기지요.

김정희는 당시 최고의 엘리트로서 암행어사와 의정부 검상, 성균관 대가성을 거쳐 병초판서, 형조판서등을 두루 거치면서 출세의 가도를 달렸습니다. 그러던 중 헌종6년, 1840년 당파싸움과 세도정치의 희생양이 되어 제주도 유배길을 오르게 됩니다. 한참 그 세력이 하늘로 치솟던 중 바닥으로 떨어진 것이니, 그 충격은 이루 말할 수 없었을 겁니다.

권력의 무상함을 뼈 속으로 느끼며 추사는 제주도에서의 귀양살이를 자신의 학문과 예술을 재정비하는 시간으로 삼았습니다. 바닷바람이 많기로 유명한 그 곳에서 자신의 내면 깊숙히에 있는 모든 욕망을 바람에 날려보낸 것 같아요. 그 고독한 유배생활 중에 추사는 그 자신만의 독특한 서체를 정립하였으며, 많은 제자도 길렀습니다.

특별히 그는 벗들과 차를 만들어 마시며 시를 짓는 것을 좋아했다고 합니다. “참선과 차를 끓이는 일로 또 한 해를 보냈다”라는 글도 남겼을 정도니, 어느 정도인지 짐작이 가시죠? 추사와 차를 마시던 친구들은 그에 대해 “폭우나 번개처럼 당당했다”고 말합니다. 때로는 온화했으며 슬픈 소식을 들으면 눈물을 흘리기도 했다고 하구요.

추사는 제주도에서 풀려난 뒤에도 몇 번의 유배생활을 더 겪은 후에 관악산 기숡에서 은거하다가 71세의 나이로 생을 마쳤습니다. 그의 영정처럼 하얀 수염과 고매한 문인의 모습으로 말입니다.

靜坐處茶半香初 妙用時水流花開

고요히 앉았노라면 차가 한창 익어 향기가 나기 시작하는 듯 하고
신묘한 작용이 일어날 때는 물이 흐르고 꽃이 열리는 듯하네



 


 


 


 


 



[고사소요도(高士逍遙圖) (1844) ]
고사 소요란 “뜻 높은 선비가 거닐다”는 뜻입니다. 그의 그림 중 유일하게 사람이 그려져 있는 작품이라고 하네요. 원나라 문인화풍의 간결한 필치가 엿보이기도 하는 데요, 작품의 완숙미는 다른 작품들에 비해 떨어진다고 합니다. 여느 그림처럼 가슴 속에서 붇받치는 감동에 밀려 그려진 것이 아니라 이성적인 사고로 그려진 듯하다는 평을 받기도 합니다.


 


 



[ 세한도(歲寒圖) (1844)]
이 그림은 김정희의 가장 대표적 작품이자, 조선 시대 문인화 중 최고의 작품으로 꼽히고 있습니다. 심지어는 이 <세한도>에 대해 평가를 하는 것 조차 불경스러운 일로 간주될 정도로 신격화, 신비화 되어 있죠. 이는 제주도 유배 중에 그의 처연한 심경을 생생하게 그려냈다고 생각되고 있기 때문입니다.


 


 



[ 지란병분(芝蘭竝盆) (1844)]
“지초와 난초가 향기를 함께 하다” 는 뜻의 그림입니다. 중심부에 난초를 엷은 먹으로 그리고, 오른 쪽에 진하게 영지를 그렸는 데요, 영 어울릴 것 같지 않았던 이 두 가지가 추사의 정서를 보여주는 듯 조화롭게 그려져 있습니다. 왼쪽에는 대원군인 이하응과 친구 권돈인의 발문이 적혀있습니다.


 


 



[ 부작란도(不作蘭圖) (1844)]
문인화의 정수를 보여주는 추사의 전형적인 난화입니다. 그는 난과 대나무를 많이 그렸는 데요, 대원군도 그에게 난 그림을 배웠을 정도입니다. 특히 유배생활 중에 제주도의 한란을 많이 관찰하고, 아끼며 그 그림을 그렸다고 합니다. 그림 속의 힘찬 난을 보면, 꼿꼿한 그의 기개가 보여지는 듯 합니다. 그나 저나 그림에 도장은 참 많이도 찍혀 있네요.


 


 



[ 영영백운(英英白雲) (1844)]
“산천이 멀어서 옛적에는 나를 찾아 주지 않더니, 이제는 어떠한가. 아침저녁으로 서로 대하기를 바란다” 는 발문이 오른 쪽에 적혀있네요. 멀리 있는 벗을 그리워하다가 외로움의 차원을 넘어, 이제는 허허로움마저 느낄 수 있네요. 제주 유배 중에 기거하던 자신의 집을 그렸습니다. 고고한 모습이죠.


 


 



[ 증 번상촌장(樊上村庄) 난 (1844)]
추사가 제주 유배시절에 친구 권돈인을 위해 그린 작품이며 번상촌장은 번리에 살던 권돈인의 별서이름이라고 하네요. 왼쪽 위의 발문은 권돈인이 붙인 것입니다. “난초꽃과난초잎이 산중 서재에 있는데 어디에서 부는 가을바람이 사람의 애를 태우네 바람과서리에 쉽사리 꺽인다면 어찌 오래도록 산중 서재에 향기를 남기겠는가!”


 


 



[ 추사 김정희 서 (1844)]
조선 최고의 명필로 칭송받고 있는 그가 고독한 유배 생활 중에 이루어낸 예술 세계입니다. 세상의 권력과 물욕에서 벗어나 자신을 들여다 보며, 자신을 비워 창조해낸 거죠. 조선시대에는 글씨자체의 멋과 아름다움도 즐겼는데요, 글씨도 그림처럼 열정을 다하여 써 내려간 그의 마음을 느낄 수 있습니다.


 


 



[ 묵란도 (1892)]
대원군 이하응의 묵란도 입니다. 그는 추사에게 난치는 것을 배웠는 데요, 추사는 이하응을 조선에서 제일 가는 난 그림을 그린다고 칭찬하였습니다. 마치 벼랑에 핀 듯 바위 틈새에 피어 난초와 괴석이 어울린 석란의 모습인데요, 그림 두 폭이 짝을 이루고 있습니다. 이는 대원군이 노년의 병중에 그렸음에도 매우 깔끔하고 고결하게 그려내었습니다.


 


 



[ 방석도산수도 (1850)]
추사가 아끼던 제자 허유가 젊은 시절에 그렸던 그림입니다. 그림 위의 발문은 김정희가 썼습니다. 깔끔하고 고매한 정서가 전형적인 문인화의 품위를 느끼게 하고 있습니다. 젊은 감각 그대로 다소 거칠지만 나름대로 진지한 태도도 묻어나고 있네요.


 


 



[ 묵란도 (1850)]
추사를 무척 따랐던 조희룡의 작품입니다. 그는 특히 난초와 매화를 잘 그렸는데요, 추사는 그에 대해 “조희룡은 난초를 배워서 치지만, 끝내 화법이라는 한길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것은 가슴속에 문자기가 없기 때문이다.”라는 평을 합니다. 이는 화법과 기교에만 치중한다는 것이죠. 하지만 나름대로 절제된 표현과 힘찬 필선은 후대인들에게 인정받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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