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조선판 지독한 사랑, 그 주인공
- 시인 최경창과
홍랑
<최경창 부부 합장묘와 그 아래 홍랑의 묘>
(경기도 파주시 교하읍 다율리)
경기도 파주시 교하읍 다율리.
해주 최씨의 선산.
부부합장묘가 1기 있다.
무덤의 주인은
종성부사를 지낸 이조판서 추증 최경창과 그의 부인 선산 임씨다.
'이조판서 추증 종성부사 역임 고죽 최경창, 정부인 선산임씨 합장 묘'
그런데 최경창 부부의 합장묘 아래에,
또 1 기의 묘가 있다.
이 무덤의 주인은, 함경도 홍원의 기생으로 알려진 시인 홍랑.
어쩌서 사대부 부부합장묘 아래,
기생의 무덤이 함께 있는가?
시대를 풍미했던 한 시인과 가장 천한 신분의 기생.
고죽 최경창(崔慶昌)과 기생 홍랑.
이들 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일까?
조선시대 사대부와 기생의 사랑은 언제 들어도 흥미진지한 이야기다.
그 유명한 황진이와 서경덕, 매창과 허균, 그리고 전해오는 또 다른 러브 스토리가 있다.
'묏버들가'의 주인인 홍랑과 그녀의 연인이었던 최경창.
이들의 사랑은 죽은 이후까지도 이어지는 끈질기고도 애절한 것이었다.
시대와 타협하지 않은 한 천재 시인과 그를 사랑한 기생의 가슴 저린 이야기.
2. 운명같이 시작된 사랑
- 간밤 비에 새잎 나거든 날인가 여기소서!~
공주사대 부설고등학교.
언어영역 수업시간.
학생들이 옛시조 한 수를 배우고 있다.
시조는 남녀간의 정을 나눈 시다.
묏버들 가려 꺾어 보내노라 님의 손에
자시는 창밖에 심어두고 보소서
밤비에 새잎 곧 나거든 날인가도 여기소서
- 홍랑
"정말 간절했던 것 같애요.
"표현이요 대개 여성스럽구요.
헤어지는 연인에게 이렇게 자신의 마음을 표현하는 게 가장 좋을 것 같은데,
전 이렇게 한 남자 오래 사랑하라 하면 못할 것 같아요."
- 이경림 학생
"수능을 비롯한 여러 시험을 대비해서 실제로 많이 가르쳐지고
아이들도 많이 읽는 시조입니다.
우리말의 순수성을 잘 담고 표현했기 때문에
문학사적인 가치는 대단히 높게 평가할 수 있는 시조입니다."
- 허왕욱 교사
그렇다면 함경도 홍원에 기생 홍랑이 지은, 이 시조는 어떻게 탄생했을까?
최경창의 집안에는 최경창과 기생 홍랑의 첫 만남이 전해져 내려온다.
그 계기는 1573년 가을로 거슬러 올라간다(선조 6년).
당시 최경창이 북도평사가 되어
함경도 경성으로 부임하고 있었다.
부임하는 도중 홍원군수가
최경창의 벼슬길을 축하하는 잔치를 베푸는 자리에서
두사람은 처음 만난다.
한 기생의 창이 끝나고
홍원군수가 홍랑을 지목했는데, 그녀는 이렇게 말한다.
"저는 노래보다 시를 더 좋아합니다."
"누구의 시를 좋아하느냐?"
"고죽선생님의 시를 좋아합니다."
".......... "
"내가 바로 고죽이니라."
홍랑은 마주보고 있는 사람이 고죽인줄 모르고 한 말이었다.
최경랑과 홍랑의 운명적인 만남은 이렇게 시작되었다.
"계유년(1573년) 가을에 내가 북도평사로 부임해 갔을 때
홍랑이 따라와 부임지에 있었다."
(만력계유추여이북도평사부막홍랑수재막중
萬歷癸酉秋 余以北道評事赴幕 洪랑隨在幕中) - <회은집>
"북평사는 함경도 지역 군사최고책임자의 보좌관 또는 부관의 자리입니다.
최경창은 경성으로 가면서 홍원에서 홍랑을 데리고 갔다고 합니다.
이걸로 봐서 두 사람은 첫눈에 반했거나 뜨거운 사랑을 했다고 보여집니다."
- 최명환 교수(공주교육대학교 초등국어교육과)
당시 서른 다섯살의 최경창과
그보다 훨씬 어린 것으로 짐작되는 홍랑의 만남.
이 두 사람은 최경창의 부임지인 경성에서 함께 지내게 된다.
그러나 둘의 첫 만남은 짧았다.
"다음 해 봄,
내가 서울로 돌아갈 때
홍랑이 쌍성까지 따라왔다가
거기서 헤어져 돌아갔다.
(翌年春 余歸京師 洪랑追及雙城而別還
익년춘 여귀경사 홍랑추급쌍성이별환)" - <회은집>
홍랑과 헤어진 최경창이 함관령 아래 한 주막에 다다랐다.
여기서 그는 서찰 한 장을 받는다.
그것은 한글로 지은 홍랑의 시조, 바로 '묏버들가'였다.
최경창과 헤어져 돌아가던 홍랑이 지어 보낸 것이었다.
"함관령에 이르렀을 때
비가 내리고
날은 저물어 어두웠는데
노래(시조) 한수를
나에게 보냈다.
(到咸關嶺 値日昏雨暗 仍作歌一章以寄余
도함관령 치일혼우암 잉작가일장이기여)" - <회은집>
연인을 보내고 그리워하는 마음을 담은 홍랑의 이 시조를
최경창은 후일 '함관의 노래'라고 부른다.
"이 작품은 문학사적으로 봐도 뜻이 그윽하고,
소리가 매끄럽고 사각거리는 것이 묘미라고 평가하겠습니다.
일단 우리말의 어감을 잘 살렸고,
그 묘미를 잘 표현한 작품이라 볼 수 있을 듯 합니다."
- 김용찬 교수(순천대 국어교육과)
홍랑이 지은 시조엔 따로 제목이 없다.
이후 최경창은 이 시조를 한시로 번역했는데
이것이 바로 최경창의 '번방곡'이다.
이처럼 두 사람은 그들의 짧은 만남과 긴 이별을 시로 나누었다.
飜方曲(번방곡)
折楊柳奇與千里人(절양류기여천리인)
爲我試向庭前種(위아시향정전종)
須知一夜新生葉(수지일야신생엽)
憔悴愁眉是妾身(초췌수미시첩신)
단 한 번의 만남으로 사랑에 빠졌던 최경창과 홍랑.
함경도에서의 두 사람의 이별은
조선을 대표하는 연애시 '묏버들가'라는 절창을 남겼다.
3. 당쟁, 시대와 타협하지 않은 고죽 최경창
한 여인의 뜨거운 사랑을 받고 절창까지 이끌어낸 최경창,
그는 어떤 사람인가?
최경창은 1539년 전남 영암 구림마을에서 태어났다.
영암에는 그의 기념관이 있다.
기념관 앞 시비에는
홍랑의 '묏버들가'와
최경창이 번역한 한시 '번방곡'이
나란히 새겨져 있다.
백광훈(白光勳, 1537~1582)은
나중에 '3당(唐) 시인'의 한 명으로 평가받을 만큼 뛰어난 시인이다.
(* 3당 시인 - 최경창, 백광훈, 이달)
그가 남긴 <옥봉집(玉峰集)>에 보면,
최경창은 열두살 때부터
청련 이후백(靑蓮 李後白, 1520(중종15)~1578(선조11))의 문하에서
글을 배운 것으로 되어있다.
"공(옥봉)이 열 네살 때, 청련 이후백에게 배웠다.
이 때 고죽 최경창이 함께 배웠다.
(최경창은 옥봉보다 두 살 어림)"
- <옥봉별집>
최경창의 문집 <고죽집(孤竹集)>을 보면
그가 아홉 살에 적은 시가 전한다.
이 때부터 뛰어난 글재주를 보였다.
'등남악(登南岳)'
푸르고 푸른 남산의 멧부리가
우뚝하게 천지 사이에 솟았네
올라가서 애오라지 내려다보니
한강물 가늘게 졸졸 흘러가네
남산에 올라 한강을 바라보는 상상을 하면서 지은 이 시에는
어린 최경창의 포부와 기개가 잘 담겨있다.
"높이 올라가보면
그 아래로 비춰지는 현상들이 작음을 알 수 있다는
어떤 높은 경지의 기개를 담은 것 같고,
아마 9살 어린 나이에
세상에 대한 자기의 포부,
자기 학문과 인격에 대한 포부와 기상이,
은연중 이 시에 드러난 것으로 보입니다."
- 김종서 교수 (한국학중앙연구원)
이렇게 뛰어난 문재를 보인 최경창은
약관(남자 나이 20세)이 되기도 전에
이이, 이산해, 송익필, 최립, 백광훈 등
당대 쟁쟁한 문인들과 함께 '팔문장'으로 불렸다.
"스무살도 되기 전에
이율곡, 송익필, 최립 등의 여러 재능있는 사람들과 함께
무이동에서 시와 문장을 주고받아
세상에서는 이들을 '팔문장계'라고 불렀다."
- <고죽집 후서>
최경창 역시 벼슬길에 올랐다.
24세에 진사시에 합격했고
선조 1년, 29세에 드디어 문과에 급제했다.
그러나 최경창의 관직 생활은 순조롭지 못했다.
1579년 6월.
최경창이 종성부사로 임명되자 대관들이 이를 반대하고 나섰다.
그러나 최경창의 재능을 높이 평가하고 있던 선조는
종성부사에서 물러나게 하라는 대신들의 주장을 끝내 듣지 않았다.
"임금은 평소부터 최경창의 재능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무릇 3개월이나 논핵했어도 끝내 윤허하지 않았다."
- <선조수정실록(1579. 6)>
이처럼 최경창은 임금의 특별한 신임을 얻고 있었다.
그러나 최경창에 대한 일부 대신들의 평가는 달랐다.
서애 유성룡(西厓 柳成龍, 1542~1607)도
최경창에 대해 부정적인 평가를 하고 있다.
대비였던 인순왕후의 국상중인데도
최경창이 홍랑을 데려다 첩으로 삼은 것에 대해
대간들로부터 비판을 받았다고 지적했다.
유성룡은
최경창이 나중에 서울에서 홍랑과 재회,
대간들의 탄핵을 받은 사실을 상기시키고 있는 것이다.
"최경창은 사람됨이 거리낌이 없어
국상을 당했을 때에
양계에 창기를 데려다 첩으로 삼았으므로
당시 대간이 이를 논박했다."
- <선조실록, 1579. 6. 8>
이보다 앞서 최경창은 선조 6년.
김효원, 김우옹과 더불어 '독서당'에 추천되었다.
이는 당시 관리들에게 큰 의미가 있는 것이었다.
"예조와 '독서당' 인원에 대해서 의논해
김효원, 김우옹, 민충원, 허옹, 최경창 등을 더 간택하였다."
- <선조실록, 1573. 11. 23>
"문과 급제자 가운데
나이가 젊은 뛰어난 능력을 가진 문사들을 뽑은
'사가독서당(賜暇讀書堂)'에 선발되었다는 것은
문과 급제보다 더 영광으로 생각했었습니다.
최경창이 '독서당'에 뽑혔다는 것은
그만큼 장래가 촉망되는 것을 말합니다."
- 안대회 교수(성균관대 한문학과)
그러나 최경창은 '독서당'에 간택되지 못한다.
덕망이 없는데도 '독서당'에 선발되는 건 옳지 않다는 여론이 들끓었던 것이다.
"(간원이 아뢰기를)
민충원과 최경창은 본디 덕망이 없는데도
갑자기 그 선발에 끼었으므로
합당하지 않게 여기니 쫓아내소서"
- <선조실록, 1573. 11. 26>
결국 최경창은
정언, 도평사, 영암군수 등 미관말직을 전전했다.
이후 종3품의 종성부사가 되었으나
역시 대간들의 반대가 있었고,
종 5품 직간으로 다시 벼슬이 낮아지기도 한다.
허균이 지은 <학산초당>에 이러한 최경창의 처지에 대한 기록이 나온다.
허난설헌은 그가 변방을 전전하는 것을 슬퍼한다고 읊었다.
"(최경창, 백광훈 등이) 변방의 고을살이로 내버려져 있음이 슬프네"
- 허난설헌의 '감우시'중
그렇다면 당대 최고의 시인이었던 최경창이
이렇게 불우한 관직생활을 했던 이유는 무엇일까?
당시 조선은 당쟁이 막 시작되는 즈음이었다.
김효원과 심의겸이
이조전랑직을 둘러싸고 갈등을 보이다가
결국 동서로 붕당이 표면화되었다.
동인 - 김효원, 기성 사림
서인 - 심의겸, 신진 사림
이 때가 1575년.
최경창이 관직에 나온 지 8년째 되는 해였다.
그렇다면 최경창은 정말 당파에 휘말렸을까?
"(창기를 데려다 첩으로 삼았는데도)
서인들이 그를 지우(知友)라 하여 그 사실을 비호하였습니다."
- <선조실록, 1579. 6. 8>
유성룡은
최경창이 서인들의 친구였기 때문에
홍랑과의 추문도 보호받았다고 주장하고,
사관들은 최경창이 원래 당인으로 지목된 인물이 아니었으나
비변사 등에 선배들이 많아 논쟁에 휘말렸다고 했다.
"최경창은 본래 당인으로 지목된 인물이 아니었으나
비변사 당상관에 선배들이 많았기에
그를 둘러싼 논쟁이 특히 준엄했다."
- <선조수정실록, 선조12년, 1579. 6. 1>
"동서 붕당이 시작되는 그 시점에서
고죽의 처신이 공격의 빌미가 되었다고 보여집니다."
- 김종서 교수 (한국학중앙연구원)
그렇다면 최경창의 벼슬살이가 순조롭지 못했던 것이
그가 단지 서인측 인물들과 가까웠기 때문이었을까?
허균의 형, 허봉(許?, 1551~1588)은
당시 동인의 대표 주자로 촉망받는 인물이었다.
이런 허봉이 최경창을 좋아하여
연이어 열흘이나 최경창을 찾아왔다.
그러나 최경창은 허봉이 편벽하다 하여
단 한번도 얼굴빛을 누그러트리지 않았다고 한다.
그리하여 허봉이 매우 노여워하였다고 했다.
"허봉이 매우 노여워하여
여러 차례 홍문관 전랑 선발에서 제외시키고
마침내 외직으로 내보냈다고 되어있다."
- <고죽집 후서>
이산해(李山海, 1539(중종 34)~1609(광해군 1)) 는
나중에 영의정에 오를 만큼 조선 정계에 인물이었다.
그러나 최경창은 이산해에 대해서도 매우 단호했다.
이산해의 마음이 공정치 못하다고 일방적으로 끊었다.
상대방이 고관대작이라 하더라도 자신의 마음에 들지 않으면
최경창은 과감하게 관계를 끊어버린 것이다.
"공은 후일 재상 된 이산해와 사이좋게 지냈으나
후에 그의 마음가짐이 공정하지 못함을 보고는 왕래를 끊었다."
- <고죽집 후서>
"최경창은 성격이 강직하고
시에 대한 의식이 투철하여
남의 눈치를 보거나 타협을 하는데 거의 관심을 갖지 않았습니다.
이러한 그의 성격과 시의 정신은
당대 정치인과의 관계에서도 부정적인 영향을 미쳤고
그의 정치적 성장에도 걸림돌이 되었다고 보여집니다."
- 최명환 교수(공주교육대학 초등국어교육과)
한편 최경창의 호방함과 인간미를 엿볼 수 있는 일화들도 보인다.
선조가 여러 문무대신을 모아 활쏘기 대회를 열었을 때였다.
최경창이 모든 화살을 명중시키자, 활을 잘 쏜다는 옆의 사내가 최경창을 두려워했다.
이에 최경창은 그에게
"걱정마시오. 오늘은 내가 몸이 좋지 않으니 걱정할 것 없소." 하더니
마지막 화살을 허공에다 쏘아버렸다고 한다.
이 바람에 최경창은 2등이 되었다.
마음에 들지 않은 인사들을 대하는 것과는 사뭇 다른 그의 호방한 면모다.
"활 잘 쏘는 자가 장원으로 상을 받았고
공이 그 다음을 차지하여 호피와 말을 하사받았다."
- <고죽집 후서>
또한 그가 영암군수로 있을 때의 일화도 있다.
어느날 당대 최고의 시인이자, 허균 등의 스승이던
손곡 이달(蓀谷 李達, 1539~1612)의 시를 받는다.
'고죽에게 드리는 비단의 노래'
- 손곡 이달
장사아치 강남 저자에서 비단을 파니
아침 해가 비치자 자주빛 안개가 피어나는구나
미인은 그걸 사서 치마며 허리띠를 만들려는데
주머니 더듬어도 돈은 없구료.
이달이 좋아하는 기생에게 비단을 사주고 싶으나, 돈이 없다는 내용이었다.
최경창은 곧 화답을 한다.
"(손곡의) 시는 한 자가 천금이니
감히 비용을 아끼랴 하고는
한 자에 각각 세 필씩 쳐서 그의 요구에 응해 주었다."
- 허균, <학산초당>
이처럼 호방하면서도 자신의 뜻과 맞지 않았던 사람들에게 단호했던 최경창.
그는 끝끝내 세상과 타협할 줄 모르는 예인 기질을 가진 시인이었던 것이다.
그리하여 최경창은 스스로를 '고죽(孤竹)', '외로운 대나무'라 지칭한다.
즉 자신을 바닷가 높은 벼랑에 서 있는 대나무에 비유,
세상에 굴하지 않는 절개를 지키겠다는 의지를 보여주고 있다.
'감우십수기정계함(感遇十首寄鄭季涵)'
외로운 대나무 가지도 잎도 없이
바닷가 산 위에 몸을 붙여 산다네
해마다 서리와 눈에 묻힌 데다
벼랑에 내린 뿌리라 편안치 않네
이 재목을 어디 쓸 데가 있으랴만
귀한 것은 추위를 견딘 자태라네
또한 관직에 대한 최경창의 태도를 엿볼 수 있는 시도 있다.
'송조운강백옥지임괴산(送趙雲江伯玉之任槐山)'
'조운강'이라는 친구가
괴산으로 부임해가는 것을 두고 쓴 시인데,
시에 보면
올바른 도가 받아들여지지 않는 세상,
벼슬은 다만 가난 때문에 하는 것이라 했다.
'直道難容世(직도난용세) - 곧은 도는 세상에서 용납되기 어려운데
微官且爲貧(미관차위빈) - 하찮은 관직 또한 가난 때문에 하시는 것'
"크게 쓰이지 못하고 지방으로 좌천되어 가는
친구에 대한 안타까움을 담고 있습니다만,
그 안타까움은 거꾸로 보면
자신에 대한 안타까움이기도 할 것 같습니다.
나도 충분히 능력있는 사람인데
세상에 인정받지 못하는 입장이라는 자기 신세까지 내포하고 있는 듯 합니다."
- 김종서 교수
당대 최고의 시인으로 왕의 두터운 신임을 받았던 최경창.
그러나 그는 동서 붕당의 정치적 격랑과
그러한 세상에 대한 꼿꼿한 기개로 시대를 잃고 말았던 것이다.
다재다능했던 시인 최경창.
그의 벼슬길은 결코 순탄하거나 화려하지 못했다.
그가 살았던 시절은 당쟁이 싹트기 시작했던 시대.
바로 그 시대가 시인을 그냥 놔두지 않았던 것이다.
4. 목숨을 건 사랑 - 천리 길을 건너다!
그러나 홍랑과의 뜨거운 사랑은 계속 된다.
아름답고도 질긴 홍랑과의 인연.
<서울대학교 규장각한국학연구원>에는
최경창과 홍랑의 인연에 대한 책이 한 권 전한다.
"남학명의 <회은집(晦隱集)>인데요,
최경창과 홍랑의 만남에서
최경창이 죽고 난 다음까지 기록하고 있습니다."
- 김학천 연구사
함경도 쌍성에서 헤어진 최경창과 홍랑에 대한 재회의 기록이 있다.
"을해년(1575년)에 내가 병들어 누워,
봄부터 겨울까지 자리를 떠나지 못했다."
- <회은집>
함경도에서 돌아온 다음해, 최경창이 병에 걸렸다.
최경창의 병환소식은 함경도에 있던 홍랑의 귀에도 들어갔다.
홍랑은 주저하지 않았다.
즉시 길을 나섰다.
밤낮으로 7일을 걸어 그녀는 서울에 도착한다.
그러나 이것은 당시로서는 엄청난 모험이었다.
"그 날로 길을 떠나,
칠일 밤낮 만에 경성(서울)에 도착했다."
-<회은집>
"당시 평안도와 함경도에 사는 사람들은
자기 지역을 벗어나는 것이 법으로 금지되어 있었습니다.
더우기 관기였던 홍랑이
함경도를 벗어나 서울로 갔다는 것은 대단히 위험한 일이었습니다.
어쩌면 목숨을 건 일일지도 모릅니다."
- 김용찬 교수(순천대 국어교육과)
홍랑은 지극정성으로 최경창을 간호했다.
사대부 최경창과 관기인 홍랑의 인연.
이 도를 뛰어넘은 이들의 사랑은 가능한 것이었을까?
조선시대 기생,
특히 관기는 관아에 소속된 물건이나 마찬가지였다.
관기들은 각종 연회나 허드렛일에 동원되었다.
일반인이 이런 관기를 혼자 소유하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었다.
예외도 있었다.
'대비정속'이란 것이 그것이다.
"대비정속이란
원래 사대부와 관기 사이에 낳은 딸을 속량시키기 위한 제도로써
사대부가 자기 딸을 속량시키기 위해 여종을 대신 들여보내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것이 관기를 첩으로 들이기 위한 수단으로 이용되기도 했습니다."
- 김용찬 교수
"원 기생의 얌전한 것 '대비' 넣고 빼어가니
있는 것이 오죽할까 절구공이 겨묻은 것
얼룩덜룩 얼굴빛이 분 마른 것 괴상터라."
- 북새곡, 구강(具康)
그러나 최경창과 홍랑은 최소한의 이런 '대비정속'도 거치지 않았다.
최경창의 병소식을 들은 홍랑이 그 길로 무단으로 경성을 떠났던 것이다.
최경창의 병은 점차 차도를 보였다.
그러나 이것은 또 다시 이별을 뜻하는 것이었다.
1576년 5월.
사헌부에서 최경창의 파직을 청하는 상소가 올라왔다.
바로 홍랑 때문에 불거진 일이었다.
이 일로 최경창은 성균관전적(成均館典籍)에서 파직되고 말았다.
"전적 최경창은 식견이 있는 문관으로서 몸가짐을 삼가지 않아
북방서 관비를 몹시 사랑한 나머지 불시에 데리고 와 버젓이 함께 사니
이는 너무 거리낌없는 행동입니다.
파직을 명하소서."
- <선조실록, 1576. 5. 2>
5. 맺어지지 못한 사랑
- 이제 하늘 끝으로 가면 언제
돌아올까!~
홍랑은 경성으로 돌아가야 했다.
그것이 유일한 선택이었다.
또 다시 두 사람 앞에 기약없는 이별이 놓였다.
최경창은 홍원으로 돌아가는 홍랑에게 시 한 수를 주었다.
증별(贈別)
물끄러미 바라보다
고운 난초를 건네노니
이제 하늘 끝으로 가면
언제나 돌아올까
함관의 옛 노래는부르지 마소
지금도 구름과 비에
푸른 산이 어둑하니
相看영영(상간영영)
贈幽蘭(증유난)
此去天涯(차거천애)
幾日還(기일환)
莫唱咸關(막창함관)
舊時曲(구시곡)
至今雲雨(지금운우)
暗靑山(암청산)
홍랑은 홀로 함경도로 돌아갔다.
최경창이 준 시만 받아들고서.
이것이 이승에서 이들의 마지막이었다.
함경도에서의 첫 만남과 서울에서의 재회.
이것으로 시인 최경창과 기생 홍랑의 인연은 끝난다.
그러나 최경창에 대한 홍랑의 사랑은 지독한 것이었다.
홍랑에 대한 최경창의 사랑 역시 시대의 금기들을 뛰어넘은 것이었다.
파직까지 감수해야 했던 최경창의 사랑.
어찌보면 무모해보이기까지 하는 이 사랑.
홍랑에 대한 최경창의 마음을 통해
조선시의 물줄기를 바꿔놓은 그의 내면 시세계를 만나보자.
중국 북경.
<북경어언대학(北京語言大學)>
조선 시인 최경창의 시는 중국에까지 알려졌다.
이곳에는 조선중기 시문학과 관련된 매우 중요한 책이 한 권 있다.
인물의 주요 시작품을 모아놓은 <열조시집(列朝詩集)>
<열조시집(列朝詩集)> <지북우담(池北偶談)>
<열조시집> 속에 조선편.
여러 사람의 시 속에 최경창의 '이소부사(李少婦詞)'라는 시도 있다.
"최경창의 이 시는 <열조시집>에 수록되어 있고 시가 매우 좋습니다.
명대 사람들이 보기에 이 시는
감정이 진실되고 풍만하여 읽었을 때 매우 감동적입니다.
그의 중국 고대 시가에 대한 소양이 매우 깊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만약 이 사람이 조선사람이라고 말하지 않는다면
아마(중국 고대 시인인지 외국인인지) 알아채지 못했을 것입니다.
몇 구절 읽어보겠습니다."
- 장덕건 교수(북경어언대학 중국어언문학계)
이소부사(李少婦詞)
相公之孫鐵城李(상공지손철성리)
養得幽閨天質美(양득유규천질미)
幽閨不出十七年(유규불출십칠년)
一朝嫁與梁氏子(일조가여양씨자)
梁氏之子鳳鸞雛(양씨지자봉란추)
珊瑚玉樹交枝株(산호옥수교지주)
池上鴛鴦本作雙(지상원앙본작쌍)
園中협蝶下曾孤(원중협접하증고)
* 호랑나비협
최경창의 시는 또 다른 책에도 소개되어 있다.
청대 유명한 시인 왕사정이 지은 <지북우담(池北偶談)>.
여기에도 최경창의 시 두 수가 실려있다.
'무릉계'와 '채련곡'이다.
이처럼 최경창은 중국에서도 인정받은 시인이었다.
황제가 하늘에 제사를 올리던 북경에 천단.
나중에 중국에 사신으로 왔던 최경창은 '천단'을 노래한 시도 남겼다.
천단(天壇)
한밤중에 천단에서 흰 구름을 쓸어 내고
향을 살라 천제에게 멀리서 예를 올린다.
달빛 아래 절하는 사람은 보이지 않는데
겹겹의 옥수 속에 전각문이 닫혀 있네
이 천단시 역시 중국에서 높은 평가를 받았는데
특히 중국에서 시의 절정기였던 당나라 시와 견주어 손색이 없다는 평가를 받았다.
"이 시는 평측이 온건하고 운각이 잘 조화되어 있어
그 기법상 아주 훌륭한 시라고 보여집니다.
그리고 이 시에는 도가적인 시상이 다분히 담겨있고
낭만적인 기상이 담겨 있기 때문에
어떻게 보면 중국의 성당시대(盛唐時代) 이태백의 시를 닮지 않았나 생각할 정도입니다."
- 이 암 교수 (북경중앙민족대학 언어문학학부)
봉은사 승축
춘삼월 광나루에 산 가득 꽃이 피었는데
비 개인 강 돌아가는 길 흰 구름 속에 있네
배 안에서 돌아보며 봉은사를 가리키니
소쩍새 두어 소리 스님은 문을 닫았네
최경창의 '봉은사 승축'
역시 '그'만의 독특한 시세계를 잘 보여준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이 시는 원문으로 읽었을 때는 운율이 아주 뛰어납니다.
아주 리드미컬합니다.
시어도 음조가 탁월한 유성음 중심으로 이뤄져 있습니다.
특히 색채감도 아주 뛰어나지요 흰 구름, 푸른 물결 등
최경창의 시 가운데 대표작으로 이야기되고,
'3당시인' 시 가운데서도 그렇습니다."
- 안대회 교수(성균관대학 한문학과)
이러한 최경창의 시는 당시 조선의 시풍과는 확연히 달랐다.
충과 효 등 국가 체제 유지를 내용으로 하는 당대 시들과 달리
최경창은 개인의 감정을 진솔하게 담아내기 시작한 것이다.
백저사
생각나요 예전에 서울 살 때에
흰 모시로 치마를 새로 지었죠
이별 뒤엔 차마 이 옷 못입겠네요
우리 님과 춤과 노래 함께 못하는데
이 시 역시 연인에 대한 그리움을 담백하게 표현하고 있다.
이처럼 개인의 감정을 솔직하게 그린 시가 있는가 하면
풍자와 은유가 넘치는 시도 있다.
대은암
문 앞의 귀인의 수레는 연기처럼 흩어지니
정승의 그 영화도 백년을 못 가는구나
깊은 골목 쓸쓸하게 한식이 막 지나는데
수유화만 옛 담장에 환하게 피어 있네
이 시에서는 권력의 무상함을 은유적으로 표현하고 있다.
"남곤이 죽고난 뒤에 남곤의 명예는 사라지고
또 남곤을 찾아오는 사람도 없는 그 쓸쓸한 분위기를 묘사하고 있습니다.
아무리 큰 권력을 지닌 사람이라 하더라도
세월이 지나면 다 사라진다는 뜻이고,
특히 남곤과 같이 악명을 남긴 사람에게는
죽고 나서 더 쓸쓸해진다는 것을 보여주는 풍자시입니다."
- 안대회 교수
당시 정치의 격랑에 한 가운데 있었던 정철에게 보낸 열편의 시.
'감우십수기정계함(感遇十首寄鄭季涵)'
(정계함(정철)에게 주는 10수의 시)
이 연작시에는 현실을 비판하는 시어들로 가득하다.
'孤'(고), '北風'(북풍), '鳳凰化鷄鶩'(봉황화계목)
이러한 최경창의 시를 가장 많이 언급하고 평가한 이는 허균이었다.
"최경창의 절구는 편편이 모두 깨끗하고 맑아
당(唐) 시대의 여러 시인들과 비교하여도 손색이 없다."
최경랑의 시는 바로 그 자신이었다.
"타인에 대한 깊은 이해와 상대에 대한 인정이
사랑의 전제 조건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본다면
최경창이 홍랑을 사랑했던 이유도
상대를 온전한 인간으로 받아들였기 때문이라 봅니다.
개인의 감정에 충실하고
이를 적극적으로 표현했었던 최경창의 시세계도
최경창이 홍랑을 적극적으로 사랑할 수 있었던 힘이었을 거라 생각합니다."
-김용찬 교수
5. 못다한 인연 - 계속되는 사랑!
관리 이전에,
한 시인으로서 최경창은
지금까지 조선의 시풍과 다른 시세계를 보여줬다.
그것은 체제나 국가에 대한 고민이 아니라
인간에 대한 고민,
그리고 인간의 감정에 대해 솔직한 표현이었다.
이런 태도와 인식이 홍랑에게 전해졌고
두 사람의 세기적인 사랑도 그래서 가능했을 것이다.
최경랑은
신분 질서가 아니라
개인과 개인의 내면을 중시하고
이런 그의 시정신은 홍랑을 일개 관기가 아닌,
한 인간으로 받아들이는 진정성을 보였고,
홍랑 역시 그런 그를 사랑하지 않을 수 없지 않았을까.
그리고 이승에서 단 두번밖에 만나지 못한 이들의 사랑은
죽음 이후까지 이어진다.
최경창의 작품을 수록한 <고죽집>은 극적으로 후대에 이어졌다.
경기도 안성시 원곡면.
이곳에는 그의 사후 발간된 <고죽집>이 전해진다.
"고죽공 유고집 초기 필사본과 초간본이 한 350년간 보존되고 있습니다.
고죽공 선생의 손자이신 '진'자, '해'자 할아버지께서 나이가 점차 들어가시니까,
내 선대조의 문집이 정리가 안 되면 후손들에게 전할 길이 없겠다 걱정하시어,
노구의 몸을 이끄시고 때로는 발품을 팔아 자료를 수집하셨고,
또 당시 교류하셨던 분들과 서신 왕래도 하시며 자료수집을 하셨던 걸로 전해집니다."
- 최종호(최경창 16세 손)
고죽 최경창의 문집인 <고죽집>
최의 시 수백여 수가 여기 담겨있다.
고죽집의 서문은 우암 송시열(宋時烈)이 썼으며
<고죽집 후서>는 박세채(朴世采)가 썼다.
이 집안에 내려오는 초판 인쇄본.
이 필사본이 만들어진 뒤 <고죽집>은 목판본으로 만들어지게 된다.
이렇게 고죽유고가 오늘날까지 전해지는데는
후손들만의 노력과 함께 홍랑도 한몫을 했다.
<고죽집 후서>에는 최경창의 최후에 대한 짧막한 기록이 나온다.
직강에 임명되어 서울로 오는 도중 종성객관에서 세상을 떠난다.
"직강으로 임명되어 서울로 오는 도중, 종성객관에서 세상을 떠났다."
- <고죽집 후서>
그의 나이 마흔 다섯이었다.
최경창의 시신은 파주 선산에 모셔졌다.
그런데 최경창이 죽은 후 누군가 묘소에 나타났다.
바로 홍랑이었다.
병든 최경랑을 간호하고 서울에서 헤어진 지 약 7년만이었다.
홍랑은 무덤가에 초막을 짓고 시묘살이를 시작한다.
홍랑은 스스로 치장을 하지않고 최경랑의 무덤을 지켰다.
스스로 자신을 초라하게 하여 다른 남자의 접근을 막았다는 것이다.
"(홍랑은) 최경창이 죽은 뒤에
자신의 용모를 훼손하고 파주에서 시묘하였다."
- <회은집>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홍랑은 가장 먼저 최경창의 시 원고를 챙겼다.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홍랑이) 최경창의 원고를 짊어지고 피하여
전쟁의 불길을 면하였다."
- <회은집>
전쟁의 참화속에서도 홍랑은
자기가 사랑하고 존경했던 최경창의 시를 지켜낸 것이다.
그것이 남아 오늘날 최경창의 작품이 세상에 전해지게 된 것이다.
"여기 누워계신 홍랑할머니가
임란때 고죽의 작품을 머리에 이고
어렵게 전쟁의 화를 피했다고 합니다.
만약 홍랑할머니가 아니셨다면
고죽의 주옥같은 작품이
오늘날까지 남아있지 못했을 수도 있었습니다."
- 최은호(최경창 16세 손, 경기 파주 교하읍)
이렇게 시인과 기생의 사랑은 질긴 인연으로 이어졌다.
그리고 홍랑은 죽어서 최경창 부부합장묘 아래 묻혔다.
최경창의 후손들이 기생 홍랑을 받아들인 것이다.
시대와 불화했던 최경창.
고고한 기개를 잃지 않았던 시인.
비록 출세와 시대는 잃었으나 최경창은 사랑과 시를 얻은 시인이었다.
시인과 기생.
최경창과 홍랑.
이 두 사람의 안타깝고 아름다운 사랑은
두 사람이 세간에 남긴 시로 인하여 더 이목을 집중시켰다.
이 세기적 사랑에 배경에는 시대적 조류를 넘어
인간을 인간으로 바라봤던 시인 최경창의 새로운 눈이 있었다.
또한 세태와 타협하지 않고 고결한 절개를 지켰기에
한 여인의 운명을 건 사랑을 받을 수 있었는지도 모른다.
영원한 시인 최경창과 그를 사랑한 기생 홍랑.
이들에겐 시대를 앞서고자 하는 열망과 영원한 예술혼이 함께 했던 것이다.
- 한국사 전(傳)을 보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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