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松江 鄭撤-1

淸潭 2015. 8. 25. 13:02

조선의 大문호 송강 정철이 전라도와 '원수'가 된 사연

입력 : 2015.08.25 07:03 | 수정 : 2015.08.25 07:13

 

전라도 광주-담양-화순에 이름난 정자(亭子)가 많습니다. 이곳이 정자는 조선시대 선비들이 학문을 논하고 후학(後學)을 교육하던 장(場)입니다. 이름을 열거해봅니다. 식영정(息影亭)-환벽당(環碧堂)-송강정(松江亭)-면앙정(俛仰亭)-취가정(醉歌亭)…. 범위를 전라남북도로 넓히면 그 수가 100개를 훌쩍 넘는다고 합니다. 그런데 담양-화순의 정자에는 꼭 이 사람의 이름이 거명되고있지요. 고산 윤선도와 함께 조선시대 대문호(大文豪)로 자타가 공인하고있는 송강 정철(鄭澈·1536~1593)선생입니다.
무등산 자락 화순-담양에는 수많은 정자가 산재해있으며 저마다의 사연을 갖고있다.
무등산 자락 화순-담양에는 수많은 정자가 산재해있으며 저마다의 사연을 갖고있다.
각 정자와 정철의 연관 관계를 알아봅니다. 식영정은 1560년 서하당(棲霞堂) 김성원이 스승이자 장인인 석천 임억령(林億齡)을 위해 지어준 것입니다.
식영정은 특이하게도 지금도 아궁이에 불을 지핀다. 그래서인지 여름에도 곰팡이가 없고 눅눅하지도 않다.
식영정은 특이하게도 지금도 아궁이에 불을 지핀다. 그래서인지 여름에도 곰팡이가 없고 눅눅하지도 않다.
김성원은 정철의 처외재당숙으로, 11년 연상인데 훗날 식영정은 정씨 가문의 소유로 넘어갑니다.
서하당은 황혼 무렵에 비치는 석양이 안개처럼 깃든다는 뜻이다.
서하당은 황혼 무렵에 비치는 석양이 안개처럼 깃든다는 뜻이다.

식영정의 마루와 기둥을 보면 우리의 멋을 알 수 있다.
식영정의 마루와 기둥을 보면 우리의 멋을 알 수 있다.
‘식영정 4선(仙)’이라는 말이 있는데 이것은 임억령-김성원-고경명(의병장)-정철을 일컫는 말입니다.
식영정 마루에서 본 천장의 모습이다. 한옥은 추상화같은 느낌을 준다.
식영정 마루에서 본 천장의 모습이다. 한옥은 추상화같은 느낌을 준다.

식영정 마루에 누우면 여름이 느껴지지않는다. 한 커플이 마루에 누워있다.
식영정 마루에 누우면 여름이 느껴지지않는다. 한 커플이 마루에 누워있다.
이들이 경치 좋은 곳을 소재로 1인당 시 20수씩을 지어 만든 80수의 ‘식영정 이십영(二十詠)’은 정철이 쓴 ‘성산별곡’의 밑바탕이 되지요.
식영정 뒤에는 성산별곡이 새겨져있다. 정철이 이곳에서 지은 가사문학의 대표작이다.
식영정 뒤에는 성산별곡이 새겨져있다. 정철이 이곳에서 지은 가사문학의 대표작이다.


식영정 맞은 편 환벽당은 나주목사를 지낸 사촌 김윤제(金允悌·1501~1572)가 지은 정자로, 환벽은 ‘푸르름이 고리를 이루듯 아름다운 자연 경관이 꼬리를 물고 이어진다’는 뜻입니다. 여기는 김윤제와 정철의 인연이 전해지는 곳입니다.
환벽당의 내부다. 어린 정철은 이곳에서 요즘으로 치면 엘리트교육을 받고 중앙 관계로 진출했다.
환벽당의 내부다. 어린 정철은 이곳에서 요즘으로 치면 엘리트교육을 받고 중앙 관계로 진출했다.
환벽당 아래에 있는 조대(釣臺)와 용소(龍沼)라는 곳이 있는데 마침 김윤제가 환벽당에서 낮잠을 자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꿈에 용소에서 용 한마리가 노는 것을 보았지요. 깜짝 놀란 김윤제가 내려가 보니 용모가 비범한 소년이 멱을 감고 있었습니다.
환벽당을 앞에서보면 원형과 사각형이 교차하는 묘한 모습이 된다.
환벽당을 앞에서보면 원형과 사각형이 교차하는 묘한 모습이 된다.
김윤제는 소년을 데려다 문답을 하면서 그 영특함을 알게 됐습니다. 그는 떠나려는 소년을 만류하고 슬하에 두어 학문을 닦게 하였는데 그가 바로 어린 정철이었지요. 사촌은 그를 16세 때부터 27세까지 환벽당에 머물게하면서 학문을 연마시켰습니다.
환벽당에서는 영산강 지류가 내려다보인다. 사촌 김윤제는 낮잠을 자다 용이 멱을 감는 꿈을 꿨는데 놀라 밑으로 내려가보니 어린 정철이었다고 한다.
환벽당에서는 영산강 지류가 내려다보인다. 사촌 김윤제는 낮잠을 자다 용이 멱을 감는 꿈을 꿨는데 놀라 밑으로 내려가보니 어린 정철이었다고 한다.
정철은 이곳에서 하서(河西) 김인후(金麟厚), 기대승(奇大升) 등 명현들을 만나 그들에게서 학문과 시를 배웠습니다. 훗날 김윤제는 그를 자신의 외손녀와 혼인을 하게 하고 그가 27세로 관계에 진출할 때까지 모든 뒷바라지를 해주었다고 합니다. 그런가하면 송강정은 1584년 송강이 대사헌을 지내다 낙향해 지내던 곳입니다.
송강정은 벼슬을 지내던 정철이 낙향해 머물던 곳이다.
송강정은 벼슬을 지내던 정철이 낙향해 머물던 곳이다.
원래 이름은 죽록정(竹綠亭)이었는데 1770년 송강의 후손들이 지금 같은 이름으로 바꿨다고 하지요. 이곳에서 송강은 ‘사미인곡’과 ‘속미인곡’같은 명작을 집필했습니다.
송강정의 원래 이름은 죽록정이었으나 후손들이 바꿨다.
송강정의 원래 이름은 죽록정이었으나 후손들이 바꿨다.

송강정은 정철이 사미인곡, 속미인곡을 집필한 곳이다.
송강정은 정철이 사미인곡, 속미인곡을 집필한 곳이다.
취가정은 환벽당에 가까이 있는데 의병장을 지내다 억울한 누명을 쓰고 죽은 김덕령(金德齡)의 넋을 기리기 위해 만든 곳이지요. 김덕령이 정철의 제자 권필의 꿈에 나타나 억울함을 호소하면서 ‘취시가(醉時歌)’를 부르자 권필이 이에 화답하는 시를 지어 원혼을 달랬다고 합니다.
취가정은 김덕령이 정철의 제자 권필의 꿈에 나타나 자신의 억울함을 호소해 지었다는 사연이 있다.
취가정은 김덕령이 정철의 제자 권필의 꿈에 나타나 자신의 억울함을 호소해 지었다는 사연이 있다.

의병장 김덕령의 원혼을 달래기 위해 지은 취가정.
의병장 김덕령의 원혼을 달래기 위해 지은 취가정.
면앙정은 1533년 송순(宋純·1493~1583)이 건립했는데 이황(李滉·1501~1570)을 비롯해 강호제현들과 학문을 논하며 후학을 길러내던 곳입니다. 이곳에는 “내려다보면 땅이, 우러러보면 하늘이 그 가운데 정자가 있으니 풍월산천 속에서 한백년 살고자 한다”는 글귀가 전해지고 있습니다.
면앙정은 다른 정자와 달리 외진 곳에 있어 호젓한 분위기였다.
면앙정은 다른 정자와 달리 외진 곳에 있어 호젓한 분위기였다.
지금은 정면 3칸, 측면 2칸의 팔작지붕으로 되어있지만 원래는 초라한 초정(草亭)으로 바람과 비를 가릴 정도였습니다. 송순은 이곳에서 이황·김인후·임제·임억령과 어울렸는데 이들이 김인후-임억령이 정철의 스승이니 역시 송강과 무관치 않은 곳입니다.
면앙정은 원래 초당이었으나 훗날 지금처럼 모습이 바뀌었다.
면앙정은 원래 초당이었으나 훗날 지금처럼 모습이 바뀌었다.
정철과 호남의 유명한 정자를 연결짓는 이유는 그의 풍파많은 인생사를 말하기 위함입니다. 저는 그동안 그를 가사(歌詞)문학의 대가로만 알고있었습니다. 교과서에는 그가 ‘관동별곡’ ‘사미인곡’ ‘속미인곡’같은 작품을 쓴 시인으로만 나오지요. 이런 그림자에 가린 송강의 행적은 잘 밝혀지지않았는데 그를 두고 찬반론이 전라도에서는 뜨겁습니다. 후손들은 부인하지만 여러 호남인들은 “정철이 호남인맥에 위해를 가했다”고 말하고있고 일부 전문서적에서도 그런 말들이 나오고 있습니다.
호남학파의 비조라 할 면앙정. 면앙은 송순의 호다.
호남학파의 비조라 할 면앙정. 면앙은 송순의 호다.
예학의 대가 김장생(金長生)은 정철을 두고 이런 글을 쓴 적이 있습니다. 정상공(鄭相公·정철)을 군자(君子)라 하고 공을 공박한 자는 소인(小人)이다.” 이것은 무슨 뜻일까요? 김장생이 옹호해야 할 만큼 정철의 사람됨에 논란이 많다는 반증일 겁니다. 정철의 자(字)는 계함(季涵)이며, 본관은 영일(迎日)입니다. 집안은 명문이지요. 원조(遠祖) 정균지(鄭均之)는 고려 때 평장사, 고조부 정연(鄭淵)은 병조판서, 아버지 정유침(鄭惟沈)은 판관을 지냈는데 집안이 대대로 청백(淸白)했다고 소문이 자자했습니다.<中편에 계속>

Photo By 이서현



[출처] 본 기사는 프리미엄조선에서 작성된 기사 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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