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松江 鄭撤-2

淸潭 2015. 8. 25. 13:06
  • 문갑식 기자의 기인이사(奇人異士)(21):大文豪 정철과 전라도의 정자들(中) 이 카테고리의 다른 기사보기

    퇴계 이황마저 칭찬한 송강 정철의 현명함

  • 문갑식 블로그
    편집국 선임기자
    E-mail : gsmoon@chosun.com
    1962년생, 연세대 행정학과 졸업. 연세대 행정학석사와 한양대..
 
입력 : 2015.08.25 07:03 | 수정 : 2015.08.25 07:14
<上편에서 계속>
어머니 죽산 안씨(竹山安氏)로 대사간(大司諫)을 지낸 안팽수(安彭壽)의 딸로, 아버지는 늘 “내 딸의 효행(孝行)은 열 명의 아들에 못지않다”고 자랑했습니다. 정철은 1536년(중종 31년) 윤십이월 6일에 수도 한양(漢陽)에서 태어났습니다. 정철의 집안은 그가 열 살 되던 해 위기를 맞습니다. 아버지가 을사사화에 연루돼 전라도 창평(昌平)으로 귀양을 간 것입니다. 이 남방행(南方行)이 정철에게는 절묘한 기회가 되니 인생의 깊이는 알 길이 없습니다. 앞서 전한 설화가 바로 그것입니다.

김윤제 선생은 그를 데려다 공부를 시켰고 대학자 고봉(高峯) 기대승(奇大升ㆍ1527~1572)에게서 교육받도록 했는데 지금으로 치면 ‘엘리트교육’을 받게 된 것입니다. 훗날 그의 친구가 된 율곡(栗谷) 이이(李珥), 우계(牛溪) 성혼(成渾)도 대학자로 명망 높았습니다.
고봉 기대승 선생이 자신의 스승인 면앙 송순을 위해 지은 글을 새겨놓은 것이다.
고봉 기대승 선생이 자신의 스승인 면앙 송순을 위해 지은 글을 새겨놓은 것이다.
정조가 훗날 그 몸가짐이 겨울 하늘에 뜬 흰 달처럼 엄격하다고 해 ‘빙월(氷月)’이라는 호를 내릴 만큼 흠모했던 게 기대승선생입니다. 정조는 “이런 분과 함께 정치를 했어야했는데…”라고 한탄했다지요. 그런 기대승선생이 정철을 이렇게 평가했습니다.

수석(水石)이 멋진 곳에서 누군가 ‘세상에 이 수석과 비길 만한 청절(淸絶)한 인물이 있느냐’고 묻자 고봉은 ‘오직 정철이 있을 뿐이라’고 했다지요. 훗날 의병장으로 명성을 떨친 중봉(重峯) 조헌은 ‘송강은 얼음처럼 맑고 옥처럼 깨끗하다’고 했습니다. 이렇게 전라도의 정수(精髓)를 이어받은 그는 1561년(명종 16년) 사마시(司馬試)에 상유(上游)로 합격했고 이듬해 장원(壯元)급제합니다. 사화에 연루된 집안 출신이어서 곧 벼슬을 하진 못했지만 1566년, 헌납(獻納)ㆍ지평(持平)에 발탁됩니다.
식영정 마루에 가득찬 외국인들. 아마 이런 건물을 처음 봤을 것이다.
식영정 마루에 가득찬 외국인들. 아마 이런 건물을 처음 봤을 것이다.
송강이 얼마나 똑똑했는지 퇴계(退溪) 이황(李滉)선생은 그를 두고 “옛날 간신(諫臣)의 기풍이 있다”고 칭찬했습니다. 이어 옥당(玉堂)에 들어가는 등 출세 가도를 질주합니다. 하지만 퇴계의 지적대로 그는 직설 때문에 여러 번 곤욕을 치릅니다. 선조 때는 김개가 “오늘날 사류(士類ㆍ선비)의 폐습은 기묘 연간(己卯年間)과 같다”고 했습니다. 기묘연간이란 정암(靜菴) 조광조(趙光祖)선생이 사약을 받은 기묘사화 때를 이르는 말인데 정철은 선조의 면전(面前)에서 김개를 ‘사특하다’고 지적하지요. 임금을 기분 나쁘게 만든 죄로 그는 삭출(削黜), 즉 벼슬을 빼앗기고 내쫓기게 됐습니다. 6년 뒤 직제학(直提學)으로 컴백하지만 이때는 동인(東人)ㆍ서인(西人)의 당파싸움이 심할 때였습니다. 서인인 그는 동인(東人)에게 밀려 시골로 돌아가지요.

1577년 다시 한양으로와 동부승지(同副承旨)가 되지만 이때 이발(李潑)과 사이가 나빠져, 훗날 대사간(大司諫)이 됐을 때는 “사당(邪黨)을 만들었다”는 상소 때문에 사직합니다. 절친한 친구였던 율곡은 이때 그를 변호하는 소(疏)를 올렸습니다. “정철은 충청 강개(忠淸剛介)하고 한마음으로 나랏일을 걱정하므로 그 기절(氣節)은 실로 한 마리 독수리에 견줄 만한데 도리어 사당이란 명목을 붙여 조정에 얼씬도 못하게 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이 소 때문에 율곡까지 탄핵을 당하고 맙니다.
명옥헌 옆 베어낸 나무 위로 떨어진 꽃잎. 마치 윤회를 보는 것같다.
명옥헌 옆 베어낸 나무 위로 떨어진 꽃잎. 마치 윤회를 보는 것같다.
1580년 강원감사-병조참의-대사성이 된 것을 보면 선조는 그를 끔찍이 아꼈던 것 같습니다. 아쉽게도 이때에도 그가 지은 글에 ‘대신(大臣)을 무시하는 의사(意思)가 들어 있다’는 공격을 받은 걸 보면 그는 성격과 글이 모두 직선적이었던 것 같습니다. 그럼에도 선조는 그를 다음과 같이 정확히 간파했습니다. 우리는 임진왜란과 정유재란 때의 일만 보고 선조를 우둔하기 짝이 없는 암군(暗君)으로 인식하기 쉽지만 전쟁이 일어나기 전의 선조는 상당히 인간의 심리를 잘 간파하는 세심한 왕이었습니다.

“정철은 마음이 바르고 행동이 방정(方正)하나, 다만 그 혀가 곧아 사람들에게 미움을 받을 뿐이다. 직책에 있으면서 죽도록 힘을 다한 충청 절의(忠淸節義)는 초목(草木)까지도 알 것이니, 참으로 원반(鵷班)의 한 마리 독수리요, 전상(殿上)의 사나운 호랑이인 셈이다. 전날 바른말로 간사한 무리를 지탄하기에 내가 이미 오늘날 이런 훼방이 있게 될 줄을 짐작하였다. 만약 정철을 죄준다면 이는 주운(朱雲ㆍ후한 때의 직신(直臣))을 목 베어 죽이는 것이나 다름없다.”

그런 송강이 전라도와 척을 진 것은 기축옥사 때문입니다. 1589년 10월2일 선조에게 전달된 황해감사 한준의 장계로 인해 시작된 사화는 4대 사화 중 가장 많은 1000여명의 피해자를 낳았으며 동인ㆍ서인은 이후 돌아올 수 없는 강을 건너게 되지요. 기축옥사는 정여립(鄭汝立ㆍ1546~1589)은 이이-성혼을 따르던 서인인데 당시 집권 동인에 아부하고 스승 율곡이 죽자 그를 배반한 인물로 기록됐습니다. 선조는 그가 성혼을 비판하자 불쾌해 생각했고 이에 정여립은 벼슬을 버리고 낙향하지요.
식영정 올라가는 계단마다 이끼가 껴있다. 정철을 비롯한 호남의 대학자들이 이곳에서 학문을 논했다.
식영정 올라가는 계단마다 이끼가 껴있다. 정철을 비롯한 호남의 대학자들이 이곳에서 학문을 논했다.
문제는 정여립이 전북 진안 죽도(竹島)에서 대동계라는 조직을 만들어 신분에 제한이 없이 불평이 많은 객을 모아 무술을 단련시킨 것입니다. 한때 대동계는 침입한 왜구를 격퇴하기도 했지만 정여립은 대동계 조직을 전국으로 확대합니다. 황해도 안악의 변숭복(邊崇福), 해주의 지함두(池涵斗), 운봉의 승려였던 의연(依然)같은 기인모사(奇人謀士)를 끌어들이는 한편 ‘정감록’을 이용해 ‘이씨가 망하고 정씨 시대가 도래한다’는 ‘망이흥정설(亡李興鄭說)’을 퍼뜨리며 쿠데타를 계획한 것입니다.

이런 움직임이 황해관찰사 한준, 신천군수 한응인, 재령군수 박충간, 안악군수 이축에 의해 잇따라 선조에게 전해지자 관군이 출동하지요. 결국 정여립은 아들 정옥남과 함께 진안 죽도에서 자살합니다. 정여립의 난을 두고는 아직도 말이 많습니다. 일례로 조선일보 이한우 부장은 ‘조선의 숨은 왕’이라는 책에서 정여립의 난을 이렇게 봅니다. 즉 1587년 전라도 손죽도에 18척의 왜적이 상륙해 노략질을 벌이자 방어선이 순식간에 무너지고 조선 수군 100여명이 오히려 왜구의 포로가 돼지요. <下편에 계속>

Photo By 이서현



[출처] 본 기사는 프리미엄조선에서 작성된 기사 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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