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松江 鄭撤-3

淸潭 2015. 8. 25. 13:09
  • 문갑식 기자의 기인이사(奇人異士)(21):大文豪 정철과 전라도의 정자들(下) 이 카테고리의 다른 기사보기

    당파싸움 희생양 된 정여립의 결정적인 실수

  • 문갑식 블로그
    편집국 선임기자
    E-mail : gsmoon@chosun.com
    1962년생, 연세대 행정학과 졸업. 연세대 행정학석사와 한양대..
 
입력 : 2015.08.25 07:03 | 수정 : 2015.08.25 07:14
<中편에서 계속>
이때 전주부윤 남언경이 대섬, 즉 진안 죽도에 있는 정여립을 찾아옵니다. 그는 낙향한 정여립을 잘 대해줬는데 위기를 당하자 “정공께서 평소 무략을 바탕으로 병사 못지않은 무재(武才)들을 키우고 있다고 들었습니다”라고 말합니다. 도와달라는 뜻이었지요. 이에 정여립이 “신체 함양을 위해 말을 타고 활을 쏘고 칼을 다룰 뿐인데 전장(戰場)에 무슨 도움이 되겠느냐”고 사양하지만 결국 남언경의 청에 따라 병사 500명을 보내고, 이들은 왜구를 습격해 대승을 거두게 됩니다. 정여립의 명성이 전국적으로 높아지지요. 당시 전라도 관찰사가 한준(韓準)이었는데 그는 전라도 방어 실패에 대한 책임을 지고 황해도관찰사로 좌천됩니다. 그런데 훗날 정여립의 모반을 최초로 선조에게 보고한 사람이 한준이니 뭔가 석연치않은 부분이 있음을 여러분도 짐작하실 겁니다.
명옥헌의 계곡사이로 흐르는 물소리가 청아하다.
명옥헌의 계곡사이로 흐르는 물소리가 청아하다.
내친김에 진안현감 민인백이 정여립을 찾아와 나눈 대화도 소개해볼까 합니다. 민인백은 갑자기 정여립을 방문해 “얼마 전 세상을 떠난 자순(子順ㆍ임제의 호)을 만난 적이 있다”고 운을 뗍니다. 그러면서 무서운 덫을 정여립에게 던지지요. 그는 “자순이 생전에 ‘예로부터 나라의 이름이 있는 곳에서는 모두 천자라고 칭하는데 우리나라만이 홀로 그렇지 못하다’고 하기에 내가 ‘농담이라도 그런 말을 입 밖에 꺼내지 말라고 했다”고 합니다. 성미 급한 정여립은 덜컥 “백춘(민인백의 호)이 틀렸다”며 선조를 지칭하면서 “백성의 뜻을 얻지 못한 임금이 무슨 임금이냐”며 큰일 날 소리를 뱉습니다. 민인백이 이 말은 훗날 정여립이 모반을 꾀한 유력한 증거로 역할을 하게 되니 무서운 게 인간입니다.

여하간 정여립이 당파 싸움의 희생양일 뿐 모반을 꾀한 것은 아니라는 설도 있지만 문제는 그 이후 연루자를 색출하면서 시작됩니다. 이때 유능한 인물들이 많이 희생되는데 대표적인 사람이 김시민-이억기-신립-이순신 등을 이끌고 오랑캐의 난을 평정했던 우의정 정언신(鄭彦信)은 정여립과 구촌 사이라는 이유로 죽임을 당한 게 대표적입니다. 서산대사(西山大師) 휴정 역시 정여립과 역모를 꾀했다는 혐의로 선조에게 친히 국문을 받았고 사명당(四溟堂) 유정은 오대산에서 강릉으로 끌려가 조사를 받기도 했지요. 이때 선조는 정철로 하여금 위관(委官)으로 삼아 옥사를 다스리게 했습니다.

서인 중에서도 강경파였던 정철은 기축옥사를 빌미로 동인 중 평소 과격한 언행을 했던 인사들을 죽이거나 귀양을 보냈습니다. 공교롭게도 이때 동인 가운데 우수하다고 평가되는 인물들이 다수 포함됐고 전라도 출신 선비들이 대거 희생된 것입니다. 훗날 정철은 ‘동인백정(白丁)’이라는 말이 따라다닐 만큼 미움을 받게 되었고 이런 감정 대립은 오늘날에도 사그라지지 않았다고 합니다. 당시 전라도 인사들이 얼마나 희생됐는지를 보여주는 자료가 있습니다. 기축옥사 전 전국의 생원과 진사 합격률입니다. 이것을 보년 서울이 1위, 전주가 2위, 나주가 3위였는데 기축옥사 이후에는 서울이 1위이고 전주는 10위, 나주는 11위로 떨어집니다. 결국 기축옥사 후 호남 사대부들은 벼슬길이 막히게 됐음을 잘 알 수 있지요.
명옥헌을 뒷쪽에서 바라본 모습이다. 이렇게 자연과 일체가 된 정자는 세계 어디서도 찾아볼 수 없다.
명옥헌을 뒷쪽에서 바라본 모습이다. 이렇게 자연과 일체가 된 정자는 세계 어디서도 찾아볼 수 없다.
기축옥사 전 정철은 아들의 상(喪)을 당해 경기도 고양(高陽)의 선산에 머물고 있었습니다. 이때 정여립의 모반 사실이 드러나자 즉시 입궐(入闕)하려 했을 때 친구 한명이 극구 만류했다고 합니다. 이 말을 들었다면 그는 오명을 피할 수도 있었을 겁니다. 그러나 정철은 “역적이 군부(君父)를 모해하려 하는데, 소위 중신이라는 자가 가까이 궐문(闕門) 밖에 있으면서 망설이고만 앉아 있을 수는 없다”고 달려간 것입니다. 감동한 선조는 그에게 사건의 전말을 조사하라는 위관-사실은 선조의 악역을 대신한 것이지만-을 맡기니 그것도 정철의 팔자(八字)인 모양입니다.

기축옥사는 책 한권으로 다뤄도 못 미칠 분량이나 이번 편에서는 길삼봉(吉三峯)에 대한 이야기로 마칠까 합니다. 정여립의 난에 연루된 이들은 하나같이 국문을 받을 때마다 “길삼봉이 상장(上將)이요, 정여립은 차장(次將)”이라고 진술한 것입니다. 그런데 길삼봉이라는 이름이 묘하지요. 길은 당시 도둑 수령으로 꼽히던 홍길동의 ‘길’이고 삼봉은 국초 대역죄인의 우두머리로 간주해 이방원에게 죽임을 당한 정도전의 호입니다. 이 둘을 엮어서 만들어낸 이름이니 선조가 공포를 느낄 만도 했겠습니다. 결국 선조는 팔도에 길삼봉을 잡으라는 어명을 내리는데 유언비어가 난무했습니다. 그의 생김새를 두고 ‘나이는 60쯤 돼 보이고 얼굴은 쇳빛이며 몸은 뚱뚱하다’, ‘나이는 30쯤이고 귀가 크고 얼굴을 여위었다’, ‘나이는 50쯤인데 수염이 길어 배까지 내려오고 얼굴은 희고 길다’는 설이 난무한 겁니다.

또한 길삼봉으로 지목된 이가 최영경(崔永慶ㆍ1529~1590)인데 그가 하필 정철과 사이가 나빴던 탓에 ‘정철이 최영경을 죽이려 길삼봉 소문을 냈다’는 말까지 나돌았지요. 실제론 정철이 최영경을 구명하려 애썼지만 결국 매를 맞고 옥사(獄死)하고 맙니다. 안타깝게도 최영경 역시 본관이 화순(和順)으로 전라도 인맥으로 분류되던 이였습니다. 이러니 정철에 대한 전라도의 인심을 날이 갈수록 뜬소문이 눈덩이처럼 악성으로 불어나 이미지가 나빠질 수밖에 없었을 겁니다. 이렇게 파란만장한 삶을 살았던 정철은 임진왜란 때 선조를 위해, 나라를 구하기 위해 백방으로 노구(老軀)를 이끌고 종횡무진으로 활동하다 선조에게 광해군을 후사(後嗣)로 삼을 것을 주청하다 강화도로 귀양을 가게 되지요. 때는 온 나라가 전쟁으로 엉망일 때였습니다.
명옥헌 앞 연못에 배롱나무들이 반영된 모습이다. 한낮인데도 워낙 수목이 울창해 컴컴하다.
명옥헌 앞 연못에 배롱나무들이 반영된 모습이다. 한낮인데도 워낙 수목이 울창해 컴컴하다.
정철은 강화도 송정촌에서 끼니 잇기가 어려울 정도로 궁핍하게 살다가 한 달 만에 생을 마감합니다. 사인이 영양실조니 조선 문학의 최고봉이요, 당대의 권력자치고는 어이없는 최후였는데 놀라운 것은 제자였던 사람도 비슷한 죽음을 맞았다는 겁니다. 그 제자가 바로 제가 앞에 언급한 취가정에서 김덕령의 혼과 시를 주고받은 권필(權韠ㆍ1569~1612)입니다. 스승을 닮아 당대 최고의 시인으로 손꼽혔던 권필은 선조의 아들 광해군에게 매를 맞고 죽었으니 이런 불운한 사제가 하늘 아래 다시 없겠지요. 권필의 목숨을 앗아간 시는 ‘궁류시(宮柳詩)’로, 광해군의 왕비의 오라버니 유희분의 전횡을 풍자한 내용이었습니다.

‘대궐 안 버들이 푸르르니 꽃잎 흩날리고(宮柳青青花亂飛)
성 안 가득한 벼슬아치들은 봄빛에 아양 떠네 (滿冠蓋媚城春輝)
조정에선 태평성대라 서로들 치하하는데 (朝家共賀昇平樂)
누가 위험한 말을 선비에게서 나오게 했나(誰遺危言出布衣)’
식영정 뒷편의 노송은 얼마전 벼락을 맞았다.
식영정 뒷편의 노송은 얼마전 벼락을 맞았다.
세상 사람들은 모두 ‘궁궐의 버들’을 광해의 처남인 유희분이라고 생각했는데 오로지 광해군만이 불같이 화를 냈지요. 사이가 극도로 안 좋았던 그의 아버지 선조가 오래전부터 권필의 시에 찬탄하여 늘 책상 위에 올려놓았다는 사실도 왕을 화나게 했습니다. 결국 권필은 좌의정 이항복과 영의정 이덕형의 만류에도 불행한 종말을 맞습니다. 왕 앞에서 심하게 얻어맞고 해남으로 유배가기 전 동대문 밖 어느 주막에서 친구들이 따라준 한잔 술을 마신 후 그는 마흔셋의 젊은 나이로 세상을 떠나고 말았습니다. 그의 죽음을 전해 들은 광해군은 이렇게 후회했다고 합니다. “하룻밤 사이에 어찌 죽을꼬?” 그를 살려내지 못한 이항복도 한마디 했지요. “우리가 정승으로 있으면서도 석주(권필의 호)를 못 살렸으니 선비 죽인 책망을 어찌 면할꼬….”

Photo By 이서현



[출처] 본 기사는 프리미엄조선에서 작성된 기사 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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