입력 : 2015.08.25 07:03 | 수정 : 2015.08.25 07:14
<中편에서 계속>
이때 전주부윤 남언경이 대섬, 즉 진안 죽도에 있는 정여립을 찾아옵니다. 그는 낙향한 정여립을 잘 대해줬는데 위기를 당하자 “정공께서 평소 무략을 바탕으로 병사 못지않은 무재(武才)들을 키우고 있다고 들었습니다”라고 말합니다. 도와달라는 뜻이었지요. 이에 정여립이 “신체 함양을 위해 말을 타고 활을 쏘고 칼을 다룰 뿐인데 전장(戰場)에 무슨 도움이 되겠느냐”고 사양하지만 결국 남언경의 청에 따라 병사 500명을 보내고, 이들은 왜구를 습격해 대승을 거두게 됩니다. 정여립의 명성이 전국적으로 높아지지요. 당시 전라도 관찰사가 한준(韓準)이었는데 그는 전라도 방어 실패에 대한 책임을 지고 황해도관찰사로 좌천됩니다. 그런데 훗날 정여립의 모반을 최초로 선조에게 보고한 사람이 한준이니 뭔가 석연치않은 부분이 있음을 여러분도 짐작하실 겁니다.
이때 전주부윤 남언경이 대섬, 즉 진안 죽도에 있는 정여립을 찾아옵니다. 그는 낙향한 정여립을 잘 대해줬는데 위기를 당하자 “정공께서 평소 무략을 바탕으로 병사 못지않은 무재(武才)들을 키우고 있다고 들었습니다”라고 말합니다. 도와달라는 뜻이었지요. 이에 정여립이 “신체 함양을 위해 말을 타고 활을 쏘고 칼을 다룰 뿐인데 전장(戰場)에 무슨 도움이 되겠느냐”고 사양하지만 결국 남언경의 청에 따라 병사 500명을 보내고, 이들은 왜구를 습격해 대승을 거두게 됩니다. 정여립의 명성이 전국적으로 높아지지요. 당시 전라도 관찰사가 한준(韓準)이었는데 그는 전라도 방어 실패에 대한 책임을 지고 황해도관찰사로 좌천됩니다. 그런데 훗날 정여립의 모반을 최초로 선조에게 보고한 사람이 한준이니 뭔가 석연치않은 부분이 있음을 여러분도 짐작하실 겁니다.
- 명옥헌의 계곡사이로 흐르는 물소리가 청아하다.
여하간 정여립이 당파 싸움의 희생양일 뿐 모반을 꾀한 것은 아니라는 설도 있지만 문제는 그 이후 연루자를 색출하면서 시작됩니다. 이때 유능한 인물들이 많이 희생되는데 대표적인 사람이 김시민-이억기-신립-이순신 등을 이끌고 오랑캐의 난을 평정했던 우의정 정언신(鄭彦信)은 정여립과 구촌 사이라는 이유로 죽임을 당한 게 대표적입니다. 서산대사(西山大師) 휴정 역시 정여립과 역모를 꾀했다는 혐의로 선조에게 친히 국문을 받았고 사명당(四溟堂) 유정은 오대산에서 강릉으로 끌려가 조사를 받기도 했지요. 이때 선조는 정철로 하여금 위관(委官)으로 삼아 옥사를 다스리게 했습니다.
서인 중에서도 강경파였던 정철은 기축옥사를 빌미로 동인 중 평소 과격한 언행을 했던 인사들을 죽이거나 귀양을 보냈습니다. 공교롭게도 이때 동인 가운데 우수하다고 평가되는 인물들이 다수 포함됐고 전라도 출신 선비들이 대거 희생된 것입니다. 훗날 정철은 ‘동인백정(白丁)’이라는 말이 따라다닐 만큼 미움을 받게 되었고 이런 감정 대립은 오늘날에도 사그라지지 않았다고 합니다. 당시 전라도 인사들이 얼마나 희생됐는지를 보여주는 자료가 있습니다. 기축옥사 전 전국의 생원과 진사 합격률입니다. 이것을 보년 서울이 1위, 전주가 2위, 나주가 3위였는데 기축옥사 이후에는 서울이 1위이고 전주는 10위, 나주는 11위로 떨어집니다. 결국 기축옥사 후 호남 사대부들은 벼슬길이 막히게 됐음을 잘 알 수 있지요.
- 명옥헌을 뒷쪽에서 바라본 모습이다. 이렇게 자연과 일체가 된 정자는 세계 어디서도 찾아볼 수 없다.
기축옥사는 책 한권으로 다뤄도 못 미칠 분량이나 이번 편에서는 길삼봉(吉三峯)에 대한 이야기로 마칠까 합니다. 정여립의 난에 연루된 이들은 하나같이 국문을 받을 때마다 “길삼봉이 상장(上將)이요, 정여립은 차장(次將)”이라고 진술한 것입니다. 그런데 길삼봉이라는 이름이 묘하지요. 길은 당시 도둑 수령으로 꼽히던 홍길동의 ‘길’이고 삼봉은 국초 대역죄인의 우두머리로 간주해 이방원에게 죽임을 당한 정도전의 호입니다. 이 둘을 엮어서 만들어낸 이름이니 선조가 공포를 느낄 만도 했겠습니다. 결국 선조는 팔도에 길삼봉을 잡으라는 어명을 내리는데 유언비어가 난무했습니다. 그의 생김새를 두고 ‘나이는 60쯤 돼 보이고 얼굴은 쇳빛이며 몸은 뚱뚱하다’, ‘나이는 30쯤이고 귀가 크고 얼굴을 여위었다’, ‘나이는 50쯤인데 수염이 길어 배까지 내려오고 얼굴은 희고 길다’는 설이 난무한 겁니다.
또한 길삼봉으로 지목된 이가 최영경(崔永慶ㆍ1529~1590)인데 그가 하필 정철과 사이가 나빴던 탓에 ‘정철이 최영경을 죽이려 길삼봉 소문을 냈다’는 말까지 나돌았지요. 실제론 정철이 최영경을 구명하려 애썼지만 결국 매를 맞고 옥사(獄死)하고 맙니다. 안타깝게도 최영경 역시 본관이 화순(和順)으로 전라도 인맥으로 분류되던 이였습니다. 이러니 정철에 대한 전라도의 인심을 날이 갈수록 뜬소문이 눈덩이처럼 악성으로 불어나 이미지가 나빠질 수밖에 없었을 겁니다. 이렇게 파란만장한 삶을 살았던 정철은 임진왜란 때 선조를 위해, 나라를 구하기 위해 백방으로 노구(老軀)를 이끌고 종횡무진으로 활동하다 선조에게 광해군을 후사(後嗣)로 삼을 것을 주청하다 강화도로 귀양을 가게 되지요. 때는 온 나라가 전쟁으로 엉망일 때였습니다.
- 명옥헌 앞 연못에 배롱나무들이 반영된 모습이다. 한낮인데도 워낙 수목이 울창해 컴컴하다.
‘대궐 안 버들이 푸르르니 꽃잎 흩날리고(宮柳青青花亂飛)
성 안 가득한 벼슬아치들은 봄빛에 아양 떠네 (滿冠蓋媚城春輝)
조정에선 태평성대라 서로들 치하하는데 (朝家共賀昇平樂)
누가 위험한 말을 선비에게서 나오게 했나(誰遺危言出布衣)’
- 식영정 뒷편의 노송은 얼마전 벼락을 맞았다.
Photo By 이서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