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05년 11월 30일, 아직 어둠이 짙게 드리운 새벽녘, 종로 전동(典洞)의 한 집에 민영환(閔泳煥)이 불을 밝힌 채 앉아 있었다. 깊은 상념에 잠겨 있던 그는 갑자기 자신의 명함(名銜)을 꺼내 들더니 그 위에 한문으로 글을 써 내려가기 시작했다.* 엄숙한 표정만큼이나 구절구절 비장함이 배어 있었다. 글을 마친 뒤 그는 결심한 듯 단도(短刀)를 집어 들었고 주저 없이 한 일(一) 자로 할복하였다. 그러나 칼날이 깊이 들어가지 않자 그은 곳을 여러 번 계속 그었고 그래도 여의치 않자 자신의 목을 수차례 난자하였다. 숨이 멎고도 한동안 피가 솟구쳐 옷을 적셨다. 한참 뒤에 급보를 듣고 시종무관 어담(魚潭)이 달려왔을 때에도 여전히 피가 흐르고 있었다. 후에 그는 “원망하는 듯 노한 듯 부릅뜨고 있는 양쪽 눈은 처절하고도 가여웠다. 참으로 장절한 죽음이었다.”고 당시를 회상했다.
11월 17일 총검으로 무장한 일본군의 포위 속에 이토의 위협과 회유에 넘어간 오적(五賊)의 찬성으로 을사늑약(乙巳勒約)이 체결되었음이 알려지고, 11월 20일 자 황성신문(皇城新聞)에 장지연(張志淵)의 논설 ‘시일야방성대곡(是日也放聲大哭)’이 게재되면서 전국의 성난 민심은 울분으로 요동쳤다. 조약에 찬성한 대신들을 처단하라는 상소가 빗발치는 가운데 민영환도 대궐 앞에 엎드려 조약 파기를 요구하는 상소를 연달아 올렸다. 하지만 모두 허사였다. 이에 그는 고위 정치가의 한 사람으로 무거운 책임감을 느꼈고 마침내 속죄하는 심정으로 결연한 의지를 표하고자 자결하였다. 12월 1일 자 대한매일신보(大韓每日申報)에 민영환의 자결 소식이 보도되자 추모객들이 구름처럼 모여들었고 비탄의 통곡 소리가 전국에 메아리쳤다. 그리고 뒤이어 조병세(趙秉世), 송병선(宋秉璿) 등 수많은 우국지사뿐만 아니라 인력거꾼 같은 일반 백성들도 연쇄 자결함으로써 국권 회복과 항일 의지가 요원의 불길처럼 타올랐다.
그런데 그가 죽고 8개월 뒤 세상을 깜짝 놀라게 하는 사건이 일어났다. 대한매일신보와 황성신문 1906년 7월 5일 자 기사에 따르면, 민 충정공(閔忠正公)이 순절(殉節)할 당시의 선혈이 낭자했던 옷과 단도를 침실 뒤의 협실(夾室)에 보관해 두었는데, 바로 그 마룻바닥 빈틈을 뚫고 녹죽(綠竹) 네 줄기가 솟아났다는 것이었다. ‘죽어도 죽지 않으리라[死而不死]’던 유서의 구절처럼 그가 다시 대나무로 부활한 것이다. 실상이 알려지자 이를 보기 위해 운집한 인파로 집 앞이 다시 인산인해를 이루었고 고종(高宗)도 직접 댓가지를 보고 나서 ‘이 대죽은 민 충정공의 충렬’이라며 눈물을 떨구었다. 신채호(申采浩)가 쓴 것으로 추정되는 7월 7일 자 황성신문 논설에서 이 대나무를 ‘혈죽(血竹)’이라 명명하면서 이후 경향(京鄕) 각지에 ‘혈죽 신드롬’이 일어났다. 민 충정공의 사진과 혈죽을 새긴 필통ㆍ술잔, 혈죽도(血竹圖), 혈죽전(血竹錢)이 제작되고 신문마다 한시, 가사, 시조, 창가 형식의 ‘혈죽 시가’들이 계속 수록되면서 열기가 고조되었다.
매천 황현이 쓴 위의 「혈죽명」도 이런 당시 분위기 속에서 쓰여진 것이다. 그러나 그의 시가 새삼 더 절절하고 애달프게 읽히는 것은 어째서일까? 민영환이 죽고 5년 뒤 나라가 병탄되는 망국의 치욕을 당한 1910년 8월, 그마저 절명시(絶命詩) 4수를 남기고 똑같이 자결이라는 길을 택한 때문이 아닐까? “나라가 망한 날, 선비로서 죽는 이가 한 사람도 없다면 어찌 통탄스럽지 않겠는가.”며 대한의 지식인으로서 책임을 다하고자 했던 매천 황현, 그리고 자신이 몸담았던 지배층이 저질렀던 통한의 과오를 죽음으로 사죄하고자 했던 충정공 민영환, 동시대 그들이 서 있었던 자리와 삶의 궤적은 달랐지만 몸을 죽여서라도 지키고자 했던 뜻은 다르지 않았다는 생각이 든다. ‘자유 독립을 회복한다면 죽어서라도 저 세상에서 기뻐 웃으리라’던 그들은, 광복 70주년을 맞는 조국 앞에 놓인 분단 현실과 일본의 군국화를 내려다보면서 어떤 표정을 짓고 있을까?
* “嗚呼!國恥民辱乃至於此,我人民將且殄滅於生存競爭之中矣。夫要生者必死,期死者得生,諸公豈不諒只?泳煥徒以一死仰報皇恩,以謝我二千萬同胞兄弟。泳煥死而不死,期助諸君於九泉之下。幸我同胞兄弟千萬億加奮勵,堅乃志氣,勉其學問,決心戮力,復我自由獨立,卽死子當喜笑於冥冥之中矣。鳴呼!勿少失望!訣告我大韓帝國二千萬同胞。[오호라! 나라와 백성의 치욕이 이에 이르렀으니, 우리 인민은 장차 생존 경쟁 가운데서 진멸하리라. 무릇 살기를 바라는 자 반드시 죽고 죽기를 각오하는 자 삶을 얻나니 제공(諸公)은 어찌 이를 알지 못하는가. 나 영환은 한번 죽음으로써 우러러 황은에 보답하고 우리 이천만 동포 형제에게 사죄하려 하노라. 나 영환은 죽어도 죽지 않고 저승에서라도 여러분을 기어이 도우리니, 다행히 동포 형제들이 천만 배 더 발분하여 뜻을 다잡고 학문에 힘쓰며 결연한 마음으로 힘을 합해 우리의 자유 독립을 회복한다면 죽어서라도 마땅히 저 세상에서 기뻐 웃으리라. 오호라! 조금도 실망하지 말지어다. 우리 대한제국 이천만 동포에게 영결을 고하노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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