참고실/역사의기록

민영환 충정공의 혈죽

淸潭 2015. 7. 24. 12:07

혈죽(血竹)으로 부활한 충정

 

 

충정을 남김없이 다 쏟은 뒤에
몸을 던져 하늘로 돌아갔나니,
하늘이 그 충성 기리는 것이
어쩌면 이렇게도 치우쳤는가.
그 몸을 죽여서 떠나게 하여
신령의 남다름 드러낼 바엔
나라에 큰 복을 내려 주어서
공 아니 죽게 함이 낫지 않은가.
공의 충정 만세에 길이 빛나고
사해와 온 누리에 전해지리라.
아름다운 몇 줄기 푸른 대나무
우리나라 전역(全域)을 숙연케 했지.
그 피가 변하여 흙이 되었고
그 기가 맺혀서 뿌리 되었네.
그때 그 원통함과 격한 울분이
잎새마다 혈흔으로 선명하여라.
이 땅의 수많은 남녀노소가
공이 다시 살아남 와서 보는데,
생전의 공의 모습 볼 수는 없고
오로지 대나무만 청청하구나.
오적(五賊)들 이 소식 듣게 되면은
날이 춥지 않아도 벌벌 떨리라.
내 문을 닫아걸고 깊이 누우니
계속해서 대나무 눈에 선하네.

情量所窮
乃歸於天
天之奬忠
若是其偏
與其身後
標此靈異
曷若祚宋
無俾公死
千秋萬歲
四海九州
娟娟數竿
肅我靑丘
血化爲土
氣結爲根
分明冤憤
葉葉刀痕
都人士女
來見公生
公不可見
惟竹靑靑
賊臣聞之
不寒而粟
鎖戶深臥
竹常在目

 

 

 

- 황현(黃玹, 1855~1910)
「혈죽명(血竹銘)」
『매천집(梅泉集)』 권7

 

 

 

     


  1905년 11월 30일, 아직 어둠이 짙게 드리운 새벽녘, 종로 전동(典洞)의 한 집에 민영환(閔泳煥)이 불을 밝힌 채 앉아 있었다. 깊은 상념에 잠겨 있던 그는 갑자기 자신의 명함(名銜)을 꺼내 들더니 그 위에 한문으로 글을 써 내려가기 시작했다.* 엄숙한 표정만큼이나 구절구절 비장함이 배어 있었다. 글을 마친 뒤 그는 결심한 듯 단도(短刀)를 집어 들었고 주저 없이 한 일(一) 자로 할복하였다. 
  그러나 칼날이 깊이 들어가지 않자 그은 곳을 여러 번 계속 그었고 그래도 여의치 않자 자신의 목을 수차례 난자하였다. 숨이 멎고도 한동안 피가 솟구쳐 옷을 적셨다. 한참 뒤에 급보를 듣고 시종무관 어담(魚潭)이 달려왔을 때에도 여전히 피가 흐르고 있었다. 후에 그는 “원망하는 듯 노한 듯 부릅뜨고 있는 양쪽 눈은 처절하고도 가여웠다. 참으로 장절한 죽음이었다.”고 당시를 회상했다.

  11월 17일 총검으로 무장한 일본군의 포위 속에 이토의 위협과 회유에 넘어간 오적(五賊)의 찬성으로 을사늑약(乙巳勒約)이 체결되었음이 알려지고, 11월 20일 자 황성신문(皇城新聞)에 장지연(張志淵)의 논설 ‘시일야방성대곡(是日也放聲大哭)’이 게재되면서 전국의 성난 민심은 울분으로 요동쳤다. 조약에 찬성한 대신들을 처단하라는 상소가 빗발치는 가운데 민영환도 대궐 앞에 엎드려 조약 파기를 요구하는 상소를 연달아 올렸다. 
  하지만 모두 허사였다. 이에 그는 고위 정치가의 한 사람으로 무거운 책임감을 느꼈고 마침내 속죄하는 심정으로 결연한 의지를 표하고자 자결하였다. 12월 1일 자 대한매일신보(大韓每日申報)에 민영환의 자결 소식이 보도되자 추모객들이 구름처럼 모여들었고 비탄의 통곡 소리가 전국에 메아리쳤다. 그리고 뒤이어 조병세(趙秉世), 송병선(宋秉璿) 등 수많은 우국지사뿐만 아니라 인력거꾼 같은 일반 백성들도 연쇄 자결함으로써 국권 회복과 항일 의지가 요원의 불길처럼 타올랐다.

  그런데 그가 죽고 8개월 뒤 세상을 깜짝 놀라게 하는 사건이 일어났다. 대한매일신보와 황성신문 1906년 7월 5일 자 기사에 따르면, 민 충정공(閔忠正公)이 순절(殉節)할 당시의 선혈이 낭자했던 옷과 단도를 침실 뒤의 협실(夾室)에 보관해 두었는데, 바로 그 마룻바닥 빈틈을 뚫고 녹죽(綠竹) 네 줄기가 솟아났다는 것이었다. ‘죽어도 죽지 않으리라[死而不死]’던 유서의 구절처럼 그가 다시 대나무로 부활한 것이다. 
  실상이 알려지자 이를 보기 위해 운집한 인파로 집 앞이 다시 인산인해를 이루었고 고종(高宗)도 직접 댓가지를 보고 나서 ‘이 대죽은 민 충정공의 충렬’이라며 눈물을 떨구었다. 신채호(申采浩)가 쓴 것으로 추정되는 7월 7일 자 황성신문 논설에서 이 대나무를 ‘혈죽(血竹)’이라 명명하면서 이후 경향(京鄕) 각지에 ‘혈죽 신드롬’이 일어났다. 민 충정공의 사진과 혈죽을 새긴 필통ㆍ술잔, 혈죽도(血竹圖), 혈죽전(血竹錢)이 제작되고 신문마다 한시, 가사, 시조, 창가 형식의 ‘혈죽 시가’들이 계속 수록되면서 열기가 고조되었다.

  매천 황현이 쓴 위의 「혈죽명」도 이런 당시 분위기 속에서 쓰여진 것이다. 그러나 그의 시가 새삼 더 절절하고 애달프게 읽히는 것은 어째서일까? 민영환이 죽고 5년 뒤 나라가 병탄되는 망국의 치욕을 당한 1910년 8월, 그마저 절명시(絶命詩) 4수를 남기고 똑같이 자결이라는 길을 택한 때문이 아닐까? 
  “나라가 망한 날, 선비로서 죽는 이가 한 사람도 없다면 어찌 통탄스럽지 않겠는가.”며 대한의 지식인으로서 책임을 다하고자 했던 매천 황현, 그리고 자신이 몸담았던 지배층이 저질렀던 통한의 과오를 죽음으로 사죄하고자 했던 충정공 민영환, 동시대 그들이 서 있었던 자리와 삶의 궤적은 달랐지만 몸을 죽여서라도 지키고자 했던 뜻은 다르지 않았다는 생각이 든다. ‘자유 독립을 회복한다면 죽어서라도 저 세상에서 기뻐 웃으리라’던 그들은, 광복 70주년을 맞는 조국 앞에 놓인 분단 현실과 일본의 군국화를 내려다보면서 어떤 표정을 짓고 있을까? 

* “嗚呼!國恥民辱乃至於此,我人民將且殄滅於生存競爭之中矣。夫要生者必死,期死者得生,諸公豈不諒只?泳煥徒以一死仰報皇恩,以謝我二千萬同胞兄弟。泳煥死而不死,期助諸君於九泉之下。幸我同胞兄弟千萬億加奮勵,堅乃志氣,勉其學問,決心戮力,復我自由獨立,卽死子當喜笑於冥冥之中矣。鳴呼!勿少失望!訣告我大韓帝國二千萬同胞。[오호라! 나라와 백성의 치욕이 이에 이르렀으니, 우리 인민은 장차 생존 경쟁 가운데서 진멸하리라. 무릇 살기를 바라는 자 반드시 죽고 죽기를 각오하는 자 삶을 얻나니 제공(諸公)은 어찌 이를 알지 못하는가. 나 영환은 한번 죽음으로써 우러러 황은에 보답하고 우리 이천만 동포 형제에게 사죄하려 하노라. 나 영환은 죽어도 죽지 않고 저승에서라도 여러분을 기어이 도우리니, 다행히 동포 형제들이 천만 배 더 발분하여 뜻을 다잡고 학문에 힘쓰며 결연한 마음으로 힘을 합해 우리의 자유 독립을 회복한다면 죽어서라도 마땅히 저 세상에서 기뻐 웃으리라. 오호라! 조금도 실망하지 말지어다. 우리 대한제국 이천만 동포에게 영결을 고하노라.]”

 

 

 

 

글쓴이 : 이기찬(한국고전번역원 선임연구원)

 

가져온 곳 : 
카페 >우현 한문방(又玄漢文房)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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