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신과의 싸움
자신이 하기 싫은 일을 해 냈을 때, 힘든일들을 잘 지나왔을 때...
괴로운 마음을 "지나가는 과정"을 배우고 나면,
다음이 보인다. 아니, 다음은 아닐 수 있다.
그 시간은 괴롭긴 하지만 자신과의 소통에서
꼭 필요하다고 말 할 수 있을 정도로 중요하다.
괴로운 마음은 스스로를 키워줄 것이다.
그것이 타인이 보기엔 하찮은 사치일 수 있다고 하여도,
스스로에게는 성장의 시간임은 틀림없다.
우리에겐 누구에게나 우리들이 이겨낼 수 있을 만큼의 고통이 찾아오고,
그 기준은 절대 같을 수 없다. 그러므로 그 결과 또한 절대 같을 수 없다.
손가락에 찔린 작은 가시 하나에 목놓아 웃는이가 있는가 하면,
손으로 연주하는 연주가가 팔이 잘려나가도
마라톤선수가 교통사고로 다리를 잃어도
희망으로 일어나 그 고통을 이겨내
더욱더 아름답게 거듭 다시 태어나는 이 또한
이 지구 어딘가에 있다.
그리고 그것은 언젠가 내 이야기가 될 수도 있다.
나는... 아주 조금 괴롭기도 했다.
하지만 정말 자알 지나왔다.
앞으로 언제 또 찾아올지 모르겠지만,
또 찾아온다 해도
고독의 시간또한 행복의 순간들 처럼 잘 보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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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신을 이기는 자가 가장 강하다
새벽녘 법공양
자신을 이기는 자가 가장 강하다
千千爲敵 一夫勝之
천천위적 일부승지
未若自勝 爲戰中上
미약자승 위전중상
전장에 나가 수천의 적을
혼자 싸워 이기는 것보다
미약한 자신을 이기는 것이
용감한 전사 중에도 최고이다.
<法句經 - 述千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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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신과 싸워 이기는법
"운동자에서 달음질하는 자들이 다 달아날지라도 오직 상 얻는 자는 하나인 줄을
너희가 알지 못하느냐 너희도 얻도록 이와 같이 달음질하라...싸우기를 허공을
치는 것같이 아니하여 내가 내 몸을 쳐 복종하게 함은 내가 남에게 전파한 후에
자기가 도리어 버림이 될까 두려워함이로라"
- 고전 9:24~27 -
육성 선수가 승리하기 위해서는 다른 선수보다 열심히 훈련을 해야 하지만
그 이전에 자기와 싸워서 이기는 과정을 거쳐야 합니다.
"이기기를 다투는 자마다 모든 일에 절제한다"(25절)고 바울이 말하는 대로
자신을 극복하기 위해 부단히 노력하는 자가 승리할 수 있습니다.
바울은 계속하여 강조하기를 자신이 자신이 자신의 몸을 쳐 복종하게 하는 것이
복음 안에서 궁극적으로 승리하는 비결이라고 합니다.(27절) 비단 육상성수만이
아니라 다른 스포츠 선수들의 경우도 그렇고 음악이나 미술 같은 예술을 하는
사람들의 경우도 그렇습니다.
피아노 콩쿨에서 우승하기 위해서도 역시 다른 사람보다 더 많이 연습하면서
노력해야 하겠지만 결국은 자기와의 싸움에서 이겨야 합니다.
이 원리는 직장인들이 자기 계발을 하는 과정에도 적용됩니다.
업무에 직접 관련되는 영역이든 영어 공부와 같은 보편적인 영역이든 자기를
계발하기 위해서는 항상 주변 사람보다 좀 더 많은 시간을 투자하며 부단한
노력을 계속해야 합니다.
그러나 결국은 자신과의 싸움입니다.
자신의 나태함을 이겨내고 게으름을 이겨내고, 타성을 극복할 때에만 진정
자기계발에 성공할 수 있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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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신과의 싸움서 이긴 방법
안녕하세요. 저는 현재 취업준비중인 스물여덟 살 청년입니다.
공부 때문에 여러 번 금연을 시도했지만 번번이 실패하다 주변에서 보건소
금연클리닉을 이용해 보라는 얘기를 듣고 금연클리닉에 등록 후 1년 6개월을
넘겨 금연 2년째를 향해 무사히 가고 있는 제 얘기가 여러분들에게 조금이라도
도움이 되었으면 하는 마음으로 이 글을 씁니다.
1996년 고등학교에 입학하고 새로운 친구들을 사귀기 시작하면서 처음 담배를
접하게 되었습니다. 처음엔 단순히 멋으로만 생각하고 피던 게 나중에는
습관처럼 나의 생활의 일부가 되어버렸습니다. 화장실 갈 때, 식사를 한 후에,
스트레스를 받을 때, 잠자기 전, 잠에서 깬 후, 그리고 친구들이나 사람들과
대화를 할 때에도 자연스레 담배를 피우게 되어 10년이라는 긴 시간동안 흡연을 하였습니다.
물론 중간에 몇 번 금연을 시도 한 적이 있습니다. 당연히 실패했고, 그만큼 금연은
힘든 싸움이었던 것입니다. 2006년 3월 1일 나는 공무원 시험을 보기위해 공부를
시작하면서 또 다시 금연을 시도 하였습니다.
어떻게 넘기느냐에 달려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이번에는 예전과 다르게
시도를 했습니다. 우선 주변에서 권유한 대로 보건소 금연 클리닉에 등록을
해서 나 혼자만의 금연 결심에서 벗어나 금연 상담사 선생님들의 격려와
지지를 바탕으로 흔들릴 때마다 의지를 다졌습니다.
금연 일주일 후에 한 번의 위기가 찾아왔습니다. 우연히 술을 마시게 되었는데
술에 취했을 때 나는 금연하고 있다는 생각을 계속 하였고, 잘 참아서
집에 왔습니다. 그런데 형이 피우는 담배가 책상위에 놓여 있었고, 그것을
보면서 한참을 고민하다 술기운에 이끌려 담배를 입에 물고 두세 모금 정도
빨아보았는데 어떻게 된 게 담배 맛이 예전 같지 않아 그냥 던져 버렸습니다.
그리곤 ‘아~ 이제는 담배는 나에게 더 이상 필요가 없고, 아무상관 없는
것이구나!’ 라고 생각을 하기 시작했습니다.
지금 생각해도 아찔하기도 하고, 스스로 대견스럽게 느껴지는 것은 그렇게
술 마신 후 담배를 입에 물었지만 그냥 한 번의 실수로 생각하고 더 이상
흡연을 계속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술자리에서 어쩌다 한두 번 흡연을
하더라도 무의식적으로, 습관적으로 피웠던 것이니 절대 금연을 포기하지
말고 한 번의 실수로 생각하고 넘어가라는 상담사 선생님께서 하신
말이 아마도 나에게 계속 금연을 할 수 있다는 용기를 준 것 같습니다.
그 이후로 나는 금연생활을 계속 했고 지금까지도 항상 ‘담배는 나와 무관하다’
라는 생각을 하면서 금연을 유지하고 있습니다. 또 금연 후 시간이 많이
지났는데도 계속해서 가래가 나와 불안한 마음에 상담사 분께 문의를 하니
폐와 기관지등의 떨어져 있던 기능들이 회복되면서 나타나는 정상적인
과정이니 전혀 걱정하지 말라는 전문적인 얘기를 듣고서 안심하고 넘어간
경우도 있었습니다.
흡연 충동이 생기고 친구들이 담배를 피우는 시간에 녹차를 자주 마시며,
금단현상이 나타나려 하면 헬스장에서 1시간 정도의 운동을 통해 땀을
뺐습니다. 운동 후에도 녹차를 마셨고 운동을 하고 나면 몸이 정말 개운해져
머리까지 맑아지는 기분을 느끼기 시작했습니다. 나는 이런 생활을 습관적으로
반복하였습니다.
금연을 하면 좋은 점이 너무도 많습니다. 치아 상태가 좋아지고, 피부도 좋아지며,
거친 운동 후 호흡이 편안해지고, 지구력도 좋아집니다. 그리고 피로도 잘 풀립니다.
허나 그 중에서도 가장 중요한 것은 자기 몸 전체가 건강해지고, 비흡연자
들에게 피해를 주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다른 건 몰라도 이것만은 알아야 합니다.
흡연으로 인해 자기 몸이 학대를 당한다는 사실, 그리고 비흡연자들의 건강까지도
해치고 있다는 것. 그러므로 금연은 꼭 필요한 것이고, 자기 자신과의 끝없는
싸움이라는 것입니다. 나 역시 지금도 계속 싸우고 있는 것이고, 내가 이 싸움에서
이길 수 있게 해주는 것은 거듭 말하지만 ‘담배는 나와 무관하다’라는 생각입니다.
누구든 금연을 할 때에는 분명 어떤 계기가 생길 것이고, 생각의 차이가
‘성공’ 또는 ‘실패’를 결정할 것입니다. 한번만 담배와의 관계를 생각해보십시오!
나와 어떤 관계로 이제껏 함께 했는지 ‘스트레스 해소’라는 흔한 변명은
하지 말고, 자기 자신을 믿고 하루 빨리 백해무익한 흡연을 멈추십시오.
그래서 건강하고 깨끗한 환경에서 행복하게 살아가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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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신과의 싸움을 그쳐라!
TV 속의 광고에서 들려오는 이야기.
"나는 싸워야 한다.
길들여지려는 나, 타협하려는 나와 싸워야 한다"
도대체 누구와 싸운다는 말인가?
자신과의 투쟁은 내적인 갈등을 일으키고
불필요한 에너지를 소모할 뿐이다.
자신과의 싸움을 통해 더 나은 상태에 도달하려는 시도는
지극히 부정적인 동기부여 전략에 지나지 않는다.
자신과의 싸움으로 시간과 에너지를 낭비할 필요가 없다.
자신과 화해하고 격려하고 모든 잘못들을 용서하라.
자신의 모든 면들을 인정해주고 사랑하라.
자신에 대한 모든 부정적 감정들을 버려라.
그리고,
자신의 모든 잠재력을 긍정적으로 이끌어 낼 수 있는,
원대하고도 적절한 목표를 세워라.
그리하여 모든 내적인 자아의 힘들을 일으켜 세워라.
그 모든 힘들이 모여
목표를 뚫고 솟아오르게 하라!
- 글 : 전용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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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기를 이기는 법
또 무리에게 이르시되 아무든지 나를 따라 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날마다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을 것이니라”
할렐루야! 오늘은 잘 아시는 본문을 가지고 자신을 이기는 법이라는 제목으로 은혜를
나누려고 합니다.
프랑스의 문호 빅토르 위고는 "오늘의 문제는 싸우는 것이요, 내일의 문제는 이기는 것이요,
모든 날의 문제는 죽는 것이다."라고 말을 했습니다.
그는 인간에게는 세 가지 종류의 싸움이 있다고 보고 있습니다.
①자연과의 싸움, ② 인간과 인간의 싸움, ③ 자기와의 싸움입니다. 그 가운데 가장
무서운 적은 자기 자신입니다. 자신의 욕망과 자신의 나약함과 자신의 게으름과
더불어 싸웁니다. 그러면서 자기 진실을 지켜 가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로마서 7장에서 "나는 원하는 바 선은 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원치 아니하는
바악은 행하는도다. 내 지체 속에서 한 다른 법이 내 마음의 법과 싸워 내 지체 속에 있는
죄의 법 아래로 나를 사로잡아 오는 것을 보는 도다.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 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위대한 사도 바울조차도
이런 고백을 하는데 저희는 어떻겠습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내가 구원받았다"고 하는 구속의 은혜를 담대하게 고백하게 됩니다.
영적으로 자신과의 싸움에서 이긴 자만이 할 수 있는 고백인줄 믿습니다.
그러면 우리가 예수를 믿으면서 어떻게 자신을 이길 수 있을까요?
Ⅰ. 분명한 결단 (Definite Decision)이 있어야 합니다.
본문에 “아무든지 나를 따라 오려거든”이라고 주님이 말씀하십니다.
많은 사람들이 가야 할 바른 길을 결정하기를 힘들어 하고 있습니다.
그들은 한편으로는 하나님을 다른 한편으로는 세상을 잡고 어찌할 줄 몰라 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주를 따를 것인지 세상으로 갈 것인지 분명한 선택을 해야 합니다.
여호수아는 24:15에 “만일 여호와를 섬기는 것이 너희에게 좋지 않게 보이거든 너희
열조가 강 저편에서 섬기던 신이든지 혹 너희의 거하는 땅 아모리 사람의 신이든지
너희 섬길 자를 오늘날 택하라 오직 나와 내 집은 여호와를 섬기겠노라”
“오직 나와 내 집은 여호와를 섬기겠노라” 하고 결단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그리스도를 위한 우리의 결단을 분명히 해야 합니다.
인생에서 가장 불행한 사람은 습관적으로 우유부단한 사람입니다. 우유부단한 사람은
의심이 많은 사람입니다. 의심이 많은 사람은 요동하는 물결과 같습니다. 그 사람은
어떤 것도 얻을 수가 없고 어떤 일도 이룰 수가 없습니다. 우유부단한 사람은 모든 일에
정함이 없는 사람입니다(약 1:6∼8). 우리는 하나님이 우리에게 맡기신 사명을 완수하기
위해 우유부단을 정복해야 합니다. 그리고 결단하는 인생을 살아야 합니다. 결단한다는
것은 뜻을 정한다는 것입니다. 다니엘은 뜻을 정한 인생을 살았습니다(단 1:8).
그는 왕이 주는 진미와 포도주로 자신을 더럽히지 않기로 결단했습니다.
비록 그가 바벨론에 포로로 끌려갔다고 해도 말씀을 따라 살기로 결단했습니다.
다니엘이 뜻을 정했을 때 하나님은 그를 도와주셨습니다. 그를 형통케 하셨습니다.
결단한다는 것은 말씀을 따라 산다는 것입니다. 말씀을 따라 산다는 것은 믿음을 따라
산다는 것입니다. 믿음을 따라 산다는 것은 모험하는 인생을 산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아브라함은 부르심을 받았을 때에 순종하여 장래 기업으로 받을 땅을 향해 갈 바를
알지 못하고 떠났습니다(히 11:8). 갈 바를 알지 못한 채 말씀을 좇아간 것입니다.
그 결단이 아브라함을 믿음의 조상으로 만들었습니다. 결단한다는 것은 초점을
맞춘 인생을 산다는 것입니다. 곧 한 우물을 판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한 방향을
선택한다는 것은 다른 방향을 포기하는 것입니다. 한 사람이 모든 것을 다 성취할
수는 없습니다. 예수님도 이 땅에 오셨을 때 오직 십자가의 구원을 이루기 위해 초점을
맞춘 인생을 사셨습니다. 그러므로 초점을 맞춘 삶, 집중하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결단한다는 것은 사명을 따라 산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사도 바울은 예수님께서
맡기신 사명을 이루기 위해 자신의 생명을 조금도 귀하게 여기지 아니했습니다(행 20:24).
“나의 달려갈 길과 주 예수께 받은 사명 곧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 증거하는 일을
마치려 함에는 나의 생명을 조금도 귀한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노라”
이 세상에서 가장 강한 사람은 사명을 가진 사람입니다. 사명을 가진 사람은 결단합니다.
행동합니다. 공부만 하지 말고 결단합시다. 기도만 하지 말고 결단합시다.
과감하게 결단하고 과감하게 행동합시다. 부디 준비만 하지 말고 결단하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Ⅱ. 대담한 훈련(Daring Discipline)이 있어야 합니다.
본문에 “자기를 부인하고”라고 합니다.
많은 사람이 자기관리(self-indulgent)를 합니다.
그러나 자기부인(self-denial)과 억제(restraint)를 못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우리 자신을 다스리고 제어할 수 있어야 합니다.
약1:12에 “시험을 참는 자는 복이 있도다 이것에 옳다 인정하심을 받은 후에
께서 자기를 사랑하는 자들에게 약속하신 생명의 면류관을 얻을 것임이니라”고 말씀하십니다.
“나를 따라 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날마다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아야 한다.”
라는 말씀은 예수님 학교의 입학금이라 할 수 있습니다. 이 입학금을 내야만
예수님 학교에 입학하여 그의 제자가 될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이 입학금을 지불한
사람에게는 “너희에게 기쁨을 충만케 해주겠다.”는 장학금이 또한 약속되어 있습니다.
신대륙을 발견한 크리스토퍼 콜롬부스는 황금에 미친 사람이었습니다.
그가 신천지를 향해 떠난 것도 이 때문이었습니다.
그러나 그에게는 한 가지 고민이 있었는데, 그것은 그의 이름 때문이었습니다.
그의 이름, ‘크리스토퍼’라는 말은 ‘그리스도를 업고 다니는 자’란 뜻이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예수를 업고 사는 자가 될 것인가, 아니면 황금을 업고 사는 인간이 될 것인가’
하는 것이 바로 그의 고민이었습니다. 수도원에 들어가 며칠을 기도한 크리스토퍼 콜롬부스는
신부님에게 자기의 이름대로 살겠다는 고백을 하였습니다. 그 후 그는 죽기까지 14년간
주님의 뜻을 위하여 살았습니다. 그는 평화스럽게 미소를 띄고 운명했는데 죽기 며칠 전
“내가 가장 행복했던 시절은 주님의 제자가 되었던 지난 14년간이다.”라고 말했습니다.
자기를 부인하고, 가 영어에는 put aside your selfish ambition 이라고 표현합니다.
우리가 그토록 욕심내는 것들이 바울에게는 배설물이 되었듯이 예수 그리스도와
십자가만이 가장 귀한 보배가 되기를 축원합니다.
Ⅲ. 매일의 헌신(Daily Devotion)이 있어야 합니다.
본문에 “날마다 제 십자가를 지고” 이 말씀은 우리에게 요구하는 바가 큽니다.
많은 사람이 이기적인 관심에만 집착하다가 하나님과 이웃을 거절하기 때문에
자기를 극복하고 부인하는데 실패하고 맙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향한 우리의 헌신,
경건생활을 부지런히 해야 합니다.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
(마6:33)의 말씀처럼 하나님을 향한 삶의 우선순위를 분명히 하는 성도님들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성수주일, 매일 기도와 성경읽기, 전도 이 모든 신앙의 행위들이 헌신이요 경건의 훈련인 것입니다.
경건의 모양은 있으나 경건의 능력은 없는 이 세대에 하나님과의 관계가
바로되고 능력있는 성도님들 되시기를 예수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예수님께서 한번만 십자가를 졌지만 우리는 “날마다” 져야 하는 십자가인데
어떻게 질 수 있는가? 안 그래도 세상 살아가는데 무거운 짐을 지고 온갖
쓸데없는 짐까지 지고 있는 현실인데 과연 십자가를 질 수 있을까?
날마다 져야 하는 내 십자가는 무겁고 힘들어 고통스러운 것이 아니라는 것을 명심해야 합니다.
구레네 시몬이 억지로 졌던 십자가, 여기서 억지로, 라는 단어가 헬라어로 앙갈류오
페르시아에서 온 단어로 급사, 우체부라는 의미에서 파생되어 앙겔로스 즉 천사라는
단어와 동의어입니다. 그래서 시중드는 자가 되게 하다, 강제로 봉사하게 하다,
억지로 가게 하다는 의미도 있지만 “신속하게, 자원하여, 본인 스스로 봉사하거나
시중들게”라는 의미도 포함되어 있습니다. 그렇다면 과연 우리는 십자가를 마지못해서
억지로 져야 하는가? 아니면 신속하게 자원하여 기쁘게 져야 하는가?
문제에서 자유롭게 선택해도 됩니다. 하나님께서 주신 말씀의 그늘 밑에 완전히
자리 잡고 거하기까지 무겁고 힘들겠지만 배우고 익혀져 자리가 잡혀지기만 하면
아주 쉽고 가벼운 것임을 깨달아야 합니다.
Ⅳ. 불굴의 결심(Dauntless Determination)이 있어야 합니다.
본문에 “나를 좇을 것이니라”고 말씀하십니다.
많은 사람들이 자기를 극복하고 승리할 것을 추구하고 있지 않습니다. 나쁜 것을
거절하고 좋은 것에 설 용기가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결단해야 합니다.
미국 버트 더빈에 작은 시골 학교가 있었습니다. 겨울철이면 그 학교는 항아리처럼
배가 불룩한 구식 석탄 난로에 불을 지펴 교실 난방을 해결했습니다. 날마다
한 어린 소년이 맨 먼저 등교해서 교사와 다른 학생들이 오기 전에 난로를 지펴
교실을 따뜻하게 만들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아침, 교사와 학생들이 등교해 보니
학교가 불길에 휩싸여 있었습니다. 불타는 교실 안에는 그 어린 소년이 정신을
잃고 쓰러져 있었습니다. 사람들은 서둘러 소년을 밖으로 끌어냈습니다.
소년은 살아날 가망이 희박해 보였습니다. 하체 부위가 끔찍한 화상을 입어
형체를 알아보기 힘들 정도였습니다. 사람들은 곧바로 소년을 근처의 시립 병원으로 옮겼습니다.
심한 화상을 입은 채 희미한 의식으로 병원 침대에 누워 있던 어린 소년은 의사가
엄마에게 하는 말을 들었습니다. “불길이 소년의 하반신을 온통 망가뜨렸기
때문에 살아날 가능성이 거의 없으며, 어쩌면 이 상태에선 그것이 최선의 선택일지도 모른다고”
꼭 살아나겠다고 소년은 굳게 마음을 먹었습니다. 아무튼 의사에게 큰 놀라움을
선사하며 소년은 죽지 않고 소생했습니다. 위험한 고비를 일단 넘겼을 때 소년은
또 다시 의사가 엄마에게 하는 말을 들었습니다. “하반신의 신경과 근육들이
화상으로 다 파괴되었기 때문에 소년을 위해선 차라리 죽는 편이 더 나을 뻔했으며,
이제 하체 부위를 전혀 쓸 수 없으니 평생을 휠체어에서 불구자로 지내야만 한다고”
소년은 다시금 마음을 굳게 먹었습니다. “결코 불구자가 되지 않기로....
언젠가는 다시 정상적으로 걸으리라고” 하지만 불행하게도 허리 아래쪽에는 운동 신경이
하나도 살아남아 있지 않았습니다. 가느다란 두 다리가 힘없이 매달려 있을 뿐이었습니다.
마침내 소년은 퇴원을 했습니다. 엄마가 날마다 소년의 다리에 마사지를 해 주었습니다.
아무 느낌, 아무 감각, 아무 반응이 없었습니다. 하지만 다시 걷고야 말겠다는
소년의 의지는 전보다 더 강해졌습니다. 소년은 침대에 누워 있지 않으면 좁은
휠체어에 갇혀 지내야만 했습니다. 어느 햇빛이 맑은 날 아침, 엄마는 신선한
공기를 마시게 해 주려고 소년을 휠체어에 태워 앞마당으로 나갔습니다.
소년은 엄마가 집 안으로 들어간 틈을 타 휠체어에서 몸을 던져 마당의 잔디밭에 엎드렸습니다.
그리고는 다리를 잡아끌면서 두 팔의 힘으로 잔디밭을 가로질러 기어가기 시작했습니다.
마당가에 세워진 흰색 담장까지 기어간 소년은 온 힘을 다해 담장의 말뚝을 붙들고 일어섰습니다.
그런 다음 말뚝에서 말뚝으로 담장을 따라 무감각한 다리를 옮기기 시작했습니다.
꼭 다시 걷겠다는 소년의 강한 의지를 꺾을 사람은 아무도 없었습니다.
소년은 날마다 그 일을 반복했습니다. 마침내는 담장 밑을 따라 잔디밭 위에
하얀 길이 생겨날 정도였습니다. 자신의 두 다리에 생명을 불어넣는 일만큼 중요한 것이
소년에게는 없었습니다. 날마다 반복되는 마사지와 소년의 강한 의지,
흔들림 없는 결심 덕분에 마침내 소년은 혼자 힘으로 일어설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 다음엔 더듬거리며 발을 옮겨 놓을 수 있게 되었고, 그 다음에는
혼자 힘으로 걸을 수 있게 되었으며, 그리고 그 다음에는 달릴 수 있게 되었습니다.
소년은 다시 걸어서 학교를 다니기 시작했습니다. 그 다음에는 달려서 학교를 다니기 시작했습니다.
소년은 달리는 것에서 오는 순수한 기쁨 때문에 끝없이 달리고 또 달렸습니다.
훗날 대학에 들어간 소년은 육상부에 소속되었습니다. 더 훗날, 한때는 살아날
가망성이 희박했으며 결코 걸을 수 없고 결코 뛰어다닐 희망이 없었던,
불굴의 의지를 가진 이 사람 글렌 커닝햄 박사는 매디슨 스퀘어 가든에서
벌어진 1마일 달리기 경기에서 세계 신기록을 달성하며 결승선을 통과했습니다.
불굴의 결심은 기적을 일으킵니다.
이 땅에 세 종류의 사람이 있습니다. 1.하나님이 없다고 하는 사람 - 어리석은 사람
2.하나님을 찾는 사람 - 고민 중에 사는 사람 3.하나님을 찾은 사람 - 행복한 사람
무디는 “성급한 자여 고요히 욥기에 가서 사귀라. 고집쟁이여 모세와 베드로를 읽으라.
게으른 자여 야고보서를 보라. 소망이 없는 자여 계시록을 읽으라” 이렇게 말합니다.
하나님의 도우심 가운데 결심하는 것은 모든 싸움 가운데 가장 큰 싸움인 자신과의
싸움에서 승리하게 합니다.
우리에게 가장 큰 적은 우리 자신입니다. 우리가 자신을 이기기 위해서는 분명한
결단이 있어야 합니다. 그리스도를 위한 결단이 있어야 합니다. 그리고 대담한 훈련이
있어야 합니다.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를 비울 수 있어야합니다. 그리고 매일 하나님께
헌신하는 영적인 일에 관심을 가져야 합니다. 경건의 능력을 힘입어야겠습니다.
끝으로 하나님의 도우심을 받아 결심하고 그 결심한 것을 불굴의 투지로 지켜나가야 하겠습니다.
그래서 자신을 이기는 하나님의 인정받는 성도님들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기도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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