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문학/수필등,기타 글

살며 생각하며

淸潭 2014. 1. 27. 09:33


☞ [오피니언] 살며 생각하며 아직도 세뱃돈을 받고 싶다


★... 정호승/시인

어릴 때는 설날이 오기를 왜 그렇게 애타게 기다렸는지 모른다. 설날 한 달 전부터는 날마다 몇 밤을 더 자면 설날인지를 손꼽아 기다렸다. 설날 하루를 위해 1년을 기다렸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설날이 되면 어머니는 설빔으로 미리 마련해 놓은 새 옷과 새 신을 손수 입혀주셨다. 내복도 꼭 빠지지 않고 마련하셔서 한번은 나를 발가벗기고 입혀주신 적도 있다. 요즘이야 멀쩡한 새 옷도 입지 않고 버리지만 예전에는 새 옷 한 벌 얻어 입기 위해 꼬박 1년을 기다려야 했다.

지금 생각해보면 새 옷과 새 신을 얻을 수 있는 날이 오직 설날이기 때문에 그토록 설날을 기다린 게 아닌가 싶다. 또 사과, 배 등의 과일과 식혜, 잡채, 고기전, 시루떡 등 설날이 아니면 맛볼 수 없는 풍성한 음식을 한꺼번에 맛있게 배불리 먹을 수 있는 날이 오직 설날뿐이어서 그토록 설날을 기다린 것 같기도 하다.

설날 아침에 부모님께 세배드리면 세뱃돈도 두둑이 받을 수 있었다. 평소에는 부모님이 학용품 값 외에는 돈을 주시는 일이 거의 없었는데 설날에는 세뱃돈을 두둑하게 주셨으니 설날이 기다려지지 않을 수 없었다.

지금은 이웃 어른들에게 세배하는 풍습이 거의 사라졌지만 어머니는 꼭 동네 어른들을 찾아가 세배하라고 말씀하셨다. 나는 부모님께서 그런 말씀을 굳이 하지 않으셔도 또래 친구들이랑 평소에 한 번도 찾아 뵙지 않았던 동네 어른들한테까지 찾아가 세배를 했다.

그러면 그분들 또한 반드시 설음식을 내어놓고 먹으라고 권하시고 세뱃돈을 주셨다. “공부 열심히 해라”든가 “밥값 하는 사람이 돼라”든가 이런저런 덕담도 해주셨다. 솔직히 말하면 나는 그때 동네 어른들의 그런 격려와 충고의 말씀보다는 건네주시는 세뱃돈에 더 관심이 컸다.

이렇게 설날은 소득이 아주 큰 날이었다. 그럴 수만 있다면 설날이 1년에 서너 번 있기를 바랐다. 엎드려 절 한 번 하는데 돈까지 얻을 수 있으니 1년에 몇 번씩이라도 절을 하고 세뱃돈을 받고 싶었다.

그러나 예순이 넘은 지금은 어릴 때처럼 설레는 마음으로 설날을 기다리지 않는다. 기다리지 않았는데도 설날이 찾아와 설날이라는 감흥조차 사라진다. 흐르는 세월의 강물에 공연히 인간이 빗금을 그어 설날이라고 한다는 생각만 든다.

그렇지만 설날 아침에는 가슴을 활짝 펴고 심호흡을 해본다. 평소보다 훨씬 더 상쾌하게 느껴진다. 설날의 맑은 햇살이 가슴 깊이 스며든다. 멀리 겨울산 위로 어미새를 따라 질서 있게 고향을 향해 날아가는 새의 가족이 정다워 보인다. 그루터기만 남은 무논 위로 새떼가 일제히 날아오르는 장엄한 풍경도 보인다. 저 새들도 설날을 맞아 나이 한 살을 더 먹을 것이다. 날개에 힘이 실리고 가슴은 희망으로 한껏 더 부풀 것이다.

서둘러 방석을 깔아드리고 부모님께서 나란히 앉으실 때까지 기다렸다가 세배를 올린다. 아흔이 넘은 부모님께 세배를 드릴 때마다 이제는 부끄러운 생각이 든다. 부모님의 사랑과 기대에 못 미친 삶을 사는 현재의 내 삶이 세배를 올리는 순간 그대로 드러나는 것 같다.

“올해에도 건강하고 하는 일 모두모두 잘 되기를 바란다. 그리고 내가 꼭 하나 부탁하고 싶은 것은, 올해부터는 너희 가족 모두 성당에 열심히 나가도록 해라.”

세배를 받고 나서 아버지가 그런 말씀이라도 하시면 그저 부끄럽고 죄송스럽다. 그래도 부모님은 어릴 때 내가 세배드렸을 때처럼 한결같이 새것으로 만 원짜리 몇 장을 미리 봉투에 넣어뒀다가 꼭 세뱃돈을 주신다. 공손히 두 손으로 무릎 꿇고 받긴 하지만 예전처럼 그렇게 기쁜 것만은 아니다. 어릴 때는 세뱃돈 받으려고 설날을 기다렸지만 지금은 늙으신 부모님께 세뱃돈을 받으면 공연히 마음이 슬프고 아리다.

더구나 부모님 보시는 앞에서 아이들에게 세배를 받는 일은 정말 쑥스럽다. 내가 아이들에게 절을 받을 수 있을 정도로 떳떳한 아버지인가 하는 데에 생각이 미치면 세배받고 싶지 않을 때도 있다.

그러나 어쩌랴. 저 아이들도 어릴 때 나처럼 세배 자체보다 세뱃돈에 관심이 더 많을 것이므로 세배를 받을 수밖에 없다. 미리 준비해둔 세뱃돈을 건네주면서 예전에 웃어른들이 내게 말씀하신 것처럼 “설 쇠면 올해 나이가 몇이지? 소원 성취하길 바란다” 등의 덕담도 건네야 한다.

아직 세배를 드릴 수 있고 세뱃돈을 받을 수 있는 부모님이 계시다는 것은 큰 축복이다. 나는 세배를 드릴 때마다 부모님께 드리는 마지막 세배가 되는 게 아닐까 하고 늘 걱정이 앞섰다. 지난해에 세상을 떠나셨기 때문에 올 설부터는 아버님께 더 이상 세배를 드리지 못한다. 그래도 아직 어머니가 살아 계시니 세배를 드릴 수 있고 세뱃돈을 받을 수 있다.

세배는 받는 일보다 하는 일이 훨씬 더 기쁘다. 세배하는 일보다 받는 일이 더 많아지고 세뱃돈을 받는 일보다 주는 일이 더 많아졌지만, 나는 아직 세배를 하고 세뱃돈을 받고 싶다. 세뱃돈을 받을 수 있다는 것은 부모님이 아직 살아 계시다는 것을 의미하고 찾아뵐 웃어른과 스승이 아직 계시다는 것을 의미한다.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상업적 등)]
▒☞[출처] 문화일보



 

'글,문학 > 수필등,기타 글' 카테고리의 다른 글

청마(靑馬)의 해라 부르는 이유 ?   (0) 2014.01.31
국민이 주인(主人)?  (0) 2014.01.27
문득문득 그리운 사람  (0) 2014.01.22
너도 그렇다  (0) 2014.01.20
大寒에 즈음하여   (0) 2014.01.1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