팔여거사(八餘居士)
이른바 팔여라는 것은 애써 무언가를 일을 도모하지 않고, 하늘이 내려준 천성에 따라 고분고분하며, 남과 다툼이 없으며 무얼 하지 말라는 것도 없고, 남의 것을 빼앗거나 흥글방망이놀지(남의 일이 잘 되지 못하게 훼방하다) 않으며, 늘 쓰는 용품이 모자라지도 않으며, 무언가 많이 가져도 싫지 않아 평생의 즐거움을 준다면 마음이 기꺼워져 여유로운 삶이 아니던가! 객이 “무엇이 팔여(八餘)입니까?”라고 묻자 팔여거사는 아래와 같이 응대를 한다. * 토란국과 보리밥을 배불리 먹을 만큼 푼더분하고(넉넉하다)(芋羹麥飯飽有餘/우갱맥반포유여) * 왕골자리와 따뜻한 온돌에서 잠을 푼더분하게 자고(蒲團煖堗臥有餘/포단난돌와유여) * 땅에서 솟아오른 맑은 샘물을 푼더분하게 마시고(涌地淸泉飮有餘/용지청천음유여) * 책시렁에 가득한 책을 푼더분하게 보고(滿架書卷看有餘/만가서권간유여) * 봄꽃과 가을 달빛을 푼더분하게 감상하고(春花秋月賞有餘/춘화추월상유여) * 새와 솔바람 소리를 푼더분하게 듣고(禽語松聲聽有餘/금어송성청유여) * 눈 속에 핀 매화와 서리 맞은 국화 향기를 푼더분하게 맡고(雪梅霜菊嗅有餘/설매상국위유여) * 이 일곱 가지를 푼더분하게 즐길 수 있기에‘팔여’이다(取此七餘樂有餘也/취차칠여락유여야) 이때 객이 자리에 머물러 앉아 있으면서 오랫동안 깊이 생각하더니 다시 앞으로 나아가 말하기를 “세상에는 거사님께서 말씀하신 바와 다른 부류의 사람들이 있습니다.”라고 하자 다음과 같이 또 말을 잇는다. * 진수성찬을 배불리 먹어도 부족하고(玉食珍羞飽不足/옥식진수포부족) * 화려한 집에 비단 병풍을 치고 잠을 자면서도 부족하고(朱欄錦屛臥不足/주란금병와부족) * 이름난 술을 실컷 마시고도 부족하고(流霞淸醑飮不足/유하청서음부족) * 잘 그린 그림을 실컷 보고도 부족하고(丹靑畫圖看不足/단청화도간부족) * 아리따운 기생과 실컷 놀고도 부족하고(解語妖花賞不足/해어요화상부족) * 좋은 음악을 듣고도 부족하고(鳳笙龍管聽不足/봉생용관청부족) * 좋고 기이한 향을 맡고도 부족하다 여기고(水沈鷄舌嗅不足/수침계설취부족) * 이 일곱 가지 부족한 게 있다고 부족함을 근심하는 것(有七不足憂不足/유칠부족우부족) 필자가 조선 중기 사람인 김정국(金正國, 1485-1541)이 쓴 『사재집(思齋集)』 권 3의 「팔여거사자서(八餘居士自序)」라는 글의 원문을 읽다 풀어본다. 1519년 정암(靜庵) 조광조(趙光祖)가 목대 잡은(여러 사람을 데리고 일을 시키다) 기묘사화(己卯士禍)로 사재 김정국은 지금의 경기도 고양 땅으로 뜻하지 않는 귀향을 하였는가 보다. 각건(角巾)을 쓰고 시골로 돌아가 은둔자의 삶을 하였던 것이다. 각건을 쓰는 이유는 불의의 세상과는 타협을 하지 않겠다는 의사표시이다. 진나라의 역사서인 『진서(晉書)』 「왕도(王導)」전에 각건이 보인다. 각건은 방건(方巾)이라고도 한다. 옛날 은자(隱者)들은 네 귀퉁이에 모가 난 관(冠)을 쓰고 산림(山林)으로 숨었다. 세상이 지저분하고 더럽다는 이유에서다. 그 비분강개(悲憤慷慨)함이 윗글에 살며시 엿보인다. 많은 것을 가지고도 남의 것을 더 걸태질(염치나 체면을 생각하지 않고 탐욕스럽게 재물을 마구 긁어모으는 짓)하려는 각다귀판(서로 남의 것을 차지하려고 서둘러 덤비는 판)을 읊어대고 있다. 점점 금수(禽獸)와 같이 되어가는 세태를 꼬집은 것이다. 달팽이 뿔 위에서 싸우는 인간의 모습을 적나라하게 그려내고 있다. 인간은 자연의 천리(天理)를 거스르려 한다. 극기(克己)의 정신은 없다. 극기는 곧 게염(욕심)을 이겨내는 것이다. 얼이 빠지고 금전 앞에 개망나니 짓거리를 한다. 돈이면 사족을 못 쓴다. 아예 사족이 뒤틀려 돌아간다. 丁口竹天(정구죽천)! 가소(可笑)로운 짓이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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