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문학/수필등,기타 글

한국사 千字文

淸潭 2013. 9. 28. 10:18

敦晩單選 橋凡反分

(돈만단선 교범반분)
돈암장의 이승만은 단독 선거를 주장했고, 경교장의 백범은 분단에 반대했다.

 

敦(도타울 돈) 晩(늦을 만) 單(홑 단) 選(가릴 선)
橋(다리 교) 凡(무릇 범) 反(돌이킬 반) 分(나눌 분)

 

1).남한만의 단독 정부 수립에 앞장서다

1945년 8·15 해방은 '완전한 자주 독립'이 아니었습니다. 제2차 세계대전에서 일본을 패망시킨 미국과 소련 등 연합국은 한반도를 '전쟁 승리의 결과물'로 여겼습니다. 이에 미국과 소련은 한반도의 남과 북을 38도 선을 기준으로 나누어 통치했습니다. 그러나 남한에서 총선거를 실시해 단독 정부를 공식 수립한 1948년 8월 15일까지, 한반도에는 두 개의 체제는 존재했지만 두 개의 나라는 존재하지 않았습니다. 당시만 해도 분단은 어쩔 수 없이 받아들여야 할 현실이 아니라 좌와 우, 남과 북의 합작으로 넘어서고 무너뜨릴 수 있는 대상이었습니다.

그러나 당시 -분단을 바라보는- 국내 정치 지도자와 정치세력들 간에는 결코 '넘어설 수 없는 장벽'이 가로놓여 있었습니다. 특히 일제 강점기 때, 일본에 협력·동조해 부귀영화를 누렸던 지주·자본가와 친일파 세력은 '자신들이 살아남을 수 있는 유일한 길'을 -좌우합작이나 남북통일이 아닌- 반공을 앞세운 분단국가에서 찾을 수 있다고 여겼습니다. 그들은 좌우 혹은 남북합작을 통해 한반도에 '자주적이고 민주적인 통일 정권'이 세워질 경우, 민족 반역행위를 한 자신들이 가장 먼저 숙청(肅淸)당한다는 공포감에 휩싸여 있었습니다. 그들은 미군이 점령하고 있는 남한만이라도 분단 반공국가를 세워야 한다는 정치적 목표를 공유합니다. 이에 그들은 해방 직후부터 정당 결성(한민당)을 통해 정치 세력화에 나서는 한편 자신들과 협력할 명망 있는 정치지도자를 찾아 나섰습니다. 이때 등장한 인물이 바로 이승만(李承晩)입니다.

이승만은 일찍부터 미국으로 건너가, 강대국의 힘을 빌려 외교적인 방법으로 독립을 이루자는 이른바 '온건 독립노선'을 주창했습니다. 그는 1919년 3·1운동 직후 상해임시정부의 최고 책임자로 추대된 후 워싱턴에 구미위원회를 설치하고 스스로 대통령 행세를 하며 독선을 일삼다가, 1921년 상해임시정부 의정원으로부터 불신임을 받기도 했습니다. 외교적 노력과 교섭을 통해 독립을 획득하겠다는 이승만의 구상은 태평양 전쟁과 일본의 조선민족말살정책에 맞서, 국내·외 독립운동세력들이 비밀결사와 무장투쟁의 길을 걷고 있는 동안에도 멈추지 않았습니다. 이 때문에 해방 이후 귀국 당시만 해도 이승만은 명망 있는 정치지도자였을 뿐, 국내에 어떤 정치적·조직적 기반도 갖추고 있지 못했습니다.

이승만은 본래 스스로 '국부(國父)'라고 여겨, 평소 오직 자신만이 우리나라를 다스릴 수 있는 사람이라고 생각한 인물이었습니다. 그는 귀국해서도 '국부(國父)'로 대접받기를 원했습니다. 이로 인해 이승만은 자신을 '건국(반공국가)의 아버지'로 떠받든 친일지주 정당 한민당(韓民黨) 및 친일부역배 세력과 손쉽게 손을 잡을 수 있었습니다. 이후 이승만-한민당-친일부역배의 정치연합은 소련과 한반도 북쪽의 공산주의 체제와 남한의 좌익 세력들로부터 나라를 지킨다는 명분을 앞세워, '남한만의 단독 정부'를 수립하려는 정치 일정을 실행해 나갑니다.

이승만은 1945년 10월 16일 귀국해 조선호텔에 잠깐 머물다가, 10월말 경 재력가 장진섭의 대저택인 돈암장(敦岩莊)으로 거처를 옮깁니다. 그 후 이곳 돈암장은 이승만-한민당-친일부역배 세력의 정치적 본거지가 되었습니다. 이러한 3자 정치연합이 남한만의 단독 정부를 수립해야 한다는 자신들의 속내를 최초로 드러낸 때가, 1946년 6월 4일입니다.

당시는 조선의 백성이라면 누구나 어떻게 하면 '자주적인 통일국가'를 세울 수 있을까 노심초사하고 있던 시기입니다. 그러나 이승만은 당당하게 반공(反共)을 위해서는 남한만의 단독정부라도 세워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그때 그가 전라북도 정읍에서 한 발언의 내용은 대충 이렇습니다.

"이제 우리는 무기 휴회된 미소 공동위원회가 재개될 기색도 보이지 않으며, 통일정부를 고대하나 여의치 않게 되니, 우리 남한만이라도 임시 정부 혹은 위원회 같은 것을 조직하여, 38이북에서 소련이 철퇴하도록 세계 공론에 호소하여야 될 것이니 여러분도 결심하여야 될 것이다."

그러나 이승만의 정읍 발언이 나올 당시만 해도, 여운형과 김규식 등이 주도한 좌우합작위원회(左右合作委員會)가 '합작 7원칙'을 발표하면서 커다란 정치적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었습니다. 이 때문에 이승만의 '남한 단독정부 구상안'은 제대로 힘을 얻을 수 없었습니다. 그러자 이승만은 직접 미국으로 건너가, 미 정가를 상대로 소련과는 절대로 협력이 불가능하다고 주장하며, 남한 단독정부 수립을 설득하고 다녔습니다.

그러다가 해가 바뀌어 1947년에 들어서자, 남한의 정치 상황이 급작스럽게 변하기 시작합니다. 좌우합작운동이 별다른 진전과 성과를 보이지 못한데다가, 그 해 7월 여운형마저 극우파의 손에 암살당하는 비극이 겹치면서 좌우합작위원회는 결국 해체되고 맙니다. 또한 그 해 5월 속개된 미·소공동위원회 역시 결렬되면서, 이승만의 '남한 단독 정부' 주장은 급속도로 정치적 영향력을 확산시켜나갑니다. 결국 미국은 한반도 문제를 국제연합총회로 넘겨, 국제연합 감시하에 남북한 총선거를 실시한다는 결정을 내립니다. 그러나 북한이 선거 감시를 위해 파견된 국제연합 한국임시위원단의 입국을 거부하자, 다시 국제연합은 남한만의 총선거를 실시하기로 결정합니다.

이에 1948년 5월 10일 제헌의회 구성을 위한 남한만의 단독 총선거가 실시됩니다. 제헌의회는 5월 31일 개원하여, 이승만을 초대 국회의장으로 선출합니다. 또한 7월 17일 대통령중심제를 골자로 하는 헌법을 제정하고, 이승만을 초대 대통령으로 선출합니다. 그리고 이승만은 8월 15일 남한만의 단독정부가 수립되었다는 사실을 선포하고, 그 해 12월 제3차 파리 국제연합 총회에서 정부 승인을 받습니다. 이로써 이승만은 남한과 북한이 전면적으로 대결하는 '분단 체제'를 구축합니다.

 

2).삼팔선을 베고 누워 민족 분단에 반대하다

김구는 정치적 성향과 노선만으로 평가하면, 공산주의나 사회주의에 비우호적인 우익 계열로 분류할 수 있습니다. 또 적지 않은 정치학자나 역사학자들은 김구를 이승만 못지않은 반공주의자로 묘사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이승만과 김구는 근본적으로 같을 수 없는 한 가지 차이가 있었습니다. 즉, 이승만은 반공을 위해서는 친일파도 좋고 분단도 좋다고 여긴 반면 김구는 통일을 위해서는 반공을 버리고 좌우합작도 할 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이와 같은 김구의 정치사상은 태평양 전쟁을 전후해 임시정부가 취한 민족연합 통일전선과 건국강령에 잘 드러나 있습니다.

또한 그가 해방 후 여운형과 김규식 등의 좌우합작위원회가 발표한 '좌우합작 7원칙'에 대해, 지지 입장을 보인 사실 또한 같은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습니다. 당시 좌우합작위원회가 합의해 발표한 7원칙은 임시정부의 건국강령이나 건국동맹과 건국준비위원회의 정치 강령이 담고 있는 '좌우합작 노선'의 연장선상에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것은 민족주의와 사회주의계열이 우파와 좌파로 나뉘어 대립하기보다는, 함께 손을 잡고 민족과 인민이 소망하는 역사적 과제 곧 자주적이고 민주적인 통일정부의 수립과 노동자·농민 등 생산대중의 생존권이 보장되고 정치적 자유를 누릴 수 있는 국가체제를 만들자는 의지를 담고 있습니다.

이렇듯 김구는 남과 북 그리고 좌와 우가 힘을 합해 자주 독립과 통일정부를 수립할 수만 있다면, 권력과 부귀영화는 물론 자신의 사상까지도 내던질 수 있다는 한 가지 신념을 지키며 살았습니다. 그러면 이승만-한민당-친일부역배의 3자 정치연합이 미국과 국제연합의 결정을 명분 삼아 남한만의 단독 정부 수립과 권력 장악을 위해 내달릴 때, 김구는 무엇을 하고 있었을까요?

남한만의 단독 정부 수립이 기정사실로 굳어져 가고 있던 1948년 2월, 김구는 '삼천만 동포에게 눈물로 호소함'이라는 제목의 성명서를 발표합니다. 여기에서 김구는 남한만의 단독 정부를 수립하는 데 자신은 결코 협력하지 않겠다는 소신을 밝힙니다.

"나는 통일된 조국을 건설하려다가 38선을 베고 쓰러질지언정 내 한몸의 구차한 안일을 취하여 단독정부를 세우는 데는 협력하지 않겠다."

남한만의 단독정부를 세우는 일에 결코 힘을 보태지 않겠다고 선언한 김구는 그 해 2월 26일, 북한의 김일성과 김두봉에게 '남북한의 정치 지도자들이 만나 정치협상을 해 통일정부 수립과 새로운 민족국가 건설에 대한 방안을 토의하자'는 제안을 합니다. 그리고 3월 7일에는 김규식·김창숙·조소앙·조성환·조완구·홍명희와 더불어 남한만의 단독총선거에 참여하지 않겠다는 7인 공동성명을 발표합니다. 여기에는 남과 북이 만나 자주적으로 통일 조국에 대한 구상을 세우고 공동으로 투쟁해 나가자는 뜻이 담겨 있었습니다. 이와 같은 김구의 제안은 한 달 가량 지난 3월 25일 '남북제정당사회단체 대표자연석회의'를 개최하자는 북측의 화답으로 마침내 성사되기에 이릅니다.

당시 이승만-한민당-미군정청은 이 남북대표자연석회의 자체를 반대했고, 우익 계열의 기독교·청년·학생단체나 북에서 쫓겨 남쪽으로 내려온 사람들은 김구의 북한 행(北行)을 끝까지 실력으로 막고 나섰습니다. 그러나 통일 노선을 지지하는 정치세력은 물론 각계각층에서 '남북한 정치지도자 정치협상'을 지지하는 움직임이 일어나자, 김구는 다시 힘을 얻어 통일정부에 대한 마지막 희망을 안고 방북 길에 오릅니다. 그러나 남북연석회의에서도 별다른 성과를 거두지 못하고 돌아온 김구는, 결국 남한 단독정부 수립과 뒤이은 북한의 정부 수립(9월 9일)을 바라보는 참담한 상황을 겪게 됩니다.

그러나 김구는 남한과 북한에 각각 독자적인 정부가 수립되어 '분단 체제'가 형성된 이후에도, 통일국가를 반드시 세우겠다는 자신의 꿈과 신념을 버리지 않았습니다. 그는 1948년 11월 미·소 양군이 물러난 후, 통일정부를 수립할 수 있다는 내용을 담은 담화문을 다시 발표합니다. 그리고 이듬해 1월에는 조국의 통일을 위해 남북한 협상을 희망한다는 발언을 합니다. 이러한 김구의 정치적 행보는 남한을 반공의 전초기지로 삼으려는 이승만을 중심으로 한 우익 세력에게는 '눈엣가시'와도 같았습니다. 그들에게 김구는 자신들이 남한에 애써 이룩해놓은 '반공 분단국가'를 언제라도 허물어뜨릴 수 있는 위험한 인물로 여겨졌습니다. 결국 김구는 자주 독립과 통일 조국을 보겠다는 평생의 신념을 지키기 위해 온몸을 바쳤다는 단 한 가지 이유 때문에, 반공우익 진영의 사주를 받은 당시 육군 소위 안두희의 총탄에 비극적인 죽임을 당하고 맙니다.

필자는 만약 좌익 계열의 몽양 여운형과 우익 계열의 백범 김구가 암살당하지 않고 살아 있었다면, 한국전쟁이라는 좌우와 남북의 '극단적인 충돌'은 막을 수 있지 않았을까 하는 상상을 간혹 해봅니다. 그런 의미에서 좌우와 남북의 균형과 조화의 가능성을 모색한 여운형과 김구의 '비극적인 최후'는 곧 타협과 공존을 위한 그 어떤 가능성도 찾지 못한 채, 서로 죽고 죽이는 극한 대결로 치달은 분단사 곧 한국 현대사의 시작점이라고도 할 수 있겠습니다.

 

 

 

돈암장(敦巖莊)

 

1945년 이승만(李承晩)이 환국하여 처음 기거했던 사저(私邸)로 당시 서울시 돈암동 인근에 있다 하여 ‘돈암장’이라 하였다. 이 집은 당시 조선타이어주식회사 사장이었던 장진영(張震英)으로부터 빌린 집으로서, 장진영은 연건평 약 150평의 3채 중 1채만을 쓰고, 안채인 54평과 또다른 1채를 빌려주었다.

 

약 700평의 정원에 뛰어난 미관(美觀)을 지녔다. 장진영은 6·25사변 때 납치되어 죽었고, 돈암장은 서울특별시 성북구 동소문동 4가 103번지의 1호 및 2호로 분할되어 1986년 현재 문화재로 지정받지 않은 채 3명의 소유자에게 나뉘어 있다. 이승만은 환국 후 조선호텔에서 며칠을 묵고 경비과중으로 이 집을 찾았다.

 

이 곳에서는 윤치영(尹致暎 : 비서실장)·이기붕(李起鵬 : 서무담당)·윤석오(尹錫五 : 문서담당)·송필만(宋必滿 : 비서) 등이 보필하였고, 와병 중에는 임영신(任永信)이 간병하였다. 이승만은 돈암장에서 미군정청으로부터 추대되었던 민주의원 의장직을 버리고, 공산계열의 민주주의 민족전선과 대결을 하면서 신탁통치반대운동에 열중하였다.

 

극도의 혼란이 거듭되는 가운데 이승만은 장진영으로부터 집을 비워달라는 통고를 받았고, 이 소식을 들은 미조선주둔군사령관인 하지(Hodge,j. R.)중장의 주선으로 일제강점기 조선총독부 정무총감 다나카(田中)가 쓰던 마포장(麻浦莊)을 얻어 이사하였다.

 

 

경교장(京橋莊) 

2001년 4월 6일 서울유형문화재 제129호로 지정되었다가 2005년 6월 13일에 사적 제465호로 승격되었다. 서울특별시 종구 평동에 있다.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주석을 지낸 백범 김구가 집무실과 숙소로 사용하였던 역사적 장소이다.

이승만의 이화장(梨花莊),
김규식의 삼청장(三淸莊)과 함께 대한민국 정부수립 이전에 건국 활동의 중심을 이룬 3대 요람이다. 1938년 금광으로 돈을 번 최창학(崔昌學)이 건축면적 396.69㎡, 연면적 945.45㎡(지하1층, 지상2층)규모로 지었으며, 1930년대 건축술을 잘 보여주고 있다. 원래 이름은 죽첨장(竹添莊)이었다.8·15광복 이후 최창학이 김구의 거처로 제공하였는데, 김구가 죽첨장이라는 일본식 이름 대신 근처에 있는 경교[京橋;경구교(京口橋)의 약칭]라는 다리 이름을 따서 경교장으로 개명하였다.

건물은 단아한 2층 양관으로 전면 분할의 비례가 아름다우며, 1층의 좌우창을 원형으로 돌출시켰고, 그 상부를 의장의
중심체로 하였다. 현관 2층부에는 6개의 붙임 원주를 사용하여 5개의 들임 아치창을 냈다.

김구가 반탁·건국·통일 운동을 주도할 때에는 흔히 '서대문 경교장'이라고 일컬었으며, 민족진영 인사들의 집결처로 이용되었다. 또한 1949년 6월 26일 김구가 집무실에서
안두희(安斗熙)의 흉탄에 의해 서거한 곳이기도 하다.

이후 최창학에게 반환되었고 다시
타이완 대사관저로 사용되다가 6·25전쟁 때에는 미국 특수부대가 주둔하는 등 여러 차례 주인이 바뀌었다. 1967년 삼성재단에서 매입하여 강북삼성병원 본관으로 사용되어왔다. 이후 서울시에서 소유는 그대로 두되 전체 공간을 복원하기로 합의해 임시정부에서 사용하던 당시의 모습대로 재현하였다. 이는 2013년 3월 2일부터 시민에게 개방되었다.

'글,문학 > 수필등,기타 글' 카테고리의 다른 글

상사화(相思花) ..|  (0) 2013.09.30
가을이익어갑니다   (0) 2013.09.29
여백餘白의 미美 ..  (0) 2013.09.21
더불어 즐기는 感謝와 나눔의 名節로  (0) 2013.09.18
행복을 함께나누는 마음으로  (0) 2013.09.1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