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담과 설화 모음집 - 뒤 담화를 까다
한정주 한국사천자문
寅於未邱 乘寂罷睡
(인어미구 승적파수)
유몽인의 어우야담과 작자 미상의 청구야담이요, 대동야승과 파적·파수록이 있다.
寅(범 인) 於(어조사 어) 未(아닐 미) 邱(언덕 구)
乘(탈 승) 寂(고요할 적) 罷(마칠 파) 睡(졸음 수)
1).17~18세기 조선 : '뒤 담화' 역사와 문학의 전성시대
잘 아시겠지만, 역사에는 '정사(正史)'의 편집체제에 편입되지 못한 소위 '야사(野史)'가 존재합니다. 또한 지배계층이나 상류 사회로부터 일반 민가의 백성을 이야기 소재와 대상으로 삼은 야담(野談)이나 각종 기이하고 신비로운 이야기를 다룬 설화(說話)가 있습니다. 야사(野史)·야담(野談)·설화(說話) 혹은 신화(神話)·전설(傳說)·민담(民譚)들은 모두 과거 왕조가 제도적으로 공인한 역사에 속하지 않았다는 점에서, 뒷마당에서 소곤거리고 즐겨 읽었던 소위 '뒤 담화의 역사와 문학'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특히 여기에서 다루어진 이야기들은 대개 정사(正史)의 기록에서 다루기 곤란한 역사나 또는 민가의 백성들 사이에서 떠도는 기담(奇談)이나 음담패설(淫談悖說)에 이르기까지 소재나 내용에 구애받지 않고 인습과 도덕의 장벽을 넘나들었습니다. 이 때문에 지배 계층인 왕조나 양반사대부들보다는 부와 권력으로부터 소외당한 일부 사대부와 중인 및 여성 계층 그리고 일반 백성들에게 널리 사랑을 받았습니다. 더욱이 감추어진 이야기에 관한 사람들의 본능적인 호기심에다, '뒤 담화의 역사와 문학'의 주인공이나 소재 및 내용들이 대개 이들 계층에 매우 친숙했기 때문에 더욱 큰 사랑을 받을 수 있었습니다.
앞서 살펴보았듯이, 17~18세기 들어 조선은 급격한 사회 변동을 겪었습니다. 노론(老論) 집권세력의 권력 독점이 심화되면서 정치권력에서 배척당한 사대부 계층이 증가하고, 국제무역과 화폐상품경제의 발달로 막강한 경제력을 갖춘 중인 계층이 등장했습니다. 또한 양대 전란(戰亂) 이후 신분 질서가 무너져 노비와 평민의 숫자는 감소한 반면 양반 인구는 급증했습니다. 이들 신흥 양반 계층은 주자학(朱子學)의 정통 학문인 경학(經學)과 사서(史書)에 익숙하지 않아서 새로운 학문과 문화에 대한 강한 욕구를 지니고 있었습니다. 영·정조(英·正祖) 시대에 중인 계층의 문화라고 할 수 있는 '여항문학(閭巷文學)과 풍속화(風俗畵)'나 새로운 학문과 사상을 추구한 사대부 계층의 실학(實學)이 전성기를 맞은 이유 역시 여기에서 찾을 수 있습니다. 지배계층의 배척과 차별·멸시를 당하면서도, 이들은 문화와 학문에 대한 새로운 욕구와 자신들의 능력을 드러내고자 했습니다. 이 때문에 이들은 노론 집권세력과 양반사대부 계층을 비꼬거나 혹독하게 비판한 이야기나 자신들을 주인공으로 삼고 그 관심사와 취향을 소재로 선택한 '뒤 담화의 역사와 문학'에 매료되었습니다.
2).『어우야담』과 『청구야담』
'寅於未邱(인어미구)'는 이렇듯 조선 후기 들어 크게 유행한 야담(野談) 문학을 대표할 만한 작품인 유몽인(柳夢寅)의 『어우야담(於于野談)』과 지은이는 알 수 없지만 19세기 3대 야담집(野談集) 가운데 하나로 평가받고 있는 『청구야담(靑邱野談)』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어우야담』은 광해군(光海君) 때 야담(野談)의 대가로 불린 어우당(於于堂) 유몽인이 지은 우리 역사 최초의 야담집(野談集)입니다. 이 책은 특히 조선 초기의 설화와 조선 후기의 야담을 연결하는 중간 다리 역할을 하기도 했습니다. 즉, 『어우야담』은 조선 초기에 양반 계층 사이에서 유행한 '소화(笑話 : 우스개 이야기)' 중심의 설화 전통을 이어받은 한편, 더 나아가 새로운 차원의 야담을 선보여 18~19세기 들어 백성들 사이에서 널리 사랑받고 인기를 모은 수많은 '뒤 담화 역사와 문학'이 등장하는 토대가 되었습니다. 이 책에는 왕후장상(王侯將相)에서부터 양인(良人)·천민(賤民)·기녀(妓女)에 이르기까지 조선 사회 모든 계층의 인물이 등장할 뿐만 아니라 사람들의 다양한 삶과 기이한 이야기 그리고 당시 사회에서 금기시한 여러 성 풍속 등이 두루 다루어져 있습니다. '어우이개중(於于以蓋衆 : 쓸데없는 소리로 뭇 사람들을 현혹케 한다)'이라는 『장자(莊子)』 「천지(天地)」편의 구절에서 어우당(於于堂)이라는 호(號)를 취한 것처럼, 유몽인(柳夢寅)은 주자학(성리학)적 관념이 지배한 양반 사회의 인습에 개의치 않는 자유분방하고 기발한 사고력을 발휘해 야담이라는 새로운 영역을 활짝 열어 젖혔습니다.
유몽인의 『어우야담』이 새롭게 개척한 야담은 18~19세기 들어 만개(滿開)합니다. 야담의 전성시대라고 할 수 있는 이때 등장한 수많은 야담집 가운데에서도 『계서야담(溪西野談)』·『동야휘집(東野彙集)』과 더불어 『청구야담』을 소위 '3대 야담집'이라고 부릅니다. 순조(純祖) 때 사람인 계서(溪西) 이희준(李羲準)이 기담(奇談)을 중심으로 자신이 보고 들은 이야기를 모아놓은 책이 『계서야담』이고, 『동야휘집』은 고종(高宗) 때 사람인 이원명(李源命)이 전해 내려오는 각종 야담과 패설(稗說)들을 모아 수집·편찬한 책입니다. '3대 야담집' 중 이 두 책은 작자와 연대가 뚜렷한 반면 『청구야담』은 그렇지 못합니다. 그러나 『청구야담』에 실린 각종 민담과 야담들이 1700~1800년대의 사회 현실과 풍속을 적나라하게 묘사하고 있기 때문에, 이 책이 19세기에 나왔다는 사실은 어렵지 않게 짐작할 수 있습니다. 특히 이 책은 내용과 표현이 매우 사실적이어서 18~19세기 사회사와 풍속사의 좋은 자료가 되고 있기도 합니다.
3).『대동야승』과 『파적』·『파수록』
'乘寂罷睡(승적파수)'는 조선 후기에 등장한 또 다른 설화와 야담 모음집인 『대동야승(大東野乘)』과 『파적(破寂)』·『파수록(罷睡錄)』을 뜻합니다.
이들 중 『대동야승(大東野乘)』은 조선 개국 초기부터 인조(仁祖) 시대까지 250년 동안의 각종 야사(野史)·수필(隨筆)·설화(說話)·야담(野談)을 총망라해놓은 기념비적인 대작(大作)입니다. 『대동야승』은 성현(成俔)의 『용재총화(慵齋叢話)』, 서거정(徐居正)의 『필원잡기(筆苑雜記)』, 허봉(許篈)의 『해동야언(海東野言)』, 정철(鄭澈)의 『시정비(時政非)』, 유성룡(柳成龍)의 『운암잡록(雲巖雜錄)』, 이덕형(李德泂)의 『송도기이(松都記異)』, 지은이 미상의 『역대요람(歷代要覽)』 및 『일사기문(逸史記聞)』 등을 비롯해 여러 사람들이 편집·저술한 59종의 책을 수집해 편찬한 일종의 '야사 총서(野史叢書)'라고 할 수 있습니다. 비록 편찬자와 발행연대는 알려져 있지 않지만, 이 책은 당색(黨色)을 초월하여 다양한 당파의 주요 인물들이 남긴 야사와 수필들을 망라해 놓았을 뿐만 아니라 정사(正史)에는 나오지 않는 실존 인물들을 둘러싼 일화나 우스개 이야기들이 광범위하게 수록되어 있습니다. 야승(野乘)은 야사(野史)의 다른 말이므로, 『대동야승(大東野乘)』이란 곧 '우리나라의 야사(野史)'라는 뜻이 됩니다.
'무료함을 깨는 심심풀이 이야기'라는 『파적(破寂)』이나 '잠을 쫓을 정도로 재미난 이야기'라는 뜻의 『파수록(罷睡綠)』은 음담패설과 각종 진기(珍奇)한 야담, 해학(諧謔)과 재치가 넘치는 설화로 꾸며져 있는 책입니다. 특히 『파수록』은 '잠을 막아줄 정도로 재미난 이야기'라는 『어수록(禦睡錄)』과 함께 음담패설과 해학의 백미(白眉)로 꼽히며, 백성들 사이에서 널리 인기를 모았던 야담집(野談集)입니다. 그러나 여기에 실려 있는 음담패설과 해학은 단순한 우스개 이야기가 아니라 당시 사회를 날카롭게 풍자하고 비판한 내용들이 주를 이루었습니다. 예를 들어 '기투환심(妓妬還甚 : 기생의 질투만 모질게 돌아오다)'이라는 제목의 이야기에는, 지방 수령부터 말단 관리에 이르기까지 자신이 사랑하는 기생(妓生)들과 불법적으로 관청 내에 살림을 차리는 일을 예사로 알았다는 대목이 나옵니다. 그리고 여러 기생을 들여놓은 충청도의 한 지방 관리가, 기생들이 서로 질투를 심하게 하는 바람에 '이 기생 저 기생' 사이에서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상황을 해학적으로 묘사해 놓았습니다. 성에 대한 흥미와 날카로운 사회풍자 및 비판을 적절하게 혼합해 놓아, 백성들에게 읽은 재미와 더불어 통쾌한 감정까지 느끼게 해준 셈입니다. 이렇듯 조선 후기의 야담(野談)은 백성들이 사회 풍자와 비판을 통해, 권문세가와 양반사대부 체제에 저항하는 무기이기도 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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