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륵불과 정감록 - 천년 왕국을 꿈꾼 백성들
한정주 한국사천자문
彌勒濟世 鄭鑑救民
(미륵제세 정감구민)
미륵불은 세상을 구제하고, 정감록의 진인은 백성을 구원한다.
彌(미륵 미) 勒(굴레 륵) 濟(건널 제) 世(인간 세)
鄭(나라 정) 鑑(거울 감) 救(구원할 구) 民(백성 민)
1).영원불멸한 구세사상(救世思想) - 미륵불
미륵불(彌勒佛)은 삼국시대부터 오늘날까지 끊임없이 민중들의 구세사상(救世思想) 속에 등장하고 있는 부처입니다. 불교 경전(經典)에 따르면, 미륵불은 현세(現世)의 부처인 석가모니의 법력(法力)을 이어 인간 세계를 구원하기 위해 오는 미래의 부처입니다. 미륵불이 인간 세계에 오는 순간은 바로 사람들이 모든 번뇌와 고통으로부터 벗어나 아라한[阿羅漢 : 불교에서 말하는 성인(聖人)의 최고 경지]의 지위를 얻게 되는 순간이기도 합니다. 따라서 예부터 백성들은 미륵불을 통해 현실 세계의 고통과 공포로부터 자신이 구원받을 수 있다는 믿음을 갖게 되었습니다. 특히 미륵불에 대한 믿음은 지배계급의 착취와 수탈로부터 해방을 바라는 민중들 사이에서 크게 유행했습니다. 그것은 미륵불을 통해 현실의 고통스러운 삶을 벗어나고자 하는 열망 때문이었습니다. 특히 사회적 혼란이나 왕조 교체 등 역사적 격변기에 미륵불 신앙은 민심(民心)을 움직이는 데 있어서 큰 힘을 발휘했습니다. 이 때문에 미륵불이라고 자처하는 인물이 나타나 백성들을 선동하고 조직할 경우, 한 나라를 무너뜨리고 새로운 나라를 세울 정도의 위력을 보여주기도 했습니다.
그 대표적인 인물이 신라의 천년 왕조가 혼란을 거듭하며 붕괴하고 있던 격변의 시대에 홀연히 나타나 자신을 미륵불의 환생이라고 한 궁예(弓裔)입니다. 그는 미륵불 신앙을 내걸어 신라가 이미 역사적으로 생명력을 다한 나라라는 사실을 만천하에 알리는 한편 자신이 세운 태봉(泰封)이 다가오는 미래를 떠맡을 나라임을 선전했습니다. 초기 궁예가 그토록 광범위한 백성들로부터 전폭적인 지지를 얻을 수 있었던 이유는 아마 미륵불에 대한 민중들의 열망 때문이었을 것입니다. 후백제를 세운 견훤(甄萱) 또한 미륵불을 통해 후삼국 통일의 야망을 이루고자 했습니다. 그의 꿈과 야망이 담겨져 있는 곳이 모악산의 금산사(金山寺 : 전북 김제 소재)입니다. 금산사는 우리 역사에서 미륵불 신앙을 최초로 일으켜 세우고 통일신라 전역에 퍼뜨린 진표(眞表) 율사가 피를 토한 수행 끝에 미륵불을 친히 만난 후 세웠다는 미륵(彌勒) 도량입니다. 이 때문에 예부터 금산사는 미륵불 신앙의 총본산으로 역할을 수행했습니다. 미륵불의 혼과 얼이 담겨 있는 최고의 미륵 도량이 옛 백제 지역에 자리하고 있다는 사실은 곧 견훤에게는 세상을 구할 미륵불이 나타날 땅이 다름 아닌 후백제(後百濟)임을 보증해 주는 가장 확실한 증거였습니다.
견훤은 비록 후삼국 통일의 꿈을 이루지 못했지만, 그 후로도 미륵불을 통해 세상을 구원하겠다는 꿈과 야망을 품은 수많은 영웅호걸들이 이곳 금산사를 끊임없이 찾아왔습니다. 고려를 멸망시키고 조선을 세운 이성계(李成桂)가 그랬고, 또한 '천하공물(天下公物)'을 주장하며 대동평등(大同平等)의 세상을 꿈꾼 혁명가 정여립(鄭汝立)과 동학농민전쟁을 일으킨 백성들의 마음이 모두 이곳 금산사에 닿아 있었습니다. 역성혁명(易姓革命)을 꿈꾸었든 혹은 왕조체제(王朝體制)의 전복을 꿈꾸었든 아니면 신분과 계급이 없는 평등한 세상을 꿈꾸었든 현재보다 더 나은 미래의 삶을 열망한 사람들은 미륵불에 의지해 자신의 뜻을 펼치고자 했습니다. 심지어 사회개혁을 부르짖은 고려 말 공민왕 때의 승려 신돈(辛旽)조차 지배계층인 권문세족(權門勢族)에 맞서기 위해 미륵불의 힘과 그에 대한 백성들의 믿음을 활용했습니다.
이렇듯 천 년 가깝게 이어져온 미륵불에 대한 '구원의 믿음'은 조선 후기 봉건질서의 붕괴와 외세의 침략 그리고 근대화의 소용돌이를 힘차게 헤쳐 나가고자 한 백성들에게서 또 다른 삶의 열정으로 나타납니다. 그것은 바로 미륵불 신앙에 바탕을 두거나 혹은 미륵불을 직접적으로 받든 동학(東學)이나 증산교(甑山敎), 봉남교(奉南敎), 원불교(圓佛敎)와 같은 신흥 민간종교들입니다. 특히 최제우의 동학과 갑오농민전쟁이 실패로 끝난 후, 증산 강일순(姜一淳)이 동학의 뜻을 이어 세운 증산교의 후천개벽(後天開闢) 사상은 당시 백성들 사이에 널리 퍼져 있던 미륵불 신앙의 정신을 고스란히 받든 것이었습니다. 이렇게 보면, 미륵불은 우리 역사에 최초로 그 모습을 보인 삼국시대 이후 단 한 순간도 구세(救世)와 더 나은 삶을 바라는 백성들의 마음속에서 사라진 적이 없었다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체제와 권력이 아무리 변화해도 번뇌와 고통으로 얼룩진 백성들의 현재 삶이 바뀌지 않는 한, 미륵불은 항상 그들의 마음 속 깊숙한 곳에 자리 잡고 있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2).조선 왕조체제의 전복을 선동한 불온서적 - 『정감록』
우리 역사상 국왕(國王)이나 지배계층의 사람들이 가장 혐오하고 두려워한 서책(書册)의 순위를 꼽는다면, 『정감록(鄭鑑錄)』이 가장 앞자리를 차지하지 않을까요? 조선 왕조의 몰락과 새로운 나라의 출현을 예언하고 있는 『정감록』은 단순한 예언서(豫言書) 이상의 역할, 즉 백성들에게 조선의 왕조체제를 무너뜨리는 구체적인 행동 지침서 역할을 했기 때문입니다. 역사상 이 『정감록』 만큼 백성들로부터 사랑받고 또한 백성들을 열광하게 만든 책은 결코 존재하지 않았습니다. 순조(純祖) 때 나라 전체를 들썩이게 만든 평안도 지역 홍경래(洪景來)의 봉기에서부터, 그 후 전국 방방곡곡을 들불처럼 밝힌 민란(民亂)은 대부분 『정감록』의 영향을 받은 백성들로부터 비롯되었습니다. 특히 홍경래의 봉기 당시 주도세력은 『정감록』에서 예언한 세상과 백성을 구원할 정진인(鄭眞人)을 받들어 봉기(蜂起)에 나섰다는 주장을 내걸고 백성들을 조직했습니다. 조선의 백성들은 이 『정감록』을 통해, 권세가(權勢家)와 양반 지배계층으로부터 벗어나 새롭고 자유로운 세상에서 살고 싶다는 자신들의 욕구를 한없이 토해냈습니다. 도대체 『정감록』은 어떤 내용을 담고 있기에 이토록 백성들로부터 뜨거운 사랑을 받았을까요?
『정감록』은 민간의 백성들 사이에서 널리 유행한 여러 비기(秘記)들을 모은 책으로, 조선 왕조의 운명을 둘러싼 예언서의 형태를 취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몇 백 년에 걸쳐 비밀리에 유포되고 읽힌 책이다 보니, 나중에는 원본(原本)이 무엇인지 알기 힘들 정도로 여러 『정감록』이 돌아다녔다고 합니다. 『정감록』에는 「감결(鑑訣)」, 「동국역대기수본궁음양결(東國歷代氣數本宮陰陽訣)」, 「역대왕도본궁수(歷代王都本宮數)」, 「삼한산림비기(三韓山林秘記)」, 「무학비결(無學秘訣)」, 「오백론사(五百論史)」, 「도선비결(道詵秘訣)」 등 20여 편이 넘는 비기(秘記)들이 모아져 있습니다. 그러나 좁게 보아, 조선 왕실의 선조(先祖)인 이심(李沁)과 이연(李淵) 그리고 조선 왕조를 멸망시키고 새로운 나라를 일으킬 정씨(鄭氏)의 선조(先祖)인 정감(鄭鑑)이라는 사람이 천하의 절경을 두루 유람하고 다니다가 금강산(金剛山)에서 미래를 예언하는 내용을 담고 있는 「감결(鑑訣)」만을 『정감록』이라고 하기도 합니다. 「감결」에 담긴 조선 왕조의 흥망(興亡)에 관한 예언이 『정감록』이 드러내고자 한 핵심 중의 핵심이기 때문입니다.
『정감록』의 「감결」은 그 시작부터 당시 지배계층의 시각에서 볼 때, 가히 혁명적이라고 할 수 있는 예언을 펼쳐 보이고 있습니다. 그 내용을 한 번 살펴볼까요?
.
鄭公曰 自崑崙來脈至白頭山 元氣至于平壤 平壤已過千年之運 移于松嶽 五百年之地 妖僧宮姬作亂 地氣衰敗 天運否塞 運移于漢陽 而其略曰 干戈未定忠臣死 乾坤長夜冥 南渡蛟龍人何去 須從白牛走從城
정공(鄭公 : 정감)이 말했다. "곤륜산의 내맥이 백두산에 이르고, 그 원기(元氣)가 평양(平壤)에 도달했다. 평양(平壤)은 이미 천 년의 운세가 지나, 원기(元氣)가 송악(松嶽)으로 옮겨갔다. 송악은 오백년 도읍할 곳이지만 요승(妖僧)과 궁희(宮姬)가 난을 일으켜 땅의 기운은 쇠퇴하고 하늘의 운세가 막혀버렸다. 다시 한양(漢陽)으로 원기(元氣)가 옮겨갈 것이다. 그것을 간략하게 말하자면, '난리가 아직 평정되지 않았으나 충신은 죽었다. 하늘과 땅이 기나긴 밤중이로구나. 남쪽으로 교룡(蛟龍)이 건너가니, 백성은 어느 곳으로 가야 하나. 모름지기 하얀 소를 따라 종성(從城)으로 도망칠지어다.'이다."
.
沁曰 來脈運移金剛至于太白(在安東)小白(在順興) 山川鍾氣 入於鷄龍山 鄭氏八百年之地 元脈伽倻山 趙氏千年之地 全州范氏六百年之地 至於松嶽 王氏復興之地 餘未詳 不可攷也云云
심(沁 : 이심)이 말했다. "내맥이 금강산으로 옮겨가 태백산(안동에 있음)과 소백산(순흥에 있음)에 이르러, 산천의 기운이 뭉쳐 계룡산으로 들어갔다. 정씨(鄭氏)가 팔백년 도읍할 땅이다. 그 후 원맥(元脈)이 가야산으로 들어가니, 조씨(趙氏)가 천년 도읍할 땅이다. 또한 전주(全州)는 범씨(范氏)가 육백 년 도읍할 땅이다. 다시 송악(松嶽)에 이르러 왕씨(王氏)가 부흥(復興)할 땅이다. 나머지는 상세하지 않아 뭐라고 말할 수 없다."
.
『정감록』에 실린 이심(李沁)과 정감(鄭鑑)의 대화를 요약해 보면, 평양(平壤) 다음에는 송악(松嶽), 송악(松嶽) 다음에는 한양(漢陽), 한양 다음에는 정씨(鄭氏)의 계룡산, 계룡산 다음에는 조씨(趙氏)의 가야산, 가야산 다음에는 범씨(范氏)의 전주(全州), 전주 다음에는 다시 왕씨(王氏)의 송악(松嶽)이 일어나 새로운 왕조의 도읍지가 된다는 내용입니다. 여하튼, 이 대화에서 가장 핵심이 되는 내용은 한양을 대신하여 계룡산(鷄龍山)에 도읍지를 정하고 새로운 나라를 세운다는 정씨(鄭氏)입니다. 여기에서부터 조선 왕조를 전복하고 새로운 나라를 여는 정진인(鄭眞人) 혹은 정도령이라는 인물이 출현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이 정진인 혹은 정도령이라는 가상의 인물은 곧 현실에서는 새로운 세상을 바라는 백성들의 소망을 담아 민란(民亂)과 봉기(蜂起)를 조직해 조선 왕조와 탐관오리에 맞서는 구체적인 인물로 나타납니다. 예를 들어 홍경래 세력은 정진인을 내세워 새로운 세상을 바라는 백성들의 지지를 모았지만, 백성들은 거꾸로 홍경래를 곧 새로운 세상을 열어주는 정진인으로 보았습니다. 여하튼 조선 왕실의 부패와 권문세가 및 탐관오리들의 폭정 속에서 하루하루 전쟁 같은 삶을 살아야 했던 백성들의 입장에서 볼 때, 자신들에게 새로운 세상의 희망을 안겨주는 사람들은 그가 정씨(鄭氏)든 아니든 모두 『정감록』 속의 정진인처럼 비쳤을 것입니다. 조선 왕조가 몰락으로 치달은 19세기는 그만큼 더 나은 삶과 세상에 대한 백성들의 소망이 뜨거웠던 시대였습니다.
'글,문학 > 수필등,기타 글' 카테고리의 다른 글
야담과 설화 (0) | 2013.09.04 |
---|---|
전생의 연인 (0) | 2013.08.29 |
모색(暮色) / 정운(丁芸). 이영도( 李永道 , (0) | 2013.08.27 |
각시잠자리 (0) | 2013.08.27 |
나는 신세대 시누이 (0) | 2013.08.24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