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교이야기/스님들 소식

[천강에서 달을보다] 불암사 회주 일면 스님

淸潭 2012. 5. 8. 19:19

 

[천강에서 달을보다] 불암사 회주 일면 스님
 
죽었다 살아나도, 한강 한 번 더 보는 것일 뿐
 
2011.12.14 14:15 입력 발행호수 : 1125 호 / 발행일 : 2011-12-14

사라호 태풍으로 집 폐허된 후

스님 뒷모습 쫓아 무작정 출가

 

힘든 행자시절 자비·시은 체득

초심은 복밭·원력은 삶의 기둥

 

 

▲일면 스님

 

 

1959년, 한가위 하루 전. 한반도에 강력한 태풍이 몰아쳤다. 사라호 태풍. 사망·실종만 800여명. 학교에서 돌아와 보니 집은 이미 폐허. 걸망 지고 길을 떠나는 스님의 뒷모습이 보였다. 가슴 뭉클했다. 따라 나섰다. 메고 있던 책보는 벌써 마루에 내동댕이쳐진 상태.


스님 따라가 보니 작은 절. 잠시 있다 큰 절로 향했다. 해인사 도착해 ‘스님 되겠다’ 하니 어리다고 받아주질 않는다. 13세 소년이었지만 물러서지 않았다. 심부름이라도 거들었다. 밥도 지었다. 밥 태우기 일쑤고, 정성들여 끓인 국을 쏟는 일 또한 다반사였으니 혼쭐도 많이 들었을 터. 밤엔 혼자 울었다. 사미계를 수지한 건 1964년. 5년동안 겪었을 각고를 어찌 짐작이나 할 수 있을까! 그래도 그는 가야산을 내려가지 않았다.


태풍에 날아간 집을 보며 어떤 상념이 스쳐갔기에, 걸망 진 스님 뒷모습에서 무엇을 보았기에 출가를 결심했을까? 만면에 미소를 띤 일면 스님이 잘라 답한다.


“사문의 팔자였겠지요!”


부드러움과 강함이 동시에 읽혀진다. 일면 스님이 지금까지 쌓아놓은 업적의 원동력은 스님만의 독특한 외유내강에서 비롯된 것은 아닐까?


딱, 하나만 들여다보자. 지금은 손을 놓았지만 조계종 군종특별교구장을 역임하며 군포교의 대혁신을 일으켰다. 46개 군법당 중창불사와 군법당 14개를 신축했고, 3년동안 16만여명의 군장병에게 수계를 내렸다. 영관급은 물론 초급장교까지 당당하게 불자임을 밝히고 있다. 군내에서의 불자 위상이 현격하게 달라졌음을 방증하는 대목이다. 신흥사, 안국선원, 대한불교진흥원 등을 통해 70여억원의 군포교 기금도 확보했다. 앉아서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다. 불철주야 뛴다고만 되는 일도 아니다. 뚝심의 원력과 자비로운 덕이 조화를 이루지 못하면 성취할 수 없는 쾌거다.


궁금했다. 태산 같은 원력, 온화 한 자비의 덕은 어떻게 충만 되었는지. 스님의 지나 온 여정을 통해 그 실마리를 풀어볼 수 있을 것 같았다. 홀로 울고 지냈던 행자 시절을 어떻게 견뎌 냈을까?


“입산 초기 때 제가 지은 밥은 딱 두 가지입니다. 된 밥 아니면 죽 밥. 그 때를 회상하면 지월 스님이 떠오릅니다.”


지월 스님은 소낙비가 내려도 뛰는 법이 없었다고 한다. 혹, 도량에서 누군가 뛰어가면 불러 세워 놓았다. 꾸짖음 대신 뛰어가던 사람으로 하여금 저절로 마음의 안정을 찾게 해주는 법문을 펼쳤다. 소나기가 아니더라도 도량에서 누군가를 만나면 법문을 했는데 주 내용은 하나.


‘삼일 마음 닦는 것은 천년의 보배요, 백 년 탐욕은 하루아침 티끌이다.’


수행인으로서의 본분사를 잊지 말라는 뜻이리라. 일면 스님의 공양을 받은 지월 스님의 ‘법문’은 어떠했을까?


“오늘은 밥이 고슬고슬한 게 참 맛있었어요. 오늘은 밥이 촉촉해서 참 맛있었어요.”


어린 행자의 외로움을 자비심으로 보듬어 준 사람은 지월 스님이었던 것이다. 사실 스님은 지월 스님을 은사로 모시고 싶어했다고 한다. 상좌를 두지 않겠다는 지월 스님의 뜻도 있었지만 무엇보다 세연이 닿지 못했다. 60대 중반쯤 지월 스님에게 병고가 찾아 왔다.


“수술을 마다하고 돌아와 해인사 경내를 말없이 둘러보셨던 스님의 모습이 지금도 생생합니다.”


성철 스님이 지월 스님 방을 찾았다.

“아파요?”

지월 스님은 웃음만 지을 뿐이었다.

“몸 바꿔야 되겠네요?”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먼저 가소.”

다음 날 지월 스님은 입적에 들었다.


일면 스님의 은사 명허 스님 별명은 ‘호랑이’였다. 1960년대 해인사 주석 당시 경내서 젊은 스님이 손이라도 잡고 있으면 “여기가 파고다공원이냐”는 불호령이 떨어졌다. 뒷짐 지고 어슬렁거리면 그 또한 용서하지 않았다. 정재를 끔찍이 아껴서 1원 하나도 허투루 쓰는 법이 없었다고 한다.


“한 번은 은사 스님께서 3000원을 주셨어요. 털실, 비누, 바늘 등을 사오라는 분부였지요. 장을 마치고 스님께 산 물건이랑 거스름돈을 드렸는데 일일이 이건 얼마냐, 저건 얼마냐 하시며 셈을 하시는 겁니다.”


100원이 모자랐다. 사탕 사 먹은 일을 실토하지 않을 수 없었다. 출가했다 해도 아직 스무살이 되기 전이었으니 그냥 넘어갈 법도 한데 아니었다. ‘시은(施恩)으로 사탕 사 먹는 놈과는 중노릇 같이 못한다.’


“당시 은사 스님은 당장이라도 내쫓을 기세였습니다. 두 시간이나 엎드려 참회한 후에야 부처님께 3000배 하라는 말씀을 들을 수 있었습니다.”


평생 동안 화두정진 한 명허 스님은 일면 스님에게 ‘참선해 불교를 일으켜 보라’ 권했다고 한다. 하지만 스님은 “제게는 맞지 않다”며 사판의 길을 걷겠다고 선언했다.


“도반들에게도 말했습니다. 너희는 주불해라. 난 후불탱화 하련다. ‘한쪽 모퉁이를 비추면 천지가 다 밝아진다’고 했습니다. 나 홀로 천지를 모두 밝게 하려 하기보다는 한 분야라도 제대로 비춰보겠다 결심했던 겁니다. 사판의 길을 걷는 스님이라 해서 수행을 하지 않는 건 아니지 않습니까? 이 신념은 예나 지금이나 변함없습니다.”


스님은 평소 ‘능력 없다’는 말을 제일 싫어하는데 그 연유가 조금은 이해된다. 그러고 보니 장기기증운동과 노인복지, 교육에 이르기까지 분초를 쪼개며 전력투구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었던 듯싶다.

 

사랑스런 눈빛·온화한 얼굴도

모두 타인을 행복케 하는 나눔

 

부처님 말씀 마음에 담아내야

지혜가 발현되고 복덕 구비돼


일면 스님에게도 시련은 있었다. 의사로부터 간경화 진단을 받았다. 지월 스님이 스쳐갔던 것일까? 그대로 놔뒀다. 점점 악화된 간은 1993년부터 정점을 찍기 시작했다. ‘그래도 할 일이 남았는데’라는 생각에 입원도 해봤다. 하지만 나아질 기미가 없었다. 조계종 중앙종회 수석부의장을 맡을 때 이르러서는 고통이 밀물처럼 밀려왔다. 육체적 고통보다 정신적 고통이 더 컸다. 우울증이라는 장애에 걸려들고 말았다.


“세상을 부정적으로 보았습니다. 누가 잘 해도 기쁘지가 않아요. 금생엔 못 살겠다. 빨리 몸 바꾸고 싶었지요.”


극단에 이르렀을 때 한 생각이 스쳐갔다. ‘나를 좋아한 사람에게 부담을 주면 안 된다. 상처를 주면 안 된다. 부처님 은혜 천분의 일이라도 갚아야 하지 않나.’ 2000년 ‘간 이식수술’ 결단을 내렸다. 수술 전까지 일주일 동안 기도정진에 들어갔다. 인연 있는 사람들의 안녕과 이미 세상을 떠난 분들을 위한 천도재를 올렸다. 무릎에서 피가 나왔다. 뱃속 창자가 끊어지는 듯했다. 하지만 멈출 순 없었다. 마지막 기도가 될 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20시간의 수술, 3일간의 혼수상태. 생사 갈림길에서 깨어나 창밖을 보았다. 한강이 흐르고 있었다. 한 생각이 스쳐갔다. ‘한강 한 번 더 보려, 한 번 더 사는구나. 결국 생사란 이런 것이구나.’ 건강을 어느 정도 되찾은 스님은 모든 일에 전력투구했다. 한 번 세운 원력은 끝까지 밀어붙였다. 일면 스님의 행보가 본격적으로 시작된 것이다. 그만한 이유가 있다.


“수술 전 법당에서 기도할 때 부처님께 고한 원이 있습니다. ‘딱, 한 번만 더 살려주십시오. 살아나면 목숨 걸고 부처님 법을 전하겠습니다.’ 가피를 입었습니다. 부처님 전에 세운 원, 실천에 옮겨야 하는 건 당연지사입니다.”


지월 스님으로부터 자비를, 스승 명허 스님으로부터는 엄격함을 체득했을 것이다. 병고를 통해 대원력을 세웠다. 덕과 원력, 부드러움과 강함은 이러한 고난의 과정을 통한 후에야 충만된 것이다. 동국대를 졸업하고 겨울 한 철 해인사 공양주 소임을 자청해 보았던 적이 있다. 당시 세납은 서른두살.


“돌아보면 행자 때 지은 복으로 지금까지 중노릇을 해온 것 같습니다. 오히려 지금은 그 복을 까먹고 있는 것 같기도 합니다. 동국대를 졸업했을 때도 비슷한 생각을 했던 거지요. 다시 그 때 그 마음으로 돌아가자. 그래야 오늘도, 내일도 중노릇 잘 한다. 혼자 다져보는 겁니다.”


초심이다. 사문 출가인으로서의 마음가짐. 행자 때 익혔던 하심. 스님은 그 초심을 잃지 않으려 서른이 넘은 후에도 공양주 소임을 자청했던 것이다.


“초심은 빈 마음이라 생각합니다. 초심은 겸허한 마음이며 늘 새로운 마음입니다. 또 무한한 가능성의 복밭입니다. 원력은 삶의 기둥이라 생각합니다. 그 기둥이 없을 때 삶은 공허하고 흔들리기 쉽습니다.”


덕과 원력이 지대해 더 큰 불사를 이뤄낼 것만 같다. 스님은 손을 내 젓는다. ‘한참 멀었다’며 아나율 존자 이야기를 껴내 들었다. 천안제일 아나율 존자는 해진 옷을 깁기 위해 바늘에 실을 꿰려 했으나 할 수가 없었다. 용맹정진으로 시력을 잃었던 아나율 존자 아니던가. 혼잣말로 ‘세상에서 복을 지으려는 사람은 나를 위해 바늘을 좀 꿰어주었으면 좋겠다’ 했다. 누군가 그의 손에서 바늘과 실을 받아 해진 옷을 기워주었다. 부처님이시다.


“복덕을 구족하신 부처님도 복을 지으려 하셨습니다. 중생이 삼악도에 떨어지지 않게 하기 위해 복을 짓는다 하셨습니다. 저는 일생 동안 복을 지어도 모자랍니다.”


스님은 ‘나누는 마음’을 가져보라 한다. 물질적 나눔만을 말하는 게 아니다.

“사랑스러운 눈빛, 온화한 얼굴, 따뜻한 용기를 심어주는 것도 나눔입니다. 재산과 권력이 없어도 타인에게 많은 행복함을 안겨줄 수 있습니다.”

일면 스님은 정호승 시인의 ‘내가 사랑하는 사람’ 시 한 편을 전했다.


‘나는 그늘이 없는 사람을 사랑하지 않는다/ 나는 그늘을 사랑하지 않는 사람을 사랑하지 않는다/ 나는 한 그루 나무의 그늘이 된 사람을 사랑한다/… 나는 눈물이 없는 사람을 사랑하지 않는다/ 나는 눈물을 사랑하지 않는 사람을 사랑하지 않는다/ 나는 한 방울 눈물이 된 사람을 사랑한다/….’


그늘과 눈물을 사랑하고, 그늘과 눈물이 된 사람! 마음을 알고 마음을 나눌 줄 아는 사람 아니겠는가.


“조과 선사가 전했습니다. 모든 악을 짓지 말고 많은 선행을 받들어 행하라. ‘세 살 먹은 아이라도 알 수 있는 것 아니냐’는 백낙천의 반문에 철퇴를 내립니다. ‘세 살 먹은 아이라도 능히 말할 수 있으나 팔십 노옹이라도 행하기 어렵다.’ 경전을 통해, 법문을 통해 배운 것은 너무도 많습니다. 문제는 지금 실천에 옮기고 있느냐 하는 겁니다.”


부처님 말씀은 머리에 저장하는 게 아니라 마음에 담아야 한다고 스님은 강조했다. 그래야 쓸 수 있다. 덕도, 원력도 자비도 마음에서 나온다 하지 않는가. 일면 스님의 여정이 이를 여실하게 보여주고 있다.


늘 그렇듯 스님은 오늘도 좌선에 들어 회광반조(回光返照) 하고 있을 것이다. 좌복에서 일어나면 오늘과 내일 할 일을 꼼꼼히 짚어보고 있을 게 분명하다. 산에서 내려온 물이 수많은 역경을 이겨내고 바다로 나아가듯 스님은 그렇게 흐르고 흐를 것이다.


채한기 상임 논설위원 penshoot@beopbo.com


 

일면 스님
1959년 해인사에서 명허 화상을 은사로 출가했다. 자운 율사를 계사로 1964년 사미계를, 1967년 비구계를 수지했다. 해인사 승가대학 대교과, 동국대 승가학과를 졸업했다. 흥국사 주지, 조계종 포교원 포교부장, 총무원 사회부장, 중앙종회 수석부의장, 조계종 교육원장, 조계종 군종특별교구장, 광동학원 이사장 등을 역임했다. 현재 생명나눔실천본부 이사장을 맡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