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교이야기/스님들 소식

[천강에서 달을보다] 법천사 선원장 일수 스님

淸潭 2012. 5. 8. 19:11

 

[천강에서 달을보다] 법천사 선원장 일수 스님
 
화두 익어도 ‘나’에 갇히면 갈길 멀어
 
2011.11.30 10:42 입력 발행호수 : 1123 호 / 발행일 : 2011-11-30

스님 봇짐 들어주다 절집 당도

좌선 수좌 멋져보여 출가 결정

 

결핵판정 이후 일본 유학 포기

해인사 방부 들이고 화두 참선

 

 

▲일수 스님

 

 

태풍이 몰아치던 어느 밤, 선실에 홀로 남았다. 거센 비바람에 대나무가 요동쳤다. 댓잎 부딪치는 소리를 따라 갈등과 번민으로 들끓던 지난날들이 스쳐갔다.


일수 스님은 세납 23세에 사문의 길로 들어섰다. 그의 유년은 방황의 연속이었다. 너무도 크고 깊은 내리사랑을 주었던 할머니가 중학교 2학년 때 노환으로 세상을 떠났다. 충격이었다. 공부는커녕 학교조차 가기 싫었다. 무덤에 찾아가 울다 잠들곤 하는 게 다반사였다. 그런 아들을 지켜내기 위해 어머니는 정성을 들였다. 그러나 모정도 그의 마음을 되돌리지는 못했다. 엄격한 아버지에 대한 반항은 날이 갈수록 커져만 갔다.


어느 날, 길에서 노스님을 만났다. 스님의 짐을 대흥사까지 들어다 주었다. 하루해가 벌써 넘어갔으니 절에 머물러야만 했다. 수좌 한 분이 좌선에 들어 있었다. 너무도 멋져 보였다. 아침공양을 하며 그 수좌 스님에게 당돌하게 물었다.


“출가하려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곧바로 삭발했다. 찬물에 삭발한 머리를 담그니 세속의 갈등도 한 순간에 깨끗이 씻겨 내려간 듯했다.


그러나 또 다른 방황이 시작됐다. 해인사 강원을 마치고 일본 유학을 결심한 직후 결핵 판정을 받았다. 그 당시 결핵이라면 불치병에 가까웠다. 보건소에서 준 약을 한보따리 받아들고 나오는데 ‘사형선고’를 받은 기분이었다. 하루 한 번 먹는 약이었지만 약성이 너무도 독해 몸이 감당해 내지 못했다. 경전 속 글자도 보이지 않을 정도였다.


이럴 수는 없었다. 한보따리 약은 해우소에 쳐 넣어버렸다. 유학도 깨끗이 포기했다. 오대산 적멸보궁에 올라 일주일 동안 참회기도를 올리며 한없는 눈물을 쏟아냈다. 그리고 결심했다.


‘참선하다 죽자.’


해인사 선방에 방부를 들였다. 장좌불와, 용맹정진을 거듭했지만 화두는 챙겨지지 않았다. 폐병이 완치될 무렵 간염이 찾아왔고, 간염이 호전되는가 싶으면 다시 다리와 무릎 통증이 심해져 왔다. 좌복에 앉아 있을 수도 없을 정도에 이르렀다. 속퇴 결정을 몇 번 했는지도 모른다. 그럴 때마다 자신을 다독였다.


‘여기서 이렇게 끝낼 수는 없지 않은가!’


혹, 자리를 옮겨 보면 몸과 마음이 전환되지 않을까 싶어 통도사로 향했다. 화두는 영축총림에서도 잡히지 않았다. 이젠 마지막이라 생각하고 들어앉은 도량이 불국사였다. 여기서도 실패하면 수좌가 아닌 다른 길을 찾아 떠날 작정이었다.


‘내 마음이 꼭 저 대나무와 같구나. 그동안 저렇게 흔들리며 살아왔구나.’

순간, 대나무 뿌리가 떠올랐다.

‘비바람에 대나무가 휘청거리지만 그 뿌리는 흔들리지 않는다!’

나부끼는 것은 바람도, 깃발도 아닌 ‘마음’이라는 혜능 선사의 일언을 알아차린 것일까? 스스로 되뇌었다.

“결국 모든 번민과 갈등은 ‘나’라고 여긴 것이 일으켰지만, 본래 주인공인 심성은 대나무 뿌리와 같다.”


비로소 화두가 들리기 시작했다. 힘이 생겼다. 아무리 써도 마르지 않는 샘길을 찾은 것이다. 행주좌와 중에도 화두는 끊이지 않았다. 저녁 방선 이후로는 주변 산과 숲을 어슬렁거렸다. 물론 자신은 ‘포행’이라 생각했지만 말이다. 화두 하나, 작은 랜턴 하나 챙겨 밤새 돌아다니다 보니 별일이 다 생겼다. 뱀의 등을 밟아 뒤로 나자빠지기도 하고, 볏짚 오두막에 들어앉아 있다 도둑으로 몰리기도 했다.


심술도 났다. 조실 방에 불이 꺼져 있는 것 아닌가. ‘젊은 수좌는 밤새 공부하는데, 조실 스님이 잠을 잔단 말인가?’ 작대기로 조실 방문을 긁으며 왔다갔다 했다. 법문 중에 ‘할’을 하면 “법문 중에 왜 그리 할을 많이 하느냐”며 “어떤 할이 죽은 할이고, 어떤 할이 산 할”이냐고 따져 묻고는 법당을 나가 버렸다. ‘선기’와 ‘객기’ 사이의 줄을 타고 있었던 것이다. 급기야 조실 월산 스님 방을 두드렸다.


“한 물건에는 법을 전할 수 없다. 한 번 일러 보시게!”

‘나’라고 여기는 물건에 갇힌 상태에서는 법을 전할 수 없다. 본래면목을 찾아야 일언이라도 뗄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한 물건도, 법도 실체가 없는 것 아닌가?’ 대답 못할 게 없다 싶어 던졌다.

“본래 법이 없는데 무슨 법을 전한단 말입니까?”


월산 스님의 대답도 떨어지기 전에 일어섰다. 방문을 나서려는 순간, ‘아차’ 싶었다.

“부끄럽습니다. 알음알이였을 뿐입니다.”

“수좌가 그 정도 살핌과 양심이 있다면 문제될 건 없네. 더 정진해 일대사를 해결하시게.”


불국사에서 봉암사로 건너간 후 백양사로 향했다. 서옹 스님의 ‘어서 오라’는 전갈을 몇 번이나 사양하고 난 후 찾은 백양사였다. 그 때는 이미 스스로 화두를 내려놓았다. 아니, 내려놓은 게 아니라 없애 버렸다. 더 이상 들 이유가 없다는 판단에서다. 한마디로 착각하고 있었던 것. 화두를 놓아서는 안 된다는 서옹 스님의 말씀이 오히려 한심해 보일 정도였다. 어느 날, 서옹 스님이 불렀다.


“너에게 주장자가 있으면 주장자를 주고, 주장자가 없으면 주장자를 빼앗겠다. 어찌 하겠는가?”

“그 주장자를 부러뜨리겠습니다.”

서옹 스님은 별다른 말없이 “나가보라” 했다. 깨달은 바가 있어 답을 한 게 아니라는 사실을 누구보다 자신이 알고 있었다. 스님을 찾아뵙고 고백했다. 큰스님에게 지고 싶지 않아 한 말일 뿐이라고.


“알고 있네. 화두 없이 공부한다는 건 나침반 없이 길을 걷는 것과 같네. 화두를 드시게.”

이 자리서 ‘무(無)’자 화두를 다시 받았다. 참 공부는 이때부터 시작됐다.

일수 스님의 지난 여정 속엔 찬란히 빛나는 그 무언가가 있다. 불굴의 정진력, 선기, 그리고 법거량!


자신의 공부가 어느 정도 되었는지를 점검받는 법거량은 선지식과 나눠보아야 정확히 가늠할 수 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솔직함’이다. 이를 배제한 법거량 자리엔 ‘법’은 없고 ‘거량’만 있을 뿐이다. ‘말’만 있을 뿐 ‘법’은 없는 셈이다. 무용지물이다.


“법거량을 하려면 선기가 출중해야 합니다. 느껴진 바 있다 해서 곧바로 선지식 앞에 나설 수는 없거든요. 용기가 필요 합니다. 하지만 이게 참 어려워요. 선기와 객기를 구분 못할 때가 있거든요.”

 

월산·서암 만나 알음알이 깨고

서옹 법거량 통해 ‘착각’ 떨쳐

 

가난하지만 자유 있으니 행복

‘참사람’ 펼치며 남은 생 정진


객기 얘기가 나오자 일수 스님은 일화 한 토막을 더 들려주었다.


해인사 선방 시절. 성철 스님에게서 화두 받으러 올라오라는 전갈이 왔다. 도반들과 함께 3000배를 올린 후 백련암으로 향했다. 성철 스님은 시자에게 학인 숫자에 맞게 화두공안이 적힌 종이를 가져오라 일렀다. 각자 한 장씩 받아들고 내려오는 길에 궁금증이 일었다. 각자 무슨 화두를 받았을까?


“펼쳐보니 다 ‘마삼근’이었습니다. ‘도인이 근기에 맞는 화두를 줘야지 이게 뭐야!’ 하고는 지나가는 산바람에 화두 적힌 종이를 날려 버렸습니다.”


1700공안은 다 어디 갔단 말인가? 너무 성의 없는 것 아닌가? 부아가 치밀었던 것이다. 지금도 생각하면 슬그머니 웃음도 나고 부끄럽다고 한다.


“마 삼근이면 어떻고, 당근 삼근이면 어떻습니까? 본래면목은 뭐고, 이뭣고는 다 뭡니까? 일반적으로 글이나 말은 소통을 위한 약속이요, 수단일 뿐입니다. 그러나 화두는 그런 의미를 넘어서 있습니다.”


어차피 화두가 보이는 언구가 본질은 아니라는 얘기다. 그 자리에 있던 도반들이 ‘마삼근’을 받았든, ‘본래면목’을 받았든, ‘무(無)’를 받았든 화두를 든 사람의 문제라는 뜻이리라. 일수 스님은 무엇보다 착각하지 말아야 한다고 강조했다. 봉암사 도량에서 수행할 당시 하심을 위해 오줌통을 지게로 져날라 화장실에 버리는 일을 하겠다고 자청한 일수 스님이었지만 ‘착각’은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자리했다는 것이다.


“삼매를 통해 느끼는 감흥은 이루 말할 수 없었습니다. 절로 웃음이 나와요. 희양산을 바라보며 고래고래 고함도 쳤지요. 내 기운을 나도 어쩌지 못하는 겁니다. 깨달은 것 같았지요.”


스님은 점검도 없이 스스로 화두를 없애버렸다. 일수 스님은 봉암사 서암 스님과의 일화 한 토막을 전했다.

어느 날, 길에서 만난 서암 스님에게 여쭈어 보았다.

“성철 스님은 돈오돈수를 주장하셨는데 스님께서는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수좌라면 돈오돈수 해야지.”

“그렇다면 어떤 것이 돈오돈수입니까?”


여기까지는 그래도 괜찮다. 다음 질문이 가관이다. “스님께서는 돈오돈수가 되어 있으십니까?”

서암 스님이 답을 하기도 전에 대중이 모퉁이를 돌아 올라오고 있었다. 대화가 잠시 끊겼다. 서암 스님 주석처와 선방이 갈라지는 길에 이르렀을 때 서암 스님이 한마디 했다.


“벼는 익을수록 고개를 숙입니다. 수행인도 이와 같지요. 공부가 잘 될 때일수록 명심하고 정진하세요.” 이미 깨달았다고 착각하고 있던 일수 스님의 귀에 서암 스님의 말씀은 들어오지 않았다.


“역시 이 공부는 선지식이 필요합니다. 성철 스님이 아니었으면 정진의 숭고함을 배우지 못 했을 겁니다. 월하 스님이 아니었으면 ‘자비’와 ‘덕’을 간접적으로나마 체험하기 어려웠을 겁니다. 월산 스님을 만났기에 ‘알음알이’가 얼마나 무서운지 알 수 있었지요. 서암 스님을 만나지 못했다면 하심과 겸허함을 체득하기 어려웠을 겁니다.”


무엇보다 일수 스님은 서옹 스님을 만나지 못했더라면 지금도 착각에 빠져 살고 있었을 것이라 고백한다. 일수 스님이 ‘참사람’ 운동에 지금도 매진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서옹 스님에 대한 ‘은혜’를 조금이나마 갚고자 하는 ‘마음’을 지금도 간직하고 있는 것이다.


일수 스님은 후학을 위해 다음 일언을 전했다. “화두가 잘 들리고 공부가 무르익을지라도 ‘나’라는 상을 온전히, 겸허하게 비워내지 않으면 소용없습니다.”


화두를 들던 중 경계에 부딪쳤다면 성북동 법천사 문을 두드려 보기 바라는 마음 크다. 선기와 객기, 착각과 깨달음을 오고 간 선지식이기에 분명한 길을 제시해 줄 것이다. 일수 스님의 일언이 지금도 귓가에 생생하다.


“화두 하나 붙잡고 사는 가난한 사람이지만 더할 나위 없이 자유롭고 행복한 수행자로 생을 마감하고 싶다.”


수좌의 길이다.


채한기 상임 논설위원 penshoot@beopbo.com

 

 

일수 스님

본사는 백양사며 은사는 지선 스님이다. 해인사 승가대학을 졸업한 후 해인사 선원에 입방해 성철, 혜암, 법전 스님과 정진 했다. 통도사 월하, 불국사 월산, 봉암사 서암, 백양사 서옹 스님을 모신 일수 스님은 지리산 칠불사 아자방, 계룡산 갑사 등에서 수행하다 서옹 스님 뜻을 이어 법천사에 주석하며 참사람 운동을 펼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