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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강에서 달을보다] 오봉사 조실 효란 스님

淸潭 2012. 5. 8. 19:10

 

[천강에서 달을보다] 오봉사 조실 효란 스님
 
자비·환희 넘치면 극락왕생 감득할 것
 
2011.11.15 16:25 입력 발행호수 : 1121 호 / 발행일 : 2011-11-16

‘정토삼부경’ 인연 지은 후
원효·신란 정토 핵심 연구


붓다에 대한 믿음 확고해야

염불신심 요체 제대로 파악

 

 

▲효란 스님

 


“부처님의 빛을 비로소 빛내겠다(초휘불일·初輝佛日)”고 자칭한 신라 고승! 화쟁사상을 통해 피폐해진 민초들의 삶에 희망을 전하며 새로운 땅을 일구려 했던 스님, 원효대사!


아홉 살에 출가한 일본의 신란(親鸞) 스님. 득도일에 벌어진 유명한 일화가 있다. 득도 하던 날. 스승 지엔(慈圓)은 “저녁이고 시간도 늦었으니 득도식은 내일로 하자”고 말했다. 이에 소년이 노래로 답한다. “내일이 온다고 생각하는 마음 때문에 벚꽃을 볼 수 없을지 모른다. 밤중에 폭풍우가 불지 않는다고 할 수 있을까?” 득도식은 그날 저녁 올려졌다.


신라고승 원효대사와 일본의 신란 스님을 관통하는 게 하나 있다. 원효 스님은 ‘나무아미타불’ 육자명호를 전하며 정토신앙을 민초들에게 권장했고, 신란 스님은 일본 정토진종을 창시한 스님이다. 두 스님 모두 양국에서 정토신앙의 선구자로 칭송받고 있다.


일제강점기로부터 해방된 이후 한국 정토신앙을 새롭게 일궈낸 스님이 있다. 효란 스님! 효란(曉鸞)은 원효의 효(曉)와 신란의 란(鸞)에서 따온 법명. 원효, 신란 스님에 대한 지극한 존경심이 읽혀진다.


일본 와세다대학 문학부 유학시절 효란 스님은 일본 경찰에 체포돼 3년 3개월 옥고를 치러야 했다. 한국 유학생들의 모임인 자숙회(自肅會)를 조직해 활동하는가 하면 독립운동가와의 친분도 있었기에 검거된 것이다. 일본 유학의 길은 여기서 끝나고 만다. 제2고보(현 경복고) 재학 중에도 ‘조센징’이라며 한국 학생들을 홀대한 일본인 와타나베 선생을 폭행해 ‘퇴학’ 당한 이력도 있었던 점을 감안하면 청년시절부터 항일정신이 투철했던 듯하다. 여기까지만 보면 효란 스님과 일본과의 인연은 ‘악연’의 연속이다.


타국 감옥살이였지만 얻은 게 하나 있다. 불심이다. 당시 형무소 교무과장이 스님이었기에 불서는 얼마든지 볼 수 있었다. 300여권의 불서를 탐독하며 불법의 요체를 하나씩 이해해 갔다. 옥중에서도 유독 불서에 마음이 간 것을 보면 스님의 불연 또한 숙연인 듯싶다. 어쩌면 열세 살 때 만공 스님을 은사로 출가한 적이 있었기에 더 끌렸었는지도 모를 일이다.


해방 후 경성대 법문학부, 보성전문학교에서 문화사를 강의하던 스님은 세납 49세인 1968년 동헌 스님을 은사로 재출가(건당) 했다. 효란 스님의 구도여정은 여기서부터 본격적으로 시작된다. 육도윤회를 끊는 길을 찾던 효란 스님은 청담 스님 재일 때 당시 일본 서산 정토종 교무부장이었던 도이 스님으로부터 ‘정토삼부경’을 얻었다. ‘염불’을 왜 하는지, 그 공덕은 어떠한지, 원효 스님과 신란 스님 사이에 흐르는 정토신앙의 공통점은 무엇인지를 짚은 스님은 염불정진 일로에 들어섰다.


해탈의 길을 찾은 스님은 1981년 오봉사를 창건한 후 ‘정토삼부경 강설’, ‘관무량수경 의역과 해설’, ‘불교의 전통신앙’ 등을 출간해 지금까지 50여만부를 법보시했다. 한국 불자들에게 정토신앙의 진면목을 알려주고자 함이었다. 일본에서의 법문 요청도 쇄도하기 시작했다. 올해 들어 건강이 허락지 않아 도일하지 못했지만 지난 30여년 동안 일본 유수 사찰 400여 곳에서 법문했다. 1년의 절반은 일본에서 머물렀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불법의 인연으로 효란 스님과 일본과의 악연은 선연으로 돌아서게 된 것이다.


“만약 제가 부처가 될 적에 시방세계의 사람들이 저의 나라(정토)에 태어나고자 신심을 내어 제 이름 열 번 불러서도 정토에 태어나지 못한다면 저는 차라리 부처가 되지 않겠습니다.”


법장 비구의 48대원 중 18대원이다. 간단하게 정리해 보면 ‘아미타불 열 번이면 정토에 태어날 수 있다’는 말이다. 석가모니부처님 이외에는 현재불로서의 존재를 인정하지 않는 초기불교나 부파의 불타관에서 보면 이는 납득하기 어려운 이야기일 수 있다. 하지만 대승불교의 근본사상인 보살정신에 입각해 보면 ‘모든 중생을 구제하지 않고는 성불하지 않겠다’는 아미타부처님의 원력은 실로 지대하기 이를 데 없다. 법장 비구의 대원력을 애써 외면할 이유가 있을까?

 

오봉사 창건 후 30여년 간
한일 오가며 정토 감로법문


아미타불 본원 의지해 보면
정토와 예토는 둘 아닌 하나


원효 스님에 이어 자장율사, 의상대사, 원칙 스님은 물론 많은 후학들이 정토신앙을 발전시켰지만 이내 자취를 감췄다. 근현대에 접어들면서 수면 위로 올라왔지만 ‘타력신앙’이라는 비판을 받으며 다시 가라앉아야 했다. 아직도 염불을 ‘하근기 사람이나 하는 수행’ 쯤으로 여기는 사람이 많다. 염불에 대한 연구가 아직까지도 미진한 이유가 여기에 있다.


어쩌면 ‘목숨 걸고 해야 소식이 있을 것’이라는 간화선에 비해 ‘아미타불 열 번이면 정토에 태어날 수 있다’는 염불 수행이 너무 쉬워 보이기에 폄하되고 있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정토신앙이 그렇게 간단할까?


“염불은 지관수행을 하기 어려운 사람을 위해 제시된 또 하나의 길입니다. 물론 그 길 역시 해탈, 열반으로 향하는 길입니다. 중요한 것은 48대 본원을 믿는 마음, 즉 신심입니다.”


어떤 마음을 말씀하시는 것일까? 정토세계는 존재하니 무조건 믿고 염불하겠다는 마음을 뜻하는 것일까?
“신앙과 앙신의 차이를 구별할 필요가 있습니다. ‘신앙’이 단지 ‘믿는다’는 의미인데 반해, ‘앙신’은 불도를 걷기 시작할 때부터 불위에 이를 때까지 깊어져 가는 믿음을 말합니다. 원효 스님이 왜 앙신을 중히 여기셨는지 헤아려 보아야 합니다.”


원효 스님은 이렇게 말한 바 있다. “만일 어떤 사람이 부처님의 지혜에 대한 의혹을 해결하지 못하면 비록 저 국토에 태어난다 하더라도 변두리 땅(邊地)에 있게 된다. 만일 어떤 사람이 비록 앞에서 말한 것과 같은 지혜의 경계를 분명하게 알지 못했다 하더라도 능히 스스로 겸손하고, 마음의 눈이 열리지 않았지만 부처님(여래)을 우러러 생각하며 한결같이 엎드려 믿으면(앙유여래 일향복신·仰惟如來 一向伏信), 이와 같은 사람은 그 행과 품계에 따라 저 국토에 왕생하고 변지에 머물지 않는다.”


“부처님이 갖고 계신 지혜의 작용 깊이나 위대함을 우리 범부가 올곧게 말한다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오직 부처님만이 알 수 있지요. 신란 스님이 말씀하셨던 것처럼 우리는 부처님께 몸을 맡겨(탁신·托身) 한 발, 한 발 나갈 뿐입니다. 정토신앙은 여기서 출발합니다.”


부처님의 지혜 작용에 대한 의심을 버리라는 얘기다. 내가 비록 아는 것이 생겼더라도, 내가 이전보다 수행을 통해 변화된 것이 있다 하더라도, 부처님 말씀을 되새기며 자신을 반조해 가는 삶을 영위하라는 뜻도 함께 함축돼 있다.


“자신의 미혹함을 알아가는 것은 참으로 중요합니다. 수행과정뿐 아니라, 인생을 살아가는데도 큰 작용을 합니다. 자신의 미혹함을 아는 순간 겸손해지거든요. 오만은 겸손하지 못한데서 비롯되는 게 아니라, 자신의 미혹함이 어느 정도인지 모르는 데서 비롯되는 겁니다.”


원효 스님의 ‘대승육정참회’를 보면 자신의 미숙함과 어리석음에 대한 참회가 곧 ‘앙신’의 첫 걸음임을 알 수 있다. 원효 스님과 신란 스님을 존경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었다.


원효 스님은 “왕생(往生)의 정인(正因)은 발보리심이요, 조인(助因)은 염불”이라 했다. 본원에 대한 확고한 믿음을 설파한 일언이라 할 수 있다. 신란은 아미타여래의 본원력을 바탕으로 정토 교학을 구축했으니 일맥이 통할 수 있다.


신란 스님은 ‘자신의 구원(해탈)은 전적으로 아미타여래에 의해 이미 완성되어 있다’고 했다. ‘원효와 신란과의 신관(信觀)비교’ 논문을 쓴 후지 요시나리 교수에 따르면 ‘신란에 있어서 정토왕생은 신심을 인(因)으로 이루어지는 것이고, 신심은 자기의 마음이 아니라 아미타여래의 평등한 마음’이라고 한다. 즉, ‘아미타여래의 마음이 자신에게 주어져 그것이 신심이 된다’는 것이다. 이러한 신심이 주어질 때 우리는 자신의 미숙함과 어리석음을 알아차려 내 자신이 자기중심적 사고방식에서 어떻게 매여 왔는가를 알 수 있다는 게 신란 정토사상의 요지다. 신심을 얻는다고 하는 것은 부처님으로부터 마음을 받는 것에 다름 아닌 것이다.


원효 스님의 ‘앙신’과 신란 스님의 ‘탁신’이 같은 맥락인지 아닌지는 깊은 연구가 필요할 것이다. 그러나 효란 스님은 적어도 원효 스님의 정토사상을 신란 스님이 계승하고 있다고 보고 있다. 앙신과 탁신 개념에서 출발한다면 18대원에 이어지는 19대원도 의심할 여지가 없다.


“만약 제가 부처가 될 적에, 시방세계의 사람들이 보리심을 일으켜 모든 공덕을 쌓고 지성으로 정토에 태어나고자 원을 세웠는데, 그들이 임종시에 제가 여러 대중들과 마중할 수 없다면 저는 차라리 부처가 되지 않겠습니다.”
그 누가 임종을 맞더라도 정토왕생 발원을 했다면 아미타부처님이 마중한다는 얘기다. 이에 대해 효란 스님은 이렇게 말한다.


“사람들은 자신이 염불해서 극락에 간다고 하지만 조금만 돌이켜 보면 내가 가는 게 아닙니다. 아미타부처님이 마중 나오셔서 데려가 주시는 거지요.”


본원에 대한 믿음을 또 한 번 강조하고 있음이라. 그렇다 해도 의구심이 남는다. 염불행자는 일상에서 오직 염불만 하면 되는 것인가? 효란 스님은 단호하게 일갈했다.


“아닙니다. 그건 오해요, 착각입니다. 팔정도 육바라밀을 실천해야 합니다. 본원력을 믿지 않고, 육바라밀도 실천에 옮기려 하지 않으며 입으로만 명호를 외는 것은 모두 허사입니다.”


평생을 염불수행에 매진하며 정토신앙 전파에 진력한 스님은 이생을 어떻게 살고 있을까? “감득하고 있습니다.” 무엇을 느끼고 있다는 것일까? “지금 이 순간도 극락으로 인도되고 있다는 것을 생생하게 느끼고 있습니다.”
극락은 사후에 가는 것 아닌가! “아닙니다. 사후가 아니라 지금부터 가는 겁니다.” 여기서 꽉 막혔다. 소참법문을 청했다.


“평소 우리는 자신을 어떻게 생각하며 살고 있을까요? 현재 살아가고 있는 이 자체가 전부라고 생각하기 십상입니다. 하지만, 생명은 내가 인식하고 있는 것보다 훨씬 더 깊고 넓은 세계와 연결되어 있습니다. 나와 네가 둘이 아니고, 나와 우주가 둘이 아니라는 말은 다 생명근원에서 빚어진 일언입니다.”


효란 스님은 염불하는 순간 찰나에 일었던 흐트러진 마음도 이내 잡힌다고 한다. 좋고 나쁨에 그리 크게 이끌리지도 않는다고 한다. 희로애락에 휘둘리지 않는다는 뜻이리라.


“이 순간은 너무도 고귀한 찰나입니다. 그 한 찰나, 한 찰나 때마다 변하지 않는 게 하나도 없습니다. 역동적이지요. 살맛나지 않습니까? 일찍이 원효 스님께서 ‘정토와 예토가 둘이 아니다’ 말씀하셨지요? 아미타부처님 본원에 의지해 보면 그 뜻이 진정 무엇인지 체득할 수 있습니다. 생사도 손바닥과 손등일 뿐입니다.”


너무도 자비로웠다. 미소 속엔 환희심이 넘쳐났다. 세수 93세의 효란 스님이 보여주신 일면이다. 신란 스님이 전한 메시지 ‘현생정정취(現生正定聚)’를 올곧이 이해하고 있음이다. 신란 스님은 본원타력의 신심이 주어졌을 때 현생에 있어서 정정취에 도달한다고 주장했다. 정취란 ‘부처가 될 것으로 결정된 사람’이란 뜻이다. 삶의 자세, 인간으로서의 바람직한 삶의 첫 걸음이 지금 이 세상, 여기서 시작되는 것이다.


참선은 믿기 쉬우나 행하기 어렵고(이신난행·易信難行), 염불은 믿기 어려우나 행하기 쉽다(난신이행·難信易行) 했다. 믿지 않으면 시작도 못하는 게 염불수행이다. 무엇을 택할지는 개인 몫이다. 근기에 따르든, 인연에 따르든 부처님 말씀을 믿는 ‘마음’ 하나야 어찌 다르겠는가. 정진할 뿐이다.
93년 인생이 고스란히 담긴 듯했던 효란 스님의 미소가 지금도 확연하다.
 

채한기 상임 논설위원 penshoot@beopbo.com



효란 스님

1919년 충남 예산 출생. 1931년 수덕사 만공 스님을 은사로 득도, 1968년 동헌 스님을 은사로 건당했다. 조계종 반야회 회장, 군법사단 후원회장, 한일불교문화교류협의회 창립 추진위원장을 역임했다. 현재 서울 서원사, 연천 오봉사 조실로 주석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