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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강에서 달을 보다] 전등선림 선원장 동명 스님

淸潭 2012. 4. 24. 15:50

 

[천강에서 달을 보다] 전등선림 선원장 동명 스님
취하지도, 버리지도 않는 허공 같은 마음 가져라
2010.01.25 14:58 입력 발행호수 : 1033 호 / 발행일 : 2010-01-25

스승 해안 스님과 나눈
첫 법거량 후 힘 얻어

충남 예산 보덕사에서 수행중이었던 동명 스님은 샘터에서 빨래를 하고 있었다. 스승 해안 스님이 다가오더니 주장자로 바닥을 세 번 두드리고는 곧장 방으로 들어갔다. 스승으로부터 ‘은산철벽’이라는 화두를 받은 지 두 달여 쯤 지난 때였지만 가슴 깊은 곳에서부터 밀려오는 그 무언가가 있었다.

동명 스님은 1964년 해안 스님을 은사로 출가했지만 사실은 그 이전에 전남 완주 일출암에서 행자시절을 보낸 바 있다. 10대 초반의 그는 친구 따라 절에 갔다가 출가 원력을 세우고는 사문의 길로 들어섰다. 동진출가한 스님이었기에 대중들로부터 많은 사랑을 받았다. 댓잎 하나만 떨어져도 누군가 금방 나서 댓잎을 달아주고, 양말에 구멍이라도 하나 나면 금방 새로운 양말이 생겼으니 스님의 말 그대로 ‘행복한 행자 시절’이었다.

그러던 어느 날 신심행 보살이 그에게 소식 하나를 전해 주었다. 전주에 큰 스님이 오시는데 그 스님을 만나 공부하면 ‘큰 스님’이 될 것이라는 귀띔이었다. 동명 스님은 가사를 챙겨 길을 떠났고, 신심행 보살은 어린 스님이 당도할 것이라는 소식을 전주에 전했다. 전주의 한 보살 집에 도착했지만 큰 스님은 하루 전 날 보덕사로 떠난 뒤였다. 대신 큰 스님은 200환을 남겨 두었다. 여비를 남겨 둔 뜻을 알아 챈 스님은 그 길로 다시 보덕사로 향했다.

보덕사에서 뵌 ‘큰 스님’ 해안 스님은 한 마리의 학과 같았다. 우아하면서도 범접하기 어려운 위엄도 있었다. 해안 스님은 동명 스님을 보자마자 108배부터 시켰다. 다음 날엔 1000배를, 그 다음엔 1만배, 그 다음엔 10만배…. 제자의 근기를 이미 간파해서였을까? 어느 날 해안 스님은 동명 스님에게 참선하는 법을 일러주고는 이내 ‘은산철벽’이라는 화두를 내렸다.

화두 든 지 두달여 쯤 그러니까, 하안거가 거의 끝나갈 즈음 해안 스님은 샘터에서 빨래하고 있는 제자에게 다가가 주장자로 바닥을 세 번 두드린 것이다. 무작정 스님을 따라 방으로 들어갔다. 해안 스님이 주장자를 들어 보이며 물었다.

“이것이 무엇이냐?”
“마음입니다.”
“누구의 마음이더냐?”
“동명의 마음입니다.”

스승은 아무런 말이 없었다. 잘 했다는 말도, 아직 갈 길이 멀다는 말도, 방망이도 맞지 않았으며 할도 없었다. 동명 스님이 이 법거량을 정확히 기억하고 있는 것은 비단 스승과 처음 나눈 선문답 때문만은 아니다. ‘동명의 마음’이라 한 그 대답을 지금도 화두처럼 들고 있기 때문이다.

보이지도 않는 ‘마음’ 한 자락을 보려 서울 성북동 전등사 전등선림을 찾았다.
“십현담 첫 번째 ‘심인’에 이미 나와 있지요? 심인(心印)은 어떠한 얼굴이냐 묻고는 누가 주고받는 게 아니라고 합니다.”
마음의 현묘한 이치를 열 가지 대목으로 나눠 설명한 십현담은 중국의 동안상찰 선사가 쓴 선화(禪話)다. 십현담 중 ‘심인’ 전문은 이렇다.

그대에게 묻노라, 심인은 어떠한 얼굴이더냐 (問君心印作何顔)
심인을 그 누가 감히 주고받으랴.
(心印何人敢授傳)
역겁토록 한결같아 다른 빛 없으니
(歷劫坦然無異色)
심인이라 부르면 벌써 헛말이로다.
(呼爲心印早虛言)
심인의 체는 허공 같은 성품임을 알지니
(須知本自虛空性)
붉은 화롯불 속의 연꽃에나 비유할까.
(將喩紅爐火裏蓮)
무심을 두고 도라 하지 마라.
(莫謂無心云是道)
무심이라 해도 한 관문이 막혀 있도다.
(無心猶隔一重關)

무심도 집착하면 큰 병
머문 바 없는 마음내야

“달마 대사도 이미 말했지요. ‘마음이여! 찾기 어렵구나. 펼치면 법계를 싸고 오므리면 바늘도 용납하지 않는다.’ 방 거사도 ‘백 섬이나 되는 아주까리를 거꾸로 나무 위에 올리는 것과 같이 어렵다’ 했습니다. 스승 해안 스님은 마음에도 거짓 마음과 참 마음 두 가지가 있다 했습니다. 거짓 마음은 보고 듣는 경계로 인해 일어나는 마음이고, 참마음은 선과 악을 초월하고 보고 듣는 경계를 떠나서 홀로 있는 마음입니다. 거짓 마음은 알기 쉽지만 한결 같이 동하지 않는, 변함없는 참마음은 알기 어렵다 하셨습니다.”
어렵다 해서 주저앉아 있을 수만은 없는 일 아닌가. 모양도 색도 없는 ‘마음’을 알기 위해서는 어떤 방편을 써야 하는 것일까?

“‘나’를 알아야 합니다. 나를 알아야 자기 본성을 볼 수 있습니다. 항상 밝게 빛나고 있는 그 본성을 본 순간 마음 자락도 분명하게 알 수 있습니다.”
동명 스님은 ‘아무것도 취하지 않고, 아무 것도 버리지 않는 허공 같은 마음’을 가져보라고 권한다. 그렇다면 ‘무심’하면 되는 것일까? ‘무심하면 도에 가깝다’는 선인의 일언도 있고 방 거사 역시 ‘만물에 무심하기만 하다면 만물이 에워싼들 무엇이 방해롭겠는가’하지 않았던가.
“그것도 좋은 방편입니다. 공부하는 사람이라면 무심을 향해 가야 하지요. 어지러운 망념부터 가라앉혀야 하니 말입니다. 하지만 무심에 집착하다 보면 공(空)에 떨어져 생각을 끊으려고만 하는 병통에 걸릴 수 있습니다. ‘무심에 걸려도 유심에 못지않은 병임을 알아야 한다’는 일언에 귀를 기울여야 합니다.”

십현담 심인의 끝 구절 ‘무심이라 해도 한 관문이 막혀 있다’는 뜻을 조금은 알 것만 같았다. 동명 스님은 ‘머무는 바 없이 마음을 내라’는 금강경의 한 구절을 다시 한 번 새겨 보라고 한다. 바로 그러한 마음이 유무에도 걸리지 않는 마음이기 때문이다.
“이 법은 유심으로도 얻을 수 없고 무심으로도 찾을 수 없다 했습니다. 금강경에 나오는 그 마음을 갖는다면 자유자재 할 것입니다.”

수행 해 얻은 살림살이
당당히 내놓고 법 펼쳐야

재가불자들의 수행공간인 전등선림 전경.

동명 스님은 ‘참마음’을 안 순간 인성이 180도로 완전히 달라진다고 강조한다. 세상을 보는 눈이 깊어져 나무 한 그루, 꽃 한 송이도 소중하게 다가오며, 무엇보다 언행이 달라진다고 강조했다.

동명 스님은 수행을 통해 얻은 살림살이가 있다면 세상에 나와 펼쳐 보여야 한다는 지론을 갖고 있다.
“부처님이 존귀한 이유는 깨달았기 때문만이 아니라, 중생의 세계로 들어오셔서 법을 펼치셨기 때문입니다. ‘털을 쓰고 뿔을 이고 저자에 들어오니 우담바라꽃이 불 속에서 피는 구나.’(披毛戴角入廛來 優?羅華火裏開)라 하지요? 털을 쓰고 뿔을 이었다는 것은 ‘소’를 가리키고, 전(廛)은 저잣거리를 말합니다. 한 곳에만 머무르지 않고 중생 속에서의 행함을 말하는 겁니다.”

묘각의 경지는 아니더라도 수행해서 얻은 만큼의 법이라도 세상에 나와 펴야 한다는 뜻이다. 그래야 우리는 선지식을 만날 수 있는 것이고 법의 오묘함을 조금이라도 더 터득해 갈 수 있는 게 아닌가. 동명 스님이 전등선림에서 재가불자들에게 법을 전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었던 것이다.
문득, 동명 스님은 현재 걸림없이 자재하실까? 하는 의문이 생겼다. 그래서 여쭈어 보았다. 진정 흔들림 없는 삶을 영위하고 있는지 말이다.

“추운 것을 견뎌 봐야 추위에 강합니다. 저는 아직 칼바람 속에 더 서 있어야 합니다. 다만, 스님으로서 올곧이 살겠다는 신념 하나만은 굳건히 세웠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동명 스님은 ‘자다가 만져 보아도 중’이라는 소리가 제일 듣기 좋다고 한다. ‘평생 중노릇만 하고 살아라’는 악담도 좋다고 한다. 스님은 산 속에 묵묵히 서 있는 고목이나 마을 어귀에 서 있는 느티나무 같은 사람이 되려 한단다.

숲 속의 고목처럼 묵묵히
하심-정진하며 대중지도

“절을 짓는 도편수는 물론 나무꾼 눈에도 들지 않은 나무가 고목이 되지요. 볼품없는 나무지만 숲에는 고목이 있어야 또 숲답습니다. 대매법상 스님은 ‘고목은 찬 숲에 기대 몇 번의 봄을 만나도 변치 않는 모습을 보여준다’ 했습니다. (催殘枯木倚寒林 幾度逢春不變心)”

평생을 스님으로서, 수행자로서 살아가겠다는 뜻이다. 최잔고목(催殘枯木)은 가지는 꺾어지고 잎이 다 말라 겨우 서있는 오래된 나무다. 차가운 숲에 의지해 살아가는 고목이지만 오랜 세월동안 만물이 생성하는 봄을 맞이하면서도 변치 않는 나무가 바로 고목이다. 이러한 고목에 ‘동명의 마음’이 스며 있는 것은 아닐까! 해안 스님이 말씀하셨다는 ‘참마음’ 말이다.

‘마음’은 보지 못했지만 ‘동명의 마음’은 엿볼 수 있었다. 무아를 체득한 후 허공 같은 마음을 가진 스님. 누구라도 ‘동명의 고목’ 아래서 쉬어봄직 하다. 그 나무 아래서 낮잠을 한 숨 자도 좋고, 시 한 편을 써도 좋고, 그림 한 점을 그려도 좋겠다. 고목 가지에서 불어오는 바람 한 점이 우리를 청량케 하기 때문이다.
스승 해안 스님이 동명 스님에게 내린 전법게가 다시금 떠올려진다.

조사가 서쪽에서 온 뜻이여(祖師西來意)
동쪽 벽이 서쪽 벽을 침이로다.(東壁打西壁)
불법은 본래 뜻이 없으니(佛法本無意)
물은 푸르고 산은 스스로 밝다.(水碧山自明)

전등선림이 푸르니 그 곳에 잠시 머무른 사람의 마음도 맑아지는 듯하다.
채한기 상임 논설위원 penshoot@beopbo.com


동명 스님은

1964년 해안 스님을 은사로 출가. 1975년 해인사 승가대학을, 1987년 동국대 불교대학원을 졸업했다. 부안 내소사 주지와 조계종 종회의원, 개운사 주지 등을 역임했다. 현재 전등사 주지이며 시민선원인 ‘전등선림’을 개설해 재가불자들의 정진을 지도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