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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강에서 달을 보다] 연대선원 자민 스님

淸潭 2012. 4. 24. 15:45

 

[천강에서 달을 보다] 연대선원 자민 스님
“원석서 금 캐지만 금은 원석으로 돌아가지 않아”
2009.12.01 16:27 입력 발행호수 : 1025 호 / 발행일 : 2009-12-01

동산 스님을 친견한다는 친구를 따라 범어사에 갔던 14세의 소녀는 팔상전을 장엄한 탱화와 벽화에 흠뻑 빠졌다. 그 전에 느낄 수 없었던 희열이었다. 그는 그 길로 범어사 대성암에서 혜진 스님을 은사로 출가했다. 탱화 한 점에 일대사를 단숨에 결정한 것을 보면 자민 스님은 어려서부터 용단을 내리는 데는 일가견이 있었던 듯싶다.

14세에 범어사 탱화 보고 출가
한영-성능 스님 대 강맥 이어

한국전쟁에 이어 ‘조계ㆍ태고 분규’로 어수선한 불교 안팎의 분위기 속에서도 자민 스님은 논산 정덕사, 순천 선암사, 동화사, 운문사 등을 찾아다니며 부처님 법을 공부해 갔다. 1970년 음력 12월 11일, 스승인 성능 스님은 개심사 강원 대중들이 모인 가운데 생신상을 받으며 자민 스님에게 ‘보월’이라는 당호와 전강게를 내렸다. 한영 스님의 강맥을 이은 성능 스님은 ‘장엄염불’의 한 구절인 ‘부처의 법을 전하여 중생제도 하지 않는다면, 그는 필경 부처님의 은혜를 갚은 자라 할 수 없다(若不傳法度衆生 畢竟無能報恩者)’라는 경구와 함께 자민 스님에게 강맥을 전한 것이다.

그런데 개심사 등의 제방 강단에서 교학을 펼쳤던 스님은 1982년 경기도 고양의 흥국사 강원을 끝으로 강단에서 내려왔다. ‘대중포교’라는 새로운 원력에 따라 또 다른 길을 택한 것이지만 그 사연이 몹시 궁금했다. 사실 전강게를 받은 후 수 십년 동안 강단에 서 있었다면 이미 비구 못지않은 대 강백으로 우뚝 서 있었을 스님이다.

일단 강단에 서면 교재엔 거의 눈도 돌리지 않고 자신의 강의를 이어갈 정도로 총명했던 자민 스님이었다. 그 이유인 즉 교재를 보면서 강의하면 남 얘기(해석)하기 바쁘지 자신만의 소리를 낼 수 없다는 게 그 이유였다. 그만큼 경전을 통해 체득한 불지가 확실했다는 얘기다. 그런데 12년 만에 끝이라니…. 경주 ‘보월선사’에서 만난 스님에게 그 사연을 여쭈어 보았다.

“당시 진경 총무원장 스님이 흥국사를 정리하려 했지요. 강원도 문을 닫아야 할 위기에 처했는데 50여 명의 학인들이 떠나질 않는 거예요. ‘우리야 다른 절에 가서 공부하면 되지만 강주 스님 홀로 두고는 못 간다’는 겁니다. 그래, 내가 먼저 자리에서 일어서야 하겠구나 하고 나왔지요.”

흥국사를 떠난 자민 스님은 그 즉시 인도로 발길을 돌렸다. 하지만 강단을 떠나기로 결심한 이유가 이것만은 아니었을 것이다. 탄허 스님이 영은사 3년 결사를 할 당시 자민 스님도 함께 했다. 탄허 문하에서 수학한 자민 스님은 공부를 하는데 하루 밥 세끼 먹는 것도 아까우니 두 끼로 줄이자고 제안했을 만큼 공부에 대한 열의가 대단했다. 그런 자민 스님이 3년을 다 채우지 않고 영은사를 떠났다.

“서울이 분규로 인해 시끄러웠어요. 부처님 가르침을 공부하는 ‘나’이지만 종단이 있어야 나도 있는 거라 생각했지요.”

탄허 스님 영은사 결사 동참
하루 두 번만 공양하며 공부

흥망성쇠의 갈림에 서 있는 종단을 공부한다는 이유로 외면할 수 없었던 것이다. 이토록 강단있는 스님이 종단의 잘못된 행정 하나에 강단을 떠났다는 건 쉽게 납득하기 어려운 대목이다. 어쩌면 당시 스님은 종단의 행정과 강원 역할에 대한 깊은 회의가 밀려왔었을 지도 모른다.

“부다가야에 도착했는데 한 생각이 스쳐 갔어요. 성도지 부다가야에서 다섯 비구에게 가르침을 전한 최초 설법지 녹야원까지 걸어갔을 부처님을 생각해 보세요. 눈물이 나더군요.”

부처님 은혜 갚는 길이 강단에 서는 일만은 아니지 않겠는가라는 생각에 이르자 또 한 번의 대 결단을 내렸다. 이후 스님은 조계종 비구니회관 건립의 기반을 닦는 것과 함께 포교에 적극 나서며 불법을 펼쳐갔다. 젊은 사람들에게는 팔정도와 사성제를, 중ㆍ노년층에게는 인과법을 중심으로 설하는 법문에 사람들은 지금도 자민 스님에게 그대로 매료되고 만다. 스님은 ‘법문 듣겠다는 단 한 사람’만이라도 있다면 법을 펴겠다고 강조한다. 조치원에서의 일 때문이다.

“딱 한 번 약속한 법문을 하지 않은 적이 있어요. 그런데 다음 법회 때 제천에 사는 보살이 찾아와 말씀하시더군요. ‘저는 스님 법문 듣기 위해 제천에서 버스를 두 번씩이나 갈아타며 조치원에 옵니다. 스님 법문을 들어야 한 달이 편합니다.’ 그 때 ‘덜컥’하면서도 가슴이 벅차 오더군요.”

스님이 강단을 떠났던 1980년대에 비해 현 종단은 체계적인 행정에 따른 실무가 이뤄지고 있는 편이다. 강원 역시 스님이 한창 공부에 열중할 당시인 6ㆍ70년대와는 확연히 다른 여건을 갖추고 있다.

“글쎄요! 얼마나 호전되었을까요? 분명한건 여건이 좋아졌다면 그 만큼 더 열심히 정진해야 한다는 겁니다. 재가불자분들이 얼마나 열심히 공부합니까? 경전 해설서도 많이 출간돼 있고, 인터넷을 통해 경전이나 선어록도 두루두루 살펴보고 있어요. 철야정진 법회에도 사람들이 몰려듭니다. 뚜렷한 목표도 없이 그냥 밥만 축내며 허송세월 보냈다가는 스님으로서 설 자리도 없어집니다. 인천의 사표가 되려면 그에 따른 노력도 뒤따라야 합니다.”

자민 스님은 학인들에게 꼭 한 가지 당부했다. 가능하면 여러 강주를 모시고 공부해 보라는 것이다. 같은 경전이라도 강주마다 내놓는 해석과 맛이 다르다고 한다.

“경봉 스님은 비유는 약했지만 불교의 핵심을 잘 짚으셨어요. 한 문장에서 무엇이 중요한지를 정확히 뽑아내셨지요. 군더더기가 없는 겁니다. 탄허 스님은 박학다식 그 자체였지요. 동양사상에 관한한 따라올 사람이 없었거든요. 그러면서도 종지를 들어 보이셨지요. 교학에 뜻을 세웠던 계기를 마련해 주신 스님이 탄허 스님이었습니다. 관응 스님은 유식학에 밝으셨는데 멋스러우셨습니다. 강의 중에도 밖을 내다보시면서 시 한 수 척! 읊어 주셨지요. 지금처럼 늦가을이면….”

산들 바람에 나뭇잎이 소리 없이 우수수 떨어지니 (簫簫瑟瑟又齋齋)
산과 골짜기에 쌓이고 시냇물에도 떨어지는구나. (埋山埋谷或沒溪)
마치 새처럼 아래위를 훨훨 날다가는 (如鳥以飛還上下)
바람결 따라 저마다 동과 서로 흩어지네. (隨風之自各東西)
본시 잎이야 푸르렀건만 누렇게 병들어 (錄基本色黃猶病)
푸른빛 시샘하는 서리 맞고 가을비에 더욱 애처롭구나. (霜是仇緣雨更凄)
두견새야 너는 어찌 그다지도 정이 박약하여 (杜宇爾何情薄物)
지는 꽃만 슬퍼하고 낙엽에는 안 우느냐 (一生何爲落花啼)
당시 관응 스님이 들려 주셨다는 김병연의 ‘낙엽’을 음미한 스님은 잠시 말을 끊고 사념에 잠겼다.

한 경전도 여러 강주에 배워야
자신의 논지 확고해 질수 있어

“은사 성능 스님은 말 그대로 ‘스님’ 이셨습니다. 학인이 있음에도 도량정리를 손수 하신 분입니다. 개심사 앞에 개천이 흘렀는데 학인들이 건너기 쉽도록 건넘돌을 놔 놓는 분이 성능 스님입니다. 스님이 갖춰야 할 덕목이 무엇인지를 몸소 보여주신 분입니다.”
그래서일까? 71세의 나이지만 그 흔한 승용차 한 대 없다. 사소한 일 하나도 남을 시키지 않고 손수 하고야 만다. 그러고 보니 자민 스님이 가능하면 다양한 강백으로부터 공부하라는 일언을 이해할 수 있을 것 같다.

“여러 사람이 편 논리를 두루 살펴야 자신의 논지를 확실하게 세울 수 있습니다. 그래야 자신의 목소리를 내고 응용할 수 있습니다.”
스님은 한 때 『대애도비구니경』을 처음으로 번역해 세상에 내 놓은 바 있다. 이 경은 스님 외에는 볼 수 없었으며, 비구니 스님들 사이에서도 ‘쉬쉬’하고 있던, 굳이 비유하자면 ‘금서(禁書)’와도 같은 것이었다. ‘비구계를 받은 지 보름 이상만 되더라도 비구니는 당연히 모시고 예배하여야 한다’는 팔경법을 중심으로 비구니가 삼가야 할 84가지의 태도도 이 경 안에 포함돼 있다. 각오는 했지만 비난의 화살은 생각보다 빗발쳤다. 그러나 자민 스님은 물러나지 않고 한마디했다.

“문자에 집착하지 말라. 부처님이 말씀하신 뜻을 헤아려라!”
성우 스님의 권유로 내놓게 된 이 경은 현재 비구니 스님들의 교재로 쓰이고 있다.
화통하면서도 주저 없는 결단을 내렸던 자민 스님도 출가 후 10여 년이 지나자 회의가 밀려왔었다고 술회했다. 무수한 부처님 말씀을 새겨 왔지만 이것을 하나로 꿰뚫는 그 무엇 하나가 손에 잡히지 않았기 때문이다.

“『원각경』을 펼친 순간 가슴이 탁 트였습니다. 그 때 새로운 힘을 얻었지요.”
자민 스님의 눈길을 머물게 한 대목은 『원각경』의 ‘금강장보살장’ 첫 부분이다.
‘세존이시여, 만약 모든 중생이 본래성불해 있는 것이라면 무엇 때문에 다시 일체의 무명이 있게 되고, 만약 모든 무명이 중생에게 본래 있는 것이라면 무슨 인연으로 여래께서는 다시 중생이 본래 성불해 있다고 말씀하시며, 시방의 중생이 본래 불도를 이루고 있음에도 후에 무명을 일으킨다면 일체 여래께서는 어느 때 다시 일체 번뇌를 일으키는 것입니까?’

‘원각경’ 보고 새 힘 얻어 정진
매일 佛恩 얼마나 갚았나 자문

중생인데 왜 본래성불이라 했으며, 본래성불인데 왜 다시 번뇌를 일으키냐는 궁극의 물음이다.
“부처님이 금을 비유로 말씀한 부분에 이르러 무릎을 탁 쳤지요. 원석에는 이미 금이 있지만 캐서 단련해야 금이 됩니다. 이 과정을 수행이라 할 수 있지요. 그러나 한 번 금(원각)이 되면 결코 원석으로 돌아가지 않습니다.”

여래가 어느 때 다시 일체 번뇌를 일으키는지 궁금해 할 것이 아니라, 당장 원석을 캐서 금을 뽑아내야 한다는 것이다. 함허 득통은 이를 놓고 이렇게 갈파한 바 있다.
“단지 자기의 마음을 비우고 관조하면 각(覺)이 현전할 뿐인데, 무명이 일어나거나 일어나지 않을 것을 헤아리고, 부처되거나 되지 않을 것을 짐작하여 스스로 정관(正觀)을 장애하겠는가?”

자민 스님은 불자들에게 ‘열반경 사의법’ 중 ‘진리에 의지하고 사람에 의지 하지 말라’와 ‘지혜에 의지하고 지식에 의지하지 말라’는 말씀을 전하며 당부했다.
“간혹 스님 싫다고 절을 떠나는 사람 있습니다. 심지어는 개종까지 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이는 금이 든 바랑을 버리고 돌 든 바랑을 지고 가는 것과 같습니다. 강의 듣고 경전 해설서 보는 것도 좋습니다. 그러나 최소한 지식이 지혜로 전환되기 전까지 알음알이를 내세워서는 곤란합니다.”

자리에 일어서기 전 마지막 질문 하나를 여쭈어 보았다. 소녀 때 출가해 칠순을 넘긴 지금 후회는 없는지 말이다.
“원효 대사가 뭘 몰라서 이 길 가셨겠습니까? 전 일말의 후회도 없습니다. 부처님 은혜 얼마나 갚았는지 자문해 볼 뿐이지요!”

스님은 자신이 보고 있던 『원각경』을 건네주었다. 돌아와 처음으로 이 경전을 펼쳐보고 있는데 스님의 일언이 귓가에 맴돈다.
“윤회 문제도 그 경을 통해 풀릴 수 있을 겁니다.” 

채한기 상임 논설위원 penshoot@beopbo.com


자민 스님은
1939년 10월 부산 출생. 범어사에서 동산 스님을 계사로 1954년 사미니계를, 1962년 비구니계를 수지했다. 조계종 제7, 8, 9대 중앙종회의원을 역임했으며 현재 전국비구니회 부회장이다. 천안 연대선원에 주석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