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千江에서 달을 보다] 영주암 회주 정관 스님
- 나태에 빠진 순간이 죽음이요 지옥임을 알아야
- 2010.02.08 18:25 입력 발행호수 : 1035 호 / 발행일 : 2010-02-08
관음정진 중 ‘이뭣고’ 의심
마당 쓸면서도 자신 반조
동산 대종사를 은사로 출가한 정관(正觀) 스님의 법명은 당초, ‘경환(慶煥)’이었다. 이 법명은 동산 스님이 지어주셨는데 ‘경주에서 온 사람, 경주에서 돌아 온 사람’이란 뜻이 담겨 있었다고 한다.
‘경환’이라는 법명을 받은 스님은 얼마 후 동산 스님을 찾아가 법명을 바꿔달라고 청했다. 그 이유인 즉 ‘경환’이라는 법명을 아무리 새겨 보려 해도 가슴에 와 닿지 않더라는 것이다. 동산 스님은 “그럼 뭐라고 하고 싶은데?”라고 물었고 스님은 그 자리서 ‘정관’이라 하고 싶다는 뜻을 전했다. 동산 스님은 “벌써 바로 보겠다는 것이냐?”며 의아해 하면서도 허락했다.
그 뒤에 동산 스님은 제자 정관 스님을 자주 놀리곤 했다고 한다. 동산 스님은 대중 스님과 함께 있는 자리에서 “정관은 벌써 세상을 바로 보고 있답니다!”, “정관은 벌써 부처님 법을 제대로 보고 있다네요!”하면서 말이다. 아마도 자신(정관)이 지은 법명인 만큼 어서 정진해 혜안을 밝히라는 무언의 재촉이었을 것이다.
부산 지역의 어린이·청소년 포교의 한 획을 그은 정관 스님은 범어사 주지는 물론이고 조계종 중앙종회 의원, 금정학원 이사장, 사회복지법인 불국토 이사장 등 흔히 말하는 ‘사판’의 길을 걸어왔다. 그러나 정관 스님은 범어사에서 14안거를 성만하며 선 수행에 매진한 바 있고 지금도 대웅전 앞마당을 쓸며 ‘이 뭣고’를 놓지 않고 있다.
정관 스님은 자신의 저서를 통해 지(知)는 종교적 근원이지만 지(智)는 철학적 비판”이라 했다. 또한 “알 지(知)는 나도 모르고 너도 모른다”고 했다. 그러면서 “역대 제불이 다 모른다 했다. 모른다 해도 삼십방, 안다고 단정해도 삼십방이니 모르는 것도 아니고 아는 것도 아닌 미묘법을 세세생생 신행하고 참구해야 한다. 출가 사문은 지(知)와 지(智) 양족자가 되어야한다”고 했다. 여기에 묘미가 있다. 역대 제불도 모른다 한 ‘이것’을 수행인은 참구해야 한다니 분명 이에 담긴 깊은 뜻이 있을 것이다.
오늘은 스님이 말한 지(知)와 지(智)의 상관관계를 여쭈어 볼 참이다. 이를 알아야 정관 스님이 전하는 법을 조금이나마 엿볼 수 있기 때문이다.
고인 물은 언젠가 오염될 뿐
정진고삐 평생 놓지 말아야
![]() |
| 정관 스님은 새벽 세 시면 어김없이 일어나 참선을 하고 마당을 쓴다. |
정관 스님이 주석하고 있는 요사채로 향했다. 낯선 현판이 눈에 들어왔다. 본래지당(本來知堂)! 당호로써는 파격적인 이름이다. 어떻게 해석해야할까? 본래는 무엇을 두고 한 말인지, 알 지(知)에 담긴 ‘안다’의 뜻은 무엇인지 종잡을 길이 없다. 다만, 정관 스님이 내 보인 책 『화두는 나의 전 재산이다』에 나온 한 편의 글에서 유추해 볼 수는 있었다. 불교 염습 과정 중 발을 씻는 ‘세족(洗足)’ 중에 송하는 법문 일부분이다.
날 때에도 적절히 생을 따르지 않으며(生時的的不隨生) / 죽을 때도 당당히 죽음을 따르지 않도다(死去當當不隨死). / 나고 죽고 오고 가는데 아무런 간섭이 없고(生死去來無干涉) / 바르고 참된 바탕 당당하게 눈앞에 분명하도다(正體當當在目前).
이 부분을 정관 스님은 이렇게 해석해 두었다.
밝고 밝게 태어난다 해도 태어남에 따르지 않고 / 죽어 가고 죽어 간다 해도 죽어감에 따르지 않고 / 가고 오는 생사 앞에서도 자유자재할 것이니 / 본래지 위신력은 항상 눈앞에 밝고 밝다.
정체(正體)를 본래지(本來知)로 해석한 것이다. 혹여, 본래지란 ‘불성’, ‘본성’ 등의 뜻을 갖고 있는 것은 아닐까? 우선 ‘본래지당’이란 이름 한 연유부터 여쭈어 보았다.
“본래지당이란 하늘 땅 이전부터 있는 집입니다. 본래부터 스스로 아는 집이지요. 그러니 집은 집이되 형체가 없는 집이요, 지붕 없는 집이니 ‘탁 트인 집’이라 하겠습니다.”
신심명의 한 구절을 인용해 비유해 본다면 ‘대도무문(大道無門)의 집’이라 할 수 있을 듯싶다. 그렇다 해도 ‘본래지’의 의미는 잡힐듯 하면서도 쉽게 잡히지 않는다. ‘두 지의 관계’부터 살펴 볼 일이다. 일단 선가에서 지(知)는 ‘알음알이’, 지(智)는 ‘지혜’를 말한다. 알음알이는 계합 이전의 단계이고, 지혜는 어느 정도의 수행이 증득된 이후 발현되는 것으로 설명된다. ‘알음알이에 떨어지면 더 이상 진전하기 어렵다’는 말이나, ‘알음알이 갖고 아는 체 하다보면 착각 도인이 된다’는 등의 말은 ‘알음알이’를 경계하는 말들이다.
“여기서 말하는 지(知)는 ‘알음알이’나 ‘단순한 지식’ 등을 뜻하지 않습니다. 지(知)란 인식 이전, 연기 이전의 상주광명(常住光明)이요, 상주안식(常住安息)입니다. 그러나 지(智)는 본래부터가 아니고 어느 때부터 즉 후천적입니다. 따라서 어제 지혜 다르고 오늘 지혜 다르며, 나의 지혜 다르고, 타인의 지혜 또한 다릅니다.”
수마부터 물리쳐야 화두 성성
무아 체득하면 ‘본래 나’ 찾아
깊은 교학 섭렵 후에 발현된 것이든, 깊은 선정 속에 나온 것이든 지혜’는 후천적이라는 것이다. 어느 정도 납득할 수 있다. 다양한 수행과 교학을 통해 얻은 지혜는 다양하게 발현될 것이다. 그렇게 발현된 지혜는 말로, 글로도 정리가 가능하니 그를 통한 철학적 사유도, 비판도 가능할 것이다. 그렇다 해도 본래의 지(知), 인식 이전의 지(知)는 아직도 손에 잡히지 않는다. 아직도 갈피를 잡지 못하고 있음을 눈치 챈 정관 스님은 마음에 내포되어 있는 ‘본래지’와 ‘습성지’(習性知) 방편을 들어 설명해 갔다.
“본래지는 천연 그대로의 마음입니다. 그러나 습성지의 마음은 세세생생 쌓여온 업에 의해 만들어진 마음입니다. 탐진치 삼독이 가득한 마음, 바로 그런 마음이 습성지의 마음이지요. 그러나 본래지의 마음은 천지가 생기기 이전에 있었던 마음입니다. 순진무구의 마음입니다.”
천지가 생기기 이전의 마음, 인식 이전의 마음이란 아마도 분별 이전의 마음을 말하는 듯싶다. 있고 없음의 중간이 아닌, 있고 없음이라는 구별조차 떨어져 나간 그 자리를 말하고 있는 것이다. 다만, 그런 마음은 닦아 가야만 성취될 것이라는 개념을 뒤집어 본래부터 있던 것이니 지금 그 것을 찾아보라는 뜻이다.
“무아(無我)를 체득한다면 본래지 또한 이해할 수 있지요. 무아라 해서 내가 없는 게 아닙니다. 무아이지만 상대의 연(緣)이 닿으면 즉각 반응합니다. 무아는 허공과 같습니다. 허공에 구름이 수없이 일어나 가고 온다 해도 허공은 원래 그대로입니다. 오고 가는 것은 구름일 뿐이지요.”
허공이 본래지라면 구름은 습성지일 뿐이다. 정관 스님의 본래지 속에는 무아, 공(空), 참 나, 주인공, 불성 등의 개념이 포함되어 있음을 직감할 수 있었다. 그러고 보니 알 지(知)와 지혜 지(智)의 의미가 새롭게 다가온다. 스님이 말하는 알 지(知)는 ‘앎의 지’가 아닌 ‘본래의 지’ 즉, 무아와 공, 불성의 의미가 녹아 있는 ‘알 지(知)’인 것이다. 정관 스님이 ‘앎의 지’가 아닌 그냥 알 지(知)라 표현한 것도 ‘앎의 지’라 한 순간 ‘단순한 지식’이나 교리 즉 ‘아는 것’에 빠지는 것을 경계했기 때문이다.
본래 知-지혜 智 겸비 해야
안식얻고 자유자재 가능해
“지(知)와 지(智)가 하나가 되어야 대안식(大安息)입니다. ‘지혜 지’만 있으면 산란심을 감내하기 어렵습니다. ‘알 지’만 있으면 판단력이 부족해 불안이 엄습합니다. ‘지혜 지’만 있으면 깊은 신심이 서지 못하고, ‘알 지’만 있으면 지혜로운 신(信)이 서지 못합니다. 따라서 ‘알 지’와 ‘지혜 지’ 모두를 갖춰야만 합니다. 양족 됐을 때 안식을 얻을 수 있습니다.”
정관 스님은 화두 들기 전 ‘송화두’를 해 보라 권한다. 정관 스님이 말하는 송화두는 ‘염불’을 의미한다. 범어사 원효암에서 ‘관세음보살’ 정진할 당시의 일이다.
“일주일 단식기도를 하던 중이었지요. 관세음보살 정진을 하고 있는 데 어느 순간 ‘관세음보살을 하는 이놈은 누구인가?’라는 의문이 들었습니다. 곧바로 방장 동산 큰 스님을 찾아가 여쭈었더니 ‘그대로 밀어 붙이면 된다’ 하시더군요. 염불도 끊이지 않게 지속하다 보면 삼매에 이릅니다. 그것만으로도 밝을 수 있지요. 거기서 더 정진하다 보면 화두로 자연스럽게 넘어 갈 수 있습니다. 안 되는 화두를 억지로 붙잡기 보다는 근기에 맞는 수행부터 차근차근 밟는 게 좋습니다.”
![]() |
| 정관 스님이 주석하고 있는 영주암 본래지당. |
정관 스님은 수행인이라면 수마부터 물리쳐야 한다고 강조한다. 수마에 한 번 빠지면 뭐가 뭔지도 모르며 허송세월만 보내기 때문이다.
“수마에 걸려 있으면서도 서글프다는 생각을 하는 게 아니라 시간 잘 가는 재미에 빠지고 맙니다. 이런 사람은 나태해지기 십상인데 이 나태는 정말 무서운 겁니다. 자신이 나태해져 있으면서도 부끄러운 줄을 모릅니다. ‘내가 왜 이러고 있나?’하는 자책도 하지 못하게 되는 것이지요. 한마디로 무감각해 지는 것인데 이러면 자신을 구제할 수 없지요. 팔만사천마군 중에 제일 큰 마군은 나태입니다. 나태는 바로 죽음이요, 생지옥입니다.”
정관 스님은 새벽 세 시면 어김없이 일어나 참선을 하고 마당을 쓴다. 스승 동산 스님도 입적하기 전까지 마당을 쓴 것으로 유명하다. 아마도 나태질 수도 있는 마음을 다잡기 위한 방편일 것이다.
“솔직히 말하면 좀 창피합니다. 새벽 세 시에 일어나기는 하는데, 아직도 자연스럽지 못합니다. 의지적으로 일어날 때가 있거든요! 비라도 내리는 소리가 들리면 오늘은 그냥 지나갈까? 하는 망상이 찰나지만 일어나니 말입니다.”
새벽 세 시 기상과 참선도 배고프면 밥 먹고 졸리면 자듯이 자연스럽게 이뤄져야 하는데 ‘이것을 꼭 해야 한다’는 의지가 동반되는 경우가 있다는 뜻이다. 새벽 기상 하나에도 이토록 세심한 반조를 한다니 놀라운 일이다!
정관 스님은 무엇보다 ‘신심’을 잃지 않는데 노력해야 한다고 했다. 출가 수행자에게 ‘신심’은 ‘사문의 집’이라고 한다.
“불퇴보리심이 곧 도이고 큰스님입니다. 신(信)이 먼저이지 도(道)가 먼저일 수 없습니다. 간절한 심심만 살아 있다면 정진은 멈춰지지 않습니다. 물은 흘러야 합니다. 고인 물은 오염될 뿐이지요. 이 공부는 평생을 해야 합니다. 그래야 법이 살고 사람이 삽니다.”
‘본래지’를 체득한 스님은 이제 진정한 ‘독거유희락(獨居遊戱樂)’을 만끽하고 있다. 영주암 본래지당을 찾아가 앉아 보면 ‘본래의 나’를 찾아 볼 수 있을 것이다.
정관 스님은
1954년 동산 스님을 은사로 출가한 스님은 범어사 불교전문 강원을 수료한 후 범어사에서 14안거를 성만했다. 쌍계사와 범어사 주지, 조계종 중앙종회 의원, 대한불교어린이지도자연합회 회장, 사회복지법인 불국토 이사장 등을 역임했다. 저서로는 『선우』, 『죽음이 없는 선의 길』, 『하늘같은 자유』, 『간화선의 길』, 『오세암의 달밤』, 『화두는 나의 전 재산이다』 등이 있다. 시민선원을 개설한 스님은 현재 영주암 회주로 주석하고 있다.
채한기 상임 논설위원 penshoot@beopbo.com
'불교이야기 > 스님들 소식' 카테고리의 다른 글
| [千江에서 달을 보다] 봉암사 수좌 적명 스님 (0) | 2012.04.24 |
|---|---|
| [千江에서 달을 보다] 금산 태고사 정안 스님 (0) | 2012.04.24 |
| [천강에서 달을 보다] 전등선림 선원장 동명 스님 (0) | 2012.04.24 |
| [천강에서 달을 보다] 육지장사 회주 지원 스님 (0) | 2012.04.24 |
| [천강에서 달을 보다] 전 조계종 교육원장 청화 스님 (0) | 2012.04.24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