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천강에서달을보다] 고불총림 백양사 유나 지선 스님
- 淸淨本然 컨데 산하대지는 어떻게 생겨났는가
- 2009.08.31 14:11 입력 발행호수 : 1012 호 / 발행일 : 2009-08-31
세속에서는 지선 스님을 ‘투사’라 말한다. 민주화 운동에 앞장섰고, 독재정권에 맞서 싸웠으니 ‘투사’라 해도 틀리지 않다. 그래도 ‘스님’과 ‘투사’사이의 간극이 느껴진다. 지선 스님은 종단개혁과 사회 운동을 잠시 내려놓고 1999년 동안거 결재에 들어갔다. 스님이 안거에 들어가는 게 그리 특별한 것은 아니지만 ‘투사’라 칭해졌던 스님이 홀연히 결재에 들어갔으니 분명 사연이 있을 법하다. 더욱이 10년 동안 20안거를 성만했다.
해제 후 지선 스님은 문빈정사에 머물고 있다. 광주로 내려가는 길에 스쳐 지나가는 상념은 왠지 착잡했다. 한국 민주화의 선구자였던 김대중 전 대통령이 영면에 든 지 이틀만의 구법길이어서일 것이다. 광주 시내로 들어서자 국립 5·18 민주묘지 이정표가 눈에 들어왔다.
고 김대중 전 대통령도 5·18민주화 운동과 6월 항쟁이 있었기에 대통령 자리에 오르며 자신의 정치 철학을 펼 수 있었다. 지선 스님 역시 1980년대 민주화 운동에 앞장서 온 불교계 대표 인물이다. 1987년 6월 항쟁 당시 서울 성공회 성당에서 군사 독재정권에 대한 대 국민 항거의 신호탄 ‘여기는 민주헌법쟁취 국민운동본부입니다’라는 방송을 한 사람이 바로 지선 스님이다.
며칠 전 지선 스님은 ‘김대중 전 대통령 광주·전남추모위원회’위원장으로 추대되며 ‘민주주의와 인권, 남북화해 등의 정신은 살아있는 시민이 이어야 한다’고 역설한 바 있다. 우리가 미처 인식하지 못한 DJ의 또 다른 면모가 있지 않을까 궁금했다.
8,90년대 사회운동에 선봉
“민주화는 지금도 진행형”
“김대중 전 대통령을 말할 때 ‘투쟁’을 떠올립니다. 그러나 이는 일면만 본 겁니다. 그 분이야말로 ‘소통’을 중요시 했고, 소통으로 현대 정치를 이끌어 왔습니다.”
사실, 지선 스님과 DJ의 관계는 애증으로 점철돼 있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민주화 운동에 나선 두 인물이지만 ‘투쟁’방식은 너무도 달랐다. 6월 항쟁으로 인해 지선 스님은 국가보안법 위반 등의 혐의로 서울 서대문 형무소에 수감됐으나 6.29선언으로 곧 풀려났다. 석방과 함께 YS측으로부터 연락이 와 상도동을 찾았다.
지선 스님은 그 자리서 ‘단일화’를 역설했다. 그러자 동교동에서도 연락이 와 DJ를 만났다. 그 자리서도 ‘단일화’를 역설했다. 그런데, 이 자리서 지선 스님은 DJ에게 ‘YS 단일화’를 제안 했다고 한다.
“솔직히 누구로 단일화 하든 관계가 없었습니다. 그러나, 선거인만큼 소가 밟아도 깨지지 않는 표를 한 번쯤 감안해야 했지요. 단일화 당선만이 가능하다면 일단, YS가 먼저 대권에 도전하고 DJ는 훗날을 기약해야 한다고 본 겁니다. DJ가 미국 망명길에 올랐을 당시 YS는 많은 고초를 겪으면서도 활발한 활동을 했던 점을 감안해 YS 단일화를 제안 했습니다.”
94년 종단개혁 일궜지만
“아직 멀었다” 일침 가해
지선 스님의 사견이 전달되기는 했지만 양측 모두 ‘단일화’가 가능하다고만 할 뿐 뾰족한 대안을 내놓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지선 스님은 그래도 두 거물이 머리를 맞대고 지혜를 발휘할 것으로 믿고 전국 순회강연을 통해 ‘단일화’를 촉구 했으나 결국 무산됐다. 당시의 상심은 너무도 컸다. DJ와의 관계는 이때부터 소원해지기 시작했다.
1989년 이철규 변사 사건도 두 사람 사이의 활동 방향을 짐작케 한다. 지선 스님은 동교동을 방문해 변사 사진을 일간지에 게재 하자고 제안했다. 그러나 DJ는 일언지하에 거절했다. “그 사진을 본 국민은 또 한 번 크게 들고 일어납니다. 공안 당국 탄압의 빌미를 줄 뿐입니다.”
“5.18 이후 수많은 열사들이 죽었습니다. 그 묘지 위에 민주주의 깃발을 꽂았는데 지금 외면하려 합니까! 그리 할 거라면 정치 그만 하십시오!”
“강연을 해도 정치인이 하는 것 보다 종교인이 했을 때 파장이 더 큽니다. 법복 입은 스님이 대학생을 선동해 화염병을 들게 하려는 것입니까! 사실을 알리자는 것이지 폭력을 조장하려 하는 게 아니지 않습니까!”
![]() |
| 지선 스님은 “민주화 운동과 종단 개혁에 나선 것도 부처님 법에 따른 실천행일 뿐”이라고 강조했다. |
두 사람 사이의 관계는 점점 더 멀어져 갔고, DJ가 집권한 이후 지선 스님은 1999년 겨울 동안거에 입재했다. 안거 10년 동안 해제가 되어도 일선에 나서지 않았던 스님이지만 김대중 전 대통령의 추모행사 만은 외면할 수 없었던 것이다.
광주가 울고 있을 때 지선 스님은 제주 관음사 주지였다. 따라서 1980년 일어난 5·18 광주현장에 지선 스님은 없었다. 5·18 광주민주화 운동 직후 지선 스님은 은사 석산 스님을 돌보기 위해 문빈정사 주지로 부임했다. 그런데 산사를 향한 대중의 비난이 빗발쳤다.
“무등산을 오르는 등산객들이 손가락질을 하며 ‘독재 하수인’이라 하는 겁니다. 비난 하는 사람들을 불러 차 한 잔 건네며 이야기를 나누어 보았습니다. 그들의 비난은 저를 포함한 불교계에 향해 있었습니다. 민주화 운동에 나서지는 못할망정 정권에 빌붙어 국가기원 법회나 하느냐는 겁니다.”
일부 불교계에서 일어나는 일일 뿐 전체가 그런 게 아니라 해도 설득이 되지 않았다. ‘광주민주화 운동’에 대한 불교적 시각을 말해 보라는 사람도 있었다. 나름대로의 견해를 피력했지만 그들은 꿈쩍도 하지 않았다. 논리가 빈궁했던 것이다. 광주 금남로 ‘삼복 서점’으로 달려갔다. 그리고 사회과학 서적을 손에 잡히는 대로 구입해 독파하기 시작했다. 6개월 동안 읽은 서적만도 100여 권이 넘는다고 한다.
“중생의 고통을 달래야 하는 보살의 정신. 그러나 실천하지 않으면 경에 새겨진 문자로만 존재할 뿐이지요. 누군가는 이 시대에 걸 맞는 실천행을 해야 한다고 보았습니다. 침묵과 말만으로 헤쳐 나갈 수 없는 시대였던 겁니다. 할과 방만으로 불교의 시대적 소명을 다한다고만은 볼 수 없었지요.”
10년 20안거 성만 소감에
“다시 30년 참선” 의지 보여
이후 지선 스님은 사회 민주화 운동은 물론 1994년 조계종 종단 개혁까지 파란만장한 여정을 걸었다. 1999년 동안거 결재에 들어간 연유를 물었다.
“DJ 정부와의 거리감 때문만은 아닙니다. 총무원장 낙선 후 제 자신을 성찰해 볼 필요가 있었던 겁니다. 민주화도 어느 정도 이룬 상태에서 종단 개혁만 참신하게 일군다면 더 바랄게 없었지요. 그러나 94년 종단 개혁도 주도면밀한 준비가 없이 이뤄졌습니다. 개혁이라 하지만 엄밀한 의미에서는 개혁이라 할 수 없습니다.”
1998년의 ‘종단 사태’를 맞이했던 조계종을 다시 대 화합으로 이끌어 못다 한 개혁에 박차를 가해보겠다는 원력으로 1999년 총무원장 선거에 나섰지만 실패했다. 지선 스님은 일말의 미련도 없이 낙선 직후 선방으로 발길을 돌렸다. 주위에서는 ‘낙선 후유증’으로 쉬기 위해 들어간 것이니 곧 나올 것이라 했지만 10년의 세월이 흘렀다.
지난 여정에 대한 후회는 없다고 한다. 다만, 민주화도 종단개혁도 진행형인 점만은 시민과 불자가 인식하고 있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그래도, 해제 후 돌아본 지난 여정이 사뭇 새롭게 다가오지 않은지 궁금했다.
“민주화 운동과 종단 개혁도 부처님 법에 따라 실천했을 뿐입니다. 출세간이 따로 있는 게 아닌데 선방 입방 이전과 이후가 크게 다를 리 없지요!”
여기서 멈추려 했지만 그래도 지난 10년 수행의 소식이 궁금했다.
사회운동-참선 수행도
불법에 따른 실천행일 뿐
“10번째 해제를 맞은 소감은 어떻습니까?”
“갱참삼십년(更參三十年).”
지난 10년간 수행 했지만 다시 30년을 더 해야 한다는 뜻이다. 그래서 하나 더 여쭈어 보았다. 지난 10년의 수행에서 얻은 것은 무엇이냐고!
“청정본연(淸淨本然)컨데 산하대지는 어떻게 생겨났는가!”
투사? 아니다! 1980년대도 선객이었고, 1990년에도 선객이었으며, 2009년 오늘도 ‘지선’은 이 시대의 이와 사를 두루 겸비한 ‘선객’이다. 그리고, 그물에 걸리지 않는 바람 같은 스님이다. 일어서면서 방문을 여니 연꽃이 마당 한 편에 피어 있다. 청정하기 그지없다.
채한기 상임 논설위원 penshoot@beopbo.com
지선 스님은
1946년 전남 장흥 출생. 1961년 세납 16세의 나이로 석산 스님을 은사로 출가한 후 1967년 범어사에서 석암 스님을 계사로 구족계 수지. 1972년 서옹 스님으로부터 ‘학봉’이라는 법호를 받으며 법제자가 됐다. 제주 관음사와 전남 백양사 주지, 종회의원 등을 역임한 스님은 2004년 4월부터 고불총림 백양사 유나 소임을 맡아 제방 수좌들을 지도하고 있다.
'불교이야기 > 스님들 소식' 카테고리의 다른 글
| [천강에서 달을 보다] 황대선원 조실 성수 스님 (0) | 2012.04.24 |
|---|---|
| [천강에서 달을 보다] 도선사 주지 선묵 혜자 스님 (0) | 2012.04.24 |
| [천강에서 달을보다] 조계종 승가대학원장 지안 스님 (0) | 2012.04.24 |
| [천강에서 달을 보다] 단양 광덕사 회주 포산 혜인 스님 (0) | 2012.04.24 |
| [천강에서 달을 보다]육조사 선원장 현웅 스님 (0) | 2012.04.24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