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대석]강남 最古사찰 봉은사 주지 취임 명진 스님
봉은사 경내의 산수유나무 아래서 웃고 있는 주지 명진 스님. 봄 햇살만큼이나 따스해 주위 사람들을 편안하게 해 준다. 김재명 기자 |
“도(道) 잘 닦고 있다 주지 맡아서 똥 밟은 기분이었지. 허허허….”
봉은사로 불쑥 찾아간 기자와 대면한 뒤 던진 첫마디부터 걸쭉하다. 지난해 11월 8일 봉은사 주지로 취임한 명진(明眞·57) 스님. 첫눈에 상반된 이미지가 동시에 다가온다. 심지 굳은 선방 수좌스님과 아무것에도 구애받지 않고 천지 사방을 떠도는 자유로운 바람….
그의 주지 임명은 조계종 내에서 하나의 ‘사건’이었다. 사판(事判·주로 절을 관리하는 스님) 경력이라고는 학승들에게 이끌려 1987년 서울 개운사 주지를 1년 한 것이 전부인 선승(禪僧)이다. 성철 스님이 있던 해인사 백련암에서 출가해 해인사와 경북 문경 봉암사 선방에서만 20여 년을 보냈다. 1982년 관광객들이 휘젓던 봉암사의 산문을 폐쇄해 1940년대 봉암사 결사의 선맥(禪脈)을 다시 세우는 데 앞장섰다. 게다가 명진 스님은 1980년대 불교계를 대표하는 운동권 출신이다.
봉은사가 어떤 절인가. 신라시대의 고승 연회국사(緣會國師)가 794년 창건해 태고 보우국사, 서산대사의 숨결을 느낄 수 있는 선종수(禪宗首) 사찰이다. 지금은 한국에서 가장 비싼 아파트라는 삼성동 아이파크와 경기고, 아셈타워, 인터컨티넨탈호텔 등에 둘러싸인 강남 부촌의 복판에 서 있다. 더군다나 그는 2005년 총무원장 선거에서 현 지관 총무원장의 반대편에 섰던 인물이다. “처음에는 ‘좌파 두목’이 주지로 왔다고 말들이 많았지요.” 그러나 이날 불공을 드리는 신도들은 대부분 명진 스님의 열렬한 팬이 돼 있었다.
명진 스님 취임 후 봉은사의 변화는 확연히 감지된다. 우선 본인부터 마음을 다잡았다. ‘1000일 정진기도’에 돌입하겠다며 바깥출입을 안 하겠다고 선언했다. 14일이 100일째 되는 날이고 아직까지도 봉은사 밖을 나선 적이 없다. 하루 3번에 걸쳐 300배를 올린다. 새벽 예불에 참여하고 발우공양까지 한다. 스님이 빗자루를 들고 마당을 쓰는 등 울력도 솔선수범한다.
지난겨울, 눈이 내렸다. 스님을 비롯해 모두 나서 눈을 쓸었다. 그러자 봉은사 한 관리원이 “지금까지 스님들이 눈 쓰는 것을 본 적이 없다”고 감격해했다는 것. 200여 명 참여하던 일요 예불에 요즘은 800여 명이 참석한다.
스님의 절 운영 방식의 핵심은 하나다. 수행의 일상화다. “출가는 수행이 목적입니다. 인간 존재에 대한 끊임없는 물음입니다. 주지나 봉은사 중흥이 목적이 아니지요. 수행은 스님만의 일이 아닙니다. 개인 수행이든 전체 수행이든 수행이 전제되지 않으면 도량이 아닙니다.
스님이 ‘운동권’이 된 사연도 재밌다. 1985년 해인사에 있을 때다. ‘5·3 인천 사태’로 경찰에 쫓기는 수배자 한 사람이 산사에 숨어들었다. “날 의식화하는데 솔직히 끌리지 않았어요. 근데 ‘스님, 감옥 한번 갔다 오면 공부에 많은 도움이 돼요. 무문관(無門關·독방 문을 폐쇄하고 1년 이상 계속하는 정진) 갈 필요 없어요. 독방도 줘요’라고 하는데 꼭 ‘고향에 가보라’는 소리로 들리더라고. 그래서 ‘감옥에 가봐야지’ 생각하고 뛰어들었지.”
결국 소원을 성취했다. 그해 봉은사에서 ‘12·7 법난 규탄대회’를 열다 구속돼 수감됐다. “3년 들어갈 각오로 ‘다 내가 했다’고 했는데도 2개월밖에 못 살아 창피해.” 당시 변호를 맡은 조영래 변호사가 감옥에서 늘 싱글싱글 웃는 명진 스님을 보고 “공안사범 여러 번 봤지만 스님은 뭐가 그리도 좋으시냐”고 물은 적도 있다고 한다.
스님은 집착이 없다. 1994년 종단 개혁 작업에 뛰어들어 대중 앞에서 법복을 벗어 노스님들 앞에 바쳤다. “개혁 안 되면 산문을 떠나겠다”고…. 노스님을 비롯해 많은 사람이 눈물을 흘렸다고 한다.
봉은사 주지로서 스님에게는 꼭 해야 할 일이 있다. 공원용지로 묶여 손도 댈 수 없는 봉은사를 전통과 현대가 어우러지는 도심 속 수행처로 바꾸는 것이다. “하루에 외국인 관광객이 100여 명 방문합니다. 얼마 전 우크라이나 대통령 부인, 네덜란드 총리 부인, 인도 통계청 장관 등이 방문했는데 손님 맞을 공간도 없어 얼마나 얼굴이 화끈거리는지….” 스님의 안내를 받아 경내를 둘러보다 깜짝 놀랐다. 스님들이 머무는 요사채는 슬레이트에 판자가 덕지덕지 붙은 무허가 임시건물이다. 좌변기 하나 없는 공용화장실의 ‘쪼그려식’ 변기는 겨울인데도 역한 냄새를 뿜어낸다.
“하나도 손을 댈 수가 없어요. 공원이면 공원답게 만들어 주든지, 그렇지 않으면 풀어 주든지….”
명진 스님을 만나기 전 솔직히 ‘갓 쓰고 자전거 타는 모습’을 연상했다. 하지만 그를 만난 뒤 알 것 같다. 왜 지관 총무원장이 그를 봉은사 주지로 임명했는지. 이심전심(以心傳心)이요, 염화미소(拈華微笑)다.
윤영찬 기자 yyc11@donga.com
▼명진 스님▼
△1950년 충남 당진 출생 △1969년 해인사 백련암에서 출가 △1974년 법주사 탄성 스님을 은사로 사미계 △1975년 혜정 스님을 계사로 구족계 △1975년 송광사, 해인사, 봉암사, 상원사, 망월사, 용화사 등 40안거 수행 △1987년 불교탄압대책위원회 위원장, 개운사 주지 △1988년 대승불교승가회 회장 △1994년 조계종 종단 개혁회의 상임위원 △2000∼2002년 조계종 민족공동체추진본부 상임집행위원장 △2005년 봉은사 선원장 △2006년 봉은사 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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