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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문학회 만든 라르스 바리외 스웨덴 대사

淸潭 2010. 2. 12. 20:12

[초대석]서울문학회 만든 라르스 바리외 스웨덴 대사




외교관과 시인들의 교류를 위해 ‘서울문학회’를 만든 라르스 바리외 주한 스웨덴 대사. 김미옥 기자

크리스마스트리와 촛불로 아늑하게 장식된 서울 성북구 성북동의 스웨덴 대사관저.

12명의 주한 각국 대사가 삼삼오오 둘러앉았다. 거실의 그랜드피아노에 팔을 걸치고 선 고은 시인의 강연이 계속됐다.

“…그렇게 주막에서 만난 한국의 옛 봇짐장수들은 서로 땀에 찌든 옷을 교환해 입으면서 서로의 운명도 나누었지요. 서산대사와 양사언은 몇 달씩 걸려 서신을 주고받으면서 우정을 쌓았고요.”

고은 시인이 무슨 말을 하고 싶어 꺼낸 얘긴지 알아들었다는 뜻일까. 어떤 이는 눈을 지그시 감았고, 어떤 이는 연방 고개를 끄덕였다. 조용한 거실에서는 슬로바키아 대사가 종이를 부스럭거리며 받아 적는 소리가 간간이 들렸다.

비 오는 15일 오후 두 시간 동안 진행된 이 자리는 ‘서울문학회(Seoul Literary Society)’ 발족을 위한 첫 모임. 유럽연합(EU) 스페인 덴마크 체코 남아프리카공화국 등 10여 명의 주한 대사들과 한국인 문인들이 시도하는 한국문학 연구 및 교류의 새로운 장이다.

그 중심에 ‘시인 외교관’이기도 한 라르스 바리외 주한 스웨덴 대사가 있다. 올해 한국에 부임한 이후 쭉 모임을 추진해 온 바리외 대사는 이날 만장일치로 서울문학회 회장에 추대됐다.

19일 스웨덴 대사관에서 바리외 대사를 만났다. 정제된 외교관의 말투와 제스처로 풀어내는 자유로운 시 이야기가 묘한 대조를 이뤘다.

“스톡홀름은 오래된 벽돌건물과 도로 사이로 독특한 미감이 흐르는 도시죠. 그곳에서 옛 시인들은 레스토랑이나 바를 돌아다니면서 시를 읊었고, 유명한 시인들이 자주 앉았던 자리는 지금도 보존돼 있어요. 이런 분위기가 자연스럽게 나를 시의 세계로 이끈 것 같군요.” 그가 시에 관심을 갖게 된 이유다.

시인과 외교관의 이미지가 선뜻 잘 연결되지 않는다고 했더니 “시는 외교관으로서 ‘제정신으로’ 살게 해 주는 버팀목”이라는 대답이 돌아왔다.

“한 나라를 대표하는 대사로서 받는 부담스러운 시선과 외교적 긴장감, 업무 스트레스 같은 비정상적인 상황을 이겨내는 데 시가 도움이 돼요. (스웨덴 출신으로) 제2대 유엔 사무총장을 지낸 다그 함마르셸드가 비행기 사고로 사망한 뒤 그의 자작시들이 적힌 공책이 발견되기도 했습니다. 문학은 국가 간의 이해를 돕고 교류를 증진시키는 데도 기여를 합니다. 대사들이 부임하는 국가를 잘 이해할 수 있도록 도와주지요. 예를 들어 한국의 시를 보고 있으면 침략당한 역사의 한을 느낄 때가 있어요.”

그는 한국 시인 중에서 김지하 씨를 좋아한다고 했다. 1970년대에 일본에서 그의 시 ‘오적(五賊)’을 접하고 깊은 감명을 받아 김 시인의 시를 스웨덴어로 번역 출판하기도 했다. 이번에 스웨덴의 ‘시카다상’을 수상한 고은 시인의 작품에도 남다른 애정을 갖고 있다.

“너무 로맨틱한 시는 싫어요. 시란 삶과 죽음에 대한 다양한 접근방식을 보여 주는 것이잖아요. 인생이란 무엇인지, 사람이 대자연 앞에서 얼마나 작은 존재인지를 깨닫게 해 주죠. 스웨덴처럼 땅덩이가 크고 기후가 혹독하게 추운 곳에서는 사람의 얄팍함에 대해 많은 생각을 하게 돼요.”

그는 말을 멈추고 자작시(自作詩)가 적혀 있는 엽서를 꺼내 왔다. ‘돌 위에 낀 이끼. 자연이 세상을 천천히 덮어주네.’ 단 석 줄이었다. 자작시 중 90%는 졸작이지만 1% 정도는 스스로 자랑스럽게 생각하는 ‘작품’이라고 했다.

서울문학회를 만들게 된 계기를 물어봤다.

“한국문학, 특히 한국 시는 그 가치만큼 세계에서 충분히 평가받지 못하고 있어요. 일본의 ‘하이쿠(俳句)’는 알아도 한국의 시조를 모르는 사람이 대부분이에요. 그 깊이와 수준을 외국에 좀 더 알리고 싶었어요. 반대로 우리 문학회 소속 대사들은 각국의 최고 작품을 선별해 한국 문인들에게 소개하게 될 거고요. 좋은 번역을 위해 최고로 적확한 단어를 찾아내는 작업도 함께 하게 될 겁니다.”

바리외 대사는 바쁜 일정 때문에 서울문학회 활동 시간을 충분히 낼 수 있을지 걱정이라고 했다. 올해 스웨덴 총선에서 집권당이 패배한 이후 한국 사회에도 ‘스웨덴식 복지 모델’을 둘러싼 논쟁이 가열되는 바람에 그는 인터뷰다 뭐다 해서 정신없는 일정을 보냈다.

복지 모델 이야기가 나오자 그는 다시 심각해졌다. 그는 “스웨덴 모델이 모든 나라에 적합한 것은 아니다”며 “가족의 역할, 세금 비중 등이 다른 한국에서는 이를 수정 보완해 적용할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그는 “1년 내내 복지 서비스가 가동되는 스웨덴에서는 연말에만 등장하는 불우이웃 돕기 이벤트가 많지 않다”며 “그런 ‘반짝’ 기부는 주는 사람의 자기 위안일 뿐 실제 도움이 되지 못한다”는 뼈아픈 한마디도 잊지 않았다.





이정은 기자 lightee@donga.com